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 58 호4339.11.13 (09.23)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오가시며 → 자유글판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그 사람 하나만 보고는 사람 됨됨이를 모르는 법.그 사람의 친구들을 살필 것. / H.E.F.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소묘 한 묶음 안개의 도시 춘천에서는 그 어떤 사물 앞에도 안개라는 단어를 관형어로 놓을 수 있다. 안개 극장 아래 있는 안개 다실에는 안개 커피와 안개 음악이있다. 지금은 오후 두 시. 손님은 서너 사람.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첼로 한 타래가 축축하게 젖은 채 실내를 굽이쳐 다니는데 안경잽이 김형이 담배를 피우다 말고 침묵 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쳐든다. 연애하고 싶다... 라고 안경알에 씌어져 있다. 안개 다실을 나선다. 우라지게 화창한 햇빛이 거리에 박살나 있다. 서너걸음 번화가 쪽으로 내려가면 전자 오락실. 프로그램이 너무 구식이어서 국민 학교 애들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사십대의 사내 하나가 열심히 벽돌을 깨고 있다. 한참 동안 눈여겨보니 언제나 오십 점을 넘지 못한다. 벌써 수십 개의 동전이들어갔다. 사내는 약이 올라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기계는 위로의 말 같은 건 뱉어내지 않는다. 창구 쪽에서 거스름 돈을 취급하는 계집애 하나가 새들새들 웃으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사내는 이윽고 시뻘개진 얼굴로 일어서서 허겁지겁 호주머니를 뒤져본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협잡을 당했다는 듯한 표정이다. 서비스로 한번 만 더 하자고 계집애에게 말하자 계집애는 새침한 목소리로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계집에는 사내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즐기고 있는 얼굴이다. 체념을하고 밖으로 나와 사내는 몇 걸음 걸어간다. 이때 신경질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민방위 경계 경보. 당황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사내의 팔소매를 잡아 끌고 가까운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이어들려 오는 격한 말소리. 도대체 그 돈 꿔 간 지가 언제냔말요. 대답은 없었지만 오늘 저 전자 오락실엔 사십대의 강도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당구장. 이백 오십짜리 후배 녀석이 백 오십을 놓고 공무원처럼 보이는 사내 하나와 당구를 치고 있다. 사내의 이마에서는 자꾸만 비지땀이 흐르고 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승부는 쉽게 끝나 버린다. 이상하게 오늘은 당구가 잘 맞는 날인데요. 후배 녀석의 능청이다. 사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이상하게 오늘은 식은땀이 잘 나와 주는 날인 모양이다. 번화가에서 여자 하나를 만난다. 이 여자는 언제나 잘난 체하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여자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가 아직까지 모른다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본 적이없는 것은 그녀의 미모와 학벌 때문에 생겨난 자존심 탓일 것이다. 섹시한 자태에 이끌려 데이트를 하자고 정중하게 말했더니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누구와의 선약일까. 짚이는 데가 있어 물어 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내가 아는 어느 외과의의 이름을 댔다. 나는 그가 조금 전에 경찰에 붙잡혀 가는 광경을 목격했었다. 내용을 알고 보니 이러했다. 한 달 전 그에게 맹장 수술을 받은 시골의 어느 환자가 있었는데 수술 후에도 줄곧 경과가 좋지 않아 신음하던 중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 다른 병원으로 가보았더니 뱃속에다 가위를 넣어 둔 채 꿰맸다는 사실이 판명되어졌다. 그러나 시일이 너무 경과된 상태였으므로 재수술을 하던 중 환자는 절명해 버렸다. 여자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더니 대번에 낯색이 파래져 버렸다. 오늘 새벽까지 그 외과의와 같이 있었는데 언제 붙잡혀 갔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시골에서 재수술을 받기 위해 올라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금시초문이라는 거였다. 난 몰라... 실성한 듯 그녀는 옆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난 몰라...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모른다는 말이 나온 셈이지만 이런 운명은 또 뭐란 말인가. 술집. 외상을 좀 달라고 하니까 주지 않는다. 이럴 때 술장사가 가장 위대해 보이면서 자신이 가장 초라해 보인다. 술장사에게 외상값이 밀렸을 때 술장사도 똑같은 심정이 될 것인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도 언젠가 한번은 해보고 싶다. 밤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인간이라는 것에서 빨리 탈피하고 싶어진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우울한 이마에 연애하고 싶다, 라고 씌어져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호적은 어떻게 만들었나 - 채웅석(가톨릭대 교수) 호적, 국가재배의 기본 자료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호적과 주민등록부에 등록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진다. 국적 변동 또는 형벌 등의 제한사유가 없는 한, 교육, 선거 등의 권리를 누리게 되며, 납세.병역 등의 의무를 져야 한다. 이렇듯 호적과 주민등록부는 국민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법적 수단이다. 동시에 국가는 국민을 파악하고 범법자를 가려내는 등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국민을 등록하고 파악하는 수단도 정교해지는 경향이 있다. 신분증의 경우 조선시대의 호패를 이어 도민증. 주민등록증 등의 형태로 변화하였으며, 곧 운전면허증. 의료보험증. 은행카드 등과 겸할 수 있는 전자카드 형태의 신분증이 나타날 모양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왕조권력의 지배력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가 호구의 등록이다. 고려시대에도 건국 직후부터 호구를 조사하고 등록하여 지배하려 하였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호적과 주민등록부제도가 따로 있지 않고 호적 한 가지만 있었다. 호적을 작성한 목적은, 첫째로 호구를 파악하여 담세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호적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16~59세 사이의 양인을 정이라 하여 국역을 부담하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호적제도와 국역 부과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라가 부강하냐 빈약하냐의 여부는 민이 많고 적은 데 달려 있고, 부역을 고르게 하려면 민의 숫자를 세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민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 민을 길러서 번성하게 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면 민이 많아지게 된다. 그리고 호와 인구를 등록하여 그 증감을 살피면 민의 숫자를 잘 파악할 수 있고, 인구를 조사하고 장정을 계산하여 부세를 매기면 부역이 고르게 된다. 이렇게 하면 위로는 일이 잘 풀리고 아래로는 소요가 일어나지 않으며, 나라는 부유해지고 민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그는 호구가 국가재정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정확하게 등록하여 파악해야만 국가의 토대를 충실하게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민에게 부역을 공평하게 부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둘째, 호적은 개개인의 신분사항을 기재하여 신분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양인과 천인을 구별하고, 양인에게는 관직과 역에 관련된 사항을 밝혀 기록하였다. 