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2.04 09:34 【독서편지】: 제 75 호 風磬 조회 수 10,733 추천 수 18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5 호4339.12.04 (10.14)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꿈을 현실로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 / J.M.P.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현해탄에 던져진 '사의 찬미' -윤심덕 1897년 평양의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난 윤심덕은 역시 같은 해 태어난 전라도 장성 군수의 목포 감리를 지낸 전라도 갑부 김성규의 아들 김우진과 운명적인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윤심덕의 가문은 개화기의 평양 선각자들이 그렇듯 기독교를 신봉하는 집안이었다. 평양 남산현 교회 윤효병 권사를 아버지로, 전도 부인을 어머니로 하고 태어난 윤심덕은 위로 언니가 되는 심성이 있었고, 아래로 성덕과 기성 두 동생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전을 나온 성덕을 음악적인 재질 면에서 심덕과 비슷한 소양을 갖춘 형제였다. 심덕이 숭의 여학교에 다닐 땐 남달리 큰 키와 어여쁜 용모로 장난기 있는 남학생들의 유혹이 많았다. 위로 언니 하나는 멀리 안동으로 출가하여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부모들은 늙었고, 동생들은 어려서 그녀는 늙은 부모 대신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할 몸이었다. 첫 취직은 강원도 원주 공립 보통 학교 교사 자리였으나 그것은 잠시, 그녀는 얼마 뒤 조선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에 가서 동경 우에노 음악 학교 사범과에 유학, 숙원이던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우에노 음악 학겨 졸업 기념 공연은 윤심덕의 음악적인 재질을 크게 펼쳐 보였던 첫 무대였다. 이 공연을 본 제국 극장 경영주는 매달 150원의 출연료로 전속 계약을 맺자고 나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동경에서 사귄 애인 김우진을 따라 서울로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우진. 그는 일본 구마모토 현립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연극 학도이며, 유학생들의 연극 단체인 동우회를 조직하여 구갠 순회 공연에 힘쓰던 이물. 말하자면 신극 운동을 전개하던 촉망받던 극작가였다. 일본 동경에서 만난 윤심덕과 김우진의 관계는, 처음에 유망한 신진 여류 성악가와 젊고 유능한 극작가의 결합이라는 데에서 유학생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지탄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김우진이 이미 고향에 처자를 둔 기혼자라는 데에 있었다. 처자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윤심덕은 몸이 달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의 부나비가 되어 자기 몸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김우진을 그의 처자로부터 빼앗아 와야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둘러 귀국하고 만 것이다.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윤심덕은 의무적으로 학교에 근무해야 했다. 경성 사범 학교 음악 교사가 윤심덕의 두 번째 직장이 되었다. 그녀의 귀국은 기실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윤심덕은 목포 고향집에 내려가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워 보내면서 김우진과의 사랑의 이력을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지난번 목포 오빠하구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을 땐 참으로 꿈만 같았어......" 동경에서 유학중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는 회관건립 기금 모금을 위하여 하기 순회 연극단을 조직한 일이 있었다. 순회 공연을 통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연극 운동을 실천에 옮겨 보는 것과 아울러 고학생 구제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려 했었다. 공연 프로는 다채로웠다. 연극 이외에 음악도 곁들여졌다. 홍난파, 윤심덕, 한기주등의 독주와 독창이 있었고, 1920년 봄 동경 유학생들의 조직인 '극예술 협회' 맴버 외에 송경 학우회의 마해송과 그 밖의 몇 사람을 더 참가시켰는데, 전용이 쟁쟁했다. 그 때에 연출을 맡은 이가 김우진이었다. 김우진. '목포 오빠'로 통하던 김우진과 윤심덕은 동갑이어서 그랬는지 쉽게 밀착되었다. 그것은 몹시 수줍고 말이 없는 김우진과 쾌활하고 적극적인 윤심덕의 성격 차이에도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1921년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동우회 간부 임세희의 인솔로 일행 22명은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일행은 순연한 영업적 배우가 아니라 예술에 살고자 하는 신청년의 단체이므로 일행의 차림은 물론 화려치 아니하였다. 어디까지나 씩씩한 학교 정복을 입은 일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각한 인상을 받게 하였으며....... 1921 .07 .27. <동아일보> 부산서부터 제 1막을 공개하여 이르는 곳마다 끓는 듯한 대환영을 받고.... 1921 . 9. 30. <동아일보> 환영을 받고 지방 공연을 하면서 '목포 오빠'로 부르던 김우진과의 사랑을 점점 무르익어 갔다. 처음부터 시인이 되려고 습작에 열중했던 김우진은 그만큼 다감한 젊은이었다. 우리말과 일문으로 된 시 40여 편과 희곡 작품으로 희극 "정오", "산돼지". "이영녀" 등을 썼던 김우진은 '극예술 협회'와 '동우회' 순회 연극단의 지도자였다. 이러한 지도자를 애인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윤심덕으로서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애초에는 김우진이 이끌던 '동우회' 순회 공연에서 소프라노 가수로 찬조 출연했던 윤심덕이었으나 유교적 가정에서 조혼의 괴로움을 맛보며 살고 있던 김우진과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급기야 두 사람은 헤어날 수 없는 사랑의 가시 울타리로 얽혀 버리고 만 셈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국민 학교 교사 생활을 하고 있던 윤심덕이 목포 집에 묵고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웠으나, 그 정열적인 윤심덕의 편지는 번번이 중간에서 없어져 버린 채, 김우진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무렵 윤심덕은 평양집을 처분하여 서울 서대문정 1정목 73번지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서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언니와 동생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윤심덕은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보다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가정의 가장이어야 했고, 돈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음악회다, 레코드 취입이다, 방송 출연이다 하고 바삐 나돌았으나 그야말로 그깟 돈은 '새발의 피'였다. 사랑하는 김우진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끊어진 채 소식이 없었다. 돈이 필요한 윤심덕은 짜증이 났다. 미모의 여가수에게 중매가 없을 수 없었다. 함경도 출신의 김홍기가 접근해 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그를 마다하고 돈이 있는 이용문과 가까워졌다. "돈이 있으면 이태리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겠지......." 그리고 동생들도 외국 유학을 보내야 한다. 돈, 돈. 동대문 갑부 이용문은 그녀의 그 같은 꿈을 실현시켜 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600원이라는 거금이 이용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소문은 윤심덕의 인기만큼 멀리 퍼져 나갔다. 윤심덕에게 이용문 외에 흥이다, 우다, 송이다, 하는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비난이 빗발쳤다. 일본 대학 문과 3학년에 재학중인 박점식이란 젊은이는 윤심덕을 짝사랑한 끝에 정신 이상이 되었다던가......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은 이제 그녀 뒤통수를 따라 다니는 악담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윤심덕은 교육계의 비난과 악단의 잡음을 피해 북만주 지방 선교사 배형식 목사의 도움을 받아 하얼빈으로 몸을 숨겼다. 목포 집에 눌러 있던 김우진이 윤심덕의 행방을 찾아나선 것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윤심덕이 하얼빈을 떠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하얼빈으로 찾아온 김우진은 그만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서울로 내려온 윤심덕의 뒤를 따라 김우진은 급히 서울로 달려왔다. 두 사람의 오랜만의 해후는 그들을 또다시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고 만다. 두 사람의 초동에 있는 어느 여관에 묵으면서 예술과 사랑의 재기를 꿈꾼다. 그것이 바로 '토월회' 가입이었다. 김우진의 권고로 토월회의 박승희에게 가입 편지를 띄우자 토월회에서는 즉각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토월회의 특별 대공연..... 작년 겨울에 지방 순회를 마치고 그후 휴연중에 있는 토월회에서는 금 6일 밤부터 황금정 광무대에서 대공연을 할 터이라는데 이번에는 특히 조선 악단에서 자못 그 명성이 높은 성악가 윤심덕 양이 새로이 가입해 가지고 밤마다 포부를 다해 출연할 터이라 하며 금번 예제는 미국 <띄 떠불유 코리스티>과 <노코 나온 모자> 1막과 <밤손님> 1막을 상연할 터이라는데 전보다도 모든 설비를 새로이 하였으며, 배우들의 기술도 더욱 연마되었으므로 매우 재미있으리라더라. --1926. 2. 6. <동아일보> 그러나 윤심덕의 토월회 무대는 연극적으로 실패였다. "동도"와 "카르멘"의 여주인공이 되어 노래를 불렀다는 게 그녀의 인기를 얼마만큼 유지시켜 준 셈이었다. 윤심덕은 '토월회'에서 다시 '백조회'로 얾겼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뒤이어 단성사 맞은편 수은동 60번지로 보금자리를 옮겼으나 초라한 두 사람의 살림은 찌들 대로 찌들어 급기야 일본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는 말이 적고 냉혈한이라 할만큼 이성적이요 감정을 억제하고 표시하지 않던 김우진은 이때부터 죽음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본의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윤심덕이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을 때 피아노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기로 하였다. 성덕은 언니 노래가 취입되면 곧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사의 찬미 독창: 윤심덕 반주: 유성덕 1.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후렴) 눈물로 되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2. 우는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갈 위에 춤추는 자로다 ........ 오사카 오카하루 여관에 집을 푼 윤심덕과 성덕 자매는 닛토 레코드 회사 다우치와 교섭 끝에 10여 곡의 취입을 끝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윤심덕 자매는 그 길로 요코하마에 가서 이별을 가졌다.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성덕은 윤심덕이 1921년 귀국했을 때 이화여전을 나왔고, 뒷날 이전 끌리 클럽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 곁으로 달려갔다. 죽음. 그들의 만남에서 죽음은 비롯되었고, 사랑의 밀어에서 죽음은 구체화되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의 영원함이란 곧 죽음 그 자체였으므로 죽음을 피한 사랑이 영원이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길. 아, 그 길인가. 그 길이란 곧 신파조의 연극 대사만은 아니었다. 아니, 죽음 이전에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밀월 여행이었다.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레코드 취입료는 말하자면 죽음행 열차와 배표를 사는 요금이 되었다. "목포 오빠..... 도쿄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안선을 따라가며 해수욕도 하고 온천도 즐겨요. 이 돈이 바닥날 때까지........" 윤심덕이 속삭이면, "조선으로 가는 배표는 사야잖아?" 하고 김우진은 부산행 배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배표! 그건 배표가 아니에요." "배표가 아니라고?" "우리가 저 세상으로 떠나는 데 필요하 여행비예요." "여행비......" 그들은 30세의 젊음을 즐기고, 뉘우치고, 방황하면서, 시모노세키에 닿았다. 1926년 9월 3일. 부산으로 떠나는 연락선 도쿠슈마루 선객 명부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2목정 173번지 윤수선. 배가 떠나는 시각은 11시. "생각나?..... 서울 수은동 60번지 오전 사진관 뒷방에서 밥을 사먹던 일......." 김우진이 갑판 위에서 어둠 속의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진관 뒷방에서 그들은 윤심덕의 라디오 출연료와 노래 부른 사례비로 겨우 살았다. 8월 4일 새벽 4시. 죽음은 무릎 아래에까지 밀려와 있었다. 목포 갑부의 아들 김우진은 사진관 뒷방을 얻어 가지고 윤심덕이 벌어 온 돈으로 밥을 사먹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세상에도 그렇게 초라한 사진관 뒷방이 있을지 몰라. 우리 그런 방을 세 얻어서 한 천 년쯤 살아 보자." 어느새 한몸이 된 두 남녀는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다. 새롭게 열리는 두 사람만의 세계,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몸을 날렸다. "풍덩!" 하고 현해탄 검은 바다가 두 사람을 안아 들였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긴 돈은 총액 145원이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나이 30세. 두 사람의 정사는 신극사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보다 더 큰 메아리로 1920년 후반을 휩쓸어 갔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까닭 - 홍영의(국민대 박물관 학예원) 신돈(? - 1371)은 1365(공민왕 14)부터 1371년까지 6년동안 공민왕의 명에 따라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낱 승려 출신으로 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정권을 장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이 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미천한’, ‘글도 모르는’, ‘대역을 저지른 사람’이라느니, ‘요사한 승려’ 라는등 부적적으로 묘사된 인물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 편찬된 <고려사>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통념이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역사 소설에서 그러한 모습을 가장 많이 드러내고 있다. 신돈이 집권한 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권문세족을 억누르며, 일반민을 위해서 개혁을 추진한 그는 당시에 ‘성인’ 이라고도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거나 실각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가 유독 이렇게 용서받지 못할 인간으로 역사책에 기록된 까닭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신돈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개혁이 무엇이며, 개혁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개혁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법명보다 속명으로 더 알려진 신돈 신돈의 출생에 관한 것으로는 아래의 <고려사>기록이 유일하다. 신돈은 영산사람이고 어머니는 계성현에 있는 옥천사의 여자종이었다. 어려서 중이 되었으며 법명을 편조라 하고 자를 요공이라 했다. 어머니가 천하였기 때문에 같은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산방에 거처하였다. 어머니가 절의 종이라서 천한 신분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지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신돈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려고 의도한 <고려사>편찬자가 아버지의 추한 면을 들추어내지 못하자 어머니 쪽만 강조한 것 같다. 아버지의 묘가 창녕에 있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아버지 계통은 명백하였던 것 같다. 고려에서는 1135년(인종 13)이래 노비는 중이 되지 못한다는 금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으므로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고도 생각된다. 