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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24 호
단기 4340. 2. 03 (음력 12.16)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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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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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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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논란이 분분한 문제에 관해 역성들지 않고 사리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유머감각이 풍부한사람. / 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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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三章 (노자 - 도덕경 : 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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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총욕약경 귀대환약신 하위총욕약경 총위하득지약경 실지약경 시위총욕약경 하위귀대환약신 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급오무신 오유하환 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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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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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셋째 장
직역
총애나 욕됨을 놀란 것 같이하라.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자신의 몸같이 하라. 총애나 욕됨을 놀란 것 같이 하라는 것은 어떤 말인가. 총애는 아래로 하는 것이니,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 같이하고,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 같이하라. 이것을 일컬어 총애를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는 것이다.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자신의 몸같이 하라는 것은 어떤 말인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내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 같이 천하를 여기는 자는,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천하를 여기는 자는,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은 것이다.
해석
총애는 임금이 신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자간에 지배와 복종이 성립하는 관계이다. 이 총애는 상대를 자신의 수하로 만들 때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총애는 다시 욕됨으로 변한다. 상대가 자신의 수하이기를 거부하게 된다면 강제력을 동원한다. 노자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총애를 받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천하를 근심하는가. 남을 근심하는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근심은 자신에 대한 근심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이 안되고 있음을 비판하는가. 그리고 자신이 한다면 더 잘할 것이라고 말을 하는가. 그런 사람에게 남이 하던 일을 맡기면 그는 다시 자신이 하던 일을 근심한다. 결국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기에 자신의 근심을 먼저 살피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근심을 아는 자는 천하의 근심을 해결 할 때 천하의 근심만 걱정을 한다. 다른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 그대들은 국어 공부를 한다. 그런데 그 시간에 영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을 한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할 때 그대들은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걱정을 한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진심을 다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시각이 또 있다. 자신을 아끼지 않는 자는 남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천하를 맡기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천하에게도 잔인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에게 잔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잔인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하를 맡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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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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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총애와 굴욕도 자같이 조심스럽게 대하여야 한다. 큰 근심(대우)을 소중하게 대하기를 자신의 몸을 돌보듯이 하라. 왜 총애도 굴욕도 다같이 조심스럽게 대하여만 하는가? 남을 섬기는 사람을 총애를 받아도 조심하고 굴욕을 당해도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총애도 굴욕도 조심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큰 근심 다루기를 제몸 돌보듯이 하라고 하는 가?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은 내몸(생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육신이 없게 되면 무슨 근심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육신을 돌보듯이 천하를 소중히 대한다면 그런 인물에게 천하를 기탁하려도 무방할 것이다. 자신의 몸 아끼듯이 천하를 사랑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천하를 맡게도 좋을 것이다.]
주
총욕: 총애와 굴욕을 뜻함. 총과 욕을 동전의 양면처럼 표리일체로 보고 , 총이 욕의 밑바탕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음. 약경: 놀라는 것처럼 대한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조심한다는 뜻임. 위하: 남을 섬기는 사람 즉 신하를 뜻함. 기: 맡긴다, 기탁한 다의 의미임.
해
남의 신하된 자는 흔히 임금의 총애와 굴욕에 얽매어 일회일비하고 있다. 그러나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속에 화가 숨어 있다. 오늘의 음지가 내일은 양지가 될 수 있고 이와 반대로 기쁨이 다하면 슬픔이 오게 된다. 인생 만사는 새옹지마인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묘미가 있다.그러므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너무 마음을 집착한다는 것은 인생을 근시안적으로 보는 것이 된다. 신하된 자는 모름지기 항상 몸가짐을 신중히 하며 총애와 굴욕은 순환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제몸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천하를 제몸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여기고 천하의 백성을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천하를 맡겨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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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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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1장 선각의 인맥
역매 오경석과 불우한 천재 고람
역매 오경석이 어려서부터 그의 집안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우선 이상적에게 글씨와 시문을 지도 받고, 서화의 안목도 높일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가 청나라를 드나들기 직전인 스물 안팎 때의 가장 가까웠던 선배로서 그의 시문과 서화를 늘 예리하게 비판해준 사람은 당시 시·서·화 삼절의 혜성 같은 천재였던 고람 전기였다. 역매보다 불과 여섯 살 위였건만 그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고, 그 때문에 서울 장안의 서화 애장가와 수집가들이 줄곧 그에게 감정과 평가를 의뢰해 오곤 했었다. 역매도 집안에 들어온 서화폭들을 언제나 그에게 보였던 것 같다. 그때의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흥미있는 고람의 편지들이 전해지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위창 오세창이 1879년에 작고한 아버지 역매의 생활기록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고람의 편지들을 서첩으로 꾸민 듯한 (위공소찰)(이겸로 소장)이라는 책자가 그것이다. 역시 위창의 부탁으로 서첩의 표제를 쓴 듯한 몽인 정학교(서울 광화문의 현판을 쓴 당대의 유명한 교양인이며 서화가)가 표제 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고 있다.