호적은 국역 부과 대상자를 파악하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신분제도를 꾸려 나가는 기초 자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셋째, 호적은 국가가 기층사회를 조직하고 편제하는 근거가 되었다. 고려 초기에 호적에 등록한 곳을 본관으로 부여하고 관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행정력이 쉽게 침투할 수 있도록 지역공동체를 고려하면서 촌락지배조직을 편성하였다. 이처럼 호적은 국가 지배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호적에 등록되지 않고 자유로이 옮겨 다니면서 국가의 부역을 부담하지 않았던 부류도 있었다. 사냥. 도살업을 하거나 버들고리를 엮어 팔아 생활하였던 양수척. 화척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할 때 제압하기 어려웠던 자들의 후예라거나 우리와는 다른 북방민족계통으로 여기고 고려의 공민으로 보지 않았다. 이렇듯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국역 부담에서 빠질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국가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호구조사와 호적작성 고려 건국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호적을 완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신라 말기부터 각 지방에서 할거하였던 지방세력들을 단시일 내에 통합하고 집권력을 갖추기는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권력의 의지대로 일시에 호구를 재조사하여 등록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한동안 지방사회를 그 지역 지배세력의 자율적 지배에 맡기고 중앙권력은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밖에 없었다.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광종 때에 어느 지역에 “읍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기록은 당시 처음으로 그 지역을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삼았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호구를 파악하고 등록을 마치게 되어 직접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전 왕조나 지방세력들이 쓰던 호적도 있었지만, 그 동안 사회변화를 거치면서 현실과 차이가 많이 났으며, 그간의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호적이 필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호적을 국가권력을 세우는 기초로 여기고 점차적으로 지방별로 공을 들여 작성해 나갔다. 대개 성종대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파악을 완결하였을 것이다. 호적을 한 번 작성한 다음에는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3년마다 다시 조사하여 고쳤다. 이것을 식년성적이라 하였다. 그 밖에 부역의 징발과 관련하여 호구사항을 집계한 계장이라는 문서를 매년 작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적을 보완하여 신분 계층별 등록부를 따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종실을 대상으로 한 종적, 군반씨족을 대상을 한 군적, 수공업자를 등록한 백공안독, 노비를 등록한 천적등이 있었다. 이러한 호적이나 여러 가지 등록부를 이용하여 고려왕조는 인민을 정교하게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 호적을 작성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각 호에서 가장이 가구내역을 밝힌 신고서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군현에서 확인한 다음 1부는 관에 보관하여 호적을 고치는 자료로 삼고 1부는 돌려 주었다. 이것을 호구단자라고 부른다. 단자를 수합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 마을의 이정 또는 촌장이 간여하여 정확한지 여부를 살폈다. 만약 가장이 가족을 누락시키거나 나이를 속였으면 고의든 부주의 때문이든 처벌하였다. 역을 피하기 위하여 고의로 그랬을 경우에 1명을 속였으면 도형1년, 2명은 1년반이라는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이정의 경우도, 1명이 문제되면 태형40대, 7명이면 장형60대 하는 식으로 처벌하였다. 이렇게 만든 호적대장은 각 군현에 보관하고 부본을 중앙의 호부에 바쳤다. 한편 호적에 등록된 사항을 관으로부터 증명받을 필요가 있을 때는 오늘날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준호구라는 문서를 발급받았다. 준호구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거나 소송을 할 때 첨부자료로 사용하였으며, 자기 소유의 노비를 확인하거나, 신분이나 출신가문의 내력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도 사용하였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시누이와 올케사이 누구나 자신이 아끼는 옷 몇벌은 있을 거예요. 그 중에는 자주 입는 평상복도 있지만 자주 입지는 않지만 예복처럼 언제 보아도 가슴이 설레는 옷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집에 머므르고 있던 시누이가 옷을 정리하고 있는 제 옆으로 오더니 "언니, 이 옷 너무 예쁘다. 오늘 나 잠깐만 빌려 줄래요?"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순간 전 광장히 난처했습니다. 사실 옷이야 입으라고 있는 것이고 누가 입든 쌓아 두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시누이가 점찍은 옷은 제가 유달리 아끼는 옷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시누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옷을 빌려 주었는데 계속 마음이 찜찜하고 혹시나 시누이가 옷을 더럽히면 어찌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오빠 집에서 생활했던 일이 떠올랐어요. 세련되고 예쁜 옷을 잘고르는 올케언니릐 옷중에는 탐나는 옷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끔 언니가 외출하고 없을 때 언니의 옷장에 있는 옷들을 꺼내 입어 보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한번은 졸업을 앞두고 사은회 행사에 입고 갈 옷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변변한 정장 한 벌 없었거든요. 어떻게 할까 곰곰히 생각하다 지난 번 올케 옷장에서 본 핑크색 원피스가 떠올랐습니다. "언니, 이 핑크색 원피스 너무 예쁘다. 이거 한 번 입어볼까?" 언니가 다른 옷은 추천 해 주면서도 그 핑크색 원피스는 입어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 제가 먼저 말을 꺼낸 것입니다. "그 옷은 결혼할 때 산 예복인데....." 올케 언니는 말끝을 흐렸지만 제가 그 핑크색 원피스만 유독 탐을 내자 빌려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올케 언니가 많이 속상했을 것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옛날에 나도 그랬는데 괜히 시누이만 탓하고 있었구나. 들어오면 웃으면서 옷이 잘 어울린다고 얘기해 줘야지.' 하지만 막상 저녁때 시누이가 들어와서 "언니 어떡하지. 친구가 장난치다가 이 옷에다 커피를 쏟아 버렸어. 미안해요"라고 말하는데 기분이 팍 상했습니다. "괜찮아요. 빨면 되겠죠."하고 돌아섰지만 시누이가 참 얄미웠습니다. 전 아직도 철들려면 먼 것 같아요. 결혼 전 일을 떠올리며 결심했던 것을 금방 까먹고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시누이만 아니었어도.....어이구 속 터져.' 이민영 님/경남 밀양시 가곡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8 -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연역법과 귀납법의 특성 그때 세계에서는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 창설 1609년: 이탈리아 갈릴레이, 천체망원경 발명 데가르트의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나는 의심한다'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명제가 나올 수 있는가? B. 