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46 호
4339.10.31 (09.10) : Music Off = Esc
|
|
편지 |
- 風磬
|
|
오가시며 → 자유글판 |
호단 님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과거의 연극은 인생이 송두리째 비쳐진 거울이지만, 오늘의 연극은 인생을 들여다보는 열 쇠구멍./ A.H.G.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37. I want this suit dry-cleaned.
가정에서 washing machine(세탁기)과 dryer(옷 말리는 기계)가 있어서 물빨래는 집에서 기계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탁기로 빨면 상하기 쉬운 것, 이를테면 순모나 실크 제품 등은 dry-clean을 해야 한다. dry-cleaning은 물론 가정에서는 할 수 없고 cleaner(세탁소)에 가지고 가야 한다. 양복 한 벌을 세탁소에 가지고 간 경우의 대화를 엮어 보자.
Cleaner: Good morning. May I help you? Customer: I want this suit dry-cleaned. Cleaner: All right. Customer: I tried to get this stain out, but it didn't come out. Do you think you can do it? Cleaner: Let me see... it looks like a grease stain. I think we can get it out. Customer: Good. when can I pick it up? Cleaner: The day after tomorrow. Customer: Can't I pick it up tomorrow? I need it for a formal party tomorrow night. Cleaner: We will try, but I can't promise. Why don't you give us a ring tomorrow afternoon? Customer: I will. How much will it be? Cleaner: That will be $7.00 plus tax. Here's your claim check. Customer: Thank you. 세탁소 주인: 안녕하세요? 뭘 도와 드릴까요? 손님: 이 양복을 드라이클리닝 해주세요. 주인: 알겠습니다. 손님: 이때를 빼려고 했지만 빠지지 않더군요. 여기선 뺄 수 있을까요? 주인: 어디 봅시다. 기름이 묻은 것 같군요. 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님: 다행이군요. 언제 찾으러 올까요? 주인: 내일 모래 오세요. 손님: 내일 찾으러 오면 안 될까요? 내일 밤 정장을 입고 가는 파티에 이 옷이 필요해서 그래요. 주인: 해보겠습니다만 (내일 꼭 된다고) 약속은 못 드리겠군요. 내일 오후에 전화를 해보세요. 손님: 그러죠, 얼마죠? 주인: 7달러에 세금을 더해 내시면 됩니다. 여기 클레임 체크(옷 찾을 때 필요한 쪽지) 받으세요. 손님: 감사 합니다.
아파트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공동으로 설치되어 있는 coin-operated washing machine(동전을 넣어 사용하는 사업용 세탁기)을 사용하거나 외부의 coin-op laundry(동정을 넣고 세탁기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세탁소)에 가서 세탁을 한다. 세탁기를 사용할 때 주의할 것은 옷의 종류에 따라 온도의 세탁 시간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옷은 대체로 regular fabrics(면직물 등 일반적인 것), permanent press(빨아서 다리지 않고 그냥 입을 수 있는 옷), 그리고 delicate fabrics(세탁하면 상하기 쉬운 옷) 등으로 나눈다. coin-op laundry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 보자.
A: Do you think this will shrink if washed? B: No, it won't shink but the color may run if washed. A: Really? In that case. I'd better dry-clean it. B: I think so. This kind dry-cleans beautifully. A: 이것은 빨면 줄어들까요? B: 아니, 줄어들지는 않지만, 빨면 물이 빠질지도 모르죠. A: 그래요? 그렇다면 드라이클리닝을 해야겠군요. B: 그게 좋겠어요. 저런 종류의 옷은 드라이클리닝이 아주 잘돼요.
A: Hold it! Don't put them in together. The dyes will bleed into one another. B: Oh, yeah? I didn't know that. Thank you for the tip. A: You're welcome. A: 잠깐만! 그것들을 한데 집어넣지 마세요. 서로 물이 들어요. B: 아, 그래요? 그걸 몰랐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A: 천만에요.
