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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2 호
단기 4340. 2. 22 (음력 01.0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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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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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능력이 적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잘못.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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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一章 (노자 - 도덕경 : 제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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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鎰志於天下矣,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以喪禮處之.
부가병자, 불상지기, 물혹악지, 고유도자부처, 군자거즉귀좌, 용병즉귀우. 병자, 불상지기, 비군자지기. 부득이이용지, 염담위상, 승이불미. 이미지자, 시락살인. 부락살인자, 즉불가이득지어천하의. 길사상좌, 흉사상우. 편장군거좌, 상장군거우. 언이상례처지, 살인지중, 이애비읍지. 전승이상례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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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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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한째 장
직역
아무리 아름다운 병기라 할지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므로 도에 있는 자는 처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평상시에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병기를 사용함에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병기라는 것은 상스럽지 못한 기물이므로 덕이 있는 자의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 해서 그것을 쓸 뿐이니 고요하고 담백한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이겨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대저 살인을 즐기는 자는 하늘 아래 뜻을 얻을 수 없다. 좋은 일에는 왼쪽을 높게 하고, 흉사에는 오른쪽을 높였다. 부관 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는다는 말은 상례로서 그것(전쟁)에 처하란 것이다. 사람의 무리를 죽였으면 슬퍼하고 애통하여 울 것이다. 전쟁에 이겨도, 상례에 처할 것이다.
해석
칼이 아름다운가. 그러나 전쟁터에서 칼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일 뿐이다. 핵탄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가. 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운가.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이다. 전쟁놀이는 재미있다. 그런 사람의 심정이 전쟁을 부른다. 총을 쥐어 본 적이 있는가. 하다 못해서 각목이라도 쥐어 본 적이 있는가. 피가 끓는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해결하고 싶어한다. 적을 베어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칼을 들면 판단이 사라진다. 오직 적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덕이 있는 사람은 칼을 씀에 담백히 하란 것이다. 칼을 들어도 자신이 칼을 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칼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좌가 높고 우가 낮다는 것은 고대의 의식이다. 그래서 좋은 일에는 귀한 손님을 왼쪽에 두어 그 사람을 높인다. 전쟁이 좋은 일이라면 대장을 왼쪽에 자리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오른쪽에 자리하게 한다. 이것은 흉사때 쓰는 예법이다. 따라서 고대에도 전쟁을 흉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장이 왼쪽에 위치한 것이다. 이것은 초상을 당한 예이다. 전쟁은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이겨서 영웅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간에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을 위해서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백명을 죽이고 천명을 죽여서 영웅이 되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그것을 자랑이라고 여긴다면 세상은 온통 전쟁으로 시달릴 것이다. 지금의 전쟁은 어떠한가. 전쟁에서 이겨도 상례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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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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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성능이 좋은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기구이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사람은 무기의 사용을 꺼려하는 것이다. 군자는 평상시에는 왼쪽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용병하는 때에는 오른쪽을 소중하게 여긴다.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며 군자가 가까이 할 물건이 못된다.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쓰게 될 때에는 담담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싸워서 이기더라도 잘 하였다고 기뻐해서는 안된다. 전투에 이긴 것을 잘 하였다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곧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사람 죽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뜻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경사에는 왼쪽을 상석으로 하고 흉사에는 오른쪽을 상석으로 한다. 군대에서는 부장은 왼쪽에 자리잡게 하고 사령관은 오른쪽에 자리잡게 한다. 왜냐하면 전투 행위를 애도할 일로 간주하여 상례를 여기에 적용한 것이다. 사람을 많이 죽게 하였으므로 그 일로 슬퍼하여 눈물 흘리고 싸움에 이겼을 지라도 장례식의 예로써 이에 대처한다는 것이다.
주
가병: 성능이 좋은 무기, 병은 무기를 뜻함. 가병을 미병으로 표기한 관본도 있음. 불처: 그곳이 마음 편안히 머물지 않는다. 즉 무기 사용을 꺼려한다, 기피한다는 뜻임. 거: 평상시. 영담: 편안하고 담담한 모양. 미: 잘하였다고 기뻐하는 것. 편장군: 부장임, 편을 돕는다, 보좌한다는 뜻임. 상장군: 대장군 죽 총사령관을 말함.
