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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10 호
단기 4340. 1. 17 (음력 11.30)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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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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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신이시여, 이것이 인간이오리까…김영현 ‘낯선 사람들’ |
입력: 2007년 01월 17일 18:0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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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개의 현이 깨지는 순간, 내가 꿈꾸는 세상이 왔을까, 첸카이거의 영화 ‘현 위의 인생’에 이런 말이 나오? 민주화라는 목표가 삶의 가치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사라진 지금, 남은 건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요.”
1970년대 중반 학번, 노동운동과 수감생활, 지식인과 민중성을 형상화한 민족문학의 대표작가란 이력을 지닌 김영현씨(52)가 죄와 벌, 구원, 사랑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은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을 펴냈다. “문청 시절 경도됐던 도스토예프스키나 체호프 등 러시아 작가들을 떠올리면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삶의 선택이나 행동의 동기에 대해 ‘그냥’이라는 답변이 통용되는 요즘 세태에 비춰볼 때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종교적 차원까지 확대했다는 점이 고전소설과 닮았다.
시골 마을금고 이사장을 지낸 수전노 최문술 영감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그의 복잡한 가정사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전혀 의외의 인물인 범인을 잡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추리소설 특유의 긴장감과 반전이 주는 쾌감 때문에 한번 잡으면 끝까지 놓기 힘든 흡인력을 지닌 게 장점이다.
작품 초입에 최문술을 죽인 범인은 계모 성경애와의 갈등 때문에 가출해 낭인생활을 하던 장남 동연인 것으로 정리된다. 그는 아버지에게 돈을 요구하다가 거부당하자 죽였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예비신부로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차남 성연이 돌아오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는 형이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살인누명을 덮어쓰고 죽음을 택했다는 느낌을 받고 빛바랜 자신의 가족사를 들춰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악한 마음으로 늙은 홀아비와 재혼한 계모, 허무주의에 빠진 외삼촌, 좌익운동을 하다가 몰락한 이모네 가족과 성연이 애틋한 마음을 품었던 이종사촌 안나, 그리고 어린 시절 최문술 집에 식모로 팔려와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학대 당한 강연옥과 그의 자식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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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이들은 탐욕과 증오, 욕망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를 죄와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그 와중에 형 동연은 자신이 가장 미워했던 아버지와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동생 성연은 수도원에 자신을 유폐하는 결정을 내린다. 죄를 저지르는 형과 그 죄를 성찰하는 아우는 도스토예스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뒤 괴로워하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둘로 나눠놓은 분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예비신부였던 성연은 지옥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의 힘을 깨닫고 파계함으로써 스스로를 세상 한가운데로 던진다. ‘이 누추한 세상 위를 거니는 하나님. 만일 사랑이 없다면 그이 역시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사랑이야말로 때로는 지옥처럼 고통스럽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생에 그이가 준 축복이자 선물이었어요.’
작가 김영현씨는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갈등,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 등 우리 현실 앞에서 막막함을 느꼈는데 인간과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생각하면서 숨통이 트였다”면서 “이 작품을 통해 이전과 달라진 문학을 추구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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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남을 처벌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을 항상 경계할 것.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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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15 화교 따이꿴: 리 카싱
"나의 첫째 가는 즐거움은 사력을 다해 일한 뒤 그 대가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홍콩 드림'을 실현한 리 카싱이 평소 즐겨 하는 말이다. 얼핏 들으면 수전노 같은 속물 냄새가 솔솔 풍긴다. 그러나 분명 그에게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으며 이런 말을 한다고 그를 속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국민학교 문앞에도 안가본 그는 화교 특유의 동물적인 상술로 지구상에 깨알같이 흩어져 있는 5,500만 명의 화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그는 개인자산만 70억 달러(5조 6천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을 존중하는 화교사회에서는 그를 언급할 때에는 반드시 그의 이름 앞에 과거 황제를 부를 때에나 사용하던 최고의 극존칭인 따이꿴을 붙일 정도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열강의 침탈과 내전으로 중국대륙이 대혼란기에 빠진 1928년 광동성 조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전란을 피해 12세 때 홀홀단신으로 홍콩에 건너왔다. 무학인 까닭에 일자리를 잡을 수 없었던 그는 시계줄과 혁대 행상부터 시작하여, 1950년 어렵게 7천 달러의 돈을 모은뒤 이를 밑천으로 플라스틱 빗과 인조꽃을 만드는 공장을 세움으로써 본격적으로 기업경영에 착수했다. 그후 그는 홍콩 붐을 예리하게 간파하고서,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땅을 헐값에 사들인 뒤 아파트를 지어 비싼 값에 되파는 방식으로 오늘날과 같은 천문학적 거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축재과정에서 결코 땅 투기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땅을 팔거나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아파트 분양권 등을 나누어줌으로써 몇 배로 보답했다. 그는 남의 돈을 빌려 돈을 버는 이른바 OPM 경영의 귀재였던 셈이다. 미국의 경영전문지 (포브스)는 1994년 화교 최대재벌로 70억 달러를 모은 리 카싱을 꼽았고, (포춘)지는 그를 1993년도 세계 랭킹 제16위로 뽑았다. 그의 양대 기업은 홍콩 최대부동산회사인 장강실업과 허치슨 왐포아이며, 부동산 이외에도 컨테이너 터미널, 전력, 통신, 호텔, 유통업 등 다양한 업종에 손을 뻗치고 있다.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그의 그룹 주식은 홍콩 전체 상장주식 총시가의 15p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다. 그럼에도 그의 도박정신은 끝이 없어 보인다. 그는 1991년 차남 리처드 리의 도박 같은 아이디어를 전격 수용해 아시아 최초로 24시간 위성 채널 홍콩 스타 TV를 발족시켰다. 당시 세계의 모든 방송인들은 리 카싱이 쪽박을 찰 것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시아 전역에 폭발적 위성방송 붐을 일으켰고, 1993년에는 이를 투자액의 6배가 넘는 5억 2,500만 달러를 받고 오스트레일리아 미디어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미련없이 팔아넘기는 뛰어난 상술을 보임으로써 연달아 세계를 감탄케 했다. 그는 아직도 스타 TV의 전체지분 중 3분의 1을 움켜쥐고 있다. 후계자를 길러내는 방법도 화교황제답게 독특하다. 차남 리처드 리의 어린 시절 회고담 한 토막이다.
