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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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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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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된다. 이는 역사가 잘못된 이유의 하나. -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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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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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인가, ‘손님분’인가
얼마 전 독자 한 분께서 질문을 보내주셨다. 요즘 “팬분께서 주셨어요.” “학생분들은 이리 오세요.” “어머님분들 들어오세요.” “손님분은 가셨어요.” 등과 같이 ‘분’을 많이 쓰는데,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근래 “커피 나오셨어요.”와 같은 표현이 문제되고는 하는데, 맞고 틀리고를 떠나 우리 사회에 경어 표현이 늘어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분’의 쓰임이 확대되어 가는 것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 탓일 것이다.
‘분’은 ‘친구분, 동생분, 남편분, 독자분’ 등과 같이 그 사람을 높이는 접미사이다. 이 접미사로써 해당하는 사람을 적절히 대우해 줄 수 있으니 매우 유용한 말이다. 물론 ‘친구이신 분, 동생 되시는 분’ 등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접미사 ‘분’을 이용하여 더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독자분의 의견대로 요즘 ‘분’을 과도하게 쓰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손님분, 어머님분’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손님, 어머님’은 ‘님’이 결합된 말로서 그 자체가 존칭어이므로 ‘분’까지 덧붙이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손님, 어머님’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팬분, 학생분’처럼 존칭어가 아닌 말에 ‘분’을 붙이는 것도 항상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외국 공무원분들이 홍보관을 방문하셨어요.” 등이 예의를 담은 표현인 것은 맞지만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군인들께, 공무원들이’라고 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며 간결하고 자연스럽다. ‘팬분께서, 학생분들은’도 ‘팬께서, 학생들은’이라고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분’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쓰는 언어문화를 기대해 본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면발’이 끝내줘요?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발음할 때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 중 하나가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면발’과 ‘보름달’은 경음화시켜 [면빨]과 [보름딸]로 발음해야 하는데, 외국인들은 이를 표기대로 [면발]과 [보름달]이라고 잘못 발음하기 쉽다. 실제로 귀화 외국인 로버트 할리는 라면 광고에 출연해 “[면발]이 끝내줘요”라고 발음하기도 했다.
‘면발’을 [면빨]로 발음하는 이유는 ‘표준발음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표준발음법’ 제6장에 보면 ‘면-발’과 ‘보름-달’과 같이 ‘합성어 중에 표기상으로는 사이시옷이 없더라도 관형격 기능을 지니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 경우에는 된소리로 발음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수[국쑤]’ ‘돋보기[돋뽀기]’ ‘곱절[곱쩔]’처럼 ‘ㄱ ㄷ ㅂ’ 계열의 받침 뒤에 연결되는 자음은 된소리로 발음하며, ‘갈등[갈뜽]’ ‘발전[발쩐]’과 같이 ‘ㄹ’ 받침의 한자어들은 비록 ‘ㄱ ㄷ ㅂ’ 계열의 받침이 아니어도 된소리로 발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자어 중에는 모음이나 ‘ㄴ ㅁ ㅇ’ 받침 뒤에서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과(內科)[내ː꽈]’ ‘국제법(國際法)[국제뻡]’ ‘난치병(難治病)[난ː치뼝]’ ‘인간성(人間性)[인간썽]’ ‘불감증(不感症)[불감쯩]’ ‘성층권(成層圈)[성층꿘]’의 예들이 그것이다. 이상의 예들처럼 한자어 ‘과(科) 법(法) 병(病)’ 등과 한자어계 접미사 ‘-성(性) -증(症) -권(圈)’ 등이 결합할 때에는 표기대로 발음하지 않고 경음화시켜 발음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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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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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미소 - 천상병
1
입가 흐뭇스레 진 엷은 웃음은,
삶과 죽음가에 살짝 걸린
실오라기 외나무다리.
새는 그 다리 위를 날아간다.
우정과 결심, 그리고 용기
그런 양 나래 저으며
풀잎 슬몃 건드리는 바람이기보다
그 뿌리에 와 닿아주는 바람
이 가슴팍에서 빛나는 햇발.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풀밭길에서
입가 언덕에 맑은 웃음 몇 번인가는
2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언덕에서 언덕으로 가기에는
수많은 바다를 건너야 한다지만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
선취 - 정지용
해협이 일어서기로만 하니깐
배가 한사코 기어오르다 미끄러지곤 한다.
괴롬이란 참지 않어도 겪어지는 것이
주검이란 죽을 수 있는것 같이.
뇌수가 튀어나올랴고 지긋지긋 견딘다.
꼬꼬댁 소리도 할 수 없이
얼빠진 장닭처럼 건들리며 나가니
갑판은 거북등처럼 뚫고 나가는데 해협이 업히랴고만 한다.
젊은 선원이 숫제 하-모니카를 불고 섰다.
바다의 삼림에서 태풍이나 만나야 감상할 수 있다는 듯이
암만 가려 드딘대도 해협은 자꼬 꺼져들어간다.
수평선이 없어진 날 단말마의 신혼행이여 !
오직 한낱 의무를 찾어내어 그의 선실로 옮기다.
기도도 허락되지 않는 연옥에서 심방하랴고
계단을 나리랴니깐
계단이 올라온다.
도어를 부등켜 안고 기억할 수 없다.
하늘이 죄여 들어 나의 심장을 짜노라고
영양은 고독도 아닌 슬픔도 아닌
올빼미 같은 눈을 하고 체모에 기고 있다.
애련을 베풀가 하면
즉시 구토가 재촉된다.
연락선에는 일체로 간호가 없다.
징을 치고 뚜우 뚜우 부는 외에
우리들의 짐짝 트렁크에 이마를 대고
여덟시간 내- 간구하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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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K.M에게) - 김수영
당신을 찾아갔다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기 위하여서였다
마침 당신은 집에 없고 당신의 아우만이 나와서 당신이 없다고 한다
부산에서 언제 올라왔느냐고 헛말같이라도 물어보아야 할 것을
나는 총에 맞는 새같이 가련하게도 당신의 집을 나와버렸다
그 아우는 물론 들어와서 쉬어가라고 미소를 띄우면서 권하였다
흔적은 없어도 전재를 입은 것만같은 (그렇게 그 문은 나에게는 너무나 컸다)
낡은 대문 사이에 매일같이 흐르는 강물이 오늘에야 비로소 꽉차있다
설움의 탓이라고 이 새로운 현실을 경시하면서도
어제와같이 다시는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서
자꾸 수그러져가는 눈을 들어 강과 대안의 찬란한 불빛을 본다
횃불로 검은 물속을 비춰가며 고기를 잡는 배가 증언처럼 다가오고
나는 당신의 아우에게로 뛰어가서 나의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미워하였다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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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안에서 - 이해인
누군가 내 안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고
정직한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목 쉰 채로
나를 부르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못 해
하늘만 보는 막막함이여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것일까
그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일까
겸허한 그 사람은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고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막막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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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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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비 - 권오순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 새는 창문가에 두라고
포슬포슬 구슬비는 종일
예쁜 구슬 맺히면서 솔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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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 박형철
빨강 남색
무지개 빛
하늘 묶어 놓으면
맑게 트인 바다 위엔
철렁철렁
남색 물이 흐르고
노랑 초록
무지개 빛
하늘 묶어 놓으면
곱게 닦인 푸른 잎엔
졸졸졸
초록 물이 흐르고
파랑 보라
무지개 빛
꽃다리 놓으면
뭉게구름 뭉게뭉게
건너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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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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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35.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는 꼭 보여준다
부모가 신경만 쓰면 텔레비전의 악영향은 없다.
텔레비전의 대량보급으로 화면을 통한 폭력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을 모방한 젊은이의 탈선 이야기가 이따금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텔레비전의 폐해를 실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들은 텔레비전의 악영향으로부터 거의 안전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여덟 살인 둘째딸아이와 여섯 살인 아들에게는 안식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오후 여섯 시 반까지만 텔레비전 시청을 허락한다. 그것도 어린이 프로에 한정되며, 혹시 그들이 어른 프로를 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집에선 폭력장면 따위가 어린이 시청 시간에 화면을 비치는 일이란 절대로 없다. 다만 폭력적이라 할지라도 다큐멘터리는 예외이다. 우리 유태인은 지난날 셀 수 없이 많은 박해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의한 대량 학살은 우리 유태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조부모는 물론이고 백부 내외가 모두 학살당해 지금은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 씨 가족 역시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몰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11형제나 되었지만, 그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형제와 자손들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다
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스의 학살 역사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남아있다. 우리 집에서는 이와 같은 종류의 기록영화만은 폭력적인 장면이 있더라도 자녀들이 보는 것을 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을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다.
"우리에겐 사촌들이 없나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단다. 우리 친척은 모두 학살당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없단다."