"위공이 역매와 주고 받은 편지들이다. 40년 전의 일로서, 손님이 앉은 자리에서 얘기를 하면서 아무렇게나 휙휙 쓰던 때가 어제 같은데, 지금 그 글씨들을 대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몽인은 쓴다."
앞의 발문으로 미루어 몽인은, 갓 서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요절하였으나 천분의 재예와 안목으로 출중했던 고람을 그의 가난한 생활의 방편이었던 한약방으로 자주 찾아간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몽인은 고람보다 일곱 살 위였다. 그런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창도 그에게 특별히 (위공소찰)의 서첩 표제를 간청했던 것 같다. 다음에 편지 내용을 몇 대목 소개해본다(모두 고람이 역매에게 써 보낸 것).
"담계와 석암-중국의 유명한 서화가들-의 대련 2폭을 어제 저녁에 권군이 가지고 왔는데 우선 여기 놔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당신의 감정이 틀림없는 것 같다. 책 2권을 받았다." "어제 보낸 서화 12폭 중에서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정수첩)(화첩인 듯) 1권뿐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표(청대의 유명한 화가 황진)의 족자는 돌려보낸다." "며칠 앓고 일어났다. 마침 부득이한 용차가 있어 부탁하니 가진 것이 있으면 20냥만 4∼5일간 빌려줄 수 없겠소? 이런 일을 부탁하니 미안하오." "보내준 예서 대련(역매가 써 보낸 글씨)은 재기가 넘쳐서 매우 좋은 데가 있다. 그것만 가지고도 세상에 이름이 날 만하나, 그러나 붓을 뉘어서 쓰고 중봉(붓의 중봉)을 많이 쓰지 않았고, 짜임새도 어색한데가 있어서 조금 흠이다. 한대의 비첩을 많이 보고 문자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한다면 옛사람 부끄럽지 않겠다."
이 편지 내용만 보아도 청나라를 드나들기 전까지 역매는 고람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모든 것을 상의하면서 교양과 안목에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19세기 중엽, 서울에서의 국내외 신·구 서화의 유전 및 감정·평가의 내막을 알려주는 고람의 흥미있는 편지들은 (위공소찰)로 묶여진 것 외에도 또 하나의 묶음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돈 많은 수집가였던 모양인 경연재라는 사람(이름은 불명)이 고람에게 서화의 감정 및 검토를 부탁했다가 받은 편지들인데, 이것은 역매의 경우와는 달리 수신인 자신이 생전에 서첩으로 꾸몄음이 분명한 것이, 표지에 '두당척소' 라 쓰고 그 아래에는 '경연재 심장' 이라 적고 있다(임창순 소장). '두당' 은 고람의 별호였다. 이 서첩에는 당시의 그림 값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밝혀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특히 흥미롭다.
"(보내온 그림의) 8폭은 보잘 것이 없다. 살 것이 못 되나 40냥 부른 것을 수차 흥정하여 24냥까지 내려갔는데, 그 이하는 나로선 다시 얘기하기가 어려우나 원한다면 다시 한번 물어보겠다." "설재의 그림은 값이 15민(냥)이라는데 주인이 도로 찾고 있다(경연재가 가져갔던 듯). 도로 보내라. 그림도 그다지 좋지 않다. 모처(추사나 우선 같은 최고의 안목인을 가리킨 듯)에 감정을 의뢰했다간 코웃음을 받을 게다. …요새 들으니 구리개(지금의 서울 을지로) 이첨정 집에 서화 수십 종이 있다는데 들은 적이 있는지? 가서 보고 싶다. 볼 길이 없을까."