해
이 장에서는 앞장에 이어 전쟁의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무기는 흉기이며 전쟁은 사람다운 사람이 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부득이하여 적의 침략 등으로 전쟁을 해야 할 때에도 전쟁을 즐기는 듯한 마음가짐으로는 안될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천하에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맹자도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능히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천하 만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길은 오직 어진 정치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묵자도 간결하고 통쾌한 표현을 구사하여 전쟁을 규탄하고 있다. 죄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인다면 그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범인임에 틀림없고 열 명을 죽인다면 열 배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므로 열 배의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은 죄없는 백성을 죽이고 남의 나라를 빼앗는 행위이므로 몇 사람을 살상하거나 타인의 가축을 약탈하는 데 비하여 그 죄악이 훨씬 큰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전쟁 행위를 불의라 하지 않고 도리어 그 공을 찬양하고 문장으로 후대에 전하고 있다. 이 일이 어찌 큰 모순이 아니겠는가. 노자, 맹자, 묵자 등은 탁월한 식견을 지닌 현인들로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상호간의 공벌약탈의 참화를 고발하고 평화를 역설하였다. 이들이 전쟁을 성토하고 평화를 부르짖는 논조에는 보편적인 인류애에 바탕을 둔 인도주의 정신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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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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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땅속의 쇠솥에서 나온 형제불
1907년 어느날,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사람 하나가 땅을 파다가 우연히 뚜껑이 덮인 옛날 쇠솥 하나를 발견했다. 솥 안에는 금빛도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둘이나 들어 있었다. 선량한 발견자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마을에 알렸다. 그러자 당시 부여 지구에 파견돼 있던 이른바 통감부 소속의 일제 헌병대가 알고 압수의 손길을 뻗쳤다. 주인이 나타날때까지 유실물로서 보관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난리때, 어느 절의 중들이 부처님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땅속 깊이 안전하게 묻어놓았다가 다시 캐서 절로 모셔갈 기회를 갖지 못하든 바람에 영원히 잊혀져버렸으리라 추측되는 그 작은 금동불들을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관한다던 일제 헌병대는 1년 후에 가서 결국 '임자 없는 물건' 이라 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경매에 붙였다. 저들 멋대로의 압수와 처분이었다. 불상의 낙찰자는 니와세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크기는 약간 다르나 백제 시대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불교미술품인 금동관음보살입상 둘을 독차지한 것인데, 겉으로는 경매입찰이었으나 내막은 헌병대를 통한 단독 점유였을 가능성이 짙다. 니와세는 1922년에 그가 갖고 있던 두 개의 백제 금동불 중 하나를 대구의 이치다(1930년에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을 불법적으로 입수하려고 했던 자)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15년 전에 땅속의 한 솥에서 나왔던 형제불은 그후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크기가 약간 작아 동생뻘이었던 것(높이 약 22.8cm)은 해방 후 서울에서 압수, 귀속재산으로 국립박물관에 들어갔으나 대구로 가 있던 형뻘 되는 불상(높이 약 28cm)은 소장자였던 이치다가 해방후 일본으로 숨겨 갖고 간 듯, 아주 사라져버렸다. 고려자기나 석탑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제 때의 고적 혹은 고미술 관계서적이나 도록에 무수히 소개돼 있는 일본인 소장의 귀중한 불상들이 오늘에 와서 거의가 행방불명이며 국내에서는 완전히 찾을 수가 없다. 그 태반이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일제 초기부터 일본인들은 석탑류에서처럼 이 땅의 대소 불상 유물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날뛰던 일부 악질 일본인들은 곳곳의 폐사지에서 석탑과 함께 석불도 걸리는 대로 불법반출하여 돈 있는 일본인 사회에 팔아 넘겼고, 순금 혹은 금동제의 작고 값나가는 불상을 약탈하기 위해서 시대가 오랜 석탑이나 부도를 무너뜨리고 그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훔쳤다. 그런가 하면 살아 있는 사암에서 약탈하거나 매수하는 방법도 썼다. 그들의 악랄한 약탈품 가운데 국보적인 가치를 갖는 어떤 불상은 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으로도 비싼 가격으로 팔려 들어갔다. 당시 일본인 사회에 이 땅의 각종 불상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고조시킨 것은 고려자기나 석탑류의 경우처럼 역시 일본인 전문가들의 고적조사 보고와 강연회였다. 