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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2호 - 2024.10.01. 화요일(음력 : 8.29.)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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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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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분하기는 매한가지야. 하기 싫은 일들을 노상 하고 있거나, 하고 싶은 일들을 아예 못하거나
- 에릭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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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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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차별’의 발음
‘성적 차별’이라는 말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표기대로 [성적차별]이라고 읽으면 학교에서 성적에 따라 학생들이 차별을 받는 것을 말하고 [성:쩍차별]이라고 읽으면 남성 혹은 여성의 성 차이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성적(性的) 차별’인데, 이처럼 어근 뒤에 접미사 ‘-적(的)’이 왔을 때 표기대로 [적]이라고 발음하면 ‘성적(性的) 차별’이 성적에 따라 차별을 받는 ‘성적(成籍) 차별’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적(的)’을 [쩍]으로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적(的)’이 항상 [쩍]으로 발음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과 같이 모음으로 끝나는 어근 뒤에서는 [적]으로 발음한다. 또한 ‘ㄴ’ ‘ㅁ’ ‘ㅇ’과 같은 비음(鼻音)으로 끝나는 어근 뒤에서도 [적]으로 발음한다. ‘낙관적’ ‘경험적’ ‘감동적’ 등이 그 예다. 비음은 입 안의 통로를 막고 코로 공기를 내보내면서 내는 소리인데, 모음과 마찬가지로 비음으로 끝나는 어근 뒤에서는 된소리로 발음하지 않고 표기대로 [적]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음 이외의 ‘ㄱ’ ‘ㄹ’ ‘ㅂ’으로 끝나는 어근 뒤에서는 [쩍]으로 발음한다. ‘공격적’ ‘노골적’ ‘직업적’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1음절로 된 어근 뒤에서는 모음이나 비음, ‘ㄱ’ ‘ㄹ’ ‘ㅂ’으로 끝나는 어근 등 모든 환경에서 [쩍]으로 발음한다. ‘내적(內的)’ ‘전적(全的)’ ‘심적(心的)’ ‘성적(性的)’ ‘극적(劇的)’ ‘질적(質的)’ ‘법적(法的)’ 등이 그 예다. 이처럼 접미사 ‘-적(的)’으로 끝나는 단어들은 된소리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강추위
“눈보라가 몰아치고 강추위가 덮치자 가마니틀 두 대를 아예 윗방으로 옮겨놓고 가마니를 쳤다.”(윤흥길, 소라단 가는 길) 이 문장에 나오는 ‘강추위’의 ‘강(强)-’은 ‘강한, 호된, 심한’의 뜻을 더해 주는 말이다. 국어사전에 ‘강추위(强--)’는 ‘눈이나 바람이 몰아치는 매서운 추위’로 풀이되어 있다.
“겨울에도 강추위만 헐벗은 사람들을 못 견디게 했을 따름, 싸락눈 한 알 날리지 않았다.”(안수길, 북간도). 이 문장에 나오는 ‘강추위’의 ‘강-’은 한자어가 아니다. 고유어 ‘강-’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또는 ‘물기가 없는’의 뜻을 더해 주는 말이다. ‘강굴, 강기침, 강된장, 강모, 강서리, 강술, 강울음, 강주정, 강풀’ 등의 예가 있다. 국어사전에서 ‘강추위’는 ‘눈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면서 몹시 매운 추위’로 풀이해 놓았다. 우리말에는 두 가지 ‘강추위’가 있는 것이다.
그럼, ‘강더위’라는 말도 있을까. ‘오랫동안 가물고 별만 내리쬐는 심한 더위’를 가리켜 ‘강더위’라 한다. “오늘도 강더위가 시작되려는지 밤새 내린 이슬들이 곡식 이파리에 붙었다가 이내 말라버렸고 … 해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김송죽, 번개치는 아침) 하지만 ‘强더위’는 없다. ‘습도와 온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나타내고 싶을 때는 ‘무더위’라 하면 된다.
‘강추위(强--)’는 이전 사전에는 없었다가 ‘표준국어대사전’(1999)에 처음 실린 새말이다. 본래 우리말에서는 고유어 ‘강추위’가 ‘강더위’와 짝을 이루어 널리 쓰였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저 ‘강추위(强--)’만 떠올릴 뿐이다. ‘강추위’는 우리 말글살이의 바깥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쓰리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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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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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가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붉은 손 - 정지용
어깨가 둥글고
머리ㅅ단이 칠칠히,
산에서 자러거니
이마가 알빛같이 희다.
검은 버선에 흰 볼을 받아 신고
산과일처럼 얼어 붉은 손,
길 눈을 헤쳐
돌 틈에 트인 물을 따내다.
한줄기 푸른 연기 올라
지붕도 해ㅅ살에 붉어 다사롭고,
처녀는 눈 속에서 다시
벽오동 중허리 파릇한 냄새가 난다.
수집어 돌아 앉고, 철 아닌 나그네 되어.
서려오르는 김에 낯을 비추우며
돌 틈에 이상하기 하늘 같은 샘물을 기웃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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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 김수영
나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있는 보람이란 이것뿐이라고-
하루살이의 광무여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일을 방해한다
-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의 유희여
너의 모습과 너의 몸짓은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러우냐
소리없이 기고 소리없이 날으다가
되돌아오고 되돌아가는 무수한 하루살이
-그러나 나의 머리 위의 천장에서는 너의 소리가 들린다-
하루살이의 반복이여
불옆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벽을 사랑하는 하루살이여
감정을 잊어버린 시인에게로
모여드는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나의 시각을 쉬이게 하라-
하루살이의 황홀이여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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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마음으로 - 이해인
참회의 눈물로 뿌리를 내려
하늘과 화해하는
나무의 마음으로 선다
천만 번을 가져도 내가 늘 목마를 당신
보고 싶으면
미류나무 끝에 앉은
겨울 바람으로 내가 운다
당신이 빛일수록
더 짙은 어둠의 나
이 세상 누구와도 닮은 일 없는
폭풍 같은 당신을 알아 편할 길 없다
오늘은 엇갈리는 만남의 비극 속에
내일은 열리는가
땅 위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존재의 끝은 당신
편히 잠들 날 없는
가장 정직한 나무의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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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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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20.어른들이 쓰는 물건과 장소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미용실에는 어른이 된 후에 보내라
내게는 열세 살과 여덟 살된 딸이 있다. 그런데 둘째 딸아이는 여자답게 제법 멋을 내는 데 민감했다. 그 애는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헤어스타일을 눈여겨보아서 그런지, 이따금 '엄마, 나도 미장원에 데리고 가줘요 깨끗하게 머리 손질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라고 조르곤 한다. 그러나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네가 큰 다음에 네 힘으로 돈 벌어서 미용실이고 어디고 마음대로 가. 지금은 안 돼."
