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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1 호
4339.12.21 (11.02)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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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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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환각의 나비’ 등 그때 그 詩·소설 잇따라 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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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을 모은 책 ‘환각의 나비’ 등 몇 권의 책이 새로운 독자들을 위해 복간됐다.
‘환각의 나비’(푸르메)는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엄마의 말뚝 2’ ‘꿈꾸는 인큐베이터’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환각의 나비’ 등 5개 중·단편을 모았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과 ‘꿈꾸는 인큐베이터’는 태아살해(낙태)를 경험한 여성의 복수를 그렸으며 박완서의 출세작인 ‘엄마의 말뚝’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현대 역사의 비극 속에서 생떼같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홀어머니의 상처를 다룬다. 또 ‘환각의 나비’는 젊어서 남편을 잃고 세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홀어머니의 내밀한 아픔을 그렸다.
박완서씨가 1999년 출간했던 묵상집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역시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시냇가에 심은 나무)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됐다. 96년부터 98년말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 94편을 수록했다.
지난해 30년 만에 두번째 시집 ‘어느 날 꿈에’(창비)를 냈던 최민씨(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의 첫 시집 ‘상실’(문학동네)도 복간됐다. 불온성을 이유로 판금돼 없어졌던 이 시집에는 젊은 시인의 성장통과 정체성 찾기의 어려움이 담겨있다.
김수경씨의 장편소설 ‘자유종’(열음사)도 26년 만에 복간됐다. 작가가 80년대의 독재와 민주화투쟁 와중에 느낀 정신적 망명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이 소설은 변혁지향적 실천성과 도덕성이 요구되던 시대에 노처녀 시인을 주인공으로 마약과 섹스라는 위험한 주제를 그린 파격으로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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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를 잃으면 나를 알 수 없다. / H.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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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바다를 건너온 보따리 장사부대 - 이종서(서울대 박사과정)
옛날에 중국 상인단의 두목(두강)으로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고려의 예성강에 이르러 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났다. 하두강은 그녀의 남편에게 내기바둑을 걸어 일부러 지고는 다시 두 곱을 걸었다. 남편은 입맛을 붙이고 부인을 걸었다. 하두강은 단번에 이기고 부인을 배에 싣고 갔다. 남편은 후회하고 한탄하면서 노래를 지었다. 한편, 그 부인은 옷 매무새를 견고하게 하였으므로 하두강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을 실은 배가 바다에 들어섰을 때, 뱃머리가 돌고 가지 않았다. 점을 치니 `정절 있는 부인이 신명을 감동시켰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파선하리라`는 점괘가 나와 두려워 돌려보냈다. 부인 역시 노래를 지었는데 후편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사>의 편찬자는 ‘예성강곡’이라는 노래가 세상에 불리게된 사연을 알리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을 다른 면에서 보면 중국 상인이 고려에 와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무역선의 최종 정박지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였다. 이규보는 “조수가 들고 나니 오가는 배는 머리와 꼬리가 잇대었어라. 아침에 이 다락(예성강루)밑을 지나면 한낮이 채 못되어 남만(남방의 이국)의 하늘에 들어 가는구나”라고 노래할 정도로 벽란도는 번창했다. 이들 벽란도에 정박한 무역선은 어떠한 위험을 겪으며 고려에 왔을까? 선주와 상인들은 대개 어느 나라 사람있을까? 무엇을 팔고 무엇을 사 갔을까?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
고려시대에 바다에서 배를 추진시키는 기구는 노와 돛뿐이었는데 노는 근해의 짧은 거리나 좁은 해협을 항해하는 데는 유용하였다. 그러나 속도가 느려 먼 거리를 가기에는 무리였고, 역풍이라도 불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선은 온전히 돛에 의지하여 먼 거리를 항해하였다. 그리고 돛을 빌어 배를 가게 하는 것은 계절에 따라 한편으로만 부는 계절풍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오는 무역선들은 주로 절강성의 명주(현재의 닝뽀)에서 출발하여 연해를 따라 북상하다가 정동으로 방향을 잡아 우리 나라 흑산도를 경유, 예성강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올 때는 남서풍을 타고, 갈 때는 북동풍을 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월별 평균 풍향을 보면, 겨울(12- 2월)에는 북서풍이 많이 불고, 여름(6- 8월)에는 남동풍과 남서풍이 많이 분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는 풍향의 변화가 몹시 심하다. 이 때문에 정확히 일치하는 바람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당시 사람들은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로 해결하였으니, 여덟 방향의 바람 가운데 정면에서 부는 역풍만 아니면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었다. 이해를 위하여 고려 전기 송나라 사신을 따라 왔던 무역선 한 척을 기록대로 복원해 보자. 길이는 대략 30여미터이고 깊이는 9미터, 너비 5. 5미터이다.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V자형으로 가파르게 좁아들었다. 이렇게 하면 밑이 넓은 배보다 심하게 흔들리는 대신 쉽게 전복되지 않아 큰 물결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돛대는 둘인데 앞의 것은 24미터, 뒤의 것은 30미터이다. 돛의 너비는 50폭으로 양 옆에는 풀로 짠 날개 모양의 돛인 뜸을 별도로 두었다. 큰 돛대 꼭대기에는 야호범이라는 풍향 조절용의 작은 돛을 달았다. 야호범이란 이름은 들여우와 같이 조화가 많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뱃머리(이물) 양 기둥 사이의 바퀴에는 약 150미터 길이의 닻줄을 감았다. 선미(고물)에는 중심키 하나와 보조키 셋을 달았다. 그리고 양쪽에 5개씩 노 10개를 정착하였다. 쌀 2천가마를 실을 수 있고 승선인원은 모두 60명이다. 이 배는 다른 배들에 비해 특별히 큰것이 아니다. 상인들은 바람이 바로 뒤에서 불면 고정 돛을 높이 올렸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흔히 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양 옆의 뜸을 펼쳐 이리 저리 움직여 방향을 잡았다. 뜸과 키를 이용하면 비록 옆에서 부는 바람을 타더라도 갈지자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너무 강하거나 약하면 야호범을 조정하여 속도를 조절하였다. 역풍이 불거나 돌풍에 밀리게 되면 돛과 뜸을 황급히 내리고 닻을 던져 배를 고정시켰다. 조류가 급히 흘러 배가 밀리거나 암초사이를 지날 때는 온 선원들이 노에 매달려 정확하게 길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송나라 명주에서 출발한 배들은 대력 10일에서 20일이면 고려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계절풍이 돕고 항해술이 발달했다 해도 그것이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했다.봄 가을 기압이 바뀔 때면 느닷없이 돌풍이 일었고 여름에는 태풍이 엄습하여 돛대를 부러뜨리거나 배를 한쪽으로 급하게 기울였다. 거기에다 큰 물결이 일어 배를 쳐 전복시켰다. 또한 겨울 바람은 지나치게 거세어 항로를 바로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많은 배들이 물속에 가라앉거나 남방으로 떠밀렸다. 사신을 실은 배조차 상당수 파선하여 국가 예물을 잃은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다. 고려말 정몽주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깨어져 표류하다 간신히 구원되었는데, 이 때 10명의 사절단 가운데 겨우 2명만이 살아 남았다. 좋은 장비를 갖추고 특별히 경험 많은 선원들을 채용했을 사절단의 배가 종종 난파했을 정도이니 그보다 낡고 규모가 작은 상인들의 배는 더욱 위험하였다. 따라서 상인들은 반드시 좋은 바람을 기다려 출항하였는데, 올때는 대개 하지 무렵부터 부는 부드러운 북풍을 타고, 갈 때는 음력 8, 9월 무렵의 아직 거세지지 않은 남풍을 탔다. 그러나 때로는 해가 바뀌도록 알맞은 바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갈 때가 올 때보다 어려움이 심하였다. 가을에는 바람이 변덕스러워, 바다로 나갔다가도 역풍에 떠밀려 되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하두강도 바로 이 역풍에 곤욕을 치렀다고 짐작된다. 결국 2년 혹은 3년이 되도록 돌아가지 못하여 끝내는 고려에서 부인을 얻고 자식까지 두는 상인도 있었다.
