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2.09 01:52 【독서편지】: 제 80 호 風磬 조회 수 8,198 추천 수 14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80 호4339.12.09 (10.19)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제1회 비룡소 블루픽션 상 작품 모집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독서를 못하는 왕이 되기보다는 비록 초라한 골방이지만 책이 가득찬 방이 있는 가난뱅이가 되겠다. / 머코리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한국 최초의 멋쟁이 문학사 - 하란사 "나의 본래의 성은 김해 김씨이옵니다. 그러나 남편의 성을 따라 하씨라 부르기로 하였나이다. 이러한 나의 정신적인 변모를 두고 개화한 여성이라 부르는지도 모르옵니다만....." 어떻든 그녀는 하란사란 이름으로 우리 개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875년 평양 태생. 얼굴이 남달리 아름답고 신체 조건이 뛰어난 데다 성격은 활달하여 남의 이목을 집중케 하는 그런 여인이었다. 간혹 그녀를 두고 예가 출신이라는 말도 떠돌지만, 어쨌든 인천 감리 하상기가 아직 별감으로 있을 때 그녀는 나이 어린 소녀로 1남 4녀를 가진 하상기의 후취가 되어 들어갔다. 남남 북녀라는 말에 어울리게 하란사는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용감하다는 것은 1남 4녀나 되는 전실 자식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정부인으로서의 용기가 아니었다. 남편의 벼슬이 올라가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으나, 그녀는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지 않고 담장 밖으로 흘러가는 개화의 물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거듭 용감했다. '미래를 개척하여 선도자가 되리라. 이 시대의 문명의 선도자가. 그러기 위하여 나는 이 가정을 뛰쳐나가야 한다.' 가정을 뛰쳐나간다는 의미가 가정을 버리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1남 4녀의 전실 자식을 남겨 두고 어디를....... 그녀의 용기란 한국적인 부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가지는 만용이 아니었다. 배움. 하란사의 머리는 배움의 욕망으로 가득 찼다. '이화 학당에 들어가 나도 남들처럼 배우고 싶어.' 그녀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화 학당의 첫 학생이 중전 민비의 영어 통역을 하여 세도를 잡아 보려고 스크랜턴 부인에게 영어를 배우러 왔던 무슨 벼슬아치의 소실 김씨라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도 몇 사람 뜨내기처럼 다녀간 기혼여성이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1890년대부터 이화 학당의 규칙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결심을 했다.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가 담판을 내자.' 어느 날 밤, 사방등에 촛불을 켜서 하인에게 들게 하고 그녀는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 나섰다. 학당장과 마주앉아 하란사는 들고 있던 등불을 훅 꺼 버렸다. "아니, 왜 등불을 끄시오?" 학당장이 어리둥절해하자 하란사는 사이를 두지 않고 말했다. "학당장님, 우리가 캄캄하기가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주세요." 학당장은 결혼을 한 이 젊은 여성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란사는 프라이 학당장을 잡고 애원했다. 애원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좋소. 부인, 입학하시오!" 프라이 학당장은 그녀가 암흑의 한국 땅에서 선각자가 될 자질이 충분히 있음을 깨닫고 입학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화 학당 재학중에 하란사는 첫 딸을 낳았다. 남편은 관리이고 부자였지만 인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당돌하지만치 대화 감각에 예민한 어린 아내를 후원해 주었다. 깊은 이해와 끝없는 사랑으로....... 하란사는 어린 딸 자옥을 전실 아들 구룡의 새 아내인 며느리에게 맡기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구룡의 첫 번째 아내는 매사에 게으르고 잠꾸러기여서 그는 게으른 아내와 이혼해 버리고 바지런하고 집안일에 열심인 새 아내와 재혼해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남편이 자청하여 학비 부담을 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아내의 학교 생활을 돕기란 드문 노릇이어서 하란사는 말하자면 그만큼 선택받은 여성인 셈이었다. 남편은 학교에 간 젊은 아내가 학교 일로 식사 시간에 귀가하지 못하면 하녀를 불러 분부했다. "냉큼 학교로 밥을 날라다 마님 잡수시도록 하여라!" 분부가 떨어지면 하녀는 따끈한 음식을 차려 큰 목판에 담아 시기를 덮고 보자기에 싸서 이고는 학교로 간다. 어린 딸도 집안에서 보살펴 주었고, 남편이 이처럼 마음을 써 주었으니 그녀는 남편과 가족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하란사는 멋쟁이였다.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하란사는 어찌 보면 법도에 어둡고 사치스러운 것 같았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집안에서는 남편, 자식들 모두가 하란사에게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엄하고, 화목하고, 법도 있게, 그것이 그녀의 생활 신조였다. 1896년 하란사가 이화 학당을 떠나 외국 유학 길에 오른 기록은 그녀를 뒷날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B.A 학위 수여자로 만들어 놓는데, 1896년 하란사는 박 에스터와 함께 이화를 나온다. 이화에서는 초창기의 학생들에게 학년 구별없이 영어에 힘을 기울였고, 산술과 국문, 성경 창가, 한문, 먹글씨, 지리등을 가르쳤는데 혼인할 나이가 되면 학교에서 주선하여 독실한 신자 중에서 적당한 배우자를 골라 부모의 협의를 거쳐 결혼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혼인식을 올린 다음 졸업장 대신 혼인 증서를 교부하면 그것이 곧 졸업이 되었던 것이다. 이미 혼인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던 하란사에게는 그러한 과정도 이제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1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친다. 그녀가 유학을 떠날 때 자옥은 새문안 교회의 신자가 젖을 먹여 기르기로 되어 있었고, 전실 아들 구룡의 아내가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남편의 헌신적인 외조, 며느리의 이해, 집안 사람들의 협조가 그녀를 무사히 미국으로 건너가게 하여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하란사는 마침내 B.A 학위를 받는다. 이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하란사를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학위 수여자로 기록하는 쾌거이기도 하려니와, 그녀가 국내 여성에게 끼친 영향을 개화의 선각자로서 영구 불멸의 별이 되게 한 점이기도 했다. 귀국 후 하란사는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정동 예배당에 나타났다. 검정 갓에 기다란 검정 새털 깃을 꽂고 검정 원피스를 입은 지적인 부인. 하 부인이라면 이제 서울 장안에서 몰라보는 이가 없었다. 하 부인은 미국에서 돌아와 스키랜던 부인고 함께 달성 이궁에서 기거하며, 상동 예배당 건립에 힘을 기울였다. 예배당이 세워지자 그녀는 거기서 영어반을 개설, 여성 교육을 실시했는데, 하란사의 지도로 뒷날 이 땅의 교육 사업에 봉사하게 될 신 알버트, 손 메레, 양 우러더 등이 배출되었다. 그녀는 또 미국인 선교사 미스 알버슨과 함께 정동 이화 학당 옆에다 부인 성서 학원을 창설하고 3년 동안 경영한다. 그 후 부인 성서 학원은 후임을 정하여 일임하고 그녀는 자신을 이화 학당에 입학시켜 준 미스 프라이 선생에게 간다. 이화 학당 교사 겸 기숙사의 초대 사감이란 직함이 그녀의 이름위에 붙게 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서양 선교사들 틈에서 영어 회화를 가장 능숙하게 할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한국 선생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의 영어는 직원이나 학생들의 의견을 선교사들에게 전달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이화 학당을 총감독하는 직책이 부여되어 '총교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총교사 하란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학생들간에 불려지고 있었다. -호랑이 어머니. 엄격한 인상에 욕설을 잘 퍼붓기도 하는 총교사에게 학생들은 그같은 별명을 붙에 주었다. 그 당시 이화 학당 학생치고 하란사 선생의 꾸중을 듣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욕은 개화로 가는 과정과도 같아서 운동장에 나와 노는 것만 보아도 욕이었고, 치마 주름이 터진 것을 보아도 욕이었다. 뎅기를 머리 끝에 물려 드리웠어도 욕이었으며, 대답 소리를 크게 하거나 너무 작게 해도 욕이었다. 그러나 욕을 잘하는 버릇은 하 부인, 하 교사의 성격이었지 학생이 미워서 하는 소리가 물론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고 학교 규칙을 잘 지키며 옷맵시를 단정히 하고 다니는 학생이 있으면 하란사는 그 학생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자기 수양딸 노릇을 해 달라는 말을 하여 친부모가 쏟는 애정을 부어 넣기도 했다. 이화 학당 재직 중 하 교사는 미국을 내왕하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그 때마다 한국을 소개하기도 하고, 연설을 하여 돈을 얻어내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그 돈으로 오르간을 사서 모교에 보내기도 한다. 언젠가 시카고와 로스엔젤레스에서 교포들로부터 700달러의 찬조금을 받아 온 적도 있었다. 학교 사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기숙사로 오는 편지를 일일이 검열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남자한테서 온 편지가 있으면 절대로 내어주지 않는다. 그 학생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품행 점수가 60점 이하가 되어 버린다. 하 교사는, 엽서에 먹칠을 하여 연필로 비밀스럽게 써보내는 연애 편지까지도 햇빛에 비춰 밝혀내고야 마는 극성이었다. 기숙사 학생들은 하 교사의 그 같은 완벽성이 늘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하 교사와 이성회 선생이 후원하고 육성하는 자치 학생 단체에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은 없었다. 하란사는 또 전도사로도 한 시대를 기록할 만한 여성이었다. 서울 교외 아홉 개 교회를 돌아가며 주일 예배에 참석한 그녀는 몇 년 동안 1,426호를 호별 방문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11년, 250명의 새로운 교인을 얻게 되었다. 하 전도사는 각 교회 안에 세워진 이화 부속 보통 학교 단위로'어머니 교실'이란 것을 설치하였다. 1주일에 1회쯤 어머니 교실에 나가서 육아법과 선진 외국의 문명 등 계몽 강연에 열을 오였다. 강연 기간 동안 어머니들은 그 학교 교직원들로부터 매일 밤 국문과 산수 등 야학 공부를 하였다. 하란사는 집안일보다 교회와 사회 일에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 부지런한 그녀는 고종과 엄비의 자문에도 나섰으며, 1908년 4월에는 고종의 분부와 사회 유지의 발기로 경희궁에서 관민 합동 환국 축하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제일 먼저 미국에서 현대 의학을 전공하고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박 에스터도 동석했다. 박 에스터와 하란사는 여러 가지 선각자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여성이었다. 개화된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1920년 우리 나라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하란사도 이른바 국권 회복이라는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6년의 일이었다.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감리교 세계 총회가 개최되었다. 하란사는 이 자리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한다. 1개월간의 총회 일정이 끝나자 그녀는 미국에 남아 해외 동포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순회 강연을 통하여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사실을 널리 알려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그녀는 이화 학당 안에서 국내외의 모든 비밀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석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1918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 주의가 발표되자 온 세계 약소 국가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자유를 부르짖으며 민족 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식민지로 압박을 당해 오던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내외의 애국 지사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일을 성취시키기로 되어 있어 하란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 하상기는 어디를 가나 아내의 활동이 자랑스러워 전보다 더 큰 열성으로 아내의 일을 돕고 나섰다. 당시 고종은 거족적인 민족 저항 운동에 앞서 의친와을 해외에 내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항간에는 일본인들 들을세라 엄청난 소문까지 나돌았다. "전하하구 의친왕께서 일본인의 눈을 피해 변소에서 밀의 하셨다는구려." "부자분이 변소에서 무슨 비밀 얘기를 하셨을까?" "의친왕을 해외로 내보내어 독립 운동에 앞장서게 한다는 얘기라는군!" 고종은 깊이 숨겨 두었던 이른바 한일 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 문서 원문과 외국 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어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 했다. 그 중대한 임무에 하란사가 발탁되어 일은 추진되었다. 하 부인이 미국 유학 당시부터 의친왕과 교분이 있는 것을 알고 고종은 하 부인에게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일을 착수시켰다. 하 부인은 용기가 솟았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녀의 가슴을 뛰었다. 일의 시작에서부터 운명은 하란사와 국운 쪽에 이로운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끝내 돌아서고 말았다. 1919년 1월 하순, 고종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시고 만 것이다. 이화 학당에서 미스 프라이와 신홍우 박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란사는 황제의 급보를 듣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궁중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 하란사는 의친왕을 통하여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이 한 가지 점만 보더라도 그녀가 의친왕이나 궁중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나 짐작이 갈 만하다. 하란사의 그 같은 활약은 그녀를 국내에 머물러 있게 하기보다 국외로 나가 독립 운동을 하도록 요청해 오기에 이르렀다. 고종 황제가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란사는 북경을 향해 떠난다. 2월 중순, 동경 유학생 황 에스터는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여성 대표로 하란사를 출국시키려고 서울에 왔으나 하란사가 이미 북경으로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하란사가 국가를 대표할 만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 도착하자 그 곳에 있던 교포들의 환영이 대단했다. 하란사는 어느 교포가 개최하는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만찬회가 생애에서 마지막 가져 보는 자리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빌미가 되어 하란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죽음의 세계를 향해 치달았다. 마침내 그녀는 폭약을 먹고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어 갔다. 그녀의 시체는 시커먼 색으로 변질되어 독살의 의혹을 짙게 했다. 장례에 참석했던 성서 공회 책임자 베커의 말이 독살당했으리란 심증을 굳게 하였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도 북경을 다녀와서 아내가 독립 운동을 방해하는 친일배에게 독살당했으니라 단정했다. 일제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배정자가 하란사의 뒤를 미행하여 독살시켰다는 소문을 남긴 채 그녀는 45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판 정신대 ‘공녀’ - 김정현(고려대 강사)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성의 해방은 시대적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편승하여 성을 상품화함으로써 돈을 벌려는 풍토가 유행하는 형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람들이 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성 폭행은 여전히 강간으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는다. 성은 인간의 자존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므로 강요된 성은 자아를 파괴한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집단적인 성 범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시에 남자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대신에 여자들은 성의 헌납을 강요당하는 적이 많았다. 힘이 약한 민족이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는 경우 여자들의 성은 파괴될 위험에 노출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 우리의 여인들은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야욕에 희생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조선의 여인들이 일본과 청나라에 끌려갔다. 특히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은 더렵혀진 몸을 깨끗이한다는 명목으로 수차례 목욕을 하였지만 ‘환향녀’라 하여 부모나 남편에게까지 배척당하였다. 원래 외적의 방어는 전통적으로 남자의 임무였다. 그런데도 조선의 남자들은 외적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전가시켰으니 그녀들은 졸지에 ‘화냥년’의 기원이 되는 누명을 뒤집어썼던 것이다. 집단적인 성 범죄는 명백한 ‘강간’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것으로 포장되기도 하며, 가해자가 개인적인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더 크다. 공녀가 발생한 사연은 13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태풍의 시대였다. 칭기즈칸에 의해 통일된 몽고가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수행해 나감에 따라 사방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 여파는 우리 나라에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몽고군은 1231년(고종18)에 마침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인들은 침략군에 맞서 수십 년 동안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고려는 대부분의 지역이 유린당하여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였다. 특히 고려 여인들이 몽고군에게 당한 수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몽고군은 저항하는 방어대를 격파하고 성을 점령하면 성인 남자는 대부분 살해하고 남자 아이와 여자들을 사로잡아 가곤 했다. 몽고의 제6차 침략이 시작되는 때인 1254년(고종41) 한 해 동안에 무려 206,800여 명의 남녀 고려인이 몽고군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기록을 참고하건대, 전쟁기간 동안 몽고군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다한 고려 여인의 수는 수십만 명이 되었을 것이다. 몽고에 끌려간 고려인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했으며 특히 여인들은 그 위에 성적인 학대까지 받아야만 했다. 고려 여인들은 전쟁 기간에만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1259년(고종46)강화가 성립되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또 다른 형태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족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그 지역의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으며 여기에는 사람, 특히 여성까지 포함되었다. 고려는 오랫동안 저항한 대가로 왕국을 유지하였지만 속국의 처지였기 때문에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원은 일본정벌을 단행하는 데 드는 막대한 경비를 고려에게 대부분 전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배기간 내내 여러 가지 명목으로 특산물을 요구하는 등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정부는 금과 은, 사냥용 매, 인삼, 잣 약재 등을 마련하여 보내느라 백성들을 수시로 닥달하였다. 