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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2 호
4339.11.06 (09.16)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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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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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시며 → 자유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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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하루 수차례 양치질을 하면서도 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지금 잠깐 거울을 보며 ‘메롱’을 해보자. 혹시 혀에 하얀 설태가 가득하진 않은지. 그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 혀는 우리 몸의 내장기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혀의 모양과 색깔 등 혀의 상태를 보고 건강을 진단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의 혀는 핑크색 또는 약간의 흰색이 섞인 핑크색이다. 혀의 색깔이 비정상적으로 붉거나 창백한 것은 이상상태를 나타낸다. 혀에 이같은 이상증세가 오래 지속된다면 각종 질환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혀는 소화기관의 거울
혀는 병이 생기면 색깔, 굳기, 통증 등 각종 신호를 보내 건강상태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알려줘 소화기관의 거울이라 불린다. 구강의 특성상 수많은 자극을 받고 있는 혀는 심장 다음으로 피가 많이 필요하고 소비되는 곳으로 우리 몸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손상을 받는 부위이다.
◇선홍색-건강, 갈색-위장병, 흑색-항생제 과다복용 등
혀가 선홍색을 띠며 촉촉한 느낌이 든다면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혀를 쑥 내밀어 보면 발그레한 표면에 하얗게 이끼가 낀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 ‘설태’라고 한다. 설태는 가장 흔한 혀의 증상으로, 혀의 윗면에 회백색의 이끼와 같은 이물질이 생기는 것이다. 설태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구강 기능을 위해 필요하다. 하얀색 설태가 얇게 고루 덮여 있으면 건강한 상태이다. 그런데 만약 설태가 짙은 회백색을 띠면서 층이 두꺼워지면 이것은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신호. 갈색 또는 암갈색의 이끼 같은 것이 달라붙으면 위장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다. 항생제를 과다 복용하면 검은 설태, 즉 흑태(黑苔)가 나타나는데, 가끔 감기가 낫지 않는다는 이유로 항생제를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흑태가 생길 수 있다. 또한 혀가 창백하면 빈혈, 청자색이면 선천성 심장기형을 의심할 수 있다. 혀에 통증이 지속되면 당뇨나 빈혈일 가능성이 있다. 을지대학병원 치과 김훈 교수는 “혀는 내장기관들의 기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장기관들의 기능 상태를 객관적으로 잘 반영한다”며 “혀를 보고 병을 진단할 때에는 혀의 색깔, 굳기와 혀 이끼, 혀 가시 등의 여러 가지 변화들을 두루 관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혀 병의 주원인은 술과 담배
담배와 술을 삼가는 것이 혀 건강에 가장 좋다. 바이러스와 함께 혀암의 3대 원인이기 때문. 특히 과음한 다음날 혀는 궤양이 생기거나 까끌까끌해지는 등 바로 반응을 한다. 담배를 많이 피우거나 과음한 다음날 혀에 자주 궤양이 생기지만 며칠 지나면 금방 낫는다. 3주 이상 궤양이 계속되고 6개월이 지나서도 치유가 되지 않는다면 설암을 의심할 수 있으므로 치과(구강악안면외과)를 찾아 검사받는 것이 좋다. 혀에 생기는 병은 대부분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지만 설암은 치료율이 낮으며, 혀 밑에 암이 생기면 조기 발견을 해도 5년 생존율이 60~70%에 불과하다. 설암은 다른 암에 비해 다른 조직으로 전이가 매우 빠른 게 특징. 설암은 혀의 가장자리에 주로 생기는데, 혀가 헐고 딱딱해지며 통증과 출혈이 있는 것이 주요 증상이다. 김교수는 “침이 혀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혀 건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적인 식사와 충분한 수분 섭취”라며 “아울러 평상시 양치질을 할 때 혓바닥과 함께 혀의 안쪽까지 구석구석 닦아 주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 글 주신분 : 호단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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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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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궂은 날씨는 창 안에서 볼 때 더 우울해 보인다./ 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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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도를 닦듯 굶으며
나의 삶은 조악하였다. 외상값을 갚기 위해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한 점을 던졌던 것을 계기로 내 인생은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다. 감히 말하거니와 인생은 빚으로 사는 것이 아닐지. 그때 상금으로 그 빚을 갚고 나는 지그재그로 면상을 두드려 맞으면서 몰리기 시작했었다. 마침내 내가 알아낸 사실은 내가 축몰이에 걸려 있다는 것. 지금까지 몰리기만 하던 축에서 손을 떼고 다른 곳에다 돌을 걸어 보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지금까지 몰리던 돌들을 충분히 이용해서 한 판 바둑을 끝내는 좋은 모양으로 거두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아직은 수가 모자라 안타깝기만 하다. 회상해 보자. 교육 대학을 중퇴하고 나는 전교생 17명의 어느 깊은 산중 화전민촌 분교에서 소사 노릇을 했었다. 이 선생님 의 꿈을 안고 교육대학에 입학했었던 놈이 결국은 이씨 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었다. 아, 그 겨울은 얼마나 외로왔던가. 나 이씨는 방학이 되자 소설가가 되는 연습을 시작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배고팠었다. 쌀이 생기면 밥을 한 솥 가득해 놓고 조금씩 먹었었다. 상할까봐 밖에다 내놓고 얼음밥을 만들곤 했었다. 서걱거리는 얼음밥을 먹으면 정신이 청명해져 왔었다. 가끔은 눈이 내리고 첩첩산중, 나는 여자가 그리웠었다. 그러나 누가 있을 것인가. 한밤중 눈 내리는 운동장에 서서 추억 같은 수음을 했었다. 하지만 뜯겨 나가고 단 한번도 묶이는 원고지는 없었다. 가끔은 산비탈로 눈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내 가슴도 우수수 헐리곤 했었다. 겨울 개구리. 얼음 언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고 개구리를 잡아먹기도 했었다. 솔직이 말해서 맛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혹했었다. 소설가란 참 더럽게 힘드는 것이로구나, 차라리 이씨 로 내 인생을 말뚝박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해보았었다. 갈수록 소설가들이 하느님 같아 보이기 시작했었다. 비공식적으로 했던 취직이었으므로 나는 소사의 자격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었다. 나는 다시 산을 내려와 도를 닦듯, 굶기 시작했었다. 지금도 나는 끝내주게 잘 굶는데, 아마도 그때 닦은 도의 덕분이리라. 그러나 그게 어디 닦고 싶어 닦은 도이랴. 인생이 조악하다 보니까 절로 그렇게 된 거지. 아, 다시 한번 회상해 보자.