"내가 여덟 살 되던 해부터 아버지는 나를 그룹 중역회의에 참석시키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의자 하나가 주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아버지는 나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맨로 파크에 있는 한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좁은 숙소 하나만 빌려주었을 뿐 생활비는 내가 벌어야 했다. 졸업 후에는 다른 회사에서 샐러리맨을 해야 했다. 스물세 살이 되던 1990년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나를 홍콩으로 불러들였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이때를 대비해 내가 오랜 기간 준비해온 비장의 카드가 바로 스타 TV 구상이었고, 아버지는 두말 않고 거액을 내주었다."
리 카싱은 과거에는 유럽과 북미에 주로 투자했으나 중국 붐이 일기 시작한 1992년부터는 재빨리 중국 투자로 방향을 선회해, 1993년 말 현재까지 4백억 홍콩달러(4조원)를 중국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 100여 건의 대중국 투자계획도 추진중이다. 그는 특히1994년 초 중국 건설부의 홍콩 자회사와 함께 홍콩상장기업인 투자전문회사 엠페라 인베스트먼트를 사들였다. 중국의 부동산 매매를 주된 업무로 하고 있는 이 회사를 사들임으로써 리 카싱은 중국 부동산 진출의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밖에 중국 최고실력자 덩샤오핑과 수시로 독대하는 유일한 남자로도 유명하다. 덩의 차남 덩쯔팡이 회장을 맡고 있는 상하이 국영기업과 함께 홍콩의 대형완구회사를 사들이고, 덩의 장녀인 화가 덩린이 해마다 홍콩에서 여는 전시회에 반드시 참석해 일부러 비싼 값에 그림을 사주는 등 덩씨 집안과의 친분은 여러 화교재벌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화교파워는 리 카싱만이 아니다. 1994년 (포브스)는 리 카싱의 뒤를 바짝 위협하는 화교 10대 재벌로 월터 쿼(홍콩, 65억 달러), 차이 완린(대만, 63억 달러), 세도노 살림(인도네시아, 60억 달러), 림 고봉(말레이시아, 50억 달러), 리 샤우키(홍콩, 50억 달러), 우 둥친(대만, 48억 달러), 프라조고 팡케스투(인도네시아, 45억 달러) 등을 꼽기도 했다. 이들 화교 파워야말로 오늘날 중국대륙에서 진행중인 거대한 경제혁명을 가능케 하는 기관차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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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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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軍 장교와 60년 '못다한 사랑' 유럽이 울었다
사랑이 아름다울수록 운명은 혹독한가. 60년 가까운 기다림 끝에 다가온 짧은 만남. 그리고 영원한 이별. 지난달 80세로 세상을 떠난 한 그리스 할머니가 온 유럽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안젤리키 스트라티고우. 이 할머니는 '아모레 셈프레(영원한 사랑)'라는 이탈리아어로 끝나는 두 통의 엽서를 가슴에 끌어안고 숨을 거뒀다. 할머니가 숨지기 직전 몇 분동안 한 말은 "티 아스페토 콘 그란데 아모레(난 위대한 사랑을 안고 그대를 기다렸어요)." 시간은 1941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의 이탈리아군 소위 루이지 수라체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북부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파트라이로 파견된다. 행군을 하던 루이지는 집 앞에 앉아 있던 안겔리키 스트라티고우에게 길을 묻는다. 처녀는 크고 검은 눈이 매력적이었다. 청년은 의젓하며 정이 많은 장교. 둘은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길을 가르쳐준 처져가 굶주림에 지쳐 있음을 눈치채고 갖고 있던 전투식량을 나눠줬다. 루이지는 사흘이 멀다 하고 먹을 것을 들고 그녀의 집을 찾았다. 루이지는 그리스 말을, 안겔리키는 이탈리아 말을 배웠다. 짧았던 행복. 그러나 이 행복은 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끝난다. 급거 귀국해야 했던 루이지는 안겔리키를 찾아 손을 한 번 잡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적군 장교와 사귀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까 두려워한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전쟁이 끝나면 결혼해 달라" 는 루이지의 청혼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난 후 루이지는 고향인 이탈리아 남부 렉지오 칼라브리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루이지는 안겔리키에게 계속 편지를 띄웠다. 당시 그녀는 고모집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조카가 적군과 연애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모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없애버렸다. 메아리 없는 편지를 계속 보내던 루이지는 천일째 되던 날 드디어 그녀를 잊기로 결심했다. 루이지는 곧 결혼을 했다.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삶이 계속 됐다. 그러나 부인이 96년 세상을 떠나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그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파트라이의 시장에게 사연을 담은 편지를 냈고, 시장은 현지 스카이 방송사 기자들의 도움을 얻어 아직도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안겔리키를 찾아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소식을 들은 안겔리키의 첫 마디였다. 안겔리키의 연락을 받은 루이지는 얼굴을 가리고 한없이 울었다. 그녀가 60년 가까운 옛날의 결혼 약속을 여전히 믿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 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의 성밸런타인데이에 둘의 감격어린 재회가 이뤄졌다. 파트라이를 방문한 루이지는 또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했고 안겔리키는 벅찬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루이지는 77세, 안겔리키는 79세였다. 1년의 절반씩을 각각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지내기로 한 루이지와 안겔리키의 달콤한 계획은 안겔리키가 앓아누운 끝에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꿈이 돼버렸다. 사망일은 1월 23일로 예정됐던 결혼식을 2주일 앞둔 9일이었다. 루이지는 아직도 그녀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 그 자신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고, 주변에서 비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식도 연기된 것으로 안다. 지금도 그는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펜을 들어 '영원한 사랑'으로 끝나는 엽서를 쓴다. 엽서는 그녀의 무덤앞에 쌓이고 있다.