황해를 가로질러 송나라에서 오는 항로로는 우선 산뚱반도 북단의 등주를 떠나 동쪽으로 황해도 북부에 이른 다음 장산곶을 돌아 예성강으로 들어오는 북로가 있었다. 이 길은 거리도 짧고 큰 위험도 없었으며 비록 난파하더라도 어쨌든 해안에 도착할 확률이 컸다. 다만 장산곶을 돌 때, 물결이 급하여 파선할 위험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북로로 가는 배들은 장산곶 부근에 이르면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곳이 곧 심청이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이다. 이렇듯 좋은 항해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왕래하는 배들은 점차 줄어 들었다. 대신 남로의 교통이 활발해졌다. 거란, 여진 등 송나라에 적대적인 북방민족이 중국 북쪽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로를 이용하면 자칫 그 경내로 들어갈 위험이 컸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강남 개발이 진척되어 중요한 물산은 대개 그 곳에서 산출되었다. 동남아시아나 인도, 아라비아의 물품을 실은 배들도 강남의 항구들에 기착하였다. 따라서 고려에 오는 상선들은 대개 강남에서 물품을 싣고 출발하였으니, 출발지로는 명주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길은 북로에 비해 거리가 배나 되었다. 바다 또한 위험하였다. 서해는 깊이와 바닥의 구성물질, 해류에 실린 먼지 등으로 여러 가지 빛깔을 나타낸다. 선원들은 바다 빛깔을 보고 출항지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짚어낼 수 있었다. 명주에서 출발한 배는 백수양에서 황수양, 흑수양의 순으로 바다를 지났다. 백수양은 양쯔강의 앞바다로 희뿌연 민물이 다량 흘러들고 수심이 얕아 흰 빛을 띠었다. 중국에 가는 배는 바다 빛깔이 희게 변하면 목적지에 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수양은 누런 빛을 띠는 데서 얻은 이름이다. 서해를 보통 황해라 하는 것은 이 황수양으로 서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몽고 고비사막에서 봄날이면 강한 서풍이 불어 황토 먼지(황사)를 날리는데 그것이 두텁게 쌓인 대지 위로 황하가 흘러 이렇게 된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되지 않을 일을 `백년하청`이라 하는 것은 황하의 물 빛깔이 결코맑게 될 수 없음을 빗댄 말이다. 이 바다에 이르면 선원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이는 물빛이 사람을 현혹시켜서가 아니라 바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황하에서 유입된 많은 토사는 물줄기를 따라 천여 리를 흘러 내리다가 마지막에 군데군데 모래 언덕을 높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물빛이 누렇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배가 이 위를 스쳐 키가 부러지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및창이 V자형으로 좁아든 형태였으므로 얹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곧 전복될 판이었다. 그래서 황수양을 지날 때면 추를 드리워 깊이를 재면서 조심조심 나가야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여행기에는, “배가 갑자기 모래톱 위로 올라가기에 엉겹결에 돛을 내렸더니 돛대가 두 동강이 났다”,“낮에 세 개의 보조키가 부러졌고 밤에 중심키가 또 부러졌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이 곳의 위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려운 황수양을 지나면 이번에는 바다가 점점 검은 빛을 띠게 된다. 이는 깊이가 깊어지면서 햇빛이 투과하지 못하여 생긴 현상인데 깊은 만큼 파도 또한 높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 바다를 끝이 없다는 뜻에서 ‘무저곡’이라 불렀다.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 곳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물빛은 어둠이 깊이 파고들어 검기가 먹과 같다. 졸지에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다 잃는다. 성난 파도가 내뿜고 닥치는 것이 산들이 치솟는 듯하다. 배가 파도 위로 오르면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하늘의 해가 밝고 쾌청할 뿐이다. 그러다 우묵한 파도 밑으로 내려가게 되면 파도의 높이가 하늘을 가려,위장이 뒤집히고 헐떡이는 숨만 남는다. 쓰러져 토악질을 하며 밥알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흑수양을 거의 지나면 물빛이 차차 맑고 푸른 빛을 띠게 된다. 이 바다에 이르면 뱃사람들은 그간의 위험에서 벗어났음을 축하하고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맑고 푸른 물빛은 고려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기 때문이었다. 대개 흑산도 부근의 바다가 이에 해당하는데, 현재에도 인천 앞바다의 누런 물빛이 만리포나 변산에 이르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선은 흑산도를 스쳐 군산도(군산은 조선말까지만 해도 섬이었다)에 이른 다음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왔다. 도중에 태안반도 부근의 사나운 조류만 조심하면 이제 벽란도에 도착한 것이나 진배 없었다.