물론 부모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신분이 천하면 자식은 천인이 된다는 규정에 따른다면 신돈은 어머니가 종이기 때문에 당연히 천인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가 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쪽 가문이 영산에서 유력하거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신돈의 학식은 어땠을까? 신돈전에는 ‘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의 무식을 혹평했지만,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승려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지배사상인 유학적 소양이 원숙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총명하고 자혜스러웠으며,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했고 스스로 도통했다고 하였다’라는 표현이나, 국사를 기록하는 사관에게 ‘국사를 망령스럽게 쓰지 말라. 내가 장차 살펴보리라’라고 한 말과 그 밖의 행적을 살펴볼 때, 신돈은 학문적인 소양뿐 아니라 국정에 대한식견도 있었다고 짐작된다. 신돈은 어떤 성향의 승려였을까? 그는 1359년(공민왕 8) 무렵 김원명의 천거로 중앙에 등장하였다. 왕의 신임을 받아 집권한 신돈은 선종 계통의 왕사인 보우를 축출하고, 화엄종 계열의 천희를 국사로, 선현을 왕사로 추천하여 책봉받게 하였다. 또한 그의 법명인 편조는 ‘광명편조’를 줄인 말로 ‘무한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이다. 이는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산스크리트어의 ‘비로카나(Vairocana)’를 의역한 것인데 부처의 몸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종에서 주존불로 모시는 부처였다. 그리고 신돈은 당시 ‘문수의 후신’으로 칭송받고, 화엄법회인 문수회를 8회에 걸쳐 개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가 선종과는 대립하고 화엄종파와 밀접한 승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사람, 신돈을 앞장 세우다 고려의 왕위 계승자를 원나라가 결정하던 당시에 공민왕은 왕위 계승에서 두 번이나 밀려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 즉위한 뒤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격적으로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근 100년동안 고려에 영향을 끼쳐 온 원나라의 영향이나 부원배를 한 번의 개혁으로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었다. 공민왕 10년에는 15만 명이나 되는 홍건적이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국왕도 안동까지 피난을 떠나야만 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국왕의 권위는 실추된 데다 홍건적을 물리친 뒤 측근세력들의 정권 쟁탈 와중에서 주요한 측근세력이 모두 제거되어 버렸다. 바깥으로는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워서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도전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과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무장들의 입지가 강해졌고 측근세력들을 상실한 공민왕의 정국 주도력은 크게 약해졌다. 당시 조정의 관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대로 고위직을 지낸 세신대족, 처음 정계에 진출한 초야신진 그리고 유생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런데 세신대족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 주고, 초야신진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가 지위가 높아지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로 이름있는 집안과 혼인하여 처음의 뜻을 다 버리며,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 좌주, 동년이라 칭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을 따른다고 할 정도로 서로가 얽혀 있었다. 공민왕은 이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돈이 등용된 것이다.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그에게 일반 정치에 관해서 거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신돈은 지방의 이름없는 승려 출신이어서 기성 정치세력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돈자신이나 일가붙이가 토지와 종을 수도 없이 거느린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개혁을 주저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고려 사회를 전반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공민왕에게는 이렇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신돈이야말로 자신의 정치를 일선에서 대신해 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돈은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최영을 비롯한 무장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기성 정치세력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인사 개편을 대대적으로 착수하였다. 개혁의 물밑에서 움튼 신진사대부 기존 체제에서 한 발 떨어진 신돈이 집권했다고 해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 방향에 동의하고 그것을 밀어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였다. 예나 이제나 앞서서 나가는 한 명의 선구자가 사회의 개혁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수백 년 고려왕조에서 지배세력으로서 부와 지위를 자손 대대로 물려가며 누려 온 자들이 정권에서 밀려난 다음 ‘이것이 대세려니...’하고 가만히 있는 법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축출된 자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무장인들인 다음에야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신돈을 모함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때로는 직접 제거하려고 모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추진세력의 형성은 더욱 절실하였다. 기성 정치세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다른 정치세력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기성 정치세력과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도 다르고 그래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할 수 있는 젊은 유학자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들 중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정도전 등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들은 신돈 정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하여 차차 성장해 갔다. 이들이 일부는 고려의 충신으로, 일부는 조선의 공신으로 정치적 갈 길이 갈라지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신돈 개혁의 본질은 ‘삶의 질 향상’ 신돈은 집권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잡기 위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것이었다. 권세가들은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거기에다가 사람을 끌어 모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힘없는 평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기도 했다. 토지를 경작할 인력을 끌어 모을 때에는 일반 평민들까지 강제로 노비로 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하게 되는가 하면, 국가는 세금을 거둘 토지와 농민이 줄어들어 재정이 고갈되었다. 권세가 개개인은 부한 반면 국가는 점점 가난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왕권을 행사하기도 어려웠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빼앗긴 토지를 되돌려 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본래대로 국가의 공민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개혁은 신돈이 집권하기 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권세가들의 계급적 이해와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모순의 주체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돈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은 기존의 권세가를 배제하고 추진하였으므로 철저하게 시행될 수 있었고, 그 성과도 그전과는 크게 달랐다.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고려사> 편찬자들조차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이 명령이 발표되자 권세가들이 많이 빼앗은 땅과 백성들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므로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 신돈이 겉으로는 공평한척 꾸미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사고자 무릇 천한 사람들이 양인되기를 호소하면 한결같이 양인으로 해주었다. 그러자 노비로서 주인을 배신한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성인이 나왔다”고 하였다. 신돈은 이와 같은 개혁을 뒷받침해 줄 정치제도를 개편했다. 지방으로 물러난 전직 관리들이 백성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책을 마련했고, 권세가의 자제가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것을 막고 관리들이 자격에 따라 차례대로 승진하게 하는 제도를 정했다. 또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을 다시 세우고 과거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러한 개혁적인 분위기에서 신진사대부들은 그전처럼 관료로서 성공하여 새로운 권세가가 되려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점차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돈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공민왕은 어째서 신돈과 같은 전혀 새로운 인물에게 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을까? 공민왕 자신의 정치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상황하에서 개혁의 일선에 나선다면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완강한 신하와 대립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일까. 공민왕은 자신의 왕권의 확보와 지배체재의 재정비를 위해 대내적인 재정비를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치일선에 나서서 수많은 반대세력과 싸우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때문에 실패하면 소생하기 어려운 개혁이라는 멍에를 신돈에게 들씌웠던 것이 아니였나 싶다. 만일 신돈의 개혁이 지속되었더라면 고려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돈의 등용과 그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공민왕이 의도한 것이었으므로, 정치적인 면에서 공민왕의 신돈을 통한 정치운영은 측근정치의 한 변형이라는 면과 국왕에 의한 개혁 추진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 개혁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친 당시로서는 포괄적인 조처들이었다. 그 중 신돈의 대표적인 개혁은 ‘전민변정사업’이었는데,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변정사업이 급진적이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신돈의 판결이 일반민의 입장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에 토지나 일반민을 불법적으로 소유한 권문세족들의 불만과 원성이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개혁이 점차 가속화되어 감에 따라 권문세족들은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고, 그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는 몰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결제기반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한 그들은 신돈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국왕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은 유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도 신돈이 정치를 주관하는 현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적인 갈등은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할 정도에까지 이르렀고, 그것이 드러나게 된 계기는 신돈이 집권하는 동안 계속된 자연재해였다. 하늘의 뜻이 인간 세상에 반영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자연재해란 위정자의 실정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신돈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이 때 중국을 통일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명나라도 공민왕이 직접 정치에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개혁의 일정부분이 성공하고 자신의 왕권강화를 어느 정도 이룬 공민왕은 더 이상의 대행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권에 버금가는 신돈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현실적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신돈을 등용할 당시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손수 글을 써서 맹세까지 하였던 공민왕. 이제 공민왕은 자신에게 미칠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신돈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돈은 왕이 자기를 꺼릴까 두려워하여 반역을 꾀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인이라는 사람이 신돈의 반역을 고발하였는데, 이 고발을 계기로 공민왕은 신돈뿐 아니라 그의 무리로 지목된 자들까지 처형하였다. 신돈은 이틀간 감금되었다가 수원에 유배되었다. 다시 그 이틀 후 살해되었다. 두 살난 아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처와 첩은 몰수되어 나라의 종이 되었다. 신돈이 처형되고 나서 정치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에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던 개혁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 몇 년 뒤 공민왕도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서는 그 전의 권세가들이 다시 정치 일선에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돈 개혁의 역사적 경험 고려 후기 14세기의 개혁정치는 12, 13세기 이후 농민항쟁에서 드러난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몽고와의 전쟁 이후 드러난 민족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개혁으로 민족모순은 해결되었지만, 신돈의 개혁에서도 사회경제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였다. 물론 당시로서는 그 어떤 개혁보다도 일반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신돈의 개혁은 그 모순에 대한 지배층의 일시적인 대응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변질된 것이었다. 특히 신돈 개혁의 실패와 그의 죽음은 개혁을 추진하거나 실무를 맡았던 인물들이 개혁의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아무리 신돈이 토지나 노비를 축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일반민의 기대가 있더라도 개혁의 호응도 역시 그만큼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개혁을 추진할 만한 신돈의 정치세력이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승려 출신이라는 신분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성리학적 유교정치이념이 팽배한 당시 상황하에서 정치적 경륜과 유학적 학문소양의 부족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신돈의 개혁 성향이나 당시 정치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 개혁의 의의는 비록 그의 죽음으로 개혁이 실패하였다고 하더라도 권세가를 억누르며 일반민의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민왕의 왕권강화를 뒷받침해 주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신진사대부가 그의 개혁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현 사회의 틀도 이와 유사하다. 