러셀은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본다. 생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생각의 주체가 나라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영국인들이면 마음과 더불어 의식이라는 개념을 썼을지 모른다). 그러면 생각의 대신과 자연계의 물질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정신과 신체가 있다. 그중, 정신은 신과 통하는 것이며, 신체는 물질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정신과 물체라고 나누어볼 수 있다. 전통적인 개념에 따른다면 2원론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은 이 이질적인 두 가지를 공유하게 되는가? 데카르트는 그 당시에 새로운 학문으로 관심을 모으던 해부학을 배경으로 우리 목 뒷부분에 있는 송과선이 바로 정신과 육체의 연결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이야기이나 그 당시에는 통할 수도 있는 설명이었다. 천재들은 때때로 바보스러운 생각을 하거나 지혜를 거꾸로 쓰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뉴턴은 연구실과 거실 사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큰 구멍은 개가 다니고 작은 작은 것은 고양이를 위해서였다는 얘기다. 친구가 큰 구멍 하나면 고양이도 다닐 수 있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내가 그 생각은 못했구만..."라고 공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뉴턴 같은 사람도 때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현실판단을 한다는 뜻에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고다. 물질의 특성은 어디 있는가? 연장에 있다고 보았다. 공간적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는 근원적으로 신, 정신, 물질로 된다. 그리고 이 셋은 철학적 존재의 기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러한 철학적 근거는 어디서 오는가? 데카르트는 철학의 방법론적 근거는 수학에 있으며, 수학의 방법론적 핵심은 연역성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본다면 데카르트 철학의 근원은 두 가지다. 그 첫째는 이성이다. 이 이성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사유의 주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연역법이다. 베이컨과 그렇게 대조적일 수가 없다. 경험과 귀납이 영미철학의 주류가 되었다면, 이성과 연역은 대륙철학의 기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이컨은 뒷받침하는 것은 자연과학이고 데카르트의 배후를 담당하는 것은 수학이었다. 데카르트 자신이 해석기하학의 창안자이기도 했었다. 데카르트는 24살 때 군에 있으면서 학문의 뜻을 세운 뒤,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학설을 제창할 수 있으며 번거로움이 없는 화란으로 이주해간다. 귀족 출신으로 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었기에 어려움 없이 학문적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가 많았다. 말브랑슈도 그러했고 스피노자와 파스칼도 그러했다. 그래서 결혼을 단념한 편이 많았다. 데카르트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알려진 바로 는 결혼을 했으나 부인이 첫 해산 때 아기와 더불어 죽었기 때문에 독신생활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학문은 많은 공명자와 반대파 학자들을 갖게 되었으나 그의 명성은 높아녀갔다. 후에는 스웨덴의 왕실로부터 여왕을 비롯한 왕실의 학문과 교육을 위해 초청을 받고 이에 응했으나, 북국의 음산한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더 큰 뜻은 얻지 못하고 객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프랑스는 이 위대한 근대철학의 개척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 한가지 추가해보고 싶은 것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대륙 철학자들은 이성론, 연역법, 직각적인 진리의 판명성을 택했기 때문에 신을 거부하거나 무신론적 철학을 제창하지는 않았으나, 경험론, 귀납법, 심리주의를 택한 영국의 철학자들은 무신론이나 신 또는 종교와 관계가 없는 철학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위로부터의 이성론은 종교의 영역을 인정하나, 아래로부터의 철학은 종교와 무관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화란이 종교적 자유와 함께 카톨릭의 정신적 제약이 적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화의 중심적 역할도 하고 있었다. 역시 정신적 자유가 제약받는 곳에는 철학이나 사상적 결실이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 데카르트의 후계자 중의 말브랑슈는 좀더 종교적 비중을 크게 갖는 철학자로 프랑스에 남게 된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지렁이'란 단어를 분석하면... '지렁이'란 단어는 어떻게 분석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렁이'의 '지'는 지렁이가 주로 땅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한자인 '땅 지'의 '지'로 보이나요? 그렇다면 나머지 '렁이'는 무엇인가요? 맨 뒤의 '이'는 접미사로 보이지요? 맴맴 운다고 해서 '매미', 개굴개굴 한다고 '개구리', 이 모든 것에 '이'가 붙어 있으니까요. 이렇게 해석한다면, 모두 맞는 말입니다. '지렁이'는 한자어입니다. 즉 '땅 지', 그리고 '용 용' 즉 '지룡'입니다. 즉 땅 속에서 사는 용이란 뜻이지요. 아니, 그렇게 작은 것도 용이라고 할 수 있느냐구요? 큰 지렁이를 아직 못 보신 모양이지요? 옛 문헌에는 모두 '디룡'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구개음화가 되어 '지룡'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접미사 '-이'가 붙어서 '지룡이'가 되었고, 이것이 음운변화를 겪어서 '지렁이'가 되었습니다. 19세기말까지도 역시 '지룡'이었었는데, 20세기에 와서야 '지렁이'가 되었지요.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이 '지룡'이 회충도 의미했다는 점입니다. 회충이나 지렁이나 생기기는 같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인간의 삶과 수명 우리가 믿어왔던 정명의 개념은 이제 흔들리고 있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생명복제까지 가능하게 된 지금 수명의 길이를 논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미없는 일이 될런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주도하며 자기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룩해 낸 사람들의 업적을 보면 그 자신의 수명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선 소크라테스와 칸트는 오래 살았다. 괴테와 톨스토이는 같은 해에 태어나 나란히 83세까지 살았다. 이들의 학문과 작품은 80년이란 그들의 인생을 담보로 하여 가능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방종했던 젊은 시절을 극복하고 거룩한 톨스토이적 휴머니즘을 완성한 것도 그가 오래 살았기 때문이며, 괴테는 파우스트를 쓰기위해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신에게 빌기까지 한 실화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인 업적은 우선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외길 인생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래서 대기는 만성으로 이어진다. 동양의 철학자, 석가, 노자, 맹자는 80년을 넘게 살았고 공자, 주자, 장자는 7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런가하면 서양의 홉스, 죤 듀이, 슈바이처, 러셀, 버나드쇼는 90을 넘겨 살았고 야스퍼스, 칼 융은 86세, 하이데거, 마틴부버, 에리히 프롬은 87세를 살았다. 