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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3호 - 2024.10.02. 수요일(음력 : 8.30.)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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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란 있는 법. 그러나 그들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힘껏 뛴 사람들. - 바브 잉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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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와 교양
얼마 전 학생들이 표준어를 주제로 발표 수업을 하였다. 학생들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 사정 원칙을 소개하면서, ‘표준어를 쓰지 않으면 교양이 없는 사람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학생들이 조사한 바로는 그 정의는 ‘표준어를 못 쓰면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표준어 규정의 해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추론에 도달하게 된다. 표준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창원 지역 학생들에게는 꽤 불만스러운 것이다. 학생들은 표준어를 잘 알기는 하지만 자신이 표준어 화자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더욱이 부모, 친척 등 주위 사람들은 강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으로 말한다. 그러니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표준어 사정의 기준일 뿐이다. 서울말이라고 해도 나이, 성별, 학력 수준, 거주 기간 등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어떤 서울말로 할 것인지 기준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정했든, 표준어의 본질은 온 국민이 공통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기로 정한 공용어다. 즉 ‘공통적인 말’이지, ‘교양 있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 공통적인 말을 정하기 위하여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말을 골랐을 뿐이다.
물론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방언을 쓰면 교양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평소에 방언을 쓰더라도 필요한 경우에 표준어를 쓸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래야만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지역 방언을 쓰는 사람들로서는 오해할 만한 여지가 크다. 다른 식으로 표준어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는 없을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여간(如干)과 심상(尋常)
우리말 중에는 부정을 나타내는 ‘아니다, 없다, 못하다’ 등의 표현과 함께 쓰이는 말들이 많이 있다. 먼저 ‘여간(如干)’은 그 상태가 보통으로 보아 넘길 만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로서 ‘보통으로’ ‘어지간하게’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잘하다’를 강조하고자 할 때는 ‘여간 잘한다.’가 아니라 ‘여간 잘하지 않는다.’로 써야 한다. ‘여간 잘하지 않는다.’는 보통으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이상으로 매우 잘한다는 뜻이다.
‘여간’처럼 항상 부정어와 어울리는 부사로는 ‘별로’ ‘절대로’ ‘도저히’ 등이 있다. 그래서 “겨울을 별로 싫어해요”는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로 고쳐 말해야 한다. 부사뿐만 아니라 형용사 중에서도 부정어와 어울리는 말들이 있는데, ‘심상하다’ ‘대수롭다’ ‘칠칠하다’ 등이 그것이다. ‘심상하다’에서 ‘심상(尋常)’은 고대 중국에서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쓰이던 말인데, 심(尋)은 ‘여덟 자’를 상(常)은 ‘열여섯 자’를 뜻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그래서 ‘심상하다’는 ‘중요하지 않고 예사롭다’는 뜻의 형용사인데, 주로 ‘심상치 않다’의 형태로 쓰여 ‘예사롭지 않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대수롭다’는 ‘대단한 것’을 말하는 명사 ‘대수’에 접미사 ‘-롭다’가 결합해 ‘중요하게 여길 만하다’를 뜻하는데, 주로 ‘대수롭지 않다’의 형태로 쓰인다. ‘칠칠하다’는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는 뜻인데, 역시 부정어와 어울려 ‘칠칠하지 못하다’ ‘칠칠치 못하다’의 형태로 사용된다. 이외에 ‘안절부절못하다’ ‘주책없다’ 등의 표현도 부정어와 결합해 사용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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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2 - 천상병
그러노라고
뭐라고 하루를 지껄이다가,
잠잔다.
바다의 침묵, 나는 잠잔다.
아들이 늙은 아버지 편지를 받듯이
꿈을 꾼다.
바로 그날 하루에 말한 모든 말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의 외마디 소리와
서로 안으며, 사랑했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 꿈속에서
하루의 언어를 위해, 나는 노래한다.
나의 노래여, 나의 노래여,
슬픔을 대신하여, 나의 노래는 밤에 잠잔다.
∼∼∼∼∼∼∼∼∼∼∼∼∼∼~~~~~~~~~~~~~~~~~~~~~~~~~~~~~~~~
꽃과 벗 - 정지용
석벽 깎아지른
안돌이 지돌이,
한나잘 기고 돌았기
이제 다시 아슬아슬 하고나.
일곱 걸음 안에
벗은, 호흡이 모자라
바위 잡고 쉬며 쉬며 오를 제,
산꽃을 따,
나의 머리며 옷깃을 꾸미기에,
오히려 바뻤다.
나는 번인처럼 붉은 꽃을 쓰고,
약하야 다시 위엄스런 벗을
산길에 따르기 한결 즐거웠다.
새소리 끊인 곳,
흰돌 이마에 회돌아 서는 다람쥐 꼬리로
가을이 짙음을 보았고,
가까운듯 폭포가 하잔히 울고.
멩아리 소리 속에
돌아져 오는
벗의 부름이 더욱 고았다.
삽시 엄습해 오는
비ㅅ낯을 피하야,
김승이 버리고 간 석굴을 찿어들어,
우리는 떨며 주림을 의논하였다.
백화 가지 건너
짙푸르러 찡그린 먼 물이 오르자,
꼬아리같이 붉은 해가 잠기고,
이제 별과 꽃 사이
길이 끊어진 곳에
불을 피고 누웠다.
낙타털 케트에
구기인 채
벗은 이내 나비같이 잠들고,
높이 구름 우에 올라,
나릇이 잡힌 벗이 도로혀
안해같이 여쁘기에,
눈 뜨고 지키기 싫지 않었다.
