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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4 호
단기 4340. 2. 27 (음력 01.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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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TV 책을 말하다를 보고
KBS 방송분 중에 'TV 책을 말하다' 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매주 빼먹지 않고 보는 편인데 가끔 전문가라는 객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말하는 문장 중 중요한 단어표현에 있어 외래어를 씁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저 외래어(전문용어)를 이해하기에 나는 뿌듯한 가 아니면 몰라서 답답한가? 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 나와 영어를 섞어 쓸까요? 그것은 한글 표현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한글로 표현가능한 영어단어임에도 쓰는 것은 습관성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글로 쓴 책을 이야기 하는데, 한국인으로 나와 한글을 말하지 못한 다면 저사람이 전문가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 법조계, 의학계, 기자, 각계전문가, 비평가 등이 각종 방송, 특히 전문가의 조언을 필요로 하거나 단체의 의견을 반영하는 토론을 위주로 하는 방송에 나오면 끝없이 외래어를 섞어 씁니다. 전문적인 단어를 쓰면 우월감이 들고 일반인보다 많이 배웠고 남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자만심의 발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이 있던 없던 듣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실에서 강의 중이라면 전문과목을 다루니 어쩔 수 없다하지만 대국민을 향한 공중파에선 보편적인 한글표현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영어뿐아니라 번역에서 오는 모호한 단어사용에도 저들이 앞장서고 있다는데에 연예인 이상 가는 현대판 한글 말살정책의 주역이 아닌가 합니다.
- 어찌어찌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에 마음이 아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의 문장들은 번역본에 주로 등장하는 잘못된 문장들입니다. 요즘은 저렇게 번역하지도 않습니다.
- 카타르시스,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리얼리즘, 매커니즘, 엄숙주의, 초현실주의...
이런 단어들은 한글로 바꾸어 말하거나 짧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무작위로 외국어를 한글과 섞어쓰다보니 어감도 좋지 않을뿐더러 거부감도 일으킵니다. 아는 자 일수록 언어의 정체성을 자각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국민을 향한 것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것입니다.
중당(中唐)시대 시인인 백거이(772~884-백낙천)의 일화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장의 한 노파에게 자신의 시(詩)를 보여주었으나 노파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 자리에서 작품을 찢어 버리고 다시썼다는 이야기 입니다.
듣는 이와 보는 이가 이해하지 못한 다면 어떠한 아름다운 단어도 쓰레기일 뿐입니다. 대중을 위해 말하고 있는 자리라면 한글표현력부터 갖추어야합니다.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분간이 않되는 언어사용은 제3세계 전문가로 전락하는 지름길 일 것입니다. 현재의 사용언어를 순수하게 한글로 표현하며 이야기 하기엔 어려움이 있고 외래어가 수반되어야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보편적인 외래어와 전문용어의 차이를 미리 숙지해야합니다. 그 후에 방송과 언론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논해야 합니다.
이 글을 적는 것은 저들이 방송과 언론에 나와 무분별하게 뱉어내는 단어를 따라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입니다. 저런 단어를 섞어써야 '아는 자'가 될 수 있다는 허상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심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지식인은 해당 분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잘 알고 있는 부분들을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발전하는 분야는 많아지며 국가적인 지식의 풍요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전달 수단인 언어부터 잘못되어 있다면 지식 저편 근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전문서적도 아니고 한국인이 한글로 쓴 책 한 권 소개하는데 셀 수 없이 많은 외래어와 전문용어가 나온다면 방송분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만의 방송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성하고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주 구매자인 일반 독자가 객이 되어야 하며, 교수나 비평가들 위주의 객은 공중파를 통한 한글파괴일 뿐입니다. 배웠다는 것은 그것을 주변에 전달하라는 것이지 뽐내라는 것이 아니기 때분입니다.