─ 중앙일보 99년 2월 5일자 10(국제)면,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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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2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3.철학의 분야들
우리들은 문학의 분야들을 시학, 비평, 소설론 등으로 나누며, 언어학의 분야들을 구문론, 의미론, 문체론 등으로 구분한다. 철학도 다른 학문과 같이 내용적인 분야에 따라서 나누인다. 철학의 분야들을 크게 구분하면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으로 된다. 이 이외에 철학사를 비롯하여 개별 고학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서 교육 철학, 역사 철학, 정치 철학, 법 철학, 과학 철학 등도 역시 철학의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에 관하여 일반적인 성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논리학은 사고의 질서와 규칙을 다룬다. 인식론은 앎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 형이상학은 있는 것들로서의 존재자 및 존재자의 근원인 존재를 취급한다. 윤리학은 행위의 기준 내지는 법칙을 문제로 삼는다. 형이상학은 있는 것들로서의 존재자 및 존재자의 근원인 존재를 취급한다. 윤리학은 행위의 기준 내지는 법칙을 문제로 삼는다. 미학은 예술적인 아름다움의 문제를 탐구한다. 논리학은 철학과 아울러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다. 논리학(logic)이라는 말의 원천은 로고스(logos)로서 로고스는 이성, 법칙, 명제 등의 뜻을 가진다. 논리학은 사고의 규범을 연구한다. 그것도 심리적,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 형식적, 법칙적인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논리학이다. 일반적으로 인문 고학은 규범적인 법칙을 연구함에 비하여 자연 과학은 자연의 사실적인 법칙을 연구한다. 논리학은 우리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옳게 사고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며 사고의 특정한 법칙 및 형식을 지킴으로써 참다운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준다. 논리학은 직관적인 느낌이나 앎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사고된 형식적인 판단을 문제로 삼는다. 예컨대 논리학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사고된 판단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논리학이 왜 필요한가를 다음과 같은 간단한 예를 한 가지 들어서 밝혀보기로 하자. "a는 b이고, b는 c이면, a는 c이다." 이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송군이 동물이고, 기린도 동물이면, 송군은 기린이다"라고 말할 때 이 판단의 형식과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판단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송군이 동물이고, 기린도 동물이면, 송군은 기린이다"라는 판단은 일정한 사고의 형식적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그릇된 판단이다. 우리가 말하거나 글을 쓸 때 멋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일정한 사고의 규범에 따라서 말하고 쓴다. 어린아이라도 말을 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암암리에 사고의 법칙을 지키기 시작한다. 사고의 형식적인 법칙을 무시하거나 어기면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순수하게 사고의 형식적인 법칙만을 다룬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사고의 자연적이며 사실적인 법칙을 다루는 심리학과 엄밀히 구분되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라고 하는 판단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이 심리적으로 타당한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심리학에서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서 일단 외부적인 자극이 신경 통로를 통하여 중추 신경에 도달한 후 생각이 일어나는 자연적인 법칙을 다룬다. 따라서 심리학은 항상 변화하는 자연적인 사실을 다룸에 비하여 논리학은 형식적인 판단을 탐구 내용으로 삼는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은 앎의 논리학이다. 인식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간의 앎을 자연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데 비하여 인식론은 앎을 논리적으로 해명한다. 인식론은 #1앎이 무엇이며 #2앎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앎에 제한을 부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3앎의 보편타당성이 무엇인지를 연구한다. 예컨대 자아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주관이다. 이 주관은 한 송이의 장미꽃이라든지 한 마리의 나비라는 대상을 객관으로 대할 수 있다. 주관으로서의 자아는 장미꽃이나 나비를 감각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사고에 의하여 "장미꽃" 또는 "나비"로 인식한다. 인식은 곧 앎이며 앎은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내 앞에 개 한 마리가 달려가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보고 한송이 백합이 피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미친 사람의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체계에서 구성되는 것으로서 대상에 대한올바른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앎과 아울러 앎의 체계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들은 그 대상의 변화하는 면과 변하지 않는 면을 동시에 안다.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각 시대의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서 매우 광범위하게 많은 뜻으로 사용되어져 왔다. 가능한 한에 있어서 형이상학을 간단히 정의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은 인식론과 함께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들 중 한 가지이다. 생겨났다가 없어지며 순간순간 변하는 구체적인 것들을 우리는 현상 또는 존재자라고 부른다. 이 사람, 저 느티나무, 그 공장 등은 구체적인 현상이며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길 수 있다. 또는 있으면서 다근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나뭇잎은 시들어 낙엽이 되며 어린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그처럼 있는 존재자들을 변화하게끔 해주는 궁극적인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궁극적인 원인을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것을 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그것을 전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연구가 얼핏 보기에는 전혀 쓸데없고 공허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형이상학적인 사고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을 물질로 보는 사람은 종교를 가질 수 없으며 그에게는 인간을 위시하여 세상만사가 기계적인 물질로 보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궁극적 원인을 정신으로 보는 사람은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근원이 신이라고 믿거나 또는 정신은 참다운 것이요 물질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근원적으로 형이상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여 유물론적 공산주의의 이론도 가능하며 자본주의 경제 이론도 성립할 수 있고 자유 민주주의 이론도 가능하다. 