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 59 호4339.11.14 (09.24)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오가시며 → 자유글판 문학소식 신춘문예공모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홈페이지에 오셔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글터 → 명언 / 격언 그 사람 하나만 보고는 사람 됨됨이를 모르는 법.그 사람의 친구들을 살필 것. / H.E.F.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여행일지 서울역. 매표소 앞. 표를 끊으려고 기다리는데 신사복 차림의 이십대 청년이 내게로 다가와서 하는 말. 형씨 술 한 잔 마시고 싶으니 천 원만 적선하쇼. 나는 어제 준 돈 벌써 다 섰느냐고 인상을 팍 쓰면서 녀석을 노려보았다. 슬금슬금 후퇴. 원 별놈 다 보겠네. 밤 열차. 특급이라고는 하지만 냉동 열차. 식인종이 보면 달리는 특빙고. 낭만없음. 오직 떨림. 잡스럽고 야비한 어투의 말다툼, 경상도 사투리의 고조, 삶에 퇴색한 얼굴들. 두 명의 애독자라는 남자들이 내게로 다가와서 술냄새를 풍기며 횡설수설. 그 후 되지 못한 녀석 하나가 나타나서는자기가 합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강조. 씨가 먹히지 않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나한테 아부하는 목소리로 격려하는 말. 형씨도 무주 구천동엘 한번 가보슈, 거기서 한달 정도만 생활하면 당신도 나 훈아의 잡초라는 노래가사처럼 감동적인 글을 한번 쓸 수가 있을 거요, 운운. 부산. 일출, 기념 사진, 바다 냄새. 태종대의 걸레 같은 방어회. 불친절, 얼라가 자고 있는 미지근한 방에서의 식사.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 다방이나 음식점들이 모두 강원도에 비해 기온의 변화와는 무관. 난도들의 우유부단성. 드라이브. 시내 구경. 잘못 걸린 전화 번호를 녹음으로 알려 주는 목소리조차 사투리였다는 점. 방금 거신 저나는예 잘못 걸린 저납니더 하는 식으로. 남포동에서 내장이 터져 나올 지경으로 퍼마신 술. 갑자기 메말라 버린주머니 사정. 을숙도 부근. 강나루라는 주막의 주인 아저씨.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실감. 105년 묵었다는 피아노. 그 피아노에서 울려 나오리라고 그가 기대하는 영혼의 소리. 먼지 앉은 문학 서적들. 아침부터 마신 열두 병의 맥주와 장작 난로. 갈대로 엮어 놓은 벽. 연인들의 방문. 철새떼. 갈대밭. 신들린 바람.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모래를 뿌리며, 미친 바람 미친 바람 미친 바람 짐승처럼 떼를 지어 몰려 다니고. 무슨 굉장한 한 같은 것이 땅 속 깊은 곳에도 허공 위에도 주택가에도 벌판에도 하다못해 지푸라기나 먼지 한 점에까지에도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경주. 추위는 여전. 그런데도 모든 난로는 역시 미지근. 터미널 안내소의 신혼 부부와 그들의 영악스러운 호텔비 깍기. 안깍이려는 안내원의 교묘한 말재주들. 언제나 상대편의 말도 맞지만 자기말도 맞다는 논리. 모든 건물들은 기와가 올려져 있으나 어디까지나 전시용 같은 분위기. 안압지. 비싼 입장료에 대한 황당함. 대체로 썰렁한 분위기. 한 바퀴돌면서 사차원으로의 통로가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을 받음. 불국사. 여러가지로 아름다운 부분들이 많았다는 생각. 돈을 던지는 탑에만 안내원이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날만의 일이었겠지. 어느 대형 범종에 양각되어진 박 정희 대통령 만수무강이라는 축원이 주는 감회. 기념품 가게들에 진열되어져 있는 기념품들의 조악한 디자인.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 화장실은 정말 최고로 좋아서 부산에서 뒤가 마려우면 경주까지 참고 와서 누는 사람까지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시내에서 탁구를 한 게임 치고 서점을 한 바퀴 돔. 별다른 점 없었음.사람 들은 대체로 친절. 내년에 또 오라는 뜻으로 알고 돈을 비축해 놓을 결심을 함. 술을 못 마신 것이 한이 되나 회는 먹었음. 박물관. 오, 위대한 신라.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호적은 어떻게 만들었나 - 채웅석(가톨릭대 교수) 호적의 내용과 특징 호적에 기록하는 사항은 시대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가족이나 친족제도가 변함에 따라 기록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현재 국보 131호로 지정된 고려말기의 호적을 통하여 당시 호적의 기록내용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에게 하사했던 노비 20구에 대한 호적과 그 이듬해 개경에 거주하던 30여 가구의 호적으로 되어 있다. 이 호적에 등록된 한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 군기시승의 벼슬을 지낸 김영록, 나이46, 본관 금주 부: 검교중랑장의 벼슬을 지낸 익려, 사망 조: 검교호군의 벼슬을 지낸 김보 증조: 사후에 좌우위중랑장의 벼슬에 추봉된 군식 모: 조이, 본관 황려현 외조: 학생인 이인 호의 처: 우근이, 나이41세, 본관 울진 부: 검교중랑장인 임천년, 나이67세 조: 산원동정의 벼슬을 한 임고, 사망 증조: 대상의 향직에 있던 임종, 사망 모: 조이, 사망, 앞의 본관과 같음 외조: 호장인 금음이 자식: 1남 난우, 나이15 호처의 어머니쪽에서 전래한 비 기지가 낳은 비 갓가의 딸인 비 사계, 나이 4 위와 같이 당시의 호적에는 호주와 처, 자녀, 동거인 또는 소유 노비와 같은 호구의 구성, 각자의 성명과 연령, 신분과 직역, 본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호주와 처의 부모, 조, 증조, 외조에 대하여 성명과 신분.직역을 밝혔다. 우선 조상을 많이 기록해 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어떤 경우에는 조모, 증조모의 부, 처 외조모의 부까지 맑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조상들을 추적하여 밝힌 이유는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상을 기록하더라도 중국 당나라의 호적이 직역을 가진 자에 한하여 부, 조, 증조의 이름만을 기록한 것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모와 외조를 더하여 이른바 4조호구식을 만들어 관인층은 물론 일반 양인층의 호적에도 적용하였다. 관인층의 일부는 더 확대하여 8조호구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8세의 호적에 노비 등 천류의 혈통이 들어 있으면 관직 진출을 금지하였다.이렇게 조상을 추적하는 범위가 넓어진 까닭은 고려의 친족체계가,부계 중심의 중국와는 달리, 부측과 모측에 거의 비슷한 비중을 두는 친족체계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여러 제도들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게 변경하여 사용하였는데, 호적제도도 그러했던 것이다. 