비교적 오성을 중요시하는 철학에 관련된 사람들은 위와 같이 오래 살았다. 고승들의 경우도 매 한가지이다. 그들 모두는 장수하였다. 반면 감성적 유형 예술가들은 천수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나 미술에 뛰어난 예술가들은 왜 항상 우울한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 이후, 수많은 심리학자나 신경학자들은 창조성과 광기에 대한 상관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미국 켄터키의대 심리학 교수인 아놀드 루드웍박사는 조울증이 가장 심했던 집단은 예술가 집단이었으며 알코올 중독은 조사대상의 60%가 배우, 41%가 작가들이었으며 과학자들은 3%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심리상태가 불안한 환자는 배우가 17%, 시인들인 13%, 과학자들은 1% 미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울증의 정도에 따라 작가들의 창작성에도 차이를 보였는데, 세계의 뛰어난 창작자들은 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홉킨스대학의 케이레드필드 제미슨 박사의 주장이다. 예술가들의 심리상태를 연구한 제미슨 박사는 자신의 저서 <우울증과 예술성>에서 시인 바이런과 셀리, 음악가 슈만, 소설가 허먼멜빌과 버지니아 울프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그들은 제 명대로 살 수가 없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 자살한 헤밍웨이와 가와바다야스나리. 한 사람은 사냥총으로 또 한 사람은 가스관을 입에 물고 죽어 있었다. 반 고흐와 클라이스트의 권총자살, 우리 나라의 시인 이장희, 김소월, 일본의 아꾸다가와류노스께는 약을 먹었고, 미시마유끼오는 할복자살을 하였다. 디자이오사무, 버지니아 울프, 셀리 그리고 이백과 굴원, 등왕각 서문을 쓴 왕발은 물에 빠져 죽었다. 셀리, 에밀리브론테, 김소월, 이상, 왕발, 이시카와타보쿠는 20대에 죽었고 손상기, 모딜리아니, 로트렉, 라파엘, 슈베르트, 모차르트, 쇼팽, 바이런, 랭보, 비용, 이효석, 나운규, 아꾸다가와류노스께는 30대에 죽었다. 모파상, 보드레르, 훨덜린, 모파상, 로트렉과 고흐는 정신병원에 감금되어야 했다. 상아탑에서 학문을 연찬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학자들의 삶이 잔잔하고 안온했다면, 온몸으로 분출하듯 작품을 쏟아내어야 하는 예술가들의 삶은 난파된 배처럼 되어 종래에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일차 생산에 직접 관련된 예술가들의 생애가 좀 더 비참하고 또한 단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차이를 더욱 느낄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음악가들의 삶을 재조명해 보면서이다. 지휘자나 연주가들은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보다 훨씬 건강하게 오래 산 것으로 나타났다. 개중에는 시벨리우스나 생상스, 베르디같은 장수자도 혹간 있긴 했으나 슈베르트, 모차르트, 멘델스존, 쇼팽, 비제, 거슈인 같은 사람은 아까운 나이 30대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베버는 40세에, 무쏘르스키는 42세에, 슈만은 46세에,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 드비시, 파가니니는 50대에 죽고 말았다. 반면 첼로의 거장 카잘스는 96세까지 살았고,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는 85세, 호르쇼브스키는 100살까지 살았다. 바이올리니스트 야샤하이휏츠는 85세, 요세프시게티는 81세, 오르가니스트인 라인캔은 99세, 샤를마리비도른는 93세까지 살았다. 장수한 음악가들은 지휘자들 쪽에 더 많았다. 런던 필하모니를 창설한 영국의 지휘자 조지스마트는 90세, 알렉산드르디코노비치는 91세, 부르노발터는 86세, 피에르몽테는 89세, 러시아의 지휘자 예프게니므라빈스키는 86세, 로베르트슈톨츠는 94세, 프랑수아조세포고세크는 95세, 미국의 유명한 지휘자 레오폴드스토코프스키는 95세, 베를린필하모니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89세, 뉴욕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레너드번스타인은 72세의 나이로 우리의 곁을 떠났다. 반세기 동안 영국의 데카 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있는 헝가리 태생의 지휘자 게오르그솔티경(주 : 게오르그솔티는 이 책이 탈고 될 무렵 1997년에 세상을 떠났기에 바로잡음.)은 84세의 나이로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건강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은 하는 것이다. 일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무엇보다 지휘란 심폐기능을 단련시키는 스포츠와 다름없다. 그리고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는 말에 그는 음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이라고 하였다. 지휘자의 장수에 대한 단서를 솔티는 여기에서 제공하고 있다. 아름다운 리듬을 타고 남과 나에게 다같이 기쁨을 주는 일, 그리고 턱시도 밑으로 흘러내리는 땀, 그 정열의 발산, 심폐기능이 단련되는 스포츠 란 말에 다시 한번 주목해야 될 것 같다. 첼로의 거장 카잘스는 또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 한 몸의 힘을 빼고,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여 손발 자체가 지닌 무게와 그 낙하력을 이용함으로써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었다. 나에게 있어서 연주라는 일은 즐거움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어렵게만 보였던 일이 즐거움이었다고 고백한 말에는 다시 한번 주목해야 될 것같다. 즐거움과 운동, 이것이 그들의 장수의 비결이었다면 밀폐된 공간에서의 영양실조와 운동부족 그리고 창작의 고통으로 인한 노심초사. 문자 그대로 마음을 괴롭히고 애를 태우며 생각을 끓이니 어찌 수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쓰는 일과 수명은 정직한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어떤 일에 관련되어져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수명과도 깊은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2. 로마 황제가 한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기원후 1세기경 동서양에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발달한 제국이 동시에 융성하고 있었다. 한나라와 로마가 그들이다. 비록 수만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 과연 접촉은 없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교역품의 왕래도 있었고 사람의 왕래도 있었다. 중국의 서쪽은 파미르 고원을 비롯해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 너머 서쪽으로 가기를 꺼려했다. 산맥을 넘을 때 생기는 산악병을 서행을 막으려는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래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한 중국인이 있었다. 바로 감영이다. 후한 화제 때(서기 97) 대진(당시 중국인들이 로마를 지칭한 이름)에 사신으로 파견된 감영은 바빌로니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대진에 가려고 하는데 중앙아시아의 제국인 파르티아의 뱃사공들이 말렸다. “바다는 광대합니다.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2년이나 걸립니다. 더구나 이 바다는 인간을 망향의 병에 걸리게 하여 벌써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감영은 로마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파르티아의 속임수였다. 당시 파르티아는 한나라와 로마 사이에서 물품을 중개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는데 만일 감영의 로마행으로 두 나라간의 직접 교역이 트이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파르티아 인들은 로마로 가는 가장 짧은 거리인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육로를 숨기고 일부러 페르시아만을 남하, 아라비안 반도를 우회하여 홍해로 향하는 해상로만을 알려 주며 겁을 주었던 것이다. 