|
|
|
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과실류>
35. 사과(능금:임금) - 마술의 과일
사과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따 먹은 금단의 열매로 유명하다. 또한 물리학자 뉴톤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처럼 에덴에서부터 뉴튼까지 함께 했을 정도로 인간과 친한 과일이 바로 사과이다. 사과의 재배역사는 아득히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부유럽지방에 있었던 호서시대(호서시대)의 유물 중에도 사과의 흔적이 출토되었다. 사과나무의 원생종은 유럽, 아시아 및 북아메리카 내륙에 대략 25종 내외가 자생하는데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유럽과 서부 아시아에 분포된 원생종 중에서 개량된 것이다. 사과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재배되었고 로마사람들에 의하여 유럽 각국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품종의 개량은 주로 유럽의 중부 이북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17세기에는 미국에 전파되어 오늘과 같이 대량 재배되기에 이르렀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사과를 '마술의 과일'이라고 불러 왔다. 또 독일에서는 '밤에 먹는 사과 한 개는 의사를 멀리 하게 한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만큼 사과는 여러모로 우리 몸에 이로운 과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1884년부터 외국 선교사를 통하여 각 지방에 몇 그루씩의 사과나무가 들어와 재식했으나 성공한 예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 관상용으로 심다가 그후 1901년에 윤병수라는 사람이 미국 선교사를 통하여 다량의 사과묘목을 들여와 원산 부근에 심은 것이 경제적 재배의 시초이다.
성분
사과에는 사과산, 구연산, 탄닌산, 비타민 A,B,C 등 유효성분이 풍부하게들어있다. 특히 사과100g 중에는 110mg의 칼륨이 들어있다. 이 칼륨은 고혈압 발생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즉, 고혈압은 식염에 의해서 많이 유발되는데 칼륨을 다량 섭취하게 되면 식염의 피해를 최소화 한다는 것이다. '하루 1개의 사과를 먹으면 의사가 할 일이 없어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사과는 인체에 유효한 여러가지 성분을 지녔다. 이러한 유효성분들은 피부의 윤기와 탄력을 지키는데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피로의 원인이 되는 젖산의 분해를 촉진시켜 피로를 해소한다. 수년 전 일본의 한 과학자는 '사과가 치아의 오염을 없앨 수 있다'는 학설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를테면 양치질을 하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치구를 제거하는 것인데 사과의 섬유질이 세균의 온상인 치구를 제거하는데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치구는 일명 '프라그'라는 것으로 충치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사과에는 다량의 식이섬유가 들어 있다. 예컨데 수용성 식이섬유인 펙틴, 불용성(불용성)섬유인 셀룰로오스, 헤미셀룰로오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 수용성의 펙틴은 콜레스테롤치를 내리는 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불용성의 셀룰로오스나 헤미셀룰로오스는 변비를 해소하고 대장암을 해소한다.이러한 식이섬유는 사과 뿐만 아니라 콩류, 야채류 등에도 풍부하게 들어있지만 그 산뜻한 맛을 즐기면서 섭취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사과가 으뜸이다. 이밖에도 사과는 식생활에서 빚어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작용을 한다.동물성 단백질을 과다섭취함으로써 발생되는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데 사과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
쓰임새
사과는 여타의 과일처럼 주로 생식한다. 조리법이 많이 개발되지 않아서 고작해야 쥬스로 만들어 먹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사과는 날것 그대로 먹어도 특유의 맛과 향이 있기 때문에 굳이 달리 제조하여 먹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날것으로 먹을 때 풍부한 영양소도 가장 많이 섭취할 수 있다. 사과는 청량감과 산뜻한 맛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고, 식욕을 증진시키며, 설사, 변비, 소화불량, 고혈압 등에 좋은 과일로 알려져 있다. 병문안을 갈 때 사과를 사들고 가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또 사과를 많이 먹으면 혈색이 좋아지는 등 미용식으로도 아주 적합하다. 사과가 많이 나는 지방의 여성이 아름답다는 말도 있다. 특히 사과는 변비증에는 쾌변을 촉진시키는 반면 설사일 경우에는 이를 멈추게 하는 이중작용을 하기 때문에, 아주 이상적인 정장제라고 할 수 있다. *변비에는 매일 밤 잠자기 전에 사과를 1개씩 먹으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사과를 건조시켜서 가루로 만들어 약처럼 먹으면 쾌변이 촉진되는데, 이것은 서양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설사나 소화불량에는 껍질을 제거한 사과를 갈아서 1회에 100g 내지 300g 가량을 하루에 5회 정도로 나누어 먹으면 좋다. 사과를 갈아 물에 희석해서 먹고 배를 따뜻하게 하는 방법도 괜찮다. *어린 쑥의 연한 잎을 뜨거운 물로 살짝 데친 후 하룻밤쯤 물에 담가 두었다가 즙을 내어, 여기에 사과 1개와 귤 1개로 만든 쥬스를 섞어 매일 아침 마시면 뇌출혈 예방에 도움이 된다. 또 하이킹이나 등산을 할 때 사과를 자주 먹으면 갈증도 해소되고, 사과만으로도 능히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두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나 회복기의 환자에게는 사과즙이 효과적이다.