윤리학은 인간 행위의 규범과 원리 및 규칙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윤리학은 도덕 철학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인식론을 앎의 이론에 관한 연구라고 하고 형이상학을 궁극 원인에 관하 연구라고 할 것 같으면 윤리학은 인간의 실천적인 행위에 관한 연구라고 말할 수 있다. 윤리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규범을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발적인 자유 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행위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인간 행위는 우연적으로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실천적 법칙을 바탕으로 삼고 성립하므로 그와 같은 행위의 원리 및 규칙을 탐구할 필요가 생긴다. 또한 윤리학에서는 선과 같은 규범의 성격 및 의무, 양심, 자유 의지와 같은 규칙이 과연 어떻게 도덕 법칙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가도 아울러 연구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윤리학에서 가장 최종적으로 다루게 되는 문제는 행복이 된다. 어떤 사람은 철학의 출발점도 윤리학이며 종착점도 윤리학이라고말한다.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은 모든 학문의 시초는 윤리학이요, 종말도 윤리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위의 문제는 앎의 문제 및 궁극 원인의 문제와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연구될 때 인간의 갊을 한층 더 심원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면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학은 인식론 및 형이상학과 함께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이다.
철학의 또 한 분야로는 아름다움을 논하는 미학이 있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은 자연미에 속하며 음악이나 그림 또는 무용 등의 아름다움은 예술미에 속한다.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은 우아미, 숭고미, 비장미, 해학미, 추미 등 여러 가지 아름다움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아름다움은 사물을 분별하는 오성이 아니라 사물을 느끼는 감성적 인식에 의해서 판단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김홍도의 풍속화가 아름답다"는 판단에서, 우리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지닌 역사적 또는 사회적 성격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어떤 재료의 붓으로 먹을 얼마만큼 강하게 칠했는지를 살피지도 않고 그저 보아서 그 그림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미학은 미적 판단에 관한 철학의 한 분야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미학과 예술 철학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순수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윤리, 사회, 역사적인 것들, 다시 말해서 아름다움과 상관없는 것들도 포함하므로 미적 판단을 대상으로 삼는 미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미적 가치를 본질적인 계기로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의 여러가지 형태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아름다움을 표현하므로 미학의 중요한 영역으로 예술을 꼽을 수 있다. 아름다움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주관적 측면으로서 그것은 미적체험이다. 주관인 나는 "홍도는 아름다운 섬이다"라고 판단한다. 이때 나의 판단은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을 내용으로 삼는다. 아름다움의 또 한 가지 측면은 미적 대상이다. "우리 여인네들의 부채춤은 아름답다"는 미적 판단에서 부채춤은 아름다운 대상이다. 따라서 미학이 탐구하는 주제는 미적 체험과 미적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서로 견해가 다른 수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우리들은 아름다움을 단지 느낄 뿐만 아니라 인식함으로써 미적 판단을 구성하고 그 미적 판단을 이론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의 기본적인 가장 중요한 분야로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그리고 미학의 성격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 밖에도 개별 학문과 연관하여 사회 철학, 역사 철학, 종교 철학, 교육 철학, 법 철학, 정치 철학, 과학 철학 등을 이야기할 수 있으나 이러한 분과들은 엄밀히 말해서 철학의 분야에 속한다기보다는 철학 자체이다. 왜냐하면 사회철학이나 종교철학도 철학으로서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을 기초로 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이란 사회 철학이나 정치 철학...등이지 오로지 철학만은 있을 수 없다. 철학이라고 할 때는 이미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원리 및 의미와 가치를 묻기 때문에 철학은 이미 교육 철학이나 과학 철학 또는 역사 철학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철학은 기초학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하여진다. 예컨대 역사학의 기초학은 역사철학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학은 역사라는 사실을 근거로 역사적 사실의 해석 및 의미를 묻지만 역사 철학은 역사가 성립할 수 있는 원리를 탐구하며 동시에 역사 전체의 가치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개별 학문과 철학과의 관계를 한층 더 상세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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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노들강변'은 '노량진 나루터'를 말하는 고유명사 ...버드나무와 상관없어
우리는 보통 '노들강변'이라고 하면 버드나무가 휘휘 늘어진 어느 강변을 연상하지 않습니까?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의 민요가 그러한 인상을 주게 하지요. 아마도 '노들'이 '버들'을 연상시키나 봅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 이러한 풍경이 있는 강변이면 '노들강변'으로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노들강변'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노들강변'은 서울의 '노량진' 나루터를 말합니다.
현재 서울의 흑석동에 있는 국립묘지 근처에 있던 나루터를 말합니다. 왜 그러냐구요? 다음 설명을 보시지요. 여러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싸우시던 '울돌목'을 아시겠지요? 이 '울돌목'은 한자어로 '명량(울명,돌 량)'이라 고 하지요. 이 '명량'의 '명'은 '울 명'자이고요. '량'은 원래 '돌 량'입니다. 이 '돌'은 충청도 방언에 '똘, 또랑'으로도 사용하고 있지요.