~~~~~~~~~~~~~~~~~~~~~~~~~~~~~~~~~~~~~~~~~~~~~~~~~
序詩(서시) - 김수영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는
전란에 시달린 이십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혁명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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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연가 - 이해인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날으는
한 마리 순한 나비인 것을
가볍게 춤추는 나에게도
슬픔의 노란 가루가
남몰래 묻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눈멀 듯 부신 햇살에
차라리 날개를 접고 싶은
황홀한 은총으로 살아온 나날
빛나는 하늘이
훨훨 날으는
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가난한 마음임을 가르치는
풀잎들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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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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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22.가정교육에 좋지 못한 것은 서슴없이 거절한다
초콜릿은 주지 마세요
자녀들에 대한 모든 책임은 부모가 진다. 나 또한 우리 아이들의 가정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가정교육에 대해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의 지침은, 부모이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딸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초콜릿 같은 단 것을 절대 주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 한 분이 초콜릿을 가지고 와서는 딸애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아주머니는 선의의 인사 표시를 한 것이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애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는 내가 선택합니다. 더구나 단 것이나 자극성 있는 음식은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것쯤은 자녀를 키우는 아주머니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초콜릿은 주지 말았으면 합니다."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이런 태도는 대단한 실례일 뿐만 아니라 냉정한 인상을 주는 말이 되겠지만, 유태인들에겐 당연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위와 같은 경우는 어느 때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는 일인만큼, 그때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가정교육'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키우셨고, 내 딸아이도 어머니가 된다면 틀림없이 내가 한 대로 따를 것이다. 이런 행동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대개 자기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무엇을 하면 되고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준을 어른인 부모가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부모가 진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들은 부모가 세워놓은 기준에 의하여 심신이 고르게 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의 간섭을 받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쪽을 택하게 마련이다. 어린이들은 더 더욱 그렇다. 만약 부모가 '가정교육'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면 자녀들은 가정교육보다 엄격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 그쪽으로 따라가게 될 것이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은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기도 쉽고, 즐거운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정교육을 시키는 데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남의 간섭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루하루 들인 정성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빗나간 자녀들을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여태까지 투자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더구나 자녀의 정신적인 성장은 정지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자녀들의 앞날에도 큰 손해를 끼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녀들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남의 간섭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자녀들은 의지가 약한 어린이로 성장할 위험성이 많아진다. 유태인은 남들이 완고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심리적인 거점이 되는 동시에 신념의 중요성을 심어주는 대단히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남의 간섭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의 성장과정의 지침은 부모이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23.조상의 이름을 통해 '가족의 맥'을 일깨워준다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유태인 이름
유태인을 만나거나 유태인과 관계된 책들을 읽다보면, 사람들 이름 중 첫머리에 야곱, 아브라함, 사무엘, 다윗, 이삭 등 유태인 조상들의 이름을 붙인 독특한 이름이 많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성경이나 유태인의 전통에서 따온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우리 집 큰딸아이의 이름 '아비가일'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다윗왕의 첫째 부인의 이름을 딴 것이며, 또 둘째 딸아이 '타마르'와 장남 '오난'도 모두 성서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더욱이 유태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등 친족의 이름을 자녀들 이름에 붙여주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이는 가족의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자녀들에게 자가시키기 위함이고, 또한 유태인이 가족의 전통에 충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거 수천 년에 걸쳐 몇 만 명, 몇 천 명의 타마르나 이삭, 다윗 등의 동명이인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친구 마잘 토케이어의 남편, 즉 앞에서 잠깐 소개한 적이 있는 마빈 역시 그의 외삼촌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외삼촌은 헝가리의 육군병사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태인들은 죽은 조상을 기억하기 위한 이름을 짓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죽은 조상의 이름만을 따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토케이어 부부의 장남 아미엘은 마잘의 부친, 즉 아미엘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 마잘에 따르면, 장녀인 사라가 태어난 지 2주일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이름을 짓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잘의 시아버지와 친아버지의 이름이 우연하게도 동명이었으므로 장남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고는, 아미엘 이란 이름을 짓고 싶다고 했더니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명예로운 일이다'라며 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유태인은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들이 성장하면 그들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등 가족의 일체감을 심어주며, 또 그 이름을 근거로 해서 성경이나 이스라엘의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한다. 얼핏 생각해도 자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졌던 조상이나 위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린이들은 그만큼 자기 조상에 대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러시아 혁명사>의 저자인 아이자크 도이처는, 탈무드 학자로서 엄격한 유태교도였던 증조부에게서 '아이자크'라는 이름을 이어받았고,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지크문트'는 전설에 나오는 영웅 이름이다. 한편, 지난날 일본에서는 아버지의 이름 중에서 한 글자만을 자녀 이름에 붙여주었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런 전통도 사라졌다고 한다. 반면 그때 그때의 유행에 좌우되어, 황태자가 성혼하던 해에는 황태자비의 이름인 미치코란 이름의 신생아가,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 있을 땐 그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을 본뜬 신생아가 급증했다고 하니, 유태인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자녀들의 이름짓기는 자녀들의 교육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지, 결코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행이란 물같이 흘러가며 변하기도 쉽기 때문에, 어린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될 무렵이면 유행하던 시절에 빛을 보던 이름도 그 빛을 잃고 말아, 자녀들이 '내 이름은 왜 이렇게 고리타분해요?'라고 따진다면 그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우리 유태인들은 가정의 전통을 떳떳하게 자녀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이름도 언젠가는 손자나 증손자의 이름으로 다시 불려지게 될 것이므로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친족의 이름을 자녀들 이름에 붙여주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는데, 이는 가족의 맥은 물론,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24.아버지의 휴일은 자녀교육에 꼭 필요하다.
안식일은 엄격하게 지킨다.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와 자녀간에 대화 단절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비단 일본을 포함한 동양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아버지가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하루 평균 3분이라고 한다. '3분간 기다리는 거야'라는 유머러스한 일본의 텔레비전 광고카피가 생각나는데, 아버지와 자녀들은 인스턴트 카레가 익을 때까지의 시간 정도밖에는 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자녀들이 부모, 특히 아버지로부터 좋은 말을 듣거나 올바른 행동을 배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태인의 가정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없다.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가정의 가장으로서 존경하며, 아버지 역시 한 가정의 중심답게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은 자연히 아버지를 본받으면서 자라난다. 공부하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모두 아버지한테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유태인들의 안식일(샵바트) 때문이다. 여기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모세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7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 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오늘날에는 정말 죽이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유태인들은 지금도 금요일 해가 지면서부터 다음날 해가 지기 직전까지는 안식일에는 불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요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부들은 안식일에는 불을 피울 수 없으므로 미리 모든 것을 장만 해 둔다. 또한 자동차는 물론이고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을 정도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면, '정통파' 유태교인 수천 명이 검은 수염에 검은 코드 차림으로 안식일 날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이때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걷다가는 돌에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설사 돌에 얻어맞았다 해도 어느 누구 한 사람 보호해 줄 사람도 없다. 이처럼 유태인들 사이에는 안식일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어, 가장인 아버지는 이날 집 안팎의 모든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자녀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는다.
