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4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
5. 이성과 앎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말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성이라는 개념에는 사고 내지는 정신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성을 감각이나 감정과 대립시킨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감정이 풍부한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앞과 뒤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모조리 망각한 채로 한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상황을 차근차근 보살피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걸어가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들은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말한다. 장사하는 젊은이가 사이가 막연한 친구와 거래를 하면서도 조목조목 따지면서 한푼의 에누리도 없을 때 우리들은 그 젊은이를 냉정한 젊은이라고 말한다. 이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쉽사리 변하여 기복이 심한 감정과는 달리 질서와 체계를 가진다. 이성에 의해서 확실한 앎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의 본질이 자아에 있다고 보며 자아의 근본적인 특징을 이성에 둔다. 감각 경험을 앎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우선 인간에게는 이성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다음에 오직 감각 경험에 의해서 앎의 시초가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이성에 의해서 확실한 앎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감각경험 및 이와 유사한 것들에 의해서는 명확한 앎이 성립될 수 없음을 밝힌 다음에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다시 말해서 확고 부동한 자아의 사고 능력에 의해서만 참다운 앎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당신은 5+7=12 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러한 수학 계산을 눈으로 보아서 아는가? 아니면 맛보거나 만지거나 들어서 아는가?"
단지 눈으로만 보고 머리 속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냄새 맡거나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당신의 자유는 감각에 의해서 알려지는가 아니면 감정에 의해서 알려지는가?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당신의 자유는 당신의 생각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손으로 만져서 자유를 알 수 없다. 손으로 만지면 보드라운 것, 껄껄한 것, 딱딱한 것, 물렁물렁한 것 등이 나에게 알려진다. 냄새를 맡아도 경우는 다르지 않다. 냄새 맡으면 향긋한 내음, 타는 내음, 싱그러운 풀내음, 구린내음 등을 알 수 있다. 자유 역시 생각에 의해서 나에게 알려진다. 그렇다면 감각 경험 및 이와 유사한 것들이 참다운 앎을 제시해주지 못하므로 결국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확실한 앎이 성립한다는 주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내가 참되다고 여겨온 모든 것을 나는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였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나는 경험하였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하여는 결코 전폭적인 신뢰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과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들에 관하여는 감각이 가끔 우리를 속이지만, 감각을 통하여 알게 된 것들 가운데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가령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난로 가에 앉아 있다는 것, 겨울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이 종이를 쥐고 있다는 것, 이 밖에 이와 비슷한 것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 나의 이 손과 이 몸이 내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있을까?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내가 미친 사람들 측에 끼여들어가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검은 담즙에서 올라오는 나쁜 증기 때문에 뇌가 아주 뒤집혀져서 알거지이면서 임금이라고 우겨대며, 또 벌거벗고 있으면서 자줏빛 옷을 입고 있다느니, 머리가 진흙으로 되어 있다느니. 자기의 몸 전체가 호박이라는, 유리로 되어 있다느니 하면서 고집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쳤을 따름이요, 나도 만일 그들의 흉내를 낸다면, 그들 못지 않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다. 그래서 밤에는 으레 잠을 자고, 꿈속에서는, 미친 사람들이 깨어 있을 때에 머리에 그리는 것과 똑같은 것을 모두, 그리고 때로는 그보다 더 엉뚱한 것을 머리에 그린다. 밤에 잠들어 있을 때, 나는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건만, 깨어 있을 때처럼 내가 여기 있다고, 옷을 입고 있다고, 난로 가에 앉아 있다고 몇 번이나 믿었던가? 그러나 지금 이 종이를 보고 있는 내 눈은 분명히 깨어 있다. 내가 움직이고 있는 이 머리는 잠들어 있지 않다. 나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또 의식하면서 이 손을 펴며, 또 이것을 나는 감각하고 있다. 잠들어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이렇게 판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볼 때, 나는 잠들어 있을 때, 이와 비슷한 착각에 의하여 가끔 속았던 것이 생각난다. 이러한 생각을 곰곰이 하고 있노라면, 깨어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표적이 전혀 없음을 보고 나는 몹시 놀란다. 