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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85 호
4339.12.14 (10.24)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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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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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음악을 메뉴처럼 생각하고 있다. 매일 똑같은것을 먹을 수는 없다. / 카를로스 산타나 (멕시코출신 기타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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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사회/문화/인물 |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4부 창업의 새 아침
'알'을 낳은 청하의 요정 -유화부인
하늘에서 오룡차가 내려온다. 웅심산으로 오룡차가 내려온다. 휘황찬란한 오룡차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타고 있었다. 오룡차 주위로 해모수의 종자들 백여 명이 하늘 나라의 신묘한 풍악을 울리며 땅 의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웅심산에 서식하던 산짐승들이 모두 나와 풍악 소리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신이 타고 온 오룡차와 종자들 백여 명이 타고 온 백혹을 한쪽 나무 그늘에 세워 둔 해모수는 까마귀 털로 만든 오우관을 고쳐 쓰면서 어느 사이에 발 아래 구름같이 모여든 주민들에게 위엄을 갖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왕이로다. 하늘 나라 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오늘부터 여러분의 임금이로다. 나라 이름은 북부여. 웅심산 밑에 왕궁을 짓고 오늘부터 해모수는 여러분들의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로다." 헤모수는 허리에 찬 용관검을 번쩍 뽑아 들고 선서를 하였다. 아침에 웅심산으로 내려와 하루 종일 백성을 다스리고, 밤이면 어김없이 천상으로 승천하는 해모수왕더러 사람들은 천왕랑이라 불렀다. 한나라 신작 3년(BC 59년) 4월 8일의 일이었다. 해모수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틈틈이 웅심산에 올라 사냥을 하기도 하였고, 웅심산 북쪽 청하(지금의 압록강)에 나가 물고기를 낚기도 하였다. 순박한 백성, 비옥한 토지를 가진 북부여에서는 공을 들여 정치를 한다거나 따로 힘을 기울여서 할 일은 없었다. 청하는 아름다운 강이었다. 해모수가 나라를 세운 4월이 지나 나무마다 들마다 신록을 마련하는 여름이 돌아왔다. 청하의 물빛은 연변에 울창한 숲 그늘에 내려앉아 푸르다 못해 검게 일렁였다. 청하 연변에 사는 부여 낭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더위를 씻어내려고 이 강가로 몰려들었다. 낭자들은 하나 둘 짝을 지어 강가에 모이기도 하고, 부끄러움에 젖어 있는 낭자들은 혼자 후미진 강굽이로 나가 옷을 벗고 밤목욕을 하기도 했다.
강가로 가세 강가로 가세 청하 아름다운 강가로 가서 천왕랑 오룡차 타고 하늘로 가세, 하늘로 가세
강가로 가세 강가로 가세 청하 아름다운 강가로 가세 해모수왕 오우관을 쓰고 임금이 될까......? 임금이 될까?
노래가 끝나면 으레 낭자들은 허리를 쥐고 한바탕 웃어대는 것이였다. 한여름이다. 찌는 듯한 무더운 강변의 여름. 그날도 하백의 세 딸들은 천왕랑이니 오룡차니 해모수 왕의 오우관이니 하는 들뜬 노래를 부르며 청하 강가로 나왔다. 청하 강가에는 목욕하기에 알맞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애초에는 청하에 이어진 물줄기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강 한쪽으로 모래가 쌓이고 쌓여진 모래성 안에 웅덩이 물이 고여서 연못을 이루게 된 곳이었다. 하백의 세 딸, 유화, 훤화, 위화 자매는 근동에서 인물이 빼어난 낭자들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이 세 낭자는 그날도 여느날처럼 연못가에 나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던 참이었다. 그 때였다. 허리에 용광검을 번쩍이며 말을 탄 사나이 하나가 연못가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세 낭자는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나이가 해모수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세 낭자는 발가벗은 알몸을 해모수에게 보였다는 부끄러움보다도 먼저 겁부터 났다. 웅심산과 청하 일대에서는 해모수의 명을 거역한 사람이 지금껏 한 사람도 없었으니, 해모수가 발가벗은 세 아리따운 낭자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 올는지 그게 궁금한 것이다. 해모수는 말에서 몸을 날려 연못가로 다가갔다. "내가 찾던 낭자들이 바로 여기에 모여 있었구나. 그대들을 모두 궁궐로 데리고 가서 왕후로 삼고 싶으니 물 속에서 나오너라!" 첫마디부터 명령이엇다. 세 낭자들은 해모수가 이글거리는 눈을 잠시도 그들의 몸에서 떼지를 않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물 속으로 몸을 감추었으나, 옷을 벗은 몸으로서는 그 이상 어떻게 부끄러운 알몸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저기, 저 키가 크고 눈이 커다란 숫색시가 유화랑이렸다.!" 하백의 첫째 딸 유화는 해모수의 눈이 핥듯이 자기 몸을 쏘아보자 몸을 떨었다. "그옆에 몸을 담그고 있는 낭자가 하백의 둘째 딸 원화, 그 옆이 셋째 딸 위화, 모두 다 듣던 대로 아름다운 낭자들이로고........." 세 낭자는 당장 용광검을 뽑아 들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올 것 같은 해모수의 당당한 체구 앞에서 그저 말문이 막히고 몸이 떨려 올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갈팡거렸다. "낭자들읃 듣거라 나는 이 나라의 국왕 해모수로다. 천재의 아들 해모수가 그대들을 맞아 왕자를 갖고 싶으니 부끄러워 말고 나와 옷을 입으라." 둘러보니 주위에는 해모수를 따라온 종자들도 보이지 않았고, 검푸르게 흘러내리는 청하의 물줄기가 발가벗은 세 낭자와 해모수를 지켜볼 뿐이었다. 해모수의 명을 받은 세 낭자 중 맏이 되는 유화가,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입을 열었다. "해모수 마마!" "오, 유화랑, 할 말이 있으면 어서 말하라." "아무리 마마의 명이시라 하더라도 발가벗은 몸으로 어찌 마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나이까?" 해모수는 무릎을 쳤다. "그렇지 그래. 장차 내 비가 될 사람들이 함부로 알몸을 드러내고 나올 수는 없으렷다. 내 당장 그대들이 머물 집 한 칸을 마련해 놓을 터이니 그리로 와서 옷을 갈아입도록 하라." 해모수는 즉시 청하 강가 숲 그늘에 숨어 있던 종자들을 시켜 나무집을 짓게 하고 술통을 마련해 놓으라 일렀다. 청하 강가 야트막 한 숲속에는 순식간에 통나무 집이 세워졌고 토주까지 한 통 마련되었다. 유화를 비롯한 훤화, 위화 세 낭자는 통나무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값진 옥패로 몸을 단장하였다. 몸에는 향유를 뿌리고 곱게 빗어 올린 머리에 황금 비녀를 꽂았다. 통나무 집 밖에는 해모수가 한꺼번에 세 낭자를 맞이할 양으로 용광검을 절그럭거리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초조한 마음은 통나무 집 안에 있는 유화, 훤화, 위화랑도 마찬가지였다. 세 낭자는 머지않아 이 나라의 국왕 해모수가 자기 몸을 요구하러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 속을 어지럽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리 준비된 술을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몸에 술이 들어가자 방금 목욕을 마친 세 낭자의 모습은 더욱 요기를 띠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윽고 해모수왕은 세 낭자가 취해 쓰러져 있는 통나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자, 몸에 향유를 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겠다. 밖에 종자들도 멀찍이 물리쳤으니 그대들은 부끄러워 말고 나와 인연을 맺도록 하자." 해모수가 손을 뻗쳐 세 낭자를 한꺼번에 이끌어 당기려 하자, 세 낭자는 일제히 몸을 날려 통나무 집을 뛰쳐 나갔다. 그러나 술이 취한 몸들이라 발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죽어라 하고 몸을 날렸으나, 세 낭자 가운데 유화는 끝내 해모수왕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하하하, 너희들이 도망을 치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앞에는 장강이 성처럼 두르고 흘러 건너뛸 수가 없고, 뒤에는 첩첩 산중이라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백보도 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릴걸? 자아, 기왕지사 두 낭자는 나하고 인연이 없어 이 통나무 집을 빠져 나갔다. 하나, 유화 낭자는 가장 나이 많고 힘이 센 몸이 도망치지를 못하고 남게 된 것으로 보면 이 또한 어쩌지 못할 천제의 명이시라 여겨지니, 부끄러워 말고 옷을 벗어라." 유화 낭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해모수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면서 나직한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소녀 유화가 이곳에 남게 된 것은 천제님의 뜻이 아니옵니다." "뭐, 천제님의 뜻이 아니였다면?" "전혀 소녀가 택한 길이옵니다. 해모수 대왕마마." "유화 낭자가 스스로 택한 길!" "그렇사옵니다, 마마. 소녀 유화는 일찍부터 해모수 대왕마마를 뵈올 날만 고대하였나이다. 