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 76 호4339.12.05 (10.15)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내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보다는 그 분의 손자가 어떤 사람이 될 지에 더 마음을 쓴다. / 에이브러햄 링컨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열녀도 부정녀도 아닌 여자 -을부의 아내 백제의 열녀는 개루왕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조를 지킨 도미의 아내로 대표되고, 신라 열녀는 왜국에 건너간 남편 박제상을 기다려 마침내 치술신모가 된 그의 아내로 대표된다. '열'이란 이처럼 지아비를 기다려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정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어떻게 보면 성을 한껏 즐기면서 열녀로 추앙받는 역설적인 열녀도 더러는 있다.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에는 을부와 병부로 불리는 절친한 초부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데 요 얼마 전에 맞아들인 을부의 아내는 어쩌자고 나무꾼의 아내답지 않게 천하 절색이었다. 을부와 병부는 매일같이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면서 입에 올리느니 그 미모의 아내 이야기였다. "짜아식, 언제 보아도 네 마누라는 참말로 선녀 같더라." 병부가 침을 튀기면서 꺼내는 말에 을부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시시덕거렸다. "헤헤. 참말로 내 마누라는 그만이여." "잠자리 맛도 그만이겠다, 응?"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네 같은 총각은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이. 아 고것이 백옥같이 흰 살결을 비비적거리면서 내 가슴팍을 파고들 때는, 어휴!" 병부가 침을 질질 흘러가며 을부의 바지춤이라도 잡을 듯이 바싹 다가서서 졸라대었으나 그 때마다 지난밤의 녹작지근한 순간순간을 돌이켜보느라 이야기를 더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병부는 친구 마누라를 머리 속에 떠올리느라고 나무를 하다 일쑤 손가락을 베기도 하고, 밤이면 밤마다 볼썽사납게 친구 마누라를 붙안고 몽설을 하기가 예사였다. 을부와 함께 산에 오르지 않는 날이면 먼발치에서라도 을부 마누라의 모습을 훔쳐보기 위하여 친구네 집 담장 밖에서 기웃거리기 일쑤였고, 별로 이렇다 할 볼일도 없는데 걸핏하면 무슨 핑계를 대어서 을부네 집에서 살기가 예사였다. "어이고 그저 저 을부 마누라를 더도 말고 하룻밤만 내 것으로 만들어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마는......" 병부는 날이 갈수록 을부 마누라를 사모하는 정이 더해 갔다. 이는 진정 큰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를 챌 만큼 병부가 친구의 아내를 흠모하는 정도는 지나쳐서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실로 엉뚱한 망상에 빠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 원수놈의 을부란 놈만 없어지면 저 마누라를 내 마누라로 만들어 버리고 말 터인데......" 마침내 병부의 마음에 살의가 움트기 시작했다. 며칠 뒤 구체적인 살해 계획이 마련되자 두 사람은 여느 날처럼 산에 올랐다. 미모의 친구 아내를 소유하고 싶은 외줄기 욕망 앞에 몇십 년래의 우정도 윤리도 아무소용이 없었다. 악마로 변한 병부는 아무 생각 없이 나무를 하고 잇는 친구 을부의 등뒤로 다가가 기어이 을부의 목을 베어 죽이고 시체를 벼랑아래로 굴려 버렸다. 을부가 마지막 죽어 갈 때 그의 입에서는 거품이 비죽비죽 비어져 나왔으나 병부로서는 그까짓게 문제될 게 없었다. 마을에 돌아온 병부는 을부가 낫질을 잘못하여 몸을 다친 데다가 발밑에 있는 돌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알렸다. 애초의 각본대로 친구의 장례까지 서둘러 치러 준 다음 병부는 늑대의 탈을 쓰고 을부 마누라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을부 아내는 당장 그 고운 손으로 땔나무며 고된 농사일까지 혼자 해내야 했다. "아주머니, 땔나무는 내가 해드릴 테니까 낫을 들고 산에 가는 일은 제발 그만두소." 병부는 일부러 호의를 가지고 바짝 접근했다. 무턱대고 그런 유의 호의를 받아들일 을부 아내도 아니었다. 문턱이 닳도록 뻔질나게 출입하는 병부에게 을부 아내는 제동을 걸고 나왔다. "놓아 두소, 동네에 소문날까 두려우니 저희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 좀 삼가 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랍디까? 나하고 함께 나무하러 갔다가 변을 당한 친구이니 불쌍하게 된 친구 아내 보살펴 주는 건 내 책임 아니오?" 이렇게 엉큼한 수작으로 맹리같이 접근해 오는 병부가 젊은 과부는 차츰 싫지가 않았다. 싫다기보다 나약한 여자 혼자의 힘으로 농사일을 거두랴, 나무를 하랴, 한 가정 일을 도맡아 보살펴 주는 병부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이 같은 낌새를 눈치챈 병부는 어느 날 밤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젊은 과부 혼자 거처하는 방으로 능구렁이처럼 스며들었다. "에그머니..... 누, 누구예....." "쉿! 나요, 병부." 어느결에 문고리에 안으로 걸어 잠그고 다가오는 병부의 가슴을 젊은 과부는 필사적으로 밀어내었다. 병부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마을에는 죽은 을부의 아내가 병부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마음 속으로 병부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소문이 날 대로 나 있는 터다. "임자도 그런 소문 들은 적 있소?" 병부는 마치 여러 날 만에 아내의 곁으로 돌아온 남편처럼 능청스럽게 옷을 벗으면서 여인에게 접근했다. "아니, 왜 자꾸 추근추근 기어 붙어요?" 여인은 기가 찬 듯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앉으며 앞가슴을 가렸다. "어허, 소문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렇고 그렇다고 나 버렸는데 왜 이러시오?" "난 소문이고 대문이고 들은 적 없어요!" "아따,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더라고, 그새 임자 남편 죽은 뒤로 독수공방 지키느라고 적적했지, 뭘 그러시오. 임자도 날 알고 보면 하룻만에 정이 쏘옥 들어 버리고 말걸!" 병부는 오늘 밤에 기어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하자면서 친구의 아내를 덥석 안아 버렸다. "이이가 왜 이러시오! 이이가 왜 이러시오!" 하면서 앞가슴을 가린 채 뒷걸음을 치던 여인은 이내 벽이 가로막아 더 물러서지 못하고 우람한 병부의 가슴에 안기고 말았다. 마을에 소문이야 어떻게 나 있건 실상 이 여인도 이 같은 밤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한 번 사내의 손길이 자기 몸에 닿자 제쪽에서 몸이 달아 능동적으로 남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요런 여우 같은.......' 병부는 연방 속으로 '계집이란 알 수 없는 요물이야.'하고 뇌까리면서 친구 마누라를 아주 녹여 없애 버릴 것처럼 점령해 들어갔다. 병부의 남성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여인은 폭풍우 같은 한순간이 지나자 다시금 사내 목을 휘어감고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날 어쩌자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소." "어쩌긴 뭘 어찌. 마누라 삼아 버리고 말 텐데." "맙소사. 당신 마누라 되는 건 기쁜 일이오만 행여 내 몸 먼저 빼앗아 먹고 마누라 삼았단 얘기는 하지 마소." "고게 무슨 발뺌이라던가?" "오늘 밤에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와서 재미봤다는 얘기는 쏙 빼고 당신이 정 이 몹쓸 년을 아내로 데려갈 양이면 매파를 놓아 정식으로 청혼을 하라 이런 말이오." "옳아, 그래야 임자가 정숙한 여자로 손가락질을 안 받는다 그런 말이렷다." 여인은 대꾸 대신 새삼스럽게 부끄러움이 고개를 드는지 사내의 땀에 젖은 가슴에다 얼굴을 묻었다. 이튿날 병부는 서둘러 매파를 놓아 정식 청혼을 하였다. 을부의 아내는 처음에 매파 말에 펄쩍 뛰며 수절할 것을 고집하다 못이기는 체하고 청혼에 응했다. 자기의 계획대로 미모의 친구 마누라를 아내로 맞아들인 병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얻은 것만큼이나 감격해 하였다. "임자가 내 아내가 되다니. 임자가 내 아내가 되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꿈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 진정 생시의 일이었다. "여보 마누라, 방으로 들어가세." 대낮에도 병부는 아내를 끼고 있을 양으로 부엌에서 일하는 아내를 불러들였다. "마누라, 우리 방아놀이 할까?" "방아놀이라니오?" "쿵덕쿵! 쿵덕쿵! 그 방아놀이 말일세." 아내는 그제야 병부의 말 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아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산에 가서 나무나 한 짐 해 오시지 않구 대낮에 무슨 방아놀이예요?" "아따, 평생 나무만 해 나르다 세월 다 보내란 말인가? 난 뭐니뭐니해도 그 방아놀이가 제일 좋더구먼." 그러면서 넌지시 아내 손을 끌어당겨 모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자 병부는, "임자, 내가 남편으로 보이는가, 남편의 친구로 보이는가?"