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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84 호
단기 4340. 5. 23 (음력 4.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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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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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2007년 제 20회 KBS TV드라마 극본공모
참신하고 유능한 신인작가 발굴 및 작품성과 완성도를 갖춘 극본 확보로
드라마의 소재 폭을 넓히고 질적 향상을 기하기 위해 ‘제20회 TV드라마 극본공모’를
아래와 같이 시행하고자 합니다.
공모부문 : 단막극 70분 1부작 (A4용지 30매 내외/ 시높시스 첨부)
공고 : 2007년 5월 7일 (월)
마감 : 2007년 6월 22일 (금) 까지
발표 : 2007년 9월 첫 째 주 ‘드라마시티’ 방송 종료 후
시상 : 추후 결정
보내실 곳 우편번호 150-010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46번지 KBS드라마팀 극본공모 담당자 앞
(2007년 6월 22일 금요일자 소인 유효/ E -메일 접수는 받지 않음)
※ 입상작은 ‘드라마시티’ 또는 특집극으로 제작, 방송 됩니다.
드라마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여러분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공/모/상/금
최우수작(1편) 1,000만원
우수작 (2편) 각 500만원
가작 (3편) 각 3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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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를 음악이 들려준다. / 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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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七十三章 (노자 - 도덕경 : 제7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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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천연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용어감즉살, 용어불감즉활, 차양자혹이혹해, 천지소악, 숙지기고, 시이성인유난지, 천지도, 불쟁이선승, 불언이선응, 불소이자래, 천연이선모, 천망회회, 소이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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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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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셋째 장
직역
감히 하는 일에 용감하면 곧 죽는다. 감히 무엇을 하지 않는데 용감하면 즉 산다. 이 두개는 혹은 이롭고 해롭다. 하늘이 그 싫어하는 바, 누가 그 까닭을 알겠는가. 이런 까닭에 성인은 오직 그것을 어렵게 여긴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천천히 하면서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서 성글하면서도 잃지 않는다.
해석
감히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때, 그리고 거대한 힘 앞에 도전할때, 그때가 감히 나서는 일이다. '쬐끄만게 감히 내 앞에서'라는 말이 있다. 개미가 탁자 위에서 그대를 똑바로 보고 여긴 내땅이라고 소리치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 개미와 같은 상황일때가 감히 나서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막는다. 따라서 적이 많다. 적이 많으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을 한다. 그것은 용감한 것이다. 그러나 곧 죽는다. 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슬쩍 빠지면 산다. 몸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럼 하늘은 어느것을 싫어할 것인가.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앞에서 나선다고 다 용감한 것이 아니고 뒤로 물러선다고 해서 다 겁쟁이는 아니다. 매사에 때에 맟추어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성인은 나서고 물러남을 어렵게 생각한다.
하늘의 도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과나무는 때가되면 열매가 열린다. 봄에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게 하려고 옆에서 장작을 때지 않는다. 물론 온실재배하고 최첨단 과학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억지로 하지 않아도 때가되면 자연스럽게 열린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라고 수천번 주문을 외어도 때가 되지 않으면 안열린다. 가을이 오라고 소리쳐도 때가 되지 않으면 가을은 오지 않는다. 지금 급하고 빨리 되어야 하는데 아직 일이 이루어 지지 않은 걸 보면서 혹시 하늘이 잘못 길을 든것이 아닌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의 그물-법도-은 크지만 노치는 것은 없다. 성인도 하늘의 법도처럼 때에 맟추어 행동을 한다. 그렇다고 기회주의자로 오도하지는 마라. 성인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다. 대도를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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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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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형집행을 잘 결단하는 이는 사람을 죽이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살린다. 이 두 가지 행위에는 이로운 점도 있고 해로운 점도 있다. 하늘이 미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도 오히려 이 일을 어렵게 생각한다. 하늘의 이법은 다투지 않고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고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며, 여유 있는 태도로 일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엉성한 것 같아도 죄있는 자는 놓치는 법이 없다.
주
감: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 천연: 태연한 모습, 여유 있는 모습. 선모: 잘 꾀하다, 잘 계획하다, 잘 도모하다. 희희: 넓고 큰 모양.