아버지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되면 아버지는 언제나 자녀들을 한 사람씩 방으로 불러서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한 주일 동안 있었던 일, 공부에 관해 들어보고 거기에 대해서 조언을 해준다. 물론 이런 대화들은 아버지와 자녀간의 관계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한 가정의 가장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 상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확립되는 한편, 그러한 아버지야말로 산 교육을 행하는 '선생님'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이자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만남의 시간은 대개 30분 정도가 보통이지만,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일주일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아버지의 의견을 듣고 총정리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또한 유태인 아버지들은 평일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저녁 식사를 가족과 함께 들 수 있게 일찍 귀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동양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거나 자녀들이 잠든 후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마치 아버지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일요일이면 골프나 낚시를 하러 나가버리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안식일 같은 관습이나 규칙은 없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일요일만큼은 자녀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나라 아버지들이나 똑같겠지만, 유태인 아버지들은 특히 자녀들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배려한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차린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크게 걱정하면서, 장성한 아들에게 '흥분하지 말라. 신중하게 행동하고 교양을 몸에 익혀라. 은인에게는 경의를 표할 줄 알아야 하며 반항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유태인의 아버지 상이다. 아버지가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부모의 자식간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포인트!
엄격하게 지켜지는 안식일의 전통은 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아버지와 자녀들이 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휴일마다 아버지가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부모와 자식간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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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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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소년 시절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는 서기 76년 1월 24일, 고대에는 히스파니아라고 불린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같은 도시 태생인 트라야누스보다 스물 세 살 아래다. 기원전 3세기 말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시대에 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가 퇴역병을 이주시켜 세운 것이 이탈리카니까, 이탈리카태생 로마인의 기원은 모두 본국 이탈리아라고 생각해도 좋지만, 트라야누스의 조상이 이탈리아 어디 출신인지는 알 수 없는 반면 하드리아누스의 조상은 알려져있다. 아드리아 해와 가까운 중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하드리아다. 아드리아 해라는 이름은 이곳 하드리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 사회의 지도층인 원로원 계급에 속하게 된 시기도 트라야누스는 아버지 대부터였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보다 훨씬 이르다. 기원전1세기 중엽에 원로원파와의 항쟁에서 이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속주출신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는데, 하드리아누스의 조상도 그때카이사르 덕분에 원로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후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춘다. 인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도 법무관으로 출세를 끝냈지만, 그것은 집정관 자격 연령에 이르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서기 1세기에는 오랫동안 무명이었던 트라야누스 가문이 하드리아누스 가문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것도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공을 세운 트라야누스의 아버지가 천거한 덕분이라고 한다. 나중에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에게 외사촌동생이었으니까, 조카가 외삼촌의 연줄로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상위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셈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카디스 태생인 파울리나와 결혼하여,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딸과 아들 푸블리우스를 낳았다. 파울리나는 양갓집 규수이긴 했겠지만, 이탈리카에서 1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같은 베티카 속주의 도시 태생에 불과하다. 딸 파울리나도 역시 같은 속주 출신인 세르비아누스에게 출가하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 계급 중에서도 상위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그런 사람이라 해도 특별한 환경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 하드리아누스도 열 살 때까지는 에스파냐 남부의 시골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후견인을 지명해놓고 죽은 것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후견인으로 지명된 것은 두 사람이다. 하나는 트라야누스, 또 하나는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다.
당시 트라야누스는 33세. 군단에 근무하는 대대장에 불과했고, 그로부터 12년 뒤에 황제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 존재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도 트라야누스가 동향인이고 외사촌동생이니까 어린 아들의 장래를 부탁했던 것이다. 아티아누스도 같은 이탈리카 출신이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원로원 계급에 이어 제2계급인 기사계급(equitas)에 속한다. 후견인을 의뢰 받았을 당시 이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속주 출신의 원기 왕성한 사나이라면 군단에 들어가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게 보통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가 그 전형이다. 따라서 아티아누스도 군단에서 한창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수도 로마의 명사가 아니라 아직 젊지만 실력파인 두 사람을 선택하여 아들의 장래를 부탁 것이다. 전쟁이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아이들이 많았던 로마 사회에서는 친지에게 아들의 후견인이나 대부를 부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부탁을 받은 쪽도 그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 플리니우스는 후견인이 된 큰아버지 대 플리니우스에게 맡겨져 그 슬하에서 자랐다.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 된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는 서로 의논하여, 열 살배기 소년이 수도 로마에서 중등교육을 받도록 조치했다. 이리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열 살부터 열네 살까지 이탈리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대도시 로마에서 충분한 기초교육을 받았다. 도미티아누스황제가 <교육론 대전> 집필을 의뢰한 퀸틸리아누스의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 사이 1년 동안은 법무관에 당선되어 수도로 돌아간 트라야누스의 집에 맡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래 영리한 소년이었던 하드리아누스는 이 시기에 그리스문화의 훌륭함에 눈을 뜬다. 그리스어는 로마의 엘리트 계층으로 태어난 자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교양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 소년은 그리스어만이 아니라 그리스 문화 전반에 열중했다. 같이 공부하는 소년들은 그를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 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을 정도다. 그런데 이것이 두 대부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로마 낭자는 실질 강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공화정 시대 로마 엘리트의 신념이었다. 제정 시대에 접어든 뒤에는-특히 수도 로마에서는-실질 강건이 이날만큼 중시되지 않았지만, 이런 생각은 왠지 중심부보다는 변경에 순수한 형태로 오래 남는다. 트라야누스도 아티아누스도 실질강건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이들 두 사람이 보기에 그리스 문명에 열중하는 것은 곧 연약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열네 살이 된 하드리아누스는 고향 이탈리카로 돌려 보내지고 말았다. 하지만 두 대부는 새로운 걱정거리를 떠 안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사냥에만 열중해 있다는 것이다. 그 일대는 완만한 구릉지대니까 말을 타고 멧돼지나 사슴을 쫓아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사냥이라면 실질강건에 어긋나지 않지만, 균형감각을 중시하는 로마인의 전통에서 보면 무언가에 열중하거나 탐닉하는 것은 좋지 않다. 고향에서 생활한지 3년쯤 뒤에 젊은이는 다시 대부들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사이에 병역 견습정도는 끝마친 모양이다. 훗날 하드리아누스의 양대 취미가 된 그리스 문명과 사냥에 대한 애착은 10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두 가지는 얼핏 정반대 되는 취미처럼 보이지만, 실은 관능이라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평생 동안 관능적인 남자였다.