안개 많은 춘천. 전문적인 거지 행각. 그리고 사기 행각. 소설가가 되겠다는 것을 빙자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속여먹어 왔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아 왔었던가. 특히 장미촌의 장미꽃들에게 나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그녀들은 내게 연탄불을 같이 쬘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포주 몰래 빈 방을 빌려주기도 했었다. 더러는 돈 많은 늙은이를 등쳐서 아침에 설렁탕 한 그릇을 포식할 수 있는 은혜도 베풀어 주었었다. 그러나 같이 자 주지는 않았었다. 나는 언제나 여자가 그리웠었다. 여자만 하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소설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았었다. 그래서 마치 여자를 환장한 놈처럼 밝히고 다녔었다. 그러나 만나기가 바쁘게 끝장나곤 했었다. 부모님의 결사 반대 때문이었다. 당연했다.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 머리카락은 베토벤보다 더 엉망진창이어서 항시 머릿니가 곰설곰설 기어 다녔고, 기어 다니다가 방바닥에 떨어지기도 했었고, 주책없게도 우리 딸과 다시는 만나지 말라 는 얘기를 하러 온 여자의 엄마 치마폭에까지 기어 오를 정도였었다. 게다가 어디 내 꼬라지가 머리카락만 엉망진창이었으랴. 아래위로 동서남북 훑어보아도 쓸만한 데라곤 전혀 없었다. 내가 그녀들의 엄마였어도 딸을 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좋은 후배놈들을 몇몇 만났었다. (문예중앙)에 오위류를 발표했던 양순석이라는 여자가 바람문학동인 으로 있었는데, 그때 나는 양순석이라는 여자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었지만 바람들 몇몇 과는 소설을 빙자한 사기를 거래하며 중앙 시장 바닥을 헤매었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라는 부사를 간판으로 내걸어 놓은 한 무리의 글패들이 있었는데 그 패들에게는 특히 엄청나게 신세를 많이 졌었다. (심상) 이란 시지에서 좋은 작품을 보여 주었던 신승근 형도 역시 그리고 였었다. 우리는 수시로 만나서 술을 마셨었고 술을 마시면 패배 당했다 는 절망감에 빠지곤 했었다. 그러나 그때가 한창 때였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까. 그때 나는 글솜씨가 조금 늘었다. 제법 많은 책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소설가가 될 자신은 없었다. 큰소리뿐 자신있어 큰소리치며 헤매기만 했을 뿐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실력은 엿먹어라 였다.
나는 다시 본격적으로 뼈를 깎아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래서 연탄도 해브 노 담요도 해브 노인 상태로 싸구려 골방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 들에게 원고지를 꾸어서 파지 만들기로 전전긍긍을 거듭했었다. 한겨울 부질없는 낮과 밤들이 파지를 벗겨 낼 때마다 한 겹씩 벗겨지곤 했었다. 자주 코피를 흘렸고 자주 변소에 가서 혼자 울었다. 소설가라는 말은 점점 위대해지는데 이외수라는 고유 명사는 점점 왜소해져 가고 있었다. 만사가 정말 빌어먹을이었다. 라면 한 개를 간신히 구하면 알맹이로 사흘을 아껴 먹고 스프는 술병에 풀어서 또 사흘을 아껴 먹었다. 매일 죽고 싶은 심정 하나뿐이었다. 그러다가...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다음해 겨울까지 비벼서 졸고를 하나 던졌더니 축 당선 이라는 통지가 왔었다. 나는 믿지 않았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믿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소설가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매일 부끄럽고 매일 울고 싶다. 내가 왜 이토록 기구한 바둑판에 뛰어들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두렵기만 하다. 모든 여자들에게 부탁컨대 소설 쓰는 남자들을 잘 좀 봐 주기를, 하여튼 누구보다도 외롭다는 사실을 알아 주기를, 더러는 술도 좀 사 주고 글도 좀 읽어 주기를. 그러나 소설가라는 것은, 제대로 소설가가 못된 나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 그것은 그대로 하늘이며 눈물이며 말씀이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소설가란 무엇인지 나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습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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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해삼물류>
41.가자미 - 가자미 눈은 오른쪽에 치우쳐
가자미목에 속하는 바다물고기를 통틀어서 가자미라 한다. 한자로는 비목어라고 하는데 눈이 빗나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자미는 두 개의 눈이 다 머리 한쪽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눈을 심하게 흘기는 사람을 보고 '가재미눈'이라고 불렀다. 가자미는 지방에 따라서 가재미, 까재미, 가지미, 납새미 등으로 불리는데 가자미류의 물고기들은 대부분 몸이 옆으로 납작하여 타원형에 가깝다. 또한 비늘은 잘고 짙은 갈색을 띠고 있으며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가 몸길이의 많은 부분에 걸쳐있고 몸의 다른 한 쪽은 흰빛을 띠고 있다. 가자미는 깊은 바닷속에서 사는데, 몸길이는 작은 것은 15cm 가량에서 큰 것은 3m 가까이 되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남부 근해를 비롯하여 일본의 근해에 분포하며 그 종류는 50여 종에 달한다. 이것들을 다시 넙치과, 가자미과, 납서대과, 참서대과 등으로 나누는데 참서대과와 납서대과는 몸이 좁고 긴 편이며, 넙치류는 왼쪽에 눈이 붙어있고 가자미과의 것들은 오른쪽에 눈이 있다. {자산어보}의 저자 정약전은 일찌기 가자미에 대한 상세한 관찰과 고증의 결과를 저서에 기록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이시진은 말하기를 비목어는 각각 눈이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나란히 합쳐져야 전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가자미류를 생산하고 있는데 크고 작은 여러가지 종류가 있으며 속칭도 각기 다르고 모두 각 개체가 독립해서 다닌다. 그리고 암수가 있으며 두 눈이 다 한쪽에 치우쳐 붙어 있다.' 이처럼 정약전은 중국 사람들이 상상해서 멋대로 풀이한 것을 구체적으로 반박하였다. 이밖에도 여러 옛 문헌에 가자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서는 대부분 가자미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기록을 반박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봉유설}에는 '비목어는 동해에서 나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접역이라 한다.'고 하며 {전어지}에 의하면 '가자미는 동해에서 많이 나며 서남해에도 있는데, 그것은 동해에서 나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예로부터 가자미는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많이 났으며 널리 식생활에 이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성분
종류에 따라 성분 특히 지질함량에 이가 많다. 육질부의 평균값을 나타내면 대체로, 수분 76.9∼78.8%, 단백질 19.0∼19.4%, 지질 0.6∼2.2%, 당질 0.3%, 회분 1.2∼1.6% 등등이다. 가자미류에는 엘라스틴(elastin) 및 콜라겐(collagen)의 두 성분으로 이루어진 결체조직인 근육섬유가 연결되어 있다. 콜라겐은 끓이면 젤라틴(gelatin)으로 되어 용출되므로 용액이 흐리게 된다. 가자미류와 같이 콜라겐이 많은 고기는 끓이면 부드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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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가자미는 활어로부터 냉동어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상태로 시판되고 있다. 종류에 따라 생선횟감, 건어물로 한다. 넙치류는 회맛이 좋고 참서대류는 건어맛이 좋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가자미는 허를 보하고 기력을 더하게 하며 많이 먹으면 조금 동기한다.'고 하였다. 또한 함경도 지방의 향토식품으로 가자미식해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이것은 동해안에서 나는 노랑가자미와 관북지역의 좁쌀을 이용한 일종의 저장식으로, 엿기름과 조밥의 녹말이 당화되어 특별한 맛이 생기게 하여 밥 반찬이나 술안주로 이용한다. 가자미식해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물좋은 노랑가자미를 내장과 머리를 떼어내고 이틀 정도 얼간을 하여 보자기에 싸서 큰 돌로 눌러놓은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을 친다. 그런 다음 메조밥을 되직하게 지어 마늘, 생강, 고춧가루, 엿기름가루를 섞어서 절인 가자미와 함께 항아리에 넣은 다음 꼭꼭 눌러서 삭힌다. 이렇게 일주일 정도 보관해 두면 익어서 물이 올라온다. 조밥이 다 삭으면 채를 썬 무를 소금에 약간 절여 물기를 짜고 함께 넣어둔 양념과 잘 섞어서 다시 꾹꾹 눌러 담아놓고 하루 내지 이틀 정도 지나면 먹을 수 있다.