{버몬트의 민간요법}에 보면, '밤에 땀이 날 때, 자기 전에 사과초를 몸에 바르면 땀을 막을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식료본초}에는 '사과는 중초의 모든 허약한 것을 보하고 비(비)를 화(화)하게 만든다. 음식을 급히 먹고 체했을 때는 사과즙을 먹으면 좋다'는 구절이 실려있다.
이것이 토종
외래종 사과가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나라에는 능금(임금)이라는 재래종 사과를 재배해 왔다. 지금은 외래종 사과에 밀려 거의 재배되지 않아서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금도 두메산골 어디쯤엔가 몇 그루 남아서 끈질기게 종자를 보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장에서 사과를 구할 때 소비자들은 보통 색이 깨끗하고 겉모양은 반들반들한 것을 고르는데 이런 사과는 일반적으로 봉지를 씌워 익힌 것으로 영양과 맛은 신통치 않다.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익혀 당분과 비타민 함량이 높은 사과는 보통 외피가 거칠다. 특히 조생종인 연두색 사과는 전체적으로 연두빛이 고루 나는 것이 잘 익은 것으로 특유의 새콤 달콤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연홍색의 쓰가류 종류는 전반적으로 노르스름한 바탕에 엷은 홍색의 줄무늬가 있는 것을 골라야 한다. 붉은 빛이 짙은 사과는 너무 익었거나 착색제(에스렐제)를 사용한 것이라 푸석푸석하고 맛이 없다. 후지 사과는 밑부분에 붉은 빛이 도는 것이 맛이 있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무당의 입김이 천하를 호령하다 - 정학수(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
최근에 대형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미리 예언했다하여 항간에 유명해진 점쟁이들이 있다. 무슨 보살이니 도사니 하는 이들은 대기업에 초빙되어 신입사원을 뽑을 때에 면접관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자문을 해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도 곤경에 처하거나 결정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도 운수를 점쳐 보고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에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체계적인 교리와 의식 그리고 조직을 갖춘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속으로 대표되는 민간신앙이 아직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은 생명력을 유지할 만한 그만한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이러한 무속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귀신을 숭배한 사람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은 병이 나서 아파도 약을 먹지 않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저주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본래 귀신을 섬겨 주문과 방술을 알 따름이다. 백성들이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개경 북쪽에 있는 숭산신사에 가서 옷과 말을 바치고 기도한다”고 하여, 고려 사람들이 귀신을 무척 숭배한다고 기록하였다. 불과 두어 달 머물다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오만하고 과장 섞인 내용이기는 해도, 고려시대 민간에 성행한 무풍의 정도를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무풍에 관한 기록은 이미 태조 때부터 나타나고 있다. 918년(태조1)에 담당 관리가 “전대의 임금도 해마다 한겨울에 팔관재를 크게 베풀어 복을 빌었으니 그 제도를 따르자”고 건의하자 태조는 이를 받아들여 그 해 11월에 팔관회를 열었다. 팔관회는 원래 출가하지 않은 일반 신도들이 이날 하루 동안만은 여덟가지 계율을 지키면서 승려처럼 경건하게 살아보고자 만든 불교의 법회였다. 그런데 이 때에 벌어진 모습을 보면 이 행사가 순수한 불교 행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대궐 안 넓은 광장에 갖가지 등불을 설치하여 밤이 새도록 땅에 가득히 광명을 비추었다. 또 두 곳에 각각 높이가 15미터나 되는 연꽃 형상의 채색 무대를 높게 설치하고 그 위에서 온갖 유희를 벌였다. 사선악부라는 악단이 나와 흥을 돋구었으며, 용. 봉황. 코끼리. 말. 수레. 배의 가장 행렬이 벌어졌다. 모든 관원이 정복 차림으로 예를 행하였으며, 밤낮으로 즐기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개경을 뒤덮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경건한 불교 법회라기보다는 음주가무가 벌어지는 신명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이 때 태조는 위봉루에 올라 이를 관람하고,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였다. 그가 남긴 훈요10조에는 팔관회에서 즐겁게 하는 귀신의 종류가 구체적으로 거명되어 있다. 하늘, 큰 산, 큰 강, 그리고 바다의 용이 바로 그것들이다. 더욱이 국가에서는 이 신령들에게 대왕이나 장군이니 하는 작호를 내려 주었으니, 그 신들의 이름은 오늘날 무당들이 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개인적인 신앙 형태는 어떠했을까.