청년 시절
다시 로마로 돌아간 젊은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말단 행정직이었다. 이것도 두 대부가 의논한 결과임이 분명한데, 공화정 시대부터 존속한 이 관직은 노예에서 해방노예가 된 사람이 로마 시민권을 얻는데 필요한 조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심사하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임무는 그것만이 아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유산상속이나 후견인의 적부 심사까지 이 관청의 임무에 추가했기 때문에, 그것을 심사하는 일도 업무 범위에 들어간다. 심사 결과가 좋으면 허가를 내주고, 재판이 필요하면 법무관에게 돌린다. 10명의 동료는 모두 20세 안팎의 젊은이였다. 공화정과 제정의 구별 없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로마의 엘리트 양성 시스템은 흥미롭다. 20대에 이미 민간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인간사회의 저변을 담당하게 한다. 안찰관의 임무에는 공창제도가 건전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고, 회계감사관의 임무는 금전출납을 점검하는 것이었고, 호민관은 요컨대 일반서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사회복지사다. 한편 군단에 근무하는 장교는 임무의 성질상 만능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이런 직책들을 번갈아 경험한 뒤, 30세가 자격 연령인 원로원에 들어간다. 원로원 의원이 되면 비로소 사회의 자질구레한 일이 아니라 국가 대사를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될까말까 한 하드리아누스의 다음 직업도 군단에 소속된 장교였다.
맨 먼저 파견된 곳은 먼 판노니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제2군단이다. 군단기지는 오늘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 도나우강 방위선의요충 가운데 하나다. 수도에서 느닷없이 최전선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래도 원로원 계급으로 태어난 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Tribunus laticlavius)로 파견되었으니까, 군단 안에서의 지위는 높다.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는 이 직책은 10명의 대대장(Tribunus) 가운데 가장 높은 수석 대대장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로원 의원의 토가 옷자락 장식과 같은 주홍색으로 물들인 '숄'을 어깨에 두르는 것이 정식 군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멋진 군장을 뽐내기만 해서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지위이기도 하다. 군단장에 버금가는 직책이니까, 군단장한테 만약의 일이 생기면 당장 군단장을 대신해서 군단병 6천명과 보조병을 합한 1만 명의 병력을 지휘해야 한다. 이렇게 책임이 막중한 지위에 군무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약관의 젊은이를 앉히는 것은 무모하게 여겨지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그것이 정상이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더 무거운 책무를 부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군무에 문외한이라도 그 주위에는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 주홍색 숄이 없는 대대장은 대부분 군단에서 잔다리를 밟아 대대장까지 올라온 사람들이었고, 특히 '로마 군단의 등뼈'라고 불린 백인대장에는 백전노장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한 일이지만, 낙하산을 타고 군단기지에 내려온 듯한 느낌을 주는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은 표면상으로는 경의의 대상이 되지만 실제로는 군사 전문가들의 무자비한 비판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표면상의 경의를 실질적인 경의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최전선에 근무하는 병사들인 만큼, 지휘관의 무능은 곧 자신들의 죽음과 직결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하드리아누스는 합격점을 받은 모양이다. 2년쯤 뒤에 전속 명령을 받았다. 이번 임지는 도나우강 하류의 먼 모에시아 속주. 제5군단의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이었다. 이 군단의 주둔지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트로에스미스. 가까이에는 도나우강 하류와 흑해를 경비하는 함대 기지도 있었다. 이곳에 근무하고 있을 때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당했다. 제위는 네르바가 물려받았다. 서기 96년은 어수선하게 지나갔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서기 97년 10월, 네르바 황제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98년 1월 27일, 노령이었던 네르바가 세상을 떠났다.
<황제열전>의 저자에 따르면, 네르바의 사망과 트라야누스의 즉위를 트라야누스에게 알린 것은 스물 두 살의 하드리아누스였다고 한다. 그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본인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념으로 도나우강 상류를 향해 말을 달리고, '게르마니아 방벽'도 단숨에 통과하여, 라인강 중류의 괼른에 머물고 있던 트라야누스에게 달려간 것이다. 아버지역할을 대신해준 사람의 영예니까 기쁨으로 가득 찼겠지만, 계절은 한겨울, 게다가 그 일대의 겨울은 여간 혹독한 게 아니다. 아무리 당시의 고속도로라고 해도 좋은 로마 가도를 달릴 뿐이었다고는 하지만, 젊으니까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 앞에서, 황제의 죽음과 새 황제의 즉위라는 중요한 소식이 수도 로마에서 도나우강 하류에 전해지고 그것을 다시 하드리아누스가 머나먼 괼른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전하는 것보다 로마에서 거의 정북 방향에 있는 괼른에 곧장 전하는 편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만두자. 40대 중반의 트라야누스도 한겨울에 먼길을 달려온 과거의 '걱정거리'가 훌쩍 성장한 모습을 보고, 황제가 된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으니까. 그 후 하드리아누스가 그대로 트라야누스 곁에 남아서 다키아 전쟁준비에 전념하는 황제를 돕고, 1년 반 뒤에 드디어 수도 로마로 귀환하는 트라야누스와 계속 행동을 같이했는지, 아니면 다시 도나우강 하류의 기지로 돌아가 군단장 차석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그는 서기 101년에 회계감사관에 당선되어 명예로운 경력'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스물 다섯 살에 회계감사관이니까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회계감사관이 된 하드리아누스에게 트라야누스 황제는 또 다른 일도 시켰다 특별 대우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이니까 스스러워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황제가 다른 볼일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때 황제의 의견을 적은 문서를 원로원에 가져가서 낭독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귀를 기울이던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 웃음이 번져갔다. 젊은 회계감사관의 라틴어 발음에 지독한 '시골 사투리' (루스티키타스)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국제어인 그리스어에 아무리 능통해도, 로마 세계의 또 다른 국제어이고 게다가 로마인에게는 모국어인 라틴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제국의 엘리트 자격이 없다. 이 일로 분발한 하드리아누스는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어릴 적부터 입에 밴 사투리를 단기간에 극복했다. 덧붙여 말하면, 정적조차도 인정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문장력에 바쳐진 찬사는 '도회적' (우르바니타스)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한 덕에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임무를 얻었다. 회계감사관 임기를 무사히 마친 그에게 주어진 일은 '원로원 의사록' (악타 세나투스)을 편집하는 일이었다. 원로원 회의에서 이루어지는 토의나 의결을 모두 정리하여 전속 필경사에게 필기시켜 보존할 뿐 아니라, 그 사본을 여럿 만들어 제국 전역의 총독이나 군단이나 지방자치단체에 배포하는 책임자다. 이 의사록 덕분에 제국 변경에서도 수도의 정세를 알 수 있었다. 현대 연구자들이 '로마 시대의 신문' 이라고 말하는 이것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지만, '쿠라토르 악토룸 세나투스'(curator actorum seriates), 굳이 번역하면 '원로원 의사록 담당관'이라는 직책을 개설하여 공식 제도로 만든 사람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다. 하드리아누스가 이 일을 맡았다는 것은 그의 라틴어도 '도회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는 증거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결혼도 했다. 신부인 사비나는 트라야누스의 누나 마르키아나의 딸인 마티디아의 딸이다. 즉 황제의 생질손녀를 아내로 맞이한 셈이다.