그 놀람이 어찌 큰지 나는 지금 꿈꾸고 있다고 믿을 지경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저 개별적인 것들, 즉 우리가 눈을 뜨는 것, 머리를 움직이는 것, 손을 펴는 것 및 이와 비슷한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러나 잠들어 있을 때에 보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을 모방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화상과 같은 것이요, 따라서 적어도 이 일반적인 것들, 즉 눈 머리 손 몸 전체는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이 아니라 참된 것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사실 화가들은 세이렌이나 사튀로스를 더할 나위 없이 기괴한 모양으로 그리려고 노력할 때에도, 전혀 새로운 본성을 그것들에다가 부여할 수는 없고, 다만 갖가지 동물의 여러 가지 부분을 이리저리 뒤섞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혹은 설사 그들이 비슷한 것을 전혀 볼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따라서 전혀 허구요, 허위라 할 만한 것을 생각해낸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구성하는 빛깔들은 참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에서, 비록 이 일반적인 것들, 즉 눈 머리 손 및 이와 비슷한 것들이 공상적인 것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이보다 더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들은 참되고 현존하는 것, 그리고 우리들의 생각 속에 있는 사물의 상들은 모두 참된 것이건, 거짓된 것이건, 위에 말한 신기한 것이 참된 빛깔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보편적인 것들로써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물체적 본성 일반 및 그 연장, 그리고 연장을 가지고 있는 것들의 모양, 이것들의 양, 즉 이것들의 크기와 수, 또한 이것들이 있는 장소, 이것들이 지속하는 시간 등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이다.
-자연학, 천문학, 의학 및 이밖에 복합된 것들의 고찰에 의존하는 모든 학문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들이지만, 대수학, 기하학 및 이런 성질의 학문들은 극히 단순하고 극히 일반적인 것들만을 취급하고, 또 이런 것들이 자연 속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내가 깨어 있건, 잠들어 있건 2에 3을 더하면 언제나 5요, 4각형은 4번밖에 가지지 못하며, 또 이와 같이 분명한 진리들이 허위의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진리의 원천인 최선의 하느님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고 유능하고 교활한 어떤 악한 영이 온갖 재주를 부려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하련다. 하늘 공기 땅 빛깔 모양 소리 및 모든 외적인 것은 악한 영이 내 쉽사리 믿는 마음을 움켜쥐기 위하여 사용하는 환영이요, 속임수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련다. 또 나 자신은 손도 없고, 눈도 없고, 살도 없고, 피도 없고, 아무 감각 기관도 없고, 다만 잘못하여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련다. 나는 완강하게 이 생각을 견지하련다. 이렇게 하면 어떤 참된 것을 인식하는 것이 내 힘에 겨운 일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거짓된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히 내 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저 기만자가 아무리 유능하고 교활하더라도 나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련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오로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와 아주 반대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절대로 거짓된 것으로서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지 않을는지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우리의 감각이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감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주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나는 상정하려 하였다. 그리고 기하학의 가장 단순한 문제에 관해서도 추리를 잘못하여 여러가지 오류 추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나도 다른 누구못지 않게 잘못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서, 내가 전에 논증으로 보았던 모든 추리를 잘못된 것으로서 버렸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 가지는 모든 생각과 똑같은 것이 우리가 잠들고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 나타나는데, 이때 참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생각하고서 나는 여태껏 정신 속에 들어온 모든 것이 내 꿈의 환상보다 더 참되지 못하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금방 그 뒤에 그렇게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동안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어떤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하여, 회의론자들의 제아무리 터무니없는 사정들을 모두 합치더라도 이것을 흔들어 놓을 수 없음을 주목하고서 나는 주저없이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 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다음에, 내가 무엇인지를 주의하여 검토하고, 또 내가 신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도대체 세계도 없으며, 내가 있는 장소도 숫제 없다고 