중국인들도 나중에는 이를 알아차렸다. 이런 기록이 있다. `대진은 키가 크며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상행위는 공정했으나 그 의복은 중국의 것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에 사절 파견을 항상 원했으나 안식국(파르티아) 사람들은 우리와의 교역에서 이득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진 사람들이 안식국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166년 마침내 로마의 명군으로 이름 높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파견한 사신은 안남(지금의 베트남)에 와서 상아, 물소 뿔, 거북이 등을 중국 황제에게 보냈다. 때마침 파르티아가 쇠약해지고 있어서 이후로 대진국과의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출발, 해상로를 이용해 동남아시아까지 온 로마의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의 토산품을 중국에 보냈다. 또 직접 중국의 해안에까지 가기도 했다. 이 상인 가운데 중국인들이 진륜이라고 부른 로마 사람은 직접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226년 그는 베트남을 거쳐 당시 위,촉,오 삼국이 정립하고 있던 중국으로 들어왔다. 오의 왕 손권은 그에게 로마의 국토와 민족에 대해 상세히 물어 보았고 진륜은 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했다. 손권은 그에게 남녀노비 각 10명을 주어 로마로 돌려보냈다. 지금부터 1700여 년 전 중국 땅에 로마 인이 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2. 제재와 앙거 그깁고 또다시 제재 2) 제재를 계속하면 중국의 항거도 계속된다 일본의 전 주중대사였던 요스키 나가이(中江要介) 씨는 임기를 마치고귀국한 후 [중국이 나아갈 길 -유일한 사회주의대국[中國的走장-獨存的社會主義大國]이라는,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을 펴냈다. 물론 이 책에서 서술한 모든 견해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자는 중국에대한 충분한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진실하고 공정하게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75년대 초 미국이 자신들의 입으로 말한 취지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를 모색하고 접근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즉 중 .미 관계 정상화는 소련을 제재하는 데 유리하다는 이유로 진행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 .미 관계가 정상화된후 최근 20년 동안의 모든 행동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떳떳하지 못하고 비밀스런 내막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내막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제국주의의 음모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미국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중국을 그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둘째 중국을 그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먼저 중국의 통일을 아주 먼 꿈으로 만들어버렸고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는 하늘과 같은 가치관을 중국에 주입시키고 나아가 동유럽이나 구소련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중국을 와해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있다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버려야 한다. 제재에 맞서 대항하여야 한다는 것은 중국이 중 .미 관계에 있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전락 중의 하나이다. 미국의 모든 대중국 제재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만일 미국 의회의원 몇 사람이 '대만방위'의 의결을 실효성 있는 행동으로 옮기려고 한다거나,그들이 '대만관계법'을'중 .미 합동성명'에 끼워 넣어 이 성명의 기본원칙을 위배하려고 하거나, 혹은 대만의 군사력 증강을 도모한다거나, 계속해서 리떵후이의 방미를 허락하거나, 라마교 집단에 특사파견의 태도를 고수하려고 든다거나 하면 우리 역시 조금도 주저할 필요없이 미국과의 외교관계 등급을 낮춰야한다. 서구 열강들에게 오랫동안 침략과 약탈 그리고 모욕을 당해온 중국에게는 지금 존엄이라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원수가 워싱턴 방문의 요청을 받고 간다면 이는 세상 누구 도 국빈자격의 방문이나 공식방문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인데도 미국은 리떵후이의 방문을 '사적인 방문'이라고 잡아떼는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중국은 원칙과 존엄을 지켜야 한다. 우리도 절대 워싱턴에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모든 국민은 앞으로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라도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이는 여행이나 휴가의 형식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결코 감정적이거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누구도 중국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은 오래된 빚에 덜미가 잡혀 나중에 몇 배로 상환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3) 미국에 대한 항거는 약소국들의 이익이다 만약 미국이 계속해서 '세계경찰'을 자임하며 국제문제를 트집을 잡는다면 우리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효과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나와 내 친구들의 일치된 견해이고 나아가 우리들의 권리문제 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얼마 전 미국영토에서 이륙하여 쿠바영공으로 진입한 쿠바 망명객의 비행기를 쿠바가 격추시킨 사건이 있었다. 우리는 당시 중국의 유엔대표가 정의롭고 현명한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사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은 안보리의 이사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큰소리를 치고 살짝 고비를 넘기려 하였고 심지어는 해외 주재관을 통해 쿠바 외무장관의 입국을 지연시키는 따위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수작을 부리기도 하고, 쿠바를 문책하려는 결의도 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완전히 공정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당시 중국대표는 대국으로서의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왜 그들에게 사실을 밝히고 자신들의 의견을 발표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입부터 막으려 하는가? 유엔이 비록 뉴욕에 위치한다하더라도 결코 미국에 속한 관공서는 아니다. 미국인들은 유엔을 빌미로 이미 얼마나 많은 자기 몫을 챙겼는가? 쿠바는 미국과는 아주 다른 사회제도를 가진 남미의 소국이다.몇십년 간 계속해서 미국의 강권정치와 경제봉쇄로 크나큰 피해를 입었으니, 이는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화를 당하게 되는 국제적인 실례에 속한다. 미국은 민주와 자유가 없다는 이유로 줄곧 몇몇 국가들에 대한 공격을 일삼아왔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다당정치를 시행하면서도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왜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국가체제를 인정하지 않는가? 