'노량'의 '량'도 '돌 량'입니다. 그래서 '노량(이슬 노, 돌 량)'은 '노돌'이라고 했지요. 그러던 것이 '노들'로 변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노량'이 '노들'로 변하고 거기에 '강변'이 덧붙은 것입니다. 이 '노들강변'은 옛날에 서울과 남쪽 지방을 잇는 중요한 나루였습니다. 그래서 이 '노들강변'은 애환이 많이 깃들여 있던 곳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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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2. 너 자신을 알라
우리가 이겼다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는 앗시리아에 이어 오리엔트 전역을 정복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 페르시아의 세력권이 되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은 정치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기원전 499년에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을 지원하는 것이 본토의 그리스인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다리우스의 정복욕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각 지역마다 폴리스라는 소국가를 건설해서 자치와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강국이었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의 선주민들을 정복하고 세워진 정복국가인 반면, 아테네는 그리스 중서부 아티카반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 세운 폴리스였다. 특히 아테네는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민주정치의 틀을 확고히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를 침입한 것이다. 다리우스왕은 그리스를 정복해서 제왕으로서의 명성을 날리고자 했다. 그는 특히 아테네를 손안에 넣음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했다. 기원전 492년 시작된 제1차 원정은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을 만나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2년 뒤에 페르시아 군대는 그리스를 다시 침입했다. 에게해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면서 내려온 페르시아 군대는 당시 아테네 북서쪽에 위치한 마라톤에 상륙했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군대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었다. 그 싸움은 마치 호랑이와 강아지의 싸움에 비유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자치를 생명처럼 여겼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를 함께 막아낼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스파르타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국내의 종교행사를 중단하고 군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스파르타의 해명이었으나 사실은 아테네가 강대국이 되는 것을 시기한 폴리스들간의 분립주의도 이에 한몫했다. 따라서 아테네인들은 자국의 영토를 침입한 페르시아인들을 거의 혼자서 물리쳐야 했다. 이때야말로 민주개혁으로 사기가 드높던 아테네 시민들의 단결력을 과시할 때였다. 모든 시민들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싸움은 아테네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헤로도토스의 보고에 의하면 6,400명의 페르시아인이 죽었고, 그리스인은 192명이 죽었다. 그때 그리스군의 전령 페이디피데스는 승리의 소식을 한시바삐 알리고자 42km가 넘는 거리를 달려 아테네에 도착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다." 한 마디를 외치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을 기리는 뜻에서 그 당시 그리스에서는 올림픽 경기 때 페이디피데스가 달렸던 거리를 경기 종목으로 채택하였고, 그 명칭을 마라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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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64.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여긴 베트남 사람들
1940년 프랑스가 나치에게 함락되자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 눈독을 들인다. 당시 장개석은 인도차이나와 가까운 중경으로 수도를 옮겨 일본에 결사 항전하고 있었는데 물자 보급이 주로 인도차이나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게 좋은 구실이었다. 1940년 6월 일본은 프랑스 식민총독을 협박해서 군사 사절단을 파견, 장개석에 대한 물자 보급로를 끊었다. 이어 9월에는 2만 5,000명의 군대를 진주지켜 프랑스 식민지당국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80년 동안 절대자로 군림해 오던 프랑스가 같은 동양의 일본에게 쩔쩔매는 것을 지켜 본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독립의 희망을 일본에게서 찾았다. 사실 그보다 35년 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자 베트남 지식인들은 경악한다. 동양의 소국 일본이 대러시아제국을 격파하다니...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즉시 일본을 배우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각계 각층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우수한 젊은이들을 도쿄에 유학시키는 이른바 동유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많은 민족주의 망명객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본질을 간과하고 같은 동양국으로서 서양의 침입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과 과거의 인연을 앞세웠다. 일본군이 진주한 후 베트남 보국동맹회는 일본군의 무기 지원을 받아 봉기, 프랑스 군을 공격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각지에서 무모한 봉기를 계속했다. 까오다이, 호아하오 등 전국적인 종교단체들도 일본을 환영했다. 그들은 일본헌병대의 도움으로 교단을 재조직하고 일본에 정보를 제공했으며 사이공의 일본군 조선소에 노동력을 공급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젊은 교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훗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는 고딘디엠도 이 때 일본군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독일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하의 프랑스 식민당국을 인정하면서 간접통치를 하려 했던 일본의 구상은 연합군과 드골이 파리를 탈환하고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이 인도차이나에 상륙할 경우 프랑스 군이 일본에 반기를 들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1945년 3월 9일. 마침내 일본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총독을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 유명무실하게 황제 자리를 지켜오던 우엔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게 하고 저명한 역사학자 쩐쫑킴에게 내각 구성을 맡겼다. 연로한 쩐쫑킴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일본이 다루기에는 안성맞춤인 사람이었다. 그의 내각에는 민족적인 성향의 정치인은 거의 없고 단순한 행정관료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베트남 인의 내각이라기보다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행정 기구에 불과했다. 프랑스 총독부의 행정 기구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일본인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베트남 인은 환호와 감격의 물결에 휩싸였다. 각지에서 저명인사들이 애국강연회를 열었고 수많은 정치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일본의 행동을 찬양하고 일본에 접근하여 독립베트남 정권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 일본 지도부는 이미 베트남을 중국, 소련, 영국, 미국과의 전쟁을 위한 식량 보급기지로 설정해 놓고 베트남의 독립은 먼 훗날의 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국이 일본의 반불 쿠데타에 환호를 보내고 있을 때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베트민(도맹: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많은 베트남인들과 달리 일본이 결코 베트남의 독립을 갖다 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도처에서 일본군이 연합군에 밀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연합군에 접근했다. 