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새삼스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내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새 남편을 돌아다 보았다. "글쎄,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내가 남편으로 보여, 남편의 친구로 보여?" "당신이야 제 남편 아니에요? 남편의 친구라니, 제가 아직도 죽은 전 남편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아세요?" "옳지, 말 잘 꺼냈다. 임자는 그전 남편 을부 생각을 아주 잊어버리고 사는가?" "잊어버리다마다요. 지금 즐겁게 해주는 이도 당신밖에 더 있어요?"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아내는 전 남편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같아 병부는 새로운 힘이 솟았다. '그러면 그렇지. 주야로 임자를 즐겁게 해 주는데 만에 하나라도 죽은 전 남편을 생각해서야 되나.'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병부는 아내 곁을 떠나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병부와 살을 섞고 살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여인은 첫 아들을 낳는다. 병부는 이제 이 여자가 자기 대를 이을 자식까지 낳았으니 전남편은 까맣게 잊어버렸겠거니 하고 안심한다. 그 다음해 아내는 또다시 딸을 낳는다. 연년생으로 낳은 자식이 아들 셋에 딸 둘, 5남매를 낳게 된다. 5남매의 부모가 된 병부와 그의 아내는 그 사이 살림이 늘 만큼 늘어 다복한 가정으로 이웃간에 부러움을 사게 된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병부는 마루에서 새끼를 꼬고 앉았다가 문득 처마에서 뜰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에 눈이 갔다. 얼마 동안을 낙숫물만 바라보고 있던 병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와 버렸다. "허허헛." 윗방 쪽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잇던 아내가 새끼를 꼬다 말고 웃는 남편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허허허, 허허헛." 아내는 무엇이 짚이는지 재빨리 바느질 손을 놓고 물었다. "여보, 무슨 생각이 나서 그렇게 웃으시우?" "엉? 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네." 남편은 서둘러 생각을 거둬 들이고 다시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내는 사이를 두지 않고 다그쳤다. "당신이 낙숫물을 보고 두 번씩이나 웃는 데에는 따로 까닭이 있어서 웃으셨을 거예요." "아, 아니래두. 그저 빗물이 떨어져서 빙그르르 돌아나가고, 돌아나가고 하는 꼴이 우스워서......" 병부는 딴전을 부렸으나 아내는 그냥 넘어가려 들지 않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이 낙숫물을 보고 웃으시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 그러셨을 거예요." ".........." "여보, 5남매까지 낳고 사는 우리 부부 사인데 말 못할 일이 뭐가 있나요? 말씀해 보세요, 여보." 딴엔 그랬다. 젊고 어여쁜 아내가 자기에게 온 뒤 자그만치 5남매를 낳고 살지 않는가? 그 하고많은 나날을 살아오는 동안 정이 붙을 대로 붙고 들 대로 들어 버린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인들 못하랴 싶었다. "여보......." "그래 알았소. 바로 임자 전 남편 을부 얘긴데......." "네, 제 전 남편이 혹 지난밤 꿈에 나타나기라도 했답니까?" 아내는 짐짓 짙은 호기심을 누르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꿈에 나타난 건 아니고 실은, 임자 전 남편 을부 녀석 말이야." "갑자기 왜 전 남편 얘기는 꺼내세요. 다 잊은 사람을....." "아니야. 재미가 있어서 그래." "재미라니오." 아내의 눈이 남편 몰래 빛난다. 남편 병부는 다시 한 번 허허허 웃고 나서, "그 녀석 내가 죽여 버렸거든." 하고 대수롭지 않게 뇌까렸다. "어머, 그랬어여? 어떻게요?" 아내는 애써 본심을 누르고 옛 이야기를 재촉하듯 되물었다. "그거 뭐, 어렵지 않더구먼. 나무하는 녀석의 등뒤로 다가가서 목을 쳐 죽이고는 벼랑 아래로 굴려 버렸으니까." "..........." "한데 녀석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입에 거품을 물고 죽었거든. 지금 저 뜰 아래 물거품을 보니까 그 때 녀석을 죽이던 일이 생각나서 웃었다네. 허허헛." "그래요? 낙숫물 떨어질 때 생기는 물거품을 보고 제 전 남편 죽이던 일이 생각나셨다구요?" "응, 허허헛." "에유, 그까짓 일이 뭐가 그리도 우스우세요?"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손에서 바느질감을 놓았다. 그녀는 이웃에라도 가듯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아내는 서둘러 관아로 달렸다. "사또! 살인자를 벌주소서. 사또마님!" 아내는 사또 앞에서 피눈물을 쏟아 놓았다. "살인자라니, 누가?" "지금 제 남편이 전날의 제 남편을 죽였소이다. 그자를 벌 주소서." 사또를 비롯한 육방 관속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의아해 하였다. "지금 남편이 전날의 남편을 죽이다니?" "예, 이는 사실이옵니다. 살인자가 눈치를 채고 도망가기 전에 어서 제 남편을 잡아 가두소서." 아내의 제보에 따라 그 남편은 관가로 잡혀 갔다. 심문 결고 병부가 을부를 죽였다는 실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 아내의 남편 병부는 사형을 선고 받고 죽어 갔다. 말하자면 전 남편은 현재의 남편에게 죽어 갔고, 현재 남편은 아내의 고발로 죽어 간 셈이었다. 아내는 남편 병부가 사형 언도를 받고 죽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미리 마련해 둔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죽어 갈 때 남달리 빼어난 자기의 자색을 미워했다. '내 아름다움이 두 남편을 죽게 하였으니 어찌 혼자 살아 남기를 바라겠는가.' 이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두고 열녀라 말하기도 하고, 부정녀라 말하기도 했다. 전 남편의 한을 풀어 준 점은 열녀였으나, 5남매까지 낳고 어차피 정을 쏟고 살을 섞으며 살아온 지금의 남편 병부를 살인죄로 죽게 하였으니 지어미로서 그보다 더한 불렬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정은 전 남편 을부에게 기울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던 것도 실은 이자가 전 남편을 죽였으리란 심증을 굳힌 나머지 그 확증을 잡기 위해 재혼한 셈이었으니, '열.불렬'의 열녀라기보다 끈질긴 '무서운 열녀'임에 틀림이 없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최영과 이성계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까닭 - 이형우(고려대 강사) 황금을 돌같이 여긴 최영, 명궁 이성계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꾸준하게 민족의 역사를 배워왔다. 선사시대부터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때때로 ‘그때 만약에 이렇게 되었더라면’하는 가정을 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가정들은 하나의 양념이 되어 우리가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또 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그려 보았을 가정은 잃어버린 만주벌판에 대한 것일 것이다. 최영 장군이 추진하였던 요동정벌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가정을 하게 해주었다. 만약 요동정벌이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를 최영이 물리쳤더라면 등등이 그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요동출병과 뒤이은 위화도 회군은 고려말 두 거목 최영과 이성계의 명암을 갈라놓았고, 결국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최영은 당대의 명문 집안 철원 최씨 출신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직계 선조들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그의 나이 16세때 일찍 죽었다. 그런 까닭에 최영도 과거 등을 통하여 문신으로 출세하지 못하고, 남보다 뛰어난 완력을 바탕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아버지의 유훈인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를 생활신조로 삼고, 공민왕. 우왕때에 여러 차례의 군공을 쌓으며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공민왕 말기는 물론 우왕 재위 기간 내내 막강한 권력자의 지위를 누렸다. 이성계는 전주 이씨 출신이다. 고조 할아버지인 이안사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지역은 당시 원나라의 통치 아래 있었고, 이안사를 비롯하여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의 벼슬을 받았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치를 단행할 때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다시 고려의 관직을 받고 활동하였다. 