기재내용 가운데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본관을 기록한 점이다. 요즈음도 호적에 본관을 기록하게 되어있다. 오늘날 본관은 부계중심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고 있으며, 본관으로 문벌을 표시하는 관행도 남아 있다. 그렇지만 본관과 거주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본관지역에 대하여 아무런 연고의식도 갖지 않는다.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고려시대에는 문벌들만이 본관을 가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우리 역사에서 본관제도가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초기였다. 당시 호적을 붙여 등록한 지역이 본관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본관과 고려시대의 본관은 의미가 달랐다. 그렇다고해서 요즈음의 본적지나 주민등록지 정도의 의미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국가는 본관제도를 향촌과 인민에 대한 지배방식으로 이용하였다. 예를 들면 본관별로 차별이 있었다. 일반 군현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과 향. 소. 부곡. 진. 역등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을 구별하였다. 후자를 잡척이라고 부르고, 국역부담이나 신분상 차별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민의 거주지 이동을 통제하였다. 본관을 기준으로 호구를 파악하여 관의 허가를 받지 않는 한 거주지를 옮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세 번째로 호적기재에 나타나는 여성의 지위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부계친족제도가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으며 자녀를 기록할 때는 남녀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연령순으로 기재하였다. 위 사례에서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는 난에 ‘조이’라고 쓴 것이 보이는데, 조이는 평민 이상의 여성을 이름 대신 표시할 때 사용한 이두였다. 평민층의 경우는 이름을 직접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배층의 경우에는 이름 대신 조이라고 쓰거나 봉작명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노비에 대한 기록이다. 노비는 호적에서 이름 앞에 ‘노’또는 ‘비’라고 신분을 분명하게 표시하였다. 주인집과는 별도로 호를 구성하는 외거노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주인을 밝혔다. 노비는 호적에 오르지만 양인과는 달리 4조화 본관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 제시한 호적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상속 받은 곳을 아버지측, 어머니측, 처측등으로 구별하여 밝혔다. 이것은 상속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리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노비에게 남편과 부인이 있는 경우에는 그들이 양인인가 천인인가를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만약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노비가 발각되면 공노비로 만들었다. 그 밖에 연령을 기록할 때 오늘날에는 생년월일을 기록하는 것과는 달리 나이로 표시한 것도 눈에 띈다. 호적제도 운영의 한계와 변화 고려시대에 전국적으로 호적에 올라 파악된 인구는 얼마였을까?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중기에 인구가 210만 명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이고 실제인구는 대략 250만 명 이상 또는 300만명 내외였을 것으로 보인다. 호적상 파악되는 인구와 실제 인구는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호적제도 운영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일반민의 입자이에서 보면, 호적에 등록되면 국가에 역을 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역이 과중하다고 여겨지면 피하기 위하여 호저에서 빠지려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역 부담이 가벼운 지역에 있는 친척의 호적에 위장하여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지역으로 도망하여 역을 피하기도 하였다. 이는 범법행위임에 틀림 없지만 권력이 수탈을 일삼을 때 자위수단을 갖지 못한 민에게는 소극적인 저항으로서의 의미도 갖는 행위였다. 역에서 빠지거나 부담을 덜기 위하여 호적에 기록된 내용을 변조.위조하기도 하였다. 신분 상승을 노려 평민이 양반으로, 천인이 양인으로 호적을 위조하였다. 반대로 양인농민이 국가의 가혹한 수탈을 피하여 권세가의 농장에 예속민으로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권세가들이 농장을 확대하면서 예속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으로 만드는 사례도 많았다. 신분질서는 호적제도의 문란과 함께 흔들렸다. 이상과 같은 호적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양한 위법. 저항행위들은 국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12세기 이후 정치행태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부분에 치중하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크게 늘어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호적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여 지방관들이 관내의 호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역을 징발할 때는 뇌물을 받고 협잡을 벌이기 때문에, 세력이 있거나 부유한 자들은 면하고 빈약한 사람들만이 당하였다. 그렇게 되면 부담을 떠넘겨 받은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도피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호구를 다시 조사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위조를 막기 위하여 법령을 발표했다. 양. 