반드시 싹쓸어 없애 버려야만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당신들의 민주주의 정신은이런 면에서는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중국은 유엔상임이사국으로서의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50년대처럼 동맹적인 성격이 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웃하고 있는 두 나라가 각자 오랜 기간을 거쳐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두 나라 관계는 50년대와 같은 낭만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면이 많아졌다고 할 수있다. 그러므로 양국관계는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장애요소는 점차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전략적 동맹자로서의 신뢰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쌍방은 이데올로기가 국가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요소가 아님을 인식해야 하며, 이데올로기가 정의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라는 점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후에야 비로소 더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북대서양조약 가맹국의 세력확장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러시아에 가한 결정적인 제재이며 나아가 모든 서구 국가가 꾸민 음모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바르샤바조약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된 지금 미국은 러시아의 목에다 날카로운 칼을 들이댄 꼴이 되어 자기들이 세계를 제패하기도 전에 굴복시켰고, 이로 인해 러시아는 과거의 영광과 대국의 지위를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상황으로 볼 패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같은 배를 탄 것이다. 서구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프랑스만이 미국의 지휘 아래 좌우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은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많은 우여 곡절을 겪기는 하였지만 훌륭한 인문정신과 전통. 자신감과 강인함 그리고 밝은 앞날을 가진 프랑스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영화. 문학, 미술과 정치적 지도자는 미국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매력적이다. 프랑스는 미국에 비해 거짓이 없고 의리가 있으며 패권적이지 않고 독립적이다. 이 후의 국제관계에서 프랑스는 드골주의의 우수한 전통을 시라크주의가 이어받고 서구 열강들의 합창단에 합류하지 말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어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구 국가 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장 먼저 인정한 나라가 바로 드골 선생이 이끄는 프랑스였음을 기억하고 있다. 역시 그는 지금 세계가 인정한 위인이 되었으며 그가 '그대들은 중국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그들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한 말은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현실이 되었다. 아시아 국가 중에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정치지도자들이 이미 여러 번 미국에 대해 할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마하티르(Datuk Seri Mahathir)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미국의 수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적이 있다. '미국은 특정한 나라에 가서 '어떤 나라의 위협론'을 퍼트려 그 나라에 그들의 무기를 팔아먹고 나서는 다시 상대 국가에 가서 똑같은 말을 한다. 그리하여 두 나라가 대치상태에 돌입하도록 하고는 군비경쟁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그는 악덕 상인의 모습을 정말 생생하게 그려 내었다고 생각된다. 싱가포르인의 불만도 마찬가지로 크다. 페이라는 미국청년이 싱가포르에서 법을 어기고 사회를 어지럽혀 싱가포르 법원에 의해 태형을 받은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모든 서구 세계가 떠들썩하였고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까지도 싱가포르에 대해 강온정책을 펴면서 사면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클린턴이 사법독립의 원칙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미국의 사법은 독립되어 있으나 다른 나라는 반드시 그의 뜻대로 행해져야 하며. 그렇케 하지 않으면 야만적이고 낙후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것은 분명히 전형적인 식민심리이다. 다행히 싱가포르는 원칙대로 처벌하였다. 이런 태형은 서구가치 지상주의 및 사법제도의 이견에 대한 고문이었다. 아시아는 바로 아시아인의 것이다. 우리들은 주변국가와 영원한 상호신뢰 및 의존관계를 구축해야 하고 모든 아시아 국가는 미국인의 수중에있는 카드에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상호공존하며 공동의 이익과 유사한 문명의 배경 아래 함께 발전하여 아시아로 침입하는 외세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국제문제의 해결에 참여하고 종족차별과 강권정치를 막아야만 새로운 아시아시대에 적응할 수있을 것이다 부록 :우리가 중국을 경계하는 이유 찰스 크라트하머(미국) 미국의 국무장관 보좌관인 로더 윈스톤은 미국이 과거 소련을 제재하는 방식으로 중국을 제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는 그들의 정책은 접근의 정책이지 결코 억제의 정책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미국 CBS가 전국을 대상으로 방영한 프로그램에서 하원의장 겅리치는 중국 국민이 중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발언한직후 그가 말하려는 의도는 결코 '전복'그 자체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하였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외교적 발언이 나오게 되는가? 새로 국제사회에 등장한 위협성을 지닌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채택하는 어떠한 합리적 정책에도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첫째는 중국이 계속해서 세력범위를 확장시킬 때는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중국에서 여전히 잔흑한 독재제도를 펼치고 있는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국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발언을 해서는 안 되지만 논설위원들은 가능하다, 제재의 의미가 과거 소련과 같은 역할을 맡은 중국과의 제2차 냉전을 가리키는 것인가? 결코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이 투쟁은 이데올로기의 색채를 띠지 않는다. 소련은 와해되기 직전 그래도 사람을 끄는 면이 있어 세계 각국의 동정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마오쩌똥시대와는 판이한 상황이며 이미 그러한 흡인력은 잃어버렸다. 지금의 중국은 구식 독재국가에 가까울 뿐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권력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19세기 말의 독일과 아주 흡사하다. 당시 독일은 유럽대륙에서 너무나 강대했었다. 중국의 인접국가들은 이미 이러한 압력을 받고 있고, 현재 중국의 세력은 남중국해까지 뻗어있다. 중국은 그들의 인접국가와 더욱 가깝고 중국과는 수백 마일 떨어져 있는 섬까지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군대가쉽게 도달할 수 있으면 모두 자신의 영토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와 서구 열강들의 군비지출은 확실히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군비지출은 갈수록 증가하여 과거 십 년 간 두배 이상 되었다. 이경비는 대륙간 탄도유도탄 개발과 육군의 현대화 및 원양 해군의 설립에사용되고 있다. 