그러고는 딸애의 머리 손질을 직접 해준다. 큰 딸애와는 가끔 미용실에 함께 간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커트만 하게 하고 그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는 작은 딸애에게 한 말과 같다. 유태인들은 다른 나라 어른들과는 달리, 어른과 아이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언제나 어린이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부모는 자녀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과 장남의 특권을 빼앗는 것 이외에는 자녀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고 되어 있다. 어린 자녀들을 어른의 세계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모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해놓기 위해서이다. 딸들이 내 화장품에 관심을 보이며 루주를 발라보고 싶다면서 이따금 떼를 쓰는 일이 있지만, 나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정장을 할 수 있는 축제 때만은 딸들에게도 화장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만, 그날 이외에는 화장품에 절대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부모 자식간의 경계선이 없으면 그 관계는 허물어진다
요즈음은 어디서나 어린이용 화장품을 팔고 있는데, 과연 그런 상품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또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어른들의 패션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어린이옷이 아주 많다. 게다가 어린이가 마치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머니들도 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래도 되는 것인가'하고 의문을 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부모와 자식간의 경계선을 허물어버리는 것이 새로운 부모 자식 관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 유태인들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어는 시대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어린이답게 행동하지 않고 어른들을 흉내낼 때 부모들이 그런 행동을 좋게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자녀들에게 어른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즉, 어린이들은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평소 가르치지 않는다면,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포인트!
가정의 참다운 질서가 유지되려면, 어린이들은 '작은 어른'이 아니라 어른들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인간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21.평생을 가르치려면 어릴 때 마음껏 놀게 하라
죽어도 자식신세 질 생각은 하지 말라
한국과 일본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어릴 적부터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자녀들이 자유롭게 놀 시간마저 빼앗아버린다. 나에게는 부모들의 그런 행동이 마치 자녀들이 일류 대학, 일류 회사에 들어가 빨리 돈을 벌어 자신들의 노후를 보살펴주기를 바라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양인과 유태인의 자녀 교육법의 차이는 보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언제까지 지속시키느냐 하는 시간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자. 우리 유태인의 경우 자녀는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자녀일 뿐이다. 부모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 또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늙어서 자식들의 도움을 받겠다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긴 안목에서 생각한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부모이고, 자식 역시 평생 자식이므로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 집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나의 할아버지는 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전에 이 과수원을 아들에게 분할하여 형식적으로는 상속을 해주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할아버지 자신의 손으로 과수원을 운영했으며,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해 내갔다. 그러므로 과수원의 아들, 즉 나의 아버지에게 넘겨진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이렇듯 유태민족은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만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면 된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부모와 자식간의 역할을 짧은 시간 내에 끝맺고자 하는 것이다. 동양인과 유태인의 교육 방법 중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놀 때는 마음껏 놀게 하라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유태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놀 수 있는 시기에는 마음껏 놀게 한다. 다시 말해서 어린 시절에 놀 기회를 빼앗아버리면 배움의 길에 들어섰을 때 놀 수 있는 시간을 얻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서의 놀이는 정신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을 빼앗으면서까지 공부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긴 안목으로 볼 때 절대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학문은 어른이 된 다음부터 이루어진다고 유태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동양의 어머니들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가 중요하므로 그때까지만 가르치면 된다. 그 후는 그다지 학문의 필요성이 없으므로 될 수 있으면 어렸을 때 공부에 열중하도록 해서 유명한 대학에 들여보내면 그만이다. 생각으로 부모로서의 책임감에서 일찍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녀들의 미래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놀게 하라.
이것이 포인트!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유태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놀 수 있는 시기에는 마음껏 놀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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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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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파르티아 원정
서기 113년 10월 27일, 트라야누스라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는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황제는 로마를 떠났다. 그를 수행한 장수들의 면면은, 한 사람이 빠진 것만 빼고는 다키아 전쟁당시와 똑같았다. 트라야누스는 자신보다 한 세대 젊은 이 장수들을 거느리고, 다키아 전쟁의 승리에 또 한번의 승전을 보탤 작정이었다. 그러나 파르티아 원정의 참모본부에서 빠진 한 사람은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었다. 트라야누스와 같은 고향 출신이고 동년배에다 근무지도 거의 같고, 그래서 친구이자 오른팔이었던 리키니우스 술라. 그는 다키아 전쟁이 끝난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에는 트라야누스에게 직언해 줄 측근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지금까치는 트라야누스의 자기 통제력이 그 결함을 보완해주었다. 연구자들 중에는 술라가 살아 있었다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결행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트라야누스에게 심취해 있는 유능한 장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심취해 있는 사람은 종종 그 누군가보다 더 과격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트라야누스는 이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이것도 성공한 사람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장수들은 다키아 전쟁 당시와 똑같았지만, 전쟁터가 도나우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바뀌는 이상 그들의 휘하에서 싸우는 군단도 당연히 달라진다. 하지만 군단을 새로 편성할 필요는 없었다. 카파도키아의 2개 군단, 시리아의 3개 군단, 유대의 1개 군단, 로마인들이 아라비아라고 부른 오늘날의 요르단에 주둔해 있는 1개 군단, 이것만으로도 7개 군단이 된다. 이집트의 2개 군단까지 소집하면 주전력만 해도7개 군단, 5만 4천 명이다. 로마군에는 보조병이나 특수 기능을 가진 병력이 딸려 있는 게 보통이니까, 파르티아 원정에 투입된 병력은 통틀어 10만 명이나 된다 전선기지는 시리아 속주의 도읍인 안티오키아다 로마 제국은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어도 방위에서는 언제나 임전태세에 있는 나라였으니까, 전략 요충마다 설치된 요새 설비며 군량보급 등 모든 것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국의 동맥이라 해도 좋은 가도망도 기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비된 상태였다. 흑해에서 시리아를 거쳐 홍해에 이르는 제국의 방위선은 이미 완성되어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1로마마일마다 세워진 이정표에는 건설 연도가 새겨져 있는데, 20세기에 발굴된 이정표는 모두 파르티아 전쟁 이전의 연도를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트라야누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흑해와 홍해를 잇는 방위선을 넘어 동쪽으로 쳐들어가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가을 햇살 속에서 로마를 떠나 아피아 가도를 남하하여 베네벤토에 이른 뒤, 자신이 확장한 아피아-트라야나 가도를 따라 브린디시로 향하는 트라야누스는 이번에는 여자를 대동하고 있었다. 