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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8 호
단기 4340. 2. 18 (음력 01.0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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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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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눈여겨 볼 때와 눈감아 줄 때를 아는 아내가 양처./ 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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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七章 (노자 - 도덕경 : 제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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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行, 無轍迹, 善言, 無瑕謫, 善數, 不用籌策. 善閉, 無關楗而不可開, 善結, 無繩約而不可解, 是以聖人, 常善求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謂要妙.
선행, 무철적, 선언, 무하적, 선수, 불용주책. 선폐, 무관건이불가개, 선결, 무승약이불가해, 시이성인, 상선구인, 고무기인, 상선구물, 고무기물. 시위습명,고선인자, 불선인지사, 불선인자, 선인지자, 불귀기사, 불애기자, 수지대미. 시위요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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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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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일곱째 장
직역
잘 움직이는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좋은 말은 흠이 없다. 잘 계산하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않고, 잘 닫는 자는 빗장 나무를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잘 묶는 자는 끊을 쓰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늘 사물을 잘 구제하며, 그러므로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습명 (온갖 것들을 다 받아들여서 자기를 깨우치는 자료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좋지 못하는 사람의 스승이며,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크게 미혹할 것이다.이것을 일컬어 묘한 요체라 한다.
해석
도구를 가지고 하는 것은 이차적인 일이다. 도구가 이미 자신의 몸처럼 되면 도구가 없어진다. 아니 도구를 자신의 몸처럼 쓴다. 그것이 고수이다. 끈으로 묶인 사람을 푸는 것이 쉬운가. 마음속에 이념으로 묶인 사람, 쉽게 말해서 사랑의 포로가 된 사람을 푸는 것이 쉬운가.
고장난 텔레비전을 우리는 버린다. 낡은 털옷을 우리는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든지 재활용할 수 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물상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도 버린다.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을 한다. 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인은 그러한 사람도 포용을 한다.
논어에 세명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세명중에 뛰어난 사람이 없어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거울이 된다. 좋지 못한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도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을 보고 그의 좋은 점을 배우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좋지 못한 사람의 좋지 못한 점을 거울로 삼아 자신이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쁘다 해서 버리고, 좋은 점이 있으면서도 배우지 아니하면 비록 똑똑하다고 해도, 발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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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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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아주 훌륭한 행위에는 자국이 남지 않고 도에 맞는 좋은 말에는 흠이 없으며, 셈에 능숙하면 산가지가 필요 없다. 잘 닫은 문은 빗장을 쓰지 않아도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잘 묶어 놓으면 구태여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구제하여 쓰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 또한 물건을 구하여 유용하게 어떤 물건도 버리는 법이 없다. 이것을 외면에 드러나지 않은 밝은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 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의 경계와 교훈이 된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거나 그 경계와 교훈이 되는 사람을 사랑한 줄 모르면 비록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우매한 것과 같다. 이것을 도의 오묘한 작용이라 한다.
주
철적: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하적: 흠, 잘못, 허물, 원래는 옥의 티를 말함. 주책: 대나무나 뼈 같은 것으로 만든 산가지. 옛날 셈할 때 쓰던 물건임, 불용 주책을 불주책을 무주책으로 기술한 판본도 있음. 관건: 문빗장, 자물쇠. 승약: 새끼줄, 밧줄, 노끈 따위로 묶는 것. 습명: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밝은 지혜. 습은 되풀이하다, 거듭하다, 감추다, 전하다, 들어가다 등으로 새겨 옛날부터 주해에 통일을 보고 있지 못하다. 자: 도움이 되다, 소용이 닿다, 취하다의 뜻임. 타산지석과 같이 선한 사람의 수양에 경계와 교훈의 자료가 된다는 뜻임. 요묘: 요묘와 같음 의미임. 신비하고 그윽한 도의 자용, 깊이를 헤아릴 수 없 는 도가 지니고 있는 진리를 의미함.
