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2 16:03 【독서편지】: 제 67 호 風磬 조회 수 11,195 추천 수 25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7 호4339.11.22 (10.02)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세계의문학 신인상 작품 모집 글터 → 명언 / 격언 기적은 가끔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게 하자면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 C.W.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구조오작위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고 취미 생활에만 열중해 있었으면 도끼자루가 다 썩었으랴. 분명히 마누라쟁이들이 장작 한번 패 줄 생각도 않고 장군멍군 따위에 열중해 있는 남편들을 원망하며 만들어 낸 말일 것이다. 하지만 도끼자루가 썩었다면 그 마누라쟁이한테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남편이 장작을 패지 않으면 자기라도 패야지 도끼자루가 썩는 걸 그래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되는 집안인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낚시춘추 김기자는 나한테 잡지의 성격을 살려서 비린내가 좀 풍기는글을 써달라고 했지만, 낚시에 대해서라면 나는 비린내 중에서도 젖비린내밖에는 풍기지 않는 초보자인즉 우선 장기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 보고 싶다. 장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여 년 전에 인도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도 있고 태국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때라고 하던가. 하지만 장기의 역사나 전래에 대해서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는 말이 낚시꾼들에게도 아주 적합하게 쓰여질 수 있으며 장기에 졸, 사, 마, 상, 포, 차, 궁이 낚시꾼들에게도 아주 잘 어울리는 말임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낚시에는 구조 오작위의 등급이 있다. 조졸, 조사, 조마, 조상, 조포,조차, 조궁을 거쳐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그리고 조성과 조선에 이르는 것이 이른바 구조 오작위라는 것이다. 조졸은 나 같은 상태의 초보자를 일컫는 말로서 한마디로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가 아직 치졸함을 벗어나지 못한 단계다. 기술적인면에서도 빵점이다. 낚싯대를 들고 고기만 잡으면 무조건 낚시꾼인 줄 아는 것도 바로 이 부류에 속한다. 고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건 말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마리도 잡히지 않으면 신경질이 나서 낚시질을 때려 치우고 술부터 찾는다. 그리고 취하면 그제서야 분이 풀려서 고성방가를 시작한다. 술을 못 마시면 집에 가서까지도 그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다. 이 단계에서 가장 낚싯줄이 많이 엉키거나 바늘이 옷에 걸리거나 초리대 끝이 망가져 버리는 수가 많은데 마음가짐에 따라 낚시대나 낚싯줄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 동작 여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반드시 낚싯대나 낚싯줄도 제멋대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몇 번 낚시질을 다니고 그러다가 재미가 붙기 시작해서 몇 번 좋은 수확을 거두거나 대어라도 두어 마리 낚게 되면 사람이 차츰 달라지기 시작한다. 장비도 제대로 갖추게 되고 기술적인 면에 대해서도 제법 신경을 쓰게 될 뿐 만아니라 공연히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대단히 고상하고 낭만적인 존재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방자할 사자가 붙어서 조사 아닌 조사로 한 등급이 올라가는데 낚시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 어디서든 낚시 얘기만 나오면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입질이 온다,라고 말해도 될 것을 반드시 어신이 온다, 라고 말하고 고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라고 말해도 될 것을 반드시 조황이 별로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단계도 바로 이 단계이며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단계이다. 하지만 옆에 앉은 사람이 자기가 잡은 것보다 큰 놈을 올리거나 수확이 잦을 경우는 대번에 의기소침해져 버리는 것도 바로 이 단계다. 그리고 이 단계만 거치게 되면 비로소 낚시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래서 조마, 조상등의 단계로 이어져 가기 시작하는데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마. 홍역할 마.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어디서든 찌가 보여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라도 낚시질을 가지 않으면 몸살이 날 지경이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연휴 때에 친구가 결혼을 하면 정강이라도 한 대 걷어 차버리고 싶을 정도다. 물론 적당한 구실을 붙여 되도록이면 식장에 참석하지 않고 낚시질을 간다. 더러는 결근도 불사한다. 조상. 과부 상. 마누라쟁이를 일요 과부로 만드는 것은 약과다. 격일 과부로 만드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사업조차 낚시 때문에시들해져 버리고 급기야는 잦은 부부 싸움 끝에 이혼하는 사례까지도 있다. 조포. 낚시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는 단계. 이쯤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절제를 시작한다. 취미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보려고도 노력한다. 낚시 때문에 인생 전체를 망쳐 버릴 듯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조차. 또 차. 다시 낚시를 시작하는 단계. 행동도 마음가짐도 무르익어 있다. 고기가 잡히건 잡히지 않건 상관하지 않는다. 낚싯대를 드리워 놓기만 하면 고기보다 세월이 먼저 와서 낚시바늘에 닿아 있다. 그러나 아직 낚을 수는 없는 단계. 고기는 방생해줄 수 있지만 자신은 방생해 주지 못하는 단계. 조궁. 다할 궁. 이제부터는 낚시를 통해서 도를 닦기 시작하는 단계. 남작. 마음 안에 큰 바구니를 만들고, 자작. 마음안에 자비를 만들고, 백작. 마음안에 백 사람의 어른을 만들고, 후작. 마음 안에 후함을 만들고, 공작. 나중에는 모든 것을 다 비운다. 그러면 비로소 조성이나 조선이 되는 바 달리 말하자면 도인이나 신선이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는 조졸이니 어찌 그런 경지를 바라볼 수조차 있을 것인가. 하여튼 틈만 나면 기를 쓰고 낚시질을 떠나 보지만 내게 술 대신 낚시에 취미를 붙이라고 낚싯대까지 마련해 준 내 아내는 벌써부터 도끼자루가 썩을까 봐 약간 맛이 가는 듯한 표정이다. 고기라도 좀 많이 잡아 온다면 또 모르겠는데 조졸이 무슨 실력이 있어서 고기를 많이 잡아 온단 말인가. 얼마전에 월척을 한마리 올리기는 했지만 아마도 붕어가 미쳤거나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생각던 중에 스승을 한 분 모시기로 작정했는데 그 분이 바로 춘천호 인람에서 만난 목 영균 선생님이시다. 그 분은 붕어를 따라 집을 이사하면서까지 낚시를 즐기실 정도로 광이시지만 기후 조건이나 수심의 변동등에 따라 고기가 활동하지 않는 날은 같이 활동하지 않고 고기가 활동하는 날만 같이 활동하는 베테랑이시다. 이른바 외대에 외바늘의 전통파. 지금 이사해 있는 집 바로 앞에다 전용 좌대 하나를 만들어 놓고 하루에 평균 한 마리 꼴로 월척을 올리신다.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나는 귀찮을 정도로 쫓아 다니며 비법을 물어 보았다. 부디 통촉하옵소서. 하도 열심이니까 내 한 가지만 가르쳐 주지. 여자 스타킹이나 모기장에다 삶은 닭발이나 원자탄 따위를 돌과 함께 싸서 던져 놓아보게. 일단 모인 고기는 상당히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지. 냄새는 나는데 먹지는 못하거든. 그때 낚시를 던지면 비교적 잘 물리게 되어 있어. 간신히 알아낸 비법 중의 하나다. 실제로 해보니까 확실히 다른 날보다는 수확이 좋았다. 하지만 또 다른 비법이 상당히 많이 비장되어져 있을 것 같은데 좀처럼 털어놓으려 들지 않는 듯한 기색을 보이신다. 고생을 좀더 한 다음에 배우는 게 좋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 낚시춘추의 김기자의 주문대로 비린내가 나는 글을 쓰는 것은 당분간 보류해 두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분의 얘기를 한번 써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고깃비늘이 번쩍거리고 비린내가 훅훅 끼쳐 오는 글을 한번 써볼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있어서 시급한 일은 우선 조졸부터 면하는 일이다. 도끼자루야 썩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람!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궁궐 기왓장에 서린 백성의 한숨 - 박종진(숙명여대 교수) - 1/2 공사장이 눈물바다를 이룬 사연은? 1167년(의종21) 3월 어느날. 개경의 중미정 공사장은 때아닌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중미정을 지을 때 부역나온 사람들은 식량을 스스로 조달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밥 한술씩 나누어 주어서 그것을 먹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그 아내가 음식을 마련하여 왔다. “친한 분들을 불러서 함께 드시지요.” “가난한데 이 음식을 어떻게 마련했소. 다른 남자와 사통하고 얻었소, 아니면 남의 물건을 훔쳤소.” “얼굴이 못생겼으니 누구와 사통하겠으며 성격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다만 머리를 잘라서 팔았을 뿐이에요.” 아내는 짧아진 머리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설움이 복받쳐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주위 사람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고려사>에 실린 내용이다. 의종은 즉위 초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였지만, 그것이 좌절되자 말년에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한 신하들과 어울려 자주 놀러다녔다. 중미정은 그러한 의종 말년의 분위기 속에서 지어졌다. 중미정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 그들은 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일을 했을까? 이들은 일반 백성이었고 요역에 징발되어 국가의 일을 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일에 동원되어 일하는 것을 요역이라고 한다. 국가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은 일반 백성들로부터 징발하는 단순 노동력뿐 아니라, 군역. 향리역. 기인역. 공장역 등의 직역도 있었다. 그렇지만 직역은 역의 대가로 토지 등을 받는다는 점에서 아무런 대가가 없는 요역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러면 백성들은 요역으로 어떤 일을 하였을까? 대표적인 것이 토목공사이다. 여기에는 궁궐. 관청. 절 등 주요 건축물을 짓고 수리하는 일, 성을 쌓는 일, 왕릉을 조성하는 일, 저수지를 만드는 일이 포함되었다. 또한 백성들은 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운반하는 일에도 항상 동원되었다. 그 밖에 토지개간이나 국공유지의 경작 등 농사활동에도 징발되었다. 또한 왕이나 사신의 행차를 맞이하는 일 또한 중요한 요역의 하나였다. 요역 징발은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는 것과 지방 군현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는 요역으로는 토목공사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공사에는 군인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성 쌓기를 제외하고는 주로 공사 현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징발하였다. 반면에 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운반하는 일은 지방 군현에서 주도하는 요역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 지방 군현에서는 수령이나 향리들이 임의로 징발하는 일도 많았는데, 국가에서는 이러한 역을 잡역이나 급하지 않은 역이라 하여 금지하였다. 수령의 임무 중 “부역을 균등히 해야한다”는 규정은 이와 관련이 있다. 우리만 왜 힘들게 일하지? 요역 징발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59세가지의 양인 남자였다. 따라서 노비와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던 양수척은 징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양인층을 요역으로 징발하지는 않았다. 관직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군인. 향리. 기인등 직역을 하는 사람은 요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효자. 의부. 절부와 부모를 시중드는 장정과 중환자는 규휼의 명분 아래 역을 면제하였으며, 승려도 징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징발하였을까? 고려 전기의 경우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이 등급에 따라서 요역을 차등 징발한 셈이다. 이는 조선 초기 토지 면적을 토대로 징발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초(경국대전)에는 토지 8결당 사람1명을 징발하여 6일동안 부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징발 기준이 사람 수에서 토지 면적으로 바뀐 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여 고려사회를 인신적인 지배에 기반한 고대사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람 수에 따라 요역을 징발하였다고 하여 그 사회를 고대사회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중세사회에서도 인구에 대한 파악과 지배는 여전히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살펴보자. 