이것이 토종
수입산 가자미는 대부분 냉동상태로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무게에 짓눌린 상태에서 얼어버리므로 몸의 형태가 구부러져 있거나 굴곡이 져있다. 또한 지느러미 부분은 노란색이며 등쪽은 짙은 갈색이고, 등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에 암색 반점이 있다. 이에 반하여 국내산은 대체로 싱싱한 선어로 유통되고 있어 체형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수입산에 비하여 약간 작으면서 길어 보인다. 그리고 암갈색 바탕에 흑갈색 반문과 유백색 반문이 산재해 있다. 또한 국내산이라도 넙치와 가자미는 모양이 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알아 두면 좋다. 넙치는 눈이 왼쪽에 붙었으며 입의 윗턱이 눈보다 뒷쪽까지 이어져 있다. 그리고 양식산은 배의 흰부분에 검은색의 띠나 큰 반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반하여 가자미는 눈이 오른쪽에 붙어 있는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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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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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장은 과연 고려시대 장례풍속이었나 - 이우석(건국대 박사과정)
전설의 진위
상장례를 전공하지 않더라도 고려시대 전공자라면 한번쯤 ‘고려장’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고려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당연히 고려의 풍습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내다버리던 악습’이다. 이렇듯 고려시대 장례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있는 고려장의 실체는 무엇일까? 다음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옛날에 늙은 노인을 산중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노인이 나이가 70세가 되자 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약간의 음식과 지고 왔던 지게를 놓아둔 채 되돌아오려고 했다. 그러자 그를 따라 왔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지고 왔다. 그는 아들에게 왜 지게를 가지고 오는가를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도 늙으면 이 지게로 버리려고요”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에 크게 뉘우치고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집에 모셔와 잘 봉양하였다. 이 이야기는 고려장에 관련된 여러 가지 설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 <효자전>의 원곡이야기와 비슷하다.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점에서 효의 윤리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인 듯하다. 또 다른 형태의 이야기도 전한다. 국법을 어기고 숨겨 봉양하던 늙은 부모의 지혜로 국가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자, 이를 계기로 고려장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경전인 <잡보장경> 기로국조의 설화와 유사한데, 이러한 이야기가 수용 확산되면서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기로의 풍습이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면서 고려장이 실재한 것처럼 믿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장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고려시대의 장례제도는 더욱 아니다. 고려장의 모습을 전하는 당대의 자료나 이를 해명하는 고고학적 성과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장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영화로,소설로, 때로는 불효가 판치는 각박한 세태를 비판하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고려시대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다.”고 하였고, 또 “부모나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징역 3년에 처한다.”고 법률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관리들도 화장을 했다는데
고려사회에서는 매장과 화장이 사제 처리 방식으로 널리 이용되었고, 가난한 사람 중에는 간혹 풍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장법은 국왕, 관리, 일반인 등 사회계층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편의상 관리의 경우부터 먼저 살펴보자. 고려시대의 묘지에 의하면, 이 시기 지배층은 화장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은 불교용어로 다비라고 하는데,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불교식으로 마무리함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유고식 사당이 없었으므로 사원이 상제례를 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사원에서 임종을 맞은 경우뿐만 아니라 집에서 임종을 맞은 경우도 빈소를 사원으로 하는 예가 많았다. 이 때 사원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거둬 사원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린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유골을 묻는데, 사망에서 유골의 매장까지 걸리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유골은 골호나 석관에 담아 묻었는데, 신라 통일기에는 골호를 주로 이용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석관을 널리 사용하였다. 석관은 대개 1미터 미만의 작은 판석 6매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불교식 의례는 사망일로부터 49일이 되면 사십구제를 올리고 100일이 되면 백일재를 올린다. 장례를 치룬 사원 근처에 묘소를 쓰기 때문에, 이 사원은 장례가 끝난 뒤에도 원당이 되어 해마다 기일재를 치르는 곳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재를 준비하기 위한 비용은 자녀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기금을 운용하여 생긴 이익으로 충당하였다. 딸도 아들과 동등하게 제사에 참여 상제례 비용은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부담하였는데, 이는 이들이 부모로부터 균등하게 상속을 받는 고려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당시에는 딸도 아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였으므로 딸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양자를 두어 후사를 세울 필요가 없었고, 자식이 없는 경우에도 사원에서 대신 제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자녀가 없어도 세계가 단절되었다는 두려움은 없었던 듯하다. 물론 이런한 사생관은 불교의 윤회사상이 고려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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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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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이슬람 신비주의
3) 수피와 종단