천간에 신분이 위조된 것을 적발하여 본래대로 돌리기 위하여 ‘노비변정사업’을 여러 차례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세부담층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수척도 한 곳에 정착시키고 호적에 올려 양인화하려고 하였다. 민의 유망을 막기 위하여 우왕때는 요충지에 방책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고려사회의 모순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들이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또한 호적제도를 본관 중심으로 운영하던 정책도 한계를 보였다. 많은 유망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을 때 그들 전부를 본관으로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향리와 같이 특수한 직역을 부담하는 계층은 여전히 본관을 중심으로 통제하였지만,일반민의 경우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그대로 등록시켜 지배하려고 하였다. 본관별로 차별하던 정책도 물론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남편의 직장에 꽃바구니를 남편이 일반 기능직으로 농협에 입사한 지 꼭 십년째가 되었다. 남편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성실했다. 주위에 계신 분들은 그런 내 남편을 일 잘한다고 칭찬하곤 했다. 열심히 근무한 덕분에 몇차례 상까지 받았다. 물론 남들도 한 직장에서 십년, 이십년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일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직장에서 승진도 없는 일반 기능직으로 십년 동안이나 근무한 남편이 나는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그날은 그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선물을 주려고 생각하니 무엇이 좋을지 고민스러웠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 마음을 적은 편지와 꽃다발을 사무실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부모님께는 효자라서 고맙고, 애들에게는 좋은 아빠라서 고맙고, 나에게는 좋은 남편이라서 고맙다는 말을 적고 끝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빽빽하게 적어서 막내를 데리고 꽃집으로 갔다. "꽃바구니 하나 만들어 주세요." "갑자기 웬 꽃바구니?" "오늘이 남편이 회사에 들어간지 십년째 되는 날이거든요." 나는 조금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저씨 오늘 기분 굉장히 좋으시겠네요." 꽃집 주인의 노련한 솜시로 예쁘게 만들어진 꽃바구니와 편지를 실은 택시가 떠나자 선물을 받을 남편의 표정이 몹시 궁금해졌다. 결국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했다. 내가 보낸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았다는 남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남편은 저녁 때 집에 돌아와서까지도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좋은 님 여러분! 남편의 직장으로 수고한다는 쪽지와 함께 작은 꽃바구니를 한번 보내 보세요. 남편이 굉장히 좋아할 것입니다. 하막선 님/경남 사천시 곤양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9 - '존재는 곧 자연이며 신' 스피노자(1632-1677) 그 때 세계에서는 1636년: 아메리카, 하버드 대학 창립 1651년: 영국 홉스, "리바이어던" 지금도 이준 열사의 무덤이 있는 화란의 헤이그 시에 가면 스피노자 거리가 있고 스피노자 하우스가 있다. 내가 갔을 때는 그 집 아래층은 어떤 변호사의 집부실로 되어 있었고, 스피노자가 빌어 살던 2층과 3층은 젊은 화가 부부가 세들어 있었다. 집무실 서가에는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스피노자의 저서들 이 꽂혀 있었다. 2,3층에는 스피노다와 인연이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피노자 당시에는 한 노파가 집의 소유자였고, 스피노자는 혼자 세들어 살았던 비교적 크고 좋은 집이다. 집 앞 스피노자 거리에는 스피노자의 좌상 동상이 있었으나 주변에는 병조각 등 물건들이 어지러이 버려져 있었다. 청소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스피노자가 유대인이 아니고 화란인이었다면, 그 집은 기념관으로 길이 남겨지고 이름있는 유적지로 가꾸어졌을 것이다. 세계 어디에 가든지 유대인들은 그 나라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도 있다. 스피노자도 본래 화란에 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남부 유럽에 살던 상인이었으나 종교적 자유를 얻지 위해 화란으로 이주해왔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종교적 신앙 때문에 유대교에서 파문을 당했다. 자유로운 기독교 신앙을 택해던 까닭이다. 일찍부터 학문을 사랑한 그는 중세철학, 유대철학, 아리비아철학을 거쳐 데카르트를 연구한 뒤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계속 수학, 자연과학, 스토아 철학에도 깊은 연구를 기울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철학자다운 삶을 살았다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B, 러셀도 스피노자의 초상화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자다운 삶이 좋아서라고 하면서... 그는 일체의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고 명예나 지위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다. 스스로 렌즈를 갈아 그 수입으로 청빈한 생계를 영위했으면 소유를 초월한 삶을 즐겼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학문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학문에 지장이 되는 가정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피노자의 라틴어 선생인 엠덴이 몸이 불편한 때는 그의 딸이 대신 강의를 했는데, 그 딸과의 사이에 서로 따뜻한 감정을 느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서 결혼에로의 길은 불가능한 여로였다. 말년기에는 스웨덴 왕실에서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조용히 학문의 길을 택했다. 프랑스의 볼테르 같은 이는 투기까지 한 일이 있었음에 비하면 스피노자는 가난한 선비의 모범이라 하겠다. 