소녀 유화가 어린 훤화와 위화를 데리고 연못에 나와 목욕을 하게 된 것도 실은 낚시하러 나오시는 대왕마마를 행여 먼 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나이다." "오호, 과연 미색이 신자 염려한 유화낭자의 뛰어난 지모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구나." 유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유화는 힘도 세고 담력이 강한 하백의 딸로서 만족할 낭자는 아니었다. 유화에게는 남이 꿈조차 꿀 수 없는 이상이 일찍부터 그녀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사냥꾼 하백의 딸이라 는 것을 앞세우고 아버지와 똑같은 젊은 사냥꾼을 맞아 정혼 할 수는 없다 했다. '아무렴, 나의 미모와 지략은 이 근동에서 소문이 자자할 만큼 인정된 터다. 이러한 내가 범부의 아내가 되어 한 평생을 늙어갈 수는 없지. 아무렴, 내 상대는 적어도 오룡차를 타고 옆구리에는 용광검을 차고, 하늘과 땅 위를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는 천제님의 아들 해모수 대왕이어야 한다. 해모수 대왕....... 나는 그 대왕을 함락시켜야 해......' 이튿날부터 유화는 동생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 다니기 시작했다. 웅심산 깊숙이 인적이 드문 골짜기가지 기어 들어가서 사냥나온 해모수를 만나보려고 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해모수와 유화 일행은 단 한번도 부딪칠 수가 없었다. 그 봄이 지나고 여름이 돌아오자 아직도 몸을 담그기에는 이른 청하 강가로 나와 유화는 옷을 벗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훤화, 위화 두 여동생이 언제나 시녀처럼 따라 나와서 함께 옷을 벗긴 하였으나 무엇인지 기대를 가지고 연못 속에 몸을 담구는 유화와는 달리 유화의 동생들은 차가운 5월의 연못 속에 쉽사리 몸을 담그려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산은 산대로 신록을 마련하기에 바빴고, 강물은 또 몇백 리씩 흘러내리면서 그 연안에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모수왕은 강가에 그림자도 비쳐 주지 않았다. 유화는 여름이 와도 강가에 나타나지 않는 해모수왕이 차츰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유화의 속마음을 모르는 훤화, 위화 두 낭자도 차츰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에유, 언니는 덥지두 않은 날에 맨날 옷을 벗고 목욕을 하라시니 이러다가는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고뿔 감기에라두 걸리겠수." "글쎄 말이다. 추운 날에 목욕을 자주 하라시는 언니 마음도 모르겠거니와, 목욕하러 온 여자들이 몸에다 값진 옥패를 두르시라는 것도 정말이지 귀찮은 일이야." 이런 불평 속에서 가까스로 만난 해모수왕이었다. 유화는 해모수가 목욕하는 세 자매의 벗은 몸을 탐내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야말로 하늘이 준 절호의 기화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해모수가 시키는 대로 유화는 겁에 질린 동생들과 함께 통나무 집에 들어갔던 것이고, 동생들보다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해 있었던 것도 실상 유화 쪽에서 미리 계산해 놓은 함정이었던 것이다. 급기야 야욕에 이글거리는 해모수의 몸이 유화에게 던져졌을 때 유화는 비로소 자기가 만든 함정이 행복으로 이끄는 길잡이였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화....... 유화....... 너는 내 여자다. 이 넓은 부여의 국모란 말일세. 유화, 오늘은 이 통나무 집에서 인연을 맺고 내일이라도 왕궁의 의식을 갖추어 대례를 치르도록 하자." 해모수를 소유하고 싶었던 유화의 꿈은 이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해모수왕과 유화 부인의 결합이 그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임을 확인한 하백이 성대한 의식을 갖추어 혼인 대사를 치르긴 하였으나, 하백은 자기 딸의 앞날이 그저 걱정 스럽기만 했다. '천제의 아들이 땅 위에 사는 여자를 평생토록 데리고 살 것 같지 않거든. 해모수, 놈은 언제고 내 딸을 버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말 거란 말야.' 하백은 그런 생각 끝에 하나의 묘한을 안출해 내었다. 해모수에게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 유화와 함께 커다란 가죽 주머니 속에 가둬 놓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설사 해모수가 하늘나라로 승천한다 해도 자기 딸을 버리지는 않겠지....... 하백은 계획대로 해모수에게 독한 술을 먹여서 유화와 함께 커다란 가죽 주머니 속에 가둬 놓고 말았다. 해모수가 마시고 취한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일주일 뒤에 가서 취기가 깬다는 독한 술이었다. 햇볕이 한 점도 들지 않는 가죽 주머니 속에서 술에 취해 있던 해모수는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겨우 눈을 떴다. "크, 큰일이로다. 나는 햇볕을 보지 못하면 죽어 버리는 몸. 이 가죽 주머니를 어떻게 뚫고 나간다?" 해모수가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고 유화는 머리에 꽂았던 황금 비녀를 뽑아 주었다. "이 비녀로 구멍을 뚫어 보셔요." 구멍이 뚫렸다. 해모수는 구멍만 있으면 얼마든지 몸이 빠져 나가는 천제의 아들. 신묘한 기술을 가진 해모수는 한번 가죽 주머니를 빠져 나가자 하늘나라로 승천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부터 유화 부인의 슬픔이 시작되었다. 화가 난 하백은, "이년 꼴두 보기 싫구나, 스스로 천제의 아들을 골라 몸을 더럽히고 집안 망신을 시킨 년이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느니!" 이러면서 펄펄 뛰었다. 하백은 유화의 입술을 길게 잡아 빼어 꿰맨 뒤 시종 두 사람을 붙여 우발수 가로 내쫓아 버렸다. 그 때부터 유화 부인의 눈에서는 눈눌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나 유화부인은 언제까지나 슬픔을 씹고 앉아 있을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총명한 머리는 부단히 무엇인가 생각을 했고, 그녀의 예리하고 빛나는 두 눈은 전후 좌우 사물을 열심히 관찰하기에 바빴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유화 부인은 왕이 행차하는 길가 우물가에 선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아가 앉아 있었다. 당시의 부여와은 금와왕이었는데 그날은 수렵을 좋아하던 금와왕이 유달수 쪽으로 납시는 날이었다. 유화 부인은 그것을 그녀 특유의 직감으로 알아 버린 것이다. 금와왕이 탄 수레가 우발수에 이르렀을 때다. 수레의 휘장 밖으로 멀리 우물가에 청초한 차림새의 선녀(?)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였다. 종자를 시켜 유화 부인을 수레 곁으로 불러들인 금와왕은 첫눈에 유화의 아름다움에 반해 버렸다. "선녀, 그대는 뉘집 딸이기에 이렇듯 후미진 우발수 물가에 나와 넋을 잃고 있느냐." "예, 이 몸은 청하 강가에 사는 하백의 딸로서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 쫓겨난 유화입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물가에서 남자를 사귀에 몸을 내맡겼다가 그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다하여 쫓겨났나이다." "허허허, 내 그대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구나. 궁궐로 가기를 권하는 바이니 허락해 주겠는고?" "예, 대왕마마 뜻대로 하시와요." 뜻대로 하란다. 그렇다. 유화는 이 기회를 은근히 노리고 있었던 중이다. 금와왕은 말하자면 자기를 버리고 승천한 해모수의 손자였다. 해모수에게는 원래 해부루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던 해부루는 어느 날 돌 속에서 금빛나는 개구리 같은 아이를 얻게 되었는데, 이 아이가 금와왕이었다. 유화 부인은 그러니까 자기를 버린 최초의 남성 해모수에 대한 보복으로 해모수의 후손인 금와왕을 소유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유화 부인은 어쩌면 해모수를 그리는 간절한 이성에의 정을 그의 후손인 금와왕에게서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금와왕은 유화 부인을 맞아 혼례를 치렀고, 그해 안으로 유화 부인은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조화인가. 유화 부인이 낳은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 '알'이었다. 유화 부인이 크기가 닷되들이만한 알을 낳자 금와왕은 화가 나서 그 알을 내다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개와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는 알, 길 가운데 버려도 소와 말이 피해서 가는 이 신기한 알을 끝내는 들에 내다 버렸지만 새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알을 덮어 주고 감싸 주기를 잊지 않았다. 알을 낳은 어미였으나 그래도 유화 부인은 산모였다. 유화 부인은 자기가 낳은 알을 값비싼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갖다 두었다. 그랬더니 며칠이 못 가 그 알 속에서는 골격이 준수하고 영특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아이의 나이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서 쏘기도 했는데 화살을 쏠 때마다 백발 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애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했는데 사람들은 유화 부인의 아들을 주몽이라 불렀다. 고주몽. 