수피종단의 회원은 이슬람 전세계에서 적게는 1/3 많게는 1/2을 차지한다. 특히 수단에서는 70%를 육박하고 있다. 수피들은 알라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데 커다란 중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혀를 입안의 경구개에 대고 ‘A-lllll-aaaa-h'라고 발음한다. 이 단어를 발음하는 동안 마음 속에서 잡념들을 추방해야 한다. 디크르를 하는 동안 한 사람의 성인에 집중하는 것도 무방하다. 알라의 발음하는 속도는 다양해서 빠르게 할 수도 있고, 심장박동의 속도와 맞춰도 된다. 이것이 곧 알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방법이다. 이런 수행에는 분명히 신비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알라의 반복이 알라의 신적영광 속에 완전히 몰입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들이 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격렬하게, 그리고 일종의 황홀경으로 끌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시와 음악에 심취한 것은 8세기부터이다. 쿠란에 ‘가능하면 자주 알라를 기억하라.’라는 말이 있어 이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많이 반복했던 말은 이슬람 신앙고백의 첫째 항인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였다. 음악과 디크르가 동시에 쓰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율법을 무시한 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10세기 초에는 초심자를 위한 엄격한 규정들이 마련되었는데, 초창기에 스승과 학생이 자유롭게 토론하던 것은 차차 없어지고 학교라는 제도적인 틀 속에 행동과 사고가 엄격하게 감독을 받는 것으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이제 초심자들은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자기 스승 세이크(shaykh)에게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철저히 복종하게 되었다. 신비주의는 지배층이나 일반대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정통 이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제 수피 세이크들은 다른 권력자들처럼 찬양의 대상이 되었고, 귀족가문과 통혼하며 때로는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거나 관리하게 되었다. 13세기부터 세이크에 대한 숭배라고는 할 수 없어도 존경을 강조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그들이 신성한 지혜를 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또 그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떠맡기는 경향도 강했다. 10세기까지 수피들은 세이크 집이나 모스크에서 모여 정신적 훈련이나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 뒤에는 회합을 위한 별도의 장소를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이 곳을 주민이나 여행하는 동료의 거처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자선행위가 정통 이슬람에서 흔히 간과되었던 데 비하여 스피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같은 수도원은 세이크나 그의 가족의 소유가 많았으나 가끔 수피종단을 위해 부유층이 기탁한 것도 있고, 12세기 이후에는 군주나 그의 부인이 기증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원 유지비용은 자발적인 헌금이나 마을의 희사금으로 충당되기도 하고 세이크가 죽으면 수도원이나 그 근처에 묻었다. 또, 기존의 묘지 근처에 새로운 수도원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수피종단은 대체로 공동묘지를 소유하여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은 그 곳에 와 복을 빌기도 하고 권력자는 묘지를 보수하거나 헌납함으로써 명예를 얻으려고 했다. 수피종단과 연관된 수도원이나 묘지들은 이슬람 출현 이전부터 있던 성지나 사당을 대체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이슬람에 있어서 성인숭배는 죽은 사람이 신의 벗이기 때문에 그에게가서 간절히 빌면 그를 통해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수피들이 종단(Tawaif, 따이파의 복수)을 형성하기 시작한 때는 13세기 리파이 종단을 든다. 이 조직의 시작은 아흐마드 알 리파이의 숙부가 시작하고 리파이 자신과 그 조카에게 계승된 활동으로 소급되지만, 그의 후손들이 각 지부를 관할하면서 종단으로 발전하였다. 교육과정을 마친 수피는 후계자(카리파, Khalifah) 또는 대리인(나입,Naib)이라 불리게 되었고, 지부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새 회원을 확보하게 했다. 신참자는 규정에 있는 대로 일정 기간 은둔과 수행을 해야 하며, 창단자의 가족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종단이 가족적인 연대에 의해 결합된 것은 아니다. 본부에서 떨어져 나가 새로운 분파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것은 종단에서 가르치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적인 대립이 생겨 새로운 분파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1500년을 전후하여 아르다빌 종단의 본부가 시아파 혁명의 기치를 내걸자 지부와 제자들이 본부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분파로 독립해 버렸다. 또, 세이크의 후손들이 반드시 동일한 종단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여성을 위한 수도원이 있기도 하지만, 여성만으로 구성된 종단은 없었다. 남성들이 위주가 되어 있어서 여성들이 기성종단에 스승이나 제자의 자격으로 참여할 때는 커튼으로 격리되어 떨어져 앉았다. 수피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규정으로 묶여 있어 그 규정은 종단과 세이크에 따라 달랐다. 종단에서 정해진 규정에는 보통 신참자가 먹는 음식, 신을 생각할 때 취해야 할 몸가짐, 외어야 할 주문, 음악을 사용해서 행하는 의식의 조건들, 사용하는 악기, 춤 출 때 입는 옷, 타인의 초대에 응할 때의 조건, 수도원 출입시 지켜야 할 것,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 일상생활에서 의식주 해결하는 방법 등이 들어 있었다. 이런 규정은 종단마다 달랐다. 수피들의 주문은 수피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는데 주문에 사용되는 단어들의 차이에 따라 종단의 성격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음악과 무도는 하나의 의식으로 혼영일체가 되어 신을 찬양하고 내적인 지고의 경험에 도달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자신이 예언자임을 나타내는 징표로서 기적을 행했지만 수피들 가운데 성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기적의 능력을 비밀로 하다가 점차 공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 하면 수피의 생애는 수많은 기적의 일화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일부 수피는 자기 몸 속에 작용하는 신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몸을 칼로 찌르거나 불 구덩이에 들어가기도 하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마술적 행위가 몽고인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몽골 침입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 기독교가 예수님에게 신성을 부여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신으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노력했다. 무함마드 자신도 평범한 인간임을 강조했고 무슬림은 무함마드나 다른 어떠한 예언자에게 기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피즘이 시작된 이후 예언자 무함마드는 언제나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로 여겨졌고(심판의 날에 알라를 믿고 이슬람을 믿는다고 해야 천국에 간다고 함), 예언자의 사랑은 신의 사랑의 일부이며, 결국 그가 최후의 심판의 날에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그의 육체는 죽어 없어졌지만 영혼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성인의 특성이 예언자의 특성을 모태로 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성인의 특성을 하위개념으로 보았다. 성인의 숭배가 높아질수록 예언자의 지위는 그만큼 더 높아졌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결국 그는 우주적인 구도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예언자적 특성을 지닌 존재로 승화되었다. 쿠란에 의하면 알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무슬림 입장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에게 들어가는 문과 같은 존재였다. 쿠란 33:56 ‘알라와 천사들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축복했으니 믿는 자들아! 예언자에게 축복을 드리고 존경의 인사를 드려라.’에서 알라가 예언자에게 축복을 주었으니 ‘신께서 우리의 예언자를 축복해 주셨고 그에게 구원을 부탁했다’는 주문이 수피들 사이에 번지게 되었다. 오로지 알라와 무함마드에게 주의를 집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이 말이 반복되었다. 수피들은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알라와 합일을 이루고 꿈이나 사후에서뿐만 아니라 생전에 예언자를 목도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열망은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강렬하였다. 메니나는 무함마드의 시신이 묻힌 곳으로 말리키 학파의 본산으로 자랑하게 되었고, 예언자 숭배는 북아프리카 서부에서 예언자 후손인 알리파에 의해 더욱 장려되었다. 19세기 창립된 사누시 종단에서는 예언자와의 합일이 지고한 종교적 목표가 되었다. 무함마드의 생일은 1200년을 전후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발전하였고, 곧 이슬람 전역으로 확대되어 13세기에는 마그립까지 퍼지게 되었다.