어린애같이 순박하고 만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어린 도사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집주인 노파가 전하고 있다. 렌즈 가는 일이 심한 노동이었는지 모른다. 1677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를 연구한 스피노자는 철학적 방법의 근거를 수학과 기하학에 두었다. 역시 대륙철학의 줄기를 계승한 셈이다. 그의 고전적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인 저서는 "에티가(윤리학)"다. 그 책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한 5가지 문제'라는 내용이다. 이 책의 제목은 윤리학이지만, 그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의 전체적인 체계를 만들고 있다. 모든 철학적 과제가 논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방법이 기하학의 증명방법과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를 명제로 제시해놓고는, 정리1에 의하여 무엇이 증명되고 계측 3에 의하여 무엇이 증명되기 때문에 그 명제는 진리일 수 있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식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만큼 그 당시의 학문들이 합리적인 연역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좋은 본보기의 하나인 셈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존재는 하나이면서 전체로 나타나야 한다. 수적으로 보면 하나일 수밖에 없고 양적으로는 전체인 것이다. 그 존재는 자연계이다. 자연존재를 떠나서는 있을 것이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전체존재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자연은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나, 그것은 하나의 존재의 다양한 모습인 것이다. 신은 그 전체와 더불어 있으면서도 일자인 것이다. 신은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 현상적인 것이 되나, 일자로서의 실체성을 갖기도 한다. 즉, 신은 존재의 실체이면서 자인존재다. 모든 지적 내용은 신의 속성은 만상의 내용이 되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사유와 연장이 공존되어 있다. 이런 철학적 견해는 자연히 범신론의 성격을 띠게 된다. 판테이즘(Pantheism)의 결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지적 활동이나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을 영원한 형상밑에서 바라보며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최고의 인식과 통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범신론은 자연히 신비주의 사상과도 일맥 통하게 된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사냥'은 원래 한자어 ......'산행'-->'산영'-->'사냥'으로 변화 '사냥'은 원래 한자어입니다. '산행(묏 산 갈 행)', 그러니까 산에 가는 것을 말하던 것이었지요. 사냥을 하려면 산에 가야 하지요. 그러던 것이 이것이 '산영'으로도 변하였지만, 곧 '사냥'으로 바뀌었습니다. 한자어이던 것이 이렇게 고유어인 것처럼 변화한 것이 많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죽음을 소화한 사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 데 기여하였으며 변론술로도 유명하다. 또한 지행일치를 강조하며, 평생을 아테네 민중을 개혁시키는 데 바쳤다. 아테네의 도덕적 부패는 시민이 자기(영혼)를 자기의 것(명예, 재산, 육체 등)에 족속시킨 주객이 전도된 데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부패한 구렁텅이에서 아테네를 구하는 길은 오직 새로운 도덕을 세우는 것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우중정치를 하던 국가는 그에게 죄를 씌어 사형을 언도했다.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이상한 종교를 선포하고 다니며 청년들을 타락시켰다. 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그는 변호인을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배심원 앞에 나가 자신을 고발한 이유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피력한다.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변명 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저는 죽는 쪽을 단호히 택합니다. 왜냐하면 법정에서건 또는 싸움터에서건 적이든 또는 다른 누구이든간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쓰는 이런 따위의 짓을 꾀하려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입니다.(생략) 온갖 위험에 처하여서 죽음만을 피하기 위해, 무슨 짓거리건 무슨 말이건 하려들면야 방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 어려운 것은 이것, 즉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비열함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어려운 것일 겁니다.(생략) 그리하여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 의해 죽음의 판결을 받고 떠납니다만, 저들은 진리에 의하여 사악과 부당함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생략) 아테네의 재판에서는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가 형량을 신청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국외 추방 정도로 낙찰될 수 있었는 데 쓸데없이 배심원을 노하게 하는 말을 해서 사형판결을 이끌어내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완곡한 방법에 의한 자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고 대중 앞에서 사과함으로써 살아날 수도 있었건만 이를 거절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자들이 마련한 탈출의 기회마저 외면하였다. 