이성계는 개경에 기반이 없던 자신의 불리함을 뛰어난 활솜씨 등 탁월한 무재를 바탕으로 극복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중국대륙 정세의 급변, 그리고 홍건적의 침입 고려는 30여 년 동안 몽고와 전쟁을 치룬 끝에 강화하여 이후 근 100년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원나라는 그 기간 동안 고려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1356년에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냈을 당시에 고려는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군사적으로 취약하다고 해도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보호 아래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몽고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의 반란으로 중국대륙이 혼란해지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중의 하나였다. 한산동. 유복통 등이 중심이 되어 하북성 영평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한족 반란군의 선봉이 되었다. 그들은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둘러 표식을 삼았기 때문에 홍건적 또는 홍두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백련교를 등에 업고 몽고족에 대한 한족들의 반원 감정을 이용하였다. 한산동을 송나라 휘종의 8세손이라고 선전하면서 빠르게 세력을 키워, 1355년에는 그의 아들 한림아가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국호를 송이라 정하였다. 그 뒤 원나라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들 중 한 무리가 원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고 고려 쪽으로 쫓겨 들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홍건적의 침입이라고 부른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자 고려는 이유도 없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홍건적은 두 번 침입하였다. 첫 번째는 1359년 12월에 있었다. 모거경 등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평안북도 의주와 정주를 함락시키고 순식간에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열을 정비하여 이듬해 1월에 평양을 탈환하고, 도망치는 홍건적을 추격하였다. 이 때 압록강을 넘어 살아 돌아간 홍건적이 수백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뒤에도 홍건적은 간헐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다가, 1361년 10월에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 이 때는 반성. 사유. 관선생이 무려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고려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수도이 개경까지 압박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공민왕과 관리들은 어쩔 도리 없이 하룻밤에 수도를 버리고 안동까지 도망갔다. 홍건적은 11월 하순에 개경까지 하락시켰다. 고려에서는 전열을 정비하고, 군대를 징발하는 데 황급한 시간을 보낸 다음, 다음해 1월에야 20만의 군대로 개경을 포위할 수 있었다. 이 때 활약한 장수 중에는 안우, 이방실 외에 최영과 이성계가 있었다. 때마침 1월 엄동설한에 눈비가 섞여 내렸는데, 적들은 향수에 젖었는지 방심하고 있었다. 그 때를 틈타 고려의 군대는 기습하여 비교적 쉽게 10여 만 명 가까운 수의 적을 무찌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개경 성안에서 어린아이까지 삶아 먹으면서 만행을 저지르던 적이 고려군의 기습에 자기들의 처자식도 데리고 가지 못한 채 압록강을 바라보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군사적으로 취약했던 고려는 홍건적의 공격에 기선을 제압당하여 처음에는 고전하였지만, 곧바로 반격하여 두 차례 모두 적을 거의 섬멸할 수 있었다. 고려 말기의 바이킹, 왜구 홍건적이 침입한 것은 두 번뿐이었지만, 왜구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걸쳐 지속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해 왔다. ‘왜구’라는 말은 본래 ‘왜가- 를 노략질하였다’라는 말인데, 고려말과 조선초에 왜가 우리 나라와 중국을 너무 빈번하게 침입하였기 때문에 일본 해적을 가리키는 명사가 되어 버렸다. 왜구가 우리 나라에 침입한 것은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의 침입은 지속적이고 그 피해가 매우 컸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는 달랐다. 그들은 고려의 수도까지 위협하여 정부에서는 빈번하게 계엄을 선포하기도 하였으며, 수도를 보다 안전한 내륙으로 옮기자는 논의도 있었다. 공민왕 때부터 공양왕 때까지 41년 동안 왜구는 총 506회, 1년 평균 약 12회 이상 침입하였다. 우왕대에 제일 극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1377년(우왕 3)에는 월 평균 4회 이상인 총 52회 쳐들어와서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렇다면 왜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결사적으로 고려를 침략했을까? 첫째 이유로는 일본의 국내 사정을 들 수가 있다. 왜구가 창궐하던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1333년 멸망하고 무로마찌 막부가 들어섰으며, 동시에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적하는 남북조시대였다. 당연히 중앙의 통치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였고, 그 틈을 타서 각 지방의 무사들은 자신들의 영지 획득에 혈안이었으며, 그 와중에서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수많은 해적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 연안까지도 출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곤궁했던 남서부 지역의 ‘왜’들이 가장 빈번하게 쳐들어 왔다. 두번째 이유로는 고려의 취약한 군사력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대부분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해당한다. 반원 개혁 이후 공민왕은 국가를 정상화하려고 노력했지만 기존의 권세가들이 반발하여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그 와중에 공민왕이 암살당하고, 나이 10살의 어린 우왕이 즉위하였다. 개인적인 치부와 세력 확대에 골몰했던 집정자들은 새로운 상황에 맞는 군사제도를 확립하지 못하였고, 군대의 기강도 해이하였다. 특히 수전에 강한 왜구를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었다. 왜구의 주된 약탈 품목은 곡식이었다. 일본은 본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서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쌀을 교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남북조 전쟁으로 더욱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왜구가 되었던 만큼 곡식 약탈에 혈안이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고려의 조운선을 습격하였고, 나아가 연안의 곡물창고를 직접 노략질하는 등 침입 초기에는 주로 해안지방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조세를 거두어 육로를 이용하고 조창을 옮기자 왜구는 내륙지방까지 쳐들어오기도 하였다. 해적으로 출발한 왜구가 기병부대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들이 내륙까지 침략해 들어오면서 고려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곡식 이외에 사람도 마구 잡아가고 죽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모습은 중세 유럽의 해적인 바이킹이 해안 지역을 약탈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내륙지방까지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실과도 비교된다. 해적의 실상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사하였던 것 같다. 무장세력이 득세하던 시절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고, 당연히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홍건적은 단 두 번 침입하였지만, 너무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외교정책도 변화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시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또 있을지도 모르는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왜구 침입은 지속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정부의 대책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수립되어야만 하였다. 고려는 화친과 전쟁 양면 정책을 사용하였다. 회유책으로는 첫째로 왜구의 투화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둘째로 일본 정부와 직접 교섭을 벌여 왜구를 금지시키려고 하였다. 