역매가 역관으로서 청나라에 첫발을 디딘 것은, 고람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천재의 생애를 마치기 1년 전인 1853년의 일이었다. 이후 1879년에 4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10여 회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했고, 그러는 동안 중국의 서화·골동품·금석문 탁본 등을 무수히 수집해 가지고 옴으로써 서울의 서화가와 교양인 사회의 중국문화 접촉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그는 저쪽의 새로운 문명서적들도 계속 가져옴으로써 이 땅의 개화사상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역매는 그의 교양생활의 중심이었던 귀한 서화 컬렉션을 더불어 감상하고 즐겨주었어야 할 고람이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는 사실에 고독을 금치 못했던 것 같다. 만년에 남긴 문집 (천죽재차록)에서 역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계축년(1853년)부터 갑인년(1854년)에 걸쳐 비로서 연경에 원유하게 되면서 여러 박아지사와 교유하고 견문을 더욱 넓히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원·명 이래의 서화 110여 점을 구득하게 되고 삼대, 진·한의 금석문과 진·당의 비첩도 또한 수백 점을 모았다. 비록 당·송의 진적을 얻지 못한 것이 유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압록강 이쪽에서는 자랑할 만하다. 내가 이것들을 얻는 데는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걸렸고, 또 그것들이 천만리 밖에서 모아들인 것이니 마음과 정신을 크게 쓰지 않았던들 참으로 쉽사리 얻을 것이 못된다. 나와 같은 벽을 갖고 있던 사람이 전기 공이었는데, 불행히 일찍 죽어서 내가 수장한 것을 미쳐 보지 못하였다. 죽은 그를 다시 살려서 같이 토론하며 감상할 수 없을까. 이것을 쓰면서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
청나라를 드나들던 초기인 1858년에 역매는 저쪽의 금석한 연구가인 유희해의 (해동금석원)과 추사의 (금석과안록)에 자극을 받은 듯 금석학 취미와 각별한 관심으로 (삼한금석록)이라는 자그만한 책자를 엮었다(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내용은 추사가 이미 독자적으로 발견하고 고증하여 그의 (금석과안록)에 기록한 '신라 진흥왕 정계비' 와 역시 추사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고증한 바 있는 '평양 성벽석각' 등의 국내 금석문을 원문으로 모으고 거기에 약간의 해설과 청나라 및 국내학자들의 논평을 곁들인 것이었다. 당시 역매의 나이 28세였다. 역매의 (삼한금석록)에 처음으로 기입된 '평양 성벽석각' 금석문은 추사가 44세 되던 해인 1830년에 묘향산을 탐승하고 돌아오다가 평양의 옛성벽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 그의 예리한 고증학적 안목은 성벽에 끼어져 있던 깨진 옛 석각편에서 '물하소형' 등 마멸이 심한 20자 내외의 글자를 판독했을 뿐인데도 자체의 고법과 단편적인 고구려의 관직명을 들어 '틀림없는 고구려의 금석문' 이라고 갈파했었다. 그런데 이 '평양 성벽석각' 은 그후 언제 어떤 경위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양의 성벽에서 떼어져 서울로 운반되었다. (삼한금석록)을 적을 당시에 역매가 그것을 직접 입수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훨씬 뒤에 위창이 수집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10년대 중엽의 신문기사는 그 귀중한 석각문화재를 위창이 애장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오늘날 남한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 금석문인 이 성벽각자는 1965년에 이화여대 박물관에 들어갈 때까지 위창 집안에서 갖고 있었다. 위창은 역매가 수집한 국내외의 풍부한 미술품 컬렉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외아들이었다. 그리고 이 위창이야말로 한국의 서화시와 기타 민족문화재 연구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최초의 근대인물이었다. 그는 서화와 갖가지 진귀한 문화재가 모아져 있는 선택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미의 안목을 높일 수 있었고, 또 혈통적으로 타고난 취미는 그로 하여금 뒷날에 가서 근대적인 서화 연구의 개척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중국 것이 중심이었던 아버지의 수집품에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고 수집한 희귀한 고서화들을 보탬으로써 2대에 걸친 최대의 컬렉션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서화만을 높이 사려고 했던 그전까지의 문화식민지적인 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이 땅의 민족 서화사 기록들을 가능한 모든 문헌에서 찾아내어 정리하는 한편 유존하는 고서화들을 파악 혹은 수집·보호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선각적인 민족사관과 주체의식은, 수집가이자 개화파의 외교관으로 대원군의 쇄국세력 밑에서 박규수 등과 개국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성공시킨 배후의 주역자였던 아버지 역매의 행동적인 사상에서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자각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한국의 서양문화재와 기타 모든 문화유산에 대한 근대적인 재인식과 민족적 자부는 전적으로 위창 오세창의 학구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은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싹텄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새로운 사상과 견식의 성장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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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4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
7.구성으로서의 앎
거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산과 들에는 새싹이 돋아나며 버러지들도 땅속에서 기어나오고 사람들도 활기를 되찾고 화사한 옷차림을 한다. 산과 나무와 나비와 새와 구름과 사람은 어떻게 보면 세계 자체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를 대우주라고 한다면 인간은 소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는 스스로 표현하지만인간은 자신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표현한다. 인간만이 자신과 아울러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동물이다. 칸트도 이미 말했지만 인간의 앎은 인간 스스로가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앎은 형식적인 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이며 창조적인 사고에 의해서 구성된다. 칸트는 앎의 보편성이 감성 형식과 오성 형식이라는 틀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보았지만, 앎의 보편성은 창조적인 사고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1자아라는 것은 과연 있는 것인가? #2있다면 그것은 물질적인가 아니면 정신적인가? #3인간이 창조적인 존재라면 당연히 정신적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기 마련이다. 물음들의 순서에 맞게 우선 첫번째 물음, 자아라는 것은 과연 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자연 과학이나 감각 경험을 바탕으로 삼는 사람들은 인간의 고유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 비하여 인간에게 이성 능력을 부여하는 사람들은 각 인간에게 고유한 자아를 인정한다. 