지배층 일부는 여전희 개혁을 표방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혀 개혁을 표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사회를 개혁한다고 할 때 누구와 손잡고 무엇을 개혁하려는 것일까? 개혁의 한계점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그 의미는 무엇일까? 말없는 대중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 주는 그 개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신돈을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역사가들이 그렇게도 목청 돋우어 ‘패륜아’로 낙인 찍었던 신돈을.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가슴속에 숨겨 둔 이야기 초등학교 삼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된다. 동네 골목에서 나랑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들 몇 명과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말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네가 잘못했다고 티격태격 다투다가 너무 화가 난 나는 단짝 친구에게 아주 못된 말을 뱉어 버렸다. "넌 참 좋겠다. 엄마가 둘이니까!" 그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고, 친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친구 아버지는 본처와 첩을 같은 동네에 두고 살았는데, 친구는 첩을 작은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때 그 친구의 친엄마가 지나가다 우리를 보고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왜 그러니? 못나게 길바닥에 앉아 울고." 난 큰일났다 싶어서 잔뜩 긴장한 채 그 친구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줄행랑을 칠 준비를 했다. "엄마, 고무줄하다 넘어졌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순간, 너무나 착한 내 친구의 대답에 난 어쩔 줄 모랐다. 그 친구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만 그쳤을 뿐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하는 친구에게 그때 그 사건에 대해선 용서를 빌지 못했다. 핑계같지만 괜히 얘기를 꺼내면 친구의 마음을 또 한번 다치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엔 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들어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권은숙 님/대구시 서구 비산2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5 - '역사는 자유의 전개과정이다': 헤겔의 역사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 대륙봉쇄형 공포 1808년: 유럽, 반도전쟁(포르투갈에서 영국군과 나폴레옹과의 싸움. ~1814)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 8. 27 슈투트가르트~1831. 11. 14 베를린. 예나 대학을 떠난 헤겔은 신문편집도 하고 고등학교 책임도 맡아보는 몇 해 동안 쉬지 않고 학문을 연마해나갔다. 그 덕택으로 "정신현상학"이 인정을 받게도 되고 다시 대학강단에 서게 된다. 독일인들은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고, 그 어려운 것을 알아야 철학자다운 자부심을 갖는지 모른다. 어쨌든 헤겔의 철학은 난해한 철학으로 유명했다. 계속해서 저서가 나올수록 그 난해의 도는 심해져가는 경향이었다. 그의 "철학백과전서"는 헤겔의 철학 전체를 체계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취급되지 않은 학문과 세계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큰)논리학"이라는 책이 있다. 그 큰 책은 누구도 전체를 기억할 수는 없을 정도로 어려우면서 체계적인 것이다. 그 책이 너무 크고 어렵기 때문에 "철학백과 전서"의 처음 3분의 1에 해당하는 논리학을 따로 떼내어 "작은 논리학"이라고 구분할 정도이다. 그 뒤에도 "법철학"이 출간된다. 그 책은 요새 우리들이 얘기하는 사회철학이 포함되어 있다. 헤겔이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책이다. 말년에 헤겔은 다시 강의록으로 된 "예술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을 내놓는다. 예술과 종교문제는 누구나 취급하고 있으나, "역사철학"은 헤겔의 특수한 과제라고 보아 좋을 만한 책이다. 사람들은 옛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저술한 이후 처음 나온 역사철학이라고 평하고 있다. 사실 역사를 독립된 철학의 주제로 취급한 철학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 이후부터는 수많은 역사철학이 나오기 시작했다. 헤겔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청을 받을 때 이야기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는 헤겔의 초청 여부를 놓고 교수들의 의견이 쉬 결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헤겔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고 그 보고에 따라 초빙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그 보고서에는 '대단히 난해하기는 하나 대가다운 장래성이 엿보이기 때문에 초청해보자'는 의견이 들어 있었다. 어떤 때는 헤겔이 강의를 끝내고 교수실로 돌아오면 학생들이 남아서 우리 교수님의 철학이 어떤 것이냐고 서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헤겔의 조교를 맡아보던 헤닝을 시켜 직접 가서 물어보게 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헤닝이 가서 선생님의 철학은 이런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헤겔은 '그것이 아니네, 내 철학은 나밖에 아는 이가 없다.' 라고 씁쓸해했다는 이야기다.어려울수록 매력을 느끼며 모르는 면이 있기 때문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이 헤겔의 철학일지도 모른다. 후에 헤겔은 베를린 대학으로 초청을 받는다. 베를린 대학은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독일 대표하는 관립대학으로 명색을 갖춘 곳이었다. 그때부터 헤겔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철학은 독일에서, 독일철학은 베를린대학이, 베를린대학철학의 주인은 헤겔로'라고 전해질 정도로 헤겔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높아져갔다. 한때 헤겔은 국립대학의 어용교수라고 불릴 정도로 친정부적이기도 했고, 그의 철학적 성향이 그런 방향을 택하기도 했다. 어쨌든 헤겔은 철학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의 철학체계가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헤겔은 취급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으며, 그 많은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취급했으니, 누구도 그 뒤를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러나 그보다 더 난해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의 철학적 방법인 변증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변증법은 철학의 마법사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변증법으로 모든 문제를 조작해내며 해결짓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프랑스나 영국 철학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변증법은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헤겔의 후계자들이 그의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가 그 대표자 중의 하나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읽으면 변증법은 헤겔식이 아닐때 대단히 중요한 면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을 정신에서 물질로 바꾸어 철학과 사상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마르크스와 그 후계자들이다. 심지어는 모택동이나 김일성까지도 모순과 혁명을 연결짓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밖에 있었던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 밖에 있었던 변증법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통해 다시 세계무대에 등단했을 정도이다. 그러면 그 변증법은 어떤 방법론인가? 누구도 그 완결된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모두가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 가지 가능한 것은 헤겔을 비롯한 변증론자들이 이런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윤곽적인 설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한 살'의 '살'과 '설날'의 '설'은 어떤 관계일까요? 우리 나라에서는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된 아기가 나이로는 '두 살'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해가 지나면 자연히 한 '살'을 먹게 되니까요. 음력 섣달 그믐날에 태어난 아기가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설날'만 되면 비록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된 아기지만 금방 두 살이나 됩니다. 서양에서는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두 살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분도 많지만, 그 생각은 서양식 교육의 영향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나이 계산 방법에 의하면 그 아기는 분명히 두 살입니다. 왜냐구요? 우리 나라에서는 태어나면 곧 한 살이 되고, 다시 한 '설'을 지나면 한 '살'을 더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해서, 태어나자 마자 한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한 살씩 더 먹는 날을, 서양처럼 각자 생일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정하지 않고 모두 '설날'로 정한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서양사람들의 사고에 비해 얼마나 인간적이고 합리적인가요? 그래서 한 '살'을 더 먹기 위해서는 한 '설'을 지나야 합니다. 옛날에는 '한 살, 두 살 다. 이렇게 국어의 단어는 만들어졌습니다. 매우 경제적인 방법입니다. 새로운 뜻을 가진 사물이나 현상이 생기면, 이것에 전혀 생소한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단어들의 자음이나 모음을 바꾸어 가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보통 '단어의 파생'이라고 합니다. 우리 국어에서는 이와 같이 모음만 바꾸어서 그 뜻을 조금씩 바꾸어 간 것이 무척 많습니다.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1) '머리'와 '마리' '머리'가 하나이면 '한 '마리'지요. 그래서 옛날(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사람의 '머리'도 '마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을 '한 마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2) '남다'와 '넘다' : '남으면' '넘치지요'? 아니면 '넘으면' '남는' 게 되지요. (3) '낡다'와 '늙다' : 사람이 '낡으면' '늙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낡다'는 옛날에 는 '다'는 다른 사물에만 쓰는 단어입니다. (4) '맛'과 '멋' : '맛'이 있어야 '멋'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이외에도 이른바 의성 의태어 는 모음을 달리해서 그 조그마한 뜻을 바꾸는 일이 너무 많지요. 다음에 드는 예문에 속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상상만해 보세요. 그 사람은 (뚱뚱하다, 똥똥하다, 땅땅하다,땡땡하다, 띵띵하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왜 그들은 의자에 앉은 채 죽음을 맞았을까 - 쇼펜하우어 / 플라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출판하던 해인 1788년에 자유의 도시 단찌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칸트의 저술과 인도의 성전, 그리고 플라톤에 얻은 바가 많다. 고 밝혔다. 그래서 자신의 철학에는 칸트의 잎과 플라톤의 꽃, 우파니샤드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었다고 말했다. 이 열매가 바로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로 나타났다. 그는 한 때 헤겔을 미워하고 또 여성들을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다. 여성들이란 음악이나 시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참되고 진정한 의미나 감정을 갖지 못하며, 그들이 뽐내거나 둘러댈 때 교태를 빙자해 꾸며대는 소견머리 없는 견해만 있을 뿐이다. 여성들이란 정신병에 가까운 낭비벽 본능적인 교활함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인간 경멸은 그의 전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염세주의에서 기인된다. 인간의 삶을 다층적 고뇌이며 철저하게 불행한 상태 라고 생각한 그는 모든 인간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의 어머니조차 혐오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단찌히의 한 의원의 딸로 태어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작가였으나 아버지가 죽은 후 정부와 놀아났기 때문에 어머니와도 24년간이나 소식을 끊고 지냈다. 할아버지는 호상으로서 대단한 재산가였고, 할머니는 네델란드의 귀족집 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할머니는 정신병이 있어서 금치산 선고를 받았고, 아들 네 명 중 첫째는 자살을 했고, 둘째는 결핵으로 죽고, 셋째는 백치였고, 넷째는 탕아로 유곽에 미쳐 돌아다니다가 결핵으로 길가에서 쓰러졌다. 자살한 첫째 아들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아버지였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자기 집 곡창 곁의 물 속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본래가 불안한 것이다. 이 불안의 해명이야말로 내가 평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나로서는 철학으로 가는 길 이외에는 살길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의 길을 택했다.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다. 거기에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를 보완하여 출판해 보았으나 눈여겨 보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의와 은거로 40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자는 물론 부모도 없었고 가정도 없었다. 나이 칠십 세가 되어서야 그에게 겨우 봄이 찾아왔으니 베를린 학술원이 그를 회원으로 추대한다고 통지해 온 것이 그것이다. 그는 복잡한 마음으로 거절해 버렸다. 그의 저서는 삼판이 거듭되었고, 프랑스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70회의 생일에는 정중하게 씌어진 승복하는 편지들이 책상에 수북히 쌓였지만 그러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1860년 8월, 쇼펜하우어는 졸도하였고 9월 6일에 다시 한번 쓰러졌다. 그를 병석에 눕게 하였던 폐렴이 조금 나은 듯 했으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9월 18일 저녁, 유언장 집행인 빌헬름그비너와 마지막 면담이 있었다. 그는 이태리 여행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21일 아침 쇼펜하우어는 밥상을 받았다. 하녀는 가만히 창문을 열어주고 물러갔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을 때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얼굴에는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없어 보였다. 72세였다. 그는 왜 플라톤처럼 죽었을까? 80세의 플라톤은 제자의 피로연에 참석했다가 의자에서 혼자 죽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얼굴에는 아무 고통의 흔적도 없이. 쇼펜하우어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1860년 9월 26일 매장되었다. 검은 화강암의 묘석에는 아더 쇼펜아우어라고만 쓰여졌다.