시아의 열두 이맘파에서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에게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칼리파와 같은 지위에 추대하고 ‘이맘’이라 불렸다. 이들 이맘은 내면의 학문(계시와 인간의 내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겼고, 신의 친구 또는 성인으로 불렸다. 그들에게 예언자적 특성과 성인의 특성(이맘적 특성)은 각각 종일한 지도자의 외적 내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다. 전자는 계시의 선포를 의미하고, 후자는 계시의 뜻을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자는 서로 연속되어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면 성인은 알라로 향하는 길목의 문을 열어 주고 인간의 보호자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이맘에게 많은 영광을 돌리는 시아파 교리는 처음부터 시아파 수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순니파에서 무함마드에 대한 숭배가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시아파에게는 무함마드는 물론 이맘들에 대한 신비적인 숭배가 생겨났다. 그러한 신비주의의 목적은 수피들 자신이 알리와 다른 이맘 들에게 한 걸음 더 근접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으로 계시를 받으려는 데 있다. 라마단달에 어떤 사람은 알리로부터 지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시아파는 열두번째 이맘이 사실 죽은 게 아니라 지구상 어디엔가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가 약속된 정의의 시대를 열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것이 곧 수단의 마흐디 사상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수피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스승을 바꾸거나 여러 명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경우가 보편적이었지만 10세기부터는 한 학생이 교육의 전과정을 한 사람의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나서 단지 자신의 수련에 완벽을 기하고자 다른 스승을 찾았다. 털로 된 옷을 걸친 것도 처음에 세속적인 것에 벗어나 검약과 고행을 상징했지만, 뒤에는 수피즘을 추종하고 있다는 상징물로 그 의미가 바뀌고, 나중에는 그 사람이 특정한 세이크나 특정종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옷의 형태나 색깔이 종단에 따라 서로 다르게 되었고, 학생은 많은 경험과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많은 종류의 옷을 받았다. 16세기 어느 이집트인 수피는 26개의 상이한 종단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13세기 이후 수피즘은 정규 교리수업의 한 과정이 되어 누구에게나 공인받는 학자가 되려면 수피즘을 공부해야 했고, 이런 경향은 15세기가 되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국가에서는 수많은 수피유파를 감독하도록 종정을 두어 다른 세이크들을 감독하게 했다. 수피종단은 다원화하여 모로코의 아흐마드 알 티자니(1815년 사암)는 무함마드에 의해 임명된 ‘성인의 징표’라고 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다른 종단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라고 요구했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정의를 실현해 주기 위해 나타날 존재 즉 마히드를 자처하게 된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인도, 중앙아시아에서 이러한 미혹에 빠져 자신이 이슬람 교리에서 예견된 혁명을 수행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15세기에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의 무함마드 누르바크쉬, 1500년경 자운푸르 출신의 무함마드 역시 스스로 마흐디라고 주장했다. 19세기 동부 수단에서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선언하고 대이집트-영구전쟁을 감행했으나, 1898년 그의 후대 때 무너지고 말았다. 수피들은 식민주의자들을 행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투쟁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 오스만 터키 정복에 다르까와 종단과 티자니 종단이 항거했다. 프랑스 진출에 대해 알제리의 티자니 종단은 지지했으나 모로코와 튀니지의 티자니 종단은 격렬하게 항거했다. 리비아에서는 오스만 터키에 대해 반대한 것은 물론 프랑스에 대해서도 무장운동을 하였다. 1951년 이탈리아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얻은 뒤 국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알 사누시의 후손이었다. 이처럼 수피들은 세속 지배자에게 때로는 우호적이고, 때로는 적대적 이었다. 어떤 군주들은 수피나 성자들의 축복 없이 지배권을 행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피들이 지니는 세속적인 영향력을 경계해서 또는 진정한 신앙의 회복을 위한다는 명분에서 탄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최근 수세기 동안 이란의 시피아 무즈타이드(개인적으로 추론이나 독립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는 수피즘을 거세게 비판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와하비파와 터키의 개혁주의자들도 수피즘을 거세게 공격했다. 수피즘과 쿠르드족의 전통이 결합하여 기이한 종교적 잡종이 생겨나기도 했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산간지역의 야지드 종단은 이슬람에서 악마로 여기는 공작새를 천사로 숭배하기 때문에 악마 숭배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들 자신은 사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토속신앙이 수피적 관념과 결합된 예이다. 현재 15만 명의 추종자가 이라크 모술 근처에 산다. 보통 일반인, 종교인, 지배층으로 나뉘어 있고 풀에는 사단이 들어 있어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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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나의 재산목록 1호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물을 주고 받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이 생명도 부모님께 받은 귀중한 선물이고 남편을 만난 것도 크나큰 선물이다. 슬하의 예쁜 세 공주와 듬직한 왕자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삼년 전 내 생일날 남편과 네 자녀들이 만들어 준 공로증을 꼽을 것이다. 그날 저녁 가족들이 모두 모여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데, 아들 녀석이 자꾸만 머뭇거리는 게 좀 이상했다. 그런데 잠시 뒤 막내는 감추어 두었던 선물 꾸러미를 내 앞에 슬쩍 갖다 놓았다. 무엇인지 궁금하여 얼른 선물 포장지를 뜯어 보았다. 거기에는 공로증이 들어 있었다. 상장 용지를 어디서 구했는지 하여간 그 공로증에는 내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귀하는 우리 가정의 어머니요, 아내이며, 교회의 집사요, 서해화성의 모범사원으로서 그 소임을 잘하고 있습니다. 슬하에 일남 삼녀를 양육하는 노고가 많았기에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감사의 뜻을 담아 드립니다.' 나는 공로증을 받아 든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쁨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만 하염없이 흘려내렸다. 가격으로 치면 오백 원도 안 되는 선물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남편과 네 자녀의 사랑이 나를 울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 선물을 벽에 붙여 놓고 힘들 때마다 읽어 본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
김묘숙 님/충남 홍성군 홍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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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2 - 천재들의 시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년)
그때 세계에서는 138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창립 1392년: 이성계, 조선 건국
우리는 세계사에 있어서의 르네상스를 얘기했다. 그러나 발상지는 당시의 이탈리아였고, 그것도 피린체(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수많은 천재들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사태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뒤따라 일어났다. 영국.프랑스.독일 등에서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때 가장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중의 천재는 누구였다고 보아 좋을까? 아마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들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그의 유작으로 되어 있는 세계적인 명화들을 생각한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알아보면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그의 수많은 업적 중의 작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작가이자 평론가인 메레즈코프스키는 레오나르도를 가리켜 '미완성의 천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역시 가장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 역할을 한 천재였다.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자.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그린다. 그리다가 어깨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기위해 극육을 연구하는 모양인데, 극육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한 레오나르도는 해부학을 연구해 그 결과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새가 하늘을 날 때 어느 정도의 근육의 힘을 갖고 공기의 압력을 가하는지 알아본다. 그것이 밝혀지면 사람도 인공날개를 갖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상한다. 그래서 수학물리학적으로 그압력을 연구해 본다. 