아내인 플로티나만이 아니라 플로티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생질녀 마티디아까지 데려간 것이다 고관들이 임지에 아내를 데려가는 것은 로마 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평화롭고 안정된 속주에 부임할 때뿐이었고(소 플리니우스도 비티니아 속주에 부임할 때 아내를 동반했다) , 전쟁터에 여자를 데려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폼페이우스도 동방 일대를 제패하러 갈 때 아내를 데려가지 않았다. 카이사르도 갈리아 원정이 계속된 8년 동안 독신으로 지냈지만, 그것은 이혼해서 아내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령 아내가 있었다 해도 동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터에 아내를 데려가는 것은, 로마의 장수에게는 새삼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동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안토니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분개했다. 트라야누스는 아내와 생질녀를 안티오키아에 남겨두고 파르티아에는 데려가지 않을 테니까 걱정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리엔트의 도시들 중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수위를 다투는 대도시안티오키아도 전쟁이 시작되면 전선기지로 바뀐다. 일반 시민이나 원로원 의원들은 아무리 상대가 파르티아라 해도 트라야누스라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승리를 확신한 것은 트라야누스 자신이 아니었을까.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 땅에 상륙한다. 가는 길에 들른 아테네에는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의 사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절은 오스로에스를 대신하여, 파르타마실리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는 데 대한 허가를 트라야누스에게 요청했다. 트라야누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동쪽으로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리스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간 황제 일행이 소아시아 남안을 지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는 서기 113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사실은 아테네에서 교섭이 결렬된 것을 안 파르티아 왕이 안티오키아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이것은 몽니를 부리는 정도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트라야누스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파르티아군은 재빨리 철수했다. 시리아 속주의 도읍이고 파르티아 전쟁의 전선기지가 된 안티오키아에서 원정에 적합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트라야누스는 병력을 점검하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원정군을 선발하는 일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파르티아 전쟁을 기록한 동시대인의 문헌이 없는데다, 다키아 전쟁을 부조로 기록한 '원기둥'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카시우스 디오가 100년 뒤에 쓴 역사책을 추적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끈질기게 기록을 주워 모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카파도키아의 2개 군단, 시리아의 3개 군단, 유대의 1개 군단, 요르단의 1개 군단, 모두 합해서 7개 군단을 원정에 데려가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다만 군단을 통째로 데려간 것은 아니다 각 기지의 방위 병력으로 2개 대대는 남겨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7곱하기 6천 명이 아니라 7곱하기 5천 명 정도가 된다. 주전력인 군단병만 3만 5천 명인 셈이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트라야누스는 가까운 이집트에서 군단을 소집하지 않고, 라인 강 방위선의 1개 군단과 도나우강 방위선의 3개 군단을 유프라테스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것은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군단병이 되려면 로마 시민권을 갖고있어야 하지만, 동방에 주둔해 있는 군단은 로마의 개국노선에 따라 오리엔트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군단만 거느리고 원정에 나설 마음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뭐니뭐니 해도 다키아 전쟁 당시 그가 직접 지휘한 경험이 있는 병사들을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각 기지의 방위를 위해 2개 대대는 남겨둘 필요가 있으니까, 1개 군단에서 5천 명씩, 2만 명의 병력이 유프라테스 전선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주전력만 5만 5천 명이 된다 여기에 보조전력을 합하면 10만 명. 파르티아는 다키아보다 훨씬 대국인데, 무엇 때문인지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 때보다 적은 병력으로 원정을 감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서기 114년 봄, 트라야누스는 38세의 하드리아누스에게 안티오키아 방위를 맡기고 이곳을 떠난다. 다키아 전쟁 당시의 장수들이 그를 수행했다. 우선 제12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멜리테네(오늘날 터키의 말라티아)로 행군한다. 아르메니아 영토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곳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최전방 기지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었다. 멜리테네에서 로마 가도를 통해 계속 북상하여 사탈라(오늘날의 터키의 케르키트)에 이른다. 이곳도 제15군단의 기지다. 여기서 도나우 방면에서 이동해온 군단의 선발대와 합류했다. 트라야누스는 주변 국가의 왕과 족장들을 이곳으로 소집했다. 로마는 다국적군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작은 군주국이나 호족을 참전시킨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거주지에도 로마의 패권이 미치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모두 로마 황제의 소집에 응했지만, 아르메니아 왕 파르타마실리스만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전군에 명을 내려 에레게이아(오늘날 터키의 에르주룸)로 진군할 것을 지시했다. 에레게이아는 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의 접경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아르메니아 영토 안으로 진격이 시작된 것이다. 파르타마실리스는 에레게이아에서 트라야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르타마실리스는 변명했다.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것은 사탈라로 가는 도중 악시달레스 군대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의 전왕 악시달레스는 무능해서 폐위되었으며, 같은 파르티아 왕족인 자기가 대신 왕위에 앉는 것은 왕관을 씌워줄 권리만 로마 황제에게 있다는 네로 황제와의 협정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리고 트라야누스가 왕관을 씌워주는 데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다...... 이렇게 말한 다음, 파르타마실리스는 쓰고 있던 왕관을 벗어서 트라야누스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트라야누스는 대답했다. 네로와 맺은 협정에는 로마 황제한테 의논도 하지 않고 파르티아 왕이 멋대로 아르메니아 왕을 결정해도 좋다는 말은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고, 그리고는 파르타마실리스와 수행원들에게 물러가라고 말했다. 파르타마실리스 일행은 로마군 숙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몰살당했다. 이 보고를 받자마자 트라야누스는 카파도키아와 아르메니아를 통합하여 1개 속주로 삼는다고 발표했다. 새 속주의 총독에는 집정관을 지낸 카틸리우스 세베루스를 임명한다. 트라야누스는 전왕 악시달레스가게 왕위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파르타마실리스가 살해된 지금, 로마도 파르티아도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정면 대결에 돌입하게 된다.
트라야누스의 명령을 받은 장수들은 각자 맡은 병력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우는지 서로 경쟁하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시우스 퀴에투스가 이끄는 기병대의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로마 세력권의 경계가 되어 있었던 유프라테스 강을 떠나 티그리스 강 상류까지 진격한다. 그 해 여름에는 벌써 이 일대의 주요 도시인 니시비스(오늘날의 누사이빈)가 함락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오늘날 터키 ·시리아·이라크의 접경 지역)는 모두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도 본격적인 회전 한번 치르지 않고 제패한 것이다. 승전보를 접한 수도 로마 시민들은 열광한다. 트라야누스는 그동안 사양했던 '지고의 황제' 존칭을 받겠다고 원로원에 통보했다. 그러나 짧은 가을과 길고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병들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트라야누스도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겨울을 났다. 전쟁 2년째인 서기 115년 봄부터 가을까지 로마군은 동쪽과 남쪽으로 제패의 고리를 넓혔다. 트라야누스 자신도 티그리스 강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제패가 끝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로마의 속주로 삼는다고 발표했다. 이 경계선이 정착되면,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은 흑해에서 시리아를 지나 홍해에 이르는 선이 아니라, 카스피해에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홍해의 출구인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선이 된다. 트라야누스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아니면 패권을 더욱 넓혀서 파르티아 왕국까지 정복하여 인도와 직접 국경을 맞대는 것까지 꿈꾸고 있었을까. 몇 년 전 인도 사절이 로마를 방문하여 트라야누스와 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사절도 로마를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쨌든 115년 말에는 원로원이 승리를 기뻐한 나머지, 성급하게도 '파르티쿠스'(Parthicus, 파르티아를 제패한 자)라는 존칭을 트라야누스에게 선사하기로 결의했다.