'사실'과 '픽션'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있다면 자녀들은 그 어떤 폭력장면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폭력장면이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그들이 '사실'과 '픽션'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가는 동포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그러한 비참한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우리집 큰딸아이는 텔레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영화는 이따금 본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과 픽션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 애 재량에 맡긴다. 이것은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일일이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전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무조건 '텔레비전은 나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텔레비젼과 현실의 차이점을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36.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헛된 꿈을 갖게 하지 않는다
유아 때부터 합리적인 사고를 심어준다
유태인은 합리주의자이다. 이를테면 <탈무드>의 해석을 둘러싸고 장장 몇 시간에 걸쳐 토론을 할 때라도, 서로가 이치를 따져가면서 전개해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 이런 경향 때문에 더러는 '유태인은 추상적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리 유태인은 합리적인 사고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의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다'는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지는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자녀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죽은 뒤에 '천당'에 가느니 '지옥'에 떨어지느니 하는 따위의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서 자녀들에게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합리주의적인 환경 아래에서 성장한 유태인 가운데,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이나 매독반응의 발견자인 와세루먼, 그리고 혈액형을 발견한 란드슈타이너 등의 과학자들과, 냉철한 현실 감각으로 세계 제일의 금융 재벌이 된 로스차일드 일가 등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합리주의 신봉자인 유태인들은 이 세상에 '기적'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는 온통 기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모두 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들뿐이다. 즉,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은 한 가지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다.
모세의 기적도 과학적으로 입증된다
한 가지 예로 모세의 기적을 들어보자. 노예의 몸인 유태인들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친 모세가 홍해에 다다랐을 때, 앞은 바다가 가로막고 뒤쪽에서는 이집트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있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출애굽기에는 그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밀 때 여호와께서 큰 돌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
홍해가 둘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건너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백 년에 한 번쯤 강풍으로 인해 조류가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홍해가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얕아지는 경우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적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모세가 일으킨 이 현상을 오로지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기적이 헛된 공상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처럼 기적마저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유태인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는 일곱 살 때 친구에게, '인간이 죽으면 하늘의 어디엔가로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실을 죽기 직전까지 믿었다고 한다. 또 음악가인 다리우스 미요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 소피로부터 '그림 같은 광경'이라는 터키의 추억담을 듣고 옛날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는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우리 유태인들은 기적과 같은 공상을 부정하고 현실성이 짙은 것을 통해서만 이론을 관철하려고 에너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합리주의적인 교육은 수많은 과학자, 사업가, 음악가, 미술가 등을 배출하는 토대가 되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 공상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이런 번거로움을 생각해서라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 아닐까.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도 밑도끝도없이 지어낸 허황된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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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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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지중해
에스파냐에서 시리아로 가는 여행이다. 로마 제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여행이다. 직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지중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게 되었다. 황제의 항해라고 해서 대규모 호위선단을 조직할 필요는 없었다. 해적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해적의 소굴을 소탕하는 방식으로 지중해도 오랫동안 '팍스 로마나'를 누리고 있었다. 홀가분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곧 평화롭다는 증거다. 원래 거창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하드리아누스는 쾌속선 서너 척만 거느리고 출항한 모양이다. 타라고나 항구에서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까지는 계속 순풍을 만난다면 닷새, 바람이 없어서 노를 저을 필요가 있다 해도 20일 내지 25일이면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에 들르지 않는다. 일단 들르면 다시 떠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한 항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타라고나를 떠난 뒤에는 아마 사르데냐 섬 남단을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항해하여 시칠리아 섬 서쪽 끝의 마르살라에 잠시 들렀다가, 시칠리아 섬 남쪽을 돌아 크레타 섬 북해안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키프로스 섬으로 향한 다음, 거기서부터는 안티오키아의 외항인 셀레우키아로 곧장 뱃머리를 돌린 게 아닐까. 계절은 초여름, 이 여정이라면 한 달 남짓에 안티오키아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프스를 넘을 때에도 틈틈이 짬을 내어 <유추>(De Analogia)이라는 제목의 문장 비교론을 써서, 정적이긴 하지만 명석한 문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인 키케로에게 헌정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행동범위가 넓다는 점만이 아니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카이사르와 비슷했다. 그런 하드리아누스가 두 달 가까이 항해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전해오는 풍문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주위는 온통 푸른 바다다. 그것도 거칠게 일렁이는 북해나 망망대해가 아니라,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하얀 꼬리를 길게 끌고 달리는 작은 어선까지 또렷이 알아볼 수 있는 초여름의 잔잔한 지중해였다. 지중해는 로마인들이 '우리 바다' (마레 노스트룸)또는 '내해' (마레 인테룸)라고 부르는 바다다 오늘날과 같은 200해리 영해 문제도 없고, 따라서 어선 나포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로마 제국의 바다였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착수하게 될 로마법 집대성이라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상상이라기보다 공상이지만, 이 공상의 유일한 근거는 하드리아누스가 수도에 돌아온 뒤에 시작되는 이 대사업-술라가 처음 시도했고 카이사르도 시도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대사업-이 착수 단계에서 이미 작업 내용이며 거기에 종사할 사람들의 인선까지 기초가 왜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는 것이다.
오리엔트
황제를 맞이한 시리아 속주의 도읍 안티오키아에서는 파르티아 전쟁을 언제라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 왕과의 정상회담을 통한 해결을 선택한다. 파르티아 왕국이 로마 제국에 강경한 태도로 나을 때는 국왕 자신이원해서가 아니라 국내 강경파의 압력에 떠밀린 경우가 많았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담장으로 정해진 유프라테스 강의 작은 섬으로 가면서 하드리아누스는 군단을 대동하지 않았다.
파르티아 왕과 로마 황제의 회담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알고 있다.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 영토로 진격하기 위해 편성된 게 아닐까 하고 로마를 걱정시킨 파르티아군은 수도로 돌아간 국왕의 명령으로 해산했다. 덧붙여 말하면 파르티아는 로마와 달리 통상적인 경비에 필요한 병력 외에는 상비군을 두지 않은 나라다. 전쟁을 할 때만 군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파르티아의 역대 왕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합리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왕실 내부의 권력투쟁과 파르티아 북동쪽의 고원지방에 사는 부족의 침략이었다. 하드리아누스도 무조건 정상회담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파르티아와는 정상회담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파르티아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지만, 몸은 이미 제국 동방에와 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곧장 북상하여 소아시아로 들어가, 소아시아 남부와 서부를 시찰하기로 했다.
이것은 쾌적한 여행이 되었다. 오늘날 소아시아 남부는 독일로 일하러 가는 노동자의 주요 공급지가 되었기 때문에 터키어 표준말보다 서투른 독일어가 더 잘 통하는 지방이 되어버렸지만, 로마 시대에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반원형극장을 가진 도시가 즐비했다. 1만 명을 수용하는 공공시설이 있었다는 것은 인구가 그 몇 배나 되는 대도시였다는 뜻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소아시아는 온통 황야지만, 그 내부를 여행해보면 역사상의 강대국들이 쟁탈전을 벌인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풍요로운 지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시대에는 이 지방이 원로원 속주였다. 즉 로마화의 역사가 길고, 따라서 정세가 안정되어 있고, 그래서 군단을 상주시킬 필요도 없는 지방이었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하드리아누스가 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해야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에게는 동경과 호기심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는 장미꽃 섬이라는 뜻의 로도스 섬도 방문했다 로도스 섬은 풍광이 아름답고 기후도 온화하고, 게다가 당시에는 학문의중심지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험하고 좁은 길을 올라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높은 벼랑 위의 린도스 신전도 방문했을 것이다. 또한 소아시아 서쪽 끝으로 돌아오면,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출생지인 할리카르나소스, 그리스 철학의 시조인 탈레스가 태어난 밀레투스, 아름다운 항구도시 에페수스가 이어져 있고, 과거 헬레니즘 국가들 가운데하나로서 그 후에도 줄곧 학문의 중심지인 페르가몬을 지나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무대가 된 트로이에 이른다.
아테네에서 꽃핀 그리스 문화는 모두 이오니아 지방이라고 불린 이곳 소아시아 서부에서 싹튼 것이다. 터키 영토가 된 지금도 이 지방을 여행할 때는 그리스 문화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 문화의 흔적이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던 로마 시대에는 이 일대가 그리스 자체였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소아시아 비티니아 태생의 그리스 미소년 안티노와 알게 된 것도 어쩌면 이 무렵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이오니아 지방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장이라도 가고 싶어지는 아테네로 직행하지 않았다. 변경을 순행하기에 알맞은 계절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간 황제 일행은 트라키아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간다 트라키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기병을 제공한 지방이고, 산악지대는 말 산지로도 알려져 있었다. 로마 군단에도 트라키아 출신 기병이 많았다. 트라키아를 지나 도착한 도나우강 방위선은 하드리아누스가 청년시절에 근무한 곳이다. 또한 제위에 오른 직후에도 수도 로마로 돌아가기 전에 돌아다니며 방위체제를 정비한 곳이다 따라서 황제가 해야할 일도 별로 없고 순행 속도도 빨랐다. 그래도 도나우 강어귀에서 시작하여 빈이 있는 중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찰을 계속했다. 라인강 방위선을 순행할 때 '게르마니아 방벽' 시찰도 모두 끝냈으니까, 이로써 하드리아누스는 로마군 최고시령관으로서 라인 강과 도나우강이라는 제국의 양대 방위선을 모두 시찰한 셈이다. 겨울이 다가올 무렵에야 황제는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카이아속주의 도읍인 아테네에서 겨울을 날 작정이었다.