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9. 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푹풍의 곶`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 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새로운 바다, 새로운 섬,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이 시대를 `지리상의 발견` 또는 대항해 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발견된 땅에는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거나 발견자가 명명한 이름을 붙였고 그 지명들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이다. 희망봉을 발견한 것은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다아스(Bartholomeu Dias, 1450~1500)인데 이 때가 1487년이었다. 포르투갈이 가장 의욕적으로 새로운 땅,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는데 이것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 무역을 독점적으로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영국이나 프랑스도 이 지중해 무역이나 북해 무역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설 절박한 이유는 없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되어 있던 포르투갈(그리고 이와 경쟁 입장에 있는 스페인)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얻게 될 경제적 이득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대서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앞서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것은 포르투갈의 엔리케(Henrique,1394~1460)왕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인도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고 그가 죽은 후 탐험대는 적도를 넘어서 나아갔지만 거기서 탐험은 중단되었다. 1480년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그의 선단은 아프리카의 남서부 앞바다에서 심한 폭풍에 휩쓸려 남쪽으로 한참 흘러 내려가 약 2주간 육지를 보지 못했다. 폭풍이 가랑 앉은 후에 동쪽으로 항해했지만 육지가 보이지 않아 다시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드디어 그는 곶을 발견했다. 이 앞바다에서 푹풍우를 만났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받은 조안 2세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할 것을 기약하며 이름을 `좋은 희망의 곶(즉 희망봉)` 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희망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희망봉을 우회하여 인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11. 미국의 편집증적 극단이기주의 '편집증적 극단이기주의'란 의학용어로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서로 좋을 때는 온화하고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잘하다가도 일단 틀어지면 짐승같이 흉악하고 냉혹하게 변하는 병적현상을 가리킨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부인살해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석방된 심슨에게 이런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 오랜 기간 그는 아내와, 그가 사랑했으나 이제는 그를 떠나려 한 여인을 지독하게 때려 왔다는 것이다. 최근 그를 떠난 미스 바비리는 그의 위협 때문에 겁에 질려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편집증'과 같은 증상이 현대 미국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문화 가운데 개성의 해방을 추구하고 자아적 창조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몇 세기 동안 지속 및 적체되었고, 이는 또 이 나라의 막강한 경제 및 군사력의 증대와 더불어 팽창되었다.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은, 외형적 성공에 그친 정치적 전략으로 인해 상실감을 느끼게 되어 미국문화의 개인주의를 뿌리가 없는 허상으로 한층 더 몰아가 결국 미국인의 과도한 숭배의식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개인의 가치는 사회가치보다 기형적으로 높아지게 된 것이다. 가정의 속박도 받지 않고 다른 어떤 집단의 구속도 없으며, 타인의 요구에 복종할 필요도 없으며 완전 자립자주적인 개인은 최대한의 창조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사업적 성공도 완전히 개인적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 본연의 선량함과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갈망은 고집스럽게 보호, 은닉되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할리우드영화의 영웅이 늘 혼자 인 것은 미국인의 이런 환상적인 자아숭배가 야기한 도덕적인 고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덕이란 곧 개인적 매력이며, 이는 곧 고립 및 반사회적인 영웅과 일체가 된다. 영웅 또한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자기의 도덕이 고상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성의 차별성과 유일성을 극도로 추구하다보니 사람은 영원히 사회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마음의 밑바닥에 깔린 고독은 그들을 더욱 더 깊이 파고들게 만들어 마침내는 자아의 핵심에 이르도록 하고, 이러한 자아의 핵심을 제멋대로 표출시키게 만들어 버렸다. 제멋대로 표출시키는 것도 어떤 이해를 구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며 마구 내던지거나 울분을 터트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결코 완전하다 할 수 없는 개인이 폭력, 성범죄, 동성애, 마약과 정치, 록음악, 환경문제, 금전만능주의, 공리주의 등으로 미국 사회를 얼룩지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편집증'은 미국문화가 다년간 팽창되어 비교적 약세에 놓인 이질문화를 상호 배척, 제거, 동화함으로써 형성된 심각한 서양중심론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국가의 골격에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제도우월론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항상 현대화란 곧 서앙화되는 것이라는 논조를 가장 일반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서양문화중심론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구의 맹방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함께 이룩한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력 때문에 서구문화와 가치관 및 서구 물질문명까지도 현대화의 지표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자의든 타의든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전통문화를 훼손하게 되었고 정치, 경제적으로는 서양의 통제 아래놓여 버렸다. 그러나 아시아의 궐기로 오래된 동방문명과 현대 물질문명은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점진적으로 형성된 아시아의 현대적 경제문화의 형태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의 '편집증'에 타격을 주고 있다. '편집증에 걸린'미국이 이러한 현상을 일순간에 받아들이기란 무척 난감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나이스피터가 이러한 사실의 수용은 옛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 의미가 매우 깊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의 '의미가 매우 깊다'는 말 중에 '의미'는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지 나로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고 그도 감히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는 않다. 동방의 문명이 부흥하여 몇천 년 간 응집된 능력이 표출되자, 스스로 최고라고 자만하던 미국인 내지는 미국문화 속에 농후하게 깃든 '편집중 정서'에 충격이 가해졌는데,그 충격은 그들에게 필연적이면서도 막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수용한다고 해서 손을 잡고 진정한 협력을 하겠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도 아니다. '편집증에 걸린' 미국은 자신들의 '편집'을 더욱 확보해 나가기 위해 아시아문제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하여,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유도하고 이곳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며, 아시아의 궐기를 완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없애 버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당연히 중국은 그들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는 또 미국문화 중의 '편집'과 서로 관련된 '극단이기주의' 의 특성을 드러나게 하고 있다. '이기주의'만 해도 좋지 않은 것인데 '극단'적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기주의'가 모든 힘을 기울여 자신의 일체를 변화시키고 이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이라면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반드시 해쳐야 하는 편파성과 광폭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할 때 항상 끌어다붙이기 좋아하는 구실은 '세계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세계의 이익'이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미국의 이익'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은 패권주의와 강권정치로 ' 전세계에 있는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툭하면 인권문제를 들고 나와 다른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는데,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인권'이 아니라 바로 '전세계에 있는 미국의 이익'인 것이다. '편집증적 극단이기주의' 가 어느 개인에게 나타나면 심리학자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국가, 그것도 핵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이는 위협과 잠재적 정신병을 의미하며 각양각색의 침략이라는 중증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각별히 경계해야 할문제이다. 이런 증상이 발작의 단계에 접어들기 전에 제재를 가하고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유도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이며 절대로 이에 굴복하거나 순종해서는 안 된다. 순종은 그들의 기세를 더욱 살려 줄 뿐이다. 다행인 것은 중국인이 이 문제에 대해 이미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둘째 셋째 행보를 줄기차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또다행한 것은 미국의 서구 맹방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국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행한 것은 세계의 여러 국가들과 여러 지역이 점점 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미국의 패권주의가 조장하고 있는 위협에 저항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유엔인권회의에서 미국이 앞서제출한 반중국결의안이 부결되자 열렬한 박수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유씨 부인의 사랑 천성이 어질고 생각이 깊은 유씨 부인이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쇠고기 한 근을 사 오라고 계집종 꽃분이를 저잣거리로 내보냈다. 그런데 꽃분이가 사 온 고기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빛깔이 지나치게 검고 썩은 내가 났다. 유씨 부인이 그 고깃덩어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분명히 상한 고기였다. 부인은 다시 꽃분이를 불렀다. "꽃분아, 네가 지금 다녀온 푸줏간에 고기가 얼마나 남아 있더냐?"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부인은 곧 안방으로 들어가 급한 일이 있을 때 쓰려고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돈을 모조리 꺼내 왔다. 그리고 그 돈을 모두 꽃분이에게 주었다. "꽃분아, 이 돈을 가지고 가서 그 고기를 몽땅 다 사 오너라. 너 혼자서는 무거워서 못 가져올 테니 행랑아범을 데리고 가거라." "아니, 마님, 그 많은 고기를 다 어디다 쓰시려고요?" "그건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빨리 다녀오기나 하거라." 얼마 후, 꽃분이와 행랑아범이 거의 한 짐이나 되는 쇠고기를 지게에 지고 돌아왔다. "수고했다.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뒤뜰 한 구석에 구덩이를 깊게 파고 고기를 전부 그곳에다 묻어라." 꽃분이와 행랑아범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꽃분이는 마님이 무슨 까닭으로 그런 분부를 내리시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님, 왜 아까운 고기를 모두 파묻으라고 하십니까?" "그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 아시면서도 왜 많은 돈을 들여 상한 고기를 사 오라고 하셨습니까?" "꽃분아,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고기를 모르고 사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리고 천상 그 고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푸줏간 주인은 또 어떻게 되겠느냐. 살림이 넉넉지 못할 게 뻔한 푸줏간 주인이 그 많은 고기를 버리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지 않겠느냐. 그리고 마음 또한 얼마나 상심이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모두 사서 땅에 묻으려 한 것이다." 글터 → 이글저글 총알은 시속 3,620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 이것을 촬영하려면 1초에 11,000,000의 속도로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어야 한다.비행기는 9,144미터 상공에서보다 7,620미터 상공에서 더 많은 연료를 소모한다.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대기의 압력이 줄어 들어 저항을 적게 받기 때문이다.소리는 해수면에서 1초에 332미터 속도로 달린다. 소리는 금속을 통할 때 가장 빠르고, 그 다음이 물 속, 그 다음이 공기 속이다. 즉 금속에서는 1.6킬로미터 가는데 1/3초, 물 속에서는 1초, 공기 속에서는 5초 걸린다.뱀은 귀 대신 혀로 소리를 듣는다, 뱀에게는 귀가 없다. 그러나 소리에 극도로 민감한 혀를 계속 날름거려 소리의 진동을 알아낸다.자동차가 길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는 운전자의 시력에 영향을 주어 초록색은 점점 더 밝아 보이게 하고 붉은색은 더 어두워 보이게 한다.사람의 구는 1초에 20 - 20,000번 진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박쥐는 1초에 50,000번 진동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왜 밤에 차가 더 잘 달릴까? 차는 밤이나 습도가 높은 날 더 부드럽게 달리는데, 공기가 더 차기 때문이지 공기 속의 더 많은 산소 때문은 아니다. 공기 속의 산소량은 항상 같다. 차가운 공기는 따뜻한 공기보다 밀도가 높기 때문에 엔진은 습도가 높고 차가울 때 더 많은 공기를 받아 들이게 된다. 