우선 요역 징발은 농번기를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주요 노동력 징발이 농한기라 할 수 있는 음력6, 7, 8월과 12, 1,2, 3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노역을 중지하는 시점도 농사가 시작되는 3, 4월에 집중되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고려시대의 요역 징발기간에 대하여는 중국 당나라의 규정이나 조선 초기의 기록을 토대로 1년에 20일 정도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규정이 무시되기도 하였으며, 대규모 토목공사인 경우는 농번기가 되어도 일을 끝내지 않았고 심지어 몇 년 동안 계속 일을 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책임자들이 과잉 충성하여 밤낮으로 일을 시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물론 사람을 규정 이상으로 초과 징발하였을 경우 다른 세금을 감면하였지만, 이것으로 부당한 징발이 과연 보상되었을까. 노동조건 역시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다. 가장 중요한 식량의 경우 앞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대개는 징발된 사람들이 스스로 준비하였다. 왜냐하면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일일이 식량을 지급하는 일은 국가의 일반 재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종때 대안사를 지었는데, 이 때 징발된 사람들은 밤낮으로 일을 하였고, 이들에게 음식을 나르기 위한 아내와 자식들의 발걸음이 봄부터 여름까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 가족까지도 식량 조달 때문에 노동력을 빼앗겨 농사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징발된 사람들이 항상 음식을 스스로 조달한 것은 아니었다. 구휼의 차원에서 특별히 사람들에게 음식을 지급한 예가 있다. 또 원종 때 일본 정벌을 위해 전함을 건조하였는데, 이 때 징발된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제공하였다. 식량 외에도 의복과 각종 도구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심지어 군인들도 개인 장비와 군복을 스스로 준비했던 사실은 요역노동에 징발된 백성들의 부담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상태에서 변변한 잠자리를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주로 공사장 부근의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한 것은 물자를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원칙 때문이었다. 이렇듯 노동의 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커다란 고통 속에서 일을 하여도 굶주리는 동료를 위해 부족한 밥을 나누어 주는 인정은 가난한 백성 사이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손바닥에 그린 햇님 맹인·중복 장애인 시설인 '라파엘의 집'에 첫발을 디딘 지도 어느덧 사 년이 지났습니다. 순간순간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만, 보지도 듣지도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하는 원생들에게서 오는 위로가 크기에 오랜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르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나 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구십사 명이나 되는 '라파엘의 집'의 가족 중에서 가장 큰 어른을 소개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름은 차낙중, 차가 달리는 중에 떨어졌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지요. 낙중이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달리는 차 속에서 창 밖으로 내던져져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발견되어 여러 절차를 거쳐 이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낙중이는 가끔 햇살이 따뜻한 곳에 쭈그리고 앉아 손바닥에 해라고 쓰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해만큼은 볼 수 있다고 손짓으로 설명해 주곤 합니다. 누군가가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면 여기저기 자랑하면서 다니다가 문에 부딪혀 상처를 입고서는 양호실에 와 치료를 해 달라고 하는 낙중이의 모습 속에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느낍니다. 낙중이는 자기를 버린 부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백 원짜리 동전 하나 없지만 궁핍함을 모릅니다. 또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보고 듣고 말할 수 없지만 늘 경쟁속에서 남들보도 더 놓아지고 싶고 더 잘살고 싶어서 허영과 질투, 이기심, 심지어는 아직 빛을 보지도 못한 아기들의 목숨까지 앗아 가고 있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낙중이는 소리 없이 지적하고 있는 듯합니다. 늘 껄껄걸 웃으면서 밝게 살아가는 낙중이의 모습을 보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고 배우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풀내음과 꽃내음이 물씬 풍기는 계절, 나무 그늘에 앉아 해를 바라보며 껄껄 웃으면서 또 다시 저의 손바닥에 '해'라고 써 주는 낙중이의 모습을 보면서 이 작은 길을 충실히 걸어가겠노라 다짐했습니다. 낙중이가 가리키고 있는 은 햇살을 향하여……. 최효숙 님/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7 - 경험주의 철학의 마감: 흄과 그 이후의 문제 그 때 세계에서는 1783년: 러시아, 크리미아를 병합 1789년: 미국 워싱턴, 초대대통령에 취임 영국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라고 볼 수 있는 D. 흄의 철학은 영국 근대철학의 결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철학을 위한 준비를 끝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흄 이후에는 또 하나의 흄이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얘기한 대로 흄은 존 로크와 그의 후계자인 버클리를 연구했다.로크의 경험론과 버클리의 주관적 인식론을 받아들여 후자의 철학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흄의 철학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인식과정을 위한) 심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 자체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면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이 될 수가 없다. 대륙 계통의 수학이나 기하학을 바탕으로 하는 연역적 방법에 비하면 경험과 귀납을 중심 삼는 심리적 경향을 택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흄은 인식은 크게 구별하여 두 가지 내용과 과정을 밟는다고 보았다. 그 하나는 외물과 연관되는 감각이며, 다음은 지식을 구성해내는 반성이다. 기초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이다.감각은 생기가 넘치고 강렬한 것이다. 그 안에는 지적인 감각뿐 아니라, 증오, 원망, 의욕까지도 포함되는 인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한 것은 지각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렇게 주어진 지각내용은 약하고 밝지 못한 인상의 기억 안에 생성되는 모상이 된다. 우리는 거기에서 좁은 의미의 관념 또는 사상 같은 것을 반성작용에 의해 일으킨다. 이렇게 본다면 기초적이면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감각에서 주어지는 인상이다. 그 인상이 발단이 되어 지각의 내용을 인상으로 만들고, 인상이 재인되는 것, 다시 말하면 지적으로 정리된 것을 관념이라고 본다. 만일 이런 인식의 형성과 과정을 대륙의 이성주의에 비교한다면 완전히 역방향을 택한다고 보아야 하겠다.대륙의 연역성에 비한 귀납성의 의미도 짐작할 수가 있다. 만일 이런 철학적 인식의 한계성이 주어진다면 철학의 전통적 과제라고 볼 수 있는 볼 수 있는 외물로서의 실재는 어떻게 되는가? 토머스 홉스는 그것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시켰고, 존 로크는 외물과 더불어의 철학을 인정했었다. 버클리는 그것을 제외한 주관적 인식을 요청했다. 이에 비하면 흄은 그것을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거부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륙철학이 비판 없이 택해온 정신적 실체도 인정할 수가 없어진다. 후일에 칸트는 이성의 기능을 철학의 주체로 삼아, 그 이성의 배후에 자아성을 인정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를 남겼다. 이성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흄은 자아도 사물과 마찬가지로 지각들의 결합에 지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흄의 철학의 한계를 대단히 축소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마침내는 깊은 회의로 몰아가는 경향으로 이끌어갔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흄의 회의로부터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려 했는가하면, 칸트는 흄을 통해 독단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과거의 철학이 비판이나 반성이 없이 실체라든지 인과성 같은 것을 문제삼아왔으나, 그것은 우리의 심리적 연상에 따른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의 생각밖에 어떤 실체라든지 인과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에서 이성에 의한 수학의 확실성을 인정하며 실증적인 확증이 용납되는 것 같아도 그것을 가지고 합리적인 형이상학이나 자연과학의 절대 확실성이 성립되는 듯이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윤리학이나 종교의 문제는 감정과 정서적인 기능에 따르는 것이다. 이성적 합리주의가 원리와 종교를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길이다. 이런 흄의 철학에 접하고 보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의 한 한계성에 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흄 이후에는 제 2의 흄이나 경험주의 철학자가 등단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흄보다 연소한 친구, 세계적인 경제학자 한 사람의 이름을 남겨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가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A. smith, 1723-1790)다. 이상스럽게도 그 시대와 사회문제를 해결짓기 위한 윤리학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고 그 영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윤리의 기본을 감정적인데 두었다는 점과 개인윤리를 사회윤리로 발전시키는 데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다 잉글랜드의 대학보다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공부했고, 둘 다 큰 업적을 남겼다는 데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라이프니츠는 끝으로 철학적 발전이 그쳤듯이, 영국에서는 흄을 끝으로 경험주의 철학의 큰 막이 내렸다고 보야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갈래의 흐름을 통합 새로운 철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독일의 칸트였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고주망태'의 '고주'는 원래 토박이말...그 뜻은? 사람이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고주망태'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퍼마셨다'고 말하지요. 고주망태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요? '고주'를 '고주'(쓸고, 술 주)라고 해석하는 분도 있지요. 그러나 '고주'는 '쓴 술, 또는 독한 술'이란 뜻을 가진 한자어가 아닙니다. '고주'는 고유어 입니다. 원래는 '고자(아래 아)'이지요. '고자(아래 아)'란 '고조'라고도 썼는데, 그 뜻은 누룩이 섞인 술을 뜨는 그릇을 말합니다. '망태'는 '망태기'와 같은 것으로, 무엇을 담는 그릇을 말하기도 하고, 전혀 쓸모없이 되어버린 상태를 말하기도합니다. 그래서 '고주망태'란 술통을 통째로 마신 것처럼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안중근 1909년 10월, 안중근은 노보케에프스크에 체재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친구들에게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왜 갑자기 떠나려하는가 물었지만, 안중근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져서 여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 곳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동공보와 원동보등의 각 신문을 살폈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며칠 안으로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친지 김성백의 집에서 유하다 일찍 일어난 다음날 아침, 1909년 10월 26일,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멋있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권총을 품안에 넣고 역을 향해 나간 것은 오전 7시 경이었다. 역에는 많은 러시아 경찰과 헌병들이 이토를 마중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안중근은 찻집으로 들어가 두세 잔 차를 마시고 이토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였다. 이토는 특별객실안에서 러시아 제국 재무대신 코코흐초프의 영접을 받으며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군 수비대의 열병을 받았다. 군악대의 음악이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영접나온 각국 대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일본인 환영객들이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나아가는 키 작은 백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근은 그가 이토일 것이라 확신하고 권총을 꺼내 그의 우측에서 세 발을 발사하였다. 