사형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30일 동안 옥중에 있었는데 그때 찾아오는 제자나 친구들에게 영혼의 불멸과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켤코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육체는 혼의 묘지다. 그러니 우리의 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니 오히려 죽음은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사형과정은 플라톤이 쓴 <파이돈>에 자세히 적혀있다. 에케크라테스가 묻고 파이돈이 답한다. 그분께선 몸가짐에 있어서나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나 행복하게만 보였고, 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얼마나 고결하게 최후를 맞으시는지 제겐 그분께서 신들의 보살핌 없이 저승으로 가시지는 않을 것이고, 그곳에 가셔도 정말 잘 지내실 것 같이 여겨졌어요(생략).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자네는 상심하지 말고 나의 육체를 묻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네. 따라서 자네 좋을대로 그리고 가장 관습에 맞는다고 생각되는대로 묻어 주면 되네. 말씀을 마치고 나서 목욕을 하기 위해 다른 방으로 가셨어요. 목욕하고 나와 가족을 잠시 만난 뒤, 집으로 돌아갈 것을 이르시고 우리들한테 오셨어요. 해질녘이 가까워왔어요. 간수가 들어왔어요(생략). 아직 안 되어었나? 독을 준비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가? 소크라테스가 재촉하자 제자들이 울며 말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요. 그래서 독을 만드는 이를 매수했습니다. 천천히 만들라고 설득했지요. 독을 만드는 이가 말했다. 내 평생 독을 만들어왔지만 당신 같은 미치광이는 처음 봤소. 왜 그렇게 서두는 거요. 내가 천천히 하면 당신도 그만큼 더 살아있을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머물 수 있지 않소? 당신은 미치광이처럼 늦는다고 탓했지만 무얼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죽음을 보고 싶어 서두르네. 난 죽음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네. 죽음이 일어났을 때 내가 살아남는지 어떤지를 보고 싶은 거야. 만약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끝이야. 하지만 내가 살아남는다면 죽음이 끝이지. 요컨대 죽음에 의해 누가 죽는지 보고 싶어. 죽음이 죽는지 내가 죽는지, 죽음이 남는지 내가 남는지 보고 싶다니까.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도저히 그것을 볼 수 없어.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든 잔을 받았다. 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선뜻 그리고 침착하게 잔을 비웠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모를 사람들이로군! 이게 무슨 짓들이람. 그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임종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맞아야 된다고 들었네. 그러니 조용히들 그리고 의연히들 하게나. 그때서야 제자들이 겨우 울음을 진정했다. 소크라테스는 간수가 시키는대로 이리저리 걷다가 다리가 무겁다고 말하고는 등을 뒤로 하고 누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독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무릎까지 완전히 죽었다. 잘라낸다 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친구여, 내 말을 들어보라. 내 다리는 죽었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는 내 다리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나는 완벽하게 여기에 있다. 내부의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계속했다. 지금 두 다리가 죽었다. 넓적다리부터 잘라낸다 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울고 있는 너희들이 있다. 울일이 아니다. 아주 좋은 기회다. 한 인간이 죽어가고 있고,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고 있다. 내 두 다리를 완전히 잘라낸다 해도, 그래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있다. 두 팔이 뒤틀린다. 내 팔도 죽어간다. 아! 얼마나 자주 이 팔을 자신과 동일시해 왔던가. 그 두 팔이 지금 내게서 분리되어간다. 그러나 아직 나는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어가는 동안 말을 계속했다. 천천히 모든 것이 온화해져 간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아직 나는 건재하다. 좀 더 있으면 너희들에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육체의 이렇게 많은 부분을 잃고도 난 아직 건재한데 조금 더 육체를 잃는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이 끝이라고 할 것인가? 너희들에게 말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육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니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나는 계속 있을 것이다. 이윽고 마지막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자 이제 마지막인가 보다. 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고 나는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는 크리톤을 향해 한 마디 당부의 말을 더 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신께 닭 한 마리를 바쳐야 할 빚이 있는데 잊지 말고 꼭 바쳐주게. 크리톤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다른 것이 더 있느냐고 묻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더니, 조금 지나서 몸을 떨 뿐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제자들을 옆에 두고 죽음 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보다 즐겁고 착한 생애를 지낸 인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면서 자신에 대해 만족함을 가지고 인생을 끝냈던 것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소화하였다 고.