중국은 자신들의 역량을 국내에서만 펼치지 않고 유도탄 및 핵기술을 파키스탄과 이란 등지에 수출하고 있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우호관계는 중국이 숙적 인도를 포위하고 몰아붙이는 데 유리한 작용을 한다. 이처럼 약자를 괴롭히는 나라에 대해서는 초기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중국의 인접국가와 적당한 관계를 모색하여야 함을 뜻하는데, 먼저 베트남과의 협력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는 어느 정도 감정적 행동일 수도 있으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 의의는 바로 지정학적인 면에 있다. 베트남은 1979년 잠시 중국과 전쟁을 벌였던 중국의 숙적이다. 그럼므로 우리는 베트남과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를 보면 대중국 제재전략의 다른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도와 새로운 안보관계를 성렵시켜야 한다. 인도는 이미 소련의 냉전동맹에서 벗어났다. 둘째 일본과의 동맹을 지속시켜야 한다. 미 일 동맹관계는 현재 미국 정부가 일본 교토에서 카뷰레터를 판매하겠다는 결의를 강력하게 보임으로써 결렬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위기 때문에태평양에서의 안정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셋째 러시아인들과 결탁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러시아인들이 다른 측면에서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와 함께 중국에서 취할 수 있는 공통적인 이익이 있을 것이다. 제재는 결코 냉전적 간섭의 연장이 아니다. 제재는 몇 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강권정치 원칙 중의 하나이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비엔나회의에서 기세가 둥등한 프랑스를 제재하려는 취지의 동맹체제가 결성된 적이있다. 당시 대서양연맹은 이미 침략적 성질이 있는 소련을 제재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서구는 막 기세를 펴기 시작한 독일을 제재하지 못해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이 20세기의 신흥대국에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순히 중국을 제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겅리치가 명확하게 천명하지 못한 것으로. 침략적 성격이 있는 독재정권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일관되게 지키고 있는 우흥다(와 같은 인물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우흥다는 인권운동에 관여하다가 간첩활동의 죄명을 쓰고 현재 감옥에 갇혀 있다. 도의적인 면에서 우흥다를 지지해야 할 이유도 분명하며 도의적인 면 이외의 정치적인 이유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일찍이 소련을 제재한 적이 있지만 결국 내부적으로는 소련의 제도를 바꾼 인물은 솔제니친, 사란스키, 사하로프 등과 같이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인사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우흥다로 대표되는 수많은 국민들은 중국의 독재제도에 가장 큰 위협을 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 당국은 아주 엄한 태도로 우흥다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흥다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제재는 그다지 큰 작용을 하지 못한다. 미국은 과거에 경제가 비교적 낙후된 소련에 대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한 적이 있다. 하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중국의 경제가 크게 발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경제제재를 시행한다는 것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것이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개적으로 인권투쟁을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베이징이 2000년 올림픽의 개최권을 따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그들 이 요구하고 있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등은 중국에 큰 타격을 줄 것이다. 다음으로 힐러리 클린턴은 부인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국이 앞장서서 금년 9월에 베이징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된 세계여성대회를 저지해야 한다. 중국과 같은 정권은 이런 여러 행사들이 가져다 줄 정권의 합법성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당국이 이러한 활동을 주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중국이 자유화 조치를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 밖으로 배척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펴는 정책의 지도원칙은 관용과 민주화를 실현해야만 공개적으로 특수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제재의 목적은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권의 변화를 촉구하여 중국을 민주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은 압력을 가하고 그 압력을 지속시켜야 할 시기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즈]에서 전재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아파트 동 대표 회의 서울 강남 H 아파트에서 임시 동 대표 회의가 열렸다. 그날 의제는 주차장 확보에 관한 문제였다. 갈수록 차량 대수가 늘어나 지하 주차장이 없는 H 아파트로서는 이제 주차 문제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오늘 편히 쉬어야 할 일요일날 우리가 굳이 모여 이렇게 회의를 갖게 된 것은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우리 아파트의 주차 문제에 대한 그 심각성 때문입니다." 101 동 대표이자 동 대표의 회장인 김씨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심각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떼었다. "차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도 아파트들이 충분한 주차 면적을 확보하지 않고 있어서 곳곳에서 주차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요즘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법적으로 지하 주차장을 확보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래도 괜찮지만, 우리처럼 오래된 아파트들은 갈수록 주차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우선 각 동 대표들의 의견을 먼저 들어 볼 생각으로 이렇게 임시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각자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장의 의제 설명이 있자 어느 자리에서건 먼저 나서기를 좋아하는 201 동 대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정말 적절한 시기에 이 회의가 소집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제 생각엔 104 동과 105 동 뒤편에 있는 자연 녹지를 주차장으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길 주차장으로 이용하면 차량 60 대는 너끈히 댈 수가 있습니다." 201 동 대표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104 동 대표가 벌컥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은 도로변과 인접해 있어서 밤에 차소리 때문에 안면 방해를 받고 있는 실정인데, 주차장까지 들어선다면 그 소음과 매연은 어떡합니까? 전 반대합니다. 