해
이장에서 노자는 무위자연의 도를 체험한 사람의 감화력을 말하고 있다. 무위자연의 도는 일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에 선이니 악이니 하는 차별적인 가치판단을 이미 초월하고 있다. 노자는 원래 선과 악을 어떤 절대론적 기준으로 성급하게 구분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악은 선과 절대적으로 대립되는 존재가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아직 선에 이르지 않는 상태 즉 선이 결여진 상태인 것이다. 악은 선과 더불어 본질적 근원적으로는 동일한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노자의 선은 악을 용서하고 포용할 줄 아는 여유와 너그러움이 있다. 서구인들이 선악의 문제를 너무 극단적인 이분법적 대립 관계로만 파악하여 일방적 자기집착 내지는 자기 독선에 빠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기독교의 원죄 의식에 뿌리를 둔 과거 서구 문학 사상 최고 수준의 걸작품들은 모두 선과 악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괴테의 '파우스트', 허만 멜빌의 '백경', 도스토에프스키의 '까라마쵸프가의 형제들' 등의작품들은 다 인간 정신의 내면에 깃든 선과 악, 특히 악의 정체에 대한 심층 해부와 분석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구식 선악관의 세례를 받은 일부 동양의 현대인들은 동양 사상(특히 노장사상과 불교)이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자기 반성, 깊이 있는 사색 등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은 아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 진리성의 결여를 입증하는 것으로까지 몰아 부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선이나 악이다 하고 딱부러지게 흑백론적 기준으로 구분 짓는다는 것에 벌써 무리가 있으며, 선이 이미 선이다 하고 목소리를 높여 자기 주장에만 열중한다면 그것 자체가 벌써 선은 아닐 것이다. 도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정신적 미숙함일 것이다. 무위자연의 도는 자기 주장이나 강변 없이 우주 만물을 길러 내며 그 자신의 품속에서 숨쉬도록 허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물건을 잘 활용하듯이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으로,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타산지석으로 그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지도, 남의 수양에 타산지석이 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 모두를 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용에 맡겨 각자의 소임을 다하도록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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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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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무법자들에게 유린된 석물들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 공포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과 고적조사위원회 설치규정은 그전까지 방임되었던 일본인 무법자와 그들에게 나쁜 짓을 배우고 혹은 매수되어 움직였던 일부 조선인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행위에 다소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범행은 조금도 중단되지 않았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던 깊은 산골짜기의 절터라든지, 한두 명의 허약한 중이 지키고 있던 몰락한 명찰, 그밖에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유적지에서 그들은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물을 빼냈고, 그것을 딴 데 팔아 큰 돈을 버는 불법행위를 감행했다. 당시 일본인 사회에서 그들의 만행은 대개 뒤탈 없이 성공했다. 또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불법적인 이익과 귀한 유물의 소유욕을 충족시켰다.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이 공포된 후 몇몇 경우가 적발돼도 일본인 관련자들은 이렇다 할 형벌을 받는 일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경우와는 달리 일찍부터 생활주택의 정원과 조경에 배치하는 석물로서 불교 문화의 고색 짙은 석탑과 석등을 진중히 여겼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세력으로 이 땅에서 부를 누리게 되었던 많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정원에 조선의 아름다운 옛 석탑과 석등 혹은 부도를 들여놓으려고 한 것은, 말하자면 자연스런 생심이었다. 그리고 이 생심이야말로 실제 불법적인 약탈행위들과 공범 관계를 맺게 했고, 동시에 배후조정 혹은 요청자로서 공모하게 한 것이다. 충남 보령의 이름을 잃은 절터에세 인천의 고노라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중간에 내세워 감쪽같이 오층석탑을 반출해내던 무렵, 같은 인천에 살고 있던 우에하라라는 도 다른 일본인은 경기도 용인에서 삼층석탑을 실어다놓고 있었다. 1919년의 총독부 고적조사 서류에서 그 사실이 짤막하지만 명확하게 씌어 있다.
"그 탑은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창리 탑골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작년 말(1919년)에 인천 축현으로 이전한 것으로 그 뒤 다시 현재의 장소인 산수정(지금의 송학동) 우에하라의 택지 안에 옮겨진 것임."