- 2007.02.27 윤영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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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고향 진부 겨울 풍경·일상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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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도연씨 산문집 '눈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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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이 다시 폭설이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넉가래를 들고 나섰다. 골짜기가 온통 흐뭇했다. 나는 그 위에다가 밖으로 나가는 길을 그렸다." ('작가의 말' 중)
평창 진부에서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 김도연 씨가 산문집 '눈 이야기'(열림원)를 내놓았다. '눈의 노래'로 시작되는 이야기에는 고향 진부의 겨울풍경과 젊은 소설가의 일상이 회화적으로 펼쳐진다. 주로 하얀색이다. 작가는 스스로의 종교를 '눈'이라고, 그 중에서도 '폭설'이라고 주장한다.
"사원은 폭설로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저는 주지와 사미 겸 목사이기도 하고 기꺼이 신도가 되기도 합니다…. 얼어붙은 눈 위에 새로운 눈이 더해가면 이 사원은 깊은 고립의 세계로 자리이동을 합니다. 바깥사람들은 쉽게 들어올 수 없지요. 제설차를 이용하거나 스키를 타지 않으면 결코 접근할 수 없습니다."('눈의 노래' 중)
평창과 진부의 겨울이 알뜰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야기 속에는, 때로 봄과 여름이 등장하기도 하고 춘천과 백담사, 서울 등대여관까지 시간과 공간이 넓혀진다.
그의 친구인 누렁이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날씨도 더운데 소설 한 편을 쓴 적이 있었다. 그걸 가방에 넣고 한 한 달을 돌아다녔지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다. 하루는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에서 꽤 많은 술을 마셨다…. 나를 보고 짖어대는 잡종 사냥개. 나는 개를 끌어안고 내 우울한 심사를 털어놓았다. 개는 그런 내 행동을 너그럽게 어루만져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 눈물까지 흘렸던가. ('지난 여름밤의 사건' 중) 그러나 이튿날 어머니에게 들은 사건의 진상은 더욱 흥미롭다.
당근 농사일을 하는 작가는 밭을 파헤치는 노루와 고라니에 화를 내기도 한다. "당근을 지켜야 한다. 나중의 술값을 벌기 위해선.… 예전엔 공기총이 있어 한 방에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 뭐뭐때문에 총은 몰수된지 오래다. 대신에 나온 몇가지 방법이 있다. 울타리를 친다든가(그 넓은 밭을!), 밤새 불을 피운다든가, 사람이 잠을 안자고 지킨다든가… " ('밤마다 노루 혹은 고라니가…'중) 작가는 결국 사냥개를 고용하고 밭을 지키게 하는데… 스스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마침내 고모님은 내 손을 잡고 말씀하신다. 함께 연변에 가자고. 사백오십만원만 있으면 가능하단다. 여자집에서 일주일을 지내다가 마음에 들면 데려오는 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여자 집으로 가면 된단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연변처녀여 미안하다. 모든 것은, 최악을 고집하는 나의 우둔함이 원인이다." ('연변처녀' 중)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나는 잠이 오지 않는 깊은 겨울밤 방바닥에 엎드려 외양간에서 소가 숨쉬는 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썼다. 천천히. 내가 만든 눈사람, 눈부처들은 그렇게 눈의 골짜기에서 칠년의 겨울을 보냈다"고 했다.
평창 진부에서 태어난 김도연씨는 1966년 등단. 2000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을 펴냈다. 고향에서 7년째 농사를 지으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수영 sooyoung@kad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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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도구는 우리의 귀. 즉 상대편 말에 우선 귀를 기울여 듣는 것. /딘 러스크 (전 미국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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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三章 (노자 - 도덕경 : 제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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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지인자지, 자지자명.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지족자부, 강행자유지. 부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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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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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셋째 장
직역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하나, 자기를 아는 자가 밝은 것이다. 남을 이기는 자가 힘세다 하나, 자기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족함을 아는 자라야 부유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가 뜻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잃지 않은 자가 오래가는 것이오,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자라야 오래 사는 것이다.