뛰어난 조선술, 빈약한 해외진출 고려와 송나라 간의 무역품은 주로 송나라 상인들이 실어 날랐다. 이들은 중국과 남방의 물화를 싣고와 고려의 물건과 교역해 갔다. 물론 고려 상인도 중국에 진출하였고, 일본 상인도 가끔 드나들었지만, 송나라 상인의 활동에 비하면 미약하였다. 그렇다고 고려의 선박건조기술이 송나라에 뒤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배는 이미 통일신라 때부터 튼튼하기로 해외에 정평이 나 있었다. 고려 후기 고려. 원 연합군이 일본정벌에 나섰다가 돌풍을 만났을 때에도, 중국 배는 다 부서졌지만 고려의 배만은 온전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조선술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하지 못한 원인은 주로 국내의 시장 규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는 값비싼 물화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고려에서 소비하는 해외의 산물은 대개 지배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치품에 국한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에는 대규모 선단을 운영할 정도의 상업자본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송나라에서는 재정안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대외무역을 장려하였으며, 상업자본도 급속히 성장하였다. 조선술이 뛰어난데다 나침반의 발명 등으로 항해술 또한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앞시기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인도와 동남아의 물품을 실어 날랐던 것과 달리 이제는 송나라의 선단이 멀리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와 송나라간의 무역은 주로 송나라 상인의 손을 빌어 이루어졌다. 이들의 방문 기록을 통계로 보면 260여년 동안 약 130여회에 걸쳐 총인원 5천명 정도가 내왕하였다. 남아 있는 기록이 이 정도이니 기록에 빠진 것과 밀무역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송나라 상인이 대부분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상인단이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식국 상인들이 바로 이들이다. 대식국은 아라비아를 일컫는 이름으로 1024년(현종 15)과 이듬해, 그리고 1040년(정종 6)에 와서 열대 특산의 몰약, 베트남 남부지방의 향료, 수은 등을 바쳤다. 이들의 방문은 세 차례에 그쳤는데, 이는 이익이 작아 굳이 내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송나라 상인의 중계로 고려 물품을 계속 사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코리아’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단장수 왕서방과 고려인삼 벽란도에 도착한 상인들은 대개 사헌무역의 방식으로 물화를 교환하였다. 사헌무역이란 물건을 왕에게 바치면 왕은 대가를 사여해 주는 교역방식이다. 고려에서는 외국 상인을 일종의 사적인 사절단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지고 온 것을 모두 바치는 것은 아니었다. 궁중이나 관에서 필요로 하는 좋은 물품만 바치고 나머지는 시장을 열어 팔도록 하였으므로 민간인도 해외의 물품을 살 수 있었다. 송나라 상인이 가져온 물품을 대금으로 환산하면, 비단류가 가장 많은 액수를 차지할 것이다. 당시 송나라의 수출품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단과 자기였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에 뒤지지 않는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만큼 자기 수입은 소량에 그치고 주로 비단을 수입하였다. 재수 없는 어느 송나라 상인은 비단을 무려 6천여 필이나 고려 관청에 떼였으니 한 번에 얼마나 많은 양을 싣고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단 다음으로는 차와 약재를 들 수 있다. 고려는 불교의 영향으로 차 마시는 풍습이 귀족과 승려간에 퍼졌으므로 양질의 중국차를 많이 수입하였다. 또한 중국 의서에 따라 약을 처방했으므로 중국 및 남방의 약재를 수입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문종이 중풍에 걸려 송나라에 약재를 요청했을 때, 100여 가지를 보내온 사례를 볼 수 있다. 서적 또한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고려 지배층은 문화적 욕구에서 송나라에서 펴낸 책들을 적극적으로 구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잡음이 일었다. 고려인은 송나라에서 유출이 금지된 지도와 지리서까지 사오려 하였으며, 송나라 상인들은 우방국 고려에 판다는 명목으로 책을 싣고는 슬쩍 북방의 적국 요나라로 들어가 10배의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서적을 둘러싸고 국제 정보전이 벌어졌던 셈이다. 악기와 음악도 수입되어 고려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다양한 상품들이 수입되었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도 향료, 향목, 칠기, 남방의 과일, 물소뿔, 상아, 비취, 마노, 수정, 호박등 다양하다. 재상가에서 기르던 공작도 여기에 추가될 것이며 앵무새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려에서는 무엇으로 이들 물화를 사들였을까? 당시 국내에서는 화폐가 활발하게 유통되지 않았으므로 물품으로 대금을 지급하였다. 일종의 구상무역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나간 것은 삼베와 인삼이었다. 삼베는 국내에서 화폐 대용으로 사용한 품목인 만큼 매우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모시는 질이 좋아 한 번에 몇만 필 단위로 수출되었다. 인삼은 중국에서 가장 오랜 약초서인(신농본초경)에 이미 상품의 약재로 정평이 나서 송나라 상인에게 큰 이익을 남겨 주었다. 종이, 먹 등도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려의 종이는 매우 질긴데다 백옥같이 희고 윤이 나 최상품으로 간주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좋은 종이를 평할 때 “고려 종이 같다”고 할 정도였다. 먹도 많이 수출하였는데 종이와 달리 큰 호평은 받지 못하였다. 색은 칙흑같이 검으나 광택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동파는 “고려먹을 가는 것은 숯을 가는 것 같다”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고려먹은 입자가 미세하고 색이 검은 장점이 있어, 중국먹과 혼합하면 좋은 먹이 되었으므로 수출이 끊이지 않았다. 수출품 명단에서는 이밖에도 잣, 연적, 자수정, 돗자리, 칠, 부채, 나전칠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귀족의 사치품 수입과 금. 은의 유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는 무역수지면에서 적자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발달한 문화와 값비싼 사치품을 주로 수입한 반면, 수출품은 인삼을 제외하면 별로 고가품이라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수출로 수입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국제 거래에서 화폐로 대용하던 금, 은 등의 귀금속으로 적자분을 메워야 했다. 국내의 재화가 송나라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상당량의 금. 은을 비축했던 것 같다. 문종 때 흥왕사에 세운 금탑은 무려 427근의 은으로 속을 대고 금 144근으로 겉을 입혔다. 한 근이 600그램이니, 은이 256.2킬로그램, 금이 86.4킬로그램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다. 또 몽고의 1차 침입 때, 그들을 달래려고 보낸 금과 은이 각각 140여 근과 3천4백여근이었다. 정부에서는 금 수백 킬로그램과 은 수천 킬로그램 정도는 늘 확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금. 은은 거의가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었다. 공물의 양을 정한 규정 가운데 ‘황금10량, 은 2근’이라는 기록이 있고, 금과 은이 나는 고장은 특별히 관리하여 별도로 많은 수량을 수취하였다. 고려 지배층은 백성들이 애써 바친 금. 은으로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적자분을 메워 나갈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신분별 소비 제한’이라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일례로 최승로의 주장을 들어 보자. 그는 “신라 때는 귀천의 구별을 위해 백성이 중국산 비단을 입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관리들이 충분히 입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재력만 있으면 중국 비단을 입으니, 가난하면 비록 벼슬이 높아도 갖출 수 없습니다. 관리들만 중국비단을 입게 하고 평민은 거친 국산 명주만 허락합시다”라고 건의하였다. 아마도 고려에 들어와서는 소비에 제한을 두지 않아 수입비단 값이 꽤나 올랐던 모양이다. 그는 신분간의 귀천을 밝힌다는 명분하에 피지배층의 소비를 규제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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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보리암에서 되돌아온 지갑