얼른 생각할 때 누구나 "나"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기 싶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도 다른 동식물처럼 자연적으로 성장한다면 인간 역시 물질의 합성 및 그 작용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인간에게는 자아가 있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이성을 인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생리학자들은 말초 신경과 중추신경, 다시 말해서 손과 발 그리고 두뇌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인간의 행동이 이루어지며 그러한 작용의 결과 중 하나를 우리들이 자아라고 부른다고 주장한다. 그러하면 인간에게 고유한 자아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고 물질적인 작용과 결과만이 중요시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쟝글 북>에 등장하는 늑대 소년과 같은 경우에는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한다. 그러나 인간을 삶 전체로 볼 경우 삶의주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행동의 주체, 양심과 자유 및 앎의 주체가 있다면 그러한 주체야말로 인간의 자아가 아닐 수 없다. 늑대 소년이 달밤이면 늑대처럼 울부짖고 짐승을 날로 먹고 네 발로 기어다닌다고 해서 늑대 소년을 늑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들이 유와 종을 구분하며 특히 인류를 다른 유와 구분하는 것은 #1인간의 생물학적인 복잡성과 동시에 #2인간만이 소유한 창조적이며 구성적인 능력을 인정하기 대문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달리 달과 별을 그리고 소나무와 장미꽃을 노래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대상을 창조적으로 구성한다. 자연 과학적인 입장과 이성적인 입장은 모두 극단적인 입장이라고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의 창조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적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며 동시에 세계를 창조한다. 창조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듯이 하느님이 없는 것에서 있는 것들을 만들었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창조한다는 것은 구성한다는 말이다. 식물이나 동물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자연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나 인간은 벌써 자연을 자연과 대립하는 대상으로 구성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대상으로(생각되는 나로) 또 하나는 주체로(생각하는 나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앎은 창조적인 자아의 자기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창조적으로 대상이나 사태에 대한 앎을 구성하므로 각자는 인격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고유성 속에서 앎과 삶의 상호 관계를 끊임없이 구성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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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괄괄하다
본뜻 : 이불 호청이나 옷 등에 풀을 먹일 때 풀기가 너무 세서 빳빳하게 된 상태를 '괄괄하다'고 한다.
바뀐 뜻 : 풀기가 빳빳한 것같이 급하고 억센 성품이나, 목소리가 크고 거센 것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구년묵이(구닥다리)
본뜻 : 흔히 오래 묵은 물건을 구닥다리라고 부르는데 '구닥다리'라는 말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말이다. '여러 해 묵은 물건'이나 '어떤 일에 오래 종사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이 낡은 것이 된 사람' 등을 얕잡아 이르는 말은 '구년묵이'다
바뀐 뜻 : '구년묵이'라는 표준어보다 '구닥다리'라는 비표준어를 훨씬 많이 쓰고 있지만 '구닥다리'는 비표준어이므로 글이나 말 중에 쓰지 않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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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아들아! 너마저도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한 카이사르는 독재관이라고 하는 공화정체상의 지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차츰 왕위에 대한 열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의 측근들 또한 그 열망을 부추겼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왕'이라는 칭호에는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것은 정치이론이기에 앞서 로마인의 정서 문제였다. 그럼에도 카이사르의 측근들은 은근히 그를 '왕'으로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한자리 하기를 바랬다. 기원전 44년 2월 15일 루페르칼리아 축제 기간에 있었던 에피소드에는 그들의 본심이 잘 반영되어 있다. 루페르칼리아는 원래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였다. 그 기간에는 젊은 귀족과 고위정무관들이 벌거벗고 시중에 뛰어다니며 아무든지 가죽끈으로 닥치는 대로 때리는 관행이 있었다. 그 가죽끈에 맞으면 임산부는 순산을 하고, 불임여자도 임신하게 되는 효험이 있는 석으로 믿어졌다. 그래서 여자들은 일부러 그 가죽끈에 얻어맞으면서 좋아하곤 했다. 그해의 집정관이었던 안토니우스도 벌거벗고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포룸에서 구경하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달려가 월계수로 만든 왕관을 바쳤다. 그런데 미리 짜고 배치해 두었던 자들만이 군데군데서 박수를 쳤을 뿐, 그들이 예상했던 박수갈채는 일어나지 않았다. 냉담한 분위기를 의식한 카이사르가 관을 거절하면서 되돌려주자, 모여섰던 무리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몇 번 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측근들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고, 이 사건은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의구심만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다. 특히 로마의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판단했다. 이 무렵 카이사르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중심 인물은 명문귀족은 출신인 그해의 법무관 브루투스였다. 그는 전쟁터에서조차 시간이 나면 막사 안에서 책을 읽을 정도로 학문을 좋아했고,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폼페이우스에게 살해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원한까지 버리고 파르살로스 전투에서는 폼페이우스 편에 가담해서 카이사르에게 맞서기까지 했다. 공화국을 위해서는 카이사르보다 폼페이우스가 이로운 존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하고 나서 그를 추종하던 측근 세력들은 카이사르에 의해 제거당했지만, 브루투스는 사면되었다. 