우리가 그를 최초의 비행기 제작의 시도자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비행 가능성을 연구하던 레오나르도는 얼마 전에 청탁을 받았던 난공불락의 성곽을 쌓는 구조와 방법을 회상해본다. 성을 구축하는 데 필요했던 물리적 운동의 계산이 필요했던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는 큰 돌을 작은 기계로 손쉽게 들어올리는 기술을 찾아본다. 가장 작은 힘으로 엄청 큰 물건을 옮기려면 아무래도 피스톤의 힘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 기계제작에 착수한다. 그리고는 기둥을 하나만 세우고 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인가를 계산해본다. 그 당시 사회가 모두 요청하고 있는 과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잠시 쉬는 시간에 당시 많이 읽히는 시집을 읽고는 일을 시작해본다. 이렇게 수많은 일을 거치다가 생각난 듯이 그때 그리던 그림을 마저 완성시켜야 할 텐데 하고 화폭으로 돌아와 그림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그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또 다른 일들에 착수하게 된다. 그래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림들은 완성품이지만 이탈리아에 있는 많은 그림들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 있다. 오래 레오나르도의 시간과 손질을 기다리다가 오늘까지 남게 된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그림의 하나가 밀라노에 있는 '최후의 만찬'이다. 완성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말할 바가 없다. 다른 작업들은 후대 사람들이 계승할 수 있어도 그림은 그 작가에 의해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레오나르도는 빈치라고 하는 한 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친이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오른손을 쓸 수 없어 손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왼손으로 했다. 글씨도 그렇다. 거꾸로 놓고 보아야 정상적이 되는 것이다. 한때 이탈리아에서 개최했던 레오나르도 박람회가 있었다. 거기에 보면 그림은 지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 가장 많은 부분은 과학과 기계 분야다. 그러면서도 시인이었고 음악가였다. 철학자 책을 읽으면 레오나르도는 혼자서 13가지 영역에 걸친 창작적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도 그러했듯이, 사랑.가정.결혼.재산 등은 전혀 소유한 바가 없었다. 오로지 일에서 일로 연결된 일생을 살았을 뿐이다. 지금도 이탈리아 인들은 로마의 비행장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공항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긍지와 함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러한 천재들이 늘 뒤를 다투어 쏟아져나왔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역사에 기여하는 위대한 문화적 혁신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부러울 뿐이다. 우리도 세종대왕 때 적지 않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나 그 뒤를 계승하지 못해 암울한 역사를 남겼다. 3.1운동을 계기로 또 한번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나 일제때문에 모든 것이 단절되어버렸다. 지금쯤은 또 한번 한국적 르네상스가 찾아올 듯도 한데 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계와 기술에 매달려 있으나 과학적 사고가 빈곤하며, 젊은 대학생들까지도 학문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운동에 빠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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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여기 멀국/말국 좀 주셔요"가 무슨 말인지 아셔요?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아침 밥상에 따끈한 국물이 있어야 제격입니다. 콩나물국에 새우젓을 푼 국물도 괜찮고, 김치에 돼지고기를 몇 점 넣은 국물도 시원합니다. 김장하고 남은 시래기를 총총 썰어 매운 고추를 몇 쪽 넣은 국물맛도 아침 밥상에 알맞습니다. 전날 저녁 술을 과음한 남편을 위하여 끓여주시는 시원한 북어국이나 오징어국도 그 국물이 참 맛있습니다. 고기가 귀한 시절에는 큰 가마솥에다 미역을 넣고 닭고기를 넣어 끓인 국이 있었는데, 고기는 어쩌다가 찾아볼 수 있었지만 그 국물맛만은 너무 맛있었습니다. 이런 국을 맛있게 먹다가, 국물이 떨어지면 우리 전북 지방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 여기 멀국좀 더 주세요." " 여그 말국좀 더 주세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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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무덤도 모르는 지상의 손님 -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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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갈 길이 바쁜 줄 알고 그렇게 서둘렀던 것일까? 다섯 살 때 곡을 쓰고, 여섯 살 때부터 유럽 등지로 여행을 다니며 각종 음악을 섭렵하더니 파리에서 크리스천 바흐를 만난 것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로마에 도착해서는 미제레제 를 듣기 위해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갔다. 이 아름다운 합창곡을 듣고 집에 돌아와 오선지에 옮겨놓았는데 조금도 오차가 없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신동으로 부상케 한 사건이다. 그는 바티칸 미술관도 구경하였다. 유독 라파엘로의 그림 앞에서 발길이 멎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신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본 적이 없어요. 그의 말에 안내를 해주던 알바니경은 너는 음악세계에서의 라파엘로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다른 사람들은 라파엘로의 작품에 의해 천상에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바로 천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만한 이 두 천재는 우연한 일이겠지만 지상에서 35년간을 머물다가 약속이나 한 듯 서른 다섯 살에 죽었다. 모차르트의 곡을 지휘하며 아름답게,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게 라고 강조하여 말한 사람은 부르노발터였다. 모차르트는 물질의 고통이 가장 혹심했던 때인 1788년에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세 개의 교향곡을 내놓았다. 그것도 불과 두 달 만이라고 하는데 Eb장조와 G장조, 그리고 쥬피터 라고 불리우는 C장조가 그것이다. 20여 년 전 어느 날 영화 엘비라 마디간 을 보고 나올 때였다. 나는 씁쓸한 느낌에 젖어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음악이 귀에서 떠나지 았았다. 트럼프에서 죽음 의 카드를 뽑아든 막다른 골목에 선 두 남녀, 그런데도 피크닉처럼 보이기만 하던 동반 자살의 장면, 아무렇지도 않게 쏙다지는 일상의 햇빛처럼, 그 자살의 장면 위에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의 둘째 악장이 능청스레 화면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통해 찬란한 햇빛을 보는 사람 이라고 슈베르트에게 말한 뫼리케의 찬사를 나는 그대로 모차르트에게도 바치고 싶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그들의 절망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일생이 불운하기만 했던 모차르트, 그 특유의 신랄한 풍자와 독설 속에 감추어둔 어쩌면 그 고통까지도 보는 듯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는 웃기만 좋아한 어린애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병상에 계신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죽음이란 우리가 아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 인류의 가장 좋은 그리고 가장 진실한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죽음이 참다운 행복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라는 것을 터득할 기회를 갖게 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밤마다 저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제가 살아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슬퍼보였다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죽기 바로 2년 전, 과중한 그의 정신 소모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발전, 악화되어 사람들이 거의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운명하기 몇 달 전, 그는 무질서한 생활속에 빠져 알 수 없는 어떤 실체와 뒹굴고 있었다. 충족될 수 없는 영원한 공허감이라고나 할까? 그는 사창가에서 파멸의 쾌락을 탐하고 있었다. 눈은 갈수록 튀어나오고, 마마자국이 있는 얼굴은 노랗게 부풀어 보였으며, 볼품없는 작은 키에 몸은 점점 비대해져 갔다. 죽기 몇 달 전, 그는 몇 푼의 돈 때문에 신원이 알 수 없는 어떤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혼곡을 쓰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요독증이 뇌를 침범한 뒤였다. 그는 신경쇠약과 환각증세 때문인지 작곡을 의뢰한 손님을 저승사자처럼 느꼈다고 한다. 죽음과 싸우듯 그는 하루에 14시간씩 진혼곡 에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고 손발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시간이 없다 고 서둘렀지만 그는 진혼곡 을 완성하지도 못한채 1791년 12월 5일 새벽, 숨을 거두고 만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몇몇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옛 성문이 있는 데서 되돌아가 버렸고, 관은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그날도 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무덤을 파고 관을 묻은 인부들은 묘표 세우는 일을 그만 소홀히 해버렸다. 누구 하나 나무로 만든 십자가조차 관심을 두고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모차르트의 무덤은 알 수가 없다고 전한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무덤도 없는 그는 이 지상에서 단지 손님에 불과했던 것일까?