따라서 밤이나 빗속을 운전할 때는 차의 힘이 좋고 엔진 노크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8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65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76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425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454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99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61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93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1,000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834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852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36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603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52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51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76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509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81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66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74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70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348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403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75 호4339.12.04 (10.14)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꿈을 현실로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 / J.M.P.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현해탄에 던져진 '사의 찬미' -윤심덕 1897년 평양의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난 윤심덕은 역시 같은 해 태어난 전라도 장성 군수의 목포 감리를 지낸 전라도 갑부 김성규의 아들 김우진과 운명적인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윤심덕의 가문은 개화기의 평양 선각자들이 그렇듯 기독교를 신봉하는 집안이었다. 평양 남산현 교회 윤효병 권사를 아버지로, 전도 부인을 어머니로 하고 태어난 윤심덕은 위로 언니가 되는 심성이 있었고, 아래로 성덕과 기성 두 동생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전을 나온 성덕을 음악적인 재질 면에서 심덕과 비슷한 소양을 갖춘 형제였다. 심덕이 숭의 여학교에 다닐 땐 남달리 큰 키와 어여쁜 용모로 장난기 있는 남학생들의 유혹이 많았다. 위로 언니 하나는 멀리 안동으로 출가하여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부모들은 늙었고, 동생들은 어려서 그녀는 늙은 부모 대신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할 몸이었다. 첫 취직은 강원도 원주 공립 보통 학교 교사 자리였으나 그것은 잠시, 그녀는 얼마 뒤 조선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에 가서 동경 우에노 음악 학교 사범과에 유학, 숙원이던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우에노 음악 학겨 졸업 기념 공연은 윤심덕의 음악적인 재질을 크게 펼쳐 보였던 첫 무대였다. 이 공연을 본 제국 극장 경영주는 매달 150원의 출연료로 전속 계약을 맺자고 나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동경에서 사귄 애인 김우진을 따라 서울로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우진. 그는 일본 구마모토 현립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연극 학도이며, 유학생들의 연극 단체인 동우회를 조직하여 구갠 순회 공연에 힘쓰던 이물. 말하자면 신극 운동을 전개하던 촉망받던 극작가였다. 일본 동경에서 만난 윤심덕과 김우진의 관계는, 처음에 유망한 신진 여류 성악가와 젊고 유능한 극작가의 결합이라는 데에서 유학생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지탄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김우진이 이미 고향에 처자를 둔 기혼자라는 데에 있었다. 처자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윤심덕은 몸이 달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의 부나비가 되어 자기 몸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김우진을 그의 처자로부터 빼앗아 와야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둘러 귀국하고 만 것이다.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윤심덕은 의무적으로 학교에 근무해야 했다. 경성 사범 학교 음악 교사가 윤심덕의 두 번째 직장이 되었다. 그녀의 귀국은 기실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윤심덕은 목포 고향집에 내려가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워 보내면서 김우진과의 사랑의 이력을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지난번 목포 오빠하구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을 땐 참으로 꿈만 같았어......" 동경에서 유학중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는 회관건립 기금 모금을 위하여 하기 순회 연극단을 조직한 일이 있었다. 순회 공연을 통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연극 운동을 실천에 옮겨 보는 것과 아울러 고학생 구제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려 했었다. 공연 프로는 다채로웠다. 연극 이외에 음악도 곁들여졌다. 홍난파, 윤심덕, 한기주등의 독주와 독창이 있었고, 1920년 봄 동경 유학생들의 조직인 '극예술 협회' 맴버 외에 송경 학우회의 마해송과 그 밖의 몇 사람을 더 참가시켰는데, 전용이 쟁쟁했다. 그 때에 연출을 맡은 이가 김우진이었다. 김우진. '목포 오빠'로 통하던 김우진과 윤심덕은 동갑이어서 그랬는지 쉽게 밀착되었다. 그것은 몹시 수줍고 말이 없는 김우진과 쾌활하고 적극적인 윤심덕의 성격 차이에도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1921년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동우회 간부 임세희의 인솔로 일행 22명은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일행은 순연한 영업적 배우가 아니라 예술에 살고자 하는 신청년의 단체이므로 일행의 차림은 물론 화려치 아니하였다. 어디까지나 씩씩한 학교 정복을 입은 일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각한 인상을 받게 하였으며....... 1921 .07 .27. <동아일보> 부산서부터 제 1막을 공개하여 이르는 곳마다 끓는 듯한 대환영을 받고.... 1921 . 9. 30. <동아일보> 환영을 받고 지방 공연을 하면서 '목포 오빠'로 부르던 김우진과의 사랑을 점점 무르익어 갔다. 처음부터 시인이 되려고 습작에 열중했던 김우진은 그만큼 다감한 젊은이었다. 우리말과 일문으로 된 시 40여 편과 희곡 작품으로 희극 "정오", "산돼지". "이영녀" 등을 썼던 김우진은 '극예술 협회'와 '동우회' 순회 연극단의 지도자였다. 이러한 지도자를 애인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윤심덕으로서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애초에는 김우진이 이끌던 '동우회' 순회 공연에서 소프라노 가수로 찬조 출연했던 윤심덕이었으나 유교적 가정에서 조혼의 괴로움을 맛보며 살고 있던 김우진과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급기야 두 사람은 헤어날 수 없는 사랑의 가시 울타리로 얽혀 버리고 만 셈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국민 학교 교사 생활을 하고 있던 윤심덕이 목포 집에 묵고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웠으나, 그 정열적인 윤심덕의 편지는 번번이 중간에서 없어져 버린 채, 김우진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무렵 윤심덕은 평양집을 처분하여 서울 서대문정 1정목 73번지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서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언니와 동생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윤심덕은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보다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가정의 가장이어야 했고, 돈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음악회다, 레코드 취입이다, 방송 출연이다 하고 바삐 나돌았으나 그야말로 그깟 돈은 '새발의 피'였다. 사랑하는 김우진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끊어진 채 소식이 없었다. 돈이 필요한 윤심덕은 짜증이 났다. 미모의 여가수에게 중매가 없을 수 없었다. 함경도 출신의 김홍기가 접근해 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그를 마다하고 돈이 있는 이용문과 가까워졌다. "돈이 있으면 이태리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겠지......." 그리고 동생들도 외국 유학을 보내야 한다. 돈, 돈. 동대문 갑부 이용문은 그녀의 그 같은 꿈을 실현시켜 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600원이라는 거금이 이용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소문은 윤심덕의 인기만큼 멀리 퍼져 나갔다. 윤심덕에게 이용문 외에 흥이다, 우다, 송이다, 하는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비난이 빗발쳤다. 일본 대학 문과 3학년에 재학중인 박점식이란 젊은이는 윤심덕을 짝사랑한 끝에 정신 이상이 되었다던가......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은 이제 그녀 뒤통수를 따라 다니는 악담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윤심덕은 교육계의 비난과 악단의 잡음을 피해 북만주 지방 선교사 배형식 목사의 도움을 받아 하얼빈으로 몸을 숨겼다. 목포 집에 눌러 있던 김우진이 윤심덕의 행방을 찾아나선 것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윤심덕이 하얼빈을 떠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하얼빈으로 찾아온 김우진은 그만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서울로 내려온 윤심덕의 뒤를 따라 김우진은 급히 서울로 달려왔다. 두 사람의 오랜만의 해후는 그들을 또다시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고 만다. 두 사람의 초동에 있는 어느 여관에 묵으면서 예술과 사랑의 재기를 꿈꾼다. 그것이 바로 '토월회' 가입이었다. 김우진의 권고로 토월회의 박승희에게 가입 편지를 띄우자 토월회에서는 즉각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토월회의 특별 대공연..... 작년 겨울에 지방 순회를 마치고 그후 휴연중에 있는 토월회에서는 금 6일 밤부터 황금정 광무대에서 대공연을 할 터이라는데 이번에는 특히 조선 악단에서 자못 그 명성이 높은 성악가 윤심덕 양이 새로이 가입해 가지고 밤마다 포부를 다해 출연할 터이라 하며 금번 예제는 미국 <띄 떠불유 코리스티>과 <노코 나온 모자> 1막과 <밤손님> 1막을 상연할 터이라는데 전보다도 모든 설비를 새로이 하였으며, 배우들의 기술도 더욱 연마되었으므로 매우 재미있으리라더라. --1926. 2. 6. <동아일보> 그러나 윤심덕의 토월회 무대는 연극적으로 실패였다. "동도"와 "카르멘"의 여주인공이 되어 노래를 불렀다는 게 그녀의 인기를 얼마만큼 유지시켜 준 셈이었다. 윤심덕은 '토월회'에서 다시 '백조회'로 얾겼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뒤이어 단성사 맞은편 수은동 60번지로 보금자리를 옮겼으나 초라한 두 사람의 살림은 찌들 대로 찌들어 급기야 일본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는 말이 적고 냉혈한이라 할만큼 이성적이요 감정을 억제하고 표시하지 않던 김우진은 이때부터 죽음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본의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윤심덕이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을 때 피아노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기로 하였다. 성덕은 언니 노래가 취입되면 곧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사의 찬미 독창: 윤심덕 반주: 유성덕 1.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후렴) 눈물로 되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2. 우는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갈 위에 춤추는 자로다 ........ 오사카 오카하루 여관에 집을 푼 윤심덕과 성덕 자매는 닛토 레코드 회사 다우치와 교섭 끝에 10여 곡의 취입을 끝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윤심덕 자매는 그 길로 요코하마에 가서 이별을 가졌다.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성덕은 윤심덕이 1921년 귀국했을 때 이화여전을 나왔고, 뒷날 이전 끌리 클럽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 곁으로 달려갔다. 죽음. 그들의 만남에서 죽음은 비롯되었고, 사랑의 밀어에서 죽음은 구체화되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의 영원함이란 곧 죽음 그 자체였으므로 죽음을 피한 사랑이 영원이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길. 아, 그 길인가. 그 길이란 곧 신파조의 연극 대사만은 아니었다. 아니, 죽음 이전에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밀월 여행이었다.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레코드 취입료는 말하자면 죽음행 열차와 배표를 사는 요금이 되었다. "목포 오빠..... 도쿄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안선을 따라가며 해수욕도 하고 온천도 즐겨요. 이 돈이 바닥날 때까지........" 윤심덕이 속삭이면, "조선으로 가는 배표는 사야잖아?" 하고 김우진은 부산행 배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배표! 그건 배표가 아니에요." "배표가 아니라고?" "우리가 저 세상으로 떠나는 데 필요하 여행비예요." "여행비......" 그들은 30세의 젊음을 즐기고, 뉘우치고, 방황하면서, 시모노세키에 닿았다. 1926년 9월 3일. 부산으로 떠나는 연락선 도쿠슈마루 선객 명부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2목정 173번지 윤수선. 배가 떠나는 시각은 11시. "생각나?..... 서울 수은동 60번지 오전 사진관 뒷방에서 밥을 사먹던 일......." 김우진이 갑판 위에서 어둠 속의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진관 뒷방에서 그들은 윤심덕의 라디오 출연료와 노래 부른 사례비로 겨우 살았다. 8월 4일 새벽 4시. 죽음은 무릎 아래에까지 밀려와 있었다. 목포 갑부의 아들 김우진은 사진관 뒷방을 얻어 가지고 윤심덕이 벌어 온 돈으로 밥을 사먹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세상에도 그렇게 초라한 사진관 뒷방이 있을지 몰라. 우리 그런 방을 세 얻어서 한 천 년쯤 살아 보자." 어느새 한몸이 된 두 남녀는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다. 새롭게 열리는 두 사람만의 세계,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몸을 날렸다. "풍덩!" 하고 현해탄 검은 바다가 두 사람을 안아 들였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긴 돈은 총액 145원이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나이 30세. 두 사람의 정사는 신극사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보다 더 큰 메아리로 1920년 후반을 휩쓸어 갔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까닭 - 홍영의(국민대 박물관 학예원) 신돈(? - 1371)은 1365(공민왕 14)부터 1371년까지 6년동안 공민왕의 명에 따라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낱 승려 출신으로 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정권을 장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이 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미천한’, ‘글도 모르는’, ‘대역을 저지른 사람’이라느니, ‘요사한 승려’ 라는등 부적적으로 묘사된 인물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 편찬된 <고려사>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통념이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역사 소설에서 그러한 모습을 가장 많이 드러내고 있다. 신돈이 집권한 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권문세족을 억누르며, 일반민을 위해서 개혁을 추진한 그는 당시에 ‘성인’ 이라고도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거나 실각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가 유독 이렇게 용서받지 못할 인간으로 역사책에 기록된 까닭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신돈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개혁이 무엇이며, 개혁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개혁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법명보다 속명으로 더 알려진 신돈 신돈의 출생에 관한 것으로는 아래의 <고려사>기록이 유일하다. 신돈은 영산사람이고 어머니는 계성현에 있는 옥천사의 여자종이었다. 어려서 중이 되었으며 법명을 편조라 하고 자를 요공이라 했다. 어머니가 천하였기 때문에 같은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산방에 거처하였다. 