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분야에 종사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고려인들은 공물로서 원에 끌려갈 운명에 처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성의 일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세되어 궁중의 환관으로 보내졌으며, 여성의 일부는 처, 첩, 궁녀, 잡역부 등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고려여성의 일부가 마치 공물처럼 원나라에 바쳐졌으니 이들이 바로 ‘공녀’였던것이다. 공녀의 선발은 일방적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1274년(원종15)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녀 140명을 요구한 것이 공녀로 끌려간 시초이다. 이는 원에 투항한 남송의 중국인에게 처를 얻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전례에 없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마을을 샅샅이 뒤져 그 인원을 채워줄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고려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찼다 한다. 색출당한 고려 여인들은 말만 처이지 사실상 그들의 노리개감이었다. 1275년(충렬왕1) 원은 칭기즈칸이 13국을 정복한 이래 그 나라들이 미녀를 바치고 있다면서 고려도 여자를 바칠 것을 은근히 종용하였다. 이러한 압력을 받은 고려는 즉시 혼인금지 명령을 내리고 처녀를 색출하여 원에 보냈다. 당시 여기에 선발된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김찬이라는 시인의 동녀시가 잘 대변하고 있다. 온 세상이 갑자기 한 집이 되니 동쪽 땅에 명령하여 궁녀를 바치라 하네 규중에 거처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더니 관청에서 선발함에 심사하는 많은 눈을 어찌 감당할까 살짝 다듬은 근심어린 두 눈썹이 파란데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억지로 들게하니 온통 발개지누나 어린 꾀꼬리가 깊은 숲속 나무를 떠나려 하고 젖내나는 제비가 날아 옛 둥지를 잃으려 하네 낭원에 옮겨심은 꽃은 금방 핀다 하고 광한에 붙여진 계수나무는 편안히 자란다 하지 떠나가는데 미적미적대지만 솜털깔린 수레에 실리고 바쁘게 떠나려 하자마자 준마가 달리누나 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질수록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낭원은 신선이 산다는 곳, 광한은 달의 궁전을 의미하며, 모두 원나라 궁궐을 비유한 것임) 규중에서 세상 모르고 자라던 어린 소녀들이 선발위원들 앞에 끌려나와 발발 떨며 얼굴과 몸매를 자세히 심사받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불행하게 심사에 통과된 소녀들은 떠나려 하지 않지만 강제로 수레에 실렸다. 혼절하였다 깨어 보니 고국은 이미 멀어진지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들은 과연 누구를 원망하였을까? 그녀들이 구박받거나 병들었을 때 도움줄 이 어디 있으랴! 이후 공녀의 헌납은 본격화하여 고려는 원나라가 요구하는 대로 여자를 바쳐야만 했다. 고려는 계속되는 공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과부와 처녀를 색출하여 원나라에 보내기 위해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몽고인들이 고려 여인을 고토록 탐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정복자로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심리적 요인과 다처의 풍습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환경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들은 춥고 건조한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함께 생화하여 성질이 드셌다. 몽고여인들은 춥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 생활한데다 말젖을 주식으로 하여 곡물, 채소, 과일 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피부가 빨리 노화되어 윤기가 없었다. 이에 비해 네 계절이 뚜렷하여 습도와 온도가 알맞는 기후 속에 살며 곡물, 채소, 과일 등을 적당히 섭취한 고려 여인들은 피부가 뽀얀 미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 잘하고 다소곳하고 나긋나긋한 고려여인들은 몽고남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여인들은 피눈물을 쏟으면서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가 노동력 착취와 성적인 학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눈물 실은 마차는 끊이지 않고 고려의 지배층은 원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공녀 색출에 광분하였다. 백성들의 원망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공녀를 색출하는 방법은 한 마디로 ‘인간사냥’이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충렬왕비가 되어 위세를 떨친 제국공주가 측근들에게 양가의 자녀로 나이가 14세에서 15세인 자를 뽑아올리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순군(경찰)과 홀치(왕의 경호부대)등에게 인가를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밤중에 침실로 돌입하거나 노비를 결박하여 자녀가 숨은 곳을 캐물었다. 그러자 비록 자녀가 없는 집이라도 놀라고 소란하였으며 원망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찼다고 한다. 제국공주는 친정인 원나라에 고려의 자녀를 선물로 가져간 셈이다. 고려 여인들은 공녀로 선택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여 기피하였다. 딸을 가진 집에서는 나이가 어리더라도 일찍 혼인을 시키는 풍조가 생겨났다. 딸이 공녀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사위를 맞아들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가 요구하는 인원을 채우기 힘들어지자, 고려 정부는 혼인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1287년(충렬왕13)에는 “양가 집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다음에 혼인시켜라. 어긴 자는 처벌하라”라는 왕명을 내리고 어린 여자들을 색출한다. 1307년에는 “나이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게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여기에서 공녀는 나이가 대략 10대 초반에서 중반의 앳띤 소녀가 선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녀의 대상으로는 초기에는 독신녀, 역적의 아내, 승려의 딸, 과부 등이 포함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원은 양가의 처녀를 계속 요구하였으며 그 때마다 민가를 뒤졌다. 공녀에는 완족이나 관인의 딸도 포함되었지만, 주 대상은 일반 백성의 딸로서 ‘동녀’라 표현된 어린 미녀들이었다. 공녀들은 지배층 출신인 경우 황제의 후궁, 귀족 내지 고위관료의 처 혹은 첩이 되어 그런대로 지낼 만하였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백성의 딸들은 원에 귀부한 여러 나라 군인의 처, 원나라 궁실의 궁녀 혹은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다. 일단 공녀로 선발되면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번은 충렬왕 때 세자(후일의 충선왕)가 마음 속으로 점지한 왕족의 처녀가 공녀에 초함되어 길을 떠난 일이 있었다. 세자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한 신하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는 모후인 제국공주에게 아뢰어 그녀는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세자의 모후가 원 황제의 딸로서 남편인 충렬왕을 쥐고 흔든 여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건은 공녀로 선발되면 어떤 막강한 배경을 지니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공녀로 뽑힌 딸을 구하려다 갖은 수모를 겪은 한 아버지의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충렬왕과 왕비 제국공주가 양가의 여자를 뽑아서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홍규의 딸도 그 중에 뽑혔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보기도 했지만 그의 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사기에게 “내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한사기는 “화가 공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홍규는 한사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제국공주가 이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홍규를 가두어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였다. 제국공주는 또한 그의 딸을 가두어 심문하였다. 딸은 “제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아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국공주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땅에 처박아 쇠로 만든 채찍으로 마구 때리도록 하였다. 그녀의 몸뚱이에는 피부가 온전한곳이 없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홍규는 무인정권 최후의 집권자 임유무를 제거하여 왕권을 회복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딸을 구해낼 수 없었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주어 사정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아버지는 섬으로 귀양가고 딸은 원나라 사신에게 선물로 바쳐지고 만다. 한편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인이 원나라 실력자의 총애를 입어 출세하는 경우도 간혹 보인다. 하급관료를 지낸 기자오의 막내딸은 고려 출신 환관의 도움으로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제인 순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황후가 되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더욱 세력을 떨친다. 그녀와 고려 출신 환관들은 큰 세력을 형성하여 원나라의 정치를 좌우하였으며, 고려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려에 남아 있던 그녀의 친족들은 하루 아침에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에 자극받은 고려의 고급 관인들 중에는 일부러 자신의 딸을 원나라의 실력자에게 바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좌정승(종1품)을 지낸 노책은 원나라 황제에게, 판삼사사(종1품)를 지낸 권겸은 황태자에게 딸을 바쳐 권세를 부렸다. 그녀들의 넋이 떠돌고 있다면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천륜에 어긋나는 만행이었다. 어떤 묘지명에는 “동방의 딸들이 뽑혀 서쪽(원나라)으로 가기를 거른 해가 없었다... 모녀가 한번 헤어짐에 아득하여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니, 아픔이 골수에 사무처 병에 걸리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하에 무엇이 있어 지극히 원통함이 이보다 더하단 말인가” 라고 새겨져 있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은 경주김씨 문벌가문 출신으로 왕족에게 시집간 여자였다. 그런데 그 딸이 공녀로 원에가 있어서 근심과 번민 끝에 병이 생겨 일찍 죽었다 한다. 그 딸은 원나라 고급관리의 처가 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알이 끝에 병들어 죽었으니 일반 부모들은 어떠하였으랴.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그 사실을 숨겨 이웃이 찾아와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당시의 기록은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통한 심정은 고려말 대학자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1335년(충숙왕 복위4) 원나라에 올린 상소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자들을 모아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예쁜 여자도 있고 미운 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미인이라도 놓아 주고 다른 데에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 여자를 얻으려 수백 집을 뒤지게 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 뿐, 누구도 어길 수 없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띠고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번에 데려가는 여자의 수는 많게는 40명에서 50명에 이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이 서로 모여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를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옷자락을 부여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한 자도 있습니다. 이런 예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 여성의 헌납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아 이후에도 고려 여인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공녀는 12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책을 실시한 후에야 비로소 중단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이곡의 상소에 따르면 공녀는 한번에 많게는 40에서 50명이 선발되었다. 80여 년에 걸친 원간섭기 동안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에 한 번 바쳐졌으니 수천 명이 끌려갔던 셈이다.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데려간 자들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고려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야 그녀들은 성적 수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조선 초기까지도 가끔 공녀가 보내지지만 그 규모나 횟수에 있어서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의 전쟁 중에 이미 수십만 명이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수천 명이 ‘공녀’라는 이름하에 끌려가서 노리개감이 되었다. 고려 왕조는 결국 백성의 딸을 제물로 바쳐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세월이 너무 흐른 지금에 와서 당시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현재의 몽고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기는 좀 무리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 때 우리 나라 여인들을 ‘정신대’란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끌어가서 일본군의 위안부로 만든 만행을 납득할만한 사과와 배상을 받지도 않고 용서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먼 훗날 고려시대의 공녀처럼 아물지 않는 수치로 남으리라.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몽순이의 변화 내겐 미정이라는 친구가 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그 애는 얼굴이 조금 못생긴 편이다. 애칭으로 '몽순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 애가 어느 날 호들갑을 떨며 어제 슈퍼에 갔다가 진짜 근사한 남자애를 만났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몽순이의 얘기에 그냥 웃고 말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몽순이가 "아까 너희들이 왜 웃었는지 안다. 그렇지만 영선아, 난 그 애가 정말 좋아. 그냥 봤을 뿐이지만 느낌이 좋은 애였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몽순이의 우울한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 몽순이라고 사람 좋아하지 말라는 법 있나? 내가 도와 줘야지'결심하곤 그 남자를 수소문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애는 내가 아는 남자였다. '계집애 눈은 높아가지고.' 나는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날 몽순이에게 내가 도와 주겠노라고 하자 그녀는 볼이 상기될 정도로 기뻐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내 걱정은 시작되었다. 그 남자애에게 차마 몽순이 얘기를 꺼내지 못한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거짓말이 시작되었다. 몽순이에게는 "그 남자애가 너의 조용한 모습이 괜찮다고 하더라" "너 머리결이 예뻐 보인데" 같은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거짓말로 몽순이에게 라면이랑 잡다한 과자를 얻어먹었다. 그러나 날로 커지는 몽순이의 기대에 내 걱정도 그 만큼 커져만 갔다. 그러기를 두 달, 양심에 가책이 되어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나는 그 남자애에게 용기를 내어 사실을 털어놨다. 사정을 들은 그 애가 뜻밖에 한 번 만나겠노라고 했다. 나는 몽순이에게 으스대며 약속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때 몽순이의 표정이란...... 드디어 약속한 날이 돌아왔다. 그날의 몽순이는 내가 알고 있던 몽순이가 아니었다. 몽순이는 변해있었다. 조신한 언행이며, 진짜 반짝이는 머리결하며.....정말 예뻤다. 그 남자애도 처음엔 조금 실망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호감을 보였다. 결과는 물론 해피엔딩이었다. 나는 지금 내 거짓말이 몽순이를 변화시켰다고 믿는다. 몽순이는 그 남자애가 조용하고 지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하루에 책을 세권 이상 읽었다고 한다. 오! 놀라운 사랑의 힘. 지금 생각해 보니 흔쾌히 만남을 허락해 준 그 남자애에게도 고맙다. 사람의 외면보다는 내면을 보아 주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그 남자애와 나만의 비밀이지만 글세 만약 이 글이 책에 실린다면 몽순이가 알까? 알아도 상관없다. 나는 캐나다에 있으니 몽순이가 찾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영선 님/Delton B.C Canada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70 - 초인의 등장: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년) 그때 세계에서는 1847년: 영국 과잉생산으로 공황 발생: 마르크스 등,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발발 니체 [Nietzsche, Friedrich] 1844. 10. 15 프로이센 작센 뢰켄~1900. 8. 25 바이마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이렇게 막다른 염세주의의 벼랑까지 몰고나온 쇼펜하우어는 그 해결의 길을 동양의 배다와 우피니샤드 철학에서 발견한다. 인도인들은 일찍부터 그런 인간과 세계의 비극성과 비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해결의 방법을 해탈의 길에서 얻으려고 했다. 인도인들의 해탈의 정신은 근본의지, 삶과 세계의 존재의지 그 자체를 무화시키며 해탈로 벗어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실 쇼펜하우어를 읽는 사람은 이 의지의 염세적인 악의 존재는 인정하나 해탈의 방법과 같은 이론적 해명에 지나지 못한다고 보기 쉬웠다. 그래서 적지 않은 추종자들이 염세 및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공명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세상에서 열심히 즐거움을 찾아 산 사람은 말년의 쇼펜하우어 그 자신이었다. 사람은 극단의 주장과 사상을 앞세우게 되면 자신은 언제나 그와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게되는 법이다. 만일 쇼펜하우어에게 니체와 같은 추종자가 없었다면 그의 철학은 몇가지 내용을 남겼을 뿐, 오늘과 같은 역사적 의미는 지니지 못했을지 모른다. F.니체는 쇼펜하우어 못지 않은 천재성과 기인적 생애를 살았다. 아버지도 목사였고 조부도 목사였다. 할머니도 목사의 딸이었고 어머니도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는 태어날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러나 유례를 보기드물 정도의 반기독교 정신을 갖고 싸운 혁명아가 되었다. 대학에서는 그리스 정신과 문화에 도취되어 리츨이라는 교수밑에서 문헌학에 뜻을 모았다. 그가 교수의 추천을 받아 바젤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교수는 당신은 대학이 요구하는 모든 영역의 학문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니체는 타고난 시이,예술가였다. 치밀한 과학성을 지닌 편도 아니었고, 체계적인 학설을 제창한 철학자다운 인내력도 부족했다. 