한 삼년 전의 일입니다. 그 해 여름이 끝날 즈음, 저와 몇몇 친구들은 남해로 야유해를 떠났습니다. 출발할 때 하늘이 조금 흐렸엇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한두 방울 빗방울을 흩뿌리더니 남해에 도착했을 때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젊은 혈기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결론 짓고 경치가 좋다는 보리암이라는 절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빗속을 뚫고 산에 오른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절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들오들 떨며 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엔 우리처럼 비를 맞고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엔 조그마하고 깊숙한 동굴들이 많았는데 모두 정성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약수도 한 무금 들이키고 나서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제 지갑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비 때문에 우왕좌왕하다가 어디엔가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습니다. 기분이 몹시 언짢았지만 모처럼 온 여행이니 즐겁게 놀다 왔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저를 찾는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 사람은 며칠전 보리암에 갔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제 지갑을 주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소포로 지갑을 부쳐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뒤에 정말로 소포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마치 귀한 것이라도 들어 있는 듯 깨끗이 싸여 있는 포장을 풀어 보니 그 속엔 지갑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를 맞아 엉망이 되었을 지갑을 얼마나 닦았는지 반들반블 윤이 나고 있었습니다. 지갑을 손에 쥔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성득 님/경남 통영시 봉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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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8 - 사회철학의 아버지: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1830-1842) 그때 세계에서는 1814: 청, 영국에 홍콩할양 등 약정 1842: 오스트리아 도플리, 도플리 효과 발표
콩트 [Comte, Auguste] 정식 이름은 Isidore-Auguste-Marie-François-Xavier Comte. 1798. 1. 19 프랑스 몽펠리에~1857. 9. 5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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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역사에 가장 큰 변혁을 일으킨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산업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혁명이었다. 이러한 경제사회와 정치계의 커다란 변혁은 서구사상에 몇 가지 문제성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 하나는 도시화에 따른 변화다. 조용한 농경사회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던 옛날 삶들은 정신적인 삶 자체가 개인중심이었다. 문화, 예술, 학문, 도덕, 종교 등 모든 문제가 개인에서 개인에로의 길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떤 사상가나 예술가의 정신과 삶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또 그렇게 살면되었다. 그러다가 도시화가 불가피하게 되고 정치적 집단과 경제의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개인이 합해진 사회가 아니라 사회 속의 개인이 되었고, 사회에 예속된 자아라는 생각이 점차로 굳어지게 되었다. 서구사회에서 일어났던 두 개의 혁명은 그 불가피성과 절대성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회철학과 사회과학이 발달되며 어떤 사회적 이념과 사상이 필수적이 된다. 서양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회과학 및 사회철학이 19세기 중엽부터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에 있어서는 공리주의가 정착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이 탄생했다. 때를 같이하여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등단하게 된다. 뒤늦게 나타난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도 일조의 사회철학이라 보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사회과학적 과정을 밟지 못한 나라들이 오늘에 있어서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가 대열에 끼어 있으나, 어딘가 정신적 선진국가라고 인정받기 어려운 것은 일본다운 사회과학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 좋을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도 실학사상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다면 우리나름대로의 사회과학적 사고가 정착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정치적 퇴락과 일제의 침략이 모든 것을 수포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아쉽고 원망스러운 역사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대학에서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했다는 사람들도 사회에 나오면 사회과학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없다. 그것은 서구의 학문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였을뿐, 그것들이 우리의 삶의 내용과 근거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성인들도 뿌리와 밑둥이 없는 가지와 잎과 꽃에 해당하는 지식의 지엽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은 오늘의 기계와 기술을 앞세운 산업사회와 접선되어 흔히 말하는 메커니즘 사회로 변질된다. 먼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러한 사회철학 및 사회과학을 대표하는 한 철학자가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A.Comte, 1798-1857)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콩트를 지금도 사회과학의 창시자 및 사회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러주고 있다. 콩트는 비범한 천분을 갖고 태어나 제멋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파리 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입학이 보류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우수했다. 콩트는 생계를 위해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그렇듯이 학원의 선생 같은 직업을 택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으나 교수들의 학문적 수준에 실망했었기 때문이다. 또 교수들도 그런 거만하고 앞선 질문과 주장을 내세우는 젊은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는 한때 별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허영심이 강한 그 여성은 변호사인 다른 남성으로부터도 생활비를 얻어오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절망과 젹분을 참지 못한 콩트는 자살을 하려고 강물에 뛰어든 일까지 있었다. 지나가던 군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훌륭한 저서와 사상은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학구생활로 뜻을 모은 콩트는 상하 두 권으로 되는 거작이면서 대표작인 "실증철학 강의"에 전념하였고, 30대 전반기부터 그 학문적 업적이 성숙, 발전의 단계에 이르러, 10여 년간의 노구 끝에 하나의 고전에 해당하는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그 앞 책에는 그 당시까지 있었던 모든 학문을 종합, 정리하여 새로운 영역으로 개척하는 획기적 업적을 남겨주었고, 그 후반부는 그 당새까지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사회과학의 과제들을 취급했던 것이다. 그의 철학적 업적은 이 창의성이 넘치는 사회과학분야에서 결실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같은 영역의 학문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그 창의적 업적은 역시 콩트에게 돌려 좋을 것이다.