혹시 이탑이 1970년 초까지 인천경찰서 앞의 은행 관사 안에 있었던 삼층석탑과 같은 물건인지도 모르나 이미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시 인천에서 삼층석탑을 조사한 서울의 전문가들은 고려시대의 비교적 우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옛 절터의 석탑이나 부도 같은 역사 유물은 어떤 경우라도 개인이 임의로 처분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불법적인 매매와 반출 또는 약탈이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모두가 일본인들이 직접 간접으로 감행한 것이었다. 다음은 1930년대에 적발된 몇몇의 확실한 사례이다. 1936년에 서울 돈암동 424에 살고 있던 닛타(혹시 뒤에 남대문께에 살며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을 사 갖고 있던 신전의각과 동일 인물인지도 모르겠다)가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 절터에 있던 우수한 석탑 하나를 서울 자기집 마당으로 반출했다가 불법행위로 걸렸다. 같은 해 2월에는 군산에 살던 다케다라는 일본인이 이 모라는 조선인 앞잡이와 짜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삼층석탑을 100원으로 몰래 사서 군산으로 반출했는데, 불법적으로 그것을 팔았던 백철현이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매매를 취소한 후 원위치로 다시 옮겨다 놓았다. 또 같은 무렵에 전북 옥구군 개정면 발산리에 살던 시마다니라는 일본인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각대리의 절터에서 우수한 오층석탑을 무단 반출했다가 적발되었으나 석탑은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방전까지 군산의 어느 농장에 이건돼 있었다는 은산면 숭각사터의 삼층석탑과 관련이 있음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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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8장 종교에 관한 명상
2.현대와 종교
현실은 인간 의식의 표현이다. 현실은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과학, 종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 다양한 현실의 모습은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계를 형성한다. 이들 현실은 바로 인간의 삶을 구성한다. 해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가뭄과 물난리는 자연만의 파괴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일 수 백년 전부터 산과 물에 대한 전략을 일과성 있게 꾸준히 밀어왔더라면 가뭄과 물난리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가뭄과 물난리는 우리들의 의식의 일부를 반영한다. 정치, 경제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복잡하고 산만한 종교적 현실 역시 우리들의 의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다양한 현실의 모습들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종교적 현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라는 전체적 현실을 표현하는 가장 내면적이고도 근원적인 의식은 역시 종교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의식이나 예술적 의식에 앞서서 종교적 의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의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화로부터 출발하여 이성의 세계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의 모든 삶의 형태는 근원적으로 신화와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미루어볼 때 종교적 의식은 한 사회 집단과 한 국가의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들이 지금 종교의 문제점을 해결하여 핵심적인 내용을 얻으려 한다면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이 현학적인 철학책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공허한 개념들만을 길게 늘어놓거나 또는 단순히 무의미하게 개념을 분석하기만 하는 작업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체험하는데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직접적인 삶에서 전개되고 있는 종교적 현실을 구체적인 바탕 위에서 음미하고 반성함으로써 삶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그러한 종교적 현실을 표현하는 종교적 의식의 본질적 구조를 해명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들은 미래 지향적인 차원에서 자기 창조적, 자기 반성적인 종교적 의식의 자유와 자발성에 대한 보장을 획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면성을 무시한 종교는 단지 형식으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적 역사적으로 우리의 삶이 현실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장소는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이다. 이 장소는 무수한 고난과 고통의 역사를 내포한 현대의 바람을 숨쉬고있다. 현대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산업사회, 물질문명, 이데올로기 집단 등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볼 수 있기는 해도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을 훨씬 더 강하게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를 좌절, 소외, 인간성 상실의 시대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오늘날의 철학적 관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현실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특히 #1사업사회 안에서의 종교의 산업화#2물질문명 안에서의 종교의 도구화 #3이데올로기 집단 안에서의 종교의 정치화 등이 우리가 직면하는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종교의식, 다시 말해서 신앙심이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일상적 의식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한다. 일상적 의식으로 변모해버린 종교의식이 나타내는 종교적 현실은 질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양적인 형식만을 소유하게 된다. 양적인 것은 집단적인 크기만을 자랑으로 여기며 언제나 측정 가능한 외부적 대상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심원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수단으로 종속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들의 직접적, 구체적인 현실에 있어서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는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던져주고 있는가? 이들 종교가 나타내고 있는 현실은 역사, 지리적으로 무수한 모순과 갈등의 고통을 안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삶에 과연 미래지향적인 방향 설정을 명확히 지시하여 주고 있는가? 어떤 특정한 종교적 현실이 결핍된 부정적 신앙심으로 가면적인 종교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지나칠 정도로 극단적으로 사회화하거나 산업화하는 경향은 없는가? 