트라야누스도 전과에 만족했는지, 그 해 겨울에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트라야누스가 머물고 있던 안티오키아를 지진이 덮쳤다. 황제도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트라야누스는 미신 따위를 믿지 않는 남자였지만, 병사들 중에는 이 사태를 흉조로 받아들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찍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번성했던 지방의 완전 제패를 목표로 내건 서기 116년, 봄이 오기를 기다려 안티오키아를 떠난 트라야누스는 남하해온 군대를 이끌고 우선 동쪽으로 진군하여 티그리스 강에 이른다. 여기서 강을 따라 남하하여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향한다. 이 루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로와 같지만, 대왕을 본받고 싶어서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선인들, 특히 알렉산드로스처럼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가진 인물이 대규모 행군에 적합한 길로 개척한 루트는 누구나 답습할 수 있다. 고대의 항구가 오늘날에도 항구로 활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450년 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지나간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생각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오늘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근처) 공략전은 문헌 사료조차 없는 상태여서 그 경과를 전혀 알 수 없지만, 별 어려움 없이 함락시킨 모양이다.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배로 운반되어온 로마식 공성기가 처음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는 수도가 함락되기 전에 도망쳤다. 로마군이 손에 넣은 것은 황금 옥좌와 공주 한 명이다. 병사들이 수도를 완전히 제압하는 동안, 트라야누스는 참모들을 거느리고 크테시폰에서 멀지않은 고도 바빌론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젊었다면 인도까지 진격했을 텐데" 파르티아의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근엄한 태도를 좀처럼 흩뜨리지 않는 원로원 의원들도 벌떡 일어나 환호하며, 트라야누스 황제는 마음대로 개선식을 거행해도 좋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편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을 원정했을 때보다 세 배나 나이가 많은 트라야누스는 동쪽으로 가는 대신 남쪽으로 내려갔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드는 페르시아만에 족적을 남긴 것이다. 로마 황제들 가운데 이곳까지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커녕 군단장급도 없었다. 페르시아만이 로마의 패권 아래 놓이게 되면, 오리엔트와 서방을 잇는 통상로인 흑해와 페르시아 만과 홍해는 모두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동방과 서방의 중개 역할을 맡았던 파르티아의 중요성은 크게 줄어든다. 로마가 파르티아 문제를 쉽사리 해결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양대 축으로 삼고있는 로마 제국의 동방 일대가 오리엔트 물산의 중개역으로 파르티아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국 동방의 경제적 안정이 확보되어야만 서방을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도 평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르티아 왕국이 지상에서 사라져준다면-하다 못해 페르시아 만 동쪽으로 쫓겨나 약소국이 되어준다면-로마 제국 동방의 경제를 짊어지고 있는 그리스계 주민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에 용기를 얻은 선조들처럼 활동범위를 계속 동쪽으로 넓혀갈 것이다. 지금도 파르티아 국내에는 징검돌처럼 그리스계 도시들이 흩어져 있는데, 그것도 알렉산드로스가 남겨두고 간 선물이다. 로마와 파르티아를 가로막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이라는 경계를 치워버리면, 같은 그리스계니까 쉽게 공존 공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라야누스가 왜 파르티아 전쟁을 결행했는지는, 거기에 바싹 다가갈 수 있는 사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의식하고 있었다면, 파르티아 전쟁을 결행한 것은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이나 끝없는 영토욕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이 남긴 유산-동방과 서방 사이에 인적, 물적 교류의 촉진-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시절의 서방과는 달리, 로마 제국의 서방은 교류할만한 사람과 물자를 많이 생산하고 있었다. 이런 교류를 현실화하는 데 성공하면, 그때야말로 트라야누스는 명실공히 '지고의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결국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파르티아 왕국은 전제군주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군주 밑에 관료기구가 정비되어 일사불란하게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는 형태의 왕국이 아니다. 각처에 할거하는 호족들을 왕이 통합하는 형태로 국가가 성립되어 있다. 그래서 왕실이 후계자 문제로 내분에 빠지면, 각지의 토호들은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는 결함을 안고 있었다. 같은 페르시아계 국가라 해도, 알렉산드로스가 쳐들어갔을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과는 다른 형태의 국가였다. 하지만 외적이 쳐들어왔을 경우에는 이런 형태의 국가가 더 유리했던 것 같다. 각지의 토호들은 정복당하면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로마는 정복한 땅의 유력자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정복자의 가문 이름까지 주면서 통치기구의 일원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민족 말살로 끝난 다키아 전쟁의 전후 처리는 파르티아의 호족들에게 달콤한 꿈을 꾸는 허락하지 않았다.
각지의 토호들이 저마다 보유한 병력을 이끌고 도망중인 국왕 밑에 집결하여 로마에 대항한다면, 트라야누스도 훨씬 대처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처음에는 15만 명, 다음에는 30만 명이라는 대군을 집결하여 알렉산드로스와 맞서 싸운 것과 똑같은 형태가 된다. 트라야누스는 비록 알렉산드로스 같은 천재형 무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끌고 있는 병력은 넓은 전쟁터를 무대로 전술을 구사하는 회전 타입의 전투에서는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로마 군단이었다. 페르시아만에 도달한 것으로 만족했는지,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겨울을 나기로 결정한다. 유프라테스 강을 중류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음, 거기서부터는 로마 가도를 따라 서쪽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마자, 이를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일제히 봉기했다. 도망중에 있는 오스로에스 왕과 연락을 취한 뒤에 봉기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토호들이 서로 짜고 봉기한 것이지 여부도 확실치 않다. 어쨌든 제패한 땅에 남아 있던 로마군에 대해 파르티아 진영은 게릴라 전법으로 맞섰다. 파르티아 왕국이 존망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라기보다 토호들 자신이 저마다 존망의 위기에 빠졌다고 느끼고 봉기한 것이다.