해
이 장에서 노자는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모순과 맹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늘의 뜻이 누구에게 벌을 내리고, 누구를 용서해 줄려는 지는 도를 체득한 성인도 모르는 것이다. 성인도 이와 같을진대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 어찌 형벌을 함부로 집행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의 이법은 억지나 작위 함이 없이 만사를 저절로 잘 다스려 나간다. 하늘의 법망은 너무 크고 성긴 것 같다. 그러나 죄있는 자를 놓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무위와 무사의 다스림을 행하며 죄지은 자는 하늘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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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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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부록
옥탑과 급 기 행상 - 1907년 4월 19일자 논설
근래에 서울에 풍설이 나돌고 있다. 얼마전에 도둑질해 갔던 옥탑을 당장 도로 가지고 와서 일본인들이 무참하게 멋대로 옮겨간 그 자리에 다시 세워놓는다는 것이다. 이 풍설을 항상 요긴하게 탐문하는 곳에 입수된 것을 우리가 알게됐는데, 이로써 통감부가 과연 하나의 자혜로운 일을 능히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가 믿을 만한 희망은 약간 있다. 그 옥탑을 되돌려 주는 것을 자혜로운 일로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여러 사례에서 이미 말하고 행동한 뒤에는 누구도 그들을 시켜서 번복할 수 없었음을 우리가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때문이다. 따라서 그 되돌아옴은 자혜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만하지만, 그러나 그 옥탑이 실제로 되돌아 왔을 때에는 그것이 순전히 저들 스스로의 결정이었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으랴. 생각건대 그 일은 만약 대한매일신보의 격론과 일본 (크로니클 신보) 지상에 흘법(서양인 이름) 씨의 비판론이 없었더라면 이미 잊혀지게 됐을 것이고, 한국인은 그 옥탑 때문에 탄식만 했을 것이다. 이 옥탑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주시할 것이 있다. 첫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그의 통감부 소속과 그밖의 일본인들이 한국인 소유물을 저들의 소유물처럼 마구 차지하려는 태도를 혀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한인에게 표시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인 수없이 마구 차지한 일이 결국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또한 염두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인민이 일본 군인들에게 강점을 당한 토지도 혹시 적절한 보상을 받을만한 희망이 더러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주권도 다시 되돌려 받게 그들이 소유한 우편 및 전신과 재정, 기타 여러 가지를 일본 정부가 처리해 줄지 모른다는 몽상 또한 있을수 있다.
일보의 옥탑기 - 1907년 4월 23일자 잡보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제9006호 보도에 옥탑 사진이 실려 있고, 그에 대한 기사가 장황한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경천사탑은 도쿄발물관 앞에 세워졌다 예부터 조선에 유명한 탑이 둘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 자리에 세워져 있고, 또 하나는 풍덕군의 경천사 자리에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인 임진왜란 때에 가토 기오마사가 그 탑을 일본으로 가져오고 싶어했다는 설이 다나카 궁내성대신의 귀에 들어가, 그 두탑 중의 하나를 일본으로 옮겨오면 그 비할 데 없는 진귀품은 우리 일본 미술계를 위해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고, 지난번 사절로 갔을 때에 조선 국왕에게 그를 간청하였던 바, 한국 정부측이 그 뜻을 이해하고, 이번에 조선 국왕께서 우리 궁내성에 경천사탑을 기증함으로써 박물관 앞에 세우고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운운.