그는 이토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가 과연 이토인가 의구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을 쏜 것이 아닐까? 하고 망설이면서 후방에서 걸어오는 일본인을 향하여 다시 네 발을 발사하였다. 이때 러시아 장교가 그를 덮쳐 쓰러뜨렸다. 안중근은 넘어지면서 하늘을 향하여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 를 세 번 외쳤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총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철도 총재 나카무라 제코, 무로다 요시부미, 후루야 히사즈나 등의 부축을 받으며 열차 안으로 옮겨졌다. 수행의사 고야마 젠과 거류민단에서 파견된 의사 모리 다카시의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고야마가 권하는 블랜디를 입에 머금은 채 가해자가 한국인이란 말을 듣고는 바보 자식 이란 말을 했고, 다시 블랜디를 요구하여 마셨지만, 세 모금째부터는 이미 마실 기력조차 없었으며, 이윽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9시 30분 피탄 후 30분이 지난 오전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체를 기차로 대련에 실어갔다. 사건 후 러시아 병사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한국인 통역을 통해 러시아 재판소 검사의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러시아 재판관의 물음에 이렇게 항변하였다. 나는 대한 국민이다. 이토 그놈이 우리의 독립을 강제로 빼앗고, 우리의 민족을 살육하였으나 나의 이 행동은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고, 우리의 민족을 보호하며,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감동되어 혀를 차며 한국에도 인재가 있다. 한국에도 인재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측에서는 한국인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기에 안중근을 곧 일본 영사관으로 이송하였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과 연루자들을 넘겨달라고 러시아와 교섭하여 러시아의 승낙을 었었다. 그리하여 하얼빈에 있는 한국사람 9명을 체포하여 4일간 심문하고 여순으로 압송하였다. 안중근의 처와 아이들도 하얼빈에서 잡혔고, 두 동생도 진남포에서 체포당한 뒤 공모한 일이 있는가 하여 엄한 심문을 당하며 혹심한 학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여러 친척 집도 모두 수색당하였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씨는 평양의 천주교 성당에 있었는데 경찰이 찾아와서 당신의 아들이 이토 공작을 살해하여 두 나라에 크나 큰 사변을 빚어냈소. 이것은 당신이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므로 당신도 죄가 없다 할 수 없소. 라고 을러대니 어머니는, 아들이 밖에서 한 일을 내가 알 리 없지만 나라 위해 죽는 것은 국민의 사명이다. 내 아들이 나라 위해 죽는다면 나도 아들을 따라 죽을 것이고 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겠다. 고 하였다. 안중근은 심문이 시작되자 이름은 안응칠, 나이 31세, 직업은 사냥꾼, 출신은 한국 평안도 평양 교외라고 답하며 자신이 한국인임을 명확히 하였지만, 부모와 처자가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종교에 대해서는 천주교라 답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왜 살해했는가. 라는 미조부치 검찰관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이토의 죄상을 열거했다. 이토의 열 다섯 가지의 죄상을 그는 미리 마음속으로 정리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1. 10여년 전 이토가 지휘하여 한국의 왕비를 암살하였다. 2. 5년 전에 이토는 한국에 매우 불리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3. 3년 전에 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한국의 군대에 불이익을 초래하였다. 4. 이토는 한국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5.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등의 것이었다. 11월 14일의 안중근에 대한 제2회 심문에 앞서 검찰측에서는 독자적인 수사를 벌인 결과, 그의 본명이 안중근이고 그의 조부는 진해군수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안태훈은 천주교도이며 대대로 사대부 명문 집안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동생이 둘 있어서, 정근은 경성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공근은 진남포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안중근에게는 아내가 있고 다섯 살과 두 살박이 아들이 있으며, 지금 하얼빈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두 포착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말하자 안중근은 단지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라고 하면서 난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고 단언했다. 마지막 공판에서 나는 이토를 개인자격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죽였다. 가장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심문에 임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당당하게 진술했던 것이다.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그는 수십 일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여순감옥에 있을 때에는 그는 마치 생사를 잊은 듯,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가 5개월간이나 기거했던 여순감옥소의 2평 마루 감방은 제2동 2층 왼쪽에 있었다. 음산한 감방복도, 좌우양측 감방에서 협소한 철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광선 아래에서 그는 80여 점의 유묵을 남겼다. 그리고 2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글도 지었다. 사형 집행일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그는 새로 지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희색을 띠며 형장으로 나섰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이라면 국권회복의 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대한이 독립하여야만 동양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고 따라서 일본도 역시 장래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10시. 교수대의 대상에 오른 도마 (세례명) 안중근은 3분동안 기도하였다. 이때 그는 32세였고, 그날은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렸다.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사형선고가 있은 뒤 안중근을 면회하러 가는 그의 두 동생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상고를 거부하고 깨끗이 교수대에 오르라고,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몸바치려고 끊었던 안중근의 손가락을 평생 간직한 채,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 을 믿는 천주신앙 속에서 지내다가 48세를 일기로 아들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시모시자 즉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일컫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1. 대학의 뿌리는 길드였다 나라마다 대학 제도의 뿌리가 되는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모습의 대학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이 대학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 학생 조합(길드) 또는 교사 조합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을 영어로 university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 universitas에서 온 말로 `전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통된 목적을 가진 집단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수공업자 조합의 회원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위한 길드였다. 당시 학생들은 교사들의 명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어서 아는 이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생활의 안전과 서로 돕기 위해 조합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대학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다. 이 대학은 로마 법과 교회법 등 법학 강의로 유명하여 12세기 말에는 전 유럽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이 학생들은 안전과 서로 돕기 위해 이탈리아 학생과 이탈리아 외부의 학생으로 조직된 2개의 길드를 결성했다. 파리 대학은 노트르담 성당 부속 학교의 명성에 끌려 모인 교사들이 12세기 말 길드를 결성함으로써 설립되었으며 1200년 필립 2세로부터 특허장을 획득했다. 이 파리 대학은 신학 연구의 본산이 되었다. 옥스포드 대학은 12세기 전반기에 생겼는데,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된 1167년 헨리 2세가 파리에 있던 영국 학자들에게 귀국 명령을 내림으로써 그 기틀이 잡혔다. 이후 13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14세기에는 독일에도 대학이 생겨났다. 이렇게 출현한 대학들은 처음에는 정해진 학교 건물이 없어서 강의실은 교사의 집이나 교회 등을 빌려서 사용했다. 또한 모든 대학은 군주나 도시 행정당국 또는 교회의 지배나 통제에서 독립하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했다. 이런 투쟁의 결과 `대학의 자치권`을 얻었는데 여기에는 대학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법권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대학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길드에 대한 감독권 등도 대학이 가지게 되었다.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것들은 문법, 수사, 논리의 3교과와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4교과였다. 3교과를 수료하면 문학사(bachelor of arts)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5,6년간의 수업을 더 거치면 비로소 독립된 교사 자격인 문학 석사(master of arts)가 될 수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앞에서 말한 7교과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전문학부인 법률, 의학, 신학등을 공부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 과정을 수료하면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당시에는 신학이 가장 이수하기 어려운 학문으로 꼽혔다. 그런데 오늘날 단과 대학을 가리키는 칼리지(college)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는 외부 인사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해 준 것에서 기원한다. 이런 기숙사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무료로 또는 아주 값싸게 숙식을 제공했으며 교사가 함께 지내면서 학습을 도와 주기도 했다. 칼리지 중에 유명한 것은 1258년 파리의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 설립한 소르본 대학, 영국 로체스터의 주교 머튼의 월터(Walter of Merton)가 세운 옥스포드의 머튼 칼리지, 영국의 대제후인 존 벨리올(John Baliol)이 세운 벨리올 칼리지 등이 있다. 학문의 중심지로서 교회를 제치고 부상한 대학은 중세 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대부분의 저명한 학자들은 대학에 속해 있었고 각 학부는 그 분야의 최고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문학 석사는 교사나 행정가로, 법학 박사는 법률가나 관리로, 신학 박사는 신학 교수나 고위 성직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주장되는 `대학의 자치`와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이 중세 대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때의 자치나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근대적인 의미의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자치 도시, 수공업자 조합, 상인 조합 등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특권 안에서의 자치와 자유였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7. 중국의 부족한 면만 크게 보려 하는 미국 '1996년 4월 24일을 기억하라.' 내가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려는데 마침 Tv에서는 유엔인권위원회의 제52차 회의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몇몇 서구 국가들이 제출한 '중국인권상황'의 결의초안에 대해 심의와 표결을 하지 않는다는 안을 투표에 부켰다. 투표결과 27대 20로 그 안건은 통과되었고. 나머지 여섯 표는 기권이었다. 1990년이래 서구 국가는 줄곧 중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의안을 통과시키려하였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이 제출한 '불이행' 건에 동의하였으나 일본만 서구 국가의 편에 섰고,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한국은 기권표를 던졌다는 점을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절대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에 표를 던졌다. 