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트라야누스의 고종사촌의 아들이니까, 황제와의 친족관계는 더한층 긴밀해진다. 그리고 자식이 없는 트라야누스와 가장 가까운 친족들 중에서 하드리아누스는 유일한 남자였다. 이때부터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대한 야망을 확실히 의식하기 시작한 게 분명하다. 아마 트라야누스 다음은 자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물 세 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후계자가 되기에는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공평무사를 무엇보다도 중시한 트라야누스는 육친이라고 해서, 아니 육친이니까 오히려 특별 대우를 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트라야누스가 44세에 네르바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될 때까지 자기가 제위를 물려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스물 다섯 살 때 이미 황제를 꿈꾸었다. 트라야누스가 공평무사한 사람인 만큼,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도 오히려 간단했다. 위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화려한 모험을 시도하기보다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101년부터 102년까지 계속된 제1차 다키아 전쟁에 하드리아누스는 도중에 참가한 모양이다. 이 전쟁에서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책임있는 지위가 주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기록에 남을 만한 전공도 세우지 못했다. 참전했다기보다 트라야누스의 막사에 손님처럼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쓴 회고록은 로마 제국과 운명을 같이하여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통치자들의 회고록 가운데 하나지만, 여기에는 그 무렵에 그가 이미 트라야누스와 가장 친밀한 측근 집단의 일원이었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포도주를 퍼마시는 트라야누스와 끝까지 대작할 수 있었단 사람도 하드리아누스였다고 한다.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황제를 당해내지 못해 참모들도 차례로 나가떨어지고, 20대 후반에 갓 접어든 하드리아누스 혼자 마지막까지 황제를 상대했다는 뜻이리라. 실제로 트라야누스 자신이 무인인 만큼, 작전회의에 참석하는 참모들도 20대 젊은이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역전의 용장들이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그로부터 3년 뒤인 서기 105년부터 106년까지 계속된 제2차 다키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에게 중책을 맡긴다. 본에 기지를 둔 제1군단의 군단장에 임명하고, 휘하 군단과 함께 다키아 전쟁에 참전시킨 것이다. 서른 살이 될까말까 한 나이에 군단병과 보조병을 합하여 1만 명을 지휘하게 된 셈인데, 이 대우도 로마에서는 특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평시가 아니라 전시다. 게다가 제1차 때와는 달리 제2차 다키아 전쟁 때의 로마군은 마치 어딘가에 줄곧 갇혀 있다가 싸움터에 풀려난 것처럼 마음껏 철저히 싸웠다. 젊은 야심가에게는 전략과 전술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한다. 그가 이끄는 제1군단의 활약은 눈부셔서, 라인 강과 도나우강 방위를 담당하는 장병들 사이에 하드리아누스의 이름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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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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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 루쉰(魯迅)/유세종 옮김
북경(北京)의 겨울, 땅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다. 벌거벗은 나무의 거무스레한 가지들이 가닥가닥 뻗어 있는 맑은 하늘, 저 멀리로 하나 둘 떠 있는 연을 바라보며 나는 경이로움과 슬픔에 잠긴다.
고향에서 연을 띠우는 계절은 춘삼월이다. 사삭사삭 얼레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 들어 쳐다보면 으레 연한 먹물로 그린 게연이거나 연초록의 지네연이다. 그리고 쓸쓸한 기와연은 얼레도 없이 나지막하 게 떠서 초췌하고 가련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 때쯤이면 땅 위에는 버드나무가 벌써 싹을 티우고 철이른 산복숭아도 봉오리를 터뜨려 아이들의 하늘과 서로 어울려 봄의 따사로운 풍경을 이룬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춥고 스산한 겨울에 둘러싸여 있다. 떠난 지 오래된 고향의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봄날들이 이 하늘에 출렁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원래 연날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싫어하였다. 할 일 없는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어린 동생이 있었는데 그 무렵 그는 열 살 안팎이었다. 병치레가 잦고 몹시 야위었는데 나와 달리 연날리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제 힘으로 연을 살 돈도 없었고 내가 연을 띠우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저 그 작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때는 반나절이나 그러고 있었다. 멀리서 게연이 갑자기 떨어지면 그는 놀라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두 개의 기와연이 얽혀 있다가 풀리면 그는 좋아라고 팔딱팔딱 뛰었다. 그의 이런 짓들이 나에게는 우수꽝스럽고 한심해 보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가 여러 날 보이지 않은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며칠 전 뒤뜰에서 그가 대막대기를 줍고 있었던 광경이 떠올랐다. 나는 퍼뜩 짚이는 것이 있어서 즉시 작은 헛간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잡동사니를 쌓아 둔 곳이었다. 문을 열어 보니, 과연 먼지투성이의 물건 더미 속에 그가 있었다. 커다란 걸상을 앞에 놓고 작은 걸상에 앉아 있던 그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낯빛이 긴장감으로 오그라들었다. 아직 종이를 바르지 않은 나비연의 연살을 커다란 걸상 옆에 세워 놓았고, 걸상 위에는 방줄 끝머리에 달 두 개의 작은 얼레가 있었다. 붉은 종이로 막 치장을 하고 있었는데 거의 다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비밀을 들추어냈다는 만족감과 아울러, 그가 내 눈을 속이고, 이렇게 고심하면서 되지 못한 아이들의 놀잇감을 몰래 만들고 있다는 것에 매우 화가 났다. 나는 곧장 손을 뻗쳐 나비의 한쪽 날개를 부러뜨리고, 얼레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아 버렸다. 나이로나 힘으로나 그는 나를 당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나는 완전한 승리를 얻었다. 그래서 절망적으로 서 있는 그를 헛간에 남겨둔 채,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왔다. 그가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벌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우리들은 헤어진 지 오래 되었고 나는 중년이 되었다. 나는 불행히도 아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외국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놀이는 어린이들의 가장 자연스런 행위이며 장난감은 어린이들에게 천사와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십여 년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이 정신적 학살에 대한 영상이 갑자기 눈앞에 펄쳐졌다. 그러자 내 가슴도 동시에 납덩이처럼 무겁게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내려앉았다. 끝없이 내려앉았다. 나는 마냥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잘못을 보상할 방법을 알고는 있다. 그에게 연을 주고, 연 날리는 것도 찬성해 주고, 그에게 연을 날리라고 권하고, 그와 함께 연을 날리는 것이다. 같이 소리 지르고, 달리고, 웃고……. 그러나 그도 이제는 나와 마찬가지로 수염이 난 지 오래다. 나는 잘못을 보상할 또 다른 방법도 알고 있다. 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가 ‘저는 조금도 형님을 미워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실행이 가능한 방법이다. 어느날 우리는 만났다. 우리의 얼굴은 이미 ‘삶’의 고통이 가져다 준 수많은 주름들로 깊이 패어 있었다. 내 마음은 무거웠다.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옛 이야기로 화제가 옮아갔다. 나는 바로 이 대목을 이야기하였고 그 때는 어려서 무얼 몰라서 그랬었노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형을 전혀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나는 용서를 받게 되고 내 마음도 이제부터 가벼워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일이 있었던가요?”