탑 형태의 대략
탑의 높이는 약 4장 2척, 회백색 대리석의 13층(정확히는 기단 3층 위로 10층)으로 만들어졌다. 위의 5개 층에는 4면에 불상 셋씩이, 중간 2개 층에는 불상 다섯씩이, 그리고 밑의 5개 층(기단 포함)은 12면으로 조성돼 있는데(기본적으로는 +자형), 그 각면에도 불상 셋씩이(실제는 보살상들도 곁들여져) 조각돼 있다. 맨 위의 상륜부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정교하기가 이를데 없다. 탑의 현판석(1∼3층)에는 각기 화엄회, 대동금석문, 원나라 역사, 풍덕읍지 및 금음집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어 기이함이 넘친다. 또한 관음보살이 불법을 강론하는 형상도 있으니, 그 보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가치를 말한다면 한국의 공채(일본에서 빌은 국채=외채)의 태반을 저당으로 잡힐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기자의 보탬말
일본인이 옥탑을 도둑질해 간 사실을 거론한 일이 여러 번이었지만, 개서군에 사는 한계명 씨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을 보다가 위와 같은 기사를 읽고 분통을 참을 수 없어서 그 신문을 우리 (대한매일신보)에 보내주었기에, 그 내용을 요약하여 여기에 게재하니, 애독자 여러분은 알고 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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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1. 형성, 확립기/남북국 시대-고려 중기
1. 유학
고려의 유학
한국 유학사의 흐름에서 볼 때 제도를 통해 점차 정치 이념으로 자리를 굳혀 간 유학은 후기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지면서 그 지위를 더욱 강화하였다. 종교 사상 등의 분야에서는 여전히 불교 사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정치와 사회, 윤리의 분야에서는 유학의 현실적이고 경세적인 성격이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고려 초기의 유학 사상은 유학적 정치 사상과 이념의 현실 적용이라는 특성 아래 지식인 사이에서 유학적인 교양이 일반화되었고 또 익숙해진 상태였으나, 주로 수기치인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치중했기 때문에 아직 학문적이거나 체계적인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유학적인 천명, 민본 사상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기초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혁명으로 창업한 왕조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이 가운데 5개조가 유학적 정치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광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동안은 중앙 집권화가 진척되면서 중세 봉건 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이 시기 유학은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도록 터전을 확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과거제의 실시(959)라든지 최승로의 '오조정적평'과 '시무 28조' 등이 그런 역할을 하였다. 최승로는 태조의 창업 이후 약 60년 동안의 정치적 득실을 '오조정적평'에서 역설했는데, 그 평가 기준을 유학적 정치 이념에서 찾았다. 또 '시무 28조'는 민생 문제에 근원을 두고 제시한 국가 정책안이었다. 즉 '시무 28조'는 고려 창업 이후 고대 사회로부터 중세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가지 진통과 모순, 신라 말 이래 이어져 온 복식, 신분 제도의 문란과 문물 제도의 미비에 따른 혼란 등에 대하여 반성적이고 개혁적인 차원에서 제시된 것으로, 성종에 의해 추진된 국가 체제 정비에 적극 반영되었다. 그는 불교와 유학을 기능에 따라 구별하였는데, 불교를 정치 문제에서 분리시켜 정치 이념은 유학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무 28조' 중 현존하는 22조 가운데 8조가 불교에 관계된 것으로 모두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불교 비판은 종교로서의 불교 교리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불교의 폐단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또 봉건 사회에서 임금의 태도와 치자로서의 자질을 문제삼았는데, 사심을 버리고 자중자애하며 겸손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성종은 한당의 선진 제도와 문화를 수입하고 최승로의 시무책을 정책에 반영하여 인정을 폈으며,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제도로서 국자감을 설치하고 경학 박사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초기의 원전 자체에 대한 초보적 이해와 수용의 단계를 넘어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상당한 정도로 확산되고 심화되었다. 이 때 유학은 제왕의 통치 이념으로서 중요하게 부각되었던 고려 초기와는 달리, 관료와 귀족 계층의 정교 이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문종 때 교육면에서 크게 기여한 최충의 문헌공도를 들 수 있다. 최충은 1055년 구재학당이라는 최초의 사학을 설치하고 구경과 삼사를 가르쳤으며, 학문의 목표를 인의와 인륜 도덕을 밝히는 데 두었다. 구재학당을 시작으로 해서 많은 유학자들이 각각 학당을 짓고 학생을 모아 교학에 힘쓰면서 당시 유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사학의 발달은 관학의 진흥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 초기에 이미 춘추관이 있었지만, 숙종, 예종대의 활발한 수찬 사업의 흐름 위에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서 유학적인 역사 의식과 역사 서술의 원칙 및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로서 전해진다.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에 보이는 춘추대의론과 유학적인 역사 의식 및 비판 정신 등은 당시의 유학 발전의 깊이를 알려 준다. 그 당시 유학의 경향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사장학이다. 사장학은 문장의 외면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는 학풍으로 유학 진흥과 더불어 과거 출신 문신들이 이룩한 귀족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둘째, 훈고학이다. 훈고학은 한대 이후 경전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면서 글자 하나하나에 매달려 그 의미를 밝히는 데 힘쓰는 학풍으로, 윤언이의 "역해", 최윤의 "고금상정례", 김인존의 "논어신의" 등의 저술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셋째, 의리학이다. 의리학은 훈고학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경전 해석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담아 낸 학풍으로 송대의 성리학이 대표적이다. 