무인집권기의 권력자인 이의민은 본래 글을 모르며 무당을 믿었다고 한다. 고향인 경주에 나무로 깎아 만든 귀신상이 있었는데 그 곳 사람들은 이를 두두을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집안에 당을 짓고 그 귀신을 맞아다가 날마다 제사하면서 복을 빌었다. 그것이 신통했는지 그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여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당에서 이상한 곡성이 들려왔다. 그가 괴상히 여기고 물으니,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는데 이제 하늘이 화를 내리려 하니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서 울고 있다”라고 하였다. 과연 얼마 안 있어 그는 최충헌 형제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였다. 이처럼 지배층 가운데서도 집안에 신당을 마련하여 귀신을 섬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개인적인 신당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은 안녕을 위하여 귀신에게 의뢰할 일이 생기면 명산 대천에 있는 신당에 찾아가 빌거나 무당에게 굿을 청하였다. 이규보의 글을 보면, 이 때에 벌어진 굿판의 모습은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규보가 개경에 살 때 이웃에 무당집이 있었는데, 날마다 많은 남녀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북, 장구 등의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무당은 주름진 얼굴, 반백의 머리에 대략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들보에 닿을 듯이 동동 뛰는 중간중간에 새소리 같은 목소리로 늦을락 빠를락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예언이 신통하게 잘 맞는다 하여 신도들은 손비빔하며 곡식과 옷감 등을 바쳤다고 한다. 타고 있는 두 자루의 촛불에 떡이며 고기, 과일로 질편하게 차린 굿상 뒤 신당의 벽에는 무신도가 액자처럼 모셔져 있고, 신이 내려오는 길목인 신간과 굿상 곁에는 굿을 차린 사람이 바친 재물이 수북이 쌓여 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사회는 위로는 국가.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지배층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생사화복에 관한 것을 귀신에게 상당히 의존하였다.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까다르
모든 무슬림은 알라의 절대적인 명령,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명령을 믿어야 한다. 알라가 영원부터 정해 놓았으며, 악과 선, 믿음과 불신은 물론 모든 것을 여원부터 명하였다고 무슬림은 믿는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과 앞으로 일어날 것도 전적으로 알라의 예지와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다. 쿠란은 이 주제에 대하여 여러 구절에서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우리가 신이 정해 놓은 명령에 따라 창조했다. ” 이 절대적인 명령, 즉 정해진 명령이 까다르이고, 타끄디르는 모든 피조물 속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을 말한다. 아랍어 까다르는 원래 ‘역량, 용량’의 뜻이지만 ‘한계, 한도, 제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곧 운명‘으로 귀착되는 낱말이다. 그리고 보면 이슬람에서 신의 의지와 운명은 하나로서 같은 것이다. 알라의 뜻과 섭리에 의하지 않고서는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질 수도 없고, 벌레가 땅위로 기어갈 수도 없다. 알라는 이 세상의 인간에 대한 행운과 불운을 영원부터 정해 두었다. 게다가 행운과 불운은 물론 인간에게 신앙이 있는 것, 신앙심이 없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내세에서 그의 행복이나 불행도 영원부터 결정해 두었다. 이처럼 이슬람에서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은 알라만이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인간은 40일 동안 그의 어머니 자궁 안에 붙어 있다가 곧이어 40일간 피가 응고된 후에 또 그 후 40일 동안 약간의 살이 붙는다. 그리고 나서 알라가 자궁의 천사를 보내어 그가 태아에게 4가지 정해준다. 첫째, 재산의 배당(성공, 번영, 부의 목), 둘째, 식량의 많고 적음, 셋째, 생명의 길과 짧음, 넷째, 미래 세상에서의 행복 또는 불행을 기록한다. ”이와 같이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지를 가르쳤으나 까다르에 관해서는 정밀하게 써 놓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를 당황하게 했고 그가 자주 모순된 말을 하게 됨으로써 그 앞에서 이 문제가 논쟁으로 번지면 그는 화를 냈다. 이슬람의 까다르란 어쩔 수 없는, 다시 말해서 피할 수 없는 이미 정해진 명령으로 나중에 와서야 발전된 교리이다. 인간의 선한 길과 악한 길을 명하는 까다르는 인간에게 이런 방법 또는 저런 방법을 따라 선택권을 주었다고 말하는 쿠란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다만 선악을 명한다는 교리는 알라의 예지교리의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알라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안다면 - 각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할지, 악한 행동을 할 지 - 알라의 예지가 틀릴 리가 없으므로 그 남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알라의 예지 다음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알라의 예지가 예정론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쿠란은 물론 하디스에도 까다르 신앙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를 이슬람의 기본신앙으로 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강림과 현존을 맞이한 인류 앞에는 알곡과 쭉정이의 두 신분과 천국의 곡간과 꺼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불 두 처소뿐이고, 그 외에 제3의 장소 연옥과 같은 곳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후에 즉시 낙원의 안식에 들어간다. 이슬람에서 심판은 무슬림들의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믿음은 구원을 받은 후의 믿음의 열매인 행위와는 엄연히 구분되고 있다. 사후에 영원한 구원과 사급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하늘 나라의 많은 유업과 주의 기쁨에 참여하는 축복을 받는 성도나, 있던 것도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자들이나 그들의 종말은 오직 현세에서 최종적으로 다 결정되는 법이요, 사후에는 다시 그들의 운명을 고칠 기회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며 기독교의 본질적인 사상이다.