이 방법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1377년(우왕 3)에 일본 구주지방의 실권자에게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는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 이런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을 쌓고 수군을 강화하며 새로운 무기인 화포를 개발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여 왜구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왜구의 퇴치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389년(창왕 1)에는 박위가 100여 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였다. 우왕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많이 줄어 들었다. 적극적인 왜구 토벌이 효과를 거둠에 따라 무장들의 정치적인 지위가 높아졌다. 그 중에서도 최영과 이성계가 중심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격심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들은 고려의 장수들 중 최영과 이성계만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우왕 때의 왜구 토벌에서 명성과 권력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성계는 그의 근거지인 동북면 출신으로 이루어진 사병을 거느렸는데, 이들은 이성계가 출세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고려사) 나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 기록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의 눈부신 무용담을 찾아 볼 수 있더, 최영의 경우 흥산전투가 유명하다.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 길만이 통할 수 잇는 곳을 왜구가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겁나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엇는데, 최영이 61살의 노구를 이끌고 앞장 서서 돌격하니 적이 무너졌다. 이 때 숲속에 숨어 있던 왜구가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히자,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러나 그는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적을 쏘아 쓰러뜨린 다음 화살을 뽑고, 더욱 세차게 싸워서 적을 거의 섬멸시켰다. 이성계의 활약은 그가 조선의 건국자이므로 더욱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그는 싸우기 전에 신기에 가가운 활솜씨를 이용하여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백 수십 걸음 밖에 놓여 있는 투구나 새 등을 목표물로 삼은 뒤, 화살 몇 발을 정해 놓고 ‘이것이 모두 명중하면 이번 전투는 이길 것이다’ 하고는, 모두 쏘아 맞추었다. 그의 활솜씨는 지금의 전북 남원 지역인 황산전투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얼굴까지 갑옷으로 가려서 화살을 맞출만한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활로 투구 꼭지를 쏘아 적중시키자 투구가 떨어졌다. 이 틈에 얼굴을 쏘아 죽이니 적은 기세가 꺾여 도망가고 고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들이 흘린 피로 냇물이 온통 붉어져 6, 7일간이나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를 못하였다 한다. 지금도 남원에는 그 지역의 땅이 붉은 빛이 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최영과 이성계 두 사람은 뛰어난 무장으로서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며 출세할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의 행보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연결된다. 최영은 명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고, 이성계는 그것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푸른 색 식권 세장 대학 시절, 나는 넉넉지 않았던 가정 형편으로 친구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지내야 했다. 친구들의 구박아닌 구박과 눈치를 받으며 어렵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장선배가 내게 다가왔다. 당시 장선배는 학교에서 '살아있는 천사표'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있던 내게 자신의 자취방에서 함게 지내자며 흔쾌히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장선배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동했다. 둘이 누우면 꽉 찼던 장선배의 조그만 자취방에서 나는 이년 동안 선배와 함께 살았다. 학교 수업이 마치면 조무래기 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면서 학비 벌기에 바빴지만 나는 늘 용돈이 부족했다. 내 주머니 속엔 언제나 교통비만 달랑 들어 있었기에 점심을 거르기가 일쑤여거, 나는 아예 점심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몰래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노랫가락 몇 소절 흥얼거리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에 들어갔던 장 선배가 혼자있는 나를 발견하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의실로 갔다. 그날 저녁, 낡아빠진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게 장선배가 누런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 웬 편지예요? 선배님 저에게 연애 편지 심부름시키시는 거예요?" 내가 이상해서 묻자, 선배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궁금해서 얼른 봉투를 열어 본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바로 학교 식당에서 사용하는 푸른색 식권 세장이었다. 유형진 님/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6 모순, 대립, 통일: 헤겔의 변증법 그 때 세계에서는 1809년: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독립운동활발 1811년: 영국, 러다이트운동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 8. 27 슈투트가르트~1831. 11. 14 베를린.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변증법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는 변증법이라는 한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변증은 개념의 분석을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은 대화 또는 토론의 뜻을 더 많이 지니게 된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변증법의 어원은 대화로 되어 있다. 대화 또는 토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갑은 A를 주장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을은 A에 반대되거나 A가 아닌 B를 주장한다. 그래서 A냐 B냐를 두고 토론을 하다가 결국은 A도 B도 아닌 C를 택하게 된다. C는 A와 B를 합친 것이면서도 A와 B를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나타나 C를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것은 D라고 말한다. 그러면 C와 D를 두고 토론하던 두 사람은 C도 D도 아니면서 그것을 합쳐 초월하는 E의 결론을 얻게 된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은 더 높은 차원의 결론으로 유도, 발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대와 대립에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는 대화와 토론의 기능,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모든 저서는 대화법으로 되어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계속되는 대화에서 명백하고 믿을 수 있는 개념을 얻어내는 것을 변증적 사고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변증법을 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킨 것이다. 인식과 역사는 물론 철학적 존재론에까지 확대시켜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변증법의 방법은 논리학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헤겔의 "논리학"을 다른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논리학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헤겔에 있어서는 그것은 논리학이라기보다는 논리학을 포함하는 변증법이며 변증법 자체가 그의 철학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그로부터 어떤 사상이나 예술관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정(Thesis)의 위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게 되었다. 