89 - 세 사람의 사회학자: 콩트와 밀 부자(1806-1873) 그때 세계에서는 1856년: 청, 애로호사건 발생 1857년: 인도, 세포이 반란 일어남
콩트는 세계의 정신사적 발전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 처음 단계는 종교적 세계관의 시기다. 이성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과학적 사고가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인류는 종교적사고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육이 보급되고 인간이성의 계발되면서 인류는 종교보다는 철학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철학의 지붕 밑에서 안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본질과 관념의 형이상학적 철학의 허구성을 깨닫고 철학적 사고의 빈곤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류는 제3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것이 다름아닌 실증과학의 시기인 것이다. 막연히 단편적인 과학들의 종합이 아닌 과학적 본질과 바탕을 만드는 실증성이 입증되는 과학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런 의미의 실증과학, 실증주의 사상을 창설하려고 시도한 것이 콩트의 학문적 사명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더이상 종교, 신화 등의 신비주의에 머물 필요가 없으며, 철학적 허구와 공론에 붙잡혀서도 안된다. 역사는 통일된 과학적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과학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것은 실증과학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사회과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으로 믿어졌다. 영국인들이 주장하는 경험보다는 사실의 학이 중요하며, 모든 경험의 내용은 실증적인 과학적 비판과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주목할 만한 사상과 사회과학 이론이 제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오랫동안 프랑스 사회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질 못했다. 콩트는 알려지지 않는 재야의 사상가였고, 대학에서는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지성사회의 전통에서 그의 사상은 서자 취급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콩트의 학설이 영국에서는 수용되어 그 값을 인정받게 되었다. J.S.밀 같은 대표적인 철학자가 콩트의 중요성을 인정했고, 심지어는 심한 재정적 곤경에 처해 있는 콩트를 도와주는 일까지 감당해주었다. 그러던 중 서서히 콩트의 학설이 프랑스에서도 인정받게 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는 콩트의 사생활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반기 여생은 오히려 실증정신보다는, 그의 인간적 성격의 본질 탓이었을까, 자가당착을 일으키는 몇 가지 사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적 이상사회를 제시하기도 했고, 이성과 인류에 호소하는 종교관을 제창하며, 자신이 마치 그 교주격의 위치에 머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역시 사생활에서는 병적인 미숙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명실 공히 사회과학의 아버지로서의 위상을 차지해서 좋을 철학자였다. 우리가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가장 많은 학생들의 애독서의 하나가 존 스튜어트 밀(J.S.Mill, 1806--1873)의 "자서전"이었다. 학생들의 독서 및 정신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인 가와이라는 교수가 있었느데, 그느 밀의 자서전을 네 번이나 읽었다는 애기를 해주었다. 두 번쯤은 읽어서 좋은 책이다. 밀은 어느 면에서 보았을 때 영국적인 성격과 분위기를 알려주는 철학저였다. 그는 학교교육은 받은 바가 없이 아주 어려서부터 부친의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친구인 제레미 벤담과 더불어 영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공리주의 철학사상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자신을 갖고 아들 밀에게 조기교육을 실시했다. 자신과 같은 철학가를 만들고 싶었다. 미갤 자신도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 앞으로 학자적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고전어와 외국어는 다 터득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부친은 그에게 학자 및 철학자로서 필요한 저서와 논문을 소개해 읽게 하였고, 그 토론에 참여케 해 일찍부터 철학적 사상의 정도를 걷도록 이끌어주었다. 어떤 심리학자는 그가 괴테에 버금가는 세계최고의 천재였다고 평가해주고 있다. 그의 직업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인도회사의 중직을 맡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교수가 되어야 학자로 인정받고, 프랑스에서는 교수가 아닌 학자가 간혹 있어도, 영국에는 일반 사회직업을 가지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의사나 법률가는 말할 것도 없으나, 일반직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영국의 대표적인 학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밀이 바로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말년의 밀은 저명한 사상가로 인정을 받았고, 그의 사회철학인 공리주의와 경제학의 영향으로 국회의원의 직책을 맡기도 했으나, 그 분야에서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편이다. 옛날의 플라톤 때부터 철학자는 사상과 이상 및 사회이념을 제시해줄 수는 있으나 정치일선에서 성공한 예는 별로 없었다. 밀도 그 전철을 밟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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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고독'이란 말을 함부로 말씀하지 마셔요.
여러분! 고독할 때가 많습니까? 그래서 '고독'을 씹는다는 말을 곧잘 하지요? 이 '고독'은 물론 한자말입니다. '외로울 고, 홀로 독'이지요. 그러나 어느 때가 외로울 때고, 어느 때가 홀로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고독한 사람은 부모를 여의고, 짝을 잃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아'니 '독신'이니 하는 말을 하지요. 정말로 '고아'와 '독신'을 겸하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때가 진실로 고독한 때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고독하다'고 말씀하시지 마십시요. 그리고 고독한 척도 하지 마십시요. 물론 오늘날에는 그 뜻이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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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녹색 지팡이와 톨스토이
톨스토이 [Tolstoy, Aleksey Konstantinovich, Graf] 1817. 9. 5(구력 8. 24) 상트페테르부르크~1875. 10. 10(구력 9. 28) 러시아 크라스니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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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은 남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 러시아 문학사에 그만이 홀로 존재한단 말인가. 중국의 이백과 두보처럼 러시아에서는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쌍벽으로 꼽힌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4년 먼저 태어났고 19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1910년 10월 28일 새벽 3시, 가을 밤의 어둠을 틈타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리야나의 집을 나섰다. 자기가 태어나고, 또 평생의 대부분을 보낸 집이었다. 이 가출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톨스토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괴로운 생활을 강요하는 아내로부터 도망해 나왔다고 말하면 간단할 것이다. 아니면 가족의 비교적 사치스런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세상을 떠나 농부와 노동자들 틈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그의 딸 타티야나가 쓴 <딸이 본 톨스토이>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이다. 톨스토이는 83세가 되던 해, 그러니까 죽기 열흘 전인 10월 28일, 미명에 집을 나섰다. 내가 생활해 온 사치한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나이 많은 늙은이들이 잘하는 식으로 떠나가려오.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그는 작업복 차림에 망토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가진 것이라곤 평생 써온 펜과 종이가 전부였다. 정부로부터 받은 백작작위, 세계적인 명성, 훌륭한 저택, 막대한 재산, 이런 것들은 그와 상관이 없었다. 그의 아내 소냐는 28일 아침, 남편의 쪽지를 보자 밖으로 뛰어나가 연못에 몸을 던졌다. 즉시 구출되기는 했으나, 전에도 몇 번 자살소동을 벌인 일이 있으므로 가족들이 감시하자 이번에는 굶어서 죽어버리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톨스토이는 우선 오프타 수도원으로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쌰마루디노 수도원으로 갔다. 거기서 수녀가 된 여동생 마리아를 만났다. 그는 마지막이 될 것임을 말하고 동생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친 채, 우랄산맥을 넘어가는 3등 객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도 없는 여행길이었다. 10월 하순의 날씨는 음울하고도 몹시 찼다. 추운 객차 안에서 톨스토이의 몸은 감기로 불덩어리가 되었다. 기차가 멈추어 선 곳은 아스타포브의 작은 역이었다. 이 빈사 상태에 빠진 노인은 조그마한 역사 안으로 옮겨졌다. 역장의 침대에 누워 떨리는 손으로 그는 또 마지막 일기를 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다. 이것은 선을 위한 전부이고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며칠 동안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처음부터 동행한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의사인 친구 듀산이 서둘러 집에 연락을 취하고 강심제를 놓는 등 많은 애를 써서 응급한 상황을 돌려놓았다. 전보를 받고 가족들은 그곳으로 달려왔다. 톨스토이는 그것도 모르고 야스나야에 전보를 쳐서 아내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세상에는 레프 톨스토이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은 레프 한 사람만을 돌보고 있어.
마지막 말이 아주 작아지더니 톨스토이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11월 6일, 숨지기 전날 밤 그는 곁에 있던 세료자를 불렀다.
나는 진리를 사랑한다 대단히 진리를 사랑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혼수에 빠져들었다. 1910년 11월 7일, 새벽이 되자 약하던 그의 맥박이 갑자기 거칠게 뛰었다. 그리고는 숨을 한번 크게 몰아 쉬더니 그게 끝이었다. 오전 6시 5분의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전 생애를 통하여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한 사람이었다.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단적인 그의 내부에서는 예술가, 사상가, 도덕가, 향락가 그리고 귀족과 무정부주의자가 항상 공존, 대립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싸우는 야곱과 타락한 천사가 한몸에 들어 있는 듯, 그는 어떤 때는 지킬 박사이기도 하고 또 파우스트 교수이기도 하였다. 육체와 정신이 똑같이 과격한 요구를 내세워 비장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귀공자로서 사치와 도박과 타락한 생활을 일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의 지나온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귀족생활을 버리고, 그는 농부가 되었다. 땅을 갈고 학교를 세우며 농노 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실천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은 하나도 빠짐없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유언장을 작성한다. 추운 겨울, 비록 초라한 시골역 관사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으나 그는 행복의 땅에 묻혔다. 초록색 지팡이 가 있는 참피나무 숲 속, 그의 형 니콜라이가 잠들고 있는 그 옆에 가서 묻혔다. 그는 나이 여든이 되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쓴 일이 있었다.