해석
천원으로 충족감을 느낀다면 그는 부유한 것이다. 천억으로도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가난한 것이다. 작심삼일 하지 마라. 그런 자가 뜻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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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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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남을 아는 사람은 슬기롭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욱 현명하다. 타인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지만,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강한 사람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넉넉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는 뜻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은 사람은 오래갈 수 있고, 죽을힘을 다하여 생명의 길을 찾는 노고를 사양치 않는 이는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
주
강행 : 끊임없이 힘써 노력하는 것. 주역의 건괘의 상전에도 '하늘의 운행은 건실하고 적극적이어서 한순간의 휴식도 없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본받아 마음을 놓지 않도록 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동일한 발상인 것이다. 사이불망자수 : 죽을힘을 다하여 생명의 길을 찾는 노고를 아끼지 않는 이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변치 않는 도와 하나가 될 때 그 정신적 합일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 노자이므로 이와 같은 발상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해
남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안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남을 이긴다는 것은 유능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즉 자신의 지나친 욕망, 나태해지는 마음, 비겁함 등의 인간적 약점이란 타고난 성격이므로 그것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 논어에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라고 했고, '산중의 적은 물리치기 쉽지만 마음속의 적은 물리치기 어렵다'는 왕양명의 말도 자기 극복의 어려움을 강조한 말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리적 반란에 의해 남을 공격을 받기 전에 이미 패배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만족할 줄 알면 언제나 넉넉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자기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면 그의 마음은 언제나 결핍으로 가난을 느낄 것이다. 절대 빈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만족감이란 정신적 요소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를 체득하여 욕망의 겉치레에 끌려들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은 언제나 만족과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근면 역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사람이다. 역경에도 '군자는 스스로 노력하여 쉬임이 없다'고 하며 근면성과 성실성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지켜 자기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를 잃지 않으면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과 세계에 대하여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적 비판론에 빠지지 말고 인생을 긍정하며 열심히 살아간다면, 정신적으로는 그런 사람의 삶이 오래 사는 것이 된다. 도의 영위함을 체득하여 도와 하나가 되는 정신적 바탕을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장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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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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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약탈자들에게 바꿔치기당한 유점사 오십삼불
1912년, 금강산지역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러 갔던 일본인 전문가 시키노와 야쓰이는 내금강께의 유점사에서 신라시대의 '53불신앙' 의 실상을 말해주는, 높이 약 7∼41cm의 작은 금동불상 50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53구 가운데 3구만 잃었을 뿐 거의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세키노와 야쓰이는 그들이 발견하고 조사한 유점사 53불중의 유존상들을 1917년과 1920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총독부 간행) 제5책과 제7책에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기적적인 대발견' 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때의 학술적인 조사·평가와 사진은 다른 일본인 무법자들에겐 일확천금할 수 있는 좋을 약탈거리이 정보였다. 1916년 3월,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운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마침내 금상산 유점사로 침입해 갔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본전인 능인보전으로 달려가서 그 안에 모셔져 있던 53불의 유존상 중에서 가장 값나감직한 신라유물 17점을 골라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백주의 약탈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사승이나 누군가를 위협하느라고 권력신분을 가장하여 개성에서 왔다고 큰소리를 쳐 결국 자기 노출의 실수를 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절에서 불상 도난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장 개성으로 범인 일당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범인에게서 도난품을 압수했다면서 일본인 순사(경찰)가 가져온 불상은 17점 전부가 아니라 9점뿐이었다. 