정규군은 싸움에 이기지 않으면 지지만, 게릴라는 이기지 않아도 지지 않는다. 로마군은 제패한 뒤 요새화한 도시에 갇힌 채 꼼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군단장이 게릴라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전사하는 피해까지 입었다. 안티오키아의 트라야누스에게 들어오는 보고서들은 모두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봉기의 불바다로 변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대공세로 나가면 불을 끌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을 끈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군사력으로 계속 제압하려면 파르티아 전쟁에 투입한 11개 군단을 메소포타미아 땅에 못박아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방위선은 동방만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제패에 필요한 이 값비싼 대가를 제국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안티오키아 총독 관저에서는 아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을 트라야누스 휘하에서 치른 장수들은 로마 제국의 명예를 위해 대반격을 결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모양이지만, 트라야누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알려져있는 것은 그때까지 병이라고는 몰랐던 황제가 병에 걸려 쓰러졌다는 것뿐이다. 게다가 63세가 된 트라야누스의 걱정거리는 파르티아만이 아니었다.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제패하고 있던 서기 115년, 유대 지방에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원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리스계 주민과의 대립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이웃인 그리스인에 대한 증오가 패권자인 로마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그리스인도 경제의 달인이지만, 유대인도 그에 못지 않은 경제의 달인이다. 따라서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는 어렵고, 그것이 민족 감정을 격화시키기 쉽다. 또한 일신교를 신봉하는 유대교도는 공존을 거부하고 독립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로마가 파르티아에 전념하고 있는 이때야말로 반란을 일으킬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는 로마 제국 안의 속주다. 로마인들에게 속주민의 반란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배후에서 등을 찌르는 배신행위로 보였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지만. 또한 그리스인이 교역의 민족이라면, 유대인도 통산의 민족이다. 유프라테스 강 서쪽과 동쪽의 그리스인 사이에 연락이 있었으니까, 로마 영토 안의 유대인과 파르티아 영토 안에 사는 유대인 사이에도 당연히 연락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는 파르티아가 유대 반란을 배후 조종하고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의 유대인 거주구역이 게릴라 전법으로 로마군과 맞서는 파르티아인의 후방지원을 맡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유대 땅에서 일어난 반란의 불길은 이집트로, 키레나이카로, 키프로스 섬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은 로마 군단기지는 습격하지 않는다. 습격의 창 끝은 그리스계 주민의 상점이나 농장으로 돌려진다. 휘하에 2개 군단을 두고도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아서 반란을 확대시킨 이집트 속주 장관은 해임되고, 대신 파견된 젊은 무장 투르보의 활약과 그리스계 주민의 협력으로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키프로스 섬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원형경기장에 가두어놓고 마구 학살할 만큼 반란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곳의 반란은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한 제7군단을 보낸 뒤에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유대인은 추방되었다. 이 키프로스에는 그 후 유대인인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 금지령을 어기면 사형이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는 일단 성공했지만, 불길이 완전히 진화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남은 불씨가 연기를 내고 있었다. 파르티아의 서부 일대에 퍼진 게릴라를 완전히 제압해야 할 117년의 봄이 찾아왔는데도, 트라야누스는 동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 해 7월 말에 안티오키아를 떠나긴 했지만, 행선지는 로마였다. 아내 플로티나와 생질녀 마티디아가 중병에 걸린 황제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황제를 태운 배는 서쪽을 향해 떠났다. 파르티아 원정군 총사령관에는 하드리아누스가 임명되었다.
죽음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항해도 길지는 않았다. 소아시아 남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트라야누스의 병세가 급변했다. 가까운 셀리누스(오늘날의 가지파샤) 항구에 배를 대고, 거기서 병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서기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 황제는 눈을 감았다. 64세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20년 간에 걸친 치세를 끝낸 것이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간소한 화장이 끝난 뒤, 아내 플로티나와 생질녀 마티디아와 근위대장 아티아누스가 유골을 안고 로마로 여행을 계속했다. 대망을 가슴에 품고 동방으로 떠난 뒤 4년 세월이 지났다. 귀국한 황제를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장례식이 아니라 개선식으로 맞이했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 위에 안치된 것은 유골을 담은 항아리였다.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은 869년의 로마 역사상 처음이었다. 평판이 좋았던 황제인 만큼, 트라야누스의 초상은 19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 앞에 서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맹렬히 애를 썼습니까?"
물론 대리석이 대답할 리는 없다. 그래서 대답은 질문한 내가 대신하지만, 이런 것을 학문적으로 바꿔 말하면 가설이 된다. 사전에 따르면 가설은 어떤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가정이라고 풀이되어 있지만, 요컨대 상상이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공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실을 토대로 한 상상이다. 그래서 나는 트라야누스의 속마음을 짐작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남들보다 훨씬 노력한 까닭은, 속주 출신으로는 최초의 황제였기 때문이오."
흔히 있지 않은가. 여자로는 처음이니까, 또는 동양인으로는 처음이니까 남들보다 훨씬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쨌거나 진심으로 성실하게 황제의 책무를 수행한 것이 20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린 트라야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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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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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섬 - 장 그르니에/김화영 옮김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여행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우리들 속에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것도 가치를 갖지 못한다. 여러 날 동안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교회와 공원과 전람회를 구경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남는 것이란 라람블라 산 호세의 풍성한 꽃향기뿐이다. 기껏 그 정도의 것을 위하여 구태여 여행을 할 가치가 있을까? 물론 있다. 바레스이 글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톨레도를 비극적인 모습으로 상상할 것이고, 대성당과 그레코의 그림들을 구경하면서 감동을 느끼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오히려 발길 가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분수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편이 더 좋다.
톨레도나 시에나 같은 도시에 가면 나는 철책을 한 창문들이나 분수에서 물이 흘러 나오는 안뜰. 그리고 요새의 성벽처럼 두껍고 높은 벽들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밤에 창문 하나 없는 그 거창한 벽들을 따라 거니노라면 마치 그 벽돌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만 같았다. 저 방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기 마련인 저 방벽, 항상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을 것 같은 저 신비――그런 모든 것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란 바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종류의 사랑 말이다.(조르조 상드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사랑 따위는 물론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인도의 종교인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콜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썻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 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그 멀미 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잊어버린다. (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인식(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이미 끝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특별한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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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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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3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서기장이 글 속에서 관직을 잃은 슬픔에 관해 언급한 곳은 몇 안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쓰디쓴 맛을 느끼게 한다. 아마 가장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경우는 그가 면직 이후의 시기를 표시하기 위해 적어놓은 간결한 문체의 (모든 것을 잃은 뒤 post res perditas) (이 어구는 1512년 메디치 가의 복귀로 마키아벨 리가 공직에서 해임되어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은거하게 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는 이 말을 자신의 (피렌체 곤사조직론 Discorso dell'ordinare lo stato di Firenze alle armi) (1506)의 개인 소장 사본에다 써놓았다. 또한 그의 글 (민병대 옹호론 La cagione dell'ordinanza, dove la si truove, ... Post Res Perditas) (1512)에서도 같은 글귀가 보인다-옮긴이)라는 구절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몰락과 불행을 조국인 자유 공화국의 몰락과 불행에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그가 그토록 충직하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국가에 봉사한 대가치고 타격은 너무 컸고 사정은 너무 불공평하였다. 그처럼 항상 바삐 돌아다니기만 하던 사람에게 해임 직후의 빈둥거리는 나날들이란 장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라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정무궁 집무실에서 온종일을 보내던 그가 집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다보니, 자신이 다욱 작고 옹색하게 느껴졌으리라. 바깥이라고 나가보았자, 비열한 인간들과 안면을 바꾼 사람들로 인해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한 대는 공화국의 서기장에게 친밀하게 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외면하거나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그의 불행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그는 이제 겨우 내리막길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었다. 관직을 배앗은 것은 그것만으로 볼대는 다만 새 정부가 자신들에게 좀더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사람들을 원한다는 뜻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서기국을 통치에 이용한다는 것은 메디치 가의 오랜 방식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해임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난이었고 처벌이었으며 복수였던 것이다. 이는 오래지 않아 명백히 드러난다. 11월 10일, 정무위원회는 그에게 일 년 간 피렌체 영토를 벗어나지 말것과 1,000피오리노 금화를 보석금 조로 납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큰 액수의 돈은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친구 세 사람이 대납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마키아베리의 심장을 또 하나의 비수로 찌르는 격이었다.