이러한 표결의 결과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인권문제에 대해 심각한 사고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 주었을 뿐 아니라 '인권의안'을 '제재'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미국의 저의가 이미 대다수 국가에게 반감을 사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1991년 9월 영국 수상 메이저가 홍콩 국제공항 건설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여 리펑 총리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중국에 오기 전한 야당 정치가로부터 중국 총리와 회담할 때는 반드시 인권문제를 거론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라는 엉뚱한 말을 하였다. 이에 대한 리펑 총리의 대답은 아주 걸작이었다. '사실 나도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중국이 100여 년 간외국 열강들의 능욕을 받았다는 사실과 이 시기에 당신네 나라들이 중국인민의 인권을 침범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직까지 정산하지 못했음을 잊지 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라고 응수하였다. 역사가 만들어내는 풍자는 사람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한다. 2차대전이 종결된 1945년까지 100년 간 중국은 수많은 서구 열강들에게 침략, 약탈, 능욕을 당하였다. 중국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을 빌자면그야말로 '주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喪權辱國]' 한 것이다. 100년간 그들이 중국 인민의 인권을 유린한 것은 지금까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수준이었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약 밀수업자라고할 수 있다. 그들은 중국에 아편을 대량으로 팔기 위해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인권에 대한 이런 기록이 시간이 흐른다고 없어질까? 쌍하이 와이탄(外繼) 지역에 있는 황푸)공원 입구에는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는 중국인을 개만도 못한 짐승으로 본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인권기록들을 당신들은 그 당시 어떤 식으로 심의하였는가? 당신들은 언제부터 이런 대규모의 인권 유린자들을 지금과같이 위엄있고 당당한 인권운동가로 양성하였는가? 큰 잘못도 고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으나,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의문점이 남게 된다. 서구인이 주장하는 인권이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구린내 나는 실용주의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미국은 페르시아만전쟁 때 서구 국가들과 함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이라크를 쿠웨이트 영토에서 쫓아내었다. 그리고는 패배한 이라크를 유엔의 감시하에 놓아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힘을 축적할 수 없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라크에 단행된 각종 물자에 대한 금수조치 해제를 지연 시키도록 다른 나라들을 조종하였다. 이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까지도 위협받게 되었음은 Tv 화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의 행위는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여 준다. 만약 미국인이 진정으로 인권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이라크 백성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학업을 중단하고 길거리에서 쓰러지는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끝까지, 그들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철저하게 보여주었다. 사담 정부가 미국의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좀더 명확히 말하자면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때 미국의 원조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미국이 중동에서 챙기는 석유이익을 침범하였으니-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다음 친미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라크는 반드시 철저한 징계를 받아야 하며, 이 기간 동안 이라크의 인권문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미국의 이익만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유엔인권위원회 제52차 회의에서 모든 회원국은,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야만적으로 폭격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사건을 질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 미국은 이 결정에 반대하였다. 투표결과는 32 대 1로 이스라엘이 레바논 백성들에게 자행한 살상을 미국만이 용납하기로 한 것이다-이것 역시 미국에 거주하는 유태인이라는 압력단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정치적 선택이었다-결국 미국은 인권존중 대신 정치적인 이익을 위하여 추악한 흥정을 벌인 셈이다. 그러므로 서구 국가들이 인권문제에 대해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중국이 내세우는 변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클린턴과 내가 cBS 방송국의 60분짜리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여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질 것이다.'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폭격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었는데도 미국의 대표는 유엔에서 다른 나라와는 반대되는 표를 던졌습니다. 이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중국 인권상황'에 대한 태도에 비추어 볼 때 당신들 인권개념에 두 가지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클린턴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이 두 문제는 따로 생각해야 하는데.. ....." '따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분명히 두 가지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중국의 인권상황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 정부가 '인권 중에 가장 중요한 권리는 바로 생존권과 발전권이다'라고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인 원인과 중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만족시키는 것과 자녀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의 인권상황을 개선시키는 가장 구체적인 빙법은, 12억이 넘는 인구를 잘 활용해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여 국민들이 부유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중국의 역사단계를 고려하지 않고 중국이 요구하는 ' 평등한 대화'를 거절하면서 나쁜 저의를 가지고 함부로 매도하고,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듯 중국을 훈계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고 중국을 '별책부록'쯤으로 밀어내자는 음모인 것이다. 티베트의 인권문제는 미국 의회의 인권보고서에 매번 등장한다. 최근에 제출된 1995년도 인권보고서의 중국 란에 실린 티베트에 관한 글에는 '들은 바에 의하면 "믿을 만한 보도에 따르면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과 같이,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게' 할 낱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을 빌미로 마구 공격하고 있는데 그 내용 중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들은 중국 정부가 여전히 티베트인들의 생활수준을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고 공격하는가 하면 또 티베트의 가장 큰 도시인 라사와 그 밖의 지역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건설들이 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파괴하였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은 일단 마음만 먹으면 어떤 구실이든 붙일 수 있고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명을 씌우려면 어떤 구실인들 만들어 내지 못하겠는가? 나는 여기서 문화부차관을 역임한 유명한 원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창한 영어와 변화무쌍한 연기력으로 미국영화 {리틀 붓다}에 출연하였던 그는. '어떤 신념'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악의에 가득찬 반중국영화에서는 여러 차례 티베트를 점령당한 국가로 호칭하였다. 이 예술가는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출연료의 유혹이나 그가 맡은 역할에 푹 빠졌던 것일까? 이는 간단하게 그자신의 비애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문제이다. 잠시 화제가 다른 길로 빠졌다. 옛말에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만 생각할 뿐, 반이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서구 국가들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할 때 가지는 태도를 비유하기에 적절할 것 같다. 그들은 우리들의 부족한 면만을 주시할 뿐 우리가 이룬 업적이나 진보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린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사실을 과장하고 진상을 왜곡하며 무고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의식형태가 다른 중국에 대해 '인권'의냉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인식상의 차이라고만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중국 고아원에 대한 보도는,오히려 중국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서구 보통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A F P의 보도에 의하면, 많은 미국 사람들이 나서서 중국 고아원에서 원생들을 보살피는 태도를 옹호하였으며 중국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팩스가 대량으로 들어와 중국 민정부(民政部)와 사법부의 전화선이 며칠 동안 불통될 정도였다고 한다.보르딩이라고 하는 어느 미국 부인은 '당신들은 이 보도의 내용과 일치되게 말하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서구의 매스컴들은 그들이 날조하여 편집한 이야기를 중국 정부와 관련지어, 마치 중국 정부가 고아들을 일부러 살해하려는 음모를 품고 있다는 식의 화면을 연출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졸렬하고 비도덕적인, 미중유의 모함은 파쇼 독일의 선전부장이었던 궤벨이 들어도 놀랄 것이다. 만일 모함한 당사자가 중국에 온다면 격분한 수많은 군중들의 돌과 몽둥이 세례로 찢겨 죽어 먼저 그의 인권이 철저하게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바람이 하는 말 해와 달이 싸웠다. "나뭇잎들은 초록색이야." 하고 해가 말하니까, 달이 "아니야, 은색이야."하고 대받았다. 달이 "사람들은 일도 하지 않고 주로 잠만 자지."하고 말하니까, 해가 "아니야, 사람들은 주로 움직여." 하고 말했다. "그럼 왜 지구가 그렇게 조용하니?" 달이 지지 않고 다시 해에게 말했다. "넌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었니? 지구는 늘 시끄럽기 짝이 없어." "아니야, 너야말로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었니? 지구도 다른 별들처럼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어." 그들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람이 나타나 말했다. "너희들이야말로 정말 우습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싸우니? 나는 해가 떠 있을 때도 불고, 달이 떠 있을 때도 불어, 낮에 해가 떠 있을 때는 바로 해가 말한 대로야. 지구는 시끄럽고,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움직이지. 나뭇잎은 초록색이고 그러나 밤이 되어 달이 떠 있을 때는 모든 게 달라져.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함이 온 누리를 다스리지. 물론 나뭇잎은 달빛을 받아 은빛을 띠게 돼. 간혹 구름이 달을 가리면 검은빛을 띠기도 하지. 그러니까 해 너도, 달 너도 사실은 다 알지도 못하는 거야. 세상은 자기 주장만이 다 옳은 게 아니야. 세상을 자기 입장에서만 이해하면 안 되는 거야." 글터 → 이글저글 고슴도치는 머리, 옆구리 등 배를 제외한 모든 곳에 총 30,000개의 바늘같은 가시를 가지고 있다. 이 가시는 살 속에 한번 박히면 빼내기 어렵고 점점 더 깊이 들어가 수술을 해야만 겨우 빼낼 수 있다.고래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토끼는 하루에 18번 낮잠을 잔다.낙지는 세 개의 심장을 갖고 있다.원숭이는 동물학적으로 이야기할 때 다리가 없다. 개구리는 이가 있고, 두꺼비는 이가 없다.고릴라는 오후 6시에 잠을 잔다.