아테네
그토록 동경하던 땅을 4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 찾은 감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소싯적에 하드리아누스는 학우들한테 '그리스 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이를 염려한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의 결단으로 연약한 그리스 문화보다 실질 강건한 로마식 생활을 익히도록 에스파냐의 시골로 돌려보내진 경험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 후 줄곧 군무와 정무로 바쁜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그리스는 여전히 멀리 있었다 난생 처음 아테네를 찾은 하드리아누스는 겨울을 나는 정도가 아니라 반 년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게 된다. 비티니아 태생의 미소년도 아테네로 불러들였을지 모른다.
하드리아누스는 구레나룻을 기른 최초의 황제로 알려져있다. 공화정 시대에도 로마 남성들은 수염을 깎는 것이 습관이었다. 내 상상이지만, 그 당시는 로마의 융성기와 그리스의 쇠퇴기가 겹쳐 있어서, 로마인들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인들과 동일시되기를 꺼려한 나머지 수염을 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인은 옛날부터 구레나룻을 풍성하게 기르는 것이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그리스인이라도 로마인들이 존경을 아끼지 않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수염을 말끔히 깎은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까, 이것도 수염을 깎는 습관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로마가 패권 국가가 되고 그리스가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간 뒤, 구레나룻은 '그람마티쿠스'로 통칭된 교사들의 상표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누군지 는 알 수 없지만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의 초상에 '그람마티쿠스'라고 적힌 것이 많다. 이런 로마에서 살아야 했던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리 그리스풍으로 꾸미고 싶어도 수염을 기르는 것을 삼갔을 것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원기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로마 남자들이 모 두 수염을 깎은 것은 아니다. 아침마다 주인의 면도만 담당하는 노예가 필요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부터 1세기가 지났다. 그리스 애호가였던 네로는 조심스럽게 턱수염을 조금 길러보기도 했지만, 하드리아누스 시대가 되면 그런 배려조차 필요 없어졌을지 모른다. 어쨌든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초상들은 모두 구레나룻을 기른 모습이지만, 그 초상들은 모두 황제가 된 이후의 하드리아누스를 묘사한 것들이다. 로마 황제가 그리스풍으로 구레나룻을 길러도 이제는 스캔들이 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황제들 중에는 구레나룻을 기른 사람이 훨씬 많다. 여인들의 머리 모양만큼 변화가심하지는 않다해도, 남자들의 수염 역시 일종의 유행일까.
하드리아누스가 구레나룻을 기른 것은 그리스를 방문하기 전이지만, 이때 그는 해외여행을 처음 떠난 젊은이처럼 그리스적인 것이라면 모조리 경험하며 돌아다닌다 아테네 시내는 물론 델피, 코린트, 스파르타, 올림피아 같은 명승고적은 빠짐없이 찾아갔고,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수니온 곶에 서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서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맞이도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에도 열중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은 아테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엘레우시스에서 거행되는데, 제우스의 누이이자 농사의 여신인 데메테르와 그 딸 페르세포네에게 바치는 제의를 한밤중에, 게다가 관계자 외에는 모두 물리친 채 비밀리에 거행하기 때문에 비교라고 불렀다. 그리스 인들은 해마다 겨울이 돌아오는 현상을 반 년 동안이나 저승에 간 채 돌아오지 않는 딸과의 이별을 한탄하는 데메테르 여신의 슬픔 탓으로 여겼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엘레우시스의 비교가 예로부터 널리 퍼진 디오니소스 신앙에 필적하는 민간신앙이었지만, 디오니소스(라틴 어로는 바쿠스)에게 바치는 제의는 노래하고 춤추는 유쾌한 것인 반 면, 저승과 관련된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은 한밤중에 조용히 거행되었다. 또한 신자도 엄격하게 골라 뽑았다.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중적이라면 이쪽은 엘리트적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이익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믿는 것이다. 엘레우시스의 비교가 신자들에게 보장한 것은 죽은 뒤의 안식이었다.
로마 황제는 '최고제사장'도 겸하고 있으니까 로마의 수호신들을 섬기는 최고책임자일 텐데, 그들 중에도 이 비교의 신자가 된 사람이 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그렇다. 다만 냉철한 통치자인 아우구스투스는 피통치자가 된 그리스인에 대한 정치적 배려로 신자가 되었고, 클라우디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로마도 다신교 사회다 그리스 엘리트들의 신앙인 엘레우시스의 비교 신자가 되었는데도, 보수적인 원로원에서조차 비난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신앙도 서기 381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의 국교화 칙령을 발표한 뒤 고대의 숱한 신앙과 함께 사교로 낙인찍혀 매장된다. 신비의식은 엘레우시스에 있는 깊은 동굴 속에서 한밤중에 거행되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휴대가 금지되어 있음에도 단검을 몰래 가져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무방비 상태로 의식에 참가했다. 호위병을 데려가는 것도 물론 금지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오래된 규칙을 충실히 지켜서 혼자 참가했다.
서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초상들은 황후 사비나와 나란히 놓여 있는 경우보다 그가 총애한 안티노의 초상과 나란히 놓여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만큼 황제와 안티노의 관계는 당시에도 그 후에도 유명했다. 소아시아 북서쪽에 있는 비티니아, 소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총독으로 부임했던 이 속주는 예로부터 그리스계 주민이 많았던 지방이다. 따라서 이곳 태생인 그리스인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특별한 것은 안티노의 뛰어난 미모였다. 안티노가 언제 어디서 하드리아누스와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고, 11월 27일에 태어난 것은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몇 년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죽은 해는 확실하니까 거기서 역산하고, 신격화된 사람의 특권이었던 나체 조각상에서 짐작할 수 있는 신체 연령을 감안하여 추측하면, 안티노가 하드리아누스와 알게 된 것은 열 다섯 살 무렵이 아닐까 여겨진다. 원숙한 중년에 이르렀지만 가슴속에는 젊은 격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48세의 로마 황제는 그리스인의 지적인 아름다움보다 오리엔트의 감미로운 우수를 풍기는, 그러면서도 외모는 완벽하게 그리스적인 미소년을 사랑했다.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말이 있지만, 하드리아누스에게 운명적인 만남의 상대는 여자가 아니라 젊은 남자였다. 게다가 그것은 그가 오랜 꿈을 겨우 실현하여 그리스 문명권을 순행하는 여행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 '아름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감수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는 남성의 세계였다. '남성의 세계'란 남자들이 가장 매력적인 시대를 말한다. 이 '남성의 세계'에서 여자 동성애자는 시인사포 정도가 있을 뿐이다. 반면에 소년을 사랑한 남자 동성애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롯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면 미소년에 대한 사랑에 도달해버린다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나 미소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그리스인 중의 그리스인인 페리클레스는 평생 동성애와 무관했고, 그가 사랑한 것은 여자뿐이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우리야말로 그리스'라고 확신했던 시대의 아테네인이다. 페리클레스에게 그리스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조국이었다. 반면에 하드리아누스에게 그리스는 동경의 땅이고,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조국이 될 수는 없는 곳이었다. 이 하드리아누스를 나는 결코 경멸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이 되어보면 잘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겨울만 나고 떠날 작정이었는데 반년이나 머물러버렸으니,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에서 눈을 빛내며 동경의 땅을 돌아다니는 여행자 노릇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황제다. 황제니까 할 수 있는 사업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꿈을 꾸는 동시에 현실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비친 그리스, 그 중에서도 특히 아테네에서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듯하다. 그런 안타까움이 아테네를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 게 아닐까. 아테네의 쇠퇴는 사실 아테네인에게 원인이 있다. 그리스 민족은 우수하기 때문에 해외에서 활약할 무대를 찾기도 쉬웠고, 그래서 요즘 말하는 두뇌 유출에 따른 공동화가 쇠퇴의 주요 원인이 되고있었다. 이런 상태를 방치해두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만 국내에 남게된다. 그렇게 되면 경제력이 쇠퇴하고, 사회의 활력도 쇠퇴한다. 사회가 활력을 잃으면 사람도 물자도 들어오지 않게 된다. 로마는 그리스의 안전을 도나우강에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배후지가 배후지 구실을 완수해주지 않으면 진정한 안전보장은 이루어질 수 없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전역의 활성화는 로마 제국의 통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냉철하고 현실적인 사람이다 아무리 부흥시키려고 애써도 아테네가 페리클레스 시대로 돌아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족에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수명이 있다. 노년기에 들어선 지 오래인 아테네나 그리스를 장년기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아테네를 학예와 관광의 도시로 만들고, 그리스를 상업과 관광의 지방으로 만들려 한 게 아닌가싶다.