그는 놀란 듯 웃으면서 말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완전히 망각하여, 조금의 원한도 없는데, 무슨 용서의 말을 운운할 것인가? 원한이 없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은 그저 무겁게 가라앉고만 있었다. 지금, 고향의 봄이 다시 이 타향의 하늘에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 지나간 지 오래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비애에 잠기게 했다. 차라리 이 스산한 겨울 속으로 몸을 숨겨 버리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나 세상은 분명히 한겨울, 나에게 무서운 추위와 냉기만을 안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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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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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3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그를 시들하게 만드는 것은 어떠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에게 주어진 무위도식적 삶이었다. 그의 정신은 훼속되고, 궁핍은 먹여 살려야 할 입들이 기다리는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으며, 형편이 좋았던 때에 토토와의 거래를 위해서 별 무리 없이 빌렸던 빚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품은 단 하나의 희망으로 옮아간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내가 만일 피렌체 영토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교황이 잘 있는지 어떤지를 물어볼 수 있을 텐데.) 한때 마키아벨리를 후원하고 칭찬해 주었던 소데리니 추기경도 로마에서 호의를 보여준 바 있었다. 지금은 (교황과 매우 껄끄러운 처지가 되어 있긴)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교황 레오네에게 추천해 주십사고 추기경에게 글을 써야 하는지, 혹은 베토리가 말로 전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안하는 편이 좋을지를 물었다. 베토리는 아무것도 안하는 쪽이 낫다고 조언하면서, 추기경의 호의는 행동이 귀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말 뿐이었고, 설사 그가 추천해 준다 해도 그것은 공연히 소데리니 가와 서기장 사이의 옛 관계를 되새기게 해서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현명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자신을 가두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4월 16일, 그는 친구에게 줄리아노가 로마로 가고 있음을 알리면서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생각게 한다. (물론 자네는 그로 하여금 나에게 호의를 가지도록 할 만한 길을 알고 있겠지. (...) 확신컨데, 나의 경우를 솜씨 있게만 다루어준다면 내가 어떤 일에서든 쓰임새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걸세. 피렌체가 아니라도 좋네. 아니 의심을 덜 받는 로마나 교황청에서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일단 교황 성하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내가 왜 나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이익이 되도록 처신하지 못하겠나. 내 이 글을 쓰고 있네만, 그렇다고 내가 꼭 이러한 것들을 열렬히 바라서는 아니네. 또 자네가 나로 인해 어떤 손해나 괴로움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네. 하지만 이런 내 기분은 헤아려주었으면 고맙겠네.)
그러나 베토리는 이렇게 집요한 마키아베리의 요청에 당황했고, 답장에서 이야기 주제를 얼른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가엾은 친구의 마음을 푸는 길은 정치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길뿐이었다. 편지는 골치 아픈 문제는 제껴두고 온통 정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것에 빠져 들어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궁핍을 잊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국의 군주들은 여전히 심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베토리 역시 그 결과의 에측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터라, 마키아벨리를 부추겨서 그의 날카로운 판단을 듣고 싶어하였다.
(에스파냐 황)의 행동을 둘러싼 많은 추측들이 있었다. 프랑스 왕은 알프스 너머에서 영국 군과 에스파냐 군에 패하여 이탈리아 내에 겨우 소수의 성만을 남기고 축출된 데다 황제와 스위스와 베네치아를 여전히 적으로 돌리고 있던 중에, 그와 에스파냐 왕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줄리오가 크게 분노함으로써 그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거의 믿지 못할 대 사건이었다. 이는 프랑스로 하여금 알프스 이쪽을 칠 수 있도록 손을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직후, 베네치아와 프랑스 간에도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로써 프랑스는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밀라노 공국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셈이었다. 당시 밀라노는 명목상 마씨밀리아노 스포르차의 이름을 내건 교황 연합군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스위스가 주인이었다.
베토리는 여우 같은 에스파냐 왕이 아무런 이유 없이 협정에 서명했을 리는 없기 때문에, 그 속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커다란 음모가 숨어 있으며 따라서 이 협정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평상시보다 두 시간이나 더 침대에) 머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도 여전히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자, 결국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눠본 어떤 사람보다도 나은) 자신의 친구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작정하였다. 마키아벨리에게 그와 같은 것을 묻는다는 것은 곧 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러한 재능을 인정해준다 함은 곧 그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에 진배없었다. 그가 자신을 되살려놓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당시 그는, 정무궁의 계단을 오르락거리며 그 귀찮고 쓸데없는 장부 계산 일에 시달린 이후, 로마에서의 희망조차도 친구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가슴이 스렸던 데다 도시에서의 생게 비용도 대기 힘들고 매일같이 빈둥거리는 것도 싫어서, 산탄드레아에 있는 자신의 허름한 시골집으로 물러나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제 정치에 관해서는 생각도 얘기도 하지 않으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뱃사람의 맹세에 불과하였고, 대사 친구의 편지를 받자 그는 한순간에 옛날의 그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렇게 실토하였다. (내가 그것을 읽고 또 읽는 동안, 나는 지금의 불행한 처지를 깡그리 잊은 채, 내가 노고를 마다 않고 헛되이 쫓아다녔던 옛날의 사건들 속으로 되돌아간 듯했다네.)