그의 특성은 철학적 과제를 시적으로 해명하는 특이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보다도 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니체가 철학적 사상에 접하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접한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는 R. 바그너의 음악을 사랑하는 예술평론가에 가까운 일에 열중해있었고 바젤 대학을 곧 떠났기 때문이 자유로운 문필가로서의 위상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다양한 독자층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적 주제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을 연장시킨 것이었다. 그 이론성을 갖춘 대표적인 저서는 "권력에의 의지"이며, 그의 핵심사상이 여기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 "권력에의 의지"도 철학적체계를 갖춘 저서는 아니다. 그는 학자이기보다는 시적 사상가였음을 여기서도 엿보게 한다. 그는 드물게 보는 문필가였다. 자기자신이 최고의 독일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A. 슈바이처도 프랑스어로 씌어진 최고의 문장은 루소의 "민약론"이고, 독일어로 씌어진 가장 훌륭한 문장은 니체의 "선약의 피안"이라고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즐겨 읽고 있다. 니체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주저이기 때문이다. 니체도 그 짐을 인정하고 있으며, 가장 뛰어난 문장이라고 자평한다. 우리가 젊었을 대는 "차라투스트라..."를 읽지 않은 대학생이 없었을 정도였다. 차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성자였다. 그를 주인공으로 해서 자기자신의 사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철학적 시상이다. 그는 그 속에서 '신들은 이미 죽었고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고 절규하고 있다. 한때 '신은 죽었다'는 신학이 유행한 일이 있었으나, 그 처음 발언자가 바로 니체였던 것이다.그는 인간의 신체가 죽으면 그것으로 삶은 끝난다고 보았다. 영혼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은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항상 주창해오던 초인의 사상을 선포한다. 찌꺼기 인간, 잡스럽고 조심스럽기만 한 벼룩의 집단같은 소인들의 위치를 벗어나, 새 모럴을 창조하며 수많은 평범한 인간들을 힘으로 지배할 수 있는 초인이 탄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때 이 초인의 사상은 젊은이들의 세계를 휩쓸었다. 영국의 버너드쇼의 "사람과 초인"이라는 희곡이 영국 런던에서 상영되었는데, 100일간 언제나 초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작품때문에 런던의 히스테리환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쇼도 초인적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니체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의 철학적인 과제로 돌아가야겠다. 7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초인사상(19세기말) 그때 세계에서는 1862년: 청.양무운동 발발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서녈)결성 니체는 태어날때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기독교 이외의 어떤 정신적 세계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싶었다. 대학에 있을 때 그이게 또 하나의 세계를 제공해 준 것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이었다 결국 니체의 일생은 기독교에서 그리스 정신에로의 전환이었고,그리스의 정신속에는 고대 동양, 특히 중동의 페르시아의 배화교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오리피즘 종교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중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에 접하면서부터는 자기자신의 철학적 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존재의지를 인간의지로 축소시켰고, 세계의지를 사회가 지배하는 권력의지로 집중시켰다. 생명세계의 의지력을 인간의 의지조건으로 재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플라톤때부터 헤겔까지 사상가들이 비판없이 추종해온 이성중심의 인간관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 것은 지성이 아닌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는 이성 또는 지성이 그 주체가 되는 듯이 착각해왔다. 그러나 지성은 의지가 원하고 명령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뿐이다. 하늘의 북두칠성을 보면서 저 국자와 같이 생긴 일곱 개의 별이 북두칠성이라고 말하면서 그 한쪽에 떨어져 있는 것이 북극성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 지성의 사고 결과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숨겨진 과정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지는 모든 것을 쉽고 간단하게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수를 계산할 수 있게 만들고, 그 수에 어떤 모양을 맞추어 한 개념으로 바꾸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식기능에서 제일 많이 작용하는 것은 동일화작용과 합리화작용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바꾸어놓으면 깨닫기 쉽고, 합리화시키면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지성이 수학, 기하학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의지가 인식에 필요한 공식을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수학, 기하학같은 합리적 원칙을 찾게 되는 것이다. 지성의 기능이 곧 인식의 도구책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쇼펜하우어의 의지 우위론이 니체에게 있어서는 지성 방법론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지성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너무 오래 지녀왔기 때문에 지성도구론에는 익숙해지지 못하곤 한다. 그러나 미국의 존듀이 같은 철학자는 지성은 행동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라고 말한다. 이는 지성이 홀로 있다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행동을 돕기 위해 생각이 뒤따라 작용한다는 철학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니체는 인간의 삶은 사회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것은 권력의지라고 규정짓는다. 권력의지는 지배자의 능력의 원천이며, 인간은 누구나 강해지며 지배하려는 의욕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 권력의지는 어디에서든지 발로되기 마련이며, 정치권력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래서 승리와 지배를 뜻하는 권력의지는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약자의 윤리는 패배자의 윤리이며, 지배자는 힘을 동반함으로써 승리의 모럴을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키아벨리 이후의 가장 대표적인 힘의 철학,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한 철학자로 니체를 꼽고 있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니체철학을 숭상한 것은 이유없는 바가 아니다.무솔리니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히틀러가 니체전집을 선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강자를 정신적으로 대표하는 인간이 그의 초인이다. 찌꺼기같은 잡스러운 소인들 틈에 끼어 있지 말고,뜻이 있는 사람은 초인이 되어 지배자의 도덕과 강자의 윤리를 찾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수많은 평범한 인간들은 한두 초인을 위해 존재하며 희생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초인은 강자의 가치관을 갖춘 사람이다. 그 초인의 가치관이 도덕과 윤리의 기반이 되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인도 운명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초인은 그 운명을 사랑하며, 세계운명은 영구히 회귀하는 섭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즉, 그리스의 세계운명의 정신이 초인이 돌아갈 마지막 길인 것이다. 니체도 운명의 인간이었다. 1900년에 죽는다. 그러나 11년동안은 정신병자로 머물렀다. 모친이 작고한 후에는 누이동생의 보호를 받다가 죽었다. 50세가 못되어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는 태양이 화려한 빛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것같은 운명의 조작인 것 같았다. 정신병을 앓고 있을 때의 니체는 어린애와 같이 양순했고, 모친과 누이동생의 지시를 반항없이 고분고분 따르곤 했다. 오빠의 운명을 슬퍼하는 누이에게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왜 우느냐"고 억지로 웃어 보이기도 했다. 아직 완전히 폐인이 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그의 사상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경부터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문학이나 사상에 넓고 깊게 영향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박쥐'의 '박'은 '눈이 밝다'의 '밝-' '박쥐'는 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짐승이지요. 우선 징그럽다고 하고, 또 밤에만 나돌아 다녀서 그런지, '남몰래 밤에만 음흉하게 일을 하는 사람'을 욕할 때, '박쥐 같은 놈'이라고 하지요. 이 '박쥐'에서 '쥐'는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박'이 붙었으며, 또 그 '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박쥐'는 원래 '밝쥐'였지요. 아마도 '눈이 밝다'는 뜻으로 '밝-'이 쓰인 것 같습니다. 박쥐가 초음파를 발사하여 그 반사음을 포착하여 방향을 조정해서 야간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니까, 그 전에는 '눈이 밝은 쥐'로 이해할 만도 하겠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운명과 화해한 사람 - 베에토벤 베토벤 [Beethoven, Ludwig van] 1770. 12. 17 독일 본에서 세례받음~1827. 3. 26 오스트리아 빈. 길을 가다가 급격한 영감의 발작이 일어났을 때, 혹은 피아노 앞에서 무슨 착상을 얻었을 때. 그의 얼굴은 변모하는 것이었다. 얼굴의 근육은 불끈 솟고, 핏대는 부풀어 올랐으며, 거풀진 눈은 갑절이나 무섭게 되고 입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제 스스로 불러낸 마신들에게 제가 잡혀 버린 마술사처럼. 악성 베에토벤을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같다고 말한 이는 율리우스 베네딕트였다.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본 시의 어느 가난한 집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술주정뱅이던 그의 아버지 요한은 예배당 가수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나게 되어 장남이던 그는 가계를 지탱하기 위해서 열세 살부터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하게 된다. 17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그는 두 동생의 교육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죽을 줄 모르는 사람은 가엾어라! 나는 열다섯 살 때,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암울한 심경을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애초부터 그의 인생은 슬프고 가혹한 싸움으로 드러났다. 1769년, 26세가 되던 그 무렵부터 서서히 청각장애의 징후가 나타났다. 원인은 급성 중이염의 악화였다. 스물다섯 살 때 매독을 선고받은 슈베르트의 절망이나 진배가 없었으리라. 화가에게 눈을 빼앗듯 그에게서 귀를 빼앗다니. 마치 눈을 흘기는 듯한 이 두 음악가의 표정은 모두 심한 근시탓이라고 하는데 둘 다 독신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쪄면 난데없이 돌출한 이십대 중반의 이러한 장애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귓병은 그의 성격을 거칠게 만들었고, 남을 의심하는 증세까지 불러일으켰다. 가끔 하늘을 향하여 우울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가다가 늘 짧게 끊어져 버리는 웃음-그것은 기쁨을 자주 가져보지 못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의 생애를 쓴 로망 롤랑의 말이다. 자살을 각오한 어느 날, 베에토벤은 두 아우들에게 유서를 썼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멀리서 들여오는 피리 소리를 듣는데 나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을 때나, 목동이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을 누군가가 듣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느냐고 물을 때, 거의 절망해서 자칫 자살하려고도 생각했다. 다만 예술만이 나를 다시 일깨우곤 했다. 아아, 나에게 맡겨진 창조를 모두 다 해낼 때까지는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의 예술의 전 재능이 아직 열릴 기회가 있는 동안은 아무리 불운이 찾아오더라도, 결코 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분연히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한때 그가 사랑했던 쥬리에타가 어느 백작과 결혼을 할 무렵, 그는 더욱 분발심을 일으켜 창작에 열중하니 그때 제3교향곡 영웅 이 탄생하고, 잇달아 운명 , 전원 교향곡이 발표되었다. 내가 비참한 지경에 뼈져 있을 때,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자살로써 인생을 끝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그렇게 술회하였다. 1810년 그는 말 대신 필기구로 해야 하는 필담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가극 피델리오 를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제1막의 이중창에서부터 벌써 무대는 흔들렸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지휘봉을 따르고 있었으나, 가수들은 제멋대로였다. 혼란이 일어났다. 잠시 휴식을 선언하고 다시 연주가 시작되자 혼란은 거듭되었다. 베에토벤의 지휘로는 연주가 불가능함이 분명해졌다. 퇴장하게, 가엾은 베에토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못했다. 쉰들러는 수첩에다 이렇게 썼다고 한다. 연주를 계속하지 마세요. 이유는 집에 돌아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후다닥 관중석으로 뛰어내려 줄달음을 쳐서 단숨에 집안으로 들어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식사시간 되기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 날의 일을 쉰들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그 날 마음속 깊이 타격을 받아 죽는 날까지 그 무서운 장면의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난청과 고립으로 완전한 내적 자아에 몰입을 하게 된 그는 고통속에서 교향곡 제9번 환희 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에르되디 백작부인에게 괴로움을 돌파하여 기쁨으로! 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죽음을 넉 달 앞둔 1826년 12월. 신의 영역에 속한다 는 걸작, 그 아름다운 현악 4중주곡 을 완성하였다. 그의 건강은 사십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황달이 간경변증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베에토벤은 앉기만 하면 술을 마셨다. 1827년 네 차례의 수술 뒤, 고통 속에서 넉 달이상이나 누워 있었는데 <베에토벤 최후의 병과 죽음>이란 논문을 쓴 포레스트 박사의 글을 보면, 폐충혈의 발작이 일어난 뒤에, 간장의 위축경화로 복수병과 발 다리의 종기가 생기게 된 것 이라고 하였다. 죽음이 너무나 일찍오는 것이라면 할 수 없고, 좀 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허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고 싶을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죽음)를 용감히 맞으리라. 베에토벤, 그는 과연 죽음과 두 번 대결한 셈이었다. 첫 번의 경우에는 혼자서 죽음의 높은 문턱을 스스로 넘어섰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이 관대하게 그것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그는 사람들을 향해서 라틴말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박수를 쳐라. 이제 희극은 끝났다. 그가 떠나던날 비엔나엔 눈이 내리고 때아닌 천둥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는데, 베에토벤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두 주먹을 불끈 쥔 다음,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웨링의 묘지에 매장이 되었는데, 묘비에는 다만,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 이라고만 씌어져 있다. 그가 죽고난 뒤 그의 모든 물건은 경매에 부쳐졌다. 고통스럽게 필담을 적었던 회화수첩과 그 일기들은 1풀로티너 20크로이쩌에 팔렸다는 후문이다. 고뇌에 찬 57년, 마침내 그는 환희 로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4. 수평파의 요구는 무엇이었는가? 런던 근교에 퍼트니(Putney)라는 곳이 있다. 템즈 강을 가로지르는 그곳의 퍼트니 다리 옆에 있는 교회에서 1647년 10~11월에 청교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의회군의 평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의 의회군의 지도자 크롬웰(Cromwell,1599~1658)과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튼(Henry Ireton)은 사병 대표들과 격론을 벌였다. 이 사병 대표들은 정치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를 주장했다. 이들이 바로 `수평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그들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에게 정치란 지주나 상인처럼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농민이나 직인처럼 재산도 없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혁명의 승리를 향해 왕당군에 맞서 함께 싸운 의회파 안에서의 이러한 대립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은 젠트리(Gentry)라고 불리는 지주층이었다. 이들은 이전 세기에 모직물 공업의 발달에 따라 양목을 위한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유력한 사회층으로 성장해 있었다. 또한 도시에서도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에 따라 시민 계급이 성장했다. 그런데 이들 시민층과 앞서 말한 젠트리 중에는 청교도가 많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른 찰스 1세는 왕권 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전제 정치를 실시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의회의 권한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또한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종교면에서도 국교회를 강화하고 청교도를 박해했다. 따라서 의회와 국왕의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1628년 대외 전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한 찰스 앞에 의회가 내놓은 것은 과세의 승인이 아니라 <권리청원>이었다. 영국 헌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 된 이 권리청원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 개인 집에 병사를 숙박시킬 수 없다. 평화시에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다. 자의적인 구속이나 투옥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찰스는 의회의 요구를 부득이 승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의회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해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하지만 1639년 스코틀랜드의 장로파가 국교회를 강요하는 데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음해인 1640년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1년 만에 소집된 의회는 왕의 과세 승인을 거부하고 오히려 왕의 실정을 실랄하게 비판했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해소되지 못하고 결국 내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이 내란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를 정점으로 하여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의회군은 승리 이후 평화와 질서 회복이라는 과제를 놓고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내부 분열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파 내부의 대립은 크게 장로파와 독립파로 나타났다. 