로마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아테네는 여전히 학예의 중심지였고, 역대 로마 황제들도 '대학'을 로마로 옮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구 적인 지원체제만 확립하면 아테네를 학예의 도시로 만드는 일은 간단했다. 하지만 교수와 학생의 도시라는 것만으로는 사람과 물자의 유입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전에는 실제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명승고적이 되어버린 아테네의 공공건물을 철저히 수리하고 복원했다. 또한 새 건물을 세워 아테네 시에 기증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시장, 즉 '경제 센터'까지 기증했으니 아테네 시민들이 기뻐한 것도 당연하다. 그리스 전역을 관광지로 만드는 문제에서는 그리스에 옛날부터 존재한4대 경기대회를 활성화하는 데에서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융성을 자랑하던 시대의 그리스에는 4대 경기대회가 있었다. 전쟁을 하다가도 중단하고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에서 사람들이 모여 경기대회를 열었다. 피티아 경기대회-4년마다 열린다. 그리스 중부의 델포이에서 열리고, 경기는 아폴론신에게 바쳐진다. 누메이아 경기대회-2년에 한번 열리고, 개최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의 아르고스. 제우스신에게 바쳐진다. 이스투미아 경기대회-2년에 한번 열리고, 개최지는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동부의 코린트. 포세이돈신에게 바쳐진다. 올림피아 경기대회-4년마다 열리고, 개최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서부의 산중에 있는 올림피아. 제우스신에게 바쳐진다.
이들 4대 경기대회의 조합은 좨 잘되어 있어서, 1년에 한번은 어딘가에서 경기대회가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경기'는 체육경기가 주류이긴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음악과시와 연극 등, 그리스인들이 문예로 여기는 장르가 모두 포함된다. 경기대회 개최지에는 그 대회를 바치는 신을 모신 신전을 중심으로 각종경기장이 산재해 있고, 그 경기장들은 모두 그리스 조각이나 회화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경기를 관전하러 찾아온 이들은 그리스 예술의정수도 접할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몸소 경기장에 나가 관전했을 뿐 아니라 우승자에게 상금을 하사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런 '이벤트'의 진흥에 힘썼다 요점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었다. 사람이 모이면 물자도 모인다. 하드리아누스는 엘리트 노선과 대중 노선을 병행하여 그리스를 활성화하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그 두 가지를 겸비한 것까지 있었다 소크라테스도 찾아갔다는 저 유명한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에 그토록 정성을 쏟은 것을 두고 그리스에 대한 그 개인의 애정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로서의 배려를 덧붙이고 싶다. 그가 세워서 아테네 시에 기증한 제우스 올림피아 신전의 완공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Olympeion'이라고 새긴 통화를 발행한 것은 신전이 완공된 지 3년 뒤인 128년이지만, 이것은 아테네에 신전을 세우는 것도 변경의 군단기지를 순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드리아누스에게는 하나의 통치행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도 수리하고 복원한 구시가지와 그가 새로 지은 신시가지의 경계에 아치를 세우고, ·여기까지는 테세우스(아테네 건국의 영웅)가 세운 아테네, 여기서부터는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아테네"라는 문구를 새긴 것은, 남에게는 관대해도 본질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이었던 하드리아누스의 성격이 교묘하게 드러나 버린 예다. 이런 사업을 반 년 만에 모두 끝낼 수는 물론 없다. 서기 124년 가을부터 125년 봄까지의 체류 기간은 설계도를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짓도록 지시하고 공사를 착공시키는 것만으로 끝났다. 하지만 역시 브리타니아에 지은 '하드리아누스 성벽'과는 달랐다.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아테네'는 그 완성된 모습을 자기 눈으로 다시 한번 볼 작정이었다.
그리스까지 돌아왔으니까 여기서 이탈리아로 직행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하드리아누스의 여행을 추체험할 자격이 없다. 어쨌거나 계절은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봄철이다. 그리고 반 년 동안 그리스에 머물면서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에 온통 열중해버렸다 아테네 외항인 피레우스에서 배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본국 이탈리아의 브린디시가 아니라 시칠리아 섬으로 뱃머리를 돌리게 했다. 시칠리아 섬은 원래 그리스 계f주민이 건설한 도시가 많은 곳이다. 본국 이탈리아와는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도,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이중 언어 노선을 택한 로마의 방침 덕분에 로마 제국영토가 된 뒤에도 여전히 그리스어가 상용되고 있었다. 특히 섬의 동쪽 절반은 과거에 '대그리스'(Magna Graecia)라고 불린 곳으로, 시라쿠사와 타오르미나, 메시나 등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가 늘어서 있다. 하드리아누스도 그리스색이 짙은 이런 도시들을 순행했을 게 분명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시에 이미 활화산이었던 에트나 산에 올라간 일이다. 화산에 흥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에트나 산에서 동쪽 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에트나 산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는 일곱 빛깔의 일출이라 하여, 고대에는 유명한 장관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해 여름이 끝날 무렵에야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황제는 본국 이탈리아에 돌아온 것을 제국 전역에 알리기 위해, 그것을 새긴 은화를 발행했다. 4년만의 귀국이라고는 하지만 '황제의 이탈리아 귀국' (Adventui Augusti Italiae)이라고 새긴 통화를 발행하여 그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 웃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저기 보고 다니는 것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황제의 책무도 충분히 완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그런 것까지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검투사가 7,835쌍이나 출전하는 대규모 검투시합을 개최하여, 순행에서 돌아온 것을 수도 로마의 시민들에게 알렸다. 이제 한동안은 본국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테지만, 하드리아누스가 본국에 머문 것은 겨울뿐이었다. 이듬해(126년) 봄이 되자마자 50세가 된 황제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참으로 못 말리는 양반이다. 이래서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싶지만, 그래도 이번은 순전히 일만 하는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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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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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우정기(喜雨亭記) - 소식(蘇軾) / 김도련 옮김
정자를 비(雨)로써 이름함은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옛날에 기쁜 일이 있으면 곧 그것으로 물건의 이름을 지었으니, 이는 잊지 않을 것을 나타내려 함이다. 주공(周公)은 벼를 얻고서는 그것으로 책의 이름을 지었고, 한무제(漢武帝)는 보정(寶鼎)을 얻고는 그것으로 연호(年號)의 이름을 지었고, 숙손(叔孫)은 적(敵)을 이기고 그것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 기쁨의 크고 작음은 같지 않으나 그 잊지 않음을 나타냄은 똑같다.
내가 부풍(扶風)에 부임한 다음 해에 비로소 관사를 손질하며 당(堂)의 북쪽에 정자를 짓고 못을 그 남쪽에 파고는 흐르는 물을 끌어 오고 나무를 심어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었다. 그 해 봄에 기산(岐山) 남쪽에 보리를 뿌리니 그 점괘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이윽고 한 달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백성들이 바야흐로 걱정을 하였다. 3월 을묘일 (乙卯日)에 비가 오고, 갑자일(甲子日)에 다시 비가 내렸는데 백성들은 아직도 부족하게 여겼다. 정묘일(丁卯日)에 큰 비가 내려 사흘만에야 그치니, 관리들은 서로 뜰에서 경하(慶賀)하고, 상인들은 서로 시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농부들은 서로 들에서 손뼉치며 기뻐하여, 근심하던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병든 사람들은 병이 나았는데, 내 정자가 이 때 마침 이루어졌다. 이에 나는 정자 위에서 술잔을 들어 손님들에게 권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닷새를 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닷새를 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보리 농사가 안 되었을 테지요.”
“열흘을 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열흘을 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벼농사가 안 되었을 테지요.”
“보리도 없고 벼도 없어지면 이 해는 장차 거듭 흉년이 들 것이요, 옥송(獄訟)이 크게 일어나고 도적이 더욱 들끓을 것이니, 내 여러분들과 더불어 비록 이 정자에서 한가히 놀며 즐기려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늘이 이 백성들을 버리지 안으시어 처음엔 가물다가 비를 내려주셔서 나와 여러분들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한가히 놀며 이 정자에서 즐기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비의 덕택이라, 그 또한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짓고 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하늘이 구슬을 뿌린들 추운 사람들 그것으로 옷을 마련할 수 없으며, 하늘이 옥(玉)을 뿌린들 굶주린 사람들 그것으로 곡식을 삼을 수 없네. 한 번 비가 사흘이나 온 것은 그 누구의 덕일런가? 백성들은 태수 덕분이라 하나 태수는 그렇지 않다 하고는 그 덕을 천자(天子)에게 돌렸네. 천자께서 그렇지 않노라 하시며 그 덕을 조물주에게 돌렸네. 조물주는 자기 공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태공(太空) 에게 돌리니, 태공은 아득하고 아득하여 이름할 수 없으니, 내 이로써 정자의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노라.”