무력했던 중들은 9점만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그 이상 문제삼지 못했다. 또 그 불상들의 조형적인 양식이나 세부적인 형태에 평소 아무런 지식도 관찰도 없었던 중들은 돌아온 9점 가운데 6점은 능인보전에서 도난당했던 유점사 전래의 신라유물이 아니고 일본인 악당들이 개성에서 지능적으로 바꿔치기 한 원위치 불명의 보잘것없는 수상들이란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범인을 추적했던 일본인 순사는 개성에서 쉽게 그들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범인들에게 매수되어 악질적인 음모에 가담했다. 그들은 개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거나, 아니면 범인들이 어디서 또 약탈해 갖고 있었던 듯한 전혀 별개의 대단찮은 작은 불상 6점에다가 유점사에서 훔쳐온 것 중에서 조각수법이나 형태가 가장 떨어지는 3점을 붙여 도합 9점을 경찰이 압수·반환시키는 것처럼 꾸몄다. 이 음모는 완전히 성공했다. 돌아온 9점의 불상조차도 3분의 2가 형편없는 것으로 바꿔치기된 사실에 의심을 품은 중은 그때 유점사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후 유점사에서 깨끗이 절취한 14 신라불상들을 '유점사 전래상' 이라는 족보까지 붙여 공공연히 국내외로 암매·유출시켰는데, 현재 보스턴미술관이 언젠지 모르게 입수해 갖고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 은 그중의 하나로 1917년의 (조선고적도보)에 사진과 조사기록이 수록돼 있다. 또 일본인으로 요코다, 이토 등이 그때의 유점사 도난품을 입수·소장하고 있었으나 오늘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유점사 오심삼불 해설, 황수영 편, 1967년). 한편 1935년 3월에 총독부박물관의 촉탁이던 일본인 가야모토와 사와가 14일간 유점사의 53불을 다시 본격 조사했는데, 뒤에 그들이 작성한 복명서에는 1910년대의 조사보고에 수록된 원래의 전래상은 36점뿐이고, 엉뚱한 것이 6점(1916년에 일본인 도둑들이 바꿔치기한 것), 그리고 과거의 조사보고에 있는 것 중의 11점(사실은 전의 고적조사 보고에 이유 없이 빠진 3점을 합쳐 14점)은 도난당하고 없으며, 따로 1930년에 송만공선사 등이 발의하여 당시 경성미술품제작소에서 새로 만들어 보충한 8점의 금동여래상과 보살입상이 있었다고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8·ㅜ15해방 이후 북한지역인 금강산 유점사의 53불이 어찌되었는지, 해방 직후에 누군가가 모두 싸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과 평양으로 옮겨져 갔다는 미확인 정보가 전할 뿐이다(앞의 (유점사 오십삼불 해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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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9장 현실과 이상의 갈등
3.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인간의 삶의 모순, 구체적으로 말해서 현대사상의 갈 길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삶의 모순은 우리들에게 명백히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특히 학문 종교 정치 경제 기술 등이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한 현대의 시점에서 인간은 이데올로기적인 현실과 인격체들의 구성으로 된 이상과의 사이에 있는 메꿀 수 없는 괴리를 직면한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연적 기능이 이성적 기능을 지배하려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성적 기능이 자연적 기능을 좌우하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적인 도구 능력이 이성 능력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존재 방식들이 이데올로기화하여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이데올로기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인간의 이중성인 자연과 이상의 갈등을 근거로 삼으며 나아가서는 이데올로기적인 도구 기능과 이성적인 이상과의 모순으로 확장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정신 분석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근원은 본능에 있으며, 이 본능이 삶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을 때 삶 자체는 이미 내면에 스스로의 괴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폐쇄 사회를 부정하여 개방된 합리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본능이라고 할 때 본능의 창조적인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성서나 불경에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야기는 비단 성서나 불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죽음에의 본능을 의식하고 삶에의 본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극이라든가 멀고 긴 인내가 필요할 따름이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기술적인 현실은 지금, 이곳의 우리들을 질식시킬 정도로 무거운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로 억누르고 있다. 우리들이 집단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데올로기가 우리들 인간을 조종한다. 이것은 확실히 인간 역사의 비극이다. 더우기나 이데올로기란 인간이 산출해낸 것이기에 한층 더 비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곳의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더라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인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현실에 처하여 있다. 모두가 최선의 전략과 정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정확한 처방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과거에 대한 정리가 부족하며 미래 설계가 불확실하고 현재는 불안에 싸여 있다. "시간"에 의하여 "존재"가 은폐되어 있듯이 우리들에게는 "현실"에 의하여 "이상"이 가리워져 있다. 여기에서의 이상은 환상이나 공상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헛된 공상이나 환상과 이상을 동일시하기 쉽다. 그러나 이상이란 인간 의식의 현실태 내지는 완성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상이란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또다른 각도에서 비록 현실에서 이상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합리적인 이상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점진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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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사리