이가 곧 후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동명성왕이었으니 유화 부인은 스스로 선택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이를테면 왕을 얻은 셈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한 나라의 시조가 될 왕을 얻음으로써 유화 부인의 한은 풀렸다. 해모수에게 버림받은 나약한 여자에서 끝내는 자기의 지모와 미색을 함게 버리지 않고 활용한 나머지 비로소 왕의 생모로서 추앙받는 자랑스러운 여인이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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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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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 박한남(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안양도 내시였다는데 일반적으로 내시라고 하면 국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전달하는 거세된 남자인 환관을 연상하게 된다. 궁중사극에 감초로 등장하는 환관은 쪼그라진 어깨에 음흉한 눈초리와 가냘픈 목소리를 가지고, 오아실 내부의 패권다툼이나 국왕의 향락을 자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던 국왕의 곁에는 환관이 있었던 예가 많다.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과 김자원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예이다. 고려 의종 때에는 정함.백선연 등과 같은 환관들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파행적인 정치 운영을 부추겼던 결과 마침내 무인정변이 일어나서 의종은 왕위에서 쫓겨난 뒤 처참히 살해되었다. 또 공민왕도 환관 김만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그가 추진했던 반원개혁 정치가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왕조의 재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온몸이 찢겨지는 고통속에서도 연산군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간언하였던 김처선 간은 환관도 있고, 중국에는 종이를 발명한 채륜과 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환관이 있엇다. 또 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이방인이 이디오피아 간다게 여왕 때의 환관인 유우너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군주의 곁에는 그의 심복으로서 환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환관이 있엇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고려에서는 환관과 내시가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즉 고려의 내시는 환관 즉 남성이 제거된 고자가 아니고, 오히려 대개가 귀족 자제로서 용모가 단정하거나 유학적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선발되엇다. 내시는 여러 시종들과 함게 왕의 행차에 동행한 것은 물론 왕명의 초안을 작성하거나 국가 기무를 관장하고 때로는 유교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내시의 선발기준 고려시대에 내시가 언제 어떠한 직급으로 설치되엇는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918년(태조 1)에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를 내시서기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당시 내시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겠다. 내시의 선발기준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기준은 문정 때에야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최사추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종은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용모가 수려한 사람 20명 정도를 내시로 뽑아자신을 시종하게 하였으며 그 수고의 대가로 별사미를 주었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인종 때까지 준수되다가, 의종 때에 이르러 귀족자제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으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내시의 선발기준이 주로 가문과 재능 및 용모를 중시하였다고는 하지만 국왕의 근시직인 만큼 내시가 되는 첫째 요건은 국왕의 총애가 우선이었다. 과거합격자로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가문이 뛰어난 집의 자손이 대부분이었으나, 과거합격자는 아닐지라도 서리직에 있으면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왕의 병을 치료하였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또는 오늘날의 폴로경기와 같은 격구 등의 잡기에 재주가 있어 내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이 뇌물을 써서 내시가 되려고 하기도 하였다. 국왕의 측근에 있으면 기회를 포착하여 잘만 하면 뜻밖의 출세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풍류를 즐겼던 의종 때에는 각종 행사비용을 후원했던 부유층의 자제들이 내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의종 때 내시들 가운데에는 왕의 선정을 위하여 좋은 정책을 입안하는 경우보다는 왕의 향락과 사치를 부추기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일부 내시들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빚까지 얻어 자금을 마련하였다가 이를 갚지 못해 빚쟁이들이 궁궐까지 찾아와 성토하는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시의 일반적인 성격을 유학자로서의 면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인(정과정)을 지은 정서를 들 수 있다.
내 님 그리워 우니나니 옷깃 적시지 않은 날 없어라. 봄 밤 깊은 산속의 두견새야 내 신세도 꼭 너 같구나. 묻지 말아라 사람들아 지난 날 나의 잘못을. 다만 내 가슴 알아 주는 것은 저 조각달과 새벽별뿐이리.
이 고려가요에서 정서는 깊은 산속에 홀로 떨어져 슬피 우는 두견새에 자신을 비유하며 자신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려 다시 국왕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정서는 동래 정씨 문벌출신으로서 의종의 이종사촌이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뛰어난 문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발탁된 정서였지만 의종 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내시는 국왕의 측근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남보다 승진을 빨리 할 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가 될 소지도 적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문신에 한정되었던 내시의 자격은 1170년 무인정변후 변화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은 그들에게도 내시직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여 비로소 무신들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최씨정권하에서는 최충헌의 사위나, 혹은 최충헌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 또 최충헌의 총애를 입은 사람들이 내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고려 내시직이 두드러지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라 하겠다. 13세기 이후 100년간의 원나라에 의한 정치 간섭과 그에 따른 정치조직의 변질, 각종 전란은 고려의 정치구조와 국가 운영체계를 전면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몰락하는 문벌가문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예전에는 출세의 꿈도 꾸지 못했던 하층신분 사람들에게 내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이제 내시가 되는 길도 가문이 좋고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 항몽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군인들,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실력을 발휘한 몽고어 통역자들과 환관들이 내시로 선발되었고, 때로는 군역 기피자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다. 특히 홀치. 필자적 등과 같은 원나라 숙위기구가 수용되면서 고려 고유의 여러 근시기구가 변질되는 것과 같은 원나라 숙위기구가 수용되면서 고려 고유의 여러 근시기구가 변질되는 것과 함께 고려 내시는 출발 초기에 보여 주었던 소수의 엘리트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1391년에는 개선책을 마련하여 호적이 분명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글씨. 셈. 활쏘기. 말타기 가운데 한 가지라도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좌,우번에 각가 50명씩 두어 둥중 숙위를 맡게 하였다. 원래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로 구성되었던 내시가 고려말에는 여러 궁중 숙위군의 하나로 변질된 것이다.