왕이 임석한 전각 강론의 기록이나 최충이 세운 구재학당의 재명을 보면 고려에서도 이미 의리학이 자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문인 우대의 경향이 심해지고 문벌 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어, 이에 불만을 품은 무인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무신 통치 시대에는 현실 도피적이고 고답적인 현학의 경향이 생겨나면서 유학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리고 원으로부터 주자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주자학은 1290년 경 안향과 백이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이 후 주자학은 권보가 "사서집주"를 가져 와 전파하며, 이제현이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 머무는 동안 당시 원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고려가 송에 계속 유학생을 파견하고 송의 서적을 빈번하게 수입했던 사실과, 예종 11년(1116)에 청연각에서 강론하면서 "예기" 중에서도 '중용'을 중요시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주자학 수용 이전에도 고려에 성리학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최충의 구재학당에서 '구재'라는 명칭은 당시 성리학과의 관련을 시사하는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자면 최충 같은 고려 학자들이 당시 북송에서 행해졌던 성리학의 학문 경향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주자학을 본격으로 도입한 것은 충렬왕 이후의 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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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천덕꾸러기
본뜻 : 말의 어원을 보자면 '천+데기'에서 나온 말이다. 소박데기, 부엌데기 등 천한 사람을가리키는 '-데기'라는 접미사가 붙어 천데기가 되었다가 '천더기'로 음운변이 되었다 여기에 또 '꾸러기'라는 접미사가 붙어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바뀐 뜻 : 남에게 언제나 천대를 받는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보기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란 아이는 나중에 성격에 결함을 가진 어른이 될 수 있으므로 부모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게 예뻐하던 개도 늙고 병이 드니까 금세 천덕꾸러기가 되고 마는 거 봐라
철부지
본뜻 :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힘을 가리키는 '철'과 알지 못한다는 뜻의 한자 '부지'가 합쳐진 말이다. '철'은 원래 계절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주역의 영향을 받은 동양권에서는 흔히 지혜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바뀐 뜻 :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어린애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보기글" -그 사람은 장가를 가고도 아직도 그렇게 철부지 같은 소리를 하고 다니냐? -옥이는 아직 국민학교도 안 들어간 철부지니까 그럴 수 있지만, 국민학교 6학년인 너까지옥이랑 똑같이 떼를 부리면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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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
맬서스의 설교는 '보이지 않는 손'을 옹호했다. 그러나 나중에 마르크스가 등장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의 위치는 크게 흔들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노동자들을 빈곤과 중노동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부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그에 대한 새로운 지지자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소위 신고전파로 불리는 이들 가운데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 1842-1924)이 있다. 캠브리지 경제학부를 창설한 그는 원래 옥스퍼드에서 아버지의 권유에 못이겨 신학공부를 했으나, 나중에 캠브리지로 옮겨 수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캠브리지학파의 시조인 마샬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을 숭배했다. 그는 사업가가 벌어들이는 이윤이 결코 착취가 아님을 입증해 보이고자 했다. 최대의 이윤을 내기 위한 사업자의 노력은, 비록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회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차가운 머리로 종합적인 경제학을 만들어 냈다. 그전까지 통용되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 대신에 '경제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바로 그의 책에서였다. 그러나 마샬은 가난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보고 인구법칙에 따른 더 큰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일체의 빈민구제사업까지 반대했던 맬서스처럼 냉엄한 현실을 차가운 머리로만 분석하는 그런 인간형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따뜻했다. 그가 보기에 기업가들의 이익이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기업가들이 이익만을 쫓는 것보다는 빈민구제 행위를 통해 진정한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사업가들이 '경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제학의 현상"이라는 캠브리지대학 교수취임 강연에서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 경제 기사도는 새로운 도덕적 면죄부였다. 비록 대학시절에 아주 가난한 사람이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저런 사람을 돕겠다고 매일 다짐한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인간이었을망정, 그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진보의 어떤 단계에서 결점을 능가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빈곤의 악덕을 경제 기사도의 사회적 기능이 광범위하게 퍼지면 줄어들 것이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업가가 경제 기사도를 발휘하거나 따뜻한 가슴을 지녔을 리가 없다. 오히려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업가, 아니 차가운 가슴까지 갖고 있는 사업가가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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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자기다움을 주장한다.