올빼미는 눈에 움직임이 없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몸은 전혀 움직이자 않은 채 머리만 거의 완전히 한 바퀴 돌릴 수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25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Date2024.11.08 風文 Views456 Read More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Date2024.11.06 風文 Views376 Read More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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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67 호4339.11.22 (10.02)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세계의문학 신인상 작품 모집 글터 → 명언 / 격언 기적은 가끔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게 하자면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 C.W.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구조오작위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고 취미 생활에만 열중해 있었으면 도끼자루가 다 썩었으랴. 분명히 마누라쟁이들이 장작 한번 패 줄 생각도 않고 장군멍군 따위에 열중해 있는 남편들을 원망하며 만들어 낸 말일 것이다. 하지만 도끼자루가 썩었다면 그 마누라쟁이한테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남편이 장작을 패지 않으면 자기라도 패야지 도끼자루가 썩는 걸 그래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되는 집안인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낚시춘추 김기자는 나한테 잡지의 성격을 살려서 비린내가 좀 풍기는글을 써달라고 했지만, 낚시에 대해서라면 나는 비린내 중에서도 젖비린내밖에는 풍기지 않는 초보자인즉 우선 장기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 보고 싶다. 장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여 년 전에 인도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도 있고 태국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때라고 하던가. 하지만 장기의 역사나 전래에 대해서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는 말이 낚시꾼들에게도 아주 적합하게 쓰여질 수 있으며 장기에 졸, 사, 마, 상, 포, 차, 궁이 낚시꾼들에게도 아주 잘 어울리는 말임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낚시에는 구조 오작위의 등급이 있다. 조졸, 조사, 조마, 조상, 조포,조차, 조궁을 거쳐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그리고 조성과 조선에 이르는 것이 이른바 구조 오작위라는 것이다. 조졸은 나 같은 상태의 초보자를 일컫는 말로서 한마디로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가 아직 치졸함을 벗어나지 못한 단계다. 기술적인면에서도 빵점이다. 낚싯대를 들고 고기만 잡으면 무조건 낚시꾼인 줄 아는 것도 바로 이 부류에 속한다. 고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건 말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마리도 잡히지 않으면 신경질이 나서 낚시질을 때려 치우고 술부터 찾는다. 그리고 취하면 그제서야 분이 풀려서 고성방가를 시작한다. 술을 못 마시면 집에 가서까지도 그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다. 이 단계에서 가장 낚싯줄이 많이 엉키거나 바늘이 옷에 걸리거나 초리대 끝이 망가져 버리는 수가 많은데 마음가짐에 따라 낚시대나 낚싯줄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 동작 여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반드시 낚싯대나 낚싯줄도 제멋대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몇 번 낚시질을 다니고 그러다가 재미가 붙기 시작해서 몇 번 좋은 수확을 거두거나 대어라도 두어 마리 낚게 되면 사람이 차츰 달라지기 시작한다. 장비도 제대로 갖추게 되고 기술적인 면에 대해서도 제법 신경을 쓰게 될 뿐 만아니라 공연히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대단히 고상하고 낭만적인 존재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방자할 사자가 붙어서 조사 아닌 조사로 한 등급이 올라가는데 낚시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 어디서든 낚시 얘기만 나오면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입질이 온다,라고 말해도 될 것을 반드시 어신이 온다, 라고 말하고 고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라고 말해도 될 것을 반드시 조황이 별로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단계도 바로 이 단계이며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단계이다. 하지만 옆에 앉은 사람이 자기가 잡은 것보다 큰 놈을 올리거나 수확이 잦을 경우는 대번에 의기소침해져 버리는 것도 바로 이 단계다. 그리고 이 단계만 거치게 되면 비로소 낚시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래서 조마, 조상등의 단계로 이어져 가기 시작하는데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마. 홍역할 마.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어디서든 찌가 보여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라도 낚시질을 가지 않으면 몸살이 날 지경이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연휴 때에 친구가 결혼을 하면 정강이라도 한 대 걷어 차버리고 싶을 정도다. 물론 적당한 구실을 붙여 되도록이면 식장에 참석하지 않고 낚시질을 간다. 더러는 결근도 불사한다. 조상. 과부 상. 마누라쟁이를 일요 과부로 만드는 것은 약과다. 격일 과부로 만드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사업조차 낚시 때문에시들해져 버리고 급기야는 잦은 부부 싸움 끝에 이혼하는 사례까지도 있다. 조포. 낚시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는 단계. 이쯤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절제를 시작한다. 취미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보려고도 노력한다. 낚시 때문에 인생 전체를 망쳐 버릴 듯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조차. 또 차. 다시 낚시를 시작하는 단계. 행동도 마음가짐도 무르익어 있다. 고기가 잡히건 잡히지 않건 상관하지 않는다. 낚싯대를 드리워 놓기만 하면 고기보다 세월이 먼저 와서 낚시바늘에 닿아 있다. 그러나 아직 낚을 수는 없는 단계. 고기는 방생해줄 수 있지만 자신은 방생해 주지 못하는 단계. 조궁. 다할 궁. 이제부터는 낚시를 통해서 도를 닦기 시작하는 단계. 남작. 마음 안에 큰 바구니를 만들고, 자작. 마음안에 자비를 만들고, 백작. 마음안에 백 사람의 어른을 만들고, 후작. 마음 안에 후함을 만들고, 공작. 나중에는 모든 것을 다 비운다. 그러면 비로소 조성이나 조선이 되는 바 달리 말하자면 도인이나 신선이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는 조졸이니 어찌 그런 경지를 바라볼 수조차 있을 것인가. 하여튼 틈만 나면 기를 쓰고 낚시질을 떠나 보지만 내게 술 대신 낚시에 취미를 붙이라고 낚싯대까지 마련해 준 내 아내는 벌써부터 도끼자루가 썩을까 봐 약간 맛이 가는 듯한 표정이다. 고기라도 좀 많이 잡아 온다면 또 모르겠는데 조졸이 무슨 실력이 있어서 고기를 많이 잡아 온단 말인가. 얼마전에 월척을 한마리 올리기는 했지만 아마도 붕어가 미쳤거나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생각던 중에 스승을 한 분 모시기로 작정했는데 그 분이 바로 춘천호 인람에서 만난 목 영균 선생님이시다. 그 분은 붕어를 따라 집을 이사하면서까지 낚시를 즐기실 정도로 광이시지만 기후 조건이나 수심의 변동등에 따라 고기가 활동하지 않는 날은 같이 활동하지 않고 고기가 활동하는 날만 같이 활동하는 베테랑이시다. 이른바 외대에 외바늘의 전통파. 지금 이사해 있는 집 바로 앞에다 전용 좌대 하나를 만들어 놓고 하루에 평균 한 마리 꼴로 월척을 올리신다.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나는 귀찮을 정도로 쫓아 다니며 비법을 물어 보았다. 부디 통촉하옵소서. 하도 열심이니까 내 한 가지만 가르쳐 주지. 여자 스타킹이나 모기장에다 삶은 닭발이나 원자탄 따위를 돌과 함께 싸서 던져 놓아보게. 일단 모인 고기는 상당히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지. 냄새는 나는데 먹지는 못하거든. 그때 낚시를 던지면 비교적 잘 물리게 되어 있어. 간신히 알아낸 비법 중의 하나다. 실제로 해보니까 확실히 다른 날보다는 수확이 좋았다. 하지만 또 다른 비법이 상당히 많이 비장되어져 있을 것 같은데 좀처럼 털어놓으려 들지 않는 듯한 기색을 보이신다. 고생을 좀더 한 다음에 배우는 게 좋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 낚시춘추의 김기자의 주문대로 비린내가 나는 글을 쓰는 것은 당분간 보류해 두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분의 얘기를 한번 써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고깃비늘이 번쩍거리고 비린내가 훅훅 끼쳐 오는 글을 한번 써볼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있어서 시급한 일은 우선 조졸부터 면하는 일이다. 도끼자루야 썩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람!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궁궐 기왓장에 서린 백성의 한숨 - 박종진(숙명여대 교수) - 1/2 공사장이 눈물바다를 이룬 사연은? 1167년(의종21) 3월 어느날. 개경의 중미정 공사장은 때아닌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중미정을 지을 때 부역나온 사람들은 식량을 스스로 조달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밥 한술씩 나누어 주어서 그것을 먹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그 아내가 음식을 마련하여 왔다. “친한 분들을 불러서 함께 드시지요.” “가난한데 이 음식을 어떻게 마련했소. 다른 남자와 사통하고 얻었소, 아니면 남의 물건을 훔쳤소.” “얼굴이 못생겼으니 누구와 사통하겠으며 성격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다만 머리를 잘라서 팔았을 뿐이에요.” 아내는 짧아진 머리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설움이 복받쳐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주위 사람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고려사>에 실린 내용이다. 의종은 즉위 초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였지만, 그것이 좌절되자 말년에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한 신하들과 어울려 자주 놀러다녔다. 중미정은 그러한 의종 말년의 분위기 속에서 지어졌다. 중미정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 그들은 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일을 했을까? 이들은 일반 백성이었고 요역에 징발되어 국가의 일을 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일에 동원되어 일하는 것을 요역이라고 한다. 국가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은 일반 백성들로부터 징발하는 단순 노동력뿐 아니라, 군역. 향리역. 기인역. 공장역 등의 직역도 있었다. 그렇지만 직역은 역의 대가로 토지 등을 받는다는 점에서 아무런 대가가 없는 요역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러면 백성들은 요역으로 어떤 일을 하였을까? 대표적인 것이 토목공사이다. 여기에는 궁궐. 관청. 절 등 주요 건축물을 짓고 수리하는 일, 성을 쌓는 일, 왕릉을 조성하는 일, 저수지를 만드는 일이 포함되었다. 또한 백성들은 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운반하는 일에도 항상 동원되었다. 그 밖에 토지개간이나 국공유지의 경작 등 농사활동에도 징발되었다. 또한 왕이나 사신의 행차를 맞이하는 일 또한 중요한 요역의 하나였다. 요역 징발은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는 것과 지방 군현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는 요역으로는 토목공사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공사에는 군인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성 쌓기를 제외하고는 주로 공사 현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징발하였다. 반면에 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운반하는 일은 지방 군현에서 주도하는 요역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 지방 군현에서는 수령이나 향리들이 임의로 징발하는 일도 많았는데, 국가에서는 이러한 역을 잡역이나 급하지 않은 역이라 하여 금지하였다. 수령의 임무 중 “부역을 균등히 해야한다”는 규정은 이와 관련이 있다. 우리만 왜 힘들게 일하지? 요역 징발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59세가지의 양인 남자였다. 따라서 노비와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던 양수척은 징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양인층을 요역으로 징발하지는 않았다. 관직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군인. 향리. 기인등 직역을 하는 사람은 요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효자. 의부. 절부와 부모를 시중드는 장정과 중환자는 규휼의 명분 아래 역을 면제하였으며, 승려도 징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징발하였을까? 고려 전기의 경우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이 등급에 따라서 요역을 차등 징발한 셈이다. 이는 조선 초기 토지 면적을 토대로 징발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초(경국대전)에는 토지 8결당 사람1명을 징발하여 6일동안 부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징발 기준이 사람 수에서 토지 면적으로 바뀐 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여 고려사회를 인신적인 지배에 기반한 고대사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람 수에 따라 요역을 징발하였다고 하여 그 사회를 고대사회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중세사회에서도 인구에 대한 파악과 지배는 여전히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살펴보자. 