어머니가 절의 종이라서 천한 신분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지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신돈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려고 의도한 <고려사>편찬자가 아버지의 추한 면을 들추어내지 못하자 어머니 쪽만 강조한 것 같다. 아버지의 묘가 창녕에 있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아버지 계통은 명백하였던 것 같다. 고려에서는 1135년(인종 13)이래 노비는 중이 되지 못한다는 금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으므로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고도 생각된다. 물론 부모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신분이 천하면 자식은 천인이 된다는 규정에 따른다면 신돈은 어머니가 종이기 때문에 당연히 천인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가 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쪽 가문이 영산에서 유력하거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신돈의 학식은 어땠을까? 신돈전에는 ‘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의 무식을 혹평했지만,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승려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지배사상인 유학적 소양이 원숙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총명하고 자혜스러웠으며,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했고 스스로 도통했다고 하였다’라는 표현이나, 국사를 기록하는 사관에게 ‘국사를 망령스럽게 쓰지 말라. 내가 장차 살펴보리라’라고 한 말과 그 밖의 행적을 살펴볼 때, 신돈은 학문적인 소양뿐 아니라 국정에 대한식견도 있었다고 짐작된다. 신돈은 어떤 성향의 승려였을까? 그는 1359년(공민왕 8) 무렵 김원명의 천거로 중앙에 등장하였다. 왕의 신임을 받아 집권한 신돈은 선종 계통의 왕사인 보우를 축출하고, 화엄종 계열의 천희를 국사로, 선현을 왕사로 추천하여 책봉받게 하였다. 또한 그의 법명인 편조는 ‘광명편조’를 줄인 말로 ‘무한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이다. 이는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산스크리트어의 ‘비로카나(Vairocana)’를 의역한 것인데 부처의 몸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종에서 주존불로 모시는 부처였다. 그리고 신돈은 당시 ‘문수의 후신’으로 칭송받고, 화엄법회인 문수회를 8회에 걸쳐 개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가 선종과는 대립하고 화엄종파와 밀접한 승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사람, 신돈을 앞장 세우다 고려의 왕위 계승자를 원나라가 결정하던 당시에 공민왕은 왕위 계승에서 두 번이나 밀려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 즉위한 뒤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격적으로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근 100년동안 고려에 영향을 끼쳐 온 원나라의 영향이나 부원배를 한 번의 개혁으로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었다. 공민왕 10년에는 15만 명이나 되는 홍건적이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국왕도 안동까지 피난을 떠나야만 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국왕의 권위는 실추된 데다 홍건적을 물리친 뒤 측근세력들의 정권 쟁탈 와중에서 주요한 측근세력이 모두 제거되어 버렸다. 바깥으로는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워서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도전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과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무장들의 입지가 강해졌고 측근세력들을 상실한 공민왕의 정국 주도력은 크게 약해졌다. 당시 조정의 관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대로 고위직을 지낸 세신대족, 처음 정계에 진출한 초야신진 그리고 유생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런데 세신대족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 주고, 초야신진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가 지위가 높아지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로 이름있는 집안과 혼인하여 처음의 뜻을 다 버리며,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 좌주, 동년이라 칭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을 따른다고 할 정도로 서로가 얽혀 있었다. 공민왕은 이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돈이 등용된 것이다.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그에게 일반 정치에 관해서 거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신돈은 지방의 이름없는 승려 출신이어서 기성 정치세력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돈자신이나 일가붙이가 토지와 종을 수도 없이 거느린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개혁을 주저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고려 사회를 전반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공민왕에게는 이렇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신돈이야말로 자신의 정치를 일선에서 대신해 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돈은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최영을 비롯한 무장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기성 정치세력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인사 개편을 대대적으로 착수하였다. 개혁의 물밑에서 움튼 신진사대부 기존 체제에서 한 발 떨어진 신돈이 집권했다고 해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 방향에 동의하고 그것을 밀어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였다. 예나 이제나 앞서서 나가는 한 명의 선구자가 사회의 개혁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수백 년 고려왕조에서 지배세력으로서 부와 지위를 자손 대대로 물려가며 누려 온 자들이 정권에서 밀려난 다음 ‘이것이 대세려니...’하고 가만히 있는 법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축출된 자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무장인들인 다음에야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신돈을 모함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때로는 직접 제거하려고 모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추진세력의 형성은 더욱 절실하였다. 기성 정치세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다른 정치세력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기성 정치세력과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도 다르고 그래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할 수 있는 젊은 유학자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들 중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정도전 등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들은 신돈 정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하여 차차 성장해 갔다. 이들이 일부는 고려의 충신으로, 일부는 조선의 공신으로 정치적 갈 길이 갈라지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신돈 개혁의 본질은 ‘삶의 질 향상’ 신돈은 집권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잡기 위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것이었다. 권세가들은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거기에다가 사람을 끌어 모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힘없는 평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때로는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기도 했다. 토지를 경작할 인력을 끌어 모을 때에는 일반 평민들까지 강제로 노비로 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하게 되는가 하면, 국가는 세금을 거둘 토지와 농민이 줄어들어 재정이 고갈되었다. 권세가 개개인은 부한 반면 국가는 점점 가난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왕권을 행사하기도 어려웠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빼앗긴 토지를 되돌려 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본래대로 국가의 공민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개혁은 신돈이 집권하기 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권세가들의 계급적 이해와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모순의 주체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돈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은 기존의 권세가를 배제하고 추진하였으므로 철저하게 시행될 수 있었고, 그 성과도 그전과는 크게 달랐다.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고려사> 편찬자들조차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이 명령이 발표되자 권세가들이 많이 빼앗은 땅과 백성들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므로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 신돈이 겉으로는 공평한척 꾸미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사고자 무릇 천한 사람들이 양인되기를 호소하면 한결같이 양인으로 해주었다. 그러자 노비로서 주인을 배신한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성인이 나왔다”고 하였다. 신돈은 이와 같은 개혁을 뒷받침해 줄 정치제도를 개편했다. 지방으로 물러난 전직 관리들이 백성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책을 마련했고, 권세가의 자제가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것을 막고 관리들이 자격에 따라 차례대로 승진하게 하는 제도를 정했다. 또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을 다시 세우고 과거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러한 개혁적인 분위기에서 신진사대부들은 그전처럼 관료로서 성공하여 새로운 권세가가 되려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점차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돈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공민왕은 어째서 신돈과 같은 전혀 새로운 인물에게 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을까? 공민왕 자신의 정치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상황하에서 개혁의 일선에 나선다면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완강한 신하와 대립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일까. 공민왕은 자신의 왕권의 확보와 지배체재의 재정비를 위해 대내적인 재정비를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치일선에 나서서 수많은 반대세력과 싸우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때문에 실패하면 소생하기 어려운 개혁이라는 멍에를 신돈에게 들씌웠던 것이 아니였나 싶다. 만일 신돈의 개혁이 지속되었더라면 고려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돈의 등용과 그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공민왕이 의도한 것이었으므로, 정치적인 면에서 공민왕의 신돈을 통한 정치운영은 측근정치의 한 변형이라는 면과 국왕에 의한 개혁 추진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 개혁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친 당시로서는 포괄적인 조처들이었다. 그 중 신돈의 대표적인 개혁은 ‘전민변정사업’이었는데,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변정사업이 급진적이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신돈의 판결이 일반민의 입장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에 토지나 일반민을 불법적으로 소유한 권문세족들의 불만과 원성이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개혁이 점차 가속화되어 감에 따라 권문세족들은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고, 그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는 몰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결제기반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한 그들은 신돈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국왕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은 유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도 신돈이 정치를 주관하는 현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적인 갈등은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할 정도에까지 이르렀고, 그것이 드러나게 된 계기는 신돈이 집권하는 동안 계속된 자연재해였다. 하늘의 뜻이 인간 세상에 반영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자연재해란 위정자의 실정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신돈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이 때 중국을 통일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명나라도 공민왕이 직접 정치에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개혁의 일정부분이 성공하고 자신의 왕권강화를 어느 정도 이룬 공민왕은 더 이상의 대행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권에 버금가는 신돈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현실적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신돈을 등용할 당시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손수 글을 써서 맹세까지 하였던 공민왕. 이제 공민왕은 자신에게 미칠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신돈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돈은 왕이 자기를 꺼릴까 두려워하여 반역을 꾀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인이라는 사람이 신돈의 반역을 고발하였는데, 이 고발을 계기로 공민왕은 신돈뿐 아니라 그의 무리로 지목된 자들까지 처형하였다. 신돈은 이틀간 감금되었다가 수원에 유배되었다. 다시 그 이틀 후 살해되었다. 두 살난 아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처와 첩은 몰수되어 나라의 종이 되었다. 신돈이 처형되고 나서 정치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에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던 개혁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 몇 년 뒤 공민왕도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서는 그 전의 권세가들이 다시 정치 일선에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돈 개혁의 역사적 경험 고려 후기 14세기의 개혁정치는 12, 13세기 이후 농민항쟁에서 드러난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몽고와의 전쟁 이후 드러난 민족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개혁으로 민족모순은 해결되었지만, 신돈의 개혁에서도 사회경제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였다. 