내시와 국왕의 관계 고려시대 내시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몇 사람의 사례를 들어 내시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정서의 아버지 정항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고을 원님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왕명을 작성하는 한림원의 직책을 맡았다. 예종은 이러한 전력을 높이 여겨 다시 내시로 선발하여 국가 기무를 관장케 하였다. 특히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세도가에게도 사정의 칼을 휘두르다 오히려 외직으로 좌천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림함으로도 이름이 높아 1125년에 사망하였을 때 그의 집에 쌀 한 말도 모아 놓은 것이 없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30년 근시오, 11년 승제를 지낸사람이 이렇게 가난하게 지냈으니 진실로 가상하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규정상 내시의 임기는 9년을 상한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정항이 30년 동안 역임했던 것처럼 한번 내시적에 오르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계속 겸임할 수도 있었다. 한안인은 과거에 급제한 뒤 한림원의 말단직을 거쳐 예종 때 내시가 되었다. 이후 그는 가문의 배경도 없으면서 눈부시게 출세하고 신진관인들을 규합하여 당시 회척이었던 이자겸과 권력을 다툴 정도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내시로서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할 수 있었고, 국왕에게 업무 추진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이 결집되면서 이자겸 세력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인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평소 한안인의 득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그를 역모죄로 몰아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곧 죽여버렸다. 당시 한안인과 함께 숙청된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20여 명의 상당수가 한안인과 마찬가지로 내시직을 거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들은 한안인을 중심으로 하여 국왕 측근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던 것이다. 비록 한안인은 외척이자 당대 최대 문벌세력이었던 이자겸과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맞하였지만, 한미한 출신이었던 그가 기존의 문벌기존세력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성장 시킬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고려 전기 내시의 정치적 위상을 잘 살필 수 있다. 유응규는 여러 차례의 응시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수려한 용모와 문장력을 높이 산 인종에 의해 내시로 발탁되었다, 그는 내시로서 매사에 정확한 판단력으로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후에 지방관이 되었을 때에도 진정으로 주민들을 아끼는 청백리라고 명성이 높았다. 때문에 무신란이 일어나 많은 문신들이 숙청되었지만 그의 명망을 아끼는 명종에 의해 내시로 활동할 수 있었다. 특히 유응규는 명종이 금나라 황제로부터 왕위 계승을 승인받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금나라 조정에서는 무인정권이 마음대로 국왕을 갈아치운 것을 빌미로 하여 명종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고려에서 보낸 공문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하면서 회신을 거부한 것이다. 이 때 사신으로 갔던 유응규는 이 문제를 타결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것은 왕명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하며 죽을 각오로 단식투쟁을 하였다. 이에 놀란 금나라 조정에서는 회유와 협박으로 죽이라도 먹이려 하였으나 그는 단식을 계속하였다. 1주일 단식으로 의식조차 희미해진 그를 본 금 황제는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명종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답장을 써 그를 귀국시켰다. 따라서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들조차 유응규가 금나라 조정에서 보여 준 행동이 아니었다면 자신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유응규의 이러한 행동은 사신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명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내시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왕과 내시와의 상호 신뢰관계는 희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희종 때 내시 왕준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당시 무인집정인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 가담자 전원이 사형에 처해졌고 희종 역시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려시대 환관은 어떠하였나? 은나라 갑골문자에도 보이고 있는 환관제도가 우리 나라에서는 826년(신라 흥덕왕1)때 처음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환관이 있었으나 그 정원은 10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특별히 왕의 총애를 받아 승진한다 하여도 7품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다. 당시 이들의 역할은 궁중 청소나 내명부의 궁녀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원래 환관이란 고자 또는 환자. 엄인으로서 궁궐에 입사한 사람을 일컫는 호칭이다. 중국은 형벌로 궁형을 받은 죄인이나 전쟁포로를 거세시켜 환관직에 투입하였으며 환관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이들을 양성하는 학교도 운영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궁형제도도 없고 전쟁 포로를 환관으로 삼지도 않았다. 따라서 성불구자로 태어났거나 사고로 고자가 된 천인들이 환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가운데는 임백안독고사. 방신우. 고용보 등과 같이 원에 끌려갔다가 타고난 수완으로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아 오히려 고려 정국을 흔들 정도의 권세를 누린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는 농장의 확대와 조세의 가중으로 살길이 막연해진 일반 양인들이 신분을 낮추어 세금착취를 당하지 않는 노비의 길을 택하든지, 스스로 거세하거나 자식 또는 동생을 고자로 만들어 환관으로 삼아 팔자를 고치려는 경우가 많았다. 수수 후 상처가 아물기까지 걸리는 100일 동안의 고통과 고자라는 평생의 수치심보다도 관리의 횡포와 배고픔의 고통을 더 견딜 수 없어 택한 길이었다. 이렇게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환관들의 권력이 증대하고 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민왕 때에는 내상시. 내시감. 내승직. 내급사등 그들만의 독자적인 관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1356년(공민왕 5)내시가 설치되어 정2품으로부터 종9품에 이르기까지 121명의 환관들이 정식 공무원으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환관들로만 구성된 내시부가 출범한 것에 비하여, 내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여러 기능 가운데 궁중 숙위의 기능을 갖는 성중애마의 하나로 위축된 채, 조선 전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 세종 때에는 이 내시가 환관내시와 용어상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이유로 내직으로 개칭되었으며 이것마저 1466년(조선 세조 12년) 완전히 폐지되어 그 소임을 궁궐 숙위병인 충의위. 충찬위에서 대신하게 하였다. 이로써 환관과 구별되는 고려의 내시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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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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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아가의 이가 다 날 때까지만
내가 사는 곳은 조그만 아파트 단지이다. 우리 집 바로 아래층으로 지난주 일요일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어린 아기를 둔 젊은 부부가 부지런히 짐을 날랐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분주하던 아파트 단지안은 잠잠해졌다. 저녁을 짓고 있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옆동에 사는 이 동네의 소식통인 지훈 엄마였다. 지훈 엄마가 시장에 다녀오다 보니 그 새댁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무슨 이야길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일까 궁금하다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때 '딩동'하고 현관벨이 울렸다. 급히 전화를 끊고 나가보니 그 새댁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온 사람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저희 아기가 이가 나기 시작하서든요. 그래서 밤이면 잇몸이 가렵고 아픈지 막 울어대네요. 혹 아기의 울음 소리 때문에 잠을 깨시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얼마 동안만요." "그 얘기를 하려고 이 추운 날 집집마다 다니는 거예요? 새댁도 참 물 그런걸 가지고....." 새댁은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새댁의 말대로 자지러지는 아기의 울음 소리가 아파트 단지안에 울려 퍼졌다. "웬 아기 울음 소리지?" 남편이 부스럭 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새로 이사 온 아래층 아기예요. 아기가 이가 날 때라 자꾸 운다고 새댁이 집집마다 인사를 다니지 뭐예요. 새댁이 참 예의가 바른 사람같아요. 그러니까 아기의 이가 다 날 때까지만 참아요" 나는 남편에게 저녁에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해 주었다.남편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늦게까지 아기 울음소리는 계속됐지만 어느 누구도 잠을 깨웠다며 화를 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김미순 님/강원도 속초시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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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0 - 실존철학의 두 거장 :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주변이야기 그때 세계에서는 1939년: 영국,프랑스,독일에 선전포고 1940년: 독일,파리에 무혈입성
야스퍼스 [Jaspers, Karl Theodor] 1883. 2. 23 독일 올덴부르크~1969. 2. 26 스위스 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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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출간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동료 철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K.야스퍼스라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본래 대학에서 정신병리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했다가 애석하게 일찍 세상을 떠난 E.라스크 철학교수가 자리를 비우게 되자 대학에서는 마땅한 후임을 찾지 어려웠다. 그래서 야스퍼스에게 철학강의를 의뢰하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세계적인 철학자로 남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야스퍼스는 전공분야와의 관련도 있어 삶의 철학과 인간이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니체연구는 대단히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로부터도 큰 철학적 암시를 받았다. 이런 철학 및 인간학적 배경을 갖고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철학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자기보다 먼저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나왔던 것이다. 앞자리를 빼앗긴 야스퍼스는 서둘러 저작을 완결시켰다. "존재와 시간"도 상하 두 권으로 된 큰 책이지만, 야스퍼스의 "철학"은 더 큰 저서로 나타나게 되었다. 두사람은 어느 정도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었으나, 철학계는 이 두 사람을 함께 소유하게 되면서 실존적 철학의 영역을 크게 굳히게 된 셈이다. 물론 두 사람의 철학이 같은 방향과 비슷한 과제를 취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남이 볼 때는 형제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 같아도 집 안에서 보면 형제간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지 모른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비교해보면 대단한 차이가 잇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철학의 영역을 개척한 공로자로 보고 싶은 것이다. 야스퍼스보다 6년 연소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 인기와 세계적인 관심때문에 히틀러의 집권 당시 그는 대학의 총장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대학의 총장자리는 명예직에 불과하며 그렇게 대단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히틀러정권자체가 독재권을 행사하던 때였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자연히 독재정권의 옹호자나 대행자같은 비판을 면치 못하게되어 그의 일생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하이데거는 히틀러의 정권을 옹호하는 교육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그런 길을 택한 하이데거에 반해 야스퍼스는 부인이 유대 계통이었기 때문에 히틀러정권에 쫓겨나 스위스의 바젤대학에 머물면서 강의를 계속했다. 히틀러의 탄압정책에서 독일을 떠난 학자와 교수는 참으로 많았다. 그 많은 교수들이 자유로운 신대륙인 미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미국대학들은 뜻하지 않게 교수풍년을 맞게 되어 철학계에서도 큰 행운을 누리게 된 셈이다.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두 미국에 정착해 있었다. 필자가 60년대 초에 미국에 머물때도 미국학생들이 영어발음이 서툰 교수들이 최고의 교수라면서 웃고 있었다. 일본에 와 있던 K.리비드 교수도 망명교수중의 한 사람이었다. 후에 바이델베르크에서 정년퇴직한 존경받는 유대인 철학자였다. 그 때문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하이데거보다도 야스퍼스의 철학이 더 많은 독자를 갖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야스퍼스연구에 뜻을 모았던 철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철학의 학문성이나 방법론들에 있어 지금은 하이데거의 업적이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또 야스퍼스의 저서는 너무 많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알찬 맛이 적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물론 실존철학의 대표자는 이 들로 끝나지는 않는다. 많은 유사한 철학자들이 있어 세계적인 영향을 남겼고, 그 여파는 2차대전을 계기로 프랑스에까지 미치게 된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가 1차대전을 계기로 태어난 철학자들이라면 프랑스의 G.마르셀과 J. P. 사르트르같은 이들은 2차대전을 겪은 뒤의 철학자들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실존철학이라고 불리던 이 계통의 철학은 키에르케고르, 니체로부터 시작되어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거쳐 G. 마르셀과 J. P. 사르트르에게 이르러 형성된 긴 과정에 걸친 것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며, 그들에게 방법론적 영향을 준 사람은 딜타이의 해석학과 E. 후설의 현상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특히 현상학의 의미는 큰 것이었다.