무슬림에게 죄는 천주교에서처럼 대죄와 소죄로 나뉜다. 무슬림은 죄 없이 태어난다고 주장하며, 만약 알라의 법을 어겼을 때는 무슬림이 죄를 지은 후 즉시 죄를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를 지체하면 이것도 죄가 된다고 한다. 지체에 따른 죄의 정도는 회개하기까지 경과된 시간에 근거한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든 알라와 동등되게 여기거나(우상숭배, 다신교), 마술을 부리거나 이유 없이 생명체를 죽이는 것 그리고 돈에 이자를 붙이거나 고아의 재산을 빼앗거나 전쟁터에서 도망치고 간통했거나 순진한 여인을 간음했다고 거짓비난하는 것이 죄가 되나. 그러므로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라마단달에 금식하고 일곱 가지 대죄를 피하면 부활의 날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8개의 문을 열어 줄 거라고 말한다. 그 반대로, 무르지아파는 그가 무슬림이라면 모든 죄는 소죄이며 그에게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였다. 한편, 카와리즈(카리즈)파는 모든 죄는 대죄이며, 모든 대죄는 이슬람을 불신하는 것이 해당한다고 하였다. 대죄의 정확한 수효에 대해 이슬람 학자 간에 합의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4가지, 또 어떤 이는 7가지, 그리고 11가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가잘리와 순니파의 학자들은 대죄의 정확한 숫자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하지 않은 모든 죄는 소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알고도 고의적으로 반복해서 지은 죄, 학식 있는 자가 무매한 자를 잘못 인도한 경우는 대죄가 된다. 그러나 고의성 없이 반복된 소죄는 대죄가 안 된다. 죄의 용서는 그런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지 않고 알라가 용서해 주거나, 천사의 눈으로부터 피하거나, 회계장부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가능하다. 하디스에 따르면 소죄는 기도하기 전에 씻는 세정의식에 의해 속죄된다고 말한다. 정통파의 교리는 무함마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즉 죄가 없다고 말하나 이 교리는 쿠란과 하디스의 여러 내용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진실한 회개는, 첫째, 죄의 용서를 구하고, 둘째, 알라에 대한 죄를 지었음을 슬퍼하고, 셋째, 다시는 죄를 짖지 않겠다는 목적이 필요하고, 넷째, 만약 그 죄로 인해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었으면 그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다. 죄의 개념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다른다. 개신교에서 죄란 원칙적으로 대죄와 소죄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작은 죄라도 사망에 이르고 다만 속죄의 길은 하나님만의 힘으로만 가능하며 예수 그리고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슬람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이 자력구원의 교리를 주장하는 반면,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기 때문에 성도의 생활이나 그들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은 오직 신자의 현세에서의 신앙과 사망 전까지의 결단으로 즉시 완전히 결정되는 것으로서 일단 죽은 후에는 다시 신자의 심판이나 불신자의 구원의 기회가 결코 없음을 보여 준다.