<고문진보(古文眞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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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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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7장 (카스트루초 전)과 (전술론). 1/2
보잘것없는 돈에도 불구하고 역사 쓰기를 택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인 피에로가 죽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피렌체에서 메디치 정권의 입장을 오히려 호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르시니 가와의 새로운 혈연 관계, 새로운 혈연 관계, 새로운 공작령의 획득, 프랑스 앙가와의 새 결속 관계, 어머니로부터 받은 나쁜 영향, 조신들의 잘못된 조언. 이 모든 것이 위대했던 대 로렌초의 적출로서는 마지막이었던 인물에게서 피렌체적 (문화 civilta)(이말은 넓게는 문명, 문화, 좁게느 푸뮈, 세련미 등을 가리키며,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핵심어이다. 마키아벨 리가 군주론 26장에서 알프스 이북의 사람들을 야만적 barbaro이라 불렀을 때, 그가 그 반대 개념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더 srjt도 바로 이 말이다. 이는 주로 도시적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가장 가까운 말은 도시적 세련성을 가리키는 urbanita가 elf 것이고, 그 반대 개념어느 시골 농촌의 촌스러움을 지칭하는 barbarie 일 것이다-옮긴이)를 빼앗아가 버렸다. 사실 이는 피렌체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들은 때로 자유는 기꺼이 포기하기도 했으나 이 문화만은 결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로렌초는 말년에 마치 군주처럼 소수의 근신들에 둘러싸여 지냈으며, 스스로도 무소불위의 군주인양 생각했다. 그래서 대 로렌초의 뒤를 이은 진정한 계승자로, 로렌초의 행동을 내심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교황 레오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교황 레오네 10세는 대로렌초(149-1492)의 차남이며, 여기서의 로렌초는 교황의 형인 피에로의 외아들이자 레오네의 조카이다-옮긴이).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야코포 살비아티와 란프레디니 등과 같이 한때는 메디치파이자 동시에 공화국에 충실했던 시민들에게 그가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숙부인 줄리오 추기경조차도 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로렌초느 금방 땅에 묻히지 않았다. 그 전에 추기경이 피렌체로 급히 와서 도시를 손아귀에 틀어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곧바로 시정을 장악하였다. 그는 적어도 고위관리들의 복종을 받아낼 만큼은 다시 권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좀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하는 체는 하였다. 그는 행동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도록 노력했고, 남의 말을 끈기있게 들엊는 모습도 보였다. 관직은 그것을 찾는 사람들의 집요한 공세가 아니라 그 사람의 공적에 따라 나눠주었다. 그는 공금을 자신의 개인 재산만큼이나 잘 관리했기 때문에, 언제나 이 as제에 민감한 피렌체인들은 이에 깊이 감사하였다. 비록 그의 개인적 이재방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교황 레오네와는 달리 그는 잡담이나 도박, 또는 익살 같은 것을 싫어하였다. (근느 사람들의 품성을 관찰하는데 남다른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에, (...) 한가할 때면 어떤 직업을 가졌든 그 방면에 학식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다.)
이처럼 피렌체 국정의 상황이 바뀐 데다 이런 유의 인물이 교황을 대신하여 시정을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와 같은 인재가 머리가 텅 빈 로렌초 시대에서처럼 마냥 잊혀지고 내팽개쳐진 상태로 남아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레오네가 서기장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소데리니와 가깝다거나 자유 공호국에 봉직했다는 점 이상으로, 그가 로마나 프랑스의 궁정에서 자신이나 동생인 줄리아노와 맞닥끄렸을 때, 물론공직자롯의 책무에서 그랬던 것이지만, 그들에게 보인 냉랭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생아인 줄리오는 메디치 가라는 나무에 푸릇푸릇한 새순이 가득했을 동안에는 뒷전의 그늘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로마 시절 마키아벨리에 대해 그가 보인 태도는 사실 레오네의 노한 기분을 대신 표출한 것이었다. 줄리아노가 그를 임용하려는 데 대해 레오네가 반대한 일은 앞에서 살핀 대로이다(이 책 15장 261쪽을 볼 것-옮긴이). 하지만 줄리오가 피렌체의 국정을 책임지게 되자, 적어도 사소한 사안에 관해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해도 괜찮을 만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가 줄리오를 만난 것은 1520년 3월 10일께인데, 이는 베토리보다는 더 친절했던 로렌초스트로치를 비롯한 원회의 여러 친구들이 주선해 준 덕분이었다. 줄리오는 그를 친절히 맞아주었다. 필로포 스트로치는 이 모임에 대해 듣고는 자신의 형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형이 마키아벨리르 메디치 가에 소개해 주었다니 매우 기쁘군요. 그가 만약 주인의 신임만 얻을 수 있다면 그의 출세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겠지요.)
마키아벨리의 재능에 관해서는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다면 그 누구도 입댈 사람이 없었지만, 스트로치의 이 말은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은, 물론 진중함이 부족하고 의견을 냄에 있어 다소 허풍을 떠는 면이 있으며 시를 폄하하는 등 스스로의 이름을 깍아내리는 어떤 성품에도 이유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미움을 샀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었다. 이제 마침내 얼음은 깨어졌고, 그들은 아마도 그가 할 만한 무언가를 주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와 추기경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약간 뒤에 기록된 문서와 사태 발전의 추이를 통해 판단할 때, 짐작건대 추기경은 그에게 (일터에서 여전히 두들겨 만들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 또 자신이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날로 구체적 방법까지 거론되어, 서기장이 첫 (십년기) 이래 역사 서술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는 오래된 이야기로 옮아간 듯하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가 당시 쓰고 있었던 저작은 7권으로 구성된 (전술론 Arte della Guerra) (전술론이란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물론 전술, 전략이라는 현대적 용어의 협소한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군사론 전체를 포괄한다. 우너래 마키아벨 리가 붙였던 (De re militari)란 이름도 바로 이러하였다. 그래서 이 원래의 제목을 살리 수도 있겠지만, 이 저작이 저자의 승인 아래 그 생전에 간행된 것이라는 사실 이 저작은 마키아벨리의 주요 작품들 중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1521)된 유일한 것이다-옮긴이) 이었다. 이는 로렌초 스트로치가 최근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에게 헌정된 것으로, 속어로 된 책에다 라틴어 제목을 붙이느 swj자의 습관ㅇ 따라 애초에는 (군사론 De re militari)으로 명명되었다. 그에게 군사학이란 단지 정치학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민 생활에서 군사적 측면을 떼어낸 것이야말로 이탈리아 병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저작은 (군주론) 및 (리비우스 논고)와 필연적으로 보완 관계에 있으며, 그 사상과 정서에서 놀랄 만큼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1516년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원회에서 이루어진 가상적인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콜론나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뤼지 알라만니, 자노비 부온델몬티, 바티스타 ef라 팔라, 그리고 누구보다도 코지모 루첼라이 등의 인물들이다. 특히 코지모의 경우에 대해서는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저자의 애석함이 곳곳에서 잘 표출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점을 든다면, 그것은 마키아벨 리가 (전술론)에서도 역시 고전 작가들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현대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오랜 경험)을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피사 전쟁기 동안, 그리고 발렌티노와 줄리오 2세와 프랑스와 스위스와 독일에 사절로 나가 있는 동안, 언제나 자신을 이끌었던 군사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그것에 쏟아부었다. 그의 관찰은 민병대 제도의 도입에 도움을 주었고, 이는 다시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 문필가는 군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기예를 가르치려 들면서도 감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던 군주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자만 속에서 행동으로만 나타내 보이려고 했던 역할을 말로 한다고 해서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란 인물은 어떤 생각을 하건 간에 항상 놀랄 만큼의 참신성과 예견력을 보여주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도 사람인 이상 편견이나 정념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고대로부터 비친 빛줄기가 때로는 그를 밝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눈을 부시게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장차 무기의 발전 양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 될지를 미처 내다보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이 책이 씌어지던 당시 그는 그러한 무기의 효과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을 목격할 만한 경우라고는 그때로서는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마리냐도 전투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그는 이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군사학의 불변적 측면에 관한 한, (당시로서도 놀라운 저술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러할) 정도로 계속 변함없는 인정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근대적 전술의 기초를 다진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는 정치학의 기초를 놓았던 때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감연한 지성으로써 그 일을 헤쳐나갔다)는 빌라리의 정평 있는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귀기울일 만하다. 더웅ㄱ이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직관력을 발휘하여 이 책에서 전쟁과 정치 사이에 존재하는 강한 결속 관계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론을 다룬 이 책에서 (리비우스 논고) 및 (군주론)과, 그리고 지난날 자신의 경험과도 가장 긴밀히 연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기 작가로 하여금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열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국가란 반드시 스스로의 군대로 무장해야만 하며, 병사들은 폭력과 약탈과 기만을 일삼는 용병이 아니라 결코 상스럽지 않고 (신을 두려워 할 줄 알며) 조국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 않는 훌륭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그의 기본 개념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자가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입을 빌러(실제의 그는 아마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피렌체 민병대를, 바로 그들만의 민병대를 칭송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는 (그 결과가 언제나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현인들이 항상 반대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문제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곱색보라)고 응답한다. 이 문구는 1권 거의 첫머리에 나오는데, 책의 말미에서도 말이 거의 바뀜이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끝부분은 (군주론)의 마지막 장과 비교해서도 그 열정과 설득력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노 콜론나는 이야기를 듣는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인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용맹심을 되살려내라고 외친다. (시와 그림과 조각에서 목격했듯이, 이 땅이야말로 죽은 것을 부활시키기 위해 탄생한 곳이 아니던가?)