또는 정치, 경제적인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는 경향은 없는가? 신앙은 원초적인 종교 의식이다. 그러나 종교의식이 전체적으로 활짝 전개되지 못하고 단지 은폐되어 가능성만으로 머물러 있을 경우 종교가 산업화, 정치화, 사회화하는 경향은 거짓된 종교의식으로 나타나서 부정적인 그리고 결핍된 허위의 종교적 현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종교적 현실이 그럴듯한 가장 강한 주장과 함께 보장하는 미래 지향적인 삶은 자연히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조화가 온갖 찬란한 색깔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싱싱한 내음과 생명을 결여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현대인, 특히 오늘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들 현대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본래적인 삶의 터전을 벗어나 고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몽고와 중국과 일본의 잦은 침략 그리고 내부에서 일어난 무수한 정변과 사화 등은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우리들 스스로의 의식이 불러일으킨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했던 역사적 사실 역시 우리들의 정신적 삶이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질서와 조화를 그리고 미래와 현재를 나아가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보장해 줄 수있는 종교적 현실과 이러한 현실을 전체적으로 표현해주는 내면적인 성실한 종교 의식에 대한 격렬한 동경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의식인 신앙은 오직 주체적 인간의 자유와 자율에 의해서만 질서 있는 종교적 현실을 구성하고 창조하며 표현할 수 있다. 결핍된 그리고 부정적인 종교의식을 극복하고 전환시켜서 순환시키는 것이 절대적인 세계 근원에 대한 외경심 내지는 신앙을 내용으로 삼는 종교의식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는 결국 인간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인격으로서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단할 때 성취될 수있는 성질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아직도 긍정적, 미래 지향적인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정신적 요인들 중의 하나는 역시 불교, 유교 및 기독교적인 원초적 종교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리들은 지나치게 많은 문제점들과 모순과 갈등이 누적되어 있는 지금 이곳의 우리들 스스로의 현실을 바라볼 때 종교에 관한 원초적 의식에 의하여 우리들의 지나간 역사적 현실이 얼마나 순화의 과정을 거칠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 자신이 주체적인 인격으로서 과연 능동적으로 신앙을 순화시켜 왔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가까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볼 때 우리는 천주교가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미래지향적인 삶의 조망을 던져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동시에 신교도 비록 천주교보다는 시대적으로 약간 뒤졌지만 일본의 지배 아래서 그리고 해방 전후와 6.25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차원을 지향하여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70년대로부터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수적인 여건과 아울러 80년대 들어서면서 특히 우리들 주변에 거짓된 각양각색의 종교의식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산업화, 물질화, 이데올로기화에 편성하고 있는 경향을 우리들은 명백히 대할 수 있다. 우리들은 가까운 역사와 주변의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지금 이곳에서 종교가 인간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고 고찰함으로써 우리들의 종교의식을 보다 더 본래적인 것으로 지양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원초적인 종교 의식으로서의 조화 있는 신앙으로 순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 의식으로서의 신앙은 도구처럼 급속한 시간적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제멋대로 제작될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록 유한한 시간적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인격의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의식에 의해서 창조되며 구성된다. 불교, 유교, 기독교의 경전에 나타나 있는 종교적 의식을 보더라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종교적 의식은 장구한 역사를 거쳐서 의식의 전개와 함께 꽃피우기 마련이다.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구성되는 종교의식이 은폐될 때 우리들은 스스로의 인격으로부터 도피하여 산업사회, 물질문명, 이데올로기 집단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의 한 요소 내지는 부속품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원초적인 종교 의식을 망각하고 상실할 경우 인간은 더이상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행위하는 인격 주체이기를 거치고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리는 개인"으로 만족해 버리고 만다. 진지한 신앙심이 아니라 정치적 또는 경제적 목적을 위하여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과 종교와는 사실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다. 오늘을 절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공간,시간적인 지점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들이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해명하여 참다운 인격 주체의 전체적인 삶을 구성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현대인에게 있어서의 종교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정신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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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어지다
본뜻 : 종이나 천이 압력을 받거나 팽팽하게 당겨지면 그 압력 때문에 터져서 구멍이 뚫리거나 틈이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이 말을 사물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꽉 차서 터질 것 같은 일반적인 상황에 두루 쓰고 있다. 주로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많이 쓴다
미주알고주알
본뜻 : 미주알은 항문에 닿아 있는 창자의 끝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 속의 처음부터 맨 끝부분까지 속속들이 훑어본다는 뜻이다. '고주알'은 별 뜻 없이 운율을 맞추기 위해 덧붙인 말이다.