|
|
|
글터 → 수필/산문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다람쥐 가족
두 해전쯤 일이었을 게다. 평소 건강하시던 할머니께서 눈이 침침하다고 하셔서 안과에 모시고 갔었다. 접수창구에 의료보험증을 내밀자 이름을 확인한 간호사가 대뜸 "생후 한달도 안 된 애를 데려왔어요?"하는 것이었다. 보험증에 쓰여진 할머니의 생년월일을 끝에 두 자만 본 간호사의 실수였다. "아, 예, 1890년대 분이라......" 내가 웃으며 말하자 간호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백하고도 다시 셋을 더 사신 할머니는 몇 년 전 백내장 수술을 받으신 것을 제외하곤 잔병치레 한 번 없을 만큼 정정하시다. 할머니가 "나도 통장 한 개 맹글어 다고"하시며 평생 저금통장 하나 없이 살아오신 것을 서운해 하시자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은행에 가셨다. 컴퓨터 자판을 몇 번이나 두드려 본 은행 여직원은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되돌려 주며 몹시 난처해했다. "......저, 컴퓨터가 1800년도 입력시키지 못해서..... 통장을 만들 수 없겠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백 살 넘으면 통장도 만들지 못합니까"하시면서 벌컥 화를 내셔모시고 갔었다. 몹시 섭섭해하시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아버지는 은행문을 나섰는데 할머니가 눈시울을 붉히며 "밥만 축내는 깡통은 어서 죽어야지......" 라고 말씀하셔서 아버지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고 하셨다. 고손자 생일까지 기억해 낼 만큼 총기가 좋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내 어머니. 예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손 마디마디에는 흉흉한 굳은 살이 박혀 있는 데, 이것은 삼십년 배추장사의 대가이다. 매서운 바람이 들창을 두드리는 새벽녘, 장사를 하러 나가시는 어머니의 대문 닫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따뜻한 이불이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른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차창 밖으로 배추가 그득한 소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버스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가슴에 남아 후회가 된다. 그리고 내 아내, 동그란 얼굴의 미소가 예쁜 내 아내는 나에게 시집온 지 팔년이 되어 이제 서른 살이 되었다. 가끔 시할머니,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사는 아내를 두고 동네 아낙들이 "어찌 사느냐"며 소근거릴 때에도 아내는 "나같이 행복한 여자 없다"며 내 팔짱을 껴 내 마음을 얼마나 든든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할머니. 부모님, 우리 부부 그리고 나의 아이들 이렇게 4대가 한 집에 옹기종기 다람쥐처럼 모여 사는 우리집,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려는 배려 속에서 끈끈한 정으로 서로를 엮어 가는 우리집처넘 행복한 둥우리가 또 있을까.
서용석 님/대전시 유성구 어은동
|
|
|
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36 - 중세사상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
그때 세계에서는 1234년: 몽고, 금을 멸함, 1265: 영국회의 성립
네 철학자 중의 제3의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알베르투스(Bollstadt의 Albertus, 1206-1280)다. 그는 철학.의학.화학.물리.식물학에도 조예가 있는 다방면의 학자였다. 도미니크 교단에 속해 독일의 주단장직을 맡기도 했고, 쾰른에서 가르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40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그가 인용하지 않은 문헌은 없을 정도로 '백과의 학자'라고 불리었다. 모든 것을 필요한 대로 종합한 철학자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 자신도 자연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신앙은 아우구스티누스, 의학은 히포크라테스에 의존하면 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보편논쟁은 아비센나의 학설을 따랐다. 보편개념은 신의 오성에서는 개물보다 먼저 있고, 자연물에서는 개물 중에 있고, 추상개념으로서는 개물 후에 있다고 보았다. 비판성보다는 수용성을, 분석보다는 종합을, 창의적이기보다는 체계적인 융합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알베르투스의 제자였고 스콜라 철학의 유일한 철학자로 숭앙을 받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로 얘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나폴리 산성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의 학문에는 귀족적인 요소가 상당히 풍긴다. 어려서 수학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수도사가 되어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18세 때 도미니크 교단에 들어갔으며, 토마스 때문에 학문은 도미니크 교단의 전용물인 것 같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교단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다. 파리의 쾰른에서 수학했다. 쾰른에서는 스승 알베르투스에 사사하였다. 27세 때부터 독립해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헤아릴 수없이 많은 저서를 남겼다.여러 지역에서 모두 성공하는 강의자가 되었다. 비교적 이른 49세에 나폴리에서 리용으로 종교회의에 가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탁월한 학자, 만인이 인정하는 학자, 천사와 같은 학자라고 불렀다. 1323년에는 성자의 반열에 올랐고, 1567년에는 제5차 대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피우스 5세 교황에 의해서였다. 제1차 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1882년에는 레오 8세교황의 명에 의하여 전집을 출간해, 명실 공이 대표적인 스콜라철학의 왕좌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의 집대성된 좋은 저서 중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표적 대작으로 남은 것은, "철학범론(Summa Philosophica)"과 "신학범론(Summa Theologica)"이다. 앞것은 4권 464장에 걸친 대작이다. 주로 모든 철학적 이론을 기독교 신앙으로 이끄는 안내서이고, 뒤의 것은 신학적인 내용이 중심이다. 아직 미완성의 것이라고 하나 그 방대함은 다른 데 비할 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모든 종교는 권위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어 때로는 공정한 비판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결국은 토마스도 그런 학자 중의 하나였다. 천사와 같은 신학자로 불리게 되면 건전한 평가와 바른 비판보다는 권위의 베일에 싸여 발전적 해석을 내리기 어렵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오지 못했고, 토마스 이후에는 그와 버금가는 학자가 나오기 힘들었다. 오직, 그와 반대되는 교단에 속하는 학자들이 토마스를 논박하는 저서를 남겼을 정도였다. 최근에도 전세계적으로 성행했던 신 토마스주의자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토마스에게서 얻으려고 노력하고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서강대학이나 성신대학을 비롯한 카톨릭대학에서는 그 열기와 전통이 대단하다. 