카이사르는 특히 그를 아끼고 사랑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의 청년시절 애인이었는데 그녀가 결혼한 이후에도 카이사르와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유지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원로원에서 대역죄를 범한 카틸리나파의 처벌을 둘러싸고 세르빌리아의 남동생 소카토와 카이사르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심부름같이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건네는 것을 본 소카토는 그것이 필시 카틸리나파에서 보낸 밀서라고 여기고 편지를 빼앗았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누님이 카이사르 앞으로 보낸 편지였는데, 그 안에는 읽는 이의 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노골적인 묘사가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애인의 아들이었던 브루투스를 카이사르가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은 이해가 갈 만하다. 브루투스 역시 카이사르를 잘 따랐다. 두 사람은 혈연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아마 서로가 부자관계 이상의 신의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브루투스를 카이사르 암살모의에 끌어들인 사람은 브루투스의 매형이자 열렬한 공화파였던 카시우스였다. 그들의 주위에 차츰 음모에 동조하는 귀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거사 날짜는 3월 15일, 장소는 원로원 의사당으로 정해졌다. 그날 원로원에서는 이탈리아 밖의 해외 속주에서 카이사르를 '왕'으로 칭하는 결의안이 제출될 예정이었다. 암살음모를 예감한 카이사르 측근들과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정 시간보다 좀 늦게 의상당에 도착한 카이사르에게 귀족들이 칼을 빼들고 떼지어 달려들었다. 최초의 일격을 가한 것은 원로원 의원 카스카였다. 그러나 누구도 카이사르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칼을 피하면서 저항했다. 그러나 단검을 쥔 브루투스를 보자 그는 체념했다. 그리스어로 "내 아들아, 너마저도!" 라고 한 것이 쓰러지면서 한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로마제국 시대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69-140)의 "12황제전 :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말을 널리 유행시킨 장본인은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쓴 세익스피어였다. 23군데 칼을 맞은 카이사르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장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정적 폼페이우스의 동상 아래였다. 카이사르는 자기와 마지막으로 세력을 다투었던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카이사르가 대사면을 통해서 남은 정적들을 자기 편으로 받아들인 것은 내전으로 분열된 로마 시민들을 다시 통합하고 로마공화국의 안정을 꾀하는데 시의 적절한 조치였다. 그가 제대병사들과 로마시의 무산시민들에게 토지를 주어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했던 것도 로마공화국의 재건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성공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야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로마는 카이사르와 더불어 새로운 도약의 길로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금기로 여긴 '왕'이 되려 했고, 그 칭호를 속주로부터 시작해서 공식적으로 취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파멸한 원인이었다. 역사 속에는 영웅이 자신의 야심을 이기지 못해 비극을 맞는 경우가 무수히 많다. 불의를 행할 때 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자기의 측근 심복이라는 것을 역사는 여러 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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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그대를 업고서라도
1980년대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눈이 발목까지 차는 다소 추운 날, 나는 뉴욕 맨해튼의 브라이언트 공원 벤치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온 외국 학생들 10여 명이 유엔 본부를 시찰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열서너 살 먹은 필리핀 학생부터 러시아에서 온 60대의 학생도 있었습니다. 칼럼비아, 뉴욕, 뉴스쿨, 포담, 뉴욕 시립대 등에서 언어 연수를 받고 있거나 전공 과목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나를 제외한 또 다른 한국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른 살의 유형은 막 랭귀지 코스에 적을 두기 시작했지만, 다음 학기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경영학도로서 농부같이 거친 외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그맣고 깡마른 몸에 등이 조금 앞으로 휘었고, 새까만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악수를 하고 나눈 짤막한 대화는 나로 하여금 그가 `밥맛 떨어지게 하는 놈`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게 했습니다. 아마도 외모에서 느껴지던 소박하고 겸손한 맛이 지나치게 자신있는 말투에 묻혀버렸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는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주일 전쯤에 도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3개월 먼저 미국에 온 나에게 뉴욕에 대해 아는 것이 무척이나 많은 척을 해댔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화나게 한 것은 토플 시험에서 겨우 480점 정도의 빈약한 점수를 받은 그가, 뉴욕에는 경역학으로 좋은 학교가 별로 없다면서 MIT나 예일 대학으로 전학가겠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 점수 가지고는 명문 대학아니라, 사실 B급 경영대학원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정도 영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경영대학원 입학의 필수 시험인 GMAT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를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미국에서 유학생들이 성공적으로 경영학을 전공하려면 영어뿐만 아니라 통계학이나 기본적인 수학 실력도 갖추어야 한다고 약올렸습니다. 대충 말을 들어보니까 그는 한국 사람들이 여러 과목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통계학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만남에서 대단히 치졸한 인간이 되어버린 나는 아파트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비록 거북스러운 첫인상을 풍기기는 했지만 유형에게는 매우 정직한 면이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토플 시험에서 550점 이하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유학생을 만난 기억이 없었습니다. 460점을 받아도, 500점을 받아도 모두 부풀려 말하며 허풍을 떠는 것이 바로 한국 사람이니까요. 