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3.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의 국교가 되었나? 미치광이 황제로 유명한 네로가 권자에 앉아 있던 서기 64년 로마의 중심가에서 원일 모를 대형 화제가 발생했다. 때마침 교외 별장에 있던 황제 네로는 급히 로마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했으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에 네로는 시민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투기장 등에서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던 베드로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었다. 그리스도가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라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참회하고 로마로 돌아와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영화로 더욱 유명한 소설 <퀴 바디스(Quo Vadis)>이다. 그런데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는 네로 시대에 그치지 않았다.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가던 2세기 이후 박해는 점점 심해졌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최대의 박해가 있었는데, 칙령을 발하여(303) 교인의 집회를 금지하고, 교회를 부수고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했으며 신자로부터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자유민의 경우 법의 보호마저 박탈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쇠퇴하기는커녕 뿌려지는 순교자의 피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교세가 확장되어 갔고 마침내 국교까지 되었다. 탄압받던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나? 이스라엘의 민족 종교인 유태교를 모태로 하여 나온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사랑과 전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의 속주였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외국의 지배에 시달려 온 유태인들이 자기 민족을 구원해 줄 존재인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 때 나타난 것이 예수였다. 하지만 그는 유태교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형식화된 율법 사상을 배격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구제하는 신에 대해 설파하고 다녔다. 소박한 생활 태도와 결합된 그의 사상은 점차 하층민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를 구세주라고 불렀다. 예수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기존 유태교 사제들은 그를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결합되어 기독교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따름이다. 예수의 사후 사도 바울과 베드로 등의 노력으로 로마내에의 포교의 발판을 갖춘 기독교는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초기에 빈민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감에 따라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제국 말기가 되면서 정치, 사회가 혼란해지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신적인 공허감과 현실 도피적인 사고 방식들이 퍼져 나갔는데 이러한 상태가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교세가 미약했던 초기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나 교인들이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하고 병역을 거부함에 따라 기독교를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도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보충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이런 대박해가 행해진 것이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Decius, 249-51) 때와 앞서 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였다. 하지만 가장 박해가 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가 박해의 마지막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다(밀라노 칙령).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떠한 박해도 기독교를 종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해가 가해져도 기독교도는 계속 늘어갔고 심지어 군인이나 고위 관리, 황실 인사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의 성격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발생할 당시 기독교는 압박받는 자의 운동 형태를 띠고 있었다. 현실의 비참함을 메시아의 도래로 보상받고자 하는 민중의 심정이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이 기독교였고 따라서 예수가 죽은 후의 초기 교회는 빈민들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세기 말, 3세기에 이르러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도 현실의 정신적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자 교회의 성격은 어느덧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교회는 억압하는 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신에 대한 순종만을 설교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기독교를 승인하여 그것을 다른 저항 운동에 대립시키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처절한 순교를 통해 공인된 기독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재위 379-95) 때가 되면 아예 국교로까지 승격되었고(392) 로마 제국보다 더 오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3. 