우선 요역 징발은 농번기를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주요 노동력 징발이 농한기라 할 수 있는 음력6, 7, 8월과 12, 1,2, 3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노역을 중지하는 시점도 농사가 시작되는 3, 4월에 집중되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고려시대의 요역 징발기간에 대하여는 중국 당나라의 규정이나 조선 초기의 기록을 토대로 1년에 20일 정도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규정이 무시되기도 하였으며, 대규모 토목공사인 경우는 농번기가 되어도 일을 끝내지 않았고 심지어 몇 년 동안 계속 일을 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책임자들이 과잉 충성하여 밤낮으로 일을 시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물론 사람을 규정 이상으로 초과 징발하였을 경우 다른 세금을 감면하였지만, 이것으로 부당한 징발이 과연 보상되었을까. 노동조건 역시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다. 가장 중요한 식량의 경우 앞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대개는 징발된 사람들이 스스로 준비하였다. 왜냐하면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일일이 식량을 지급하는 일은 국가의 일반 재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종때 대안사를 지었는데, 이 때 징발된 사람들은 밤낮으로 일을 하였고, 이들에게 음식을 나르기 위한 아내와 자식들의 발걸음이 봄부터 여름까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 가족까지도 식량 조달 때문에 노동력을 빼앗겨 농사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징발된 사람들이 항상 음식을 스스로 조달한 것은 아니었다. 구휼의 차원에서 특별히 사람들에게 음식을 지급한 예가 있다. 또 원종 때 일본 정벌을 위해 전함을 건조하였는데, 이 때 징발된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제공하였다. 식량 외에도 의복과 각종 도구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심지어 군인들도 개인 장비와 군복을 스스로 준비했던 사실은 요역노동에 징발된 백성들의 부담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상태에서 변변한 잠자리를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주로 공사장 부근의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한 것은 물자를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원칙 때문이었다. 이렇듯 노동의 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커다란 고통 속에서 일을 하여도 굶주리는 동료를 위해 부족한 밥을 나누어 주는 인정은 가난한 백성 사이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손바닥에 그린 햇님 맹인·중복 장애인 시설인 '라파엘의 집'에 첫발을 디딘 지도 어느덧 사 년이 지났습니다. 순간순간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만, 보지도 듣지도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하는 원생들에게서 오는 위로가 크기에 오랜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르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나 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구십사 명이나 되는 '라파엘의 집'의 가족 중에서 가장 큰 어른을 소개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름은 차낙중, 차가 달리는 중에 떨어졌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지요. 낙중이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달리는 차 속에서 창 밖으로 내던져져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발견되어 여러 절차를 거쳐 이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낙중이는 가끔 햇살이 따뜻한 곳에 쭈그리고 앉아 손바닥에 해라고 쓰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해만큼은 볼 수 있다고 손짓으로 설명해 주곤 합니다. 누군가가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면 여기저기 자랑하면서 다니다가 문에 부딪혀 상처를 입고서는 양호실에 와 치료를 해 달라고 하는 낙중이의 모습 속에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느낍니다. 낙중이는 자기를 버린 부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백 원짜리 동전 하나 없지만 궁핍함을 모릅니다. 또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보고 듣고 말할 수 없지만 늘 경쟁속에서 남들보도 더 놓아지고 싶고 더 잘살고 싶어서 허영과 질투, 이기심, 심지어는 아직 빛을 보지도 못한 아기들의 목숨까지 앗아 가고 있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낙중이는 소리 없이 지적하고 있는 듯합니다. 늘 껄껄걸 웃으면서 밝게 살아가는 낙중이의 모습을 보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고 배우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풀내음과 꽃내음이 물씬 풍기는 계절, 나무 그늘에 앉아 해를 바라보며 껄껄 웃으면서 또 다시 저의 손바닥에 '해'라고 써 주는 낙중이의 모습을 보면서 이 작은 길을 충실히 걸어가겠노라 다짐했습니다. 낙중이가 가리키고 있는 은 햇살을 향하여……. 최효숙 님/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7 - 경험주의 철학의 마감: 흄과 그 이후의 문제 그 때 세계에서는 1783년: 러시아, 크리미아를 병합 1789년: 미국 워싱턴, 초대대통령에 취임 영국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라고 볼 수 있는 D. 흄의 철학은 영국 근대철학의 결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철학을 위한 준비를 끝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흄 이후에는 또 하나의 흄이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얘기한 대로 흄은 존 로크와 그의 후계자인 버클리를 연구했다.로크의 경험론과 버클리의 주관적 인식론을 받아들여 후자의 철학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흄의 철학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인식과정을 위한) 심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 자체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면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이 될 수가 없다. 대륙 계통의 수학이나 기하학을 바탕으로 하는 연역적 방법에 비하면 경험과 귀납을 중심 삼는 심리적 경향을 택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흄은 인식은 크게 구별하여 두 가지 내용과 과정을 밟는다고 보았다. 그 하나는 외물과 연관되는 감각이며, 다음은 지식을 구성해내는 반성이다. 기초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이다.감각은 생기가 넘치고 강렬한 것이다. 그 안에는 지적인 감각뿐 아니라, 증오, 원망, 의욕까지도 포함되는 인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한 것은 지각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렇게 주어진 지각내용은 약하고 밝지 못한 인상의 기억 안에 생성되는 모상이 된다. 우리는 거기에서 좁은 의미의 관념 또는 사상 같은 것을 반성작용에 의해 일으킨다. 이렇게 본다면 기초적이면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감각에서 주어지는 인상이다. 그 인상이 발단이 되어 지각의 내용을 인상으로 만들고, 인상이 재인되는 것, 다시 말하면 지적으로 정리된 것을 관념이라고 본다. 만일 이런 인식의 형성과 과정을 대륙의 이성주의에 비교한다면 완전히 역방향을 택한다고 보아야 하겠다.대륙의 연역성에 비한 귀납성의 의미도 짐작할 수가 있다. 만일 이런 철학적 인식의 한계성이 주어진다면 철학의 전통적 과제라고 볼 수 있는 볼 수 있는 외물로서의 실재는 어떻게 되는가? 토머스 홉스는 그것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시켰고, 존 로크는 외물과 더불어의 철학을 인정했었다. 버클리는 그것을 제외한 주관적 인식을 요청했다. 이에 비하면 흄은 그것을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거부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륙철학이 비판 없이 택해온 정신적 실체도 인정할 수가 없어진다. 후일에 칸트는 이성의 기능을 철학의 주체로 삼아, 그 이성의 배후에 자아성을 인정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를 남겼다. 이성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흄은 자아도 사물과 마찬가지로 지각들의 결합에 지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흄의 철학의 한계를 대단히 축소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마침내는 깊은 회의로 몰아가는 경향으로 이끌어갔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흄의 회의로부터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려 했는가하면, 칸트는 흄을 통해 독단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과거의 철학이 비판이나 반성이 없이 실체라든지 인과성 같은 것을 문제삼아왔으나, 그것은 우리의 심리적 연상에 따른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의 생각밖에 어떤 실체라든지 인과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에서 이성에 의한 수학의 확실성을 인정하며 실증적인 확증이 용납되는 것 같아도 그것을 가지고 합리적인 형이상학이나 자연과학의 절대 확실성이 성립되는 듯이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윤리학이나 종교의 문제는 감정과 정서적인 기능에 따르는 것이다. 이성적 합리주의가 원리와 종교를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길이다. 이런 흄의 철학에 접하고 보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의 한 한계성에 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흄 이후에는 제 2의 흄이나 경험주의 철학자가 등단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흄보다 연소한 친구, 세계적인 경제학자 한 사람의 이름을 남겨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가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A. smith, 1723-1790)다. 이상스럽게도 그 시대와 사회문제를 해결짓기 위한 윤리학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고 그 영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윤리의 기본을 감정적인데 두었다는 점과 개인윤리를 사회윤리로 발전시키는 데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다 잉글랜드의 대학보다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공부했고, 둘 다 큰 업적을 남겼다는 데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라이프니츠는 끝으로 철학적 발전이 그쳤듯이, 영국에서는 흄을 끝으로 경험주의 철학의 큰 막이 내렸다고 보야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갈래의 흐름을 통합 새로운 철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독일의 칸트였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고주망태'의 '고주'는 원래 토박이말...그 뜻은? 사람이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고주망태'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퍼마셨다'고 말하지요. 고주망태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요? '고주'를 '고주'(쓸고, 술 주)라고 해석하는 분도 있지요. 그러나 '고주'는 '쓴 술, 또는 독한 술'이란 뜻을 가진 한자어가 아닙니다. '고주'는 고유어 입니다. 원래는 '고자(아래 아)'이지요. '고자(아래 아)'란 '고조'라고도 썼는데, 그 뜻은 누룩이 섞인 술을 뜨는 그릇을 말합니다. '망태'는 '망태기'와 같은 것으로, 무엇을 담는 그릇을 말하기도 하고, 전혀 쓸모없이 되어버린 상태를 말하기도합니다. 그래서 '고주망태'란 술통을 통째로 마신 것처럼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안중근 1909년 10월, 안중근은 노보케에프스크에 체재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친구들에게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왜 갑자기 떠나려하는가 물었지만, 안중근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져서 여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 곳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동공보와 원동보등의 각 신문을 살폈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며칠 안으로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친지 김성백의 집에서 유하다 일찍 일어난 다음날 아침, 1909년 10월 26일,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멋있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권총을 품안에 넣고 역을 향해 나간 것은 오전 7시 경이었다. 역에는 많은 러시아 경찰과 헌병들이 이토를 마중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안중근은 찻집으로 들어가 두세 잔 차를 마시고 이토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였다. 이토는 특별객실안에서 러시아 제국 재무대신 코코흐초프의 영접을 받으며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군 수비대의 열병을 받았다. 