장로파는 장로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는 사람들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파는 의회군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고 각 교파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수평파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의회파내의 대립 속에서였다. 장로파는 의회군을 해산하는 조치를 통해 자파의 기반을 강화하려고 했는데 이에 맞서 의회군은 장교와 사병의 대표로 구성된 군평의회를 만들고 자신들의 불만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의회군은 밀린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제대 후에도 마땅한 대책이 없던 차에 해산당하게 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의 요구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의견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군의 불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들이 피흘려 승리로 이끈 혁명의 대의와 새로운 입헌 질서라는 문제로 사태가 발전하자 차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가 퍼트니에서 벌어진 크롬웰과 사병 대표 사이의 격론의 내용이다. 완전한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수평파의 요구는 당시 그들이 작성한 <인민협정>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21세 이상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을 비롯하여 신앙과 종교의 자유, 법의 의한 재판, 채무로 인한 인신 구속 반대, 공무원 선거제, 징병 권한의 의회 귀속등의 주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평파의 요구는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에 의해 거부당했고 이후 아일랜드 원정을 거부하는 사병들의 집회는 폭력적으로 해산당했다. 수평파는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한 정치적 평등과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 사상은 수평파를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4. 미국인들조차 분노한 미국언론 편집자에게.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중국인들! 고아원 원아 학대를 부인하다'라는 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쌍하이 고아원에서는 그 고아원의 가장 훌륭한 모습을 기자들에게 보여주면서, 뉴욕에 총본부를 두고 있는 인권감찰기구가 중국에서는 아동들을 고의로 굶겨 죽이고 있다고 고발한 내용에 대해 반박하였습니다. 저로서도 쌍하이 시 민정국(民政局) 부국장 및 아동복지원 원장의 해명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그들이 보살피던 고아들 중 상당수가 추운 날씨에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환경 때문에 사망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본국에서 중국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평하는 글을 자주 보았습니다만 이번의 글처럼 중국이 정부정책으로 아이들을 굶겨 죽여 고아의 수를 감소시키고 했다는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루슨다르가 1월 8일에 쓴 글에 나타난 공산당들의 잔혹성과 매정함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자금 부족과 각종 시설의 착오 및 이의 관리소홀 등이 모두 관방의 고의적 계획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귀보 1월 6일자에 실었던 사진과 영국의 BBS에서 연속적으로 방송한 중국의 모습은, 1월 10일 황금시간대에 방송된 미국 국영수용소의 저능아들이 받는 학대장면보다는 덜 충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중국의 선전기구가 미국의 이런 박약아 학대사건을 미국 정부가 자행한 정책의 일환이라고 몰아붙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1996년 1월 10일 뉴욕에서 편집자에게. 귀보의 1월 9일자 보도와 루슨다르의 1월 8일자 중국 고아원에 관한 칼럼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미스터 루슨다르의 글은, 중국 정부가 고아원의 원아들을 고의로 굶어 죽게 만들고 있다는 인권감찰기구의 보고서를 근거로 쓰여진 것입니다. 중국의 고아원에 대한 이 말은 어떤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귀보의 보도에서도 말하였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보도에서 지적한 것 외의 어떤 원인들이 중국아동들을 버림받고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아원에서 죽어가는 많은 아이들은 그곳에 올 때 이미 중병을 갖고 있거나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영양실조상태였습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중국이 자유시장경제를 실시하자 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중국에서도 치료비를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적당한 치료를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들 가정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치료비조차 부담할 수 없어 국가에서 구제해 주길 바라면서 아이들을 내다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버린 이아이들은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을 만큼 허약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입니다. 저는 미스터 루슨다르가 아이들의 이런 고통을 지역 간 정치투쟁의 도구로 이용하기 전에 '증거가 확실한' 보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996년 1월 11일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편집자에게. 1월 6일과 9일, 귀보에 게재된 인권감찰기구의 중국 고아원 관련보도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저는 중국 여자아이 한 명을 입양할 예정인 어머니로서 많은 시간 동안 중국아동 양육문제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중국아이를 입양하여 양육하고 있는 부모는 물론이고 사회복지종사자 및 사회복지기구들과도 많은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귀보의 보도 사실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정부와 고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최선을 다해 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있고. 아이들에게 가정의 따뜻함을 주기 위해 미국인들이 입양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귀사에서 다시 한 번 조사해 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미국 매스컴들의 특종과 흥미를 위한 이런 보도가 이 아이들과 양부모들 에게는 절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1996년 1월 10일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 애리스 고딘 올림 위의 글들은 1월 15일자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독자편지들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이들 영문편지를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원문의 어투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였다는 점이다. 1996년 1월 {뉴욕타임즈}는, 중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고아원의 원아들을 굶겨 죽였다는 내용을 기획시리즈의 일환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이에 앞서 1995년 6월 영국의 BBS도 '사신(死神) 이 찾아 든 고아원'이라는 제목아래 중국 정부가 고의로 고아원의 아동들을 굶겨 죽였다는 내용의 보도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보도에 대해 미국 일반독자로부터 온 위 3통의 편지는 {뉴욕타임즈} 와 BBS의 보도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였다 평범하기 이를 데없는 이런 국민의 편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편지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1) 모시 톤은 미국 국영수용소에서 정신박약아를 학대한 '추악한 모습'을 솔직하게 폭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중국은 미국 의회에서 고의로 전국 수용소의 박약아를 학대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했다거나, 또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이 흑인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 정책을 수립하였다고 하지는 않을테니까. {2) 머쉬 콜만은 아동의 고통을 자기들의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과거 중국인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인의 고아들을 데려다 기른 민족이다. 이렇게 포용할 줄 아는 민족을 모함하는 짓은 아주 비열한 행동이라는 것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중국인들이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고아들을 키울 수 있다. 미국인이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죽어간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또 미국에 의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라크아동들의 인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국인에게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있다면, 이 독자의 말처럼 아이들을 정치투쟁의 도구로 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애리스 고딘은 미국 언론계가 특종보도를 지나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 언론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기자들은 자기의 명성을 위해 사람을 놀라게 할 특종을 보도하려는 폐단을 가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원아들을 굶겨 죽이려는 계획을 세울 리 없다는 것과. 또 미국인의 이러한 보도는 도깨비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쯤은 중국인 누구나 알 수있는 사실이다. 고아원 종사원이 아동을 돌보는 일에 어쩌다 소홀한 경우가 발생할는지는 모르지만, 중국 정부는 결코 히틀러 정부가 아니며 중국의 고아도 2차대전 당시 박해를 받던 유태인이 아니란 점을 미국인 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헝크리가 레이건 대통령을 저격하고는, 이렇게 하면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기억난다. {뉴욕타임즈}의 기자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심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악명만 떨치게 된 셈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죽음보다 강한 사랑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 년 7월 말,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제 14 호 감방 사람들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떨었다. "단 한사람이라도 도망을 치면 같은 감방에 있는 다른 사람 스무 명을 아사형에 처한다"는 수용 소장 프리치의 경고를 떠올리고 그들은 다들 죽음과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구 하나 잠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잔혹한 고문에 살아남기를 원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그들이었지만 아무도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사감방으로 끌려가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숨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창자와 핏줄이 말라붙어 짐승처럼 날 뛰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영웅들마저도 "내가 뽑히면 어떡하나."하고 어린애처럼 울고 있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아사감방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밤마다 맹수의 부르짖음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굶주림의 고통보다 목마름의 고통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사형에 처해진 사람들한테서는 인간다운 점을 찾아볼 수가 없어 나치스의 간부들마저도 그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점호 시간. 수용 소장 프리치는 도망간 사람을 찾지 못하자 14 호 감방 사람 전원을 수용소 마당에 세워 놓았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기절해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열 밖으로 끌어내어 던졌다. 내던져진 사람 위에 또 다른 사람들이 쓰러져 포개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무더기는 점점 커졌다. 오후 3시. 그들에게 30분간의 휴식과 수프를 먹는 일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프를 먹었다. 그리고 여전히 차려 자세로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이윽고 저녁 점호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친 포로들이 수용소 마당에 정렬하자 소장 프리치는 교활한 조련사처럼 각 감방별로 보고를 받으면서 이리저리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14 호 감방수들 앞에 딱 멈추어 서서 갑자기 발작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도망친 놈이 아직도 안 잡혔다. 이제 너희들 중 열 명이 저 아사감방에 가서 죽어야 한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스무 명을 한꺼번에 보내겠다." 소장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서투른 폴란드어로 계속 지껄였다.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 이빨을 보여!"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들처럼 벌벌 떨었다. 소장은 그들의 이빨을 자세히 관찰하는 척하면서 그들 사이를 저승 사자처럼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보좌관 팔리치가 즉시 지적된 수형자의 번호를 명부에 기입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인간이 한 개 번호에 불과했다. 지적을 당한 사람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몇 차례 버둥거리는 듯하더니 열 밖으로 빠져나갔다.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서 포로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너, 너, 너, 너, 그리고 너!" 한 순간에 열 명이 지적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불쌍한 내 마누라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구나!" 지적을 당한 사람 중 한 사내가 열 밖으로 걸어나오면서 울부짖었다. 지적 당하지 않고 열 가운데 남은 사람들은 아사감방에 가는 일만은 면하게 되었다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신발을 벗어!" 보좌관이 명령을 내렸다. 사형수들은 맨발로 형장으로 가게 돼 있었으므로 그들은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던졌다. 부인과 아이들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었다고 울부짖던 사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좌로 돌앗!" 보좌관이 아사감방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좌로 돌았다. 그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포로 한 사람이 동료들 사이를 헤치고 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가 약간 옆으로 굽은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크고 맑은 눈으로 소장 프리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걸어나왔다. "정지! 무슨 일이야? 이 폴란드 돼지 새끼야!" 당황한 소장이 고함을 질렀다. 그가 소장 앞에 똑바로 섰다. 아주 침착했다. 입가에 미소까지 띤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옆 사람한테만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저 사형수 중의 한 사람을 대신해서 제가 죽겠습니다." "뭐라구?" 소장은 멍하니 놀란 얼굴이었다. 그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결정을 결코 바꾸어 본 적이 없는, 반항하는 자는 단 한 발의 총성으로 간단히 처치해 벌이던 소장이 갑자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래? "저는 이미 늙었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어도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먼저 처치해 버린다'는 나치스의 불문율을 먼저 내세웠다. 혹시 자신의 태도가 소장에게 영웅적으로 비쳐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몹시 조심하는 태도였다. "그래, 누굴 대신해서 죽겠다는 거냐?" "저 사람, 부인과 아이들을 가진 사람 대신입니다." 그는 아까 한없이 울부짖던 프란시스코 가죠프니체크 중사를 가리켰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천주교의 신부입니다." 그의 대답은 짤막하고 엄숙했다. 소장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한없이 젊고 화사해 보였다. 그는 소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멀리 지평선에 걸려 있는 붉은 저녁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침묵이 흘렀다. 점호 중에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된 적은 없었다. 마침내 쉰 목소리로 소장 프리치가 말했다. "좋다! 함께 가라!" 소장은 감히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좌관 팔리치가 아사감방행 명단 가운데 번호 하나를 지우고 대신 '16670'번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갓!" 사형수들은 맨발에 셔츠 바람으로 아사감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 사람도 마치 양 떼를 모는 목자처럼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이다. 글터 → 이글저글 계란을 소금물에 담그어 보아 가라앉으면 싱싱한 것이고 뜨면 오래된 것이다.한 방울의 물 속에는 1,700,000,000,000,000,000개의 분자가 있다.소금을 화학적으로 분해하면 염화나트륨이 주성분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사람이 먹으면 죽는다. 검은색은 열을 흡수하고 흰색은 열을 반사한다.유리로 만든 공은 고무공보다 더 높이 튄다. 또 강철로 만든 공은 유리공보다 더 높이 튄다.귀중한 보석일수록 색깔이 없다.백금 28그램으로 16,093킬로미터까지 길게 늘일 수 있다.