마키아벨리가 이 저작을 다듬어가고 있을 때, 새로운 메디치 가의 호의 덕분으로 그의 미래도 밝아오고 있었다. 4월 26일 친구이자 원회에서 가까운 사이였던 바티스타 델라 팔라가 로마에서 좋은 소식을 한 보따리 보내왔다. 그는 오랫동안 메딫 가에 봉사해 온 이력에다 굉장히 값나가는 흑담비 모피를 선물한 덕분으로 교황궁과 매우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지적인 모임을 좋아하는 교황에게 자신들의 원회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 모두가 마키아벨리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다는 말을 전한 적이 있었다. 또 그는 (만드라골라)에 관해서도 후한 평을 했는데, 이는 당시 이미 교황청에서 상연될 예정으로 있었다. 레오네란 인물은 (군주론)보다는 봄 질척거리는 희극 같은 것에 더 쉽사리 넘어가는 그런 유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도 농담은 즐기고 쓴 말은 뱉어가며 연극을 보았으리라. 그 교활한 조신은 먼저 교황의 기분을 맞춘 다음, (저술이나 또는 다른 일에 대한 보수)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자신의 후의를 표시한다는 말을 그로 하여금 메디치 추기경에 서 전하도록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이 편지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좋은 소식은 이것으로다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언젠가 비삐에나 추기경의 칼란드로에게 메쎄르 니차의 찬사를 전한 적이 있었는데(칼란드로와 니차는 각각 비삐에나의 희극 (라 칼란드리아 La Calandria)와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의 주요 등장 인물. 결국 마키아벨리가 비빠에나의 작품에 대해 후한 평을 보냈다는 뜻. 두 사람의 작품은 플라우투스나 테렌티우스 같은 고전 작가를 모방한 르네상스기의 이른바 (commedia eurdita)에 속하는 대표적인 보기이다-옮긴이), 이제 그에 대한 (정중한 답례)를 받게 되었다. 더불어 살비아티 추기경도 호의의 말을 전해 왔다. 그리고 RMx으로, 그럴싸한 말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나토 델 코르노는 그토록 애를 먹이던 500두카토를 되돌려받게 되었고, 그 일부는 돈을 떼이지 않도록 애써준 친구에게로 갈것이었다.
물론, 글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저술에 대한 보수)를 받아 그 덕분으로 조용히 공부에 파묻히든지 아니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것을 바라마지 않겠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이 그보다 더 바랐던 것은 오히려 자신이 한때 봉직했던 자리와 그 때문에 겪었던 온갖 수고로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메디치가로서는 저술을 맡기는 쪽이 관직 임명의 문제를 비켜가느 swhg은 구실이 되었으리라. 바티스타 델라 팔라의 편지에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언급으로 미루어보아, 앞서 얘기했듯이 이미 추기경과의 첫 만남에서 마키아벨리에게 저술을 맡기는 방법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 전에 (그늘 친구들) (원회 단골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을 빌리자면)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당분간 그 가엾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했다. 그 성격상 토마토 익는 가을이나 되어서야 나올 보수를 기다리면서, 그는 미켈레 귀니지의 대파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루카로 가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이 사건에서 피렌체 상인들이 여럿 관련되어 큰 손해를 입었는데, 그 중에는 교황의 혈족인 살비아티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 채권자들을 대변하여 상거래로 인한 부채가 노름빚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파산의 규모 등 관련 사항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제노바에서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법률가나 회계사의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그는 7월 9일 길을 떠났다. 당시 그는 사인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채권의 규모와 그 채권자들의 면면이 공화국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정도였기 때문에, 추기경 스스로가 그 파견 문제를 결정한 뒤, 루카의 정무위원회에 직접 추천서를 써서 그 위상을 높여주려 할 정도였다. 7일, 정무위원회는 이 편지를 미리 보냈다. 서기장이 이 문제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루카와 관련하여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첫째는 조페소 문제였고, 두 번째는 그곳에 피신하고 있으면서 말썽을 일으키던 피사 대학 학생들 문제였다. 이 사소하고도 귀찮은 문제들에 대한 계획과 편지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추기경이 학생 문제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남아 있는데, 그 표현은 친절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의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피렌체의 정무위원회가 루카의 정무위원회 앞으로 쓴 편지도 한 통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 시민과 상인들은(...) 두 달 전 니콜로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을 그곳으로 보낸 바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첫머리에 실려 있다. 정무위원호는 그가 공직에 있었을 당시 같았으면 (고귀하고 지체 높은 nobile e spettabile)이란 말로 지칭될 서기장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제 단지 산타 지타의 정무관들과 파산한 상인의 처리 문제를 협의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품상 RmsrlfhTJ 모든 일에 잘 적응하여, 어디에서건 자신의 재능에 값하는 일을 찾아낼 사람이었다. 정치 이론가이자 관찰자 외엔 다른 사람일 수 없었던 그의 품성이, 루카 공화국에 머물면서 그곳 정부를 연구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쓰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고, 그는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중에 몇 달이 흘러갔고, 그는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중에 몇 달이 흘러갔고, 그는 루카에서의 긴 시간적 여유 속에서 또한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 전)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그것을 역사서로 생각하고자 한 후세의 현학자들간에는 하나의 커다란 스캔들이 되었다. 그들은 차라리 정치 저술이거나 나아가 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할 그 책에서 역사적 오류 또는 오히려 허구라고 불러야 좋을 사실들을 지적해 내기에 바빴던 것이다! 결국에는 그 작품의 본질을 인식해 냈던 명민한 현대의 비평가들조차도 그것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제는 마키아벨 리가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가 후보에 오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힘차고도 아름다운 산문은 그의 후원자들에 대해서는 견본인 셈이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역사 서술의 문체를 시험하는 것이었으리라. 이는 결코 단순한 추측이 아니며 문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것을 (역사서의 모험)으로 생각하며 보냈고, 친구들 역시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였다. 시험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견본은 나름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는 니콜로 테그리미의 (카스트루치 안텔미넬리 전 Castruccii Antelminelli vita)을 15세기 판 혹은 필사본으로 읽으면서, 이로부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colloqui) (당시 루카에서의 (colloqui)란 말은 피렌체에서는 (pratiche)에 해당된다)를 골라내고는 그것에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 Diodorus Siculus(기원전 60년경에 활동하다가 30년에 죽은 그리스 역사가. 신화 시대로부터 키케로 시대까지의 40권짜리 지중해 세계의 역사를 씀. 비판적 면모는 보이지 않으나, 그가 사용한 사료들은 귀중한 가치가 있음-옮긴이)와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Diogenes Laertius(기원후 3세기초에 살았던 그리스 문필가. 철학자들의 사상을 학파에 의거하여 쓴(철학자들의 생애 Vitae Philosopforum)가 있음. 뚜렷한 역사관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며, 주로 철학자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쉽게 풀어쓴 대중적 저술이 특징임-옮긴이)를 전범으로 하여 고전 고대의 풍미를 가하였다.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고전적 특에 갇혀서 자신이 애호하는 정치, 군사 개념들을 사용하여 다시 한번 이상적인 군주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는 마키아벨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와 시를 역사에 부가하므로써 이 소품은 더 큰 (역사 Istorie)를 위한 (조그만 모형)이 될 것이었다.
(카스트루초 전)은 8월이 가기 전에 완성되었다. 29일, 그는 자신이 책을 헌정한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뤼지 알라만니에게 그 작품을 보냈다. 자노비는 9월 6일자 답장에다 그 책에 대한 자신과 다른 (그늘 친구들)의 평을 담아 보냈다. 그를 비롯하여 뤼지, 디아체티노, 귀데티,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치 등이 다함께 그 책을 읽고 검토한 결과, 그것이 (훌륭히 잘씌워진 글)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다만 약간의 사소한 부분들을 지적하면서 (그냥 두어도 나쁘지 않겠지만 조금 손보면 더 나아질 여지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말미의 경구들이 그 보기인데, 그것은 수가 너무 많은 듯이 보이기 때문에 efms 책에서 따온 것들의(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부는 차라리 빼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야기는 주로 언어와 문체에 관한 세부적인 문제들에 집중되었다. 야코포 나르디,바티스타 델라 팔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책을 읽고는 모두가 좋아하며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
자노비가 같은 편지에서 그렇게 불렀듯이, 마키아벨리가 이 (역사서의 모형)으로 호평을 받자,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제는 그가 견본적인 습작에서 진짜 역사서로 옮아갈 때가 되었다는 의견이 늘어났다. 자노비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자네가 하루바삐 이 역사서를 쓰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고 믿네.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자네가 그렇게 햊었으면 하네.) 따라서 근 마키아벨리에게 빨리 돌아오도록 재촉하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그들은 그가 보고 싶었고, 게다가 특히 그에게 (자네도 알 만한 우리의 계획을) 말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이라는 게 바로 피렌체사의 서술을 그에게 맡기는 일이었으리라.