나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의 선율을 듣게 될 때마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 의 절망과 아마데우스의 천진한 웃음이 절묘하게, 그리고 가슴 아프게 겹쳐오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로 둘은 다 같이 단명하였고 불운하였다. 음악적 재능이 부모에게 일찍 발견되어 부친으로부터 조기교육의 혜택을 받은 것까지 똑같다. 둘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다. 그리고 죽기 두 해 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두 사람 모두 불후의 걸작품을 쏟아내었다. 모차르트가 세 개의 교향곡을 내어놓을 때, 슈베르트는 교향곡 제9번 과 현악 5중주 를 내놓았다. 죽음의 병상에서 겨울 나그네 의 작곡에 매달리던 슈베르트는 과연 겨울 나그네가 되어 버렸고, 진혼곡 에 몰두했던 모차르트는 그 자신의 진혼곡을 쓰고 있었던 셈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항시 있는 것이지만 이토록 아쉬운 것은 그들의 천재성과 아름다운 음악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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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아크로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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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테네 민주주의의 명암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이 그리스 어인 데모크라티아(인민의 지배)에서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가 가장 먼저 성립하고 발전한 것도 그리스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정착한 것은 아니어서 기원전 8세기 도시 국가인 폴리스(polis)가 성립했을 때는 귀족이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기원전 5세기까지 폴리스의 역사는 귀족에 맞서 평민이 정치적 권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한 역사였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5세기 후반) 직전에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 제도가 마련되고 전쟁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지도자의 이름을 따 페리클레스 시대(기원전 457-459)라고 한다.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명문귀족 출신의 펠리클레스를 지도자로 내세워 보수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것이다. 시민권을 가진 성년 남자 전원이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민회는 행정, 입법의 최고 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재판권도 추첨에 의해 재판관을 선출하는 시민 법정이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과 동맹시로부터의 공납금으로 공직자들에게 보수를 지급할 수 있었는데, 이런 수당제의 실시는 가난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에 수당이 지급되지 않을 때는 직접 일하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한 부유한 시민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민주 정치의 기본 원리는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관리의 임기를 1년으로 정하고 중임을 금지했으며 관리의 선출 방식도 추점제였다. 당시 아테네 인들은 추점제가 선거보다 공평하고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리스 인들이 제비 뽑기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예외도 있었다. 국방의 책임을 지는 장군들은 추첨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과 능력에 의해 10명이 뽑혔으며 또한 중임도 인정했다. 그런데 점차 이들의 권한이 확대되어 모든 내외 정책이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으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한다는 이상을 실현한 것 같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주주의도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에는 성년 남자만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여자나 재류 외국인,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시민권을 얻는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여 부모 모두가 아테네 인인 경우로 제한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의 시민수는 약 3만 명, 그리고 여기에 가족수를 합하면 약 12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약 1만 명, 노예는 시기에 따라 4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일 때도 있었다. 이렇게 아테네 전 인구 중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적었다는 것이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의 한계였지만 또한 이 한계가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원천이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했다. 일단 생산적인 일에서 벗어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단순히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민회에서 훌륭한 연설을 하여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운영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시민은 이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이러한 여유는 노예의 존재에서 나왔다. 당시 아테네 시민은 한 사람당 평균 두세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노동은 노예에게 맡기고 시민은 정치, 학문, 체육에 전념했다. 이것이 시민의 이상이었다. 경우에 따라 노예와 함께 일하기도 했지만 육체적인 노동은 항상 노예의 몫이었다. 시민은 이렇게 여유 있는 신분으로서 민주주의를 향유했던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데모크라티아, 즉 인민의 지배)를 달성하려 했고 어느 정도 그것을 향유했다. 하지만 그들이 향유한 민주주의는 여성, 외국인 특히 노예를 배제한 제한된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에서 배제한 노예의 노동에 의해 민주 정치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이기는 했지만 여타 신분을 배제한 시민만의 민주주의였다.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이상은 평등을 이념으로 한 시민 혁명 이후에나 본질적으로 제기될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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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식 돈벌이 - 후지다 덴
제 1부 - 현금을 손에 쥔 나의 방법
남이 돈 잘 번다고 질투하지 말라
맥도날드 햄버거가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나에 대한 비난도 당연히 더해 갔다. 어느 시대에나 남의 성공에 질투를 하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질투를 품는 사람들은 남보다 배 이상 돈벌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시샘하는 사람일수록 돈벌이에는 재주가 없다. 이러쿵저러쿵 남에 대한 말이 많은 마음씨 나쁜 할아버지가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미덕은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점에 있다. 그런데 후지다상은 선 채 로 식사를 하게 하고 있다. 후지다상이 하고 있는 짓은 우리 미덕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이런 소리도 들려오게 되었다. 나는 이 말도 안되는 중상모략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하였다. 이런 중상모략에 귀를 기울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상모략으로 문화의 흐름이 바뀌어지지는 않는다. 그 좋은 예가 명치유신 직후의 단발이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모두 머리에 쫀마게를 틀고 다녔다. 현재는 쫀마게는커녕 장발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에 비하면 단발이다. 그러나 백 년 전에 단발로 거닐던 사람은 쫀마게족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으며, '저따위 머리꼴을 하다니!' 라는 경멸과 중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그런 경우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입식 식사는 예의가 아니라고 경멸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보통 식사 스타일로 바뀌어 가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원시 시대의 인간들은 선 채로 포도와 같은 열매를 손으로 따 먹고 살았다.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운 식사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식사의 스타일에 관해서 말하자면 다시 원시 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문화'라고 말하게 될 날이 분명히 찾아오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비밀로 하면 헛소문이 퍼진다