금 1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150,000톤의 광석을 갈아내야 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4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65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76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425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454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99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61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93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1,000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834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852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36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603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52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51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76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509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81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66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74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70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348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403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80 호4339.12.09 (10.19)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제1회 비룡소 블루픽션 상 작품 모집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독서를 못하는 왕이 되기보다는 비록 초라한 골방이지만 책이 가득찬 방이 있는 가난뱅이가 되겠다. / 머코리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한국 최초의 멋쟁이 문학사 - 하란사 "나의 본래의 성은 김해 김씨이옵니다. 그러나 남편의 성을 따라 하씨라 부르기로 하였나이다. 이러한 나의 정신적인 변모를 두고 개화한 여성이라 부르는지도 모르옵니다만....." 어떻든 그녀는 하란사란 이름으로 우리 개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875년 평양 태생. 얼굴이 남달리 아름답고 신체 조건이 뛰어난 데다 성격은 활달하여 남의 이목을 집중케 하는 그런 여인이었다. 간혹 그녀를 두고 예가 출신이라는 말도 떠돌지만, 어쨌든 인천 감리 하상기가 아직 별감으로 있을 때 그녀는 나이 어린 소녀로 1남 4녀를 가진 하상기의 후취가 되어 들어갔다. 남남 북녀라는 말에 어울리게 하란사는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용감하다는 것은 1남 4녀나 되는 전실 자식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정부인으로서의 용기가 아니었다. 남편의 벼슬이 올라가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으나, 그녀는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지 않고 담장 밖으로 흘러가는 개화의 물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거듭 용감했다. '미래를 개척하여 선도자가 되리라. 이 시대의 문명의 선도자가. 그러기 위하여 나는 이 가정을 뛰쳐나가야 한다.' 가정을 뛰쳐나간다는 의미가 가정을 버리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1남 4녀의 전실 자식을 남겨 두고 어디를....... 그녀의 용기란 한국적인 부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가지는 만용이 아니었다. 배움. 하란사의 머리는 배움의 욕망으로 가득 찼다. '이화 학당에 들어가 나도 남들처럼 배우고 싶어.' 그녀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화 학당의 첫 학생이 중전 민비의 영어 통역을 하여 세도를 잡아 보려고 스크랜턴 부인에게 영어를 배우러 왔던 무슨 벼슬아치의 소실 김씨라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도 몇 사람 뜨내기처럼 다녀간 기혼여성이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1890년대부터 이화 학당의 규칙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결심을 했다.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가 담판을 내자.' 어느 날 밤, 사방등에 촛불을 켜서 하인에게 들게 하고 그녀는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 나섰다. 학당장과 마주앉아 하란사는 들고 있던 등불을 훅 꺼 버렸다. "아니, 왜 등불을 끄시오?" 학당장이 어리둥절해하자 하란사는 사이를 두지 않고 말했다. "학당장님, 우리가 캄캄하기가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주세요." 학당장은 결혼을 한 이 젊은 여성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란사는 프라이 학당장을 잡고 애원했다. 애원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좋소. 부인, 입학하시오!" 프라이 학당장은 그녀가 암흑의 한국 땅에서 선각자가 될 자질이 충분히 있음을 깨닫고 입학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화 학당 재학중에 하란사는 첫 딸을 낳았다. 남편은 관리이고 부자였지만 인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당돌하지만치 대화 감각에 예민한 어린 아내를 후원해 주었다. 깊은 이해와 끝없는 사랑으로....... 하란사는 어린 딸 자옥을 전실 아들 구룡의 새 아내인 며느리에게 맡기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구룡의 첫 번째 아내는 매사에 게으르고 잠꾸러기여서 그는 게으른 아내와 이혼해 버리고 바지런하고 집안일에 열심인 새 아내와 재혼해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남편이 자청하여 학비 부담을 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아내의 학교 생활을 돕기란 드문 노릇이어서 하란사는 말하자면 그만큼 선택받은 여성인 셈이었다. 남편은 학교에 간 젊은 아내가 학교 일로 식사 시간에 귀가하지 못하면 하녀를 불러 분부했다. "냉큼 학교로 밥을 날라다 마님 잡수시도록 하여라!" 분부가 떨어지면 하녀는 따끈한 음식을 차려 큰 목판에 담아 시기를 덮고 보자기에 싸서 이고는 학교로 간다. 어린 딸도 집안에서 보살펴 주었고, 남편이 이처럼 마음을 써 주었으니 그녀는 남편과 가족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하란사는 멋쟁이였다.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하란사는 어찌 보면 법도에 어둡고 사치스러운 것 같았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집안에서는 남편, 자식들 모두가 하란사에게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엄하고, 화목하고, 법도 있게, 그것이 그녀의 생활 신조였다. 1896년 하란사가 이화 학당을 떠나 외국 유학 길에 오른 기록은 그녀를 뒷날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B.A 학위 수여자로 만들어 놓는데, 1896년 하란사는 박 에스터와 함께 이화를 나온다. 이화에서는 초창기의 학생들에게 학년 구별없이 영어에 힘을 기울였고, 산술과 국문, 성경 창가, 한문, 먹글씨, 지리등을 가르쳤는데 혼인할 나이가 되면 학교에서 주선하여 독실한 신자 중에서 적당한 배우자를 골라 부모의 협의를 거쳐 결혼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혼인식을 올린 다음 졸업장 대신 혼인 증서를 교부하면 그것이 곧 졸업이 되었던 것이다. 이미 혼인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던 하란사에게는 그러한 과정도 이제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1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친다. 그녀가 유학을 떠날 때 자옥은 새문안 교회의 신자가 젖을 먹여 기르기로 되어 있었고, 전실 아들 구룡의 아내가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남편의 헌신적인 외조, 며느리의 이해, 집안 사람들의 협조가 그녀를 무사히 미국으로 건너가게 하여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하란사는 마침내 B.A 학위를 받는다. 이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하란사를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학위 수여자로 기록하는 쾌거이기도 하려니와, 그녀가 국내 여성에게 끼친 영향을 개화의 선각자로서 영구 불멸의 별이 되게 한 점이기도 했다. 귀국 후 하란사는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정동 예배당에 나타났다. 검정 갓에 기다란 검정 새털 깃을 꽂고 검정 원피스를 입은 지적인 부인. 하 부인이라면 이제 서울 장안에서 몰라보는 이가 없었다. 하 부인은 미국에서 돌아와 스키랜던 부인고 함께 달성 이궁에서 기거하며, 상동 예배당 건립에 힘을 기울였다. 예배당이 세워지자 그녀는 거기서 영어반을 개설, 여성 교육을 실시했는데, 하란사의 지도로 뒷날 이 땅의 교육 사업에 봉사하게 될 신 알버트, 손 메레, 양 우러더 등이 배출되었다. 그녀는 또 미국인 선교사 미스 알버슨과 함께 정동 이화 학당 옆에다 부인 성서 학원을 창설하고 3년 동안 경영한다. 그 후 부인 성서 학원은 후임을 정하여 일임하고 그녀는 자신을 이화 학당에 입학시켜 준 미스 프라이 선생에게 간다. 이화 학당 교사 겸 기숙사의 초대 사감이란 직함이 그녀의 이름위에 붙게 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서양 선교사들 틈에서 영어 회화를 가장 능숙하게 할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한국 선생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의 영어는 직원이나 학생들의 의견을 선교사들에게 전달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이화 학당을 총감독하는 직책이 부여되어 '총교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총교사 하란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학생들간에 불려지고 있었다. -호랑이 어머니. 엄격한 인상에 욕설을 잘 퍼붓기도 하는 총교사에게 학생들은 그같은 별명을 붙에 주었다. 그 당시 이화 학당 학생치고 하란사 선생의 꾸중을 듣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욕은 개화로 가는 과정과도 같아서 운동장에 나와 노는 것만 보아도 욕이었고, 치마 주름이 터진 것을 보아도 욕이었다. 뎅기를 머리 끝에 물려 드리웠어도 욕이었으며, 대답 소리를 크게 하거나 너무 작게 해도 욕이었다. 그러나 욕을 잘하는 버릇은 하 부인, 하 교사의 성격이었지 학생이 미워서 하는 소리가 물론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고 학교 규칙을 잘 지키며 옷맵시를 단정히 하고 다니는 학생이 있으면 하란사는 그 학생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자기 수양딸 노릇을 해 달라는 말을 하여 친부모가 쏟는 애정을 부어 넣기도 했다. 이화 학당 재직 중 하 교사는 미국을 내왕하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그 때마다 한국을 소개하기도 하고, 연설을 하여 돈을 얻어내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그 돈으로 오르간을 사서 모교에 보내기도 한다. 언젠가 시카고와 로스엔젤레스에서 교포들로부터 700달러의 찬조금을 받아 온 적도 있었다. 학교 사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기숙사로 오는 편지를 일일이 검열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남자한테서 온 편지가 있으면 절대로 내어주지 않는다. 그 학생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품행 점수가 60점 이하가 되어 버린다. 하 교사는, 엽서에 먹칠을 하여 연필로 비밀스럽게 써보내는 연애 편지까지도 햇빛에 비춰 밝혀내고야 마는 극성이었다. 기숙사 학생들은 하 교사의 그 같은 완벽성이 늘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하 교사와 이성회 선생이 후원하고 육성하는 자치 학생 단체에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은 없었다. 하란사는 또 전도사로도 한 시대를 기록할 만한 여성이었다. 서울 교외 아홉 개 교회를 돌아가며 주일 예배에 참석한 그녀는 몇 년 동안 1,426호를 호별 방문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11년, 250명의 새로운 교인을 얻게 되었다. 하 전도사는 각 교회 안에 세워진 이화 부속 보통 학교 단위로'어머니 교실'이란 것을 설치하였다. 1주일에 1회쯤 어머니 교실에 나가서 육아법과 선진 외국의 문명 등 계몽 강연에 열을 오였다. 강연 기간 동안 어머니들은 그 학교 교직원들로부터 매일 밤 국문과 산수 등 야학 공부를 하였다. 하란사는 집안일보다 교회와 사회 일에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 부지런한 그녀는 고종과 엄비의 자문에도 나섰으며, 1908년 4월에는 고종의 분부와 사회 유지의 발기로 경희궁에서 관민 합동 환국 축하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제일 먼저 미국에서 현대 의학을 전공하고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박 에스터도 동석했다. 박 에스터와 하란사는 여러 가지 선각자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여성이었다. 개화된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1920년 우리 나라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하란사도 이른바 국권 회복이라는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6년의 일이었다.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감리교 세계 총회가 개최되었다. 하란사는 이 자리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한다. 1개월간의 총회 일정이 끝나자 그녀는 미국에 남아 해외 동포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순회 강연을 통하여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사실을 널리 알려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그녀는 이화 학당 안에서 국내외의 모든 비밀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석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1918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 주의가 발표되자 온 세계 약소 국가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자유를 부르짖으며 민족 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식민지로 압박을 당해 오던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내외의 애국 지사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일을 성취시키기로 되어 있어 하란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 하상기는 어디를 가나 아내의 활동이 자랑스러워 전보다 더 큰 열성으로 아내의 일을 돕고 나섰다. 당시 고종은 거족적인 민족 저항 운동에 앞서 의친와을 해외에 내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항간에는 일본인들 들을세라 엄청난 소문까지 나돌았다. "전하하구 의친왕께서 일본인의 눈을 피해 변소에서 밀의 하셨다는구려." "부자분이 변소에서 무슨 비밀 얘기를 하셨을까?" "의친왕을 해외로 내보내어 독립 운동에 앞장서게 한다는 얘기라는군!" 고종은 깊이 숨겨 두었던 이른바 한일 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 문서 원문과 외국 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어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 했다. 그 중대한 임무에 하란사가 발탁되어 일은 추진되었다. 하 부인이 미국 유학 당시부터 의친왕과 교분이 있는 것을 알고 고종은 하 부인에게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일을 착수시켰다. 하 부인은 용기가 솟았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녀의 가슴을 뛰었다. 일의 시작에서부터 운명은 하란사와 국운 쪽에 이로운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끝내 돌아서고 말았다. 1919년 1월 하순, 고종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시고 만 것이다. 이화 학당에서 미스 프라이와 신홍우 박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란사는 황제의 급보를 듣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궁중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 하란사는 의친왕을 통하여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이 한 가지 점만 보더라도 그녀가 의친왕이나 궁중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나 짐작이 갈 만하다. 하란사의 그 같은 활약은 그녀를 국내에 머물러 있게 하기보다 국외로 나가 독립 운동을 하도록 요청해 오기에 이르렀다. 고종 황제가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란사는 북경을 향해 떠난다. 2월 중순, 동경 유학생 황 에스터는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여성 대표로 하란사를 출국시키려고 서울에 왔으나 하란사가 이미 북경으로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하란사가 국가를 대표할 만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 도착하자 그 곳에 있던 교포들의 환영이 대단했다. 하란사는 어느 교포가 개최하는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만찬회가 생애에서 마지막 가져 보는 자리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빌미가 되어 하란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죽음의 세계를 향해 치달았다. 마침내 그녀는 폭약을 먹고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어 갔다. 그녀의 시체는 시커먼 색으로 변질되어 독살의 의혹을 짙게 했다. 장례에 참석했던 성서 공회 책임자 베커의 말이 독살당했으리란 심증을 굳게 하였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도 북경을 다녀와서 아내가 독립 운동을 방해하는 친일배에게 독살당했으니라 단정했다. 일제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배정자가 하란사의 뒤를 미행하여 독살시켰다는 소문을 남긴 채 그녀는 45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판 정신대 ‘공녀’ - 김정현(고려대 강사)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성의 해방은 시대적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편승하여 성을 상품화함으로써 돈을 벌려는 풍토가 유행하는 형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람들이 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성 폭행은 여전히 강간으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는다. 성은 인간의 자존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므로 강요된 성은 자아를 파괴한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집단적인 성 범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시에 남자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대신에 여자들은 성의 헌납을 강요당하는 적이 많았다. 힘이 약한 민족이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는 경우 여자들의 성은 파괴될 위험에 노출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 우리의 여인들은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야욕에 희생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조선의 여인들이 일본과 청나라에 끌려갔다. 특히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은 더렵혀진 몸을 깨끗이한다는 명목으로 수차례 목욕을 하였지만 ‘환향녀’라 하여 부모나 남편에게까지 배척당하였다. 원래 외적의 방어는 전통적으로 남자의 임무였다. 그런데도 조선의 남자들은 외적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전가시켰으니 그녀들은 졸지에 ‘화냥년’의 기원이 되는 누명을 뒤집어썼던 것이다. 집단적인 성 범죄는 명백한 ‘강간’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것으로 포장되기도 하며, 가해자가 개인적인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더 크다. 공녀가 발생한 사연은 13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태풍의 시대였다. 칭기즈칸에 의해 통일된 몽고가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수행해 나감에 따라 사방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 여파는 우리 나라에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몽고군은 1231년(고종18)에 마침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인들은 침략군에 맞서 수십 년 동안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고려는 대부분의 지역이 유린당하여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였다. 특히 고려 여인들이 몽고군에게 당한 수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몽고군은 저항하는 방어대를 격파하고 성을 점령하면 성인 남자는 대부분 살해하고 남자 아이와 여자들을 사로잡아 가곤 했다. 몽고의 제6차 침략이 시작되는 때인 1254년(고종41) 한 해 동안에 무려 206,800여 명의 남녀 고려인이 몽고군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기록을 참고하건대, 전쟁기간 동안 몽고군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다한 고려 여인의 수는 수십만 명이 되었을 것이다. 몽고에 끌려간 고려인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했으며 특히 여인들은 그 위에 성적인 학대까지 받아야만 했다. 