그에게 이어서 일어난 일은 비유하자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사건이었다고 할까. 11월 17일(앞 뒤 시간 간격이 짧은 것 자체가 일을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 정무위원회는 그가 1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했던 정무궁에 12개월 간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곧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를 그곳에 데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면서 말이다! 당시 그는 민병대에 봉급을 주기 위해 큰 액수의 돈을 만졌기 때문에 회계 관계를 설명코자 정무궁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출입이 금지된 문턱을 넘게 해주십사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한때 자신의 서기보였지만 이제는 마치 이단 신문관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돈 계산을 한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을 지닌 그로서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 메디치 가의 옛 서기장이자 지금은 그들을 위해 정무위원회를 염탐하고 있는 니콜로 미켈로치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의심에 찬 얼굴과 피하는 듯한 목소리를 대하는 것도 모두가 고통스러웠다. 이러한 일들을 12월 1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아르노 강 너머의 초라한 집에 웅크리고 있는 니콜로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더없이 슬픈 날이었다. 그의 식탁 위에는 산탄드레아의 맛있는 시골 빵과 가능성 없는 희망이라는 버터가 놓여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메디치파와 유력 시민들의 원한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법하다. 그의 식탁에 오른 것은 소데리니를 쫓아내되 자신은 폭군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보냈던 메디치 추기경을 향한 그 불 같은 교황의 분노와, 또다시 피렌체 정부를 바꿔놓겠다는 그의 엄포와, 신정부에 대한 의심으로 분통을 터뜨리던 일부 시민들의 불만이라는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특별히 마키아벨리를 살찌울 만한 것은 없었다.
정권에 불만을 가진 인물들 중에는 아고스티노 카포니와 피에트로 파올로 보스콜리가 있었다. 둘 중 하나가 18명 내지 20명의 명단이 올라 있는 문서 하나를 잃어버렸고, 8인감찰위원회가 이를 입수하게 되었다. 명단에 나온 사람들을 모두 의심스럽게 본 그들은 더 조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즉시 체포된 카포니와 보스콜리의 입에서 그들이 추기경을, 또는 딴 사람에 의하면 줄리아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백이 흘러나왔다. 이는 당시로서는 흔하게 보던, 칼보다는 펜을 가지고 하는 평범한 모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이 경우, 모의자들은 고전에서 그러한 영감을 얻긴 했지만 그 생각 자체가 매우 솔직담백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해를 끼칠 만한 성질의 것은 못 되었다. 점잖고 학식있는 인물로서 사보나롤라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피에트로파올로의 마음속에서는 브루투스와 그리스도가 갈등하고 있었다. 모의자들은 이 명단에다 자신들이 아는 친구나 또는 반메디치적이라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들 중 그들이 만난 사람은 니콜로 발로리와 조반니 폴키뿐이었는데, 둘은 그들을 차갑게 대했다. 그러므로 이 모의는 그럴 듯한 기반도 없고 실제 진행되지도 못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8인감찰위원회는 주저 없이 명단에 적힌 사람 모두를 체포하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7번재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경찰이 그를 붙잡으로 갔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아직도 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정무궁 내의 친구 누군가가 미리 알려준 덕분에 스스로 몸을 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딴 곳에 가 있었을 것이라는 편이 더 그럴 듯하다. 체포에 실패하자, 그들은 (메쎄르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의 아들 니콜로가 어디 있는지 알거나 그를 숨겨주고 있는 사람, 혹은 누가 그를 숨겨주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란죄로 몰려 자신의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으려면 한 시간 안에 그를 고발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는 즉시 출두하였고, 그 자리에서 투옥되어 다른 혐의자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보스콜리와 약간 아는 사이이며 발로리 및 폴키와 친구라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지 못했다. 혹여 있다면, 그들이 최근 몇 달 사이 그에게 가한 위해를 두고 그가 메디치 가를 조롱 조로 입에 담은 적이 있다는 것 정도엿다. 하지만 그가 하지도 않은 그 일조차도, 체포되어 고문 끝에 나온 다른 사람들의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따. 푸네 fune(밧줄로 죄인의 손을 뒤로 묶어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형벌-옮긴이)는 네 번이면 보통 심신이 기를 잃기에 충분한 횟수였다. 이것으로 모자랄 대는, 사지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는 고문이 되다른다. 니콜로는 6번 매달렸다. 그는 이를 (스스로도 대견해할 만한) 기백과 강인함으로 이겨내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은 감옥에 갇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비로소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이 어두운 구멍 속에 빠져버린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인식하려고 애썼다. 팔다리가 고문으로 찢겨진 데다 수갑과 족쇄로 꼼짝달싹 못하게 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그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들 찼고, 이는 다시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켯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염려했다. 그는 스스로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처럼 자신에게 가당찮은 불운에 의해 굴욕을 겪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로서는 사태가 나쁘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는 새 정부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국정을 다스리는 데 매우 엄격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문을 꿋꿋하게 잘 이겨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을 엉뚱하게 걸고 넘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동생인 토토가 사건 즉시 로마에다 전령을 보내 (정부의 인색함 때문에 그가 사절 시절 도무지 누리지 못했던 사치) 교황청에 대사로 가 있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사건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베토리가 (자신만을 아는) 사람이고, 설사 도와줄 마음이 별로 있다고 해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2월 23일 동틀 무렵, 그는 장송곡 소리에 잠을 깼다. 카포니와 보스콜 리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서기장의 신앙심은 별로 두터운 편이 못 되었다. 혹시 쓸데없는 경거망동으로 자신을 파멸시켜 버린 그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동정심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별안간,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쳤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들이 줄리아노의 인간성, 점잖음, 관대함을 한껏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시인들과 벗하는 대단히 품위 있는 사람이며, 뮤즈의 신들과도 친분이 있다고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편지를 한번 써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에 대한 허락을 받고는 필요한 물건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성격상 소네트를 쓰는 사람이지 비탄 조의 탄원서를 쓸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웃음으로 지키고, 숨을 때도 언제나 웃음 뒤에 숨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지의 고통과 죽음의 면전에서도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조소를 되찾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저는, 줄리아노 님이여, 양다리엔 족쇄를 하고
어깻죽지엔 여섯 번을 궁중에 매달린 상처가 있습니다.
다른 불행은 아예 말씀 올리지 않겠습니다.
시인이란 으레 이런 식으로 대접받으니까요.
부서진 벽에서는 이가 득실댑니다.