바뀐 뜻 : 아주 사소한 일까지 따지면서 속속들이 캐고 드는 모양이나 어떤 일을 속속들이 얘기하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시시콜콜히'가 있다
바늘방석
본뜻 : 말 그대로 바늘이 자리잡고 앉는 방석을 말한다. 요즘은 흔히 바늘꽂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명칭은 바늘방석이다. 바늘방석은 바늘을 꽂아 두는 물건으로서 속에 솜이나 머리카락을 넣어 만든다. 바늘이란 물건은 워낙 조그맣고 가늘어서 자칫 간수를 잘못하다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분실을 방지하느라 따로이 바늘을 꽂아 두는 작은 물건을 만들어서 거기에 꽂아 두고 쓰곤 하였다.
바뀐 뜻 : 오늘날에 와서는 본래의 뜻은 아주 없어지고, 바늘의 뾰족한 부분이 위로 꽂혀 있는 무시무시한 방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떤 자리에 그대로 있기가 몹시 거북하고 불안할 때를 가리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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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유럽의 16세기는 정적인 중세 문화와 사회를 떨쳐버리고 대내외적으로 약동하는 시기였다. 한편에서 신항로의 발견 이후 쏟아져 들어온 동방의 산물에 사람들이 들떠 있는가 하면, 지중해 연안의 이탈리아에서는 고전문화의 부활인 르네상스가, 북부유럽의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의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때 섬나라 영국에서는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 기이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은 이러했다. 신항로 발견으로 동방의 물품이 대량으로 유럽에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상품 역시 동방에 큰 시장을 갖게 되었다. 유럽의 상인들은 중세 이후 유럽의 최대 수출품인 모직물을 더 많이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모직물은 융단이나 코트에도 필요했다. 당시 유럽에서 모직물의 최대 생산지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방이었다. 플랑드르 지방은 그때 에스파니아 영이었다. 신항로 발견의 선두주자였던 에스파니아인들은 모직물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다. 그런데 플랑드르 지방은 토지가 부족해서 모직물의 원료인 양모를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이 지방에 막대한 양의 양모를 공급한 것은 에스파니아와 영국이었다. 에스파니아의 고원지대는 품질 좋은 양모로 정평이 나 있었다. 에스파니아의 양모업자들은 더 큰 이익을 노리면서 국왕의 특허를 받아 양떼를 고원에 풀어 놓았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베리아반도를 누비고 다녔다. 영국 역시 양을 키우기 위한 목장의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밭은 대부분이 농민의 보유지였다. 따라서 영주들은 양을 더 많이 키우기 위하여 농민들이 옛부터 공동으로 사용해 온 초원지대와 황무지에 눈을 돌렸다. 농민들의 공동지 이용권을 무시한 채 영주들은 그곳에 자기들의 양떼를 풀어 놓은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곳에 울타리를 둘러쳐서 농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를 '엔클로저 운동'이라 한다. 농민들은 자유로이 가축을 방목하고, 땔감을 위한 장작과 나무열매를 마음대로 이용하던 공동지를 영주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더 곤궁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인간이 양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저서 "유토피아(Utopia, 1516)"에 쓰여져 있다. "유토피아"는 영국의 대법관까지 지냈던 그가 젊었을 때 쓴 작품으로 지상의 어디에도 없는 이상국가를 그린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공상가는 아니었다. 농민이 양에게 잡아먹이는 것 같은 당시 영국의 현실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공상적인 이상국가를 제시함으로써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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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선생! 고무가 어디서 날 것 같소?