추기경의 마음이 이미 우호적ㅇ로 돌아선 데다가 그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애써준 덕분으로, 일은 이제 거의 다 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호의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9월 8일에서 10일 사이 어느 때쯤에 피렌체로 돌아왔다. 루카에서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방향은 좋은 결과를 얻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피렌체 대학이 자신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그 대학의 장은 다름아닌 메디치 추기경 자신이었고 실무 쪽은 마키아벨리의 처남인 프란체스코 델 네로가 맡고 있었다. 세세한 계약 조건은 아직 미정이었으므로, 이 미래의 역사가는 델 네로에게 손수 이렇게 써주었다.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다. 그는 연봉 얼마얼마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얼마 얼마의 햇수 동안 고용된다. 그의 의무는 피렌체 국과 그 도시에 의해 행해진 일들의 연대기 또는 것이다. 그 시기는 그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는 때로 하고, 사용 언어도 라틴어로 할 것인지 토스카나어로 할 것인지 그에게 맡긴다.
그러나 대학 당국의 11월 8일자 결정에 따른 실제의 계약 내용은 이와 달랐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1월 1일을 시작으로 향후 2년 간 대학에 고용되었다. 그 첫해의 계약은 확정된 상태였지만 두번째 해의 경우에는 재계약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피렌체의 연대기나 역사, 또는 그 외 다른 일 중에서)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보수는 스투디오화 fiorini di studio(대학 당국이 지급하는 피오리노 금화-옮긴이)로 100피오리노였다. 이 화폐는 (촉진이 불가능한) 재래식 피오리노화로, 당시 통용되던 피오리노 봉인금화처럼 평가 절하된 화폐 종류였다. 따라서 고용에 대한 보수는 사실상 57피오리노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는 그가 정무위원회 서기장으로서 한창 명성을 날릴 때쯤에 받던 액수의 반을 약간 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소용 닿는 데가 있었다. 그는 마침내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일에는 명예가 따라오고 있었다. 과거에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가를 역임한 면면들 속에는 레오나르도 아레티노(레오나르도 브루니를 말함. 그가 아레초 출신인 데서 나온 이름-옮긴이), 포초, 스칼라가 들어 있었는데, 이 모두가 위대한 인물들로 정무위원회의 제1서기장을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서기장직으로 거의 돌아간 듯한, 혹은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낸 듯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한 가닥 서광이 비쳤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추기경이 몸소 그 일을 맡겼다는 사실이 희망을 더 밝게 해주는 듯이 보였다. 추기경은 그를 고용하자, (그 외 다른 일)도 맡길 수 있다는 계약 조건에 따라 교황에게 보일 글 하나를 주문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렌초 사후의 피렌체 국정에 대한 논고 Discorso delle cose fiorentine dopo la morte di Lorenzo) (이하 (피렌체 논고)로 줄여 씀)이다. 당시 교황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자신과 추기경이라는 두 명의 성직자 손에 놓여 있던 피렌체의 국정을 안정시키는 방책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 레오네가 추기경의 입과 베토리의 글을 통해 그의 자문을 구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마키아벨리에게 결코 좋은 것이 될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공화국의 봉급을 받는 입장에서 자신에 대한 요청에 직접 응대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요청이란 게 스스로도 그토록 다시 쓰고 싶어했던 피렌체 국정에 관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피렌체가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피렌체 논고)에서 교황에게 그럴 듯한 말보다는 자신의 나라에 유익한 이야기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의 견해는 당시의 여론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다. 그의 얘기는, 예컨대 종신 또는 장기간의 임기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는 곤팔로니에레를 제외하고는 옛부터 내려오던 통치 방식을 모두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장된 태도로 말미암아 그의 제안은 아주 나쁜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쩐지 현실성이 없고 좋지 않은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피렌체 논고)에는 보기에 따라 좋은 듯도 하고 나쁜 듯도 한 내용도 끼어 있었는데, 그것은 교황과 추기경이 목숨을 다한 뒤에는 피렌체를 다시 자유롭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이는 사실 넓은 견지에서 나온 조언으로, 레오네에게는 그리 기분 나쁜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의 가문 안에서 적법한 계승자를 찾을 수 없는 마당에 그로서는 한번 관대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반면 교황의 인척과 그의 충실한 추종자들에게는 이러한 조언이 매우 듣기 싫은 것이었으리라.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명예와 이익이 깡그리 훼손될 것이고, 나아가 평시민의 정권의 복수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음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 학식 있는 문학사가는, 그같이 고귀한 생각을 접할 때 (우리는 (군주론)의 저자를 새삼 우러러보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하겠다. 그러한 생각은 그의 드높은 이상을 일관되게 말해 줄 따름이라고. 우리는 (군주론)에 담긴 고결한 생각들뿐만 아니라 그 시적 장중함을 (피렌체 논고) 마무리 부분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다시 음미하게 된다.
믿건대,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는 그의 조국이 자연스럽게 내려주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자 동시에 신까지도 기쁘게 하는 일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나아가 공화국과 왕국을 법과 제도로써 혁신하는 사람만큼 그 행동에서 더 칭송받을 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거의 신성을 지녔던 인물들 다음으로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이들입니다. (...) 그러므로 하늘은 그 누구에게도 이들보다 더 나은 재능을 내리지 않았고, 더 영광된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신이 성하의 가문과 성하께 내리신 그 넘치는 행운들 중에서도,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하의 고명을 스스로 영원케 하고 성하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영광까지도 뛰어넘게 만들 힘과 기회를 부여하는 최고의 행운인 것입니다... (피렌체 논고)는 로마로 보내졌으나, 당시 추기경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1520년인 그 해 11월 6일 피렌체를 떠난 상태였다. 반면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레오네의 모호한 게획은 점점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의 죽음으로 공백 상태에 있었던 제국이 결국 에스파냐의 칼에게로 넘어갔고, 이는 여태까지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 사이 마키아벨리의 명성은 이 (피렌체 논고)보다는 최근의 다른 저술들과 장차 나올 역사서 덕분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출세를 보장받은 사람)으로 비쳤다. 또 다른 미래의 역사가이자 그의 친구인 필리포 데 네를리는 평소의 시금털털한 농담 없이 그에게서는 보기 드문 진지함을 가지고 자신이 (카스트루초 전)과 (전술론)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다는 편지를 11월 17일자로 로마에서 써 보냈다. (전술론)은 메디치 추기경도 기다리는 바였고, 그래서 네를리는 그에게 그것을 주기로 약속했던 자노비 부온델몬티의 말만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그가 책을 보내지 않는다면 난 전하께 꼼짝없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네. 그러니 제발 자네 둘 사이에 끼어 나 죽는 꼴 보지 않도록 해주게나.)
마치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재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루크레치아 살비아티는 궁정 내의 문인들 중 하나로부터 (알렉산드로 대왕 전) 한 부를 증정 받았는데, 네를 리가 그녀에게 읽어준 바 있던 퀸투스 루푸스의 같은 인물에 대한 전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이를 마키아벨리에게 맡겨 새로 고쳐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이 묘하게 꼬인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네를리의 공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비난은 그 혼자 뒤집어 썼다. 15일에는 콘테시나 리돌피가, 19일에는 마딸레나 치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제 마돈나 루크레치아만이 교황의 여동생들 중 유일한 혈육으로 남게 되었다(레오네 10세의 아버지인 대 로렌초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중 첫째딸 루크레치아 메디치는 야코포 살비아티와 결혼했고, 콘테시나 메디치는 피에로 리돌피와, 마딸레나 메디치는 프란체스케토 치보와 결혼했다. 치보는 교황 인노첸초 8세의 사생아였다-옮긴이). 레오네가 교황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토록 환희와 드높은 희망이 넘치던 그 가문이 불과 4년만에 혈족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행운에 만족하면서, 장차의 더 나은 삶에 희망을 걸었다. 생질은 베르나치에게 보낸 편지의 분위기도 마침내 환하게 바뀌었다. 피에로 소데리니가 그에게 보낸 1521년 4월 13일자 편지가 그가 새로이 되찾은 마음의 평화를 흔들어놓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전에 소대리니는 그에게 아드리아해 연안의 소국 라구사 공화국의 서기장 자리를 제의했던 적이 있었고 그는 이를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제의를 해왔다. 전임 곤팔로니에레는 당시 서기장을 물색하고 있던 프로스페로 콜론나에게 피렌체 공화국의 전임 서기장을 천거한 것이다. 로마의 대귀족이자 용병 대장이었던 그는 (전술론)에서 자신의 사촌 파브리치오의 명예를 드높인 저자의 명성에 이끌려 그 제의를 매우 환영하면서 그 일의 성사 여부를 소데리니에게 일임하였다. 그에 대한 보수는 금화 200두카토에다 비용을 따로 얹어주는 것으로, 실로 대단한 액수였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귀띔하기를, 만일 조건이 마음에 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즉시 말에 올라 피렌체에서 그가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기 전에 곧바로 콜론나에게로 가라고 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이 제의가 (그곳에 남아 보잘 것 없는 돈으로 역사책을 쓰고 있느니보다 휠씬 낫다)고 하면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귄유하였다.