연합군도 프랑스 식민당국의 행정체계가 파괴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던 베트민이 필요했다. 호찌민은 반일노선을 굳히고 중국 운남성 곤명에서 미국의 제14공군사령관을 만났고 OSS(미국전략첩보대)와 구체적인 작전 계획도 논의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이틀 후 소련이 만주에 진입하자 베트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일본의 항복이 박두했음을 깨닫고 즉각적인 총봉기를 결행했다. 일본을 해방군으로 여겼던 많은 국민들과 정치단체들은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8월 19일 하노이가 베트민 장악하에 들어갔고 공산당의 세력이 비교적 약했던 사이공까지 8월 25일 베트민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것이 8월 혁명이다. 8월 30일 바오다이 황제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인 황금의 보도를 베트민 대표에게 넘겨 주고 퇴위했다. 그로부터 3일 후 호찌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많은 베트남 인들은 비로소 일본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베트남 인들은 호찌민 정부 아래서 자신의 이권을 되찾겠다며 돌아온 프랑스와 그에 뒤이은 미국의 침략과 맞서 처절한 전쟁을 수행했다. 이제 아무도 환상 따위는 갖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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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17.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중국의 작가들은 한 번도 노벨상을 타보지 못했다. 중국 작가들은 이 사실을 전혀 납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은 문명국이며 문화대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문화를 만들어 수출했으며 일본, 한국. 동남아 등의 나라들도 모두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노벨상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라오써가 노벨상 후보에 오른적이 있었으나 그때 그가 죽었으며. 루신도 후보에 올랐으나 그가 수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두 건 다 무산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두 설은 그 후 노벨상위원회에 의해 공식부인되었다. 이로 볼 때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 문인들이 노벨상에 얼마나 연연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작가들은 옛날보다 총명하여 더이상 누가 노벨상을 탈뻔했다와 같은 말을 억지로 꾸며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방송매체가 발달하여 노벨상위원회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을 하면 마음을 상하게 되고 체면이 깎이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방법은 노벨상이 별것 아니라는 것과, 심지어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도 이 상을 타지만 톨스토이처럼 비범한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결코 이 상을 타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우리가 왜 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노벨상위원회가 안목이 없는 것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또 다른 견해는 노벨상위원회의 위원들이 모두 서구인이어서 중국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도와 일본은 받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하나는 서구의 식민지였고, 하나는 서구의 연맹국이기 때문이며, 다만 중국만이 그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설은 서구인들은 한자를 모른다는 것이지만, 심사위원들에게는 한자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러하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가짐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분명히 얻어내려고 하는 바에 대해 오히려 그것을 경시하며 톨스토이도 못 탔다는 말로 얼버무리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은 나는 많은 작가의 책꽂이에서 노벨상 수상작가의 문집을 보았다. 그들은 거의 모든 수상자들의 책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일본작가 카와바타 야쓰나리의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들의 노벨상에 대한 그런 마음가짐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올림픽을 서구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중국문학은 도대체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훌륭한 작가들이 너무 많아 범람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은 문우들과 문학상 수상작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해 보았는데, 작품성이 뛰어나서 반드시 수상해야 한다고 할 만한 작품이 몇 손가락 꼽아지지 않았다. 국내의 문학상도 이런 형편인데 어떻게 노벨상을 논한단 말인가? 현재 우리의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중국작가들은 아직도 노벨상을 받지 않는 것을 최상으로 삼는 것 같다.영화감독 짱이머우(張藝謨)가 아주 좋은 예이다. 짱이머우의 영화가 외국에서 찮은 상을 받았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짱이머우는 서양인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어 중국을 아주 낙후되고 지저분하게 묘사한 영화를 찍어 서양인들의 환심을 사서 그런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짱이머우가 나라를 팔아가면서 영광을 취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서양의 심사위원들이 중국의 낙후된 모습을 찍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집에 앉아 글을 쓰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서양사람들이 별것 아니라고 말하면서도,속으로는 너무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출국하는 사람들이 유니폼을 제작하여입는 것이 그 예이다. 중국의 회사원이나 공무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획일적인 걸음걸이로 똑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파리나 뉴욕의 거리를 걷는 정경을 상상해 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출국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일을하는 데 유니폼이 왜 필요한가? 평생 한 번도 중국에 와보지 못한 서양인들이 본다면 어! 중국인들은 원래 유니폼을 이렇게 입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자신을 왜곡시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국내에서는 결코 이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쓰고 입는 것만큼은 자유로우며, 결코 정부가 통일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왜 출국할 때는 이렇게하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병폐이다. 그러나 최근몇 년 사이에 중국인들에게 다소 변화가 생겼는데, 견문도 넓어지고 심리도 어느 정도 정싱적으로 돌아와 유니폼을 입는 등의 행동까지는 하지않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파리의 거리을 걸어가면 영화 속의 장면처럼 많은 파리사람들이 둘러싸고서 중국사람이 왔다고 구경하는 대신 아주 정상적으로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베이징 시의 찐빵같이 생긴 자동차 ' 빵차 택시[函的] '도 하나의 진풍경이다. '빵차'와 같은 교통수단은 싸고 실용적이어서 국내의 상황에 잘 어울리며 수입이 괜찮은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2년 전부터 빵차를 형편없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빵차를 힐난할 때마다 빵차 기사는 골머리를 썩이며, 소형 승용택시인 샤리(KrI1)역시 3기통으로 좁아 비틀어지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투덜댄다. 