이미 알고 있는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맥도날드에 쏟아진 가장 악질적이고도 집요한 증상은 맥도날드 햄버거의 고기는 쇠고기가 아닌 어느 작은 동물의 고기라는 것이었다. 농담이 아니다. 다른 햄버거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맥도날드 햄버거만큼은 100퍼센트 쇠고기를 사용하고 있다. 쇠고기 이외의 고기는 1그램도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생각해 보면 아시겠지만, 맥도날드는 하루에도 수만개의 햄버거를 팔고 있다. 소문처럼 쇠고기 이외의 작은 짐승의 고기를 사용하고 있다면 얼마 안가서 온 나라 안의 그 작은 동물이 없어지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수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계장처럼 햄버거용의 작은 동물 양식장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공급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또 한 개나 두 개를 만든다면 모르지만 그런 짓을 하면 결코 돈을 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다 알 수 있는 헛소문이 진실인 것처럼 퍼져 나가고 또 그 헛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심할 정도로 민도가 낮다. 비문명국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도리가 없겠다. 민도가 높으면 이런 엉터리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첫째로 그런 중상적인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조차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의 민도가 낮은 헛점을 이용한 모략이다. 사실 전에도 맥도날드의 오기꼬보점이 토오쿄오의 스기나미구에 개점하였을 때 아침 일찍 세 대의 차를 타고 덩치가 큰 정체 모를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가게 주변의 주민들에게 맥도날드의 고기는 쇠고기가 아니라 작은 동물의 고기라고 모략 선전을 퍼뜨리며 돌아다녔던 사실이 있다. 쇠고기 100퍼센트라고 선전하면 할수록 이런 풍문이 떠도는데, 생각해 보면 맥도날드는 햄버거 상술의 모든 기술정보를 일체 비밀로 해 오고 있다. 맥도날드에는 2만 5천 개에 달하는 기술정보가 있는데, 기업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개되지 않고 있다. 물론 고기의 조리법도 비밀이다. 맥도날드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는 모든 기업의 비밀은 당연한 것인데, 예를 들면 코카콜라만 하더라도 원액의 제조법은 극비로 되어 있어 아직까지 그것을 밝혀낸 사람이 없다.
그런데 스스로 창출해 내지를 않고 남의 흉내를 잘 내기로 유명한 일본인은 그런 것이 비밀로 되어 있으면 아주 애를 먹는다. 흉내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로 하면 곧 수상쩍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서둘러 기업의 비밀을 공개시키고자 애쓴다. 모처럼 기업이 큰 돈을 투자하여 개발한 것을 공개하라고 다그치는 쪽이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며, 기업 비밀을 공개하지 않으면 수상쩍다고까지 말한다면 비열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다. 그러나 나는 큰 결심을 하고 맥도날드의 비밀을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전에는 외부 인사에게는 주방 사진을 찍는 것은 물론이요, 견학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국민학생 견학자들에게 먼저 공개하기로 했던 것이다. 비열한 중상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는 적의 수법에 속는 것 같지만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계속 비밀을 고집하고 있으면 또 무슨 말을 들을지도 모르고 도리어 마이너스를 초래하기가 쉽다. 이들 비밀을 공개하는 것은 점보 제트기의 구조를 공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손바닥을 다 펴 보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니까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비밀을 공개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그런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감히 돈 버는 비밀을 공개하려고 하는 것이다.
유사제품을 환영하라
맥도날드 햄버거는 2만 5천 가지의 매뉴얼을 조립한 기술 정보를 지닌 정교한 정밀기계와도 같은 제품이다. 점보 제트기가 수만 개의 부품으로 조립된 문명의 이기라면 맥도날드의 햄버거는 문화 그 자체이다. 그 햄버거에 작은 동물의 고기가 들어 있다는 등의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의 정신 구조는 마치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처음 본 미개인이 '저건 악마가 날아가고 있는거야' 라고 외치는 것과 꼭 같다고 하겠으며, 이 헛소문을 믿는 사람은 비행기를 악마라고 믿고 땅바닥에 엎드리는 야만인과 같은 정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돈이란 것은 본 적도 없는 미개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돈을 벌어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과는 평생 인연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부 미개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기업의 비밀을 고집하는 것을 포기했던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그렇지 않아도 많은 햄버거의 유사품이 급증할 것이 예상된다. 나는 유사품을 대환영한다. 왜냐하면 여성에 비유한다면 미인이 '정말 미인이야'라고 확인하는 데는 서로를 비교해 보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먹어 보고 '맛이 없는데' 라는 유사품이 있어야 비로소 맥도날드 햄버거의 참맛이 더욱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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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사랑과 우정
경애는 당장 남편의 수술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가진 돈이라고는 한푼 없었다. 그나마 조금 있는 돈마저 아들 대학 입학금으로 낸 지가 바로 어제였다. 경애는 어디 마땅히 돈을 빌릴 데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장 친한 친구인 은숙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독신인데다 약국을 경영하는 은숙에게 다소 여유 돈이 있을 것 같았다. 경애는 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한 사이일수록 돈을 빌리는 일을 삼가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은숙아, 영우 아빠가 쓰러지셨어. 심장에 이상이 있대.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정작 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경애가 머뭇거리자 은숙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어느 병원이야? 나 지금 곧 갈께." 은숙은 급히 수술비를 마련해 가지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경애는 그런 은숙이 고마웠다. 그러나 경애의 정성과는 아랑곳없이 경애의 남편은 죽었다. 장례를 다 치른 뒤 경애는 은숙을 찾아갔다. "은숙아, 고맙다. 네가 돈까지 빌려줬는데, 그만 그런 보람도 없이 그인 가고 말았어. 빌린 돈은 내가 꼭 갚을께." "갚지 않아도 돼. 난 네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한 것만 해도 고마워. 경애야, 실은 나도 영우 아빠를 사랑했어. 이제 영우 아빠가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 사이에 굳이 숨길 일도 아닌 것 같아. 네가 여고생 때부터 영우 아빠를 사랑하는걸 보고 난 그만 단념하고 말았어." 경애는 놀라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말했다간 너랑 나랑 싸움 나게?"
경애는 활짝 웃는 은숙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은숙이 지금껏 왜 독신을 고집하고 살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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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숫자는 아라비아가 아니라 인도에서 만들어졌다.
인디안 잉크는 인도가 아니라 중국과 이집트에서 유래된 것이다.
페인트 칠하는 낙타털붓은 이 붓을 만든 camel의 이름을 딴 것일뿐, 낙타 털은 전혀 섞이지 않았다.
흑연 연필의 재료는 흑연이 아니라 석묵이고, 쇼트브레드(short bread)는 빵이 아니라 두꺼운 과자(thick cookie)이다.
개똥벌레는 파리가 아니라 딱정벌레이며, 누에는 벌레가 아니라 애벌레(caterpilla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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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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