괴테와 셰익스피어 사이에는 서로 어긋나고 반대되는 점이 있었다. 괴테는 어떤 면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반(Anthesis)의 위상에 속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대립시켜보면서 더 높은 제 3의 사상이나 예술관을 갖게 된다. 그것은 정과 반의 합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다. 만일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같은 내용이었다면 즉 반이 없었다면 양적으로 더 많은 지식은 얻을 수 있으나 질적으로 더 높은 것은 탄생되지 못한다. 그 다음에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하자. 그 때는 합의 위치의 지식이 정이 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반의 자리를 차지해 또 하나의 높은 차원의 사상과 예술관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 인식과 지식이 성장, 발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견해를 변증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카톨릭의 위치로 굳어져 왔다. 그 안에 갈등도 생기고 모순도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루터 같은 종교 개혁가가 나타나 반카톨릭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그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카톨릭은 루터를 파문에 처하고 추방해버린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크게 성장해 마침내는 카톨릭과 동등한 세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두 갈래의 대립상대를 만들게 되나, 결국은 그 때문에 기독교는 더 성숙되고 원만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머물러버린다면 카톨릭이라는 어머니는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에서 발전에의 과정을 역사에서는 언제나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 작용을 변증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변증법이 인정받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하게 되는 것은 동질적인 내용은 변증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대되는 내용들은 어느 정도 대립과 변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모순관계는 반드시 변증적 발전을 일으킨다. 그래서 헤겔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순의 논리를 현실화시켜 나간다. 반대개념 사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은 중간 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과 사, 유와 무는 중간이 없는 모순관계이다 모순은 논리에서는 항상 비라는 개념을 동반한다. 유와 비유 같은 헤겔의 애용개념이 여기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헤겔의 변증법을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어도 변증법적 사고는 있을법하고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을 수정, 발달시킨 대표자가 마르크스였고 키에르케고르였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우두머리'는 옛날에는 비칭이 아니라 평칭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두머리'라는 단어가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치 '두목'이란 한자어처럼 '도둑의 괴수'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지요. 그러나 옛날에는 '우두머리'란 단어는 비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칭은 아니었습니다. '우두머리'는 한자어인 '위두'(할 위, 머리두)에 고유어인 '머리'가 합쳐진 합성명사입니다. '위두'는 보통 '위두하다'라는 형용사로 쓰이어서 가장 위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두머리'의 '위'가 단모음화되어 '우'가 됨으로써, 오늘날 '우두머리'가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니체의 운명애 니체는 1844년 10월 5일 독일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4살에 이미 스위스 바젤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10년간을 재직하다가 병고로 사직한 것이 그의 경력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니체가 죽은 1900년을 현대 철학사의 시점으로 잡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현대인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이미 니체에 의해서 모든 검토를 끝낸 것 이라고 말한 독일의 시인 벤에게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니체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철학자였다. 그러나 분명 20세기의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를 가리켜 우리는 생의 철학자 혹은 실존철학의 선구자 라고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이성철학에 대립하여 의지 철학 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되며, 삶 그 자체를 절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하여 그것의 배후에 어떤 원리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해 왔었다. 그가 열세 살 때, 쓴 <자전>에는 이런 것이 언급되고 있다. 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거울. 그속에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첫째의 일. 우리들은 애써 이 일을 하리라. 여기에 그의 모든 관심사와 사상이 이미 요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끔찍한 병고를 치르면서도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필연적인 일을 참고 견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숨겨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자기애와 운명애 를 강조하면서 그는 영겁회귀 라는 사상의 실타래에서 그것을 풀어내고 있다. 인간은 그저 막연히 생사의 세계를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똑같은 모습, 그대로 영원히 몇 번이고 회귀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정신과 육체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제3의 무엇이다. 나는 완전히 온몸 전체로 병을 앓고 있다. 니체는 그의 말대로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10대부터 심한 두통으로 고생을 하였다. 두통과 발작이 되풀이 되었다. 1년에 200일이나 두통으로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었고, 쓰는 일, 읽는 일을 할 수 없어 방에 틀어박혀 고통을 견딜 뿐 이라고 말했다. 그외에 각혈을 동반한 위경련, 편두통, 신열, 식욕부진 등 니체의 몸은 그야말로 고통의 둥지였다. 뇌매독을 앓기 전 열두 살 때부터 두통으로 괴로움을 겪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유전적인 요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정신병(뇌경화증)으로 층계에서 굴러 떨어져 한 1년간을 앓다가 36세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나이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1865년 니체에게 류마티즘과 같은 통증을 동반한 최초의 격한 두통 발작이 일어났다. 그가 취임했던 바젤대학의 한 진료소에서 2도에 해당하는 뇌매독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평소 작은 목사 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엄격했던 니체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 한번의 실수로 해서이다. 니체가 스무살 때 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긴 여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낯선 땅에 도착한 그는 안내인에게 허기를 달랠 레스토랑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니체가 도착한 곳은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아니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곳은 사창가였다. 집안에 들어선 니체를 둘러싼 여인은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여섯명의 여자에 둘러싸여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822년 말, 니체가 발작한 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친구 오하헨스크는 그가 긴 의자의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니체는 큰 소리로 노래하고 날뛰며 춤을 추는 등 소란을 피워댔다. 