81 - '인격...최고의 목적가치': 야스퍼스의 "철학"(1920년대 말) 그때 세계에서는 1928년: 파리에서 무전조약(켈로그, 브리앙 조약조인) 1929년: 예루살렘에서 아랍인의 대규모 유대인습격 일어남(통곡의 벽 사건)
하이데거에 비하면 야스퍼스의 철학은 이해하기 쉬우며 유럽철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의 방대한 내용의 철학을 쉽게 표현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는 어렵지 않게 공감이 갈 내용들이다.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있는 사람들에게 무엇때문에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돈과 경제, 정치와 권력, 기계와 기술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절대다수의 삶의 목표는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들이 소중하기는 해도 그 자체들은 수단으로서의 가치, 예비적인 가치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목적가치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가 목적가치일때는 우리들의 삶과 사회는 전도된 가치관때문에 불안을 가져온다 그러면 목적이 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오히려 학문과 참의 가치예술과 미의 가치도덕과 선의 가치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서 좋은 것이다. 진리와 예술과 선은 그 자체가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들이며,또 그렇게 되어서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신적 가치는 삶의 궁극적 가치가 될 수 있는가? 그 자체는 수단과 방편으로서의 가치는 될 수 없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 자체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예술가가 예술은 최고의 가치라고 말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 뜻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의 타당성과 가치는 중하지만 여전히 그것도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목적가치일 수도 있으나 준비적 가치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목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수단과 예비적 가치는 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도 있는가? 있어야 하며 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다름아닌 인간적 가치, 인격의 가치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수단이나 방편으로서의 가치일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 뜻과 가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은 야스퍼스의 개인적 주장이나 요청은 아니다. 기독교의 인간목적관이 바로 그것을 가리키며, 칸트가 인격은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체계를 따른 것이다. 지금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인 것이며,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질, 변형될 수 있어도 휴머니즘은 영구한 목적이념일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주의, 사상에 있어서 목적가치인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의 비극과 모순은 어디 있는가? 이 가치체계가 거꾸로 되어 있는데 있다. 인간과 인격의 존엄성과 가치가 정치, 권력의 수단과 방편이 되어버린 실례를 너무 쉽게 발견하게 된다. 바로 20세기에서 그 사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는 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선,후진국을 구별해보고 때마다 경제적인 평가에서 결정지어버린다. 그것이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재산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수입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평가받고 있다. 기계와 기술은 현대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과학적 사고와 가치가 인정받아야 하며, 그 과학적 가치는 인간 및 사회에의 기여도에 평가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훌륭한 과학자일수록 인간 목적가치에 순응하는 과학의 의미를 따른다. 그러나 오늘의 과학은 기계와 기술개발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과학이 상품적 가치의 시녀노릇을 하고 불행한 사회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이 당면하고 있는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 이 전도된 가치관을 바로잡는 일이다. 목적가치의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명백히 가지며 삶의 의미와 내용을 정상적인 체계로 바로 잡지 못하면 오늘의 위기와 불행은 치유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과거와 같이 어떤 고정된 가치관을 고집함으로써 사회를 잘못 유도하고 있는 모든 관념과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도 그렇다. 이러한 인간목적과 인간적 가치를 위하는 종교는 받아들여지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도 좋으나, 무조건 종교이기 때문에 옳다든지 도덕을 앞세우면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위험하다. 야스퍼스가 삶의 핵심되는 요소는 성선설에 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가치체계를 구현하기 위해 꾸준한 자기혁신과 겸허한 정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실과 사랑은 인간적 삶과 가치의 새로운 창조와 건설적인 기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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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감기'는 옛날에 '고뿔'이라고 불렀습니다. 곧 '코에 불(열)이 난다는 뜻
요즈음 감기에 잘 걸리지요. 저도 지난번 중국 연길시에서 있었던 우리말 컴퓨터 처리 국제학술대회에서 북한과 회담을 하면서, 그만 감기에 걸려 아직까지도 기침은 계속 나고 있습니다. 중국의 독감에 걸린 것이지요. 지금은 감기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모두 '고뿔'이라고 했습니다. 이'고뿔'은 마치'코'에 '뿔'이 난 것처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것은 '코'에 '불'이 난 것입니다. 즉 '코'에 열이 난다는 뜻이지요. 이전엔 '곳블'이었습니다. 즉 '코'를 뜻하던 옛날말인'고'에 '불'(되었던 것인데, 원순모음화가 되어 '곳불'이 되고 다시 '뒤의 '불'이 된소리로 되어(마치 '냇가'가 실제 발음으로는 '내까'가 되듯이) '고뿔'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한자어인 '감기'가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 '감기'란 한자말은 '복덕방' '사돈', '사촌' 등처럼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어입니다. 혹시 일본어에서 온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어에서는 감기를 '풍사(바람풍 사악할 사)'라고 하니깐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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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투신자살한 작가들 - 버지니아 울프 / 굴원 / 셀리 / 태재치
우즈강에 몸을 던지 - 버지니아 울프 3월이라지만 아직은 춥고 쌀쌀한 영국의 봄날, 1941년 3월 28일. 버지니아 울프는 모자와 지팡이를 나란히 우즈강 언덕에 남겨놓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집어넣고서 찬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살아나오지 못했다. 3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고, 다량의 수면제를 먹기도 했지만 자살은 번번이 실패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머니가 터지도록 돌멩이를 넣었던 것이다. 59세를 살다 간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저명한 작가였고 어머니도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우수한 머리와 문학적 재질을 물려받은 버지니아 울프.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옥스퍼드나 캠프리지 등의 명문대학교에 여성 입학이 금지된 것에 충격을 받아 후일 여권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몇 차례의 자살을 기도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 고 말하듯 13세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충격과 연이은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사촌이던 조지에게 당한 성적 충격이 그를 정신질환으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성적 불감증이 된 그녀와 원만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남편 레오나드는 울프의 영혼을 따뜻이 감싸 주고 후원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남김 울프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다시 정신이 이상해져감을 느낍니다. 또 한번, 그 참혹했던 시절을 반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아마 회복이 안될 거예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신 분입니다. 저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생략).
울프의 익사체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 지나서였다. 그녀의 남편 레오나드는 시체를 거두어 화장한 뒤, 멍크스하우스 정원밖에 있는 커다란 느릅나무 밑에 그녀의 재를 묻었다. 그리고 묘비명에는 울프의 소설 <파도>의 마지막 구절을 새겨 넣었다.