고려 여인들은 전쟁 기간에만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1259년(고종46)강화가 성립되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또 다른 형태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족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그 지역의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으며 여기에는 사람, 특히 여성까지 포함되었다. 고려는 오랫동안 저항한 대가로 왕국을 유지하였지만 속국의 처지였기 때문에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원은 일본정벌을 단행하는 데 드는 막대한 경비를 고려에게 대부분 전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배기간 내내 여러 가지 명목으로 특산물을 요구하는 등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정부는 금과 은, 사냥용 매, 인삼, 잣 약재 등을 마련하여 보내느라 백성들을 수시로 닥달하였다. 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분야에 종사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고려인들은 공물로서 원에 끌려갈 운명에 처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성의 일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세되어 궁중의 환관으로 보내졌으며, 여성의 일부는 처, 첩, 궁녀, 잡역부 등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고려여성의 일부가 마치 공물처럼 원나라에 바쳐졌으니 이들이 바로 ‘공녀’였던것이다. 공녀의 선발은 일방적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1274년(원종15)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녀 140명을 요구한 것이 공녀로 끌려간 시초이다. 이는 원에 투항한 남송의 중국인에게 처를 얻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전례에 없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마을을 샅샅이 뒤져 그 인원을 채워줄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고려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찼다 한다. 색출당한 고려 여인들은 말만 처이지 사실상 그들의 노리개감이었다. 1275년(충렬왕1) 원은 칭기즈칸이 13국을 정복한 이래 그 나라들이 미녀를 바치고 있다면서 고려도 여자를 바칠 것을 은근히 종용하였다. 이러한 압력을 받은 고려는 즉시 혼인금지 명령을 내리고 처녀를 색출하여 원에 보냈다. 당시 여기에 선발된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김찬이라는 시인의 동녀시가 잘 대변하고 있다. 온 세상이 갑자기 한 집이 되니 동쪽 땅에 명령하여 궁녀를 바치라 하네 규중에 거처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더니 관청에서 선발함에 심사하는 많은 눈을 어찌 감당할까 살짝 다듬은 근심어린 두 눈썹이 파란데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억지로 들게하니 온통 발개지누나 어린 꾀꼬리가 깊은 숲속 나무를 떠나려 하고 젖내나는 제비가 날아 옛 둥지를 잃으려 하네 낭원에 옮겨심은 꽃은 금방 핀다 하고 광한에 붙여진 계수나무는 편안히 자란다 하지 떠나가는데 미적미적대지만 솜털깔린 수레에 실리고 바쁘게 떠나려 하자마자 준마가 달리누나 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질수록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낭원은 신선이 산다는 곳, 광한은 달의 궁전을 의미하며, 모두 원나라 궁궐을 비유한 것임) 규중에서 세상 모르고 자라던 어린 소녀들이 선발위원들 앞에 끌려나와 발발 떨며 얼굴과 몸매를 자세히 심사받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불행하게 심사에 통과된 소녀들은 떠나려 하지 않지만 강제로 수레에 실렸다. 혼절하였다 깨어 보니 고국은 이미 멀어진지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들은 과연 누구를 원망하였을까? 그녀들이 구박받거나 병들었을 때 도움줄 이 어디 있으랴! 이후 공녀의 헌납은 본격화하여 고려는 원나라가 요구하는 대로 여자를 바쳐야만 했다. 고려는 계속되는 공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과부와 처녀를 색출하여 원나라에 보내기 위해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몽고인들이 고려 여인을 고토록 탐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정복자로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심리적 요인과 다처의 풍습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환경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들은 춥고 건조한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함께 생화하여 성질이 드셌다. 몽고여인들은 춥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 생활한데다 말젖을 주식으로 하여 곡물, 채소, 과일 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피부가 빨리 노화되어 윤기가 없었다. 이에 비해 네 계절이 뚜렷하여 습도와 온도가 알맞는 기후 속에 살며 곡물, 채소, 과일 등을 적당히 섭취한 고려 여인들은 피부가 뽀얀 미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 잘하고 다소곳하고 나긋나긋한 고려여인들은 몽고남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여인들은 피눈물을 쏟으면서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가 노동력 착취와 성적인 학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눈물 실은 마차는 끊이지 않고 고려의 지배층은 원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공녀 색출에 광분하였다. 백성들의 원망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공녀를 색출하는 방법은 한 마디로 ‘인간사냥’이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충렬왕비가 되어 위세를 떨친 제국공주가 측근들에게 양가의 자녀로 나이가 14세에서 15세인 자를 뽑아올리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순군(경찰)과 홀치(왕의 경호부대)등에게 인가를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밤중에 침실로 돌입하거나 노비를 결박하여 자녀가 숨은 곳을 캐물었다. 그러자 비록 자녀가 없는 집이라도 놀라고 소란하였으며 원망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찼다고 한다. 제국공주는 친정인 원나라에 고려의 자녀를 선물로 가져간 셈이다. 고려 여인들은 공녀로 선택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여 기피하였다. 딸을 가진 집에서는 나이가 어리더라도 일찍 혼인을 시키는 풍조가 생겨났다. 딸이 공녀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사위를 맞아들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가 요구하는 인원을 채우기 힘들어지자, 고려 정부는 혼인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1287년(충렬왕13)에는 “양가 집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다음에 혼인시켜라. 어긴 자는 처벌하라”라는 왕명을 내리고 어린 여자들을 색출한다. 1307년에는 “나이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게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여기에서 공녀는 나이가 대략 10대 초반에서 중반의 앳띤 소녀가 선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녀의 대상으로는 초기에는 독신녀, 역적의 아내, 승려의 딸, 과부 등이 포함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원은 양가의 처녀를 계속 요구하였으며 그 때마다 민가를 뒤졌다. 공녀에는 완족이나 관인의 딸도 포함되었지만, 주 대상은 일반 백성의 딸로서 ‘동녀’라 표현된 어린 미녀들이었다. 공녀들은 지배층 출신인 경우 황제의 후궁, 귀족 내지 고위관료의 처 혹은 첩이 되어 그런대로 지낼 만하였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백성의 딸들은 원에 귀부한 여러 나라 군인의 처, 원나라 궁실의 궁녀 혹은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다. 일단 공녀로 선발되면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번은 충렬왕 때 세자(후일의 충선왕)가 마음 속으로 점지한 왕족의 처녀가 공녀에 초함되어 길을 떠난 일이 있었다. 세자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한 신하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는 모후인 제국공주에게 아뢰어 그녀는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세자의 모후가 원 황제의 딸로서 남편인 충렬왕을 쥐고 흔든 여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건은 공녀로 선발되면 어떤 막강한 배경을 지니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공녀로 뽑힌 딸을 구하려다 갖은 수모를 겪은 한 아버지의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충렬왕과 왕비 제국공주가 양가의 여자를 뽑아서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홍규의 딸도 그 중에 뽑혔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보기도 했지만 그의 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사기에게 “내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한사기는 “화가 공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홍규는 한사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제국공주가 이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홍규를 가두어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였다. 제국공주는 또한 그의 딸을 가두어 심문하였다. 딸은 “제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아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국공주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땅에 처박아 쇠로 만든 채찍으로 마구 때리도록 하였다. 그녀의 몸뚱이에는 피부가 온전한곳이 없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홍규는 무인정권 최후의 집권자 임유무를 제거하여 왕권을 회복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딸을 구해낼 수 없었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주어 사정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아버지는 섬으로 귀양가고 딸은 원나라 사신에게 선물로 바쳐지고 만다. 한편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인이 원나라 실력자의 총애를 입어 출세하는 경우도 간혹 보인다. 하급관료를 지낸 기자오의 막내딸은 고려 출신 환관의 도움으로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제인 순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황후가 되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더욱 세력을 떨친다. 그녀와 고려 출신 환관들은 큰 세력을 형성하여 원나라의 정치를 좌우하였으며, 고려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려에 남아 있던 그녀의 친족들은 하루 아침에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에 자극받은 고려의 고급 관인들 중에는 일부러 자신의 딸을 원나라의 실력자에게 바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좌정승(종1품)을 지낸 노책은 원나라 황제에게, 판삼사사(종1품)를 지낸 권겸은 황태자에게 딸을 바쳐 권세를 부렸다. 그녀들의 넋이 떠돌고 있다면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천륜에 어긋나는 만행이었다. 어떤 묘지명에는 “동방의 딸들이 뽑혀 서쪽(원나라)으로 가기를 거른 해가 없었다... 모녀가 한번 헤어짐에 아득하여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니, 아픔이 골수에 사무처 병에 걸리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하에 무엇이 있어 지극히 원통함이 이보다 더하단 말인가” 라고 새겨져 있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은 경주김씨 문벌가문 출신으로 왕족에게 시집간 여자였다. 그런데 그 딸이 공녀로 원에가 있어서 근심과 번민 끝에 병이 생겨 일찍 죽었다 한다. 그 딸은 원나라 고급관리의 처가 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알이 끝에 병들어 죽었으니 일반 부모들은 어떠하였으랴.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그 사실을 숨겨 이웃이 찾아와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당시의 기록은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통한 심정은 고려말 대학자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1335년(충숙왕 복위4) 원나라에 올린 상소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자들을 모아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예쁜 여자도 있고 미운 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미인이라도 놓아 주고 다른 데에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 여자를 얻으려 수백 집을 뒤지게 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 뿐, 누구도 어길 수 없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띠고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번에 데려가는 여자의 수는 많게는 40명에서 50명에 이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이 서로 모여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를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옷자락을 부여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한 자도 있습니다. 이런 예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 여성의 헌납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아 이후에도 고려 여인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공녀는 12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책을 실시한 후에야 비로소 중단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이곡의 상소에 따르면 공녀는 한번에 많게는 40에서 50명이 선발되었다. 80여 년에 걸친 원간섭기 동안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에 한 번 바쳐졌으니 수천 명이 끌려갔던 셈이다.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데려간 자들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고려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야 그녀들은 성적 수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조선 초기까지도 가끔 공녀가 보내지지만 그 규모나 횟수에 있어서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의 전쟁 중에 이미 수십만 명이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수천 명이 ‘공녀’라는 이름하에 끌려가서 노리개감이 되었다. 고려 왕조는 결국 백성의 딸을 제물로 바쳐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세월이 너무 흐른 지금에 와서 당시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현재의 몽고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기는 좀 무리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 때 우리 나라 여인들을 ‘정신대’란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끌어가서 일본군의 위안부로 만든 만행을 납득할만한 사과와 배상을 받지도 않고 용서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먼 훗날 고려시대의 공녀처럼 아물지 않는 수치로 남으리라.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몽순이의 변화 내겐 미정이라는 친구가 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그 애는 얼굴이 조금 못생긴 편이다. 애칭으로 '몽순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 애가 어느 날 호들갑을 떨며 어제 슈퍼에 갔다가 진짜 근사한 남자애를 만났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몽순이의 얘기에 그냥 웃고 말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몽순이가 "아까 너희들이 왜 웃었는지 안다. 그렇지만 영선아, 난 그 애가 정말 좋아. 그냥 봤을 뿐이지만 느낌이 좋은 애였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몽순이의 우울한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 몽순이라고 사람 좋아하지 말라는 법 있나? 내가 도와 줘야지'결심하곤 그 남자를 수소문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애는 내가 아는 남자였다. '계집애 눈은 높아가지고.' 나는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날 몽순이에게 내가 도와 주겠노라고 하자 그녀는 볼이 상기될 정도로 기뻐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내 걱정은 시작되었다. 그 남자애에게 차마 몽순이 얘기를 꺼내지 못한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거짓말이 시작되었다. 몽순이에게는 "그 남자애가 너의 조용한 모습이 괜찮다고 하더라" "너 머리결이 예뻐 보인데" 같은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거짓말로 몽순이에게 라면이랑 잡다한 과자를 얻어먹었다. 그러나 날로 커지는 몽순이의 기대에 내 걱정도 그 만큼 커져만 갔다. 그러기를 두 달, 양심에 가책이 되어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나는 그 남자애에게 용기를 내어 사실을 털어놨다. 사정을 들은 그 애가 뜻밖에 한 번 만나겠노라고 했다. 나는 몽순이에게 으스대며 약속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때 몽순이의 표정이란...... 드디어 약속한 날이 돌아왔다. 그날의 몽순이는 내가 알고 있던 몽순이가 아니었다. 몽순이는 변해있었다. 조신한 언행이며, 진짜 반짝이는 머리결하며.....정말 예뻤다. 그 남자애도 처음엔 조금 실망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호감을 보였다. 결과는 물론 해피엔딩이었다. 나는 지금 내 거짓말이 몽순이를 변화시켰다고 믿는다. 몽순이는 그 남자애가 조용하고 지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하루에 책을 세권 이상 읽었다고 한다. 오! 놀라운 사랑의 힘. 지금 생각해 보니 흔쾌히 만남을 허락해 준 그 남자애에게도 고맙다. 사람의 외면보다는 내면을 보아 주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그 남자애와 나만의 비밀이지만 글세 만약 이 글이 책에 실린다면 몽순이가 알까? 알아도 상관없다. 나는 캐나다에 있으니 몽순이가 찾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영선 님/Delton B.C Canada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70 - 초인의 등장: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년) 그때 세계에서는 1847년: 영국 과잉생산으로 공황 발생: 마르크스 등,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발발 니체 [Nietzsche, Friedrich] 1844. 10. 15 프로이센 작센 뢰켄~1900. 8. 25 바이마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이렇게 막다른 염세주의의 벼랑까지 몰고나온 쇼펜하우어는 그 해결의 길을 동양의 배다와 우피니샤드 철학에서 발견한다. 인도인들은 일찍부터 그런 인간과 세계의 비극성과 비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해결의 방법을 해탈의 길에서 얻으려고 했다. 인도인들의 해탈의 정신은 근본의지, 삶과 세계의 존재의지 그 자체를 무화시키며 해탈로 벗어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실 쇼펜하우어를 읽는 사람은 이 의지의 염세적인 악의 존재는 인정하나 해탈의 방법과 같은 이론적 해명에 지나지 못한다고 보기 쉬웠다. 그래서 적지 않은 추종자들이 염세 및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공명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세상에서 열심히 즐거움을 찾아 산 사람은 말년의 쇼펜하우어 그 자신이었다. 사람은 극단의 주장과 사상을 앞세우게 되면 자신은 언제나 그와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게되는 법이다. 만일 쇼펜하우어에게 니체와 같은 추종자가 없었다면 그의 철학은 몇가지 내용을 남겼을 뿐, 오늘과 같은 역사적 의미는 지니지 못했을지 모른다. F.