미국은 대만문제에 간섭 지 마라 대만 내에 분열주의자들의 활동이 강화되자 중국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이를 막고 있다. 비록 지금은 평화로운 상태인 듯하지만, 나무가 조용하게 있고 싶어도 바람이 그냥 두지 않듯이 진정한 의미의 어떤 전환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근본원인은 미국과 소수 서구 열강들이 중국대륙과 대만의 통일을 실질적으로는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이 선언한 것과 같은 평화적 방식으로 통일이 된다 해도 미국인들은 결코 달가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막 국제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확보해 나가고 있는 나라가 이데올로기의 판이한 차이로 분열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은 어느 모로 보나 미국의 전략구도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현상은 중국의 현대화 과정에 끊임없는 속박과 간섭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미국에게는 언제든지 간섭할 구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애매모호한 태도에다 상황에 따라 돌변하는 행동, 그리고 국회와 정부 간에 마치 대립하는 듯하다가도 신속하게 협조의 정신을 발휘하는 식의 정치놀음을 벌이는 미국으로서는 그들의 수완으로 대만과 중국관계를 둘러 싸고 있는 분위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을 것이며, 게다가 교묘하게 그 속셈을 숨기고 자신과 남을 동시에 속이기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중 .미 합동성명'에 서명하고도 의회에서는 '대만관계법'을 통과시켰다. 대만 독립주의자들의 소란이 요란해져 중국 정부가 어쩔 수 없이 강경한 대응을 취하면 미국 의회는 이에 대해 다시 들고 일어나 한편으로는 '대만관계법'을 개정하여 '중 . 미 합동성명'보다 상위에두어야 한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만관계법' 중의 낱말을 꼬집어 미국이 지지하는 것은 '중국과 대만의 평화통일'이기 때문에 무력사용은 비합법적이고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중국이 무력사용을 중지하지 않으면 미국은 즉시 '대만보호'의 귄 리와 의무가 있음을 천명한다.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현상은 미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 계좌에서 대만의 분열주의자들을 위해 쓰인 돈이 얼마인지는 조만간 만천하에 밝혀질 것이다. 이렇게 된 후 미국은 다시 우리에게 평화통일을 요구할 것이며, 이때 대만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신호에 지나지 않을 뿐 결코 대륙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중국의 영토는 아닐 것이다. 좀더 상세히 말하자면 미국의 전략은 첫째 평화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둘재 중국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통일 이외의 수단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셋째 대만문제를 국제화하여 중국이 경솔한 행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고 이를 어기면 아시아 태평양 내지 전세계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응징과 국제적 고립을 감수하도록 한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대만문제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중국의 원칙은 확고하게 결정되어 있으며 결코 한두 명의 정치지도자나 한 시대의 정부에 의해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만에 관련된 문제해결의 원칙은 국민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에는 중국과 대만 간에 생길 수 있는 갖가지 변수들과 외세간섭의 가능성까지도 고려되어 있는 것이다. 장쩌민(姜澤민)이 말한 바와 같이. 적어도 대만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어떤 지도자도 무원칙적으로 타협을 할 수는 없으며 누군가가 이를 어긴다면 그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미국은 항공모함 두 척을 대만해협에 보내어 ' 강경하고 명확한 태도'를최대한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명확하였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만일 대만과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미국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 고 군사적인 수단으로 간섭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이런 태도는 매우 모호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태도일 뿐이고 미국이 실제로 무력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계산해 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은 이라크침공 때처럼 많은 서구 국가들을 모아놓고 유엔의 명의를 빌어 '합법'적으로 중국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인지를 따져 볼 것이다. 둘째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그에 동감하는 댕방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를 계산해 볼 것이다. 셋째 중국은 이라크와는 달리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으며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다. 이점은 유엔결의에서 이미 밝혀졌다. 제 아무리 미국의 맹폭을 받는다고 하여도 중국은 절대 이라크처럼 무력 앞에 쉽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몇 차례 전쟁을 치루었지만 깨끗하게 결말을 내고 물러난 적이 없다. 만일 중국과 대전한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20세기 최대의 도박을 벌이는 꼴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이 중국의 군사력이 이미 미국과 대항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아울러 중국이 호전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아니다. 