로맨티스트라면 더욱더 실생활에서는 만족감을 얻기 어려워진다. 로맨틱한 꿈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당당한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활을 위한 일, 결혼이라는 강제력, 자녀교육의 책임 등에 시달리는 사이에 자기는 한 사람 몫은 켜녕 반쪽만 되도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혼한 지2년 된 뉴욕에 사는 주부 루우스는 왠지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지만 상담할 상대가 없다. 친구가 가족에게 털어놓으려고 해도 만에 하나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면, 그들은 자기를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여자라고 볼 것이다. 반면에 자기의 의심이 맞는다면 모두들 남편의 부정을 소문내고 그녀에 대해서는 '모자라는 여자'라고, 결국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루우스는 보통의 여자이다. 인생의 동반자로서 남편을 얻어야만 한 사람의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듣고 자랐다. 따라서 남편이 없는 생활이 그녀에게서 살아갈 권리마저 빼앗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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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박안신
박안신(1369-1447)의 본관은 상주이다. 태조 2년(139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정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대사헌 맹사성과 함께 평양군 조대림을 국문한 일이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지 않고 국문하다가 태종에게 큰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맹사성과 함께 수레에 실려서 끌려갔다. 거리에서 사형을 당할 참에 이르러 맹사성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박안신은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그가 맹사성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나의 상관이고 나는 당신의 부하다. 그런데 이제 둘이 함께 죽게 되었으니 상관과 부하 사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전에 나는 당신을 지조를 가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어찌 이렇게도 겁이 많은가? 당신은 저 삐걱거리는 수레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또 그는 나졸에게 기와 조각을 가져오라고 하여 거기에 지남철 끝으로 긁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너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죽음이야 달게 받겠지만, 다만 간하는 신하를 임금이 죽였다는 이름을 남길까 두렵다. 안신은 눈을 부릅뜨고 옥리들에게 말했다.
"이것을 그대로 상께 보고해라. 만약에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내가 악귀가 되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잡아먹겠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욱 진노하였다. 그러나 하륜, 성석린, 권근 등 대신들이 힘을 다하여 그를 구제하였다. 그는 간신히 사면되어 곤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안신은 사신이 되어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뱃길에서 해적을 만났다. 그가 두려운 빛이 조금도 없이 태연하게 걸상에 걸터앉아 조용하게 상대하자, 해적들이 그의 위엄에 눌려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해적들에게 잡힌 일행이 모두 안전하게 풀려났다.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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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백일몽
우리는 흔히 터무니없는 계획이나 공상을 가리켜 백일몽이라고 한다. 한낮에 꾸는 꿈은 그만큼 더 허망하다는 뜻.
백일몽에 대해서 처음으로 학문적인 정의를 내린 것은 정신분석학의 원조 '프로이드' (1895-1939)였다. 그는 '작가와 공상' (1908)이라는 작은 논문 속에서 백일몽과 공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과 문학자 및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탁견을 피력하고 있다.
공상이나 백일몽이나 밤에 꾸는 꿈이나 다 같이 충족되지 못한 소망의 대용 충족이다. 그러므로 작가를 '백중의 몽상가', 작품을 '백일몽'에 비유함으로써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비밀의 일부가 밝혀질 것이다. (프로이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20세기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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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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