물론 당시로서는 그 어떤 개혁보다도 일반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신돈의 개혁은 그 모순에 대한 지배층의 일시적인 대응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변질된 것이었다. 특히 신돈 개혁의 실패와 그의 죽음은 개혁을 추진하거나 실무를 맡았던 인물들이 개혁의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아무리 신돈이 토지나 노비를 축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일반민의 기대가 있더라도 개혁의 호응도 역시 그만큼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개혁을 추진할 만한 신돈의 정치세력이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승려 출신이라는 신분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성리학적 유교정치이념이 팽배한 당시 상황하에서 정치적 경륜과 유학적 학문소양의 부족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신돈의 개혁 성향이나 당시 정치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 개혁의 의의는 비록 그의 죽음으로 개혁이 실패하였다고 하더라도 권세가를 억누르며 일반민의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민왕의 왕권강화를 뒷받침해 주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신진사대부가 그의 개혁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현 사회의 틀도 이와 유사하다. 지배층 일부는 여전희 개혁을 표방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혀 개혁을 표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사회를 개혁한다고 할 때 누구와 손잡고 무엇을 개혁하려는 것일까? 개혁의 한계점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그 의미는 무엇일까? 말없는 대중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 주는 그 개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신돈을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역사가들이 그렇게도 목청 돋우어 ‘패륜아’로 낙인 찍었던 신돈을.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가슴속에 숨겨 둔 이야기 초등학교 삼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된다. 동네 골목에서 나랑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들 몇 명과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말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네가 잘못했다고 티격태격 다투다가 너무 화가 난 나는 단짝 친구에게 아주 못된 말을 뱉어 버렸다. "넌 참 좋겠다. 엄마가 둘이니까!" 그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고, 친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친구 아버지는 본처와 첩을 같은 동네에 두고 살았는데, 친구는 첩을 작은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때 그 친구의 친엄마가 지나가다 우리를 보고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왜 그러니? 못나게 길바닥에 앉아 울고." 난 큰일났다 싶어서 잔뜩 긴장한 채 그 친구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줄행랑을 칠 준비를 했다. "엄마, 고무줄하다 넘어졌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순간, 너무나 착한 내 친구의 대답에 난 어쩔 줄 모랐다. 그 친구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만 그쳤을 뿐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하는 친구에게 그때 그 사건에 대해선 용서를 빌지 못했다. 핑계같지만 괜히 얘기를 꺼내면 친구의 마음을 또 한번 다치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엔 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들어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권은숙 님/대구시 서구 비산2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5 - '역사는 자유의 전개과정이다': 헤겔의 역사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 대륙봉쇄형 공포 1808년: 유럽, 반도전쟁(포르투갈에서 영국군과 나폴레옹과의 싸움. ~1814)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 8. 27 슈투트가르트~1831. 11. 14 베를린. 예나 대학을 떠난 헤겔은 신문편집도 하고 고등학교 책임도 맡아보는 몇 해 동안 쉬지 않고 학문을 연마해나갔다. 그 덕택으로 "정신현상학"이 인정을 받게도 되고 다시 대학강단에 서게 된다. 독일인들은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고, 그 어려운 것을 알아야 철학자다운 자부심을 갖는지 모른다. 어쨌든 헤겔의 철학은 난해한 철학으로 유명했다. 계속해서 저서가 나올수록 그 난해의 도는 심해져가는 경향이었다. 그의 "철학백과전서"는 헤겔의 철학 전체를 체계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취급되지 않은 학문과 세계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큰)논리학"이라는 책이 있다. 그 큰 책은 누구도 전체를 기억할 수는 없을 정도로 어려우면서 체계적인 것이다. 그 책이 너무 크고 어렵기 때문에 "철학백과 전서"의 처음 3분의 1에 해당하는 논리학을 따로 떼내어 "작은 논리학"이라고 구분할 정도이다. 그 뒤에도 "법철학"이 출간된다. 그 책은 요새 우리들이 얘기하는 사회철학이 포함되어 있다. 헤겔이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책이다. 말년에 헤겔은 다시 강의록으로 된 "예술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을 내놓는다. 예술과 종교문제는 누구나 취급하고 있으나, "역사철학"은 헤겔의 특수한 과제라고 보아 좋을 만한 책이다. 사람들은 옛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저술한 이후 처음 나온 역사철학이라고 평하고 있다. 사실 역사를 독립된 철학의 주제로 취급한 철학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 이후부터는 수많은 역사철학이 나오기 시작했다. 헤겔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청을 받을 때 이야기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는 헤겔의 초청 여부를 놓고 교수들의 의견이 쉬 결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헤겔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고 그 보고에 따라 초빙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그 보고서에는 '대단히 난해하기는 하나 대가다운 장래성이 엿보이기 때문에 초청해보자'는 의견이 들어 있었다. 어떤 때는 헤겔이 강의를 끝내고 교수실로 돌아오면 학생들이 남아서 우리 교수님의 철학이 어떤 것이냐고 서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헤겔의 조교를 맡아보던 헤닝을 시켜 직접 가서 물어보게 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헤닝이 가서 선생님의 철학은 이런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헤겔은 '그것이 아니네, 내 철학은 나밖에 아는 이가 없다.' 라고 씁쓸해했다는 이야기다.어려울수록 매력을 느끼며 모르는 면이 있기 때문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이 헤겔의 철학일지도 모른다. 후에 헤겔은 베를린 대학으로 초청을 받는다. 베를린 대학은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독일 대표하는 관립대학으로 명색을 갖춘 곳이었다. 그때부터 헤겔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철학은 독일에서, 독일철학은 베를린대학이, 베를린대학철학의 주인은 헤겔로'라고 전해질 정도로 헤겔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높아져갔다. 한때 헤겔은 국립대학의 어용교수라고 불릴 정도로 친정부적이기도 했고, 그의 철학적 성향이 그런 방향을 택하기도 했다. 어쨌든 헤겔은 철학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의 철학체계가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헤겔은 취급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으며, 그 많은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취급했으니, 누구도 그 뒤를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러나 그보다 더 난해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의 철학적 방법인 변증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변증법은 철학의 마법사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변증법으로 모든 문제를 조작해내며 해결짓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프랑스나 영국 철학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변증법은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헤겔의 후계자들이 그의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가 그 대표자 중의 하나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읽으면 변증법은 헤겔식이 아닐때 대단히 중요한 면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을 정신에서 물질로 바꾸어 철학과 사상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마르크스와 그 후계자들이다. 심지어는 모택동이나 김일성까지도 모순과 혁명을 연결짓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밖에 있었던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 밖에 있었던 변증법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통해 다시 세계무대에 등단했을 정도이다. 그러면 그 변증법은 어떤 방법론인가? 누구도 그 완결된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모두가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 가지 가능한 것은 헤겔을 비롯한 변증론자들이 이런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윤곽적인 설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한 살'의 '살'과 '설날'의 '설'은 어떤 관계일까요? 우리 나라에서는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된 아기가 나이로는 '두 살'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해가 지나면 자연히 한 '살'을 먹게 되니까요. 음력 섣달 그믐날에 태어난 아기가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설날'만 되면 비록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된 아기지만 금방 두 살이나 됩니다. 서양에서는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두 살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분도 많지만, 그 생각은 서양식 교육의 영향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나이 계산 방법에 의하면 그 아기는 분명히 두 살입니다. 왜냐구요? 우리 나라에서는 태어나면 곧 한 살이 되고, 다시 한 '설'을 지나면 한 '살'을 더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해서, 태어나자 마자 한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한 살씩 더 먹는 날을, 서양처럼 각자 생일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정하지 않고 모두 '설날'로 정한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서양사람들의 사고에 비해 얼마나 인간적이고 합리적인가요? 그래서 한 '살'을 더 먹기 위해서는 한 '설'을 지나야 합니다. 옛날에는 '한 살, 두 살 다. 이렇게 국어의 단어는 만들어졌습니다. 매우 경제적인 방법입니다. 새로운 뜻을 가진 사물이나 현상이 생기면, 이것에 전혀 생소한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단어들의 자음이나 모음을 바꾸어 가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보통 '단어의 파생'이라고 합니다. 우리 국어에서는 이와 같이 모음만 바꾸어서 그 뜻을 조금씩 바꾸어 간 것이 무척 많습니다.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1) '머리'와 '마리' '머리'가 하나이면 '한 '마리'지요. 그래서 옛날(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사람의 '머리'도 '마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을 '한 마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2) '남다'와 '넘다' : '남으면' '넘치지요'? 아니면 '넘으면' '남는' 게 되지요. (3) '낡다'와 '늙다' : 사람이 '낡으면' '늙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낡다'는 옛날에 는 '다'는 다른 사물에만 쓰는 단어입니다. (4) '맛'과 '멋' : '맛'이 있어야 '멋'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이외에도 이른바 의성 의태어 는 모음을 달리해서 그 조그마한 뜻을 바꾸는 일이 너무 많지요. 다음에 드는 예문에 속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상상만해 보세요. 그 사람은 (뚱뚱하다, 똥똥하다, 땅땅하다,땡땡하다, 띵띵하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왜 그들은 의자에 앉은 채 죽음을 맞았을까 - 쇼펜하우어 / 플라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출판하던 해인 1788년에 자유의 도시 단찌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칸트의 저술과 인도의 성전, 그리고 플라톤에 얻은 바가 많다. 고 밝혔다. 그래서 자신의 철학에는 칸트의 잎과 플라톤의 꽃, 우파니샤드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었다고 말했다. 이 열매가 바로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로 나타났다. 그는 한 때 헤겔을 미워하고 또 여성들을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다. 여성들이란 음악이나 시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참되고 진정한 의미나 감정을 갖지 못하며, 그들이 뽐내거나 둘러댈 때 교태를 빙자해 꾸며대는 소견머리 없는 견해만 있을 뿐이다. 여성들이란 정신병에 가까운 낭비벽 본능적인 교활함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인간 경멸은 그의 전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염세주의에서 기인된다. 인간의 삶을 다층적 고뇌이며 철저하게 불행한 상태 라고 생각한 그는 모든 인간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의 어머니조차 혐오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단찌히의 한 의원의 딸로 태어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작가였으나 아버지가 죽은 후 정부와 놀아났기 때문에 어머니와도 24년간이나 소식을 끊고 지냈다. 할아버지는 호상으로서 대단한 재산가였고, 할머니는 네델란드의 귀족집 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할머니는 정신병이 있어서 금치산 선고를 받았고, 아들 네 명 중 첫째는 자살을 했고, 둘째는 결핵으로 죽고, 셋째는 백치였고, 넷째는 탕아로 유곽에 미쳐 돌아다니다가 결핵으로 길가에서 쓰러졌다. 자살한 첫째 아들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아버지였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자기 집 곡창 곁의 물 속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본래가 불안한 것이다. 이 불안의 해명이야말로 내가 평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나로서는 철학으로 가는 길 이외에는 살길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의 길을 택했다.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다. 거기에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를 보완하여 출판해 보았으나 눈여겨 보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의와 은거로 40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자는 물론 부모도 없었고 가정도 없었다. 나이 칠십 세가 되어서야 그에게 겨우 봄이 찾아왔으니 베를린 학술원이 그를 회원으로 추대한다고 통지해 온 것이 그것이다. 그는 복잡한 마음으로 거절해 버렸다. 그의 저서는 삼판이 거듭되었고, 프랑스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70회의 생일에는 정중하게 씌어진 승복하는 편지들이 책상에 수북히 쌓였지만 그러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1860년 8월, 쇼펜하우어는 졸도하였고 9월 6일에 다시 한번 쓰러졌다. 그를 병석에 눕게 하였던 폐렴이 조금 나은 듯 했으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9월 18일 저녁, 유언장 집행인 빌헬름그비너와 마지막 면담이 있었다. 