너에게 대항하여 굽히지 않고 단호히 나 자신을 내던지리라. 죽음이여!
자의식이 선택한, 실로 단호한 죽음이었다. 때로는 심하게 덮치는 우울증과 정신발작의 광기를 억누르고 그녀는 저항운동가로, 여권운동가로, 훌륭한 작가로 59년을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 있어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멱라강에 투신한 - 굴원
초나라 굴원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하나의 절이 탄생되었으니 단오절이 바로 굴원이 죽은 날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똑같은 나이 59세에 굴원도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5월 5일이었다. 그는 초나라 왕족으로서, 견문이 넓고 치란에 밝아 26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벼슬이 높았다. 굴원은 회왕으 명으로 헌령을 작성하고 있었는데 마침 다 되기도 전에 상관대부가 이것을 빼앗으려 하자 굴원은 거절하고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상관대부의 참소를 입고 끝내는 회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파직되었고 왕은 점차 그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진, 제, 초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굴원은 친제공진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마침 굴원이 쫓겨나게 된 것을 안 진나라 임금이 장의를 시켜 제나라와 국교를 끊도록 만들어놓고 초나라로 쳐들어갔다. 위나라까지 기습해 왔다. 속은 것을 안 회왕이 잘못을 뉘우치고 철저한 친제파이던 굴원을 다시 불러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그는 다시 중용이 되어 초나라의 삼려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 회왕은 진의 계략에 빠져 친진파들의 참언으로 충간하던 굴원을 내쫓고 만다. 결국 회왕은 어리석은 아들 자란의 말을 듣고 진나라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회왕의 장자, 경양왕이 그의 뒤를 잇고 아우 자란이 영윤이 되었다. 굴원은 자란을 미워하다 비록 방축되었지만 초나라를 걱정하고 회왕을 그리워하며 다시 조정에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그의 직언을 꺼리던 경양왕은 진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자, 그를 강남으로 방축해 버렸다. 수 년간 울분으로 비분 강개하다가 <어부사>를 쓰고 경양왕 14년(기원전 285), 굴원은 59세를 일기로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그가 주은 5월 5일에는 쭝즈(종자)라는 떡을 만들어 먹고 뱃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비통한 굴원의 죽음에 그를 애도하는 초나라 사람들이 죽통에 쌀을 담아 강물에 던지는 것은 교룡에게 그걸 먹고 굴원의 시체를 다치게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단오날을 시인절로 정하여 갖가지 문학행사를 하면서 굴원의 시정신을 문학적 지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회사> 돌을 품에 안다 라는 시 끝 구절에
세상 혼탁하여 날 알아 주는 이 없고 사람의 마음 일깨울 수 없어라. 죽음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애석히 여기고 싶지 않아라. 분명 세상 군자들에 고하노니 나는 그대들 본보기 되리라.
이것이 그가 죽고자 한 뜻이었다. 이 시를 절필로, 그는 불의에 굽히지 않는 본보기가 되려고 스스로 죽는다고 했다. 다 같은 익사이지만 각기 처해진 입장과 심경은 모두 이렇게 달랐다. 특히 굴원의 문학은 망국을 슬퍼하는 여말의 목은, 야은, 포은 등 우국충정한 신하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동병상련의 감회를 그들은 시로써 나눈 것이리라.
폭풍우가 데려간 - 셀리
셀리는 이백이나 굴원, 태재치나 울프처럼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사고사였다. 친구와 보트를 타고 스페치아만을 항해하는데 폭풍우가 덮쳐 순식간에 그를 데려간 것이었다. 그때의 나이 29세였다. 그도 버지니아 울프처럼 영국의 명뭔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티모디 셀리는 국회의원이었고 셀리도 준남작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엉뚱하고 반항적이며 자유분방한 기질을 나타내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교실에서 접시에 담은 알코올에 불을 붙여 파아란 불꽃을 보며 그는 주문을 외운다. 공기와 물과 불의 악마들이여! 내가 너희들을 불러내노라. 선생이나 학생들은 미치광이 셀리라 불렀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친구와 <무신론의 필요성>이란 책을 출간하여 퇴학처분을 당하게 된다. 19세 때였다. 집에서 배척을 받고 가출한 그는 여관집 딸 헤리어트와 아일랜드로 도망을 갔다. 그들은 2년 뒤에 애기를 안고 돌아왔다. 셀리는 급진주의자인 윌리엄 고드원을 만나 곧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그의 딸 메리와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남녀가 이번에는 스위스로 도망을 쳤다. 그 소식을 안 헤리어트는 자살을 해 버렸다. 급진주의자다운 빠른 템포로 셀리는 여러 가지의 일을 저질렀다. 장인의 소송에 의해 그는 1818년 이탈리아로 쫓겨간 후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궁핍과 가정적인 불행 속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시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셀리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 바이런, 키츠 등과 어울렸다. 키츠는 이태리를 여행하다 3개월만에 로마에서 각혈을 하며 쓰러졌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셀리는 추모시 아도네스 를 썼다. 그런데 우연인가 키츠가 누워 있는 로마교외의 묘지에 셀리도 와서 묻히게 된다. 불과 4개월 뒤였다. 키츠는 26세, 셀리는 29세였다. 셀리의 시체가 지중해의 해변가로 떠올랐을 때, 바이런이 다리를 절며 단숨에 달려왔다. 둘은 평소에도 통하는 데가 있었으며 공통점이 많았다. 바이런은 남쪽 해안에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셀리의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지폈다. 셀리는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이탈리아의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러나 불과 2년 후, 바이런마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 격전지인 미서롱지에서 열병으로 죽자 그도 한 줌의 재가 되고 만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 셋은 약속이나 한 듯 로마와 그리스에 와서 객사하였다. 셀리가 죽기 전에 쓴 서풍에 부치는 노래 는 언필칭 그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무덤 속의 송장들처럼 차가운 곳에 누워 있게 하는 오! 너 서풍!
자살할 수밖에 업슨 사람 - 태재치
태재치에 대해 쓰려고 그의 이름을 뇌어보니 37년 전, 예전 그대로의 그리운 정감이 솟아난다. 내가 대학 초년새이던 1960년 무렵, 전후문제 작품집이 쏟아져나오고 일본의 작가 하라다 야스꼬의 <만가>,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 등 일본소설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태재치의 <사양>에 매료되어 있었다. 특히 시인이던 신동문씨의 문장은 너무도 아름다워 숨막히는 순간의 절망의 미를 그대로 우리에게 옮겨 주었다. 1964년으로 기억되는 가을, 무교동의 어느 대폿집에서 우연히 다자이(태재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고은씨가 나를 신동문씨에게 소개해 주었다. 다자이를 몇 번이나 읽었습니까? 그의 첫 마디였다. 그리고 이어령씨와 동창인 그의 아내 진여사는 다섯 번인가를 읽었다고 말했다. 그날 밤 우리는 다자이의 혼이 씌인 듯 우에하라 선생의 키로칭 을 흉내내며 실컷 떠들고 웃고 마셨다. 함께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신의 몫을 저마다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삶이 힘들고 괴로웠던 때였으니까. 힘에 닿지도 않는 실력이나, 욕심으로 나는 다자이의 소설을 모두 일어본으로 구했다. 특히 그의 유서나 다름없는 <사양>이나 <인간실격>은 마치 죽은 동생의 일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도 나는 소중히 지니고 있다. 육십을 바라보는 지금,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든 다 옮겨올 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뭉크의 그림같이 유혼이 되어 떠다니던 때의 모습. 몰락한 전후 고아 가즈꼬(사양의 여주인공)처럼 나도 그때 허허벌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오지의 유서를 그때 읽고 또 읽었다. <인간실격>의 요오조오나 <사양>의 나오지는 바로 태재치 자신의 모습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내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여서 때로는 거울을 보는 듯한 전율마저 느끼며 그 유서르 거듭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누님. 안되겠어요. 먼저 가요.(생략)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태양 속에서는 살기 어렵습니다. 살아가기에는 어딘지 한 군데 모자라는 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것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큰 노력이었습니다.(생략) 강한 세력에 밀려서 지지 않으려고 마약을 쓰며 미치광이가 되어가지고 저항했습니다.(생략) 나는 집을 잊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머님의 착하심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님에게 냉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저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생략) 누님. 믿어 주십시오. 나는 놀기만 하였지만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쾌락의 임포텐츠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오직 귀족이라는 자신의 헛도깨비에서 이탈하고 싶어서 놀고 미치고, 거칠어진 것입니다.(생략) 누님. 나에게는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결국 나의 죽음은 자연사입니다.(생략) 어젯밤의 술도 말짱히 깨었습니다. 나는 맨정신으로 죽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안녕하십시오. 누님. 나는 귀족입니다.