이럴 때마다 빵차 기사는 벙어리 냉가슴 않는 심정으로 언젠가는 샤리를 잡아 혼을 내주겠다고 벼른다고 한다 만약 아무도 이처럼 빵차를 욕하지 않았다면 빵차 기사라고 해서 샤리에 대해 잡아먹을 듯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 때문에 놀라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고위층 인사들이 갑자기 빵차 같은 교통수단은 등급이 너무 낮아 베이징 시의 미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이며 국제적인 대도시로 중국의 관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빵차를 없애고 등급이 높은 차로 교체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안전성이나 기타 기술 때문에 빵차를 도태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도시미관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도태시킨다는 것은 확실히 그 이면에 좋지 못한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들이 자신들을 위해 사는지 서구인들을 위해 사는지를 묻고 싶다. 현재 우리들의 경제수준으로는 빵차를 타는 것이 당연히 어울린다. 일반 국민들도 이런 실용적인 교통수단을 좋아한다. 우리들이 차를 타는 목적은 푸싱먼(復興門)에서 싼웬챠오(三元橋)나 혹은 다른 곳에 가기 위한 것이지 남에게 겉치레로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슨 영향을 준단 말인가? 독일에서는 택시도 모두 벤츠인데 그렇다면 우리도 모두 벤츠를타야 국위선양을 한다는 말인가? 사실 합리적이라는 서구인들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허영을 부리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빵차는 베이징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실제적으로 알려 주고 있으며, 신경과민인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그렇게 베이징 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 자기 생활의 편리와 자유로움을 위해 사는지 명확히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차를 타는지 알아보려고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다. 왕푸징(王府井)이나 젠구오먼(建國門)에서는 서양인들도 중고 자전거상점에서 산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다. 서구에 대해 과민반응하는 것은 앞으로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확실히 고쳐져야 한다. 애국이란 말을 매일 입에만 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축구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선수들이 경기 전후에 기립하여 국가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경기에서 져 화제가 안 된 것이지, 이겼다면 당연히 언론매체에서 어떻게 그렇듯 훌륭한 애국교육을 시켰느냐고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축구는 국가를 불러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력도 있어야 하고 작전도 잘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일일이 애국과 연결시켜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은 다소 병적이다. 관중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경기는 대 그루미아 전이었다. 이 축구경기는 중국인이 심판을 맡았는데,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 탓-그것이 애국심의 발로인지는 몰라도-에 상대편이 졌다.그 팀은 앞으로 중국에 와서 경기를 할 때는 자기네 심판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축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중국 각계의 인사들도 마찬가지로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나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심리현상이 우리에게 만연하고 있다. 한번은 버스에서 두 젊은이가 싸우자 자상해 보이는 한 노인이 그들을 말리면서 다음과 같이 훈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너희들이 어떻게 길거리에서 싸울 수 있느냐? 아주 몰상식한 짓이야. 너희들은 수도 베이징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 !'이런 식의 말은 베이징의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수도 베이징사람이므로 문화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싸우는 짓 따위는 자칫수도의 이미지를 망칠 우려가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도 이런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넓혀서, 수도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길거리에서 싸워도 좋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말 속에는 질서가 잡힌 안정된 곳에서 살고 싶은 염원보다는.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수도와 같은 한 나라의 관문과 같은 곳에서는 남의 이목을 염려해서라도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안타까운 우려가 담겨 있다. 우리들 속에는 확실히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마음이 많이있다. 사실 우리들의 환경. 옷. 생활방식, 문화기준 등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조건은 우리들의 위생과 안락한 생활을 위한 우리 자신들의 필요성이다. 예를 들면 식당의 위생, 시장의 질서등은 우리들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단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화는 진정한 문화라고 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작년에 베이징에서 세계여성대회를 개최했는데, 여러 곳에서 소위 '위생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국제적인 회의를 개최하려면 위생적이어야 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회의가 끝난 뒤에 베이징의 위생상태는 옛날보다 오히려 못해졌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은 진정한 문화가 아니며,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깊은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당연히 세계의 많은 나라나 많은 지역에도 우리와 같은 이런 심리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처럼 심한 곳은 드물다. 이와 같이 단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동에서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찾아와야만 그나마 가까스로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그 '문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수동적으로 강제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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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땅 위의 직업
강원도 사북에 간 김 기자는 막장 광원 감장순 씨를 따라 수직 갱으로 들어갔다. 먼저 탈의실에 들어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헤드 램프가 달린 헬멧을 쓴 뒤, 작업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7백 미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갱차를 타고 수평으로 1천 2백 미터까지 가서, 다시 갱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미로와 같은 갱 속은 춥고 어두웠다. 지하 사무실에서 막장으로 가는 지도를 보았으나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갱 양편으로 탄가루가 섞인 검은 지하수가 급히 흘러갔다. 갱 바닥은 탄가루와 뒤범벅이 돼 장화 신은 발이 푹푹 빠졌다. 김 기자는 오직 헬멧에 부착된 희미한 불빛만 의지하고 김장순 씨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 30여 분쯤 걸었을까. 더 이상 갱도가 없는 곳이 나타나고, 갱벽 한가운데를 비스듬히 위로 뚫은 새로운 갱도 하나가 나왔다. 두세 사람 정도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좁은 갱 속을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면서 들어가 보니 그곳이 바로 지하 막장이었다. 광원들은 좌우로 버팀목을 세우며 안으로 안으로 파 들어가고 있었다. 김장순 씨가 한 번씩 곡괭이를 내리찍을 때마다 탄 덩이가 떨어져 나왔고, 떨어져 쌓인 탄덩이는 경사진 배출구를 통해 갱도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김 기자는 곡괭이 질을 하는 김장순씨를 지켜보며 막장에 널브러져 있는 버팀목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막장 안은 지열 때문인지 몹시 더웠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도 없는 땅 속 저 깊은 곳, 어딘지도 모르는 한 지점에 한 마리 벌레처럼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막장에서는 잠을 못 자게 합니다. 담배도 못 피이지요. 그런데 어떤 때는 앉은 채로 깜빡 졸 때도 있습니다."