가상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없다고 가상할 수는 없고, 오히려 이와 반대로 다른 것들의 진리성을 의심하려고 생각하는 바로 이 사실로부터 내가 있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게 또 아주 확실하게 귀결되며, 거꾸로, 만일 내가 생각하기를 그치기만 하며, 설사 내가 그때까지 상상해온 나머지 모든 서이 참이라 하더라도 내가 있다고 믿을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요, 그 본질 내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요, 또 존재하기 위하여 아무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 '나', 즉 나를 나되게 하는 정신은 신체와 전혀 다른 것이요, 또 신체보다 인식하기가 더 쉬우며, 설사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긴 인용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감각적인 것, 꿈속의 사실과 같은 것 및 상상 등은 항상 변화하므로 확실한 앎의 대상이 못 되고 #2 따라서 정신적인 자아가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앎의 주체이므로 자아의 이성에 의해서 대상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위의 긴 인용문을 상세히 살펴볼 때, 차례로 의심을 하고 난 후에 확고 부동한 자아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확고 부동한 자아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확고 부동한 자아를 전제로 하고 편의상 감각이나 꿈을 의심했는지가 문제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는 의심이 "방법적 의심"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성적인 자아를 전제로 하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확실한 앎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합리론의 입장은 마치 경험론이 처음부터 감각 경험만이 참다운 앎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경험론은 상대적인 감각 경험을 앎의 근거로 보므로 앎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합리론은 보편적 필연적인 자아의 이성을 앎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앎 또한 필연적 보편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합리론자들은 수학적 진리와 같은 이성적 사고의 대상은 보편적인 앎에 속하며 냄새나 맛과 같은 감각 경험의 대상은 상대적 앎에 속한다고 본다. 결국 불변하는진리는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 파악된다는 말이 성립한다. 앞에서 우리들이 앎의 근거를 감각 경험에 두는 이론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앎의 근거를 자아의 이성에 두는 이론도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할 경우 의심하는 "나"는 과연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이 확고 부동하게 명백한 자아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 역시 하나의 가정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도 여전히 의심의 대상이 된다. 수학적인 앎은 불변하는 명백한 것이라는 주장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당성을 상실한다. 아마존 밀림 속의 어떤 도인들은 5이상의 수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들에게 5더하기 7은 12라는 것이 자명한 진리가 아니냐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무의미하다. 그런가 하면그들에게 수 개념도 경험에 의해서 성립한다고 주장하여 5더하기 7이 12라는 것을 가르치려 하여도 그것은 힘든 일이다. 이는 마치 1800년대 외국 선교사들이 그들에게 자명한 하느님을 우리들에게 알리려 하여도 전혀 불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 일체인 하느님이 자명했겠지만, 삼신이나 부처님 또는 하느님 등에 익숙했던 우리들은 외국인들의 그러한 이상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오직 이성적인 자아에 의해서만 명백한 앎이 보장된다고 하는 주장 또한 극단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적인 앎만이 참되다면 감각 경험에 의한 앎은 참되지 못하다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성적 사고라고 하는 명백한 기능이 주어져 있고 우리가 확실한 앎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감각의 방해 때문인가? 그렇다면 감각 경험은 앎에 있어서 단순한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복잡하고도 미묘한 존재이다. 인간은 감각적의로 경험하면서 동시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지금 창밖에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확고한 바탕을 성급히 소유하려고 하는 그리고 그러한 바탕을 믿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앎의 근거를 감각 경험이라고 믿으면 그것을 전제로 하여 앎의 모든 문제를 체계화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반대로 앎의 근거를 이성적 자아라고 믿으면 그것을 전제로 하여 앎의 온갖 문제를 체계화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앎의 문제를 오직 인식론의 한계 안에서 밝히려는 것은 오히려 앎의 문제를은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컨대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오직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 여성의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앎의 문제로 존재의 문제도 존재의 문제 및 세계 근원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과 긴밀한 관계 안에서 밝혀질 때 독자적인 고유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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