한국전쟁으로 재산을 몽땅 잃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집은 폭격을 맞아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수중에는 돈 한푼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세 자녀를 집터에 남겨두고 무작정 거리를 헤매었습니다. “이제 식구들을 어떻게 먹여살려야 한담....” 청량리 근처를 걷다가 지친 그가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전거에 폐타이어며 다 떨어진 고무신 등의 고무를 잔뜩 싣고 고물상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싱글벙글 웃으면서 돈을 세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 그는 고물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사람들이 고무를 들고 들어갔다가 예외없이 돈을 받아가지고 나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는 막 고물상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고무는 어디서 가져오는 것이오?” 그 사람은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더니 대꾸도 없이 자전거에 올라타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고물상 앞에 서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고무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고물상의 문이 닫힐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 것인지 알지 않고서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결심으로 고물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주인! 저는 부산에 피난 갔다 돌아와 벌써 이틀째 굶고 있습니다. 저는 참을 만합니다만, 집에 있는 노모와 어린 자식들은 굶길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저기 문 앞에 서서 보아하니 사람들이 고무를 가져와 이곳에 파는 모양인데, 도대체 그 사람들은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 것입니까?” 고물상 주인은 매우 불량스럽게 생긴 20대 후반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얌전스레 생긴 방문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식솔을 먹여살릴 수 있단 말이오? 난 당신이 아침부터 밖에 서서 이곳을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소. 사람들이 고무를 팔아서 돈을 챙겨 나가는 것을 보았으면 즉시 들어와 물어볼 것이지, 하루 종일 머뭇거리다가 이제서야 들어온단 말이오” 주인은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고는, 역시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청년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그는 문고리를 붙잡고 통사정했습니다. 그 청년이 그런 자세를 좋아할 것도 같았습니다. “주인양반! 그러지 말고 죽는 사람 한번 살리는 셈 치고 고무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좀 가르쳐 주시오.” 그가 목이 쉬도록 사정하자, 마침내 나이 어린 주인이 문을 열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여보시오, 선생! 고무가 어디서 날 것 같소? 오늘 돈을 받아간 사람들은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면서 고무를 주워 온 것이오. 간혹 홈쳐오는 놈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 저도 고무를 주워올 테니 수레 하나 만들 수 있는 바퀴 두 개만 빌려주시겠소?” 그에게는 자전거가 없으니 길에서 주운 고무를 주워 담을 수레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쇼! 여기서 만들어 가쇼.” 주인은 다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고, 그는 고물 더미에서 성한 바퀴 두 개와 나무 판자를 찾아 엉성하게나마 수레를 만들어서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고물을 주워서 그 고물상으로 날랐고, 그로부터 채 5년도 못 되어 상당한 재산을 모아 서울에서는 꽤 유명한 고물상 주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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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조광조와 정치 개혁의 드라마
소학 대감
개혁의지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정암 조광조는 성종 13년에 태어났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소년 시절을 혼탁의 극치랄 수 있는 연산군 시대의 암울했던 현상을 몸소 체험하면서 보냈다. 강상과 윤기를 치도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연산조와 같은 패덕의 시대가 생겨나는 것도 역사의 흐름이 빚어내는 필연의 결과일 것이다(독자들이여, 우리가 체험한 현대사와 비교하면서 음미해 주기를 바란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과 같은 수구세력을 창칼로 제거한 계유정란의 명분은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개혁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 13년은 개혁은 고사하고 쿠데타의 실세들을 새로운 기득권세력으로 만들어 내는 시시였다. 세조는 자신의 측근들이 자행하는 비리와 축재를 관대히 묵인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철저하게 비호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기득권 세력에 의해 자신의 왕권유지가 위험지경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조는 말년에 이르러 기득권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 세력(귀성군, 남이, 유자광 등)을 양성하려 했으나, 자신의 죽음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조 (재위 1년)에 이르러 귀성군과 남이는 유자광이라는 새 기득권 세력(어제까지는 동지였지만)에 의해 무참한 종말을 맞게 됨으로써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예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13세의 어린 보령으로 또 다른 기득권세력(한명회, 신숙주 등)에 의해 옹립되었고, 그의 치세는 이른바 원훈의 자리를 굳히고 있던 계유정란의 주역들이 뿜어내는 경륜, 아니 그들의 전횡과 독단에 의해 태평성대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대항할 개혁세력이 고개를 들지 못했던 것은 권력의 핵이랄 수 있는 세조비 정희왕후와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한명회의 안사돈)의 철저한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산조의 탄생은 기득권 세력의 배후인물인 인수대비의 불호령에 대소신료들이 무릎을 끓었던 결과였음은 앞장에서 거론한 바와 같지만, 관원들의 창의력이 퇴화되고 줄 서기에 능해야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시대라면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세력의 태동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조광조가 16세 되던 해(1498)에 당대의 양식 집단이었던 사림들이 일거에 참살되는 '무오사화'의 참극을 지켜보게 된다. 