군악대의 음악이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영접나온 각국 대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일본인 환영객들이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나아가는 키 작은 백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근은 그가 이토일 것이라 확신하고 권총을 꺼내 그의 우측에서 세 발을 발사하였다. 그는 이토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가 과연 이토인가 의구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을 쏜 것이 아닐까? 하고 망설이면서 후방에서 걸어오는 일본인을 향하여 다시 네 발을 발사하였다. 이때 러시아 장교가 그를 덮쳐 쓰러뜨렸다. 안중근은 넘어지면서 하늘을 향하여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 를 세 번 외쳤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총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철도 총재 나카무라 제코, 무로다 요시부미, 후루야 히사즈나 등의 부축을 받으며 열차 안으로 옮겨졌다. 수행의사 고야마 젠과 거류민단에서 파견된 의사 모리 다카시의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고야마가 권하는 블랜디를 입에 머금은 채 가해자가 한국인이란 말을 듣고는 바보 자식 이란 말을 했고, 다시 블랜디를 요구하여 마셨지만, 세 모금째부터는 이미 마실 기력조차 없었으며, 이윽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9시 30분 피탄 후 30분이 지난 오전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체를 기차로 대련에 실어갔다. 사건 후 러시아 병사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한국인 통역을 통해 러시아 재판소 검사의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러시아 재판관의 물음에 이렇게 항변하였다. 나는 대한 국민이다. 이토 그놈이 우리의 독립을 강제로 빼앗고, 우리의 민족을 살육하였으나 나의 이 행동은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고, 우리의 민족을 보호하며,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감동되어 혀를 차며 한국에도 인재가 있다. 한국에도 인재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측에서는 한국인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기에 안중근을 곧 일본 영사관으로 이송하였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과 연루자들을 넘겨달라고 러시아와 교섭하여 러시아의 승낙을 었었다. 그리하여 하얼빈에 있는 한국사람 9명을 체포하여 4일간 심문하고 여순으로 압송하였다. 안중근의 처와 아이들도 하얼빈에서 잡혔고, 두 동생도 진남포에서 체포당한 뒤 공모한 일이 있는가 하여 엄한 심문을 당하며 혹심한 학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여러 친척 집도 모두 수색당하였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씨는 평양의 천주교 성당에 있었는데 경찰이 찾아와서 당신의 아들이 이토 공작을 살해하여 두 나라에 크나 큰 사변을 빚어냈소. 이것은 당신이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므로 당신도 죄가 없다 할 수 없소. 라고 을러대니 어머니는, 아들이 밖에서 한 일을 내가 알 리 없지만 나라 위해 죽는 것은 국민의 사명이다. 내 아들이 나라 위해 죽는다면 나도 아들을 따라 죽을 것이고 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겠다. 고 하였다. 안중근은 심문이 시작되자 이름은 안응칠, 나이 31세, 직업은 사냥꾼, 출신은 한국 평안도 평양 교외라고 답하며 자신이 한국인임을 명확히 하였지만, 부모와 처자가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종교에 대해서는 천주교라 답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왜 살해했는가. 라는 미조부치 검찰관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이토의 죄상을 열거했다. 이토의 열 다섯 가지의 죄상을 그는 미리 마음속으로 정리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1. 10여년 전 이토가 지휘하여 한국의 왕비를 암살하였다. 2. 5년 전에 이토는 한국에 매우 불리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3. 3년 전에 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한국의 군대에 불이익을 초래하였다. 4. 이토는 한국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5.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등의 것이었다. 11월 14일의 안중근에 대한 제2회 심문에 앞서 검찰측에서는 독자적인 수사를 벌인 결과, 그의 본명이 안중근이고 그의 조부는 진해군수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안태훈은 천주교도이며 대대로 사대부 명문 집안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동생이 둘 있어서, 정근은 경성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공근은 진남포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안중근에게는 아내가 있고 다섯 살과 두 살박이 아들이 있으며, 지금 하얼빈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두 포착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말하자 안중근은 단지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라고 하면서 난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고 단언했다. 마지막 공판에서 나는 이토를 개인자격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죽였다. 가장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심문에 임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당당하게 진술했던 것이다.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그는 수십 일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여순감옥에 있을 때에는 그는 마치 생사를 잊은 듯,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가 5개월간이나 기거했던 여순감옥소의 2평 마루 감방은 제2동 2층 왼쪽에 있었다. 음산한 감방복도, 좌우양측 감방에서 협소한 철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광선 아래에서 그는 80여 점의 유묵을 남겼다. 그리고 2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글도 지었다. 사형 집행일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그는 새로 지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희색을 띠며 형장으로 나섰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이라면 국권회복의 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대한이 독립하여야만 동양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고 따라서 일본도 역시 장래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10시. 교수대의 대상에 오른 도마 (세례명) 안중근은 3분동안 기도하였다. 이때 그는 32세였고, 그날은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렸다.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사형선고가 있은 뒤 안중근을 면회하러 가는 그의 두 동생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상고를 거부하고 깨끗이 교수대에 오르라고,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몸바치려고 끊었던 안중근의 손가락을 평생 간직한 채,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 을 믿는 천주신앙 속에서 지내다가 48세를 일기로 아들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시모시자 즉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일컫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1. 대학의 뿌리는 길드였다 나라마다 대학 제도의 뿌리가 되는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모습의 대학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이 대학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 학생 조합(길드) 또는 교사 조합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을 영어로 university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 universitas에서 온 말로 `전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통된 목적을 가진 집단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수공업자 조합의 회원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위한 길드였다. 당시 학생들은 교사들의 명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어서 아는 이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생활의 안전과 서로 돕기 위해 조합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대학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다. 이 대학은 로마 법과 교회법 등 법학 강의로 유명하여 12세기 말에는 전 유럽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이 학생들은 안전과 서로 돕기 위해 이탈리아 학생과 이탈리아 외부의 학생으로 조직된 2개의 길드를 결성했다. 파리 대학은 노트르담 성당 부속 학교의 명성에 끌려 모인 교사들이 12세기 말 길드를 결성함으로써 설립되었으며 1200년 필립 2세로부터 특허장을 획득했다. 이 파리 대학은 신학 연구의 본산이 되었다. 옥스포드 대학은 12세기 전반기에 생겼는데,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된 1167년 헨리 2세가 파리에 있던 영국 학자들에게 귀국 명령을 내림으로써 그 기틀이 잡혔다. 이후 13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14세기에는 독일에도 대학이 생겨났다. 이렇게 출현한 대학들은 처음에는 정해진 학교 건물이 없어서 강의실은 교사의 집이나 교회 등을 빌려서 사용했다. 또한 모든 대학은 군주나 도시 행정당국 또는 교회의 지배나 통제에서 독립하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했다. 이런 투쟁의 결과 `대학의 자치권`을 얻었는데 여기에는 대학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법권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대학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길드에 대한 감독권 등도 대학이 가지게 되었다.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것들은 문법, 수사, 논리의 3교과와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4교과였다. 3교과를 수료하면 문학사(bachelor of arts)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5,6년간의 수업을 더 거치면 비로소 독립된 교사 자격인 문학 석사(master of arts)가 될 수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앞에서 말한 7교과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전문학부인 법률, 의학, 신학등을 공부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 과정을 수료하면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당시에는 신학이 가장 이수하기 어려운 학문으로 꼽혔다. 그런데 오늘날 단과 대학을 가리키는 칼리지(college)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는 외부 인사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해 준 것에서 기원한다. 이런 기숙사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무료로 또는 아주 값싸게 숙식을 제공했으며 교사가 함께 지내면서 학습을 도와 주기도 했다. 칼리지 중에 유명한 것은 1258년 파리의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 설립한 소르본 대학, 영국 로체스터의 주교 머튼의 월터(Walter of Merton)가 세운 옥스포드의 머튼 칼리지, 영국의 대제후인 존 벨리올(John Baliol)이 세운 벨리올 칼리지 등이 있다. 학문의 중심지로서 교회를 제치고 부상한 대학은 중세 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대부분의 저명한 학자들은 대학에 속해 있었고 각 학부는 그 분야의 최고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문학 석사는 교사나 행정가로, 법학 박사는 법률가나 관리로, 신학 박사는 신학 교수나 고위 성직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주장되는 `대학의 자치`와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이 중세 대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때의 자치나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근대적인 의미의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자치 도시, 수공업자 조합, 상인 조합 등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특권 안에서의 자치와 자유였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7. 중국의 부족한 면만 크게 보려 하는 미국 '1996년 4월 24일을 기억하라.' 내가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려는데 마침 Tv에서는 유엔인권위원회의 제52차 회의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몇몇 서구 국가들이 제출한 '중국인권상황'의 결의초안에 대해 심의와 표결을 하지 않는다는 안을 투표에 부켰다. 투표결과 27대 20로 그 안건은 통과되었고. 나머지 여섯 표는 기권이었다. 