하도 크고 살져서 흡사 나방 같지요.
그런 고약한 냄새는 아직까지 없었을 겁니다. 롱세스발리에스에서도
혹은 사르데냐의 수풀 속에서도.
저의 이 멋진 방에서만큼은 말입니다.
땅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 하며,
제우스와 몬지벨로(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옮긴이)가 내려치듯이.
수형자 하나가 사슬을 차면, 다른 하나는 사슬을 풀고,
열쇠와 자물통을 시끄럽게 찌그럭대면서.
그리고 공중에 높이 매달린 또 누군가의 비명소리!
저를 제일 슬프게 하는 건 말이죠.
잠이 들어 새벽이 어슴푸레 다가올 때,
들리기 시작하는 이런 소리.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원컨데 제발 그런 목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를 저에게 베푸시어.
그리고, 대인이시여,
이제는 그만 이 끔찍한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한 수의 시는 다른 시를 부르는 법. 그는 소네트 하나를 더 지어 앞의 것과 함께 보냈다. 혹은 며칠 뒤에 보낸 것 같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마치 뮤즈가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와 그렇게 신세 한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가 이름을 대자, 뮤즈는 그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콜로나니! 당신은 다초야.
다리며 발꿈치며 모두 꼼짝달싹 못하고
광인처럼 사슬로 채워져 있는 걸 보니.
안드레아 다치(위의 시에 나오는 다초가 지칭하는 실제 인물-옮긴이)는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학생으로, 당시 정체가 심한 편이던 피렌체 문필계란 바다에서 어떻게든 떠 있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 농담은 재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재기가 넘치는 줄리아노에게 틀림없이 즐거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3월 7일 재판이 끝났다. 발로리와 폴키는 2년 간 볼테라의 지하 감옥에 갇히는 벌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단기간의 추방이나 벌과금의 형을 받았다. 니콜로는 다시 숨쉴 수가 있었다. 그는 자유를 되사기 위한 돈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려난 것이 오직 소네트 덕분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사실 그는 뒤에 가서 자신의 방면이 줄리아노와 파올로 베토리 덕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줄리아노에게 소네트와 그의 시인됨을 잘 말해 주어 그로 하여금 더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파울로였을 것이다.
한편, 2월 21일 줄리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카포니와 보스콜리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인 22일에 메디치 추기경은 로마를 향해 떠났다. 3월 6일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갔던 그는 11월 레오네 10세라는 이름의 교황이 되어 나왔다. 그 소식은 정말 놀랍게도 바로 그날 안으로 피렌체에 전해졌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메디치파로 변했다. 그들은 각각 동료 시민으로서 씀씀이가 후한 교황으로부터 공사 양면으로 기대할 만한 명예와 이익을 떠올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광란의 상태에 빠졌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가가호호 문 앞에서, 닷새 동안 쉬지 않고 축제의 화톳불이 타올랐으며, 태울 만한 땔나무나 나뭇단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마루판이나 지붕의 나무 판자, 나무 통, 목가구까지 태웠다. 흡사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것 같았다. 때는 사순절(참회의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뿌리는 성회례를 시작으로 부활절 전야에 이르는 40일 간을 말함. 황야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뜻에서 단식과 참회를 함-옮긴이) 기간이었으나, 사람들은 마치 사육제라도 되는 양 가장행렬용 마차들을 만들어 매일 저녁 메디치 가 건물 앞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불태웠다. 평화의 여신을 모신 마지막 남은 마차 한 대는 새 교황 아래서는 전쟁이 끝난다는 뜻에서 불태우지 않았다. 감옥 문이 열렸고, 모의죄로 형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벌과 금과 잔여 형기 모두가 면제되어 방면되었다. 곧이어, 소데리니까지도 사면되었다.
그래서 (이 도시 전체가 환희의 도가니에 빠진 가운데), 마키아벨리는 그 악취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 이미 봄의 향내가 풍기는 피렌체의 감미로운 미풍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는 마치 오랜 중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생명을 얻은 기분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도망쳐 나오 삶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느낀 것이다. 2일 간을 창고에 묶여 있던 후에 다시 맛보는 자유란 더 기쁜 것이었다. 심연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가다가 그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그는 이제 그 비탈을 다시 기어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메디치 군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여 그들에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의심을 총애로 바꾸어놓아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기 작가들과 문학사가들의 견해화는 반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축복받은 영혼들에 대한 찬양 Canto degli Spiriti beati)의 저술 시기를 바로 이 당시로 비정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앞서 언급했던 평화 여신의 개선을 노래학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시를 쓰려고 했더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 투옥중에도 풍자 조의 시구들을 읊었던 그가 아니던가. 그것은 사육제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임직한 것들 중에서 사육제적 분위기와는 가장 거리가 먼 작품이며, 사실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긴다. 여기서 그는 전임 교황의 통치기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을 피로 물들였던 긴 전쟁을 한탄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라
우리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삶으로써.
그는 또한 신의 증오와 분노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주께서 당신의 왕국을 보시니
점점 사그라드는구나. 당신의 양떼까지도.
새 목자가 잘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를 (새 목자)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다른 수단도 강구하고자 했다. 그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쓴 3월 13일자 편지에서, 베토리가 (하지도 않았던) 일을 들먹이며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교황의 시종이 되고 싶어하는 동생 토토를 추천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가능하다면 나를 교황 성하의 기억 속에 넣어두어 당신께서든 당신의 가족들이든 나를 쓰고자 생각하도록 해주게나. 그리 된다면 나는 기필코 자네에게 명예가 되고 나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네.) 그러나 베토리는 자신이 마키아벨리의 일을 추기경에게 말씀 올리기 위해 교황 선출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 피사 원병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막상 그가 풀려나왔을 때는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면서, (이전에 닥쳤던 다른 불운들도 참아내었던 것처럼, 이번의 박해도 오히려 기쁜 마음르로 털어내버리라)고 위로하고 (언제나 낙담만 있는 것은 아닐 거라)며 희망을 가지라는 듣기 좋은 말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단지 말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따뜻함에 마키아벨리는 기운을 차렸고 다시 희망을 되살리게 되었다. 그는 3월 18일 친구에게 답장을 쓰는데, 여기서 그의 마음과 그의 펜은 최근 자신을 덮쳤던 사건들로 되돌아간다. (운명에 감연히 맞서는 일에 대해서라면, 난 나 자신의 불운으로부터 자네가 무언가 즐거움을 얻길 바라겠네. 나는 그러한 불운을 꽤 잘 이겨냈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 대해 기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놈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일세. 그리고 만약 새로운 주인께서 내가 여기 이대로 있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나는 분부를 기꺼이 받들어 당신께 기쁜을 주는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다고 확신하네. 만약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난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만 하겠지. 원래가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던 나니가 말일세.) 이러한 말을 여기에 옮기는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를 대하는 독자들 역시 바로 이 말 때문에 그를 반드시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렇듯 보편적인 기쁨을 느긋하게 맛보면서,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생의 나머지를 즐기겠다)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삶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이 꿈 저 꿈 속에서 대사 친구가 교황에게서 얻어다줄 도움을 기다리는 한편, 그는 자신이 직접 줄리아노에게 스스로를 알리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산탄드레아에서 잡은(사냥 시즌의 마지막 무렵에!) 개똥지빠귀를 새로 지은 소네트 한 수와 함께 그에게 보낸 것도 아마 바로 이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통상적인 경우와는 달리, 선물 때문에 소네트를 지은 것이 아니라 소네트 때문에 선물을 한 것이었다.