나는 얼마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나의 소원을 여기에 적어 둔다. (생략) 내 시체를 땅에 묻을 때에는 의식(장례식)을 하지 말라. 다만 바라고 싶은 것은, 나무로 만든 관에 내 시체를 넣어 야스나야 풀리야나 숲 속의 녹색 지팡이 가 있는 곳에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
모스코바 근처 뚜라시의 야스나야 풀리야나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어린 형제들,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와 함께 숲 속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때 큰 형 니콜라이가 물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니?
셋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사실은 녹색의 지팡이에다 주문을 써서 숲 속에 파 묻었거든. 누구든지 그 녹색 지팡이를 찾아내면 돼. 그 지팡이를 발견한 사람은 그 소유자가 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단다.
아이들은 녹색 지팡이를 찾으려고 날이 저물 때까지 숲속을 뛰어 다니면서 정신없이 뒤졌다. 톨스토이는 죽을 때까지 이 날의 일을 잊지 않고 살았다. 그가 <부활>을 탈고했을 때는 일흔두 살이었다. 러시아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이 되고, 노벨상 수상이 결정되었지만 대중과 함께 받을 수 없는 상을 혼자만 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상마저 그는 거절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며 때론 성자처럼 떠받들기도 했다.
나는 성인이 아닙니다. 성인인 척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질질 끌려가기가 일쑤요(생략). 나는 정말 약한 한 인간으로서 악덕의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의 신을 섬기려 하면서 언제나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만일 나를 잘못한 일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저지른 과실은 모두 거짓이나 위선으로 보인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를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그것이 사실 나의 본 모습입니다.
막심고리키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구나 라고.
그의 마음속에는 정말 미움도, 전쟁도, 슬픔도, 질병도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게 한다는 바로 그 녹색 지팡이 가 꽂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녹색 지팡이 는 그에게 있어 고양된 영혼, 아니 하나의 양심, 아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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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5. 일본 농민은 존재조차도 몰랐던 천황
한때는 `살아 있는 신`으로까지 추앙받으며 전 일본인을 그 이름 하나로 전쟁터로 몰아넣은 일본 천황. 1945년 패전 후 히로히토 천황은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요구대로 그가 신이 아님을 공식 선언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천황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신으로 살아 있다. 1989년 히로히토가 위독했을 때 일본인들은 1억의 일본 국민 모두가 천황이 나을 때까지 근신하자는 `1억 총자숙`을 실행하고 신문들은 날마다 그의 혈압, 맥박 등을 전하는 고정란을 설치하여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아키히토 천황의 황태자가 여성 외교관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나자 일본의 양심과 진보적 지성을 대표한다는 아사히 신문의 1면 제목은 `황태자 전하, 감축 드리옵니다`였다. 황실 대변인의 발표를 방송하는 역대황실 텔레비전 앞에 모여든 일본인들이 감격해 하는 표정이 전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그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만세일체의 천황 혈통`을 자랑하며 천황에 대한 신앙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정치에서 천황의 위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 천황은 그 존재만으로도 일본 국민의 보수적 성향과 배외주의적 기질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일본 사회가 큰 혼란에 처하게 되거나 19세기 말처럼 외국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 오거나 일부 정치 세력이 필요에 의해 이런 상황을 조작해 내는 때가 온다면 천황이 일본 사회의 불평을 잠재우고 통합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천황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일본인들에게는 유감스러운 말이겠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그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들은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천황은 11세기 무사들이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한 번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적이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정치적 실권은 고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7세기 초 정권을 잡은 뒤로 무사정권이 확고히 안정되자 천황은 그 존폐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당시 천황가의 연수입은 쌀 3만 석이었다. 당시 도쿠가와가의 장군의 연수입이 700만 석이었고 10만 석이 넘는 번(막부의 통제를 받던 지방정권)들도 꽤 있었다. 천황은 일개 번의 수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 규모로 옹색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는 생계를 위해 황가의 보물을 교토의 시장에 내다 파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시대를 막부는 수수방관했고 행여 왕실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는 가차없는 보복을 가했다. 일부 무사들 이외에 농민을 비롯한 일본 민중의 대다수는 이런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영주만 의식하면 되었다. 이렇던 천황이 민중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1840년 중국의 아편전쟁 소식이 전해지면서였다. 중국이 오랑캐 영국에게 패했다는 청천벽력을 접한 일본의 조야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의 위험 앞에서 그들은 자기 고유의 것, 천황을 새삼스레 들춰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막부 전복을 꾀하던 일부 하층 사무라이들은 거사의 명분을 갖기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 훗날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는 이들은 천황을 `다마`라는 암호로 부르며 천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무도 찾지 않던 교토를 연일 드나들었다. 이들에게 천황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이용물에 불과했다. 효명 천황(명치 천황 직전의 천황)이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하는데 반대하자 하층 사무라이들은 명치유신 직전에 그를 독살시켜 버린다. 이들의 공작에 의해 어느덧 천황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농민을 비롯한 일반 일본일들에게 천황은 여전히 관심 밖의 존재였다.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정권을 막부에게서 탈취한 젊은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거의 유일한 권력 기반인 천황의 존재와 위엄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작을 시작했다. 아직 나이 어린 명치 천황에게 전국 각지를 순행하게 하고 곳곳에서 천황의 군대 사열식을 거행했다. 1873년 명치 천황은 한때 무사정권의 본거지였던 가마쿠라의 순행길에 오른다. 천황은 4월 1일 아침 도쿄 신바시역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가마가와역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오후에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여기서 무사들의 무기독점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새로 구상한 `천황의 육군`의 야영 연습을 참관하고 한 어촌을 방문했다. 당시 정부가 파견한 밀정은 이 때 백성들이 천황 방문에 대해 “감복해 하기는커녕 귀찮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천황이 방문한다니까 지방관서에서는 도로, 교량 보수에 주민들을 동원했고 천황 일행의 음식 등도 주민 부담으로 마련했다. 안 그래도 생계가 빠듯한데 수백 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천황에 대해 어민들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길에 난 구덩이를 메우는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제대로 메우지 않고 짚단으로만 살짝 가리기도 했다. 이 중 한 사람은 “천자님이 오신다고 이전의 길을 고치고 청소했다. 천자님의 행차는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다고 밀정은 보고하고 있다. 인도에 동원된 사람들의 반응도 냉담했다. 가마쿠라에 도착했을 때 마중나온 사람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몇몇 마을에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마중 나온 자들도 뻣뻣이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고 예를 갖출 생각을 하지 않은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민중의 반응에 신정부의 실권자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미 폐지되었던 황실의 각종 행사를 부활시켜 성대하게 치렀고 전국의 국민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배포, 교실마다 걸어 놓게 했다. 이어 불교를 탄압하고 신도를 크게 장려하여 천황을 신격화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던 신사를 정리해 국가의 감독하에 두는 국가 신도정책을 수많은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일본의 첫 의회가 개설되던 1890년에는 마침내 국가적인 천황 이데올로기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칙어>가 공포되고 전국의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암송하게끔 했다. 이리하여 20세기 초가 되면서 농민의 자식인 젊은 군인들이 대형 중국국기 위에서 중국에 대한 `대일본제국의 성스러운 전쟁`을 개시할 것을 촉구하면서 `천황의 이름`으로 하리카리(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도쿠카와 막부 말기 젊은 무사들의 배를 갈랐던 `천황의 이름`이 20세기에 와서는 농민 아들들의 배를 가르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패전 15년이 지난 1970년에도 저명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역시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 정신의 부활을 외치며 배를 갈라 죽었다. `천황의 이름`은 현대 일본 사회에서도 종이호랑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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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6. '젼쟁준비를 한다'는 말을 겁내지 마라