마키아벨리는 4월 29일자로 보낸 답장에서 매우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에스파냐 왕이 휴전 협정을 체결해 준 이유와 그로부터 초래될 결과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이는 역시 날카로운 베토리의 예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매우 흥미 있게 읽었으나, 그의 생각은 재기가 넘치는 만큼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말은 많은 사라들에게 그렇게 비쳤고 또 종종 실제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석 달 뒤, 프랑스 왕이 다시 한번 이탈리아로 침입해 들어와서는 또다시 밀라노 공국을 힘들이지 않고 빼앗았다가 어이없이 내주는 일을 반복하자, 베토리는 마키아벨리의 편지를 꺼내어 재차 읽어보고는 칭찬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예언자는 (시골집으로 물러나 사람의 얼굴을 멀리한 채), 외부로부터의 소식과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절연당한 어둠 속에서도 군주 제후들의 생각과 장래의 행동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제14장 산탄드레아의 (여가)-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
페르쿠시나 지방의 산탄드레아는 dpt 로마의 우편도로 부근에 자리잡은 조그만 마을로, 피렌체에서는 7밀리오, 산 카쉬아노에서는 2밀리오 떨어져 있다. 작은 교구 성당, 여인숙으로 사용되는 집 한 채, 이와 담을 같이 하고 있으면서 속칭 영주관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오막살이에 가까운 건물, 뒤쪽으로는 옹기종기 농가들이 박혀 있고 길 건너 편으로는 기름 짜는 곳, 빵 굽는 곳, 빵 굽는 곳, 농번기에 쓰는 움막, 외양간 등으로 쓰이는 집들을 거느린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과 망류들, 농장 일꾼들이 기거하는 오두막집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집들, 이 농가들, 그리고 (보르고) 또는 (스트라다)로 불리는 이 농장과 (포초)라 불리는 또 다른 농장, 몬테풀리아노와 폰탈레의 땅들, 이러한 것들이 이제는 시골집에 살며 농장 관리인을 겸한 피렌체 서기장의 작은 왕국인 셈이었다. 영주관은 그 옆의 여인숙을 본따 (알베르가초 Albergaccio)(초라한 여인숙이라는 뜻-옮긴이)라 불렸는데, 이 말은 그 두 건물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산 카쉬아노로 이어지는 길의 오른편에도 소유지가 있지만, 그 크기는 보잘 것 없었다. 그 소유의 땅과 포도밭, 올리브 과수원, 숲 등 모든 것이 자그마한 마을로부터 그레베란 이름의 개천에 이르는 남쪽 사면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격이 여름에는 물이 말라 하얀 자갈을 해골처럼 드러내는 계곡 낮은 곳에서 바라다보였다.
(모든 것을 잃은 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해 생각하거나 논하지 않기로 작정하고서) 그곳에 은거하였다. 여기는 그 어두침침한 감옥 생활 이후 자신이 택한 푸른 숲과 햇빛이 있는 유폐의 장소인 셈이다. 그곳은 그가 어린 시절 뛰놀던 땅일 뿐 아나라 조상들에게도 친숙했던 땅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이 어쩐지 즐겁지 않고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곳은 인생의 황혼기쯤이면 활동에서 은퇴하여 마지막 여가의 나날들을 조용히 즐기기에는 적당한 장소로 보였다. 물론 활력이 최고조에 달한 인생의 절정기엔 어울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시골의 단순소박한 생활이 그에게는 자신의 재능의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무릇 사람들이 위대함네 하고 내세우는 생각들이 자연의 눈으로는 얼마나 하찮고 덧없는 것인지를 정작 그들 자신은 알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 토스카나의 시골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잡다하고 부드러운 듯하다가도 거친 것이 웃음과 울음을 왔다갔다하는 그의 종잡을 수 없는 기질과 꼭 닮지 않았는가! 그와 같이 오랜 부재 뒤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그곳의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되찾게 된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단지 해와 바람과 석양과 여명만이 아니다. 가장 소박한 것들, 개천에 깔린 단순한 고동이며 꽃 향기며 들풀 냄새며 새의 지저귐 소리. 바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무뎌지고 비틀린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주는 것이다. 흙을 밟고 만지고 들풀과 나무 뿌리 냄새를 맡음으로써 사람들은 안테오스(Anteo, Anteos, Ant(a)eus 등으로도 표기됨. 그는 포세이돈과 대지의 어머니 사이에서 난 거인으로, 리비아의 왕. 레슬링의 명수였으나 헤라클레스와 싸워 죽임을 당함. 여기서는 그가 대지에 접함으로써 힘을 얻은 사실을 비유한 것-옮긴이)의 신화를 되살려내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것들과 함께 있었다. 그토록 많은 고통과 근심을 겪은 뒤, 그는 이제 그처럼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 자신의 불행은 이제 독침을 거두고 오히려 행동의 활력소로 변했다. 계속 되는 그의 내키지 않는 여가가 그렇게 바뀌었듯이 겨울 동안의 오랜 휴식 끝에 기지개를 켜는 주변의 나무며 들풀들처럼, 이전에는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 찬 그의 마음도 싹을 틔워 나갔다. 베토리의 편지들 역시 그의 생각을 정치로 돌려놓는 첫 번째 자극이 되었다. 휴전 협정에 관한 4월 29일의 유명한 편지로 인해 침묵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흘러가 버리고, 그리하여 5월 모두와 6월 일부 동안의 시간 간격 뒤에 그들은 다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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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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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4.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법
참외밭에서 신발끈을 고쳐 매지 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인의 생활을 어렵다. 남의 앞에 서서 이끌어 가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 수 있겠는가?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도 잘 꾸려가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큰 조직과 많은 사람을 훌륭히 인도해 가는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장님의 길 안내
뱀의 꼬리는 언제나 머리 뒤에 붙어다녔다. 꼬리는 불만을 터뜨리면서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하였다. 머리는 “너의 능력으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행동을 결정할 두뇌도 없으므로 안 된다”고 하였으나 꼬리의 강청에 못 이겨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꼬리는 기뻐하면서 앞장을 섰다. 그러다가 구덩이에 빠졌다. 머리가 노력한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머리의 도움으로 가시덤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꼬리는 그래도 우기고 앞장서서 가다 불 속으로 들어갔다. 다급해진 머리가 때 늦은 노력을 하였으나 뱀은 타죽고 말았다. 아무런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 남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우화이다.