자기들 편하자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104 동 대표는 104 동 주민들을 위해 결사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러자 201 동 대표가 입을 열었다. "정 그렇다면, 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있는 녹지를 전부 없애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차를 90 대는 더 주차할 수 있어요. 난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문제는 어떻게 하든 이 주차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우리가 도달해 있다는 것입니다." 201 동 대표의 그 발언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다가 주차 시설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오래 전부터 바라 왔던 터였으므로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임시 동 대표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은 즉각 시행되었다. 각동 주민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형식적으로나마 주민 의사를 수렴한 후 보름도 채 되지 않아서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있던 녹지를 없애 버렸다. 사철나무와 단풍나무와 백목련과 쥐똥나무가 다 뽑혀 나가고, 백목련과 넝쿨 장미가 피던 자리엔 사고 방지 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H 아파트는 다시 예전처럼 심한 주차 난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그 동안 아파트 주민들의 보유 차량 대수가 더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H 아파트에서는 다시 임시 동 대표 회의가 열렸다. 회장인 김씨가 주차장 확보 문제에 관한 안건을 내어놓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자 이번에도 201 동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주차장이 없다고 차를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이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도록 합시다. 물론 어린이를 두고 있는 집에서는 반대하시겠지만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201 동 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동 대표들은 당장 두 패로 나뉘어졌다. 한 패는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서라도 주차 난을 해결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한 패는 차량 대수를 줄였으면 줄였지 어린이 놀이터만은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요. 놀이터를 없애 버리면 도대체 그런 아이들은 어디에 가서 놀란 말입니까? 아이들이 없거나 다 큰애들만 있는 집에서는 그래도 괜찮겠지만, 한창 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선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한쪽이 이런 주장을 하면 다른 한쪽이 또 다른 주장을 했다. "요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러십니까? 요즘은 학교에 갔다 오자마자 과외를 한다. 텔레비전을 본다 해서 정작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은 몇 명되지 않아요. 우리가 그런 몇 명의 아이들은 위해서 그런 공간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서로의 의견은 팽팽했다. 어느 한쪽에서도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201 동 대표의 주장은 더욱 강력해졌다. "우리 집에도 아이들을 둘이나 키우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놀이터를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주차장 확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개인적인 이해 득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파트 전체 손익에 관련된 문제로, 잘못하다간 집 값마저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까 어느 분의 말씀처럼 아이들이 실제로 공부하느라고 노는 시간도 별로 없지만, 논다 하더라도 놀이터보다는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비디오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꼭 밖에서 놀고 싶으면 학교 운동장을 이용하면 됩니다. 꼭 아파트 단지 안에서 놀 필요가 없어요. 여기는 시골이 아니라 도시입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답게 자랄 수밖에 없어요." 회장은 골치가 아팠다. 어느 쪽도 편들 수가 없어서 표결에 부치는 수밖에 없었다. "저로서는 하는 수가 없군요. 회칙에 따라 다수결로 정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표결 결과는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자는 쪽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젊은 층보다 중년층이 더 많이 살아 어린이를 키우는 집이 많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H 아파트엔 곧 어린이 놀이터가 없어졌다. 미끄럼틀과 회전 그네가 있던 곳에는 대형 승용차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그후 몇 달이 지나 어느 일요일이었다. 210 동 대표 집의 아들이 아파트 앞 골목길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놓친 공을 주우려고 큰길 쪽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차를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201동 대표는 그제서야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자고 주장한 일이 크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글터 → 이글저글 아이작 파커 판사는 재직 중에 9,454명의 피고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155명의 남자, 다섯 명의 여자, 총 16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80년 7월 3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네 명의 남녀 죄수들을 돌로 쳐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두 여자는 매춘, 한 남자는 호모섹스, 또 한 남자는 강간죄로 판결을 받았는데, 판사가 먼저 죄수들을 돌로 내리치기 시작하자 집행관들도 함께 나서서 돌을 던졌다. 그리하여 15분 만에 그들은 모두 죽었다고 뉴욕 타임즈기 보도했다.사뭉엘 세월 판사는 1692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셀럽에서 열린 마녀 재판에서 19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그는 1697년, 5년 전의 그 재판에서 오판을 하였음을 인정하고 1730년 죽을때까지 금식하며 회개했다고 한다.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 중 네 명이었던 아브라함 링컨, 존 마샬, 다니엘 웹스터, 스티븐 A.더글러스는 사실 법률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존 키트는 영국의 유명한 학교 교장이었는데, 하루에 80명을 때릴 정도로 ‘회초리 선생’으로 이름나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만일 오늘날 이처럼 스승이 학생을 회초리로 때린다면 아마 해지기 전에 80명의 변호사가 찾아 오지 않을까?1853년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는 흑인이 다른 주에서 와 10일 이상 머물 경우 50달러의 벌금을 내도록 하는 법이 통과 되었다. 50달러를 내지 못하는 흑인은 꼼짝없이 노예로 팔려갈 수 밖에 없었다.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비극 시인인 아이스킬로스는 하늘을 날아가던 독수리가 떨어뜨린 큰 거북이에 머리를 맞아 즉사했다고 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