80년대 중엽이 되어서야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세계대전은 피할 수없다'는 마오쩌똥의 단언과 이와 관련된 행동을 포기하였다. 구소련의 반중국적 영화에서 유아용 놀이기구 중 장난감 총은 세계적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아이들에게는 유일한 놀이기구이다'라고 중국의 탁아소에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묘사한 적이 있다. 이 말에는 어린아이에서부터 지도층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 모두가 똑같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황인종이 세계무대에 두각을 나타낼까봐 두려워하는 백인들의 심리와 제국주의, 수정주의, 그리고 반동파에 대한 우리들의 혐오감과 경계심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해 본다면, 어떤 것이 다른 하나를 능가한다고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들은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새롭고 자극적인 경험을 하게 될 날이 오기를 가슴 졸이며 빌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소련의 붉은군대가 우리들의 교실에 쳐들어와 선생님을 쏘아죽이고 우리의 교실을 파괴한다면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까지도 모두 나서 산 넘어 군대를 찾아가게 될 것 같은 상상을 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친구들과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즐겨 하고, 영화 속에 등장하거나 실제로 존재하는 무기를 가지고 싶어하며, 다 자란 후에도 여전히 '전쟁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쟁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전설적 인물의 전기적 행동과 무사나 협객의 용감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숭고한 정신을 흠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인해 중국사람들의 동양적 전쟁관의 특징이 결정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이상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사람들은 전쟁이 노동과 마찬가지 일이며, 도덕적으로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설사 전국이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을 짓밟고 약탈하려는 잔혹성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중국인에게는 제국주의적 유전자가 없다. 즉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향은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중국인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거나 다른 나라와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전쟁의 기본 경향. 즉 폭력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전쟁은 인의를 섬겨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일을 감행하는' 교화와 설교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이러한 전쟁의 도덕관을 심어주었다. 마오쩌똥 주석이 서거한 그 날 오후,우리는 모두 운동장에 엎드려 국부(國父)를 잃은 슬픔으로 애통해 하던 중,방송에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하는 약속을 들었다. '중국은 영원히 세계를 제패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후 20년 동안의 중국 정세는 이 도의적 약속을 정성껏 지켜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이 세계를 제패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해가 가고 또 가능한 일이지만, 왜 초강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인가? 라는 의구심은 떨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왜 국제무대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없으며, 우리는 왜 분쟁을 조절하는 힘있는 중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수박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않고 배나무 밑에서 갓을 벗지 않는다 하여 우리의 웅지를 숨길 이유는 없다. 리비아 같은 나라도 '소연합국'이라는 시적이고 귀여운 상상을 하는데,우리의 국력신장이 더디다고 '말꼬리를 흐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가?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뒤 많은 국가들과 조직이 모두 아리송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때, 우리는 우리의 색깔을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정의감은 넘치지만 그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굳은 의지이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개발도상국가나 국제연합 연맹국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를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라는 견지에서 중국대표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권리를 여러 차례 포기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런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의 이 걱정은 서양사람들이 우리를 업신여길까봐 고심하고 염려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통일전선에 따르는'방법으로 고심하고 근심하여 미래에 더욱 첨예해질 국제갈등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누구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고 무력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온건하다고 모든 일이 순조롭지 만은 않을 것이며, 약진한다고 이 땅을 잃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서양인들이 우리 땅에서 손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니카라구아와 같은 약소국연합의 의견을 얕보아서는 안 되며. 더욱이 대만과 세네갈이 국교를 맺은 후 점진적으로 퍼지게 될 영향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주의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늘 해왔던 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앞으로 주권문제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저 멍청하게 당할 수뷔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국영토의 분할을 획책하는 세계적인 음모는 국제외교의 미묘한 변화속에 잘 반영되어 있으며, 이것은 결코 내가 독자들을 놀라게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생각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나라조차도 최근에는 과격한 몸짓으로 '대만을 지키자'는 시위행렬에 참여하여,우리는 한시바삐 대만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실감케 하고 있다. 사랑 같은 감정은 1분 내에도 발생할 수 있는 기이한 것이며, 국제문제도 이와 유사한 성질을 띤다. 대만문제의 향방이 어떤 쪽으로 기울어지겠는가 하는 것은 대만섬 안팎과 세계적으로 이와 관련되어 계속 발생하는 사건과 매스컴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리떵후이와 루오따로의 대담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런 진실하고 비통한 독백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볼 때, 그저 간단하게 감정이 비틀렸기 때문에 일을 그렇게 만들었다고만은 생각할 수 없다. 리떵후이는 일본 점령시기를 거친 사람이다. 나는 대만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영화 속에서 대만사회가 일본에게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보고 매우 놀랐으며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정결하고 뻣뻣한 교복, 친절하고 성실한 시골 경찰, 시골 아낙네의 머리 꼭대기에 동여 매어진 흰 수건, 방 안의 다다미는 흡사 아열대의 일본을 연상하게 했다. 내가 오랫동안 무척이나 싫어했던 대만가요는 일본의 엔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일본의 잔재가 대만인의 따뜻하고도 즐거웠던 어린시절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리떵후이와 동시대에 어린시절을 보낸사람들은 모두 이런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자랐던 것이다. 또한 리떵후이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람이고, 그가 걸어온 과정은 아마도 당시 지식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었을 것이다. 국민당의 대만인학살사건인 소위 '2 28, 사태'가 일어나던 날 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중국인이면 누구나 느끼는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당국이 '2 . 28사태'로 대만인에게 준 상처는 대만독립주의자들을 선동하는 비장의 무기가 되었다. 일본의 대만 통치는 시간적으로 당시의 만주국보다 길고 일본에 동화된 정도도 훨씬 더 깊으며,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대만 발전에 미친어떤 영향이나 일부 인재의 양성에 끼친 영향은 만주국에서보다 더 심했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나는 최소한 리떵후이의 감정적 배경을 이런 데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리떵후이가 대만의 정치방향을 결정함에 있어 언행이 무엇인가 확실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보냈던 이러한 생애 때문이며, 그의 개인적 경력이 대만독립에 대한 이념의 유래를 굴절시키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에게 일본이 끼치는 영향은 미국에 비해 결코 뒤떨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헌법을 개정하여 집단자위권을 실행하자는 소란은 아시아 주변국가들의 우려를 자아냈을 뿐아니라 장차 중국과 일본이 서로 대항할 여지를 자연스럽게 만들게 되었다. '집단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법칙에 의거하면, 일본은 자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가에게 도의상으로 배울 수 있는 것 이외의 원조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일본과 대만의 역사적 관계 및 대만 독립을 추진시키려는 국제세력의 행위들로 미루어 보아 위험한 추론을 전개할 수 있다. 만일 대만이 독립을 선포한다면, 만약 일본의 주권이 성장하여 세계를 석권한다면 우리는 미래에 어떤 동맹에 직면하게 될까? 그때 우리는 세계여러 나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 또는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고려하여 아픔을 감수하며 우리의 목표 달성을 포기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될것이다. 대만해협에는 소리없는 통곡의 벽이 세워지게 되고 우리는 눈앞의 얕은 바닷물 위로 천 년 동안 긴 회한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것이다.