한 일본인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1915년 5월이었다고 생각된다. 세키노 박사가 서울 남산여학교 강당에서 고적조사의 보고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런 말이 나왔다. '나이치(일본 본토)와 계열을 같이 하는 불상이 조선에 많이 있을 걸로 생각하고 많은 사원을 조사해 봤으나 비교적 적었다. 어디선가 나타날 거라고 주의해 보았더니 근자에 와서 여러 곳의 절터, 산속의 동굴, 경작지 같은 데서 하나둘씩 출토되기 시작했다. 이왕가박물관의 많은 불상은 그런 경위로 모여진 것들이다.' 사실 그후에도 삼국시대와 신라의 불상들이 무수히 출토되고 있다. 박사의 강연이 있은 후, 어떤 사람(물론 일본인)이 높이가 약 23cm쯤 되는 금동불상 하나를 들고 가서 박사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강원도 산 속에서 나왔다는 그 불상을 본 박사는 깜짝 놀라면서, '이건 굉장한 삼국시대 불상이다. 이런 것이 민간에 나돈다는건 곤란한 일이다' 고 주의를 시키는 것이었다."(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 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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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9장 현실과 이상의 갈등
1.현대의 사상적 상황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출판한 것은 1927년이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현대라는 시기를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로 잡을 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현대의 산물이며 현대를 분석하고 진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일상속에 물들어 있는 현존재로 보며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호기심, 지껄임, 애매성, 던져짐 등으로 지칭한다. 인간의 존재방식은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양상을 대변하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양상은 인간 의식의 표현이다. 의식의 표현은 사상이다. 일상인의 존재방식을 지껄임, 애매함, 호기심, 던져짐 등으로 파악한 하이데거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현대인이 살아가는 양상은 고대 중세 및 근대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사회체제가 물질 문명과 국제 시장 경제 및 이데올로기 중심적인 정치 체제 등에 의하여 그 전의 것과는질적으로 판이한 모습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사상적 상황도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징들 속에 자신의 위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서구 사상의 맥락을 더듬어보자면(일반적으로 크게 볼 때 동양 사상도 이와 일치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고대에는 윤리 신비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중세에는 전반적으로 종교적인 색채가 중심적이었고 근대에는 자연 과학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대를 좌우하는 사상적 경향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들은 이 물음에 대하여 #1좁은 의미에서 사상적 경향을 철학에 한정시켜 볼 수 있으며 #2넓은 의미에서는 사상적 경향을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과학 사회 종교에까지 확대시켜서 언급할 수 있다. 현대 철학의 상황을 잡다하게 늘어놓자면 수많은 학파들과 경향들을 열거할 수있겠지만, 우리들은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두 흐름을 지시함으로써 현대의 사상적 상황에 대한 윤곽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두 흐름은 브렌타노, 훗설,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뽕띠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슐릭, 파이글, 카르납 등이 대변하는 논리적 실증주의이다. 전자는 여전히 인간의 이성에 치우치며 후자는 인간의 경험에 기운다, 우리들이 이 두 가지 현대의 철학적인 경향만을 살핀다면 현대 철학의 상황은 고대 중세 또는 근대의 철학적 상황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의 두 면을 고찰할 때 우리들은 현대의 철학적 상황의 피상적인 윤곽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결코 그 내용을 붙잡을 수 없다. 고대나 중세 근대에는 어떤 한두 가지 철학의 경향이 두드러졌었고 따라서 그러한 사상을 반영하는 사회도 극심한 복잡성을 소유하지 않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들은 현대의 대표적인 두 철학적 경향으로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를 꼽았지만 현대 사회를 보다 더 강력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이들 전통적인 순수한 철학적 경향들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경제적인 뿌리를 가지고 철학의 옷을 차려입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은 넓은 의미에서 현대의 사상적 상황을 돌이켜볼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을 이어오는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라는 좁은 의미의 사상적 경향은 자신을 용해시키면서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자연 과학이라는 넓은 의미의 사상적 상황에 자리를 양보한다. 