니체는 쇼펜하우어 못지 않은 천재성과 기인적 생애를 살았다. 아버지도 목사였고 조부도 목사였다. 할머니도 목사의 딸이었고 어머니도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는 태어날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러나 유례를 보기드물 정도의 반기독교 정신을 갖고 싸운 혁명아가 되었다. 대학에서는 그리스 정신과 문화에 도취되어 리츨이라는 교수밑에서 문헌학에 뜻을 모았다. 그가 교수의 추천을 받아 바젤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교수는 당신은 대학이 요구하는 모든 영역의 학문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니체는 타고난 시이,예술가였다. 치밀한 과학성을 지닌 편도 아니었고, 체계적인 학설을 제창한 철학자다운 인내력도 부족했다. 그의 특성은 철학적 과제를 시적으로 해명하는 특이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보다도 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니체가 철학적 사상에 접하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접한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는 R. 바그너의 음악을 사랑하는 예술평론가에 가까운 일에 열중해있었고 바젤 대학을 곧 떠났기 때문이 자유로운 문필가로서의 위상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다양한 독자층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적 주제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을 연장시킨 것이었다. 그 이론성을 갖춘 대표적인 저서는 "권력에의 의지"이며, 그의 핵심사상이 여기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 "권력에의 의지"도 철학적체계를 갖춘 저서는 아니다. 그는 학자이기보다는 시적 사상가였음을 여기서도 엿보게 한다. 그는 드물게 보는 문필가였다. 자기자신이 최고의 독일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A. 슈바이처도 프랑스어로 씌어진 최고의 문장은 루소의 "민약론"이고, 독일어로 씌어진 가장 훌륭한 문장은 니체의 "선약의 피안"이라고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즐겨 읽고 있다. 니체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주저이기 때문이다. 니체도 그 짐을 인정하고 있으며, 가장 뛰어난 문장이라고 자평한다. 우리가 젊었을 대는 "차라투스트라..."를 읽지 않은 대학생이 없었을 정도였다. 차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성자였다. 그를 주인공으로 해서 자기자신의 사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철학적 시상이다. 그는 그 속에서 '신들은 이미 죽었고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고 절규하고 있다. 한때 '신은 죽었다'는 신학이 유행한 일이 있었으나, 그 처음 발언자가 바로 니체였던 것이다.그는 인간의 신체가 죽으면 그것으로 삶은 끝난다고 보았다. 영혼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은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항상 주창해오던 초인의 사상을 선포한다. 찌꺼기 인간, 잡스럽고 조심스럽기만 한 벼룩의 집단같은 소인들의 위치를 벗어나, 새 모럴을 창조하며 수많은 평범한 인간들을 힘으로 지배할 수 있는 초인이 탄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때 이 초인의 사상은 젊은이들의 세계를 휩쓸었다. 영국의 버너드쇼의 "사람과 초인"이라는 희곡이 영국 런던에서 상영되었는데, 100일간 언제나 초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작품때문에 런던의 히스테리환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쇼도 초인적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니체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의 철학적인 과제로 돌아가야겠다. 7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초인사상(19세기말) 그때 세계에서는 1862년: 청.양무운동 발발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서녈)결성 니체는 태어날때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기독교 이외의 어떤 정신적 세계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싶었다. 대학에 있을 때 그이게 또 하나의 세계를 제공해 준 것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이었다 결국 니체의 일생은 기독교에서 그리스 정신에로의 전환이었고,그리스의 정신속에는 고대 동양, 특히 중동의 페르시아의 배화교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오리피즘 종교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중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에 접하면서부터는 자기자신의 철학적 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존재의지를 인간의지로 축소시켰고, 세계의지를 사회가 지배하는 권력의지로 집중시켰다. 생명세계의 의지력을 인간의 의지조건으로 재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플라톤때부터 헤겔까지 사상가들이 비판없이 추종해온 이성중심의 인간관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 것은 지성이 아닌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는 이성 또는 지성이 그 주체가 되는 듯이 착각해왔다. 그러나 지성은 의지가 원하고 명령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뿐이다. 하늘의 북두칠성을 보면서 저 국자와 같이 생긴 일곱 개의 별이 북두칠성이라고 말하면서 그 한쪽에 떨어져 있는 것이 북극성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 지성의 사고 결과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숨겨진 과정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지는 모든 것을 쉽고 간단하게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수를 계산할 수 있게 만들고, 그 수에 어떤 모양을 맞추어 한 개념으로 바꾸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식기능에서 제일 많이 작용하는 것은 동일화작용과 합리화작용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바꾸어놓으면 깨닫기 쉽고, 합리화시키면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지성이 수학, 기하학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의지가 인식에 필요한 공식을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수학, 기하학같은 합리적 원칙을 찾게 되는 것이다. 지성의 기능이 곧 인식의 도구책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쇼펜하우어의 의지 우위론이 니체에게 있어서는 지성 방법론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지성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너무 오래 지녀왔기 때문에 지성도구론에는 익숙해지지 못하곤 한다. 그러나 미국의 존듀이 같은 철학자는 지성은 행동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라고 말한다. 이는 지성이 홀로 있다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행동을 돕기 위해 생각이 뒤따라 작용한다는 철학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니체는 인간의 삶은 사회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것은 권력의지라고 규정짓는다. 권력의지는 지배자의 능력의 원천이며, 인간은 누구나 강해지며 지배하려는 의욕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 권력의지는 어디에서든지 발로되기 마련이며, 정치권력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래서 승리와 지배를 뜻하는 권력의지는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약자의 윤리는 패배자의 윤리이며, 지배자는 힘을 동반함으로써 승리의 모럴을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키아벨리 이후의 가장 대표적인 힘의 철학,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한 철학자로 니체를 꼽고 있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니체철학을 숭상한 것은 이유없는 바가 아니다.무솔리니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히틀러가 니체전집을 선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강자를 정신적으로 대표하는 인간이 그의 초인이다. 찌꺼기같은 잡스러운 소인들 틈에 끼어 있지 말고,뜻이 있는 사람은 초인이 되어 지배자의 도덕과 강자의 윤리를 찾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수많은 평범한 인간들은 한두 초인을 위해 존재하며 희생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초인은 강자의 가치관을 갖춘 사람이다. 그 초인의 가치관이 도덕과 윤리의 기반이 되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인도 운명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초인은 그 운명을 사랑하며, 세계운명은 영구히 회귀하는 섭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즉, 그리스의 세계운명의 정신이 초인이 돌아갈 마지막 길인 것이다. 니체도 운명의 인간이었다. 1900년에 죽는다. 그러나 11년동안은 정신병자로 머물렀다. 모친이 작고한 후에는 누이동생의 보호를 받다가 죽었다. 50세가 못되어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는 태양이 화려한 빛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것같은 운명의 조작인 것 같았다. 정신병을 앓고 있을 때의 니체는 어린애와 같이 양순했고, 모친과 누이동생의 지시를 반항없이 고분고분 따르곤 했다. 오빠의 운명을 슬퍼하는 누이에게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왜 우느냐"고 억지로 웃어 보이기도 했다. 아직 완전히 폐인이 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그의 사상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경부터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문학이나 사상에 넓고 깊게 영향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박쥐'의 '박'은 '눈이 밝다'의 '밝-' '박쥐'는 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짐승이지요. 우선 징그럽다고 하고, 또 밤에만 나돌아 다녀서 그런지, '남몰래 밤에만 음흉하게 일을 하는 사람'을 욕할 때, '박쥐 같은 놈'이라고 하지요. 이 '박쥐'에서 '쥐'는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박'이 붙었으며, 또 그 '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박쥐'는 원래 '밝쥐'였지요. 아마도 '눈이 밝다'는 뜻으로 '밝-'이 쓰인 것 같습니다. 박쥐가 초음파를 발사하여 그 반사음을 포착하여 방향을 조정해서 야간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니까, 그 전에는 '눈이 밝은 쥐'로 이해할 만도 하겠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운명과 화해한 사람 - 베에토벤 베토벤 [Beethoven, Ludwig van] 1770. 12. 17 독일 본에서 세례받음~1827. 3. 26 오스트리아 빈. 길을 가다가 급격한 영감의 발작이 일어났을 때, 혹은 피아노 앞에서 무슨 착상을 얻었을 때. 그의 얼굴은 변모하는 것이었다. 얼굴의 근육은 불끈 솟고, 핏대는 부풀어 올랐으며, 거풀진 눈은 갑절이나 무섭게 되고 입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제 스스로 불러낸 마신들에게 제가 잡혀 버린 마술사처럼. 악성 베에토벤을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같다고 말한 이는 율리우스 베네딕트였다.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본 시의 어느 가난한 집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술주정뱅이던 그의 아버지 요한은 예배당 가수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나게 되어 장남이던 그는 가계를 지탱하기 위해서 열세 살부터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하게 된다. 17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그는 두 동생의 교육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죽을 줄 모르는 사람은 가엾어라! 나는 열다섯 살 때,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암울한 심경을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애초부터 그의 인생은 슬프고 가혹한 싸움으로 드러났다. 1769년, 26세가 되던 그 무렵부터 서서히 청각장애의 징후가 나타났다. 원인은 급성 중이염의 악화였다. 스물다섯 살 때 매독을 선고받은 슈베르트의 절망이나 진배가 없었으리라. 화가에게 눈을 빼앗듯 그에게서 귀를 빼앗다니. 마치 눈을 흘기는 듯한 이 두 음악가의 표정은 모두 심한 근시탓이라고 하는데 둘 다 독신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쪄면 난데없이 돌출한 이십대 중반의 이러한 장애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귓병은 그의 성격을 거칠게 만들었고, 남을 의심하는 증세까지 불러일으켰다. 가끔 하늘을 향하여 우울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가다가 늘 짧게 끊어져 버리는 웃음-그것은 기쁨을 자주 가져보지 못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의 생애를 쓴 로망 롤랑의 말이다. 자살을 각오한 어느 날, 베에토벤은 두 아우들에게 유서를 썼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멀리서 들여오는 피리 소리를 듣는데 나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을 때나, 목동이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을 누군가가 듣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느냐고 물을 때, 거의 절망해서 자칫 자살하려고도 생각했다. 다만 예술만이 나를 다시 일깨우곤 했다. 아아, 나에게 맡겨진 창조를 모두 다 해낼 때까지는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의 예술의 전 재능이 아직 열릴 기회가 있는 동안은 아무리 불운이 찾아오더라도, 결코 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분연히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한때 그가 사랑했던 쥬리에타가 어느 백작과 결혼을 할 무렵, 그는 더욱 분발심을 일으켜 창작에 열중하니 그때 제3교향곡 영웅 이 탄생하고, 잇달아 운명 , 전원 교향곡이 발표되었다. 내가 비참한 지경에 뼈져 있을 때,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자살로써 인생을 끝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그렇게 술회하였다. 1810년 그는 말 대신 필기구로 해야 하는 필담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가극 피델리오 를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제1막의 이중창에서부터 벌써 무대는 흔들렸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지휘봉을 따르고 있었으나, 가수들은 제멋대로였다. 혼란이 일어났다. 잠시 휴식을 선언하고 다시 연주가 시작되자 혼란은 거듭되었다. 베에토벤의 지휘로는 연주가 불가능함이 분명해졌다. 퇴장하게, 가엾은 베에토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못했다. 쉰들러는 수첩에다 이렇게 썼다고 한다. 연주를 계속하지 마세요. 이유는 집에 돌아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후다닥 관중석으로 뛰어내려 줄달음을 쳐서 단숨에 집안으로 들어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식사시간 되기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 날의 일을 쉰들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그 날 마음속 깊이 타격을 받아 죽는 날까지 그 무서운 장면의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난청과 고립으로 완전한 내적 자아에 몰입을 하게 된 그는 고통속에서 교향곡 제9번 환희 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에르되디 백작부인에게 괴로움을 돌파하여 기쁨으로! 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죽음을 넉 달 앞둔 1826년 12월. 신의 영역에 속한다 는 걸작, 그 아름다운 현악 4중주곡 을 완성하였다. 그의 건강은 사십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황달이 간경변증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베에토벤은 앉기만 하면 술을 마셨다. 1827년 네 차례의 수술 뒤, 고통 속에서 넉 달이상이나 누워 있었는데 <베에토벤 최후의 병과 죽음>이란 논문을 쓴 포레스트 박사의 글을 보면, 폐충혈의 발작이 일어난 뒤에, 간장의 위축경화로 복수병과 발 다리의 종기가 생기게 된 것 이라고 하였다. 죽음이 너무나 일찍오는 것이라면 할 수 없고, 좀 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허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고 싶을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죽음)를 용감히 맞으리라. 베에토벤, 그는 과연 죽음과 두 번 대결한 셈이었다. 첫 번의 경우에는 혼자서 죽음의 높은 문턱을 스스로 넘어섰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이 관대하게 그것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그는 사람들을 향해서 라틴말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박수를 쳐라. 이제 희극은 끝났다. 그가 떠나던날 비엔나엔 눈이 내리고 때아닌 천둥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는데, 베에토벤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두 주먹을 불끈 쥔 다음,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웨링의 묘지에 매장이 되었는데, 묘비에는 다만,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 이라고만 씌어져 있다. 그가 죽고난 뒤 그의 모든 물건은 경매에 부쳐졌다. 고통스럽게 필담을 적었던 회화수첩과 그 일기들은 1풀로티너 20크로이쩌에 팔렸다는 후문이다. 고뇌에 찬 57년, 마침내 그는 환희 로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4. 수평파의 요구는 무엇이었는가? 런던 근교에 퍼트니(Putney)라는 곳이 있다. 템즈 강을 가로지르는 그곳의 퍼트니 다리 옆에 있는 교회에서 1647년 10~11월에 청교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의회군의 평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의 의회군의 지도자 크롬웰(Cromwell,1599~1658)과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튼(Henry Ireton)은 사병 대표들과 격론을 벌였다. 이 사병 대표들은 정치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를 주장했다. 이들이 바로 `수평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그들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에게 정치란 지주나 상인처럼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농민이나 직인처럼 재산도 없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혁명의 승리를 향해 왕당군에 맞서 함께 싸운 의회파 안에서의 이러한 대립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은 젠트리(Gentry)라고 불리는 지주층이었다. 이들은 이전 세기에 모직물 공업의 발달에 따라 양목을 위한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유력한 사회층으로 성장해 있었다. 또한 도시에서도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에 따라 시민 계급이 성장했다. 그런데 이들 시민층과 앞서 말한 젠트리 중에는 청교도가 많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른 찰스 1세는 왕권 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전제 정치를 실시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의회의 권한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또한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종교면에서도 국교회를 강화하고 청교도를 박해했다. 따라서 의회와 국왕의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1628년 대외 전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한 찰스 앞에 의회가 내놓은 것은 과세의 승인이 아니라 <권리청원>이었다. 영국 헌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 된 이 권리청원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 개인 집에 병사를 숙박시킬 수 없다. 평화시에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다. 