다자이 오사무(태재치), 그는 일본 본토 북쪽 끝에 있는 아오모리껭에서 출생하였다. 동경대 불문과에 다녔으며, 집안은 귀족의 명문가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대단한 부자였다. 1909년에 태어나서 1948년에 죽었으니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였다. 그는 41세의 나이로 자살을 했는데 정말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다. 그가 문단에 나온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둔 암담과 혼돈의 시대였다. 형식적으로는 틀의 개혁을 시도하고 내면적으로는 현실부정의 반속정신을 표방했지만 그가 지닌 주체의 연약성과 그의 시도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사회정세로 말미암아 그의 의도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패배는 창작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인간생활까지 뿌리채 뒤흔들어 놓았다. 말하자면 인간에 실격한 셈이었다. 순수한 그에게 문학과 인생이란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던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일종의 자학적인 도전, 그러한 그의 행위는 마치 불나방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학이 생활에 옮겨와 그는 마약에 손을 대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정사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벽이 창작에서는 야릇한 결과를 빚어냈다. 퇴폐적인 미를 형성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몰락한 귀족의 고귀한 패배의 미를 탐구한 <사양>, 자존보다도 비굴, 진실보다도 허구를 통해서 오히려 실존과 진실을 탐구한 <인간실격>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전후 일본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다. 긴자의 여급과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혼자만 살아 남았고, 두 번째는 초대라는 여자와 수상온천에서의 자살미수. 세 번째는 산기부영과 손을 잡고 옥천상수에서 뛰어내렸다. 세 번째 가서야 그는 정말로 죽을 수 있었다. 태재치의 정사는 마음 아프다든지 슬프다고 말하기보다는 더 한층 견딜 수 없이 암연한 생각을 문학에 종사하는 우리들에게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생전의 그의 소설이 나타내고 있던 세계의 해명을 몸으로써 증명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정사, 그 자체가 태재치가 원했던 최후의 무도이었던 것만 같다. 이러한 감개를 실감한 사람은 나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를 좋아하던 촌송정효의 소감이다. 태재는 아꾸다가와(개천)가 생애의 끝판에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라고 말한 사람은 복전이란 작가였다. 10여 년 전, 태재에 관해 메모해 두었던 공책은 이랬다. 태재치와 개천 = 자살 직전 둘다 신경쇠약, 태재치 정신병원 입원 태재치와 보드레르 = 마약, 광기, 자살기도. 태재치와 김소월 = 아편, 자살실행. 그리고 41세, 폐결핵, 마약, 정신병원, 객혈. 태어나서 미안해요. 어디선가 그의 길다랗고 하얀 얼굴이 나타나 히죽이 웃으며, 이 말을 거네올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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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9. 폴란드 인의 비애가 담긴 쇼팽의 <혁명>
우리에게도 친숙한 음악가 쇼팽(1810-49)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유럽 고전 음악의 전통과 폴란드 민족 고유의 색채를 종합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피아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천재였다. 그런데 쇼팽이 폴란드 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쇼팽이 살았던 시대에 독립국가로서의 폴란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찍이 폴란드는 동유럽의 대국이었지만 17세기 이후 점차 쇠락해져 `유럽의 국가`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쇠락한 폴란드는 1772-95년 세 차례에 걸친 분할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807년 나폴레옹의 원조로 바르샤바 대공국이라는 명칭으로 어느 정도 국가의 틀을 갖추었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쇼팽이 태어난 1810년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바르샤바 대공국이 있었는데 나폴레옹 몰락 후인 1815년의 빈 회의를 통해 폴란드 왕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 왕국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황제가 국왕으로 있는 러시아 영토에 불과했다.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한 쇼팽은 1829년 열아홉의 나이로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도시 빈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로 호평을 받은 쇼팽은 음악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 가을 연주 여행에 앞서 그는 바르샤바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 천재는 열정적으로 연주했지만 그에게 그 연주회는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가 되고 말았다. 다시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난 쇼팽은 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르샤바 봉기 소식을 들었다. 1830년 파리에서 불타오른 혁명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쳤고 드디어 11월 폴란드에도 봉기의 기치가 높이 올랐다. 그러나 봉기 세력은 대귀족 중심의 보수파와 중소 지주 중심의 진보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게다가 어느 쪽도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봉기는 러시아 군대에 의해 1831년 9월 바르샤바 함락과 함께 진압되었다. 귀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태의 추이를 보고 있던 쇼팽은 독일의 슈트트가르트에서 진압 소식을 들었다. 작품 번호 10번 `12개의 연습곡`중의 하나인 <혁명>은 이 때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곡에는 `골수까지 폴란드 사람`인 쇼팽이 자기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지 못한 고뇌와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잘 담겨 있다. 이후 폴란드 인으로서의 고뇌를 간직한 채 파리로 간 쇼팽은 죽을 때까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1849년 파리에서 서른아홉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쇼팽의 마음은 항상 조국 폴란드를 향해 있었다. 말년에 건강이 매우 나빠진 와중에도 그는 런던에서 폴란드 난민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 출연할 정도였으며 사망한 해에 작곡한 두 편의 작품도 모두 마주르카(4분의 3박자의 폴란드 무용곡)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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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7. 중국은 굴복하지 않는다
부록 : 미국의 능력으로는 중국을 막을 수 없다 - 키신저 (미국)
중 .미 관계에 대해 나는 중국 국민을 좋아한다. 70년대 이전까지 나는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줄곧 중국문화를 연구하고 중 . 미 괸 계발전에 힘을 기울여 나름대로 그에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개 인적인 흥미 때문만이 아니고 중 .미 관계의 발전은 양국의 이익에 도움 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양국 사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를 정상적인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나이가 든 나는 과거의 일들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70년대에는 마오쩌똥이 주석이었고 떵시아오핑은 부총리였었다. 나와 떵시아오핑은 중 .미 양국은 서로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다는 대화를 하였다. 마오쩌똥은 이 대화기록을 들었고 다음날 접견에서 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가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만날 필요도 없지 않느냐고 하였다. 사실 우리에게는 서로 취할 수 있는 공동의 이익이 있었다. 상대방으로부터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이다. '중 미 합동성명'의 기본 목적은 동아시아에 패권주의가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도 우리는 공동의 이익이 있다고 보았고, 그외 많은 문제들에 관해서도 서로 얻을 것이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대만문제만 하더라도 처음 중국과 접촉할 패 중국측은 '하나의 중국' 입장을 강조하였다. 과거 미국의 6대 정권은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모두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승인하였다. 대만 역시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근래 이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미국이 지금까지 인정했던 입장을 변경해서도 안 되고 대만도 중국에 속한 하나의 성(省)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중국측에서 무력사용의 중지를 천명한다면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중국의 정치적 입장을 천명하는 것일 뿐으로 중국이 국제적인 어떤의무를 가지게 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절대로 대만의 독립을 돕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러한 관점은 미국에 가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대만에 있는 관원들의 직급을 제한하고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수교한 후 처음 15년 동안은 중국의 내정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으며 주로 국제문제에 대해 어떻게 협조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나는 중국이 미국의 적이라거나 미국에 대한 어떤 위헙을 조장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양국은 대외정책에서 상호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국방부장관이 예정대로 미국을 방문할 수 없게 된 것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쌍방이 이번 방문을 다시 실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 그가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나는 뉴욕에서 그를 만찬에 초대 할 것이다. 현재 중 .미 간에 쟁점이 되고 있는 다른 하나는 중국이 파키스탄에 핵기술을 수출한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되리라 생각한다. 중국은 우리보다 어리석지 않다. 중국의 주변에 새로운 핵보유국이 등장한다면 먼저 중국에게 불리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국 국내법을 들어 핵 확산금지를 요구하는 것은 중국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들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중국과 평등한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가 중국을 설득한다고 나설 필요도 없을 것이며 그들도 공동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초 위에 양국의 전문가들이 자세하게 토론한다면 이 논쟁은 해결되리라 믿는다. 