공자와 같이 지식과 학문이 뛰어난 사람도 제자 자로가 “죽음이란 무었입니까?”하고 묻자,“아직 삶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묻자“아직 사람도 잘 섬시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느냐”라고 하였다. 공자는“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로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 역시 잘났다고 떠들고만 다니는 사람들을 어떤 방법으로 고치게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그대로 버려두어라. 그들은 눈먼 길잡이들이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라고 답하였다. 무지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파멸에 이른다고 경고하여 말한 것이다.
맹자에‘사람의 잘못된 행동의 하나는 남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데 있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장 서서 잘난 체하고 큰소리 치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빈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고, 실력이 없는 사람이 크게 떠들면서 자기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적격자라고 장담하다가 망하는 경우가많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파멸에 이르게 된다. 지도자를 선택할 때는 언제나 머리되는 사람을 구해야지, 꼬리 같은 사람을 택해서는 안 된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When the blind leads the dlind, both fall into ditch)
예쁜 여자 사로잡기
10여 년 전 미국에서 미스 유니버스에 당선된 미모의 아가씨가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있었다. 이유는 이렇다. 미스 유니버스에 당선되자 그녀는 각종 행사나 화려한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행사는 줄울 있고, 그녀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치러냈건만,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이상한 허탈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일은 그녀가 외로움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데이트를 신청하는 남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녀의 고독감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섰고,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 같은 미모와 명성을 가진 여자면 많은 남자들이 접근하였다가‘시골간이역 급행열차 지나가듯’거절당했으리라 여긴다. 그래서 자기 같은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단정내린다. 그래서‘봅꿩이 자기 소리에 놀라 소스라쳐 도망가듯이’그런 미녀에게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 자기 자신을 송충이로 비하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미스 유니버스’라 해서 머리에 금테 두른 천사도 아니고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그냥 평범한 젊은 여자와 다를 것이 없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남자들은‘사느냐,죽느야,그것이 문제로다’라며 머뭇거린 나약한 햄릿처럼,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까 말까? 그녀가 내 사랑을 받아들일까?라는 생각에 노심초사한다. 그러다 번번히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그녀의 옆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영국 속담에‘선거에 입후보하여 당당히 자기의 정견을 발표한 후 낙선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였다가 거절 당하는 일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또, 전쟁터에서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갖은 간사한 꾀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듯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법을 써도 된다고 하였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도 연적에게만은 중상비방도 허락된다는 말이다.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법을 써도 된다고 하였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도 연적에게 만은 중상비방도 허락된다는 말이다. 머뭇거리는 남자는 어여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랑도 그렇지만 행운도 용감한 자에게만 찾아간다고 한다.‘남자는 베짱, 여자는 절개’라는 시골 장터 약장사 말과 같이 말하는 사람치고‘저돌적’으로 사랑을 구하는‘베짱’은 없다는 말도 있을망정 말이다.
(전쟁과평화),(안나 카레니나)등의 주옥 같은 명작을 쓴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를 보자 그는 성을 죄악시하고 성욕을 만악의 근원이라고 극언한 성욕론까지 써서 많은 인세 수입을 올린 사람인데, 그는 그렇게 번 돈으로 82세로 죽기 얼마 전까지 여자 없이 하룻밤도 못 잘 정도의 생활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글로 쓰는 것과 실행하는 것, 말로 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데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도 알아두자.
소심한 남자는 예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Faint heart never won fair lady.)
참외밭과 신발끈
시저(Julius Caesar, 100~11 B.C.)가 영국 원정(55~54 B.C.)을 성공시키자 그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로마 원로원은 시저의 세력이 커나가자 이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에게 군대 통수권을 원로원에 이양할 것을 명령하였다. 시저는 원로원의 명령을 거절하고‘주사위는 던져졌다’며기원전 49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로써 로마는 내란에 들어갔다. 그는‘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란 자신의 말에 맞게 반대세력인 폼페이를 격파하였다. 아울러 영웅호색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이듯,그해 겨울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크라와 갖은 염문을 뿌렸다. 그는 차례로 폼페이의 잔당과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로마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구집권을 위한 황재자리에 오르려다 공화정을 원하는 세력에 의해 기원전 44년 3월15일 암살되고 말았다.
부루투스 너까지도...
시저 암살 음모의 주동 인물은 부르투스,캐시어스등이 있다. 시저가 자객의 칼에 맞아 죽으면서 옆에 부르투스가 있자,“부르투스 너까지도.....(Brutus, you too!)"라는 말을 남겼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토록 믿고 믿었던 부르투스도 시저에게 면종복배(面從腹背 : stabbed in the back)한 것이다. 부르투스는 시저를 암살한 후,“내가 그를 죽인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욱 사랑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 후로부터 약 2,000여 년이 지난 1979년 10월26일 서울의 궁정동. 황제가 되려했던 시저가 아니라 영구집권을 하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 부르투스가 아니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칼로써가 아니라 총으로..... 확실히 역사는 되풀이 된다. 박 대통령은“김부장 당신이....”라고 말했고, 김부장은 부르투스가 시저의 장례식에서 한 말과 같이 법정에서“내가 그를 죽인 것은 그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장래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다.
시저의 이혼 사유
시저는 정치인 씬나의 딸인 코낼리아와 정략결혼했으나 그녀가 죽자, 기원전 62년에 폼페이아와 재혼하였다. 하지만 시저는 그녀에게 싫증을 느껴 적당한 이혼 사유를 찾았다. 그러던 중 그의 정적인 클로디어스가 신성 모독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그 재판에 아내 폼페이아가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나자, 시저는 이를 이유로 단행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의하면 시저는 확증없이 심증만 있었지만 그러한‘소문’때문에 최고직에 있는 자신의 명예와 위신이 실추되었다고 생각하고, 갖은 루머가 나도는 가운데서도 이혼을 단행했다고 한다. 시저는 “나의 마누라가 아예 의심받을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후 칼퍼니아와 다시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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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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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화음 - 하정심
물이 차오를 때
바닷가 조약돌길을 걸어 보아요
자박자박 내 발소리
차르르차르르 파도 소리
우우 소리치듯 달려오는 바다 안개
바다가 뿜어 내는 숨소리
그건 으뜸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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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 정진채
파도가 밀려간
바위틈
소라게가 집을 업고 놀러 나왔다.
동그란 처마 밑으로
빨갛고 예쁜 발이 하나
햇빛에 반짝인다.
이 넓은 바다의 한쪽에
요렇게 작은 고마 소라게가
용하게 살고 있다.
바다의 한 식구
소라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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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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