자의적인 구속이나 투옥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찰스는 의회의 요구를 부득이 승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의회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해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하지만 1639년 스코틀랜드의 장로파가 국교회를 강요하는 데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음해인 1640년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1년 만에 소집된 의회는 왕의 과세 승인을 거부하고 오히려 왕의 실정을 실랄하게 비판했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해소되지 못하고 결국 내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이 내란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를 정점으로 하여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의회군은 승리 이후 평화와 질서 회복이라는 과제를 놓고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내부 분열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파 내부의 대립은 크게 장로파와 독립파로 나타났다. 장로파는 장로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는 사람들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파는 의회군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고 각 교파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수평파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의회파내의 대립 속에서였다. 장로파는 의회군을 해산하는 조치를 통해 자파의 기반을 강화하려고 했는데 이에 맞서 의회군은 장교와 사병의 대표로 구성된 군평의회를 만들고 자신들의 불만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의회군은 밀린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제대 후에도 마땅한 대책이 없던 차에 해산당하게 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의 요구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의견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군의 불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들이 피흘려 승리로 이끈 혁명의 대의와 새로운 입헌 질서라는 문제로 사태가 발전하자 차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가 퍼트니에서 벌어진 크롬웰과 사병 대표 사이의 격론의 내용이다. 완전한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수평파의 요구는 당시 그들이 작성한 <인민협정>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21세 이상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을 비롯하여 신앙과 종교의 자유, 법의 의한 재판, 채무로 인한 인신 구속 반대, 공무원 선거제, 징병 권한의 의회 귀속등의 주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평파의 요구는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에 의해 거부당했고 이후 아일랜드 원정을 거부하는 사병들의 집회는 폭력적으로 해산당했다. 수평파는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한 정치적 평등과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 사상은 수평파를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4. 미국인들조차 분노한 미국언론 편집자에게.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중국인들! 고아원 원아 학대를 부인하다'라는 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쌍하이 고아원에서는 그 고아원의 가장 훌륭한 모습을 기자들에게 보여주면서, 뉴욕에 총본부를 두고 있는 인권감찰기구가 중국에서는 아동들을 고의로 굶겨 죽이고 있다고 고발한 내용에 대해 반박하였습니다. 저로서도 쌍하이 시 민정국(民政局) 부국장 및 아동복지원 원장의 해명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그들이 보살피던 고아들 중 상당수가 추운 날씨에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환경 때문에 사망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본국에서 중국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평하는 글을 자주 보았습니다만 이번의 글처럼 중국이 정부정책으로 아이들을 굶겨 죽여 고아의 수를 감소시키고 했다는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루슨다르가 1월 8일에 쓴 글에 나타난 공산당들의 잔혹성과 매정함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자금 부족과 각종 시설의 착오 및 이의 관리소홀 등이 모두 관방의 고의적 계획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귀보 1월 6일자에 실었던 사진과 영국의 BBS에서 연속적으로 방송한 중국의 모습은, 1월 10일 황금시간대에 방송된 미국 국영수용소의 저능아들이 받는 학대장면보다는 덜 충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중국의 선전기구가 미국의 이런 박약아 학대사건을 미국 정부가 자행한 정책의 일환이라고 몰아붙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1996년 1월 10일 뉴욕에서 편집자에게. 귀보의 1월 9일자 보도와 루슨다르의 1월 8일자 중국 고아원에 관한 칼럼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미스터 루슨다르의 글은, 중국 정부가 고아원의 원아들을 고의로 굶어 죽게 만들고 있다는 인권감찰기구의 보고서를 근거로 쓰여진 것입니다. 중국의 고아원에 대한 이 말은 어떤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귀보의 보도에서도 말하였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보도에서 지적한 것 외의 어떤 원인들이 중국아동들을 버림받고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아원에서 죽어가는 많은 아이들은 그곳에 올 때 이미 중병을 갖고 있거나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영양실조상태였습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중국이 자유시장경제를 실시하자 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중국에서도 치료비를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적당한 치료를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들 가정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치료비조차 부담할 수 없어 국가에서 구제해 주길 바라면서 아이들을 내다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버린 이아이들은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을 만큼 허약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입니다. 저는 미스터 루슨다르가 아이들의 이런 고통을 지역 간 정치투쟁의 도구로 이용하기 전에 '증거가 확실한' 보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996년 1월 11일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편집자에게. 1월 6일과 9일, 귀보에 게재된 인권감찰기구의 중국 고아원 관련보도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저는 중국 여자아이 한 명을 입양할 예정인 어머니로서 많은 시간 동안 중국아동 양육문제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중국아이를 입양하여 양육하고 있는 부모는 물론이고 사회복지종사자 및 사회복지기구들과도 많은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귀보의 보도 사실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정부와 고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최선을 다해 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있고. 아이들에게 가정의 따뜻함을 주기 위해 미국인들이 입양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귀사에서 다시 한 번 조사해 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미국 매스컴들의 특종과 흥미를 위한 이런 보도가 이 아이들과 양부모들 에게는 절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1996년 1월 10일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 애리스 고딘 올림 위의 글들은 1월 15일자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독자편지들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이들 영문편지를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원문의 어투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였다는 점이다. 1996년 1월 {뉴욕타임즈}는, 중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고아원의 원아들을 굶겨 죽였다는 내용을 기획시리즈의 일환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이에 앞서 1995년 6월 영국의 BBS도 '사신(死神) 이 찾아 든 고아원'이라는 제목아래 중국 정부가 고의로 고아원의 아동들을 굶겨 죽였다는 내용의 보도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보도에 대해 미국 일반독자로부터 온 위 3통의 편지는 {뉴욕타임즈} 와 BBS의 보도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였다 평범하기 이를 데없는 이런 국민의 편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편지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1) 모시 톤은 미국 국영수용소에서 정신박약아를 학대한 '추악한 모습'을 솔직하게 폭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중국은 미국 의회에서 고의로 전국 수용소의 박약아를 학대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했다거나, 또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이 흑인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 정책을 수립하였다고 하지는 않을테니까. {2) 머쉬 콜만은 아동의 고통을 자기들의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과거 중국인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인의 고아들을 데려다 기른 민족이다. 이렇게 포용할 줄 아는 민족을 모함하는 짓은 아주 비열한 행동이라는 것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중국인들이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고아들을 키울 수 있다. 미국인이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죽어간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또 미국에 의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라크아동들의 인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국인에게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있다면, 이 독자의 말처럼 아이들을 정치투쟁의 도구로 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애리스 고딘은 미국 언론계가 특종보도를 지나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 언론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기자들은 자기의 명성을 위해 사람을 놀라게 할 특종을 보도하려는 폐단을 가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원아들을 굶겨 죽이려는 계획을 세울 리 없다는 것과. 또 미국인의 이러한 보도는 도깨비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쯤은 중국인 누구나 알 수있는 사실이다. 고아원 종사원이 아동을 돌보는 일에 어쩌다 소홀한 경우가 발생할는지는 모르지만, 중국 정부는 결코 히틀러 정부가 아니며 중국의 고아도 2차대전 당시 박해를 받던 유태인이 아니란 점을 미국인 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헝크리가 레이건 대통령을 저격하고는, 이렇게 하면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기억난다. {뉴욕타임즈}의 기자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심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악명만 떨치게 된 셈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죽음보다 강한 사랑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 년 7월 말,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제 14 호 감방 사람들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떨었다. "단 한사람이라도 도망을 치면 같은 감방에 있는 다른 사람 스무 명을 아사형에 처한다"는 수용 소장 프리치의 경고를 떠올리고 그들은 다들 죽음과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구 하나 잠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잔혹한 고문에 살아남기를 원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그들이었지만 아무도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사감방으로 끌려가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숨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창자와 핏줄이 말라붙어 짐승처럼 날 뛰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영웅들마저도 "내가 뽑히면 어떡하나."하고 어린애처럼 울고 있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아사감방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밤마다 맹수의 부르짖음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굶주림의 고통보다 목마름의 고통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사형에 처해진 사람들한테서는 인간다운 점을 찾아볼 수가 없어 나치스의 간부들마저도 그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점호 시간. 수용 소장 프리치는 도망간 사람을 찾지 못하자 14 호 감방 사람 전원을 수용소 마당에 세워 놓았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기절해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열 밖으로 끌어내어 던졌다. 내던져진 사람 위에 또 다른 사람들이 쓰러져 포개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무더기는 점점 커졌다. 오후 3시. 그들에게 30분간의 휴식과 수프를 먹는 일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프를 먹었다. 그리고 여전히 차려 자세로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이윽고 저녁 점호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친 포로들이 수용소 마당에 정렬하자 소장 프리치는 교활한 조련사처럼 각 감방별로 보고를 받으면서 이리저리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14 호 감방수들 앞에 딱 멈추어 서서 갑자기 발작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도망친 놈이 아직도 안 잡혔다. 이제 너희들 중 열 명이 저 아사감방에 가서 죽어야 한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스무 명을 한꺼번에 보내겠다." 소장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서투른 폴란드어로 계속 지껄였다.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 이빨을 보여!"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들처럼 벌벌 떨었다. 소장은 그들의 이빨을 자세히 관찰하는 척하면서 그들 사이를 저승 사자처럼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보좌관 팔리치가 즉시 지적된 수형자의 번호를 명부에 기입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인간이 한 개 번호에 불과했다. 지적을 당한 사람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몇 차례 버둥거리는 듯하더니 열 밖으로 빠져나갔다.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서 포로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너, 너, 너, 너, 그리고 너!" 한 순간에 열 명이 지적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불쌍한 내 마누라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구나!" 지적을 당한 사람 중 한 사내가 열 밖으로 걸어나오면서 울부짖었다. 지적 당하지 않고 열 가운데 남은 사람들은 아사감방에 가는 일만은 면하게 되었다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신발을 벗어!" 보좌관이 명령을 내렸다. 사형수들은 맨발로 형장으로 가게 돼 있었으므로 그들은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던졌다. 부인과 아이들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었다고 울부짖던 사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좌로 돌앗!" 보좌관이 아사감방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좌로 돌았다. 그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포로 한 사람이 동료들 사이를 헤치고 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가 약간 옆으로 굽은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크고 맑은 눈으로 소장 프리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걸어나왔다. "정지! 무슨 일이야? 이 폴란드 돼지 새끼야!" 당황한 소장이 고함을 질렀다. 그가 소장 앞에 똑바로 섰다. 아주 침착했다. 입가에 미소까지 띤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옆 사람한테만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저 사형수 중의 한 사람을 대신해서 제가 죽겠습니다." "뭐라구?" 소장은 멍하니 놀란 얼굴이었다. 그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결정을 결코 바꾸어 본 적이 없는, 반항하는 자는 단 한 발의 총성으로 간단히 처치해 벌이던 소장이 갑자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래? "저는 이미 늙었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어도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먼저 처치해 버린다'는 나치스의 불문율을 먼저 내세웠다. 혹시 자신의 태도가 소장에게 영웅적으로 비쳐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몹시 조심하는 태도였다. "그래, 누굴 대신해서 죽겠다는 거냐?" "저 사람, 부인과 아이들을 가진 사람 대신입니다." 그는 아까 한없이 울부짖던 프란시스코 가죠프니체크 중사를 가리켰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천주교의 신부입니다." 그의 대답은 짤막하고 엄숙했다. 소장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한없이 젊고 화사해 보였다. 그는 소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멀리 지평선에 걸려 있는 붉은 저녁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침묵이 흘렀다. 점호 중에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된 적은 없었다. 마침내 쉰 목소리로 소장 프리치가 말했다. "좋다! 함께 가라!" 소장은 감히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좌관 팔리치가 아사감방행 명단 가운데 번호 하나를 지우고 대신 '16670'번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갓!" 사형수들은 맨발에 셔츠 바람으로 아사감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 사람도 마치 양 떼를 모는 목자처럼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이다. 글터 → 이글저글 계란을 소금물에 담그어 보아 가라앉으면 싱싱한 것이고 뜨면 오래된 것이다.한 방울의 물 속에는 1,700,000,000,000,000,000개의 분자가 있다.소금을 화학적으로 분해하면 염화나트륨이 주성분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사람이 먹으면 죽는다. 검은색은 열을 흡수하고 흰색은 열을 반사한다.유리로 만든 공은 고무공보다 더 높이 튄다. 또 강철로 만든 공은 유리공보다 더 높이 튄다.귀중한 보석일수록 색깔이 없다.백금 28그램으로 16,093킬로미터까지 길게 늘일 수 있다.금 1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150,000톤의 광석을 갈아내야 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