미국에게 올해는 아주 힘든 해였다. 미국인은 선거를 치르는 와중에 어떠한 좋은 견해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중 . 미 양국이 계속해서 대립한다면 이는 어느 쪽에도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며 서로에게 돌아오는 것은 재난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줄곧 중 . 미 간의 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또 쌍방을 위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이후 더 많은 군인들과 회담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이전 만찬에서 중국 군인들을 한 번 만나본 후 다시 중국 군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미 일 안전동맹에 관해 중 .미 간에 경색된 국면이 타개된 후 10년 동안 중국은 미 .일 쌍방의 공동방위관계의 유지에 찬성해 왔다. 중국측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미국이 계속 남아주길 바란다고 분명히 밝혔으며 일본과 미국과의 지속적인 동맹관계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단독방위체계는 오히려 미 .일 공동방위보다 중국에 훨씬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공동방위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사상에 관해 미국이 일관되고 완벽한 전략체계를 가졌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않다, 사실 우리는 장기적인 전제망침을 가져 본 적도 없고 완전한 전략사상을 가져 본 적은 더더욱 없다.우리는 중국과 같이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겨우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우리에게는 만리장성이란 것도 없고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으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전략적인 안목으로 세계를 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미국의 전략은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수 있는 대국이 출현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미국은 새롭게 등장하는 대국을 막을 만한 역량이 없다고 대답하겠다. 미국이 중국을 제재하려 한다면 이는 미국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고 미국의 재산만 허비하는 꼴이 될 것이다. 게다가 어느 나라도 우리 편에 서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중국의 군대가 동남아나 한반도를 향해 진군한다면 그것은 곧 미국과 적대관계에 놓인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미국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 지금 내가 대만문제를 제쳐두고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러시아를 제재할 생각이 없다. 러시아가 자신의 군사력을 국경 너머로 보내지만 않는다면 미국은 러시아를 위협적 존재로 생각지 않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가졌던 어느 강연회에서 나는 '러시아의 국내변화에 우리는 간섭하지 않으나 해외로 확장하려 한다면 이는 전락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지금의 문제는,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확장하기를 좋아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대선 이후에나 논란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작년 5월 미국 보수파 인사가 주최한 만찬에서 앞에서 언급한 견해들을 말하였다. 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10년 내에 변화가 생기리라고 생각하며, 미국정책은 결국 나의 견해와 근접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은 다르게 선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10년 내의 동아시아 세력 판도에 관해 일본은 계속해서 상당히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될 것이고 아마도 핵을 보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등지에 계속 투자를 확대하면서 사실상 중국을 포위하고 있다. 지금 한반도정세는 아주 불안하다. 현재의 상황이 절대로 향후 10년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앞으로 민족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 확실하나, 그건 유럽에 둔 것이 아니며 아시아에 등 진것도 아니다. 지난 세기 동안 그들의 중점은 아시아였다가 나중에 유럽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안정하다. 인도는 그 힘을 인도양을 향해 확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앞으로 중요국가가 될 것이다. 미래의 아시아 태평양지역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가 서로 경쟁하는 양상이 될 것이다.
-96년 4월 중 . 미 관계와 아시아태평양 문제에 관한 1차 담화 내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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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북의 어머니
그는 43 년만에 고향땅 북한을 찾았다. 재미 교포로서의 공식 일정을 모두 끝내고 곧장 고행 마을을 찾아 나섰다. 길도 옛길도 아니고 마을 이름도 옛 이름이 아니었으나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한 집을 찾아내었다. 초가 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것 말고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던 자리와 뒷간과 광이 있던 자리까지 예전과 똑같았다. 심지어 뒤꼍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까지 그대로였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봉당에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꼬부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할머니, 혹시 43 년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을 아세요?" 그는 가만히 노파에게 다가가 물었다. 노파는 꿈이라도 꾸는지 눈도 뜨지 않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50 년 전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네? 50 년 전부터요?" 놀란 그는 주름 투성이인 노파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노파는 이빨이 몽땅 빠지고, 하얗게 센 머리가 북데기처럼 엉켜 있었으며, 눈마저 짓물러 눈곱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헛일 삼아 다시 물어 보았다. "그러면 할머니, 6.25 나기 전에 이 집에 살던 기영이라고 아세요?" "기영이?" 노파의 얼굴에 환히 반가운 기운이 스치더니 이내 눈물이 고였다. "우리 아들인데 죽었어." "아니 그러면 저의 어머니세요? 어머니, 제가 기영인데요." "뭐라구?" 노파는 귀가 어두워 잘못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남에 갔는데 죽었어. 한번만이라도 만나 봤으면 좋겠어." "어머니, 제가 이남에 갔던 기영이에요. 고개를 들어보세요." 그제서야 노파가 번쩍 고개를 들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눈에 불꽃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로 그의 양복저고리를 벗겨 내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지 젊은이 못지 않은 힘으로 와이셔츠마저 벗겨 내었다. 그리고는 "아이고, 기영아!"하고 그의 등에 얼굴을 대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꿈인가 생시가? 네가 정말 기영이구나! 등에 삼태성이 있는 걸 보니 틀림없는 기영이구나! 아이구,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낳았을 때 이 삼태성을 보고, 우리 집에 인물 났다고 네 아버지가 그리 좋아하셨다." 노파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도 "어머니!"하고 노파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꿈에 그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머니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달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이 더욱 쏟아졌다. "휴전선이 막히자 아버지는 네 생각에 화병이 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네 누나와 동생은 6.25 때 죽었고. 나도 오래 전부터 몸이 아파 널 한번만 보고 죽게 해 달라고 매일 매일 신령님께 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정말 이렇게 보게 되다니. 어제는 오랜만에 네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니 네 얼굴이 통 안 떠올라 아까부터 봉당에 앉아 네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려고 애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집이 달라지면 네가 영영 찾아올 수 없을 것 같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허물지도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정말 잘 한 일이구나." 노파는 연신 꿈만 같다면서 몇 번씩이나 자기의 손등을 꼬집어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저런 사정상 어머니와 하룻밤도 지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매달리며 우는 어머니에게 몇 달 후에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만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그 뒤, 그가 다른 나라에 들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와 있었다. 가만히 날짜를 따져 보니 자기가 찾아갔던 바로 그 다음날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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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과 북극에서도 과연 감기에 걸릴까? 물론 “예”라고 대답할른지 모른다. 왜냐하면 추운날 감기에 더 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극과 북극에서는 감기 바이러스가 살 수 없기 때문에 감기에 걸릴 걱정이 전혀 없다.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항상 13센티미터 정도 흔들거리며 파리에 있는 에펠탑은 기온에 따라 15센티미터 정도 흔들거린다.
선풍기는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덥게 한다. 선풍기는 그저 몸의 습기를 말려 잠시 열을 빼앗아감으로써 시원해지는 듯이 느끼게 할 뿐, 실제로는 모터의 열 때문에 오히려 더워진다.
1902년 마르티니크 섬에 있는 펠레 화산이 폭발하였을 때 가스와 불꽃 때문에 38,000명이 질식했다. 하지만 그 중 단 한 사람,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만은 살아남았다.
1930년대 미국에는 금주령이 내려 있었는데 워렌G.하딩 대통령 등 정치가들은 밖으로는 국민들에게 금주령을 강요했으나 자신들의 집안에서는 술에 만취되곤 했다. 그 때 미국에는 200,000개의 무허가 술집이 널려 있어 뉴욕에만도 32,000개가 넘었고 그 중 15,000개는 살롱 비슷했다.
비는 땅을 축축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메마르게 만든다. 왜냐하면 공기중에 있는 습기를 빼앗아, 이것이 구름으로 되었다가 다시 비로 변하여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비라는 것이 없다면 공기 중에 있는 습기는 항상 땅의 표면을 축축한 상태로 유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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