다른 말은 없이 음울한 어조로 죽은 신의 후계자 가 자신이라고 자기를 지칭하며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두려운 일들을 마구 지껄여댔다. 고 오하헨스크는 회고했다. 1865년 니체는 매독에 감염되어 조기 매독성 골수막염을 앓고 있었다. 강단에 설 기력조차 없어 그는 학교를 사직하고 바닷가로 요양을 떠났다. 도리노 광장에서 니체는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 마흔세 살 때였다. 혼수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져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그 후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신이다. 이렇게 변장하고 온 것이다 라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신은 죽었다 라고 과감히 외치던 니체,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목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정신적 광증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어머니와 누나의 간호를 받으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니체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친구들의 고별사가 몇 마디 있었을 뿐, 목사의 말씀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니체의 유언 때문이다. 그가 미쳐 버린 마흔네 살 무렵, 꺼져가는 촛불이 반짝하듯 자기 도취의 황홀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긴 했으나 가장 체계적이고 니체의 본질을 잘 드러내 보인 것은 역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병고에 시달리며 사람에게 버림받아 그야말로 허무와 고뇌의 심연 속에 있으면서도 생의 비약과 환희,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는 애썼다. 고통을 껴안고 운명을 필연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그는 비로소 초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짜라트스트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대들은 아직 자신을 탐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연히 나<짜라투스트라>를 발견했다. 신도란 언제나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나<짜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그의 실존은 여기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0.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한 까닭 우리는 운동 경기 등에서 너무 강력해서 맞수가 없을 정도의 팀을 흔히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정복할 수 없는 함대라는 뜻이다. 어떤 나라의 왕이나 지도자든지 자기 함대를 그렇게 부르고 싶었겠지만 우리가 무적 함대라 하면 보통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만든 함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무적 함대도 영원한 것은 아니어서 영국에 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중세 말 이후 지방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무너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16세기경에 행정, 사법, 군사면에서 중앙집권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성립했다. 그리고 최초로 이러한 절대주의 국가가 형성된 곳이 스페인이었다. 15세기 후반 통일 왕국을 형성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곳으로보터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으로 인해 번영하고 있었다. 특히 펠리페 2세(재위 1556~98) 때 스페인은 레반토 해정에서 투르크를 격파하여(1571)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후 포르투갈을 합병하여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당시 결혼하지 않고 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에다 엘리자베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정책은 펠리페 2세의 심기를 건드렸다. 특히 스페인과의 경쟁속에서 진행된 해외 진출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해적 드레이크(Francis Drake)로 하여금 스페인 상선대를 습격하도록 했다. 자기 나라 상선대가 큰 피해를 입자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드레이크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여왕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도리어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펠리페 2세에게 이것은 구혼 실패와 함께 엄청난 모욕이었고 양국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드디어 1588년 5월 무적 함대는 영국으로 향했다. 당시 이 무적 함대는 약 130척의 배와, 2,500문의 대포를 가지고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던 함대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모두 합쳐 190척의 배를 모았지만 절반 정도는 소형배여서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소용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영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듯이 보였다. 태풍을 만나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겨우 7월 29일 영국 해협에 그 모습을 들어낸 무적 함대는 영국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프랑스의 찰레 항구로 도망쳤다. 거기서 한숨 돌리려고 했지만 다시 야간 공격을 받고 이리저리 쫓기다가 폭풍우까지 만나 피해는 더욱 커졌다. 9월에 겨우 살아남은 병력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 63척의 배와 익사, 전사 등으로 약 1,800명을 잃었다. 한편 영국측의 손실은 배 한 척, 전사자 약 100명이었다. 그러면 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숙련된 선원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여기에 작지만 기동성이 있었던 배, 그리고 소구경이었지만 사정 거리가 긴 포를 가지고 있던 것 등이 그 이유이다. 영국 함대는 위세만을 믿고 덤벼든 무적 함대에 먼 거리에서 포를 쏘았으며 이에 놀라 후퇴하는 적을 쫓아 야간 공격을 감행할 정도로 기동성과 선원들의 기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스페인은 이후 해상에서의 패권도 상실하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를 네덜란드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12. 못된 쪽으로 극히 뛰어난 미국 중앙정보국 현대의 이름 있는 어느 정치가는 분노한 군중들을 향해 '너희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공포를 떨쳐 버려야 한다'라고 경고한 일이 있다. 군중 의 공포는 저항으로 변하고. 이는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키는 혁명의 가장 좋은 요소가 되는 것이다. 반세기 동안 미국의 중앙정보국과 그 전신인 전략정보국은 줄곧 세계여러 나라 정치세력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중앙정보국은 미제국주의가 군사적 침략과 경제적 약탈 외에도 국제적 음모를 자행할 때 반드시 사용하는 비장의 무기이다. 미국의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전 참의원 맥카시도 인민 민주운동이 발발하자 이들 세력을 용공분자로 몰아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적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국의 정부는 점차적으로 문민화하였고 이에 따라 친미파 인사나 중앙정보국 요원에 대한 처벌은 예전처럼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후로 죄악을 저지른 중앙정보국 요원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중앙정보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침투를 단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다. 레이건시절에는 중국의 개방 이후 최고조에 이르는 대중국 간첩활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중앙정보국이 고용한 동아시아문제 전문가 존 길후리[-중국 이름이 마치 '暖舊胡來(에이,함부로 날뛴다)'와 비슷한 음이다-는 중국에 스파이를 보내거나 중국에서 소수의 불량분자들을 모아 간첩활동을 하게 하는 공작을 벌여 중화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였다. 