1990년이래 서구 국가는 줄곧 중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의안을 통과시키려하였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이 제출한 '불이행' 건에 동의하였으나 일본만 서구 국가의 편에 섰고,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한국은 기권표를 던졌다는 점을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절대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에 표를 던졌다. 이러한 표결의 결과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인권문제에 대해 심각한 사고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 주었을 뿐 아니라 '인권의안'을 '제재'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미국의 저의가 이미 대다수 국가에게 반감을 사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1991년 9월 영국 수상 메이저가 홍콩 국제공항 건설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여 리펑 총리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중국에 오기 전한 야당 정치가로부터 중국 총리와 회담할 때는 반드시 인권문제를 거론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라는 엉뚱한 말을 하였다. 이에 대한 리펑 총리의 대답은 아주 걸작이었다. '사실 나도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중국이 100여 년 간외국 열강들의 능욕을 받았다는 사실과 이 시기에 당신네 나라들이 중국인민의 인권을 침범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직까지 정산하지 못했음을 잊지 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라고 응수하였다. 역사가 만들어내는 풍자는 사람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한다. 2차대전이 종결된 1945년까지 100년 간 중국은 수많은 서구 열강들에게 침략, 약탈, 능욕을 당하였다. 중국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을 빌자면그야말로 '주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喪權辱國]' 한 것이다. 100년간 그들이 중국 인민의 인권을 유린한 것은 지금까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수준이었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약 밀수업자라고할 수 있다. 그들은 중국에 아편을 대량으로 팔기 위해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인권에 대한 이런 기록이 시간이 흐른다고 없어질까? 쌍하이 와이탄(外繼) 지역에 있는 황푸)공원 입구에는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는 중국인을 개만도 못한 짐승으로 본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인권기록들을 당신들은 그 당시 어떤 식으로 심의하였는가? 당신들은 언제부터 이런 대규모의 인권 유린자들을 지금과같이 위엄있고 당당한 인권운동가로 양성하였는가? 큰 잘못도 고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으나,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의문점이 남게 된다. 서구인이 주장하는 인권이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구린내 나는 실용주의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미국은 페르시아만전쟁 때 서구 국가들과 함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이라크를 쿠웨이트 영토에서 쫓아내었다. 그리고는 패배한 이라크를 유엔의 감시하에 놓아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힘을 축적할 수 없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라크에 단행된 각종 물자에 대한 금수조치 해제를 지연 시키도록 다른 나라들을 조종하였다. 이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까지도 위협받게 되었음은 Tv 화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의 행위는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여 준다. 만약 미국인이 진정으로 인권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이라크 백성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학업을 중단하고 길거리에서 쓰러지는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끝까지, 그들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철저하게 보여주었다. 사담 정부가 미국의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좀더 명확히 말하자면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때 미국의 원조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미국이 중동에서 챙기는 석유이익을 침범하였으니-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다음 친미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라크는 반드시 철저한 징계를 받아야 하며, 이 기간 동안 이라크의 인권문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미국의 이익만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유엔인권위원회 제52차 회의에서 모든 회원국은,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야만적으로 폭격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사건을 질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 미국은 이 결정에 반대하였다. 투표결과는 32 대 1로 이스라엘이 레바논 백성들에게 자행한 살상을 미국만이 용납하기로 한 것이다-이것 역시 미국에 거주하는 유태인이라는 압력단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정치적 선택이었다-결국 미국은 인권존중 대신 정치적인 이익을 위하여 추악한 흥정을 벌인 셈이다. 그러므로 서구 국가들이 인권문제에 대해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중국이 내세우는 변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클린턴과 내가 cBS 방송국의 60분짜리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여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질 것이다.'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폭격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었는데도 미국의 대표는 유엔에서 다른 나라와는 반대되는 표를 던졌습니다. 이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중국 인권상황'에 대한 태도에 비추어 볼 때 당신들 인권개념에 두 가지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클린턴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이 두 문제는 따로 생각해야 하는데.. ....." '따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분명히 두 가지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중국의 인권상황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 정부가 '인권 중에 가장 중요한 권리는 바로 생존권과 발전권이다'라고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인 원인과 중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만족시키는 것과 자녀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의 인권상황을 개선시키는 가장 구체적인 빙법은, 12억이 넘는 인구를 잘 활용해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여 국민들이 부유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중국의 역사단계를 고려하지 않고 중국이 요구하는 ' 평등한 대화'를 거절하면서 나쁜 저의를 가지고 함부로 매도하고,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듯 중국을 훈계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고 중국을 '별책부록'쯤으로 밀어내자는 음모인 것이다. 티베트의 인권문제는 미국 의회의 인권보고서에 매번 등장한다. 최근에 제출된 1995년도 인권보고서의 중국 란에 실린 티베트에 관한 글에는 '들은 바에 의하면 "믿을 만한 보도에 따르면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과 같이,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게' 할 낱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을 빌미로 마구 공격하고 있는데 그 내용 중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들은 중국 정부가 여전히 티베트인들의 생활수준을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고 공격하는가 하면 또 티베트의 가장 큰 도시인 라사와 그 밖의 지역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건설들이 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파괴하였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은 일단 마음만 먹으면 어떤 구실이든 붙일 수 있고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명을 씌우려면 어떤 구실인들 만들어 내지 못하겠는가? 나는 여기서 문화부차관을 역임한 유명한 원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창한 영어와 변화무쌍한 연기력으로 미국영화 {리틀 붓다}에 출연하였던 그는. '어떤 신념'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악의에 가득찬 반중국영화에서는 여러 차례 티베트를 점령당한 국가로 호칭하였다. 이 예술가는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출연료의 유혹이나 그가 맡은 역할에 푹 빠졌던 것일까? 이는 간단하게 그자신의 비애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문제이다. 잠시 화제가 다른 길로 빠졌다. 옛말에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만 생각할 뿐, 반이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서구 국가들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할 때 가지는 태도를 비유하기에 적절할 것 같다. 그들은 우리들의 부족한 면만을 주시할 뿐 우리가 이룬 업적이나 진보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린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사실을 과장하고 진상을 왜곡하며 무고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의식형태가 다른 중국에 대해 '인권'의냉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인식상의 차이라고만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중국 고아원에 대한 보도는,오히려 중국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서구 보통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A F P의 보도에 의하면, 많은 미국 사람들이 나서서 중국 고아원에서 원생들을 보살피는 태도를 옹호하였으며 중국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팩스가 대량으로 들어와 중국 민정부(民政部)와 사법부의 전화선이 며칠 동안 불통될 정도였다고 한다.보르딩이라고 하는 어느 미국 부인은 '당신들은 이 보도의 내용과 일치되게 말하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서구의 매스컴들은 그들이 날조하여 편집한 이야기를 중국 정부와 관련지어, 마치 중국 정부가 고아들을 일부러 살해하려는 음모를 품고 있다는 식의 화면을 연출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졸렬하고 비도덕적인, 미중유의 모함은 파쇼 독일의 선전부장이었던 궤벨이 들어도 놀랄 것이다. 만일 모함한 당사자가 중국에 온다면 격분한 수많은 군중들의 돌과 몽둥이 세례로 찢겨 죽어 먼저 그의 인권이 철저하게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바람이 하는 말 해와 달이 싸웠다. "나뭇잎들은 초록색이야." 하고 해가 말하니까, 달이 "아니야, 은색이야."하고 대받았다. 달이 "사람들은 일도 하지 않고 주로 잠만 자지."하고 말하니까, 해가 "아니야, 사람들은 주로 움직여." 하고 말했다. "그럼 왜 지구가 그렇게 조용하니?" 달이 지지 않고 다시 해에게 말했다. "넌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었니? 지구는 늘 시끄럽기 짝이 없어." "아니야, 너야말로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었니? 지구도 다른 별들처럼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어." 그들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람이 나타나 말했다. "너희들이야말로 정말 우습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싸우니? 나는 해가 떠 있을 때도 불고, 달이 떠 있을 때도 불어, 낮에 해가 떠 있을 때는 바로 해가 말한 대로야. 지구는 시끄럽고,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움직이지. 나뭇잎은 초록색이고 그러나 밤이 되어 달이 떠 있을 때는 모든 게 달라져.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함이 온 누리를 다스리지. 물론 나뭇잎은 달빛을 받아 은빛을 띠게 돼. 간혹 구름이 달을 가리면 검은빛을 띠기도 하지. 그러니까 해 너도, 달 너도 사실은 다 알지도 못하는 거야. 세상은 자기 주장만이 다 옳은 게 아니야. 세상을 자기 입장에서만 이해하면 안 되는 거야." 글터 → 이글저글 고슴도치는 머리, 옆구리 등 배를 제외한 모든 곳에 총 30,000개의 바늘같은 가시를 가지고 있다. 이 가시는 살 속에 한번 박히면 빼내기 어렵고 점점 더 깊이 들어가 수술을 해야만 겨우 빼낼 수 있다.고래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토끼는 하루에 18번 낮잠을 잔다.낙지는 세 개의 심장을 갖고 있다.원숭이는 동물학적으로 이야기할 때 다리가 없다. 개구리는 이가 있고, 두꺼비는 이가 없다.고릴라는 오후 6시에 잠을 잔다.올빼미는 눈에 움직임이 없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몸은 전혀 움직이자 않은 채 머리만 거의 완전히 한 바퀴 돌릴 수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