이제 우리는 현대의 사상적 상황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기계주의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앞으로의 역사를 통하여 과연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이 더욱더 강하게 인간의 삶을 지배할 것이지 아니면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중지하고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좌우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인간이 미래 존재를 결정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가 현대의 사상적 상황이 지금, 이곳에서 어떠한 형태를 띠우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에 직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곳은 불교와 유교의 오랜 전통이 배인 곳이다. 비록 샤마니즘과 밀접히 결합되기는 했어도 이곳은 나름대로의 불교 유교적인 의식에 젖어 있었다."예수는 일어서서 도전적인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음에 비하여 석가는 평온하게 앉은 자세로 죽음을 대하였다."는 스즈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체로 유교 불교적인 사상은 역사의 시간적인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하늘과 사람이 합일할 경우 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일 경우 인간은 이미 우주와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서구 사상에서는 인간은 절대자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며 그는 전 생애를 통하여 자연을 이용하여배를 채우며 그 영광을 하느님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정치 경제 종교 학문적인 이데올로기의 직접적인 근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중심적인 서구 사상이다. "자연과의 조화"가 아니라 "자연을 이용"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삶는 서구 사상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마저도 이용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이곳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대의 사상적 상황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며 절망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자연 및 우주와의 합일을 전통으로 지니면서도 자본주의 기계주의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현대 사상의 맥락을 살펴보았고 현대의 사상적 상황이 인간을 무의미한 개인으로 전락시키며 불안과 절망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태는 #1의식의 갈등 #2현실과 이상의 괴리 #3미래 지향적 의사 소통 등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자신의 핵심을 드러낼 수 있고 동시에 해결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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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불현듯이
본뜻 : 불을 켠 듯이 갑자기 환해짐을 이르는 말이다.
바뀐 뜻 : '갑자기 치밀어 걷잡을 수 없게' '느닷없이'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호령
본뜻 : 불호령은 볼멘 소리로 하는 호령이라는'불호령'에서 나온 말이다. 대개는 마음에 차지않고 불만스러운 점이 많을 때 볼이 메게 되는데 이렇게 볼멘 소리로 하는 호령은 무섭고 사나울 수밖에 없다. 불호령이 이처럼 불같이 사납고 무섭다고 하여 불호령이란 말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바뀐 뜻 : 사전에는 불호령은 볼멘 소리로 하는 꾸지람. 불호령은 불같이 갑작스럽고 무서운 호령이라는 뜻으로 나누어 놓았으나 둘 다 비슷한 뜻을 가진 유사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비지땀
본뜻 : 콩을 갈아 헝겊에 싸서 짤 때 나오는 콩물처럼 많이 흘리는 땀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힘든 일을 할 때 쏟아지는 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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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여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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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나, 그대를 만나
사랑은 슬픔으로 시작되고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날 오후, 조금 슬픈 듯한 눈과 따뜻한 미소를 하고 당신은 저만치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웃고 마시고 떠들고 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당신의 지긋한 미소와 눈은, 그 모든 소리와 사람들을 차단하고 나를 한 순간 진공 속으로 몰아넣는 듯했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나에게로 왔을까. 햇빛이 부어 내리듯, 꽃들이 눈처럼 내리듯 기도처럼 너에게로 왔을까 그것을 말해 다오. 하나의 행복이 빛나면서 하늘에서 내려와 그 날개를 크게 펴고 내 불타는 영혼 위에 앉았습니다.