금화 200두카토에다 비용은 따로라니! 공화국의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봉급도 그만큼은 되지 못했다. 마키아벨 리가 역사를 쓰는 대가로 받는 액수도 겨우 그 사분의 일이나 오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제의를 한순간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을 수락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명예로운 공직을 버리고 외국 군주의 궁정에서 봉직함을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로서는 궁정의 조신으로 5피오리노를 받는 쪽보다는 피렌체에서 자유를 누리며 단 1피오리노를 받는 쪽이 나았을 법하다. 그가 콜론나에게로 간다면, 이는 곧 대학 당국이나 원회 친구들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친구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고, 조국 피렌체는 물론 스스로와 애증을 함께 해온 알베르가초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며, 마침내 그가 (출세가도)로 접어들 무렵, 그리고 계약상의 (그외 다른 일)이라는 문구가 말해 주는 바처럼 공화국으로부터 무언가 일 부스러기를 (아마도 사절의 직이리라!) 맡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이제 막 가지려는 참에, 그 (메디치 군주들)과 간계를 끊어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콜론나의 제의는 정말 탐나는 것이었지만, 마키아벨리는 단 한시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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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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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5. 지헤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돈
수입과 지출
사람은 누구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듯이 천한 일이라도 열심히 벌어서 떳떳하게 살면 된다. 성경의 잠언은, ‘지혜로운 사람은 앞날을 위해서 저축하나 미련한 사람은 닥치는 대로 써버린다’고 전하고 있다. 돈을 힘들여서 번 사람은 돈을 무척 아껴 쓴다. 지갑을 꺼낼 때, 물건을 살 때에도 신중을 기하고 일시적인 기분으로 돈을 쓰지 않는다. 돈을 버는대로 쓰게 되면 국가나 가정 모두 적자에 허덕이고 날마다 외상이요, 빚에 쪼들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생활하여야 한다. 쓸 재산이 없는 상태에서 호화생활을 유지하려면 부정한 방법을 저지를 수 밖에 없다. 예기는 ‘집안 살림은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알맞게 해야 한다’고 밝힌다. 예는 사치하기보다 검소한 것이다. 분에 넘치는 생활은 예의에 벗어나는 허례라는 것이다. ‘검약하는 사람은 잃는 것이 적다’고 논어는 전한다. 언행이 신중하고 물질을 검약하면 실패없는 삶을 산다. 인생을 헛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수입의 한도에서 생활하라. (Keep no more cats than will catch mice.)
빚진 자의 마음
사랑의 빚을 지는 것 말고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 이는 성경의 로마서가 전하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만사 이처럼 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렇게 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에게 돈을 빌려 쓰고 제날짜에 갚지 못하면 빚진 죄인이 된다. 채무자는 채권자 앞에 서면 죽어가는 소리로 간청하지만 채권자는 거만하게 큰 소리로 대답한다. 채권자는 채무자보다 더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다. 채권자는 받을 빛을 ‘기름 먹은 종이’ 위에 써놓기 때문에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빚을 지게 되면 자기의 생계를 남에게 맡기는 것처럼 자유스러워질 수가 없다. 오죽하면 빚이 없는 자는 가진 것이 없더라도 부자라고 하였을까.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 우리는 할부빚, 카드빚, 은행빚 등에 쪼들린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러한 ‘빚’들의 ‘종’이 되어 있다. 남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은 슬픔을 자초하는 행위이다. 빚을 지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와 같이 잠깐 동안은 따뜻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더욱 상태를 악화시킨다. 마약과 같은 빚, 쓰면 쓸수록 중독이 되어 회생 불능이 된다. 빚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돈 빌리러 가는 자의 발걸음은 항상 무겁다. (He that goes a-borrowing, goes a-sorrowing.)
얼마 전 우리를 경악시켰던 박초롱초롱빛나리 양 유괴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전모 여인도 범행도익가 카드빚 400만원을 갚기 위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빚을 쓰는 일은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빚 갚을 날
마음은 기운을 거느리고, 기운은 몸을 거느린다고 맹자는 말했다. 몸의 모든 부분은 마음에 의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그 마음은 돈 지갑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돈이 없으면 마음이 허전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낯설고 물설은 타향 땅에 ‘땡전 한 닢’ 없어서 있어 보라.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마음이 돈 지갑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남에게 빚을 진 사람은 정한 기일 내에 갚지 못하면 죄인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빚진 사람은 빌려준 사람의 종이 된다’고 성경은 말하였다. 그런데, 빚을 쓸 때는 언제 갚겠다는 기한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 갚겠다는 기약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가 선뜻 돈을 빌려주겠느냐마는, 갚을 돈이 준비되기까지는 언제 갚겠다는 말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왜냐하면 갚을 날짜를 정하고 그 날짜에 갚지 못하면, 빚은 빚대로 졸리고 거짓말쟁이도 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졸릴 때 졸리더라도 거짓말쟁이는 되지 말라는 말이다. 솔로몬은 그래서 “네가 약속한 것을 이행하라. 약속하고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약속한 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지키고, 못 지킬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그래도 빚쟁이들이 돈을 갚을 날짜를 정하라고 ‘피를 말리듯’이 조르면, ‘참다운 신의는 약속이나 맹세같은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는 예기의 말을 전해주라. 아무리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빚 갚을 날을 정하지 말라.(Speak not of my debts unless you mean to pay them.)
빚을 갚으면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돈을 꾸거나 꿔주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에게 돈을 빌렸다가 정한 날짜에 갚지 못하면 ‘빚 쓴 죄인’이 되어 채권자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한다. 그러다가 빚을 갚게 되면 앓던 이가 빠지듯, 꽉 막혀 있던 하수구가 뚫려 허드렛물이 쫙 빠져나가듯,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할 값어치가 없다 하듯, ‘빚쟁이’에게 시달려 보지 못한 사람과 인생을 말해 봐야 구두 신고 가려운 발을 긁는 격이다. 도무지 시원하고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채귀
몹시 조르는 빚쟁이를 채귀라고 한다. 이런 말을 채권자가 들으면 몹시 원통해하고 분하게 여긴다. 집 사는 데 보태려고, 아이들 교육비로 쓰려고, 남편 보약 사주려고 한푼 두푼 모은 ‘깨소금’같고 ‘구렁이 알’같은내 돈, 금방 쓰고 돌려준다는 말만 믿고 빌려주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 갚아주지 않는다. 이러다 떼이는 건 아닐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심사는 헤아려 주지 못할망정, 빚 독촉 몇 번 했다고 ‘채귀’라니, 바늘로 이마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악질 유태인 ‘샤일록’같단 말인가?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채무자의 입장도 보자. ‘돈’을 집에 쌓아놓고, 사람의 피를 말리는 채귀에게 시달리는 어리석은 짓을 할 사람이 있을까? 차라리 마른 나무를 짜내어 물을 얻는 것이 쉽지, 아무것 없는 가난한 사람을 독책하여 없는 것을 만들어 내라면 무엇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빚을 받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채무자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그가 정신을 차리게 하여, 빠른 시일내에 벌어 갚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늘나라식 빚 청산
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나라식 빚 계산 방식을 보자. 빚 계산이 시작되자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왕은 빈털터리인 종에게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갚도록 명령했다. 종은 왕 앞에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갚아드리겠습니다”며 울면서 간청했다. 종의 눈물어린 하소연에 마음이 엷어진 왕은 그를 동정하여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다. 뛸 듯이 기뻐한 종은 서둘러 이 소식을 마누라에게 알리려고 집으로 뛰어가다가 자신에게 백 달란트를 빚진 이웃 마을의 다른 종을 만났다. 그는 대뜸 “요놈 잘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네 놈의 행방이 묘연하여 미칠 지경이었는데 잘 만났다. 내 돈 내놔라!”하고 악을 쓰면서 그의 멱살을 붙들고 늘어졌다. 종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그에게 조금만 기다려주면 갚겠다고 했으나 그는 들은 체도 않고 그를 끌어다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옆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다른 종이 그가 하는 짓이 몹시 괘씸하여 왕에게 가서 이 사실을 이실직고하였다. 화가 몹시 난 왕은 그 종을 다시 불러 “네 이놈, 나는 네가 눈물로 간청하기에 너의 빚을 모두 면제해 주었다.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하고 호통쳤다. 왕은 그를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명령하였다.
사랑의 빚
물질적인 빚을 진 자에게 그 빚을 ‘면제’를 해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정신적인 빚, 즉 남을 미워하고 중상하고 모략한 빚은 얼마든지 면제해 줄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일에 너무 인색하다. 이러한 ‘빚’청산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진심으로 주위 사람을 용서하여 주고 또 용서를 받을 일이 있으면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만 달란트 빚진 종과 같이 감옥에서 가슴을 치고 이를 갈면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빚을 갚으면 앓던 이가 빠진 것같이 시원하다. 빚을 진 사람은 노예와 같고 자유스러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빚을 갚으면 앓던 이 빠진 것 같이 시원하다. (Out of debt, out of d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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