본뜻 : 흔히 일본어로 잘못 알고 있는 '사리'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사리'는 '사리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실같은 것을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은 것을 얘기한다. '몸을 사린다'는 말에 쓰일 때는 '어렵거나 지저분한 일은 살살 피하며 몸을 아낀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바뀐 뜻 : 국수나 새끼, 실 등을 동그랗게 감은 뭉치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살림
본뜻 : 한 집안을 운영, 관리하는 일을 가리키는 살림이라는 말은 원래 불교 용어인 산림에서 나왔다(산림이라고 쓰기도 한다) 산림은 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말하는데, 이 말이 절의 재산 관리만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의 재산을 관리하고 생활을 다잡는 일까지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바뀐 뜻 : 집안의 경제나 생활 등을 맡아 운영, 관리하는 일을 말한다.
삼박하다
본뜻 : 어떤 물건이 잘 드는 칼에 가볍게 잘 베어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박하다'의 센 말이 '쌈빡하다'이다.
바뀐 뜻 : 아주 명쾌하고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모양을 갖춘 사람이나 그런 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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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국가, 즉 그것은 나다
르네상스와 지리상의 발견, 그리고 종교개혁의 시기를 거쳐 16-18세기에 유럽은 절대주의 시대를 맞는다. 특히 종교개혁은 종교적으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유럽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즉, 종교개혁은 유럽에 종교적 분열과 대립을 초래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정치적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보편'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종파가 되었고, 분열된 종파들은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저마다 국가권력과의 보호를 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주들은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제 신앙이 정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신앙을 이끄는 시대가 되었다. 왕권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권리였고, 신에게만 책임을 질 뿐이었다. 이른바 '왕권 신수설'은 그들의 권력의 이적 근거가 되었다. 이제 대제후들에게 분산되어 있던 중세시대와는 달리 권력은 국왕에게 집중되었다. 왕은 상비군과 관료제를 통해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세와 같은 교황권과 왕권에 의한 이원지배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절대적'인 왕권에 귀속된 절대주의 체제가 나타났다. 에스파니아와 영국에서는 이미 16세기에, 프랑스에서는 17세기에,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에서는 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루이 13세(재위 1610-1643)하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몇 차례의 내분을 평정하면서 루이 13세는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이 바로 루이 14세(재위 1643-1715)였다. 1643년 아버지가 죽어서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는 겨우 5세였다. 그로부터 그는 72년 간이나 왕위에 있었다. 1715년 죽을 때 아들과 손자마저 먼저 죽어서 5살짜리 증손자인 루이에게 왕위를 넘겨줄 정도로 그는 오래 살면서 프랑스를 통치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초기에는 유능한 재상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재상 마자랭이 그를 잘 보필했다. 그러나 그가 23세가 되던 해에 국정을 전담하던 마자랭이 죽자 중신회의에 나온 루이는 다음 재상을 임명하는 대신 앞으로는 자신이 모든 정무를 직접 관장했다는 결의를 표시했다. "국가, 즉 그것은 나다."라는 말은 그가 15세 때 어린 국왕으로서 귀족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나온 것이나 그 말이 구체적인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청년왕 루이는 친정을 시작하면서 왕의 절대권력을 확립하기 위하여 왕에게만 책임을 지도록 관료기구를 개혁했다. 그리고 이 관료제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재무상 콜베르를 등용하여 우선 프랑스의 국부를 증진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루이 14세가 어린 나이에 귀족들에게 공세를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유년기에 겪은 정치적 체험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한참 진행되던 1648년에서 1653년까지 프랑스에서는 '프롱드의 난'이었다. 프롱드의 난은 중앙집권화하려는 절대왕정에 대한 귀족들의 반란이었다. 이때 루이는 폭도들의 침입으로 두 달 동안이나 파리의 왕궁에서 쫓겨나 있어야 했다. 