중국이 큰 대가를 감수할 정도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대만의 독립을 앉아서 지켜보는 이는 바로 역사상 가장큰 죄인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우리들도 미국에 이상과 같은 분명한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이제 더이상 대만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모든 상황의 변화는 바로 미국의 식언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중국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하는 것은 중국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 되며 이에 중국은 크게 격분할 것이다. 대만문제는 바로 중국의 '아주 개인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키신저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계속 중국을 적대시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우리는 동반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에게 대만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1896년 일본에 의해 강점된 이래 중국영토가 잠식되어 떨어져 나간 하나의 섬이다. 중국이 대만의 분열적 태도에 보이는 반응은 미국 남부의 각 주가 미국을 벗어나려는 태도에 보이는 북부의 반응과 같은 맥락이다'라고 말하였다. 키신저는 친 중국인사로 장관 경력이 있는 고급관리에 지나지 않지만 정직하고 공정한 생각을 지니고 역사를 존중하며 용기와 지혜 및 전략적 안목을 두루 갖춘 인물로, 겅리치나 제이시 헬무츠와는 다르다. 대만문제를 대하는 태도면에서 그들과 키신저를 비교해 보면 단순히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 이들은 중국 통일을 미국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협하는 행위로 여기고, 대만해협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만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가되면 미국은 '동반자를 찾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사람은 인간입니다 국민학교 1 학년 수업 시간. 교단에 선 지 10 년만에 다시 1 학년 담임을 맡게 된 최규동 씨는 마치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으로 교단에 선 듯한 느낌이었다. "자, 오늘 첫 시간엔 '슬기로운 생활'을 꺼내세요." '슬기로운 생활'은 선수와 자연을 통합한 교과서로, 오늘은 조류와 짐승의 차이점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여러분, 모든 동물은 누구한테서 태어납니까?" 최 교수는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쳐다보며 가장 쉬운 질문부터 던져 보았다. "엄마한테서요." 아이들이 모두 입을 모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새들은 어떻게 태어납니까?" "알에서요." "그러면 돼지는 어떻게 태어나지요?" "제 모습 그대로요." 최 교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최 교사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대답이었다. 제 모습 그대로 태어난다니! 1학년 아이의 대답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 얼마나 명쾌한 답인가. "새들은 꼬리 깃이 있는 대신 동물들은 꼬리가 있어요. 그리고 새들은 날 수 있는데, 동물은 날 수가 없죠, 또 새들은 부리가 있고 발은 한 쌍인데, 동물들은 부리가 없고 다리가 두쌍이에요." 최 교사는 조류와 짐승의 특징을 설명을 해주다가 아이들에게 또 물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태어날까요? "제 모습 그대로 태어나요." "네 맞아요. 그러면 사람은 무엇입니까?" 최 교사는 아이들이 "동물입니다." 하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사람은 인간이에요." 최 교사는 다시 한번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이 되었다. "왜 그러지요?" 최 교사는 다시 물었다. "동물은 꼬리가 있는데, 선생님은 꼬리가 없잖아요?" 아이들은 다들 선생님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표정이었다. 최 교사는 잠시 말을 잃고 있다가 속으로 말했다. '그래 맞아. 사람은 짐승이 아니고 말고. 인간이어야 하고 말고. 고맙구나 애들아, 너희들이 나를 깨우치는구나. 우리는 정말 인간답게 생각하고, 인간답게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아가야 한다.' 글터 → 이글저글 “공산주의는 완전한 잠꼬대야. 저주받을 책을 썼다.”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년만에 완성한 ‘자본론(Das Kapital)’을 출판사에 넘겨준 뒤 술 한 잔을 나누며 이렇게 말했다.미국의 대통령과 부대통령은 결코 같이 여행을 갈수가없다.멕시코는 스페인인들과 멕시코 원주민들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일본은 1945년 한국이 해방되기 전에 일본인과 한국인을 결혼시켜 혼혈 민족으로 만들어 한국과 일본을 통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BC324년 전에 이미 알렉산더 대왕이 이러한 혼혈민족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10,000명의 마케도니아 군인들과 많은 페르시아 여자들을 결혼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젊은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다우닝가 10번지는 영국의 수상관저가 있는 주소이다. 이 집의 문은 밖에서는 열리지 않고 안에서만 열린다.볼리비아에서는 160년 동안 190번이나 정부가 바뀌었다.중세 영국에서는 시편 51편으로 범죄자가 글을 읽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아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면 형벌을 줄여 주었다고 한다.우루과이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의 하나는 잘 훈련시킨 개로 강간을 시키는 것이다.인도에서는 죄인을 고문하는 한 방법으로 강간을 행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