내전 시기에는 대포, 폭격기, 탱크, 기관총을 보내 우리 세대들을 살해 했으나 오늘날 중앙정보국의 수법은 그때와는 달리 위장술. 전화도청. 야시경, 적외선 신호장치. 해상보트 등둥으로 그 장비가 다양해졌다. 길후리 씨의 묘수로 미국은 중국대륙에 첫 번째로 정보망을 구축하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막강한 국가기관에서도 지금까지 이들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1986년 {뉴욕타임즈}의 베이징주재 수석기자 존 바인즈는 四川)성에서 중국 군부대의 사진을 몰래 찍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우리정부는 바인즈의 불법행위를 엄정하게 다루면서도 최대의 아량과 관용을 베풀었다.다른 나라였다면 관계당국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간첩죄'를적용하여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 버렸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도 난처했을 것이다. 한 달 후 별 볼 일 없는 중앙정보국의 루슨쉬[廬序] 순서에 따라 법망에 걸린다는 뜻이니 참좋은 이름이다-가 중국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12년형을 선고받자 미국무성 대변인이 이 사건과의 관련성을 극구 부인함으로써 그들의 난처함을 드러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는 중앙정보국이 저지르고 있는 악랄한 행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전 어느 세계적 정치지도자는 미국의 중앙정보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은 거대한 정보조직이 아닌 막강한 정치조직이며 미국이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정치적 계략을 수행하는 정치, 경제, 문화, 정탐 기능의 종합체로, 미국의 '지하 국무원'이다.' 미국은 50년대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서베를린의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문화자유연맹'을 탄생시켰다. 이 연맹은 이후 10년 이내에 33개 국가에 지부를 두고 몇십 종류의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영향력 있는 세계적 대형예술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연맹의 입장은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폴란드의 포츠난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노동운동이 동양의 어느 국가에서 발생하면 이 조직은 즉각 반응을 보여 야단법석을 떨며 항의하는 동시에 다른 편에는 성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에게 미국의 중앙정보국이 비밀리에 돈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뉴욕타임즈}가 밝혀 내었다. {뉴욕타임즈}가 그 흑막을 폭로할 때는 마침 미국이 월남전에 발목이 묶여 민심을 잃고 있을 때라 중앙정보국이 곳곳에서 행한 추악한 짓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중앙정보국의 자금지원으로 전세계에서 활동을 하던 문화자유동맹은 이 사건이 폭로된 후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문화자유동맹의 추문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중앙정보국의 침투방식은 극히 뛰어나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성공한 '혁명' 뒤에는 반드시 중앙정보국의 특수공작이 있었다. 중앙정보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세계 곳곳에 깔려 있는 그들의 실체를 숨겨왔다. 무성권총, 도청기, 마이크로필름 같은 것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수법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비정보공작' 즉 사상적 이데올로기의 공격을 우선적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반미국가들이 왜 그 정적을 '미국 중앙정보국 대리인'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80년대 대학캠퍼스에서 중국 학생의 성생활을 지도한다고 날뛰었던 소위 '하느님의 아들' 사건 역시 중앙정보국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런 것까지도 중앙정보국의 공작업무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징소리 나는 곳에는 반드시 있는 놈'이라는 중국의 속담처럼 중앙정보국이 개입하지 않는 일은 없다. 예술활동에 찬조하는 것 역시 중앙정보국이 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포드재단은 예술활동의 지원으로 아주 유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포드재단의 자금은 대부분 이름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후원자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 기실은 거의 모두 중앙정보국에서 제공한 것이고, 둘째 이 재단의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예술가는 주로 미국인으로, 예를 들면 행동파 화가 바로크같은 인물이다. 중앙정보국은 이런 예술가에게 뒷돈을 대주어 미국을 표방하는 공적인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치적인 유명인들을 통해 다른 나라의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속셈인 것이다. 우흥다사건에 직접 개입하고 [마오쩌똥 주치의 회고록]이 출판되도록 획책한 것 등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중국을 비방하려는 행동의 일부이다. 우흥다의 [노동개조 수용소]가 미국에서 출판된 것은 미중앙정보국의 자금원조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재직하던 '노동개조재단'은 바로 미중앙정보국의 비밀조직 중 하나이다. 우씨는 미국의 CBS와 영국의 BBC 양대 방송국을 위해 중국의 감옥과 관련된 악의성 짙은 특별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중국에서의 정탐계획 등은 모두 중앙정보국의 스파이들이 직접 참여하고 수립한 것이었다. 중국에 대해 벌이고 있는 이른바 '인권공격'은 바로 이와 같은 스파이 활동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1994년 미국의 출판사 랜덤 하우스(Random Houe) 와 대만의 쓰빠오{時報) 문화출판기업유한공사(文化出版企業어限公司)는 [마오쩌똥 주치의 회고록]의 영문판과 중문판을 각각 발행하였다. 출판사는 이 책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심지어는 '이전에 없던 가장 귀중한 원시 사료이다'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면 마오쩌똥 개인 전기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사의 관련저자들이 앞으로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등 허위 과장선전을 하였다. 아예 '관련저작들이 앞으로 철저하게 고쳐 써질 것이다'라고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작가 리쯔수이(의 천박한 글이 드러내고 있는 혐오스러운 불성실과 허풍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조차도 없겠으나, 이나마도 리쯔수이의 경력이나 능력으로 보아 절대 독자적으로 이러한 책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숨겨진 몇몇 대필자는 리쯔수이로 위장하여 이 책의 기획과 편집에서부터 상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의 포장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이 책이 마오쩌똥의 독재 아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 백성들과 살아남기 위해 양심과 이상을 희생한 선량한 지식인들의 역사가 되길 만천하에 호소하는 바이다'와 같은 말이다.이에 대해 사정을 잘아는 사람은 그 의식이나 문장 스타일로 보아 절대 리쯔수이가 쓴 것일 수 없으며 장기간 대만의 군에서 대공선전을 맡았던 사람이 대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이런 선전품을 근 10년 동안 물색하였고 그 목표가 황립되자 그들이 임시로 고용한 사람들을 직접 이 작업에 투입시켜 이 책의 저작에서부터 출판. 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할을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중앙정보국은 미국의 국제전략상 가장 첨예하고 위험한 업무를 도맡아 왔으며, 표면적으로는 첩보전의 형식을 띠지 않고 해외로 침투하고자 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독립의 조류를 정신적으로 암살하고 있으며, 미국 이외의 국가가 강성해 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미국 국민과 어떤 교류이든 하고자 할 때는 이미 중앙정보국이 바로 우리 옆에 있게 된 것이고, 우리가 친구에게 미국 제품을 추천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이미 중앙정보국의 요원이 된 것이다. 나는 미국을 향해 소리치고 싶다. '어디 두고 보자! 너희는 함부로 날뛰지 말아라. 앞으로 우리는 너희들의 음해전략에 대해 냉혹한 인민의 법을 집행할 것이다'라고." 손자(孫子)도 '적의 음모를 깨는 것이 상책이고,무력사용은 차선책이다[上튜伐謀,其次伐兵]'라고 말했다.