-R.M.릴케의 <사랑의 노래>
햇빛이 반짝이며 내 어깨 위에 내려앉듯이, 봄날 오후 수많은 꽃잎들이 하늘을 덮고 흩날리면서 쏟아지듯이, 그렇게 사랑은 내게로 왔습니다. 갑자기 세상은 한 개의 금빛 종이 되어 쟁그랑 쟁그랑 노래 부르듯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어떤 대상과 과감하게 결합하는 일이다”라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무슨 따뜻한 빛이 나를 감싸는 듯했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꼬집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육친을 만난 것 같은 느낌, 잃어버렸던 나의 일부를 찾아낸 것 같은 안도감이 나의 가슴을 서서히 밀고 올라와 알 수 없는 충족감으로 나를 설레게 했습니다.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독신의 삶 속에서 일과 성취욕에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여태까지의 나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결핍으로 가득한 것이었던가를 깨닫게 해주었던 그날 오후 당신과의 만남은, 긴 여행의 끝에 도달한 안온한 가정의 평화와도 같은 느낌, 불완전한 외쪽의 바퀴로 타력에 의하여 마구 달리던 수레가 다른 한쪽의 바퀴를 마저 달고 비로소 안정감을 얻은 것 같은 균형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사랑은 운명이라고 흔히 말을 하지요. 나의 이성이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 나의 강한 이기심으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조금씩 나를 해체시키면서 따뜻하게 무너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왔던 나의 에고(ego)와 논리적인 사고, 자기 운명의 열쇠는 자기가 쥐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철저한 자아가 그렇게도 쉽사리, 그렇게도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에 대하여 나의 의지는 강하게 저항해야만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 동안, 내 속에는 어이없게도 따뜻한 기쁨이 움트고 있음을, 끝없는 평화가 내 가슴을 채워가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나는 이상한 행복감으로 울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온화한 미소와 조금 쓸쓸한 듯한 분위기를 갖고 계셨습니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옷은 엷은 갈색과 진한 갈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귀밑에는 몇 올 쯤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흩날리듯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하면서 웃던 당신의 얼굴은 무언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현세의 욕망이나 이해타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넉넉하고 자유로운 당신의 분위기, 마치 목적없이 떠도는 여행자와도 같이 보이는 당신의 조금 허탈한 눈, 내성적이고 세심하게 보이는 당신의 손놀림, 한동안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건너다보고 있던 당신의 눈빛 속에서 나는 나의 운명이 나래를 펴고 나의 몸 위로 내려앉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아벨라르. 그리하여 하나의 행복이 내 불타는 영혼 위로 내려앉았고 정교한 조직의 이국 산물`과도 같은 사랑의 신비가 내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당신은 먼 이국에서 오셨고, 또 언젠가는 떠나갈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잠깐 머물렀다 떠나갈 당신이 내게 새롭게 발견된 또 하나의 `나 자신`인 것을 깨달은 그 날 오후, 한 몸의 연인을 반으로 나누어 세상의 끝과 끝으로 던져 놓았다는 짖궂은 신화 속의 `베터하프(Better half)`를 상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미소, 당신의 옷깃이 닿은 의자와 식탁의 모서리, 당신이 잡은 술잔에 이르기까지 내 관심의 촉각은 예민하게 일어서서 그 모두를 나의 눈과 귀 속에 생생하게 각인했고,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소리는 한 음계 높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빛깔은 은빛 혹은 금빛으로 채색되었으며, 그 향기는 어찌 그리도 감미롭게 나를 감싸고 말았던지요? 뜰안의 나무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조용히 그 키를 키워가고 나무들 너머로 바라보이는 하늘에는 엷은 봄날의 아지랑이가 눈물 같이 어룽이었습니다. 아벨라르. 다시 한번 인생을 시작해 보고 싶은 열망이, 그것을 위하여는 그 무엇이라도 지불하고 싶은 열정이 내 몸 속에서 강하게 피돌기를 시작한 그날 오후, 나는 기쁨보다는 더 많이 슬픔 쪽에 서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갖고 있는 성질 속에는 기쁨과 환희도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고통과 인내도 더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 또 사랑이라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를 겪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자아를 희생해야 하는지를 나는 알고 있으므로, 그리고 당신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먼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아벨라르, 내 사랑은 슬픔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슬픔의 다른 한쪽에서 다스릴 수 없이 솟아오르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 반짝이는 미소, 세상이 온통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 차는 것 같은 율동감이 스스로를 가눌 수 없게 하던 저 불가해한 봄날 오후의 한때를, 나는 내게 내려주신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반생의 어둠을 밀어내고 빛처럼 내게로 오신 이, 세상의 온갖 사물과 냄새, 그 리듬을 바로 감각하고, 생의 곳곳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바로 이해하도록 해주신 이, 그리고 긴 밤을 눈 떠서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알게 해주신 이, 나의 아벨라르여. 사랑은 내게 기도처럼 왔습니다. 내 영혼을 깊이 울리면서 천상의 어느 곳을 향하여 손 모으고 무릎 꿇게 하는 겸손하고 맑은 기도처럼 그렇게 내게로 왔습니다. 내가 이 대지 위에 밭 붙이고 살고 있음을 감사하고 나의 영혼이 그리움의 고통으로 닳아가고 있음을 또한 감사하는 순정한 기도처럼 와서, 나뭇잎 하나에도 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시인 릴케(Reiner Maria Rillke, 1875~1926, 독일)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아벨라르. 나의 기도가 당신을 지켜, 생애의 어느 하루도 어두운 날이 없기를, 다만 행복하고 사랑에 가득하기를 이 밤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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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소년 국왕과 대비의 수렴청정