어쨌든 나는 그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그 주 토요일 오후, 나는 소형 카메라를 사러 브로드웨이에 나갔다가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42가 쪽으로 걸어오는 유형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나는 얼굴을 피하고 싶었고, 그도 아마 나의 그런 마음을 알아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방향을 틀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와 나 사이에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나와 그는 어색한 눈웃음을 교환하며 형식적으로 아는 척을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는 몇마디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얻어놓은 아파트의 수리가 끝날 때까지 싸구려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고는, 별다른 말이 없이 손을 흔들어 잘 가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서너 발자국을 옮기더니 고개를 돌리고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아내가 내일 오니까 다음 주중에 만나서 밥이나 같이 먹읍시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자신만만해 하는 걸 보니 저 친구가 자랑할 것이 많은 여자를 마누라로 얻은 모양이군.`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친구에 대해 비위 상할 일이 도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은근히 걱정스러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나도 모르게 그러자고 했습니다. 아마도 마음이 쓸쓸하여 대화 상대가 그리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42가에 있는 뉴욕 공공 도서관에 들러 자료를 찾아보고는 그가 영어 연수를 받는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약속 시간은 그의 수업이 끝나는 초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보잘것없는 그 대학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웃기는 녀석`과 실없는 약속을 한 것이 후회스러워, 커피를 입 속으로 쏟아붓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리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유형의 모습은 쉽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장신의 미국 학생들 가운데 파묻혀 다가오는 그는 반 토막 성냥개비처럼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나는 사실 그의 아내가 어딘가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그러지 않은 척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듯 여겨지는 동양 여자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오른쪽 무릎에 두 손을 대고 안쓰럽게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힘겹게 걸어오는 여인이 보였습니다. 너무나 의외였지만 그녀가 그의 부인임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부터 그와 아주 오랫동안 사귀어온 것처럼 부담없이 말을 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심하게, 아주 심하게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지만 말에 재치와 교양이 넘쳐흘렀고, 오히려 다른 여성들보다 표정이 더 밝아 보였습니다. 얼굴도 그만하면 미인 축에 든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버거킹에 가서 와퍼 햄버거와 커피로 저녁을 때우고, 허드슨 강변으로 나가 산책을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낭만을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이틀이 멀다 하고 자주 만나 먹고 마시고, 그리고 잡담을 즐겼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와 그가 사는 아파트의 거리는 걸어서 20분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내가 국수를 삶는다고, 혹은 겉절이를 담갔다고, 아니면 자기 학교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이 온다면서 나를 수시로 불러댔습니다. 한끼 한끼를 어떻게 때워야 하나로 고민하던 나는 전화를 받으면 부리나케 그의 아파트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어느새 허무맹랑하게 비쳐지던, 매사에 자신만만한 그의 말에 독설로 반격해 실망시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의 말을 듣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그리 흔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어느덧 그의 말을 즐겨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번한 회합은 수개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유형은 봄이 되면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긴 했지만, 유형이 어디 갔는지 말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한국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와서 뇌까리던 그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라고, 그를 아는 유학생들은 입술을 삐죽거렸습니다. 그의 아파트 주변에서 혼자 사는 늙은 유학생들이 주로 그랬습니다. 툭하면 불러서 밥을 먹여주던 짓을 딱 끊어버렸으니 고마웠던 생각보다는 섭섭한 마음이 먼저 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밤 야채 가게에서 밤새도록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채 가게 일이 얼마나 힘든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해병대 출신의 한 유학생은 두 달 만에 코피를 쏟고, 야채 가게 일에 비하면 군대 훈련은 저리 가라 할 정도라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그 일이 힘들면 잠시 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기기도 했습니다. 손님이 남기고 간 팁을 놓고 다른 직원들과 다투었다고 신경질이 난다면서 나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가 돈에 무척이나 쪼들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전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학기 등록 기간에 나는 그의 부인의 손에도 등록 카드가 들려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등록한 후 같이 식사나 하자면서 나를 자신의 학교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랭귀지 코스를 마치고 경영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동안 아내가 무척 심심해 했다면서, 그녀와 함께 공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랭귀지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두 건씩 뛰고, 그것도 모자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사무실 청소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랭귀지 코스를 거치면 자신과 같은 시기에 졸업할 수 없다면서 학교 당국에 랭귀지 수업을 면제해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학교 당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으려거든 다른 학교로 가보라는 말을 듣고, 그는 부인의 담당교수를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그의 진지함과 집요함에 감동한 교수가 랭귀지 코스 담당자를 직접 만나 그녀의 영어 부족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보장해 주고는 바로 정식 과목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42가 부두로 나가 허드슨 강을 따라 맨해튼 섬을 한 바퀴 도는 서클라인을 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에게는 애틋한 사연이 숨어 있었습니다. 