둘째로는 숙부이기도 했던 영국의 찰스 1세가 단두대에서 처참하게 처형된 사건 또한 루이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회와 다투다 패해 마침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영국 왕의 모습은 어린 루이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국가, 즉 그것은 나다."라는 루이의 말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국내에서 귀족들에 대하여 절대군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국왕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전쟁을 유발시켰다. 왜냐하면 유럽 군주의 왕, 즉 왕중 왕의 지위야말로 그가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다. 실로 재위 기간 72년 중에서 32년 동안 프랑스는 이 나라 저 나라와 전쟁을 치렀다. 국내에서의 그의 지위가 막강해서 내부적으로는 큰 정쟁이 없었다. 이처럼 정세를 주도하기 시작한 루이 14세는 그에 걸맞는 궁정문화를 연출하는 데도 힘을 썼다. 당시 파리의 루브르 궁전은 너무 낡기도 했지만, 프롱드 난으로 인한 몸서리나는 기억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파리 근교에 새로운 궁전터를 물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때 선택된 곳이 베르사유였다. 루이 14세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베르사유에 새 궁전을 건축하는 데 열중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갖가지 대향연이 벌어졌다. 거기에는 늘 풍악이 울려 퍼졌으며, 호화찬란한 의상으로 단장한 귀족들이 연극 구경이나 무도회에서 시간을 보냈다. "국가, 즉 그것은 나다."는 말은 프랑스 절대주의의 실상을 잘 상징한 말이다.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고도 불린다. 태양과 같이 빛난다는 뜻이고, 당시가 태평성대였음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그러나 태양은 떴다가 지는 법, 그의 영광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그후로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 시대만큼의 영광을 다시 맛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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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같은 살 같은 영혼
아벨라르. 당신은 무용의 천재, 이사도라 던컨의 생애를 읽어 보셨겠지요. 본능과 직관이 시키는 대로 삶의 리듬을 춤추다가 간 던컨을 떠올릴 때마다 사랑과 예술의 대립, 서로 융화하기 힘들며 둘 다 매우 강한 힘으로 한 사람의 생명력 전부를 요구하는 절대의 소명, 그것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게 됩니다.
“내 삶은 오직 두 개의 동기를 갖고 있다. - 즉 사랑과 예술이 그것인데, 사랑은 때때로 예술을 파괴했고 예술의 전제적 소명은 사랑에 비극적 종말을 가져왔다. 이 둘은 어울리지 못하며 끊임없이 싸울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도 그것을 위해 전부를 요구하고 예술도 그것을 위해 전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춤을 추면서 살다 간 무용의 천재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1927, 미국)은 그의 자서전에서 위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던컨은 여러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기는 했지만, 남자의 곁에 안주하여 단순히 한 여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죽을 때까지 그는 자연과 그의 직관, 그리고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리듬을 춤추다가 떠난 무용가였습니다. 그는 감사하거나 숭배하는 많은 예술가들 앞에서 춤을 춤으로써 그의 마음을 표현했고, 자유로운 영혼과 빛나는 천재로서 한 시대를 춤추다가 갔습니다. 그는 고든 크레이그라는 젊은 무대 예술가를 만나서 “그에게서 나의 살과 같은 살을 만났고, 내 피와 같은 피를 만났다. 이것은 영혼끼리의 만남이었다”라고 감동하여,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사랑을 나누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제각기 자기의 일이 사랑 때문에 방해받고 지연되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와 함께 사는 것은 그의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고, 그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마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랑과 에술은 둘 다 그 사람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생명의 전부를 거기에 집중하고 걸지 않으면 안되는 전제적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흔히 사랑을, 그 창조력의 촉발제로써나 혹은 윤활제로써만 갖는 수가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정열은 창작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강한 힘을 부여하므로 예술가의 생애에는 많은 사랑의 얘기가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의 소명이 사랑보다는 예술 쪽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비단 예술가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주 범속한 생활인에게도 `일`이란 그의 존재의 이유와 가치와 보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일을 가지고 있는 연인들의 사랑이 불행하게 끝나 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땍쥐베리(Antoinc de Saint-Exupery, 1900~1944, 프랑스의 작가)가 사랑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사랑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사랑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동화`의 감정과 `전제적 힘`을 가리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성질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일 속에서 부단히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들의 일과 사랑을 함께 키워 갈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끼리는 서로 동화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지요.