독살설
절대권력을 에워싼 여러 세력간의 갈등은 어디에고 있게 마련이다. 그 갈등이 크게 번지면 정변이 되고 혁명이 되지만, 암살이나 독살과 같은 비겁한 수단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런데도 조선왕조의 경우는 암살이 없다. 그것은 강상과 윤기를 치도의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왕조 시대에 있어서의 정적의 제거는 대개 상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한두 번의 상소로 결판이 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사와 선대의 관례를 소상히 인용하는 장문의 상소가 수십 번 오르내리고 그에 반대하는 상소가 또 수없이 오르내리고서야 '사사하라!'는 임금의 윤허를 받을 수 있다. 이 같은 사정이고 보니 암살과 같은 비겁한 수단은 용인될 수가 없었을 것이리라. 그런데도 왕실의 일각에서는 독살설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설일 뿐, 독살이라고 단정되지는 않았다. 그 첫 번째가 인조 23년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독살설이다. 임금이나 세자가 죽으면 소렴과 대렴시에 종친과 당상관들이 입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데 의혹이 있다. "인조실록"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세자의 시신은 진흑으로 변해 있었으며, 칠혈에서 출혈하고 있어 마치 독약에 중독된 사람과 같았다.
그렇다면 누구의 소행인가. 바로 이 점이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이 독살설이 공통점이다. 이때는 인조의 총비인 귀인 조씨의 소행일 것이라는 풍설이 난무하였으나 그 내막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두 번째의 독살설은 경종4년 8월25일에 있었던 경종의 죽음이었다. 저 유명한 희빈 장씨(장옥정)의 소생이었던 경종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연잉군(후일의 영조)을 세제로 맞아들였다. 이 세제책봉의 일을 놓고는 노론과 소론을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명분론의 대립이었지만 살기가 도는 갈등이라고 할 만했다. 이때의 기록으로는 동궁에서 올린 게장을 먹고 경종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또한 애매한 것이 경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영조를 독살의 주모자로 몰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영조의 소행일 것이라는 풍설은 난무하듯 퍼져 나갔다.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입에 담았다 하여 이천해 같은 사람은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경종의 독살설은 근 30여년 간이나 설왕설래되고 보니, 궁색하게도 대왕대비 김씨가 게장을 올린 것은 동궁이 아니었고, 경종이 죽은 것은 게장을 먹은지 닷새 후였으므로 직접 사인이 아니라는 궁색한 해명까지 해야 했다. 그 후에도 독살설의 후유증은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더 세월이 흐른 다음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도 경종의 죽음에 관한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독살설은 1918년 12월 20일에 있었던 고종황제의 죽음이다. 고종의 독살설은 설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독살로 알려져 있다. 이때는 이른바 일제의 통감정치의 와중이었으므로 일본인들이 개입된 특수한 사건이었다. 고종은 식혜를 좋아했다. 그 식혜에 독을 넣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또한 설로 끝날 것 같았는데, 염을 할 때 시체에서 살이 묻어나는 것으로 확증이 드러났다. 전의 안모라는 자가 일본정부의 관리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이방자 여사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자전에다 밝혔다. 이 밖에도 고종의 총비였던 영보당의 소생인 완화군이 급사한 일이 있었는데 한때 민비의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실상은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하였다. 어떻든 권력의 정상부에서 곧잘 일어나는 독살은 대체로 설로 끝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때로는 함구령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입에 담는 것이 곧 불충이 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기가 십상이었기에 풍설로 묻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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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Diogenes)
고대 희랍의 철학자. 금욕파인 큐니코스파의 대표적 인물인데 큐니코스파라는 이름도 원시적 반문명적 생활을 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이 큐논(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 그의 기행에 대한 갖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알렉산더' 대왕과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평생토록 홑옷을 입고 통 속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가서, 무엇이든지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더니 때 마침 햇볕을 쬐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조금만 비켜 서 주시오.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알렉산더' 대왕은 그 말을 듣자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 하고 술회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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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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