적어도 중국은 기본적으로 평화적인 문제해결 방침을 고수하지만 무력 사용을 자제한다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라는 경고문을 세계라는 게시판에 공고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젊은이들은 '적을 쓰러트릴 준비를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무력을 사용하여 적을 쓰러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우물거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부심이 어떤 사람을 자극시킬 것인가를 두려워하지 말라. 전세계의 위험세력은 시시각각 대만의 항로이탈을 주도하고 있는데 우리만 왜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무서워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젊은 시절에 호기있게 하던 말이 있다. '노름은 크게 벌이는 것이 낫고, 싸움중에 끼어드는 것보다 선수치는 게 낫다.' 무력은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평화를 구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전쟁은 우리의 5개년 개발계획을 대가로 하기에 만일 지금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뒤따라 올 영향은 더크고 깊으며 심지어는 중국의 발전을 더욱 더디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를 능멸한다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을 용기가 있다. 전쟁과 맞바꿔야 할 미래와 비교해 본다면 이것은 말할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희생으로써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기에 세계는 이로 인한 편년사(編年史)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희생과 굳센 의지가 있어야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 나는 미국의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 군에 입대하여 죽는 일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할 즈음-이런 가치관은 일찍이 그들의 아버지 시대에 인정 된 것이다-중국은 미국 젊은이들이 그 회의에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책임이 있나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여 보았다. 워싱턴에는 전쟁을 기념하는 장벽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월남전쟁 때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떼 죽은 군인을 기념하는 것이다. 중국 여행객이 워싱턴을 방문할 때면, 미국 젊은이들의 이름이 가득 새겨져있고 지금까지도 장벽 속에서는 저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곳을 들러 감개무량해지곤 한다. 중국인이라면 반드시 그곳에 한번쯤은 가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승리하지 못 한 전쟁이며, 그리고 중국 병사들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미국인들이 대만문제로 인해 우리를 없신여기고 핍박하여 전쟁을 기념하는 장벽을 하나 더 세우고자 한다면, 그 장벽에는 더 많은 미국 청년의 이름을 새기게 될 것이라고 나는 정중하게 충고하고 싶다. 또한 나는 그 장벽이 미국인의 영혼을 묻을 묘지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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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아버지와 신발
누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아버지가 사주시던 신발 생각이 난다. 요즘 아이들이야 소위 '메이커 있는'품질 좋은 운동화를 사 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검정 고무신이나 질 낮은 운동화가 고작이었다. 어쩌다가 흰 고무신이나 때깔 좋은 운동화라도 얻어걸리면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나 내 발보다 한두 치수 큰 신발을 사주셨다. 나는 처음엔 아이들은 키가 쑥쑥 빨리 자라니까 일부러 거기에 맞추어 큰 신발을 사주시는 줄 알았다. 또 가난한 집안 형편에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신발을 신기기 위해서 그러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무슨 신발을 신든 그리 오래 신지는 못했다. 내 발이 채 크기도 전에 언제나 신발이 먼저 떨어져 버렸다. 그것은 신발의 품질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껴 신는다 하더라도 신발이 먼저 닳아 버려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으레 내 발보다 꼭 한두 치수씩 큰 신발을 사주셨다. 나는 언제나 그게 불만이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신발이 벗겨질까 봐 조심스럽게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번은 학교 운동회 때 신발을 신고 달리다가 꼴찌를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자연히 걸음걸이가 느려졌으며,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뛰어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 뒤 어른이 되어 이번에는 내가 아버지의 신발을 사 드리게 되었다. 아버지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시내 어느 구두가게에 들른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저한테 그러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아버님이 한 치수 더 큰 구두를 사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네 발보다 큰 신발을 사준 것은 다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건 항상 여유를 가지고 살라는 뜻에 서였다.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바쁘게 세상을 사는 것보다는 발에 조금 헐거운 신발을 신고 좀 여유 있게 걸어다니며 세상을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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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얼음은 두께가 4,828미터나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녹아본 적은 결코 없다. 이 상태가 아마 2천만년도 넘게 계속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녹는다면 온 지구가 자유의 여신상의 코 높이까지 물이 찰 것이다.
금을 뿜어내는 화산, 안타르티카의 유일한 활화산인 에레부스 산은 화산이 분출될 때 투명한 순금이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이 가루들은 너무 미세하고 넓게 퍼져서 채금할 수는 없다.
전 유럽대륙을 연결한 로마의 도로는 90,000킬로미터나 되었다. 이 도로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건설되었다. 돌로 단단하게 포장된 이도로는 전차(戰車)가 지나가도 아무 탈이 없었고 하룻만에 300킬로미터 달릴 수 있었다. 줄리어스 시저가 1주일 동안 900킬로미터를 전차로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도로망 덕분이었다.
인도네시아는 13,600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이고, 하와이는 132개의 섬으로 된 주이며, 필리핀은 7,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이란을 전에는 페르시아라 불렀다. 페르시아 이전에는 또 이란이라 불렀다.
알래스카 대륙에도 1만 2천년 전에는 사자, 코끼리, 낙타 등이 들끓었다고 한다.
동시베리아에서 오줌을 눈다면 나오자 마자 얼어붙어 버릴 것이다.
이집트는 겨우 4%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고 나머지 96%는 사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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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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