유형은 지방의 어느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괜찮은 대학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서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모 대학 경영학과로 편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학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팔 다리가 부러지고 혀까지 말을 듣지 않아 전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그는 휠체어에 앉아 병원 뜰을 산책하다가 자신처럼 휠체어에 앉아 햇빛을 쬐는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파리한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휠체어 바퀴를 굴려 그녀에게 접근해 갔습니다. 그리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메모지에 글을 써서 무슨 일로 병원에 들어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았는데 성장해서도 가끔씩 아프다고 했습니다. 고통이 심할 때는 병원에 수개월씩 입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연극 관람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 후로 자주 만났습니다. 병실에 있다가도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밖으로 나와 서로를 찾았습니다. 간호사들은 그들이 병실에 없으면 아예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줄 알고 밖으로 나와 약을 주고, 때로 간단한 주사는 그 자리에서 놓았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사랑이 싹트게 되었고,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찌감치 퇴원하였고, 유형은 그로부터 반 년이나 더 병원에 있다가 퇴원햇습니다. 그 동안에도 그녀는 그를 거의 매일 면회 오다시피 하며, 어젯밤에는 무슨 연극을 보았는지 등의 전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습니다. 유형은 팔다리는 완치되었지만 말은 여전히 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그의 상태가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완벽하게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절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성학 책을 구입하여 혀의 구조 그림을 보면서 혀 밑에 볼펜을 집어넣고 발성 연습을 했습니다. 그토록 눈물겨운 노력 끝에 그는 1년 반 만에 완벽하게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에게는 결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더니 그만 만나자는 간단한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당신이 싫어졌으며, 생각이 진보적이지 못하고 행동력도 없는 당신 같은 남자에게 인생을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유형은 그 말이 그녀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형은 진보 그 자체라 할 정도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행동력이 없기는커녕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 나가 골치 아픈 일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형은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자,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를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는 친구로부터 그녀가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 사람은 얼마든지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을 수 있어. 병원에서 한 부질없는 약속으로 그를 붙들어 두고 싶지 않아. 그는 나를 잊어야 해”라고 하면서 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형은 그 친구에게 사정을 해서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 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달려가 당장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유형이 자신을 찾지 않을 줄 알았다가 직접 찾아오자,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유형은 부모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혼을 발표해 버렸습니다. 부모들은 기절할 듯이 펄펄 뛰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도망쳐 나와 부모의 허락도 없이 동거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부모와는 연락이 일절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건강하고 예쁜 딸이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밤 10시경, 유형은 나에게 전화를 주었습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우드사이드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밤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걸어서 그 커피숍으로 갔습니다. 그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아주 못된 성질을 가졌다고 흉을 보았습니다. 툭하면 이혼하자면서 프라이팬 등을 집어던지며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얌전하고 교양있는 부인이 그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한국에 두고 온 딸이 보고 싶다면서,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서울로 돌아가겠다며 투정을 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할머니가 키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두 사람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고통도 참아가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그러면 슬퍼진다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사실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자격지심에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특히 유학생 모임에 나갔다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와서 자기와 깔깔거리면서 대화 나누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겐 아내밖에 없으며 죽을 때까지 아내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형은 돈도 별로 없으면서 자주 부인을 택시에 태우고 연극 구경을 다녔습니다. 