그러나 개신교 계통의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열심히 연구해도 토마스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토마스는 이미 카톨릭 철학자로 간주되어 있으며, 스콜라 철학은 전성기 카톨릭 철학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의 철학을 가벼이 보아서는 않된다. 지금도 그가 취급한 모든 문제의 해결은 공정하며 치우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과학적 비판이 가해지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건전한 견해를 갖고 있다. 시대적인 잔해는 피할 수 없는데, 예를 들면 천사들이 천체를 운행하고 있다는 내용들은 현대적 비판이 가해져야 할 점이라 하겠다. 또 그의 전집 마지막에 들어가 있는 작은 논문들은 오히려 눈여겨볼 만한 내용을 안고 있다. 그의 저서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 전집이 완역된다는 것은어려운 과업이다. 영어판에는 "신학범론"의 내용을 발췌한 적당한 분량의 책이 있어 많이 읽히고 있다. 우리말로도 일부분은 번역되어 있을 줄 안다. 편안하게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장아찌'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먼저 '지'를 말씀드려서 '지'를 아셨으니, 이젠 '장아찌'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장아찌'는 옛날부터 쓰이던 것이었는데, 이때의 '찌'가 무엇인지는 위의 설명에서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즉 '간에 저린 채소'를 '디히'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로 변하고, 이 '지'가 된소리로 되면 '찌'가 됨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장아'는 무엇일까요?
이때의 '장아'는 한자어입니다. 옛날 문헌에는 '장아찌'를 '장앳디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장' + 애(처소를 나타내는 처격 조사, 오늘날의 '-에'에 해당합니다) + 시옷'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 뜻은 '장(간장, 된장, 고추장)에 담근 채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장앳디히'가 변화하여서 '장앗디히, 장앗지이'로 되고 이것이 오늘날 '장아찌'가 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혼자만 살아남은 광해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조선조 제15대 왕으로, 15년 1개월이나 지존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 그가 왕비와 세자, 세자빈 등 가족이 모두 자결한 뒤에 혼자만 살아남아서 18년 동안 섬에 갇혀 자연사할 때까지 목숨을 연명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맞아 북쪽으로 파천하는 몸이 되었다. 조정을 나누어 만약의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하므로 임금은 후사를 서둘러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는 40년을 재위에 있으면서 8명의 부인에게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은 14명인데 적출이 없어 나이 마흔이 되도록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선조가 총애하던 신성군은 피난 중 병사하고 광해의 동복 형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므로 장자임에도 세자책봉에서 제외되었다. 1594년 광해를 세자로 결정하고 명나라에 세자책봉을 주청했지만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당한다. 임해군은 왕위를 도적맞았다 고 떠들면서 돌아다녔다. 이것을 대북파는 묵과하지 않았다. 그 후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어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 는 선조의 명을 받은 유영경 등 몇몇의 소북파 신하들은 영창군의 지지파가 된다. 바로 이 소북파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1608년 선조가 사경에 이르러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다. 이때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 버렸다. 이 일이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에게 발각되었고,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 계승권은 인목대비에게로 넘어갔다. 영창은 그때 세살이었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킬 것과 수렴청정을 권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우여곡절과 14년의 긴 여정끝에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드디어 제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난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타버린 궁궐을 중건 개수하며,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했다.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도 다시 간행 편찬하였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했다. 명나라가 후금과 싸워 패하자 광해는 강홍립을 시켜 적당히 싸우는 체 하다가 후금에 투항하게 했다.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고 그곳에 억류된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조정에 보고토록 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협력하는 체 하면서 안으로는 후금과의 우의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관계를 회복하여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이러한 치적으로 보아 광해군은 분명 암군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실상은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재위한 15년 동안, 대북파들은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참으로 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결국 이귀, 김자점 등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니 성공을 거두게 된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영창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인륜을 저버렸다는 등의 이유였다. 중종반정을 불러온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반해 광해군은 왕권 도전세력에 칼을 썼으나, 백성을 학대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민생경제를 일으키는데 전력을 쏟은 임금이었다. 인조반정이 순수한 구국의지에서였다기 보다는 사대주의자들과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자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보는 견해에 필자도 공감이 간다. 그러나 붕당에만 치우쳐 명분론만 앞세우던 그들 인조반정 세력은 시대적 대세의 흐름은 읽지 못하고 있었으니 명은 이미 기울어진 나라였고, 청(후금)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명나라를 섬기던 인조는 정묘와 병자, 두 번의 호란을 면할 수 없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무릎을 꿇고 청나라와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야 하는 쓰라림도 겪는다.