아벨라르. 나는 이미 당신과 동화하기로 내 삶의 방향을 결정했지만, 당신의 일과 나의 일은 사실상 거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혹시 전생에서 우리는 오누이로 살지는 않았을까 의심할 만큼 나와 같은 피, 같은 성품, 같은 취미, 같은 영혼을 당신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상적 반려자로서의 당신에게 나의 일, 나의 사랑, 모든 것을 주어도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주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곧 당신도 함께 느끼며, 내가 즐거운 일은 곧 당신에게도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의 오랜 방황은 이제 끝났습니다. 일과 함께 사랑을, 사랑과 함께 일을 키워갈 때 배가되는 기쁨 속에서, 나는 무엇에고 감사하며 언제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자매혼`으로 얽힌 사람들이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들이므로 어떤 고난이 닥쳐오고 어떤 좌절이 온다 해도 당신과 나의 `본질로서의 맺음`은 결코 끊기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운명이 우리에게 허락한 이 소중한 만남을 어떻게 키우고 가꾸어 나갈 것인가, 일과 사랑을 어떻게 조화시키며 삶의 결실을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난한 과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생각, 같은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을 믿기에, 나는 내 미래의 열쇠를 당신에게 모두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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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소년 국왕과 대비의 수렴청정
족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족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와 연결되어진다. 문벌가계와 성족파별을 분명히 하고, 존비와 항렬을 따르는 풍속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족보의 유래는 물론 중국의 후한대에서부터 조상의 관력이나 혼인에 이르는 가문의 제반사를 기록하여 남기는 것으로 타문화의 비교우위에 서고자 한 데서 시작되어 보학까지 성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면서 족보는 점차 신뢰성을 잃게 되어 각 가문의 사문서로 전락되기도 하였으나, 그 기록성까지 비방해야 할 까닭이 없었기에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북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가정각본"으로 명나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위에 적은 "가정각본"에 영향을 받아 조선조초기에 본격적인 '족보'가 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연려실기술"에 별집에 적힌 바를 따르면 가정 연간(1522-1566)의 '문화유보'가 최초라고 되어 있으나 그 실물이 현존한다는 얘기는 듣질 못했고, 문헌적으로 가장 오래 된 우리 나라의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는 종법과 보첩은 없고, 거가대족은 있으나 가승이 없다. 서거정이 쓴 안동 권씨보의 서문 한구절이다. 이로 미루어 조선조 초기 이전에는 제대로 된 족보가 없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족보를 총칭하여 계보라고 하지만, 그 외도 보첩, 세보, 세계, 세지, 가승, 가보 등의 많은 명칭으로 불리우면서 기재된 내용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예컨대 '가첩'은 동족 모두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직계만을 따로 발췌해서 엮은 것을 말하고, '가승'은 계도뿐만이 아니라 선조에 관한 전설과 사적까지를 함께 적은 것을 말한다. 또 일반적으로 '대동보'라고 불리는 것은 씨족 전체의 계보를 엮은 이른바 '종보'임을 말하는 것이며, 중시조부터 따로 독립하여 적은 것은 '파보' 혹은 '지보'라고 한다. 족보가 숭조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가문의 내력을 후세에 전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국민정서와는 불가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각자의 이름자에는 거의 반드시 두 자중 한 자가 항렬자로 되어 있다. 대체 이 항렬자를 누가 어떻게 정해 놓았기에 몇 백년을 써도 끝이 없는가를 생각해 본일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각 가문의 '종보'로 일컬어지는 '대동보'에 적혀 있다. 