뉴욕은 연극의 메카로 불리는 곳이니 연극을 좋아하는 그의 부인이 집안에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유형이 학교에 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면 그녀는 혼자 브로드웨이로 가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가 할인권을 구해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녀가 쉬지 않고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겨우 50미터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걸었다 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어딜 가려면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겨울에도 비지땀을 흘리며 유형과 함께 다녔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관람이 끝난 야밤에 유형은 집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5번가를 따라 걷기를 좋아했습니다. 때로는 그리니치 빌리지 안에 있는 커피숍에 가서 분위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당신,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그 유명한 에드거 앨런 포가 폼을 잡고 앉아서 글을 쓰던 바로 거기야. 당신, 에드거 앨런 포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 그러면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식으로 무시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등에 업고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거리를 쏘다니고 지하철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이고, 이제는 더 이상 못 가겠다... 좀 쉬었다 가자.” 힘이 들면 그는 아내를 계단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내곤 했습니다. 유형은 부인과 같은 시기에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딸이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졸업식에 참가하지도 않고 바로 귀국해 버렸습니다. 나는 한때 유형이 보고 싶어 그를 찾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등에 업고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5번가를 걷던 그 모습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그를 만난 거나 진배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멀리서나마 그들이 아주 행복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살아주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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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지도자의 자질이 미래를 열고
총독부의 청사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여러 가지 자축하는 행사가 있었는가 하면, 자성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8월을 지내놓고 보니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이벤트라기보다 전시효과만을 노린 일과성에 불과한 관제행사였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첫째는 구 조선총독부의 청사이자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는 거대한 석조건물의 첨탑을 제거하는 해프닝을 지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 어느 천지에 국립박믈관에 소장된 문화재를 놓아둔 채 건물의 철거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을까. 한 번 손상되면 복원할 수 없는 국보급 문화재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명백히 한 연후에 첨탑을 들어내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정부의 고위관리나 대학에서 글을 가르치는 저명한 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잔재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조처라고 하였지만, 실상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식민잔재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주변에서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고, 경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학제나 커리큘럼은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굴지의 언론들도 편집의 틀이나 기획기사까지도 바다 건너 일본의 신문을 복제하는 지경이지만, 구 조선총독부의 건물은 그런 일들을 지켜보고 있는 돌덩이에 불과한 것이다. 광복 50년을 맞이하여 진실로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다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국립박물관의 설계를 범세계적으로 모집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그 당선작을 가려서 시상하고, 그 다음 정부는 건설에 착수하고, 또 그 다음 정부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국립박물관을 준공하게 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일 것이며, 그런 연후에 구조선총독부의 청사를 헐어 낸다 해도 아무 하자가 없을 것이다.
둘째, 꼭 광복 50주년을 기념해서가 아니지만, 경복궁의 일부 전각이 복원된 일은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다. 임금의 집무실로 쓰이던 사정전 뒤에 위치한 교태전, 강녕전, 만춘전, 연생전 등이 그 아름답고 오밀조밀한 옛 모습을 되찾으니 그나마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만, 앞에서 소상히 소개한 바 있는 장영실의 노작이자 조선 과학의 정수인 '흠경각'이 복원계획에서 제외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 또한 따지고 보면 무지와 무계획의 소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흠경각'이 서 있던 위치가 이번에 복원된 건물들의 주변이었기에 더 큰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지만, 비어 있는 전각의 복원보다 살아서 움직이는 전각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일이 될 것이며, 경복궁을 찾아오는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큰 감동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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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Notre Dame)
프랑스어로 '우리들의 귀부인'이란 뜻.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빠리, 아미앙, 샤르뜨르, 루앙 등 프랑스에는 이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대성당이 많다. 그 중에서도 '노트르담 드빠리(Notre Dame de Paris) 는 '빅토르 유고'작인 동명의 소설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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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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