인조가 등극한 뒤 49세로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 동문쪽에 부인 유씨와 함께 위리 안치된다.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쪽에 안치시켰다. 그 후 두 달쯤 지나 세자 내외는 자살을 하고 만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의 세자는 담 밑에 구멍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세자가 잡히는 것을 보다가 그만 땅에 떨어졌고, 그 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더니 욕된 삶을 길게 끌고 갈 것이 없느니라 하고 결국은 목매달아 죽었다. 폐세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해 늦가을 폐비 유씨마져 병사하고 만다. 자주 격정에 휩싸이며 미칠 것 같다 고 말하던 폐비. 그는 친정오라버니들(유희분, 유희발)이 참살당한 일과 목에 밧줄이 걸려있는 아들, 며느리의 환영으로 몹시 괴로워하였다. 홧병을 얻은 폐비는 괴성을 지르며 가시덩굴 속에서 숨져갔다. 48세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그 해에 세 식구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광해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외의 정세에 따라 태안으로 또 강화도, 교동으로 몇 번 이배되었다가 인조 15년 멀리 제주로 옮겨져 거기서 67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 처음 섬에 올 적에 배의 사면을 휘장으로 가리고 목적지를 비밀로 하였으므로 어딘지 모르다가 땅을 딛고 내리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낭패해 하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차 단념하며 묵묵히 지내게 되었다. 따라간 계집종이 패악하게 말을 함부로 하고 윽박질러도,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윗방을 차지하고 아랫방을 거처하게 하여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잠자코 견디었다. 채근담에 소 라 하거나 말 이라고 하거나 고개만 끄덕인다(지시점두)는 말이 있다. 뭐라고 하면 어떤가? 이미 그런 심경이 아니었을까? 온몸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 소리에 귀먹은 그의 내면은 이미 풍화될대로 풍화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가 지은 시, 한 편이 여기에 있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 성머리 지나니 (풍취비우과성두) 장기 훈음속에 높은 다락이어라. (장기훈음백척누) 창해의 성낸 파도 어둑어둑해 오는데 (창해노도래박막) 푸른 산에 근심한 빛 청추에 어렸더라. (벽산수색대청추) 마음이 가고파 왕손초도 보기 싫어 (귀심염견왕손초) 나그네 꿈 가끔 제자주에 놀래네. (객몽빈경제자주) 나라의 존망조차 소식 끊어지고 (고국존망소식단) 연파낀 강상 외로운 배에 누워 있노라. (연파강상와고주)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여늬 때와 같이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닷소리를 듣고 있었다. 영욕의 67년을 이끌어온 몸이 그만 눕고 싶어진다. 옆으로 눕자 물살이 떠밀려와 자신을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좋다 고 생각하자 무거워진 눈꺼풀을 다시 뜰 수 없었다. 그날은 화담선생이 떠나시던 날처럼 견우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이었다. 그는 어머니 무덤의 발치 아래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공빈 김씨의 묘 아래에 있다. 제법 많은 나이이건만, 어머니의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의 시 한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
|
|
글터 → 구비 |
책들이 많아 참조하여 하나의 문서로 만들고 있습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발레타인의 날(2월 14일) : 3세기의 로마 성직자였던 성.발렌타인은 젊은 사람들에게 결혼할 것을 권하고 격려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로마 황제였던 그로디우수 2세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노여움의 이유는 군인들이 결혼하지 않아야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성.발렌타인은 AD 270년경 그로디우스 2세에 의하여 순교 당하였다.
“돈키호테”는 왜 금서가 되었나? 1640년에 발간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스페인에서 금서 리스트에 올랐다. 그 이유는 책 안에 쓰인 한 문장 때문이었다. “성의 없는 자선사업은 아무 가치가 없다.”
세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소련으로 1년에 54,569권의 새 책을 펴낸다. 한국은 33,156권의 새 책을 인쇄하여 세계에서 7위이다. 즉 하루에 90권의 새 책이 나오는 셈이 된다.
세계에서 종이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미국으로 59,336,000톤이고, 한국의 경우는 2,500,000톤이다. 인도는 한국보다 20배나 더 인구가 많은데도 종이 생산량은 훨씬 적어 1,550,000톤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섹스에 관한 책인 ‘카마수트라’는 AD500년경 한 불교 종파의 제자이자 시인인 말란아가가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 수백년 동안 다르어오던 것을 재정리한 것이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