항렬자는 모두 스무 자(20세까지)로 정해져 있지만, 때로는 한 대에 두 자를 정하여 위나 아랫자로 쓰게 한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 스무 자를 모두 사용하면(20세가 지나가면)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대를 15년으로 본다면 (실제로 '족보'는 15년을 주기로 증보 간행된다) 항렬자는 대충 3백 년을 주기로 처음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여기서 족보에 기재된 내용을 소상히 살펴보기로 한다. 외척의 두령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윤원형의 족보를 인용해 보면 이렇다. 윤원형은 윤지임의 아들이다. 윤원형의 부인 김씨는 본관이 연안이며 현감을 지낸 김안수의 딸이었으나, 윤원형은 적실을 물리치고 첩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윤지임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장녀는 별좌 정식에게 출가를 하였으나, 차녀의 경우 사위의 이름을 적지 못한 채 '여 xxxx'라고만 되어 있고 그 끝에 견후비록 이라고 적은 것은 딸 xxxx는 왕비가 되었으므로 뒷장에 따로 적었으니 그 항목을 찾아보라는 뜻이다. 윤원형은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모두 서자와 서녀라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적실인 연안 김씨를 쫓아내고 맏아들인 소실의 소생들이 분명하나, 그 소실의 인적사항은 한 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와 같이 역사 드라마나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그 소실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때로는 절대절명일 수도 있다. 천만다행으로 율곡 이이가 자신의 "석담일기"에 윤원형의 애첩은 정난정이라고 기록해 두었기에 비로소 그녀의 출신과 가계를 알게 되었다. 윤원형의 족보를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조선조에서는 소실의 소생인 서자와 서녀는 양가의 자제와 통혼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윤원형의 소실 소생들은 양가과 통혼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거짓을 적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명종실록"에 '원형의 자녀가 비록 서자요 서녀지만 양가와 통혼하게 하라'는 명종의 어명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외척의 두령이 누린 특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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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의 15분
A군은 오래간만에 애인 B양과 저녁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생겨서 매양 즐겁기만 했다. 푸짐하게 먹고 나서 돈을 치르려고 카운터 앞에 선 A군,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 넣더니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옷을 갈아 입고 나오느라 지갑을 잊고 온 것이다. 이런 순간을 프랑스에서는 '라블레의 15분'이라고 한다.
'라블레'는 '가르간튜어', '판타그튀엘' 등으로 유명한 16세가 프랑스의 작가. 그는 당시의 왕 '프랑소아' 1세의 명을 받들어 로마를 갔었는데 오는 길에 리용에 이르니 여비가 한 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신분을 밝히면 되었지만 그러기를 싫어한 '라블레'는 심사숙고 15분, 마침내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의사로 변장한 다음 그곳의 의사들을 모아놓고 의학강의를 한바탕 늘어놓았다. 시골 의사들이 탄복하여 듣고 있는데 난데없이 '라블레'는 약 한 봉지를 꺼내들더니 이태리에서 구해온 독약인데 이 약으로 국왕을 독살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놀란 의사들이 경찰에 알렸기 때문에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것도 중대범인이라하여 소중히 다루었으며 빠리까지 편안히 호송되어 갔을 뿐 아니라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다. '프랑소와' 1세는 중대 범인을 체포해 왔다는 말에 직접 대면을 했으나 변장을 지워버리고 제 모습으로 돌아온 '라블레'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크게 웃으며 그의 기지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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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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