김 기자는 곡괭이 질을 하는 중간 중간 한 마디씩 던지는 김장순 씨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를 취재한다는 일이 자기로서는 너무나 건방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김장순 씨가 막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다시 갱 속에 있는 지하 사무실로 가 그곳에 보관해 둔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어둠 속에서 손도 씻지 않고 작업복도 입은 채 그대로였다.
"드세요. 우린 여기서 이렇게 점심을 먹습니다. 그래도 이때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김장순씨가 김 기자의 몫으로 싸 온 도시락을 건네주면서 허옇게 이빨을 드러내었다. 김 기자는 김장순씨가 건네준 도시락을 먹으면서, 광원이 된 지 몇 해나 되는가, 고향의 농협 빚은 다 갚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가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건 물론 땅 위의 직업을 갖는 일이지요.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잘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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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채찍으로 읽는 역사, 길잡이로 읽는 역사.
식민지 사관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였고, 명성황후(민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시해된 지 1백 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으며, 또 한일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였던 탓에 연초부터 역사적인 이벤트로 가득할 것이라는 예견이 적중하더니 마침내 연말에 이르러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어 법정에 서는 꼴불견이 연출되면서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여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 인식을 체험하게 되었다.
역사는 죽어 있는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맥락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오늘에 이르는 5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가장 소리 높여 외친 말은 '일제 36년'이라는 원한에 찬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치욕의 36년보다 더 긴 세월을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사관 하나 말끔히 불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간에 있었던 우리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때묻고 구겨져 있었으며, 또한 얼마나 커다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국경의 개념이 없는 시대로 전개된다. 모든 정보가 멀티미디어라는 새로운 통로를 통해 개개인의 pc로 집약되는 판국일수록 민족간의 고유한 문화가 그 민족의 자긍심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는데, 아직도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조선왕조'라는 말 대신 '이조'라는 비속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조선백자'라고 써야 할 자리에 '이조백자'라고 쓰고 있는 무지가 상존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간신문의 중간제목까지 그렇게 쓰여지고 있다면 어찌 되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이른바 해방세대들까지도 그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현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역사 인식이 병들어 있는 기성세대의 전도된 가치관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그들의 역사 인식이나 지도력이 또한 한심한 지경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지로 지배당했던 치욕의 36년보다 더 긴 세월을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살면서 굴욕적이고도 수치스러웠던 식민지 시대의 대표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때묻고 찌든 우리의 역사 인식까지 군사독재 시대의 산물로 돌려버릴 수는 없질 않겠는가. 그럼에도 역사교육은 날로 더 뒤쪽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다른 교과의 커리큘럼도 우리의 정서보다 구미의 정서를 상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 우리의 교육환경이다. 교육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대학입시 제도의 개선에만 매달릴 뿐, 견실한 한국인을 길러내기 위한 한국인의 정서를 소중히 하는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개편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환경이라면 어찌 되는가. 바로 이같이 때묻고 잘못된 역사 인식이 광복 50년이 되도록 민족의 정통성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하였고, 스스로 민족의 자긍심을 훼손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굴욕보다도 더 암울한 이 현실을 깨부수지 못하고서는 결단코 세계화를 주장하는 지금의 현상은 그야말로 황당한 몽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비근한 예가 되겠지만, 우리의 근대사가 흥선대원군의 유아독존적인 아집 때문에 개항에 실패했다든지 흥선대원군과 중전 민씨와의 끝없는 갈등과 대립으로 정치부재의 현상을 빚어내면서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는 등의 터무니 없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잇는 것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역사 인식이다. 그들이 과연 우리 민족의 미래를 창출해 낼 꿈 많은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진로를 열어 줄 수 있을지 비감에 잠기기 보다 차라리 암담해질 때가 많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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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과 다윗
구약 성경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거인.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사람과 싸움을 벌여 '유다'의 소고라는 곳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블레셋 사람의 진영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거인이 나타나더니 이스라엘의 진지로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골리앗' (골라이아스), 키는 6큐빗(3.8m), 머리에는 청동의 투구를 쓰고 몸에는 5천세겔(약 75킬로)의 비늘 모양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진지를 향해 무시무시한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나하고 결투하자. 내가 지면 우리 군사는 모두 너희들의 노예가 되마. 그러나 내가 이기면 너희들은 우리에게 항복을 하라." 이렇게 4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나와서 싸움을 걸었으나, 그의 생김새에 겁을 집어먹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서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때마침 종군하고 있는 형을 찾아 이스라엘의 진지에 왔던 '다윗' 소년 (후에 이스라엘 왕)이 '골리앗'을 보더니 분연히 나가서 상대하겠다고 했다. '사울'왕은 '다윗'에게 갑옷을 주었으나 '다윗'은 그것을 입지 않고 한 손에 지팡이, 한 손에는 돌 다섯 개를 넣은 자루를 들고 거인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다. '골리앗'은 비웃으며 단숨에 죽이겠다고 덤볐으나, '다윗'소년이 자루에서 돌을 꺼내어 힘껏 던지자 보기좋게 거인 이마에 명중, 거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블레셋 사람들은 총퇴각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골리앗'은 거인의 대명사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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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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