그는 이태리 여행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21일 아침 쇼펜하우어는 밥상을 받았다. 하녀는 가만히 창문을 열어주고 물러갔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을 때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얼굴에는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없어 보였다. 72세였다. 그는 왜 플라톤처럼 죽었을까? 80세의 플라톤은 제자의 피로연에 참석했다가 의자에서 혼자 죽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얼굴에는 아무 고통의 흔적도 없이. 쇼펜하우어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1860년 9월 26일 매장되었다. 검은 화강암의 묘석에는 아더 쇼펜아우어라고만 쓰여졌다.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9. 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푹풍의 곶`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 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새로운 바다, 새로운 섬,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이 시대를 `지리상의 발견` 또는 대항해 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발견된 땅에는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거나 발견자가 명명한 이름을 붙였고 그 지명들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이다. 희망봉을 발견한 것은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다아스(Bartholomeu Dias, 1450~1500)인데 이 때가 1487년이었다. 포르투갈이 가장 의욕적으로 새로운 땅,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는데 이것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 무역을 독점적으로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영국이나 프랑스도 이 지중해 무역이나 북해 무역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설 절박한 이유는 없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되어 있던 포르투갈(그리고 이와 경쟁 입장에 있는 스페인)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얻게 될 경제적 이득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대서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앞서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것은 포르투갈의 엔리케(Henrique,1394~1460)왕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인도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고 그가 죽은 후 탐험대는 적도를 넘어서 나아갔지만 거기서 탐험은 중단되었다. 1480년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그의 선단은 아프리카의 남서부 앞바다에서 심한 폭풍에 휩쓸려 남쪽으로 한참 흘러 내려가 약 2주간 육지를 보지 못했다. 폭풍이 가랑 앉은 후에 동쪽으로 항해했지만 육지가 보이지 않아 다시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드디어 그는 곶을 발견했다. 이 앞바다에서 푹풍우를 만났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받은 조안 2세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할 것을 기약하며 이름을 `좋은 희망의 곶(즉 희망봉)` 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희망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희망봉을 우회하여 인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11. 미국의 편집증적 극단이기주의 '편집증적 극단이기주의'란 의학용어로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서로 좋을 때는 온화하고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잘하다가도 일단 틀어지면 짐승같이 흉악하고 냉혹하게 변하는 병적현상을 가리킨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부인살해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석방된 심슨에게 이런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 오랜 기간 그는 아내와, 그가 사랑했으나 이제는 그를 떠나려 한 여인을 지독하게 때려 왔다는 것이다. 최근 그를 떠난 미스 바비리는 그의 위협 때문에 겁에 질려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편집증'과 같은 증상이 현대 미국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문화 가운데 개성의 해방을 추구하고 자아적 창조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몇 세기 동안 지속 및 적체되었고, 이는 또 이 나라의 막강한 경제 및 군사력의 증대와 더불어 팽창되었다.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은, 외형적 성공에 그친 정치적 전략으로 인해 상실감을 느끼게 되어 미국문화의 개인주의를 뿌리가 없는 허상으로 한층 더 몰아가 결국 미국인의 과도한 숭배의식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개인의 가치는 사회가치보다 기형적으로 높아지게 된 것이다. 가정의 속박도 받지 않고 다른 어떤 집단의 구속도 없으며, 타인의 요구에 복종할 필요도 없으며 완전 자립자주적인 개인은 최대한의 창조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사업적 성공도 완전히 개인적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 본연의 선량함과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갈망은 고집스럽게 보호, 은닉되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할리우드영화의 영웅이 늘 혼자 인 것은 미국인의 이런 환상적인 자아숭배가 야기한 도덕적인 고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덕이란 곧 개인적 매력이며, 이는 곧 고립 및 반사회적인 영웅과 일체가 된다. 영웅 또한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자기의 도덕이 고상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성의 차별성과 유일성을 극도로 추구하다보니 사람은 영원히 사회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마음의 밑바닥에 깔린 고독은 그들을 더욱 더 깊이 파고들게 만들어 마침내는 자아의 핵심에 이르도록 하고, 이러한 자아의 핵심을 제멋대로 표출시키게 만들어 버렸다. 제멋대로 표출시키는 것도 어떤 이해를 구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며 마구 내던지거나 울분을 터트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결코 완전하다 할 수 없는 개인이 폭력, 성범죄, 동성애, 마약과 정치, 록음악, 환경문제, 금전만능주의, 공리주의 등으로 미국 사회를 얼룩지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편집증'은 미국문화가 다년간 팽창되어 비교적 약세에 놓인 이질문화를 상호 배척, 제거, 동화함으로써 형성된 심각한 서양중심론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국가의 골격에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제도우월론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항상 현대화란 곧 서앙화되는 것이라는 논조를 가장 일반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서양문화중심론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구의 맹방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함께 이룩한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력 때문에 서구문화와 가치관 및 서구 물질문명까지도 현대화의 지표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자의든 타의든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전통문화를 훼손하게 되었고 정치, 경제적으로는 서양의 통제 아래놓여 버렸다. 그러나 아시아의 궐기로 오래된 동방문명과 현대 물질문명은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점진적으로 형성된 아시아의 현대적 경제문화의 형태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의 '편집증'에 타격을 주고 있다. '편집증에 걸린'미국이 이러한 현상을 일순간에 받아들이기란 무척 난감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나이스피터가 이러한 사실의 수용은 옛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 의미가 매우 깊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의 '의미가 매우 깊다'는 말 중에 '의미'는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지 나로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고 그도 감히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는 않다. 동방의 문명이 부흥하여 몇천 년 간 응집된 능력이 표출되자, 스스로 최고라고 자만하던 미국인 내지는 미국문화 속에 농후하게 깃든 '편집중 정서'에 충격이 가해졌는데,그 충격은 그들에게 필연적이면서도 막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수용한다고 해서 손을 잡고 진정한 협력을 하겠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도 아니다. '편집증에 걸린' 미국은 자신들의 '편집'을 더욱 확보해 나가기 위해 아시아문제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하여,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유도하고 이곳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며, 아시아의 궐기를 완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없애 버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당연히 중국은 그들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는 또 미국문화 중의 '편집'과 서로 관련된 '극단이기주의' 의 특성을 드러나게 하고 있다. '이기주의'만 해도 좋지 않은 것인데 '극단'적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기주의'가 모든 힘을 기울여 자신의 일체를 변화시키고 이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이라면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반드시 해쳐야 하는 편파성과 광폭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할 때 항상 끌어다붙이기 좋아하는 구실은 '세계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세계의 이익'이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미국의 이익'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은 패권주의와 강권정치로 ' 전세계에 있는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툭하면 인권문제를 들고 나와 다른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는데,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인권'이 아니라 바로 '전세계에 있는 미국의 이익'인 것이다. '편집증적 극단이기주의' 가 어느 개인에게 나타나면 심리학자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국가, 그것도 핵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이는 위협과 잠재적 정신병을 의미하며 각양각색의 침략이라는 중증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각별히 경계해야 할문제이다. 이런 증상이 발작의 단계에 접어들기 전에 제재를 가하고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유도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이며 절대로 이에 굴복하거나 순종해서는 안 된다. 순종은 그들의 기세를 더욱 살려 줄 뿐이다. 다행인 것은 중국인이 이 문제에 대해 이미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둘째 셋째 행보를 줄기차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또다행한 것은 미국의 서구 맹방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국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행한 것은 세계의 여러 국가들과 여러 지역이 점점 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미국의 패권주의가 조장하고 있는 위협에 저항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유엔인권회의에서 미국이 앞서제출한 반중국결의안이 부결되자 열렬한 박수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유씨 부인의 사랑 천성이 어질고 생각이 깊은 유씨 부인이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쇠고기 한 근을 사 오라고 계집종 꽃분이를 저잣거리로 내보냈다. 그런데 꽃분이가 사 온 고기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빛깔이 지나치게 검고 썩은 내가 났다. 유씨 부인이 그 고깃덩어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분명히 상한 고기였다. 부인은 다시 꽃분이를 불렀다. "꽃분아, 네가 지금 다녀온 푸줏간에 고기가 얼마나 남아 있더냐?"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부인은 곧 안방으로 들어가 급한 일이 있을 때 쓰려고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돈을 모조리 꺼내 왔다. 그리고 그 돈을 모두 꽃분이에게 주었다. "꽃분아, 이 돈을 가지고 가서 그 고기를 몽땅 다 사 오너라. 너 혼자서는 무거워서 못 가져올 테니 행랑아범을 데리고 가거라." "아니, 마님, 그 많은 고기를 다 어디다 쓰시려고요?" "그건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빨리 다녀오기나 하거라." 얼마 후, 꽃분이와 행랑아범이 거의 한 짐이나 되는 쇠고기를 지게에 지고 돌아왔다. "수고했다.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뒤뜰 한 구석에 구덩이를 깊게 파고 고기를 전부 그곳에다 묻어라." 꽃분이와 행랑아범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꽃분이는 마님이 무슨 까닭으로 그런 분부를 내리시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님, 왜 아까운 고기를 모두 파묻으라고 하십니까?" "그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 아시면서도 왜 많은 돈을 들여 상한 고기를 사 오라고 하셨습니까?" "꽃분아,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고기를 모르고 사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리고 천상 그 고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푸줏간 주인은 또 어떻게 되겠느냐. 살림이 넉넉지 못할 게 뻔한 푸줏간 주인이 그 많은 고기를 버리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지 않겠느냐. 그리고 마음 또한 얼마나 상심이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모두 사서 땅에 묻으려 한 것이다." 글터 → 이글저글 총알은 시속 3,620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 이것을 촬영하려면 1초에 11,000,000의 속도로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어야 한다.비행기는 9,144미터 상공에서보다 7,620미터 상공에서 더 많은 연료를 소모한다.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대기의 압력이 줄어 들어 저항을 적게 받기 때문이다.소리는 해수면에서 1초에 332미터 속도로 달린다. 소리는 금속을 통할 때 가장 빠르고, 그 다음이 물 속, 그 다음이 공기 속이다. 즉 금속에서는 1.6킬로미터 가는데 1/3초, 물 속에서는 1초, 공기 속에서는 5초 걸린다.뱀은 귀 대신 혀로 소리를 듣는다, 뱀에게는 귀가 없다. 그러나 소리에 극도로 민감한 혀를 계속 날름거려 소리의 진동을 알아낸다.자동차가 길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는 운전자의 시력에 영향을 주어 초록색은 점점 더 밝아 보이게 하고 붉은색은 더 어두워 보이게 한다.사람의 구는 1초에 20 - 20,000번 진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박쥐는 1초에 50,000번 진동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왜 밤에 차가 더 잘 달릴까? 차는 밤이나 습도가 높은 날 더 부드럽게 달리는데, 공기가 더 차기 때문이지 공기 속의 더 많은 산소 때문은 아니다. 공기 속의 산소량은 항상 같다. 차가운 공기는 따뜻한 공기보다 밀도가 높기 때문에 엔진은 습도가 높고 차가울 때 더 많은 공기를 받아 들이게 된다. 따라서 밤이나 빗속을 운전할 때는 차의 힘이 좋고 엔진 노크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