이때 조광조는 아버지 조원강이 찰방으로 있는 어천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무렵 무오사화에 희생된 김굉필이 희천으로 유배되어 온다. 호가 한훤당인 김굉필은 당대의 대유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사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데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보다 더 급한 것은 없고 사람을 가리고 유능한 사람을 뽑는 데는 소인들에 가리워지고 통하지 않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없다. 사림이 핍박을 받으면 나라의 경영이 온전할 수가 없다는 김종직의 인재론이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가 되어 그의 사상을 전수받게 된다. 후일 조광조가 이상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이른바 '도학정치사상'과 '군자소인지론'과 같은 정심법으로의 접근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터득하고 다듬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성급한 것 같지만 그의 '군자소인지론'의 핵심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재이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데 있다. 사실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소인은 군자를 소인이라 하고, 군자도 소인을 소인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인은 주야로 군자를 공박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소인은 인주(임금)와 의 접견시에 예모를 갖추고 좋은 말로 수식함으로써 그를 가려내는 것은 용이 할 수가 없다. 참으로 기막힌 말이 아닐 수가 없다. 개혁이란 군자연하는 소인의 무리를 다스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같은 소인의 무리를 분별해 내기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소인의 무리는 권력의 주변에서 서식하면서 언제나 듣기 좋은 말로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칼로 기득권 세력을 몰아냈던 계유정란으로부터 연산조로 이어진 기득권 세력은 공교롭게도 '중종반정'이라는 쿠데타에 의해 몰락된다.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박원종 등의 실세들은 또 다른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개혁의지는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퇴색한다. 타의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중종은 새로운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한 '정국공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에 급급했고, 기득권 세력의 오만은 점차 친인척의 비리로 확산되어 갔다. 조광조가 진사시에 장원하고 성균관 적을 두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때 이미 그의 학문과 인품은 원숙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조정의 고위관직 중에서 그나마 양식을 대변하고 있던 이조판서 안당은 무력해진 조정에 새로운 기운을 진작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신진사류의 특채를 시도하였다. 그러자니 성균관 유생 중에서 믿음직한 인재들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선발된 사람이 조광조를 비롯한 김식, 박훈 등 세 사람이었다. 과거에 등과하지 않은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는 것은 선대의 공훈에 힘입어 음서의 혜택을 적용받는 것이 상례지만, 위의 세 사람은 음서의 혜택이 아니었으므로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34세의 조광조에게 주어진 첫 관직은 종6품의 벼슬인 조지서의 사지였다. 맡은 임무는 별것이 아니었어도 남의 부러움을 사서 마땅히 등용이지만, 조광조는 이를 탐탁히 여기질 않았다. 이 무렵 조광조는 "소학"을 몸에 지니고 다닐 만큼 애독하고 있었다. 결과론이지만 조광조는 성리학의 거벽으로 추앙받게 된다. 이미 그의 학문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음에도 "소학"을 들고 다니면서 애독한 것은 모든 고전의 엣센스만을 간추려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소인배들은 바로 이점을 비아냥거렸다.
일부소학항근독 가지공명자연내(일부의 소학을 부지런히 읽으라. 사지의 공명이 절로 올지니)
조광조는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따가운 눈초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맡은 소임에 열중하면서 과거에 응하기로 다짐한다. 정정당당하게 입신의 길을 열어 나가기 위한 비장한 결기였다. 마침내 중종 10년 8월 22일에 시행된 문과전시에서 조광조는 차상의 성적으로 등과하였다.(조광조가 장원급제하였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 등과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직으로 승진한다. 성균관은 그에게 있어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문학과 인품은 익히 알려져 있었으므로 옛 동료들과 후학들은 조광조를 따뜻이 맞아 주었다. 그러므로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들과 신진사류의 중심인물로 급부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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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곤란한 일과 마주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을 보면 흔히 말로써 힘를 북돋아 준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7장 7절 이하에 나오는 말로 '산상수훈'의 일부. "구하라 주어질 것이요, 찾아라 찾아질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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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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