타국의 안전을 말살하기 위해 미국은 한층 더 중앙정보국이라는 '이기'에 의존하고 있다. 칠레의 전 대통령 알랜드를 암살하거나 도미니카 민주정부의 기세를 꺾어놓는 등 중앙정보국은 미국 정부가 공개적인 방법으로는 이룩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 국가가 공리적으로는 승리할 수 없을 때 '무력사용은 차선책'이라는 식의 피비린내 나는 음해전략이 가장 먼저 선택될 것이다. 미국은 공리적으로 나약하면서도 음모를 획책하는 데는 무척 발달하였다. 이는 미국의 국가적 계략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부록:땅리쯔(方勵之)부부의 망명은 미국 중앙정보국의 음모 - 요스키 나가이(일본) 미국 외교가 표방하고 있는 것은 정의 편에 서서 칼을 뽑아 도와준다는 것이나 그 배후에는 항상 억지와 이기적인 전략방침이 숨어 있다. 1989년 6월 天安門)사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꽝리쯔 부부의 망명사건도 결국 미국 정부의 음모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중국 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이었고 ' 중국의 사하로프'로 불리는 천체물리학자 광리쯔와 그 부인인 베이징 시 인민대표 리쑤센(李淑)은 천안문사태가 발생한 다음날인 1989년 6월 5일 주중 미국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였고 1년 후인 1990년 6월 23일 미 . 중 양국의 외교교섭을거쳐 잠시 영국으로 갔었다. 짱리쯔는 1986년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선이래로 민주인사들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 동안의 경과를 살펴보면, 천안문사태 이후 이들 부부가 중국의 민주화에 절망하고 자신들의 신변안전에 위협을 느껴 미국대사관으로 도망간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땅리쯔가 취한 시기적절한 행동을 보고 미국 중앙정보국이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고 1989년 2월 26일 발생한 한 사건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날 중국을 방문한 부시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만찬회를 주최하였다. 초청된 인물은 주로 중국 정부의 고위지도자들이었고 주빈은 국가주석 양쌍쿤(楊尙昆)이었다. 펑리쯔 부부도 이 만찬에 초대를 받았으나 중국 정부의 제지로 만찬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 전 외교부장이며 부총리인 우쉬에첸(릇學謙)은 후일 중국을 방문한 어느 일본 요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래 우리는 평화공존의 원칙에 따라 대미관계를 개선하려 하고 있지만 미국의 이런 적나라한 노골적 내정간섭 행위는 절대 묵인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유독 꽝리쯔 부부의 초대장만은 중국측에 전해 주지 않고 본인에게 직접 전달했습니다. 주빈이 환영하지 않을 인물을 몰래 초대하는 것은 매우 실례가 되는 행위입니다, 친구에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중국 정부를 극구 반대하고 있는 광리쯔를 한 마디의 사전 언질도 없이 국가의 외교적 연회의 중요한 자리에 앉게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실례가 아닐 수 없으며, 이 일 자체가 이미 내정간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정부로서도 광리쯔와 중국 정부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리 만무하므로, 잠시 소홀하여 이런 중요한 외교적 행사에 실수를 범했을 리는 절대 없는 것이다. 이는 분명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의로 조작한 행동인 것이다. 천안문사태 이후 펑리쯔 부부가 미리 계엄을 감지하고 미국대사관으로 도망간 것 역시 시간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 다른 민주운동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되는 마당에 그만 재빠르게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가 보호를 요청한 것이다. 이 사실은 미국이 짱리쯔 부부를 사전에 인도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광리쯔사건은 후일 미국의 인권외교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연출한 조작극이라고 의심하는 시각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인권존중을 최우선으로 하는 부시 대통령의 미국이 인권을 무시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학자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중국을 그냥 둘리 없으므로, 이는 펑리쯔 부부를 받아들이고 경제적 제재를 가해 민주화를 강요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벌인 조작극이 아니겠는가? 이런 추측은 절대 허구이거나 망상일 수 없다. 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된 일련의 활동과 후일 미국 정부가 보여준 태도를 보면 자연히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펑리쯔 부부가 출국할 수 있도록 묵인한 중국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부시에게 어느 정도의 명분을 주고 장차 이에 대한 보상을 받을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는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외교라는 것이다.만약 일본이 표면에 드러난 현상만을 좇아 유유자적하다가는 일본의 장래도 그리 밝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에 옐친과 같은 인물이 나타날 수 있을지. 또 땅리쯔 부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앞으로의 문제인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우물과의 대화 물동이 하나가 우물에 가서 물을 가득 채운 뒤 우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길으러 오는 일이 미안해서 은근히 물동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가져가지만 했을 뿐, 내가 당신에게 해 드린 것은 아무도 없군요. 내일부터는 매일 오지 않고 하루씩 걸러서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주저하지 마시고 찾아오세요. 나는 당신이 내게 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나는 늘 당신 것을 가져가기만 할뿐인 걸요. 다음부터는 나를 반쯤만 채워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나를 찾아 주시는 것이 곧 당신이 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자주 물길으러 오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하하,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게 오는 수많은 물동이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정말 마음이 좋고 관대하시군요. 당신은 당신을 찾는 다른 모든 물동이들에게도 이렇게 내게 대하듯이 하시나요?"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합니다. 차별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마를 때도 그렇게 하나요." "나는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항상 차고 넘치고 있어서 내게 오는 모든 물동이들을 늘 찰랑찰랑 채워 줍니다." "하긴 그렇군요. 아직 당신이 마른 걸 본 적이 없군요." "나는 나를 찾는 물동이들을 참으로 사랑한답니다. 내가 만일 물동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마르지 않는 건 바로 물동이 당신들 때문입니다." 그때 머리에 또아리를 얹은 아주머니 한 분이 머리 위에 물동이를 얹었다. 물동이는 급히 우물에게 눈인사를 하고 우물가를 떠났다. 우물은 멀리 굽은 논두렁길을 가는 물동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물 속에 달빛이 비칠 때까지. 글터 → 이글저글 전자오븐은 어떻게 음식을 데울까? 전자파(마이크로 웨이브)는 음식 속에 있는 물입자를 1초에 2,500,000,000번 진동시켜 그 에너지로 음식을 데운다. 따라서 물기가 없는 음식은 결코 데워지지 않는다. 물기없는 그릇이 뜨거워지는 것은 물기가 있는 음식이 뜨거워져서 그 열이 그릇에 전달되기때문이다.무지개의 끝, 왜 우리는 무지개의 끝을 볼 수 없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무지개의 끝이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무지개의 빛이 완전히 원형을 이루며 굽어지게 되어 있지만, 우리가 그 원형을 다 볼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시야가 수평선에 의해 꺾이기 때문이다.레이저 광선은 1950년에 발명되었는데 인간이 발견한 에너지 중 가장 강한 것이다. 레이저 광선을 만들어 내려면 냉장해 두었던 루비 크리스탈에 빛을 쬐인다. 이 빛이 루비의 어떤 원자를 자극하면 이 원자가 아주 강력한 붉은 빛을 방사한다. 이 빛은 하도 강하여 5,000분의 1초 만에 다이아몬드에 구멍을 낼 수 있고 태양빛보다 1평방인차당 2,000배가 넘는 에너지를 낼 수 있다.1981년 겐지 우리라 라는 사람은 로봇이 치는 망치에 맞아서 죽었는데, 로봇에게 죽은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