줄리아노 님, 여기 몇 마리 개똥지바귀를 보냅니다.
이 선물이 귀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가엾은 마키아벨리를 잠시라도
대인께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
그는 계속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이 새들을 보내는 것은, 만일 그의 주변에 남을 (깨물고) 중상모략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깨물게) 하여 더 이상 남을 (깨물지) 못하다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새들이 보잘것없는 크기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저 역시 보잘것없지요. 그들도 알다시피.
하지만 저를 멋있게 한 입 가득 베어먹었죠.
줄리아노가 그에게 호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맙다는 말이나마 전해주었는지 어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호의의 샘, 아니 아리오스토의 풍자에 나오는 호의의 우물은 로마에 있었으나, 그곳에는 아이의 대부에다가, 스스로 친구라고 말하고 그러한 샘을 두드릴 만한 최상의 위치에 있던 한 인물, 프란체스코 베토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엾은 마키아벨리)에게 돌아갈 물은 없었던 것이다. 피렌체인 교황의 귀를 열게 하고 그의 호의를 받아내는 데 피렌체인들의 대사 이상 더 적당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베토리는 3월 30일자 답장에서, 자신은 별로 교황의 총애를 받고 있지 못하며, 단지 명목적이고도 의례적인 일에 불과한 토토에 대한 부탁조차도 확답하기 힘든 지경이라고 썼다. 물론 그가 실제로 마키아벨리를 위하여 이러저러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저히 친구에게는 그대로 전하기 힘든 대답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성품으로 볼 때, 교황의 나쁜 성질을 보았거나 그러리라고 짐작하면서 아예 그토록 골치 아픈 일에는 뛰어들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편지는 그렇지 않아도 의기소침한 니콜로를 더욱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고, 마지막 남은 한 줄기 희망마저도 빼앗아가 버렸다. 그는 베토리에 대한 답장에서, 그가 전해 준 쓰디쓴 소식에서 느껴지는 대로 무언가 경계하고 무언가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는 답답함이 그를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롭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토토의 교황 시종 건에 대해서도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하고 있지 않네. 그리고 만약 토토가 시종 명단에 오를 수 없다면, 되는 대로 그냥 놔두게나.)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부탁한 이 모든 일 때문에 자네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지 말기 바라네. 만약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자네에게 화내는 일은 없을 것이네.) 물론 그는 그만한 일로 화낼 사람은 아니었다! 이 편지를 베토리의 답장과 비교해 볼 때, 마키아벨리의 사람됨이 그보다 얼마나 더 크게 보이는가!
그러나, 비록 그가 그토록 희망에 부풀어 시작한 친구와의 서신 교환에서 아무런 실질적 이익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와 더불어 세상사를 논하는 재미였다. 하지만 이 재미도 스스로가 기대했던 것과는 항상 반대로 움직이는 듯한 사건들 때문에 점점 시들해져 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가지 자네의 머리를 망상으로 가득 채우는 일만 한 셈일세.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나의 운명은 비단이나 양모 짜는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고 잇속을 남기거나 밑지는 일에도 문외한이니, 정치에 대해서밖에 더 얘기할 수 있었겠나. 아예 입을 닫고 있든가 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든가를 내 자신부터 결정해야겠네.) 그는 편지 말미에다 다음과 같이 씁쓸한 서명을 남겼다. (전 서기장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가 베토리에게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면, 피렌체식의 걸쭉한 농담이나 서로 아는 친구들에 대한 재미있는 주변사를 전하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이 농담 조의 말 중간에 페트라르카의 시구를 불쑥 들이밀고 있다.
때로 내가 웃고 노래한다 해도
그건 단지 이렇게 하는 것이
내 괴로운 눈물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지.
이렇게 그의 웃는 얼굴 뒤에는 슬프고 불행한 얼굴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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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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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요람을 흔드는 손
미국의 법률가이며 수필가인 윌레스(W. R. Wallace, 1819 ~ 1833)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남자는 강하다고 말을 하지만
그들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을 하지만
요람을 흔드는 어머니들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첨병들이다
They say`that man is might,
He governs land and sea,
For 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
Is the hand that rules the world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이를 교육을 시킨다고 하였다. 태교가 그것이다.
맹자의 어머니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는 데 삼천지교와 단기지교로 가르쳤다. ‘삼천지교란 맹자 어머니가 맹자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맹모삼천이라고도 한다. 단기지교에 대해 알아보자 하루는 유학가 있던 맹자가 공부를 견디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자고 있던 베틀의 베를 칼로 끊어 버렸다.
“어머니, 왜 베를 끊어 버리십니까?”하고 맹자가 놀라서 묻자,
“네가 학문을 그만두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는 것과 같다. 네가 학문을 그만두면 다른 사람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듯이, 나 역시 베를 짜다 그만두면 남의 집 가정부로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맹자는 어머니 말씀에 크게 깨달아 배움에 힘을 써 천하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사인선사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지만 바로 그 남자를‘요리’하는 것은 여자이다.‘베갯밑공사에 이겨낼 장사가 없다’고 하듯이 잠자리에서 아내가 속삭이는 말을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장수를 쏘아 맞추려면 그가 타고 있는 말을 먼저 쏘아야 한다고 하듯, 상대방에게 청할 일이 있으면 우선 ‘사모님’을 집중 공략하여야 한다. 요람을 흔드는 손이 세계를 지배한 다.(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 rules the world) 요람을 흔드는 손이란 어머니를 뜻한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키울 때 좋은 영향을 미치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가는 역군으로 활약한다는 말이다.
연습
처음 자전거를 탈 때는 균형을 잡지 못해 자주 넘어지지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넘어지지 않고 탈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숙달되기 전까지는 배우기가 힘드는 법이다. 익혀서 안 될 일은 없다는 말처럼 같은 잘못이라도 되풀이 하다 보면 기술이나 능률이 오른다.
매미잡는 꼽추
공자가 숲길을 가다 물건을 줍듯이 산 매미를 잡고 있는 한 꼽추를 만났다. 공자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솜씨가 아주 좋으데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요?" 그가 대답했다.
“방법이 있지요, 대여섯 달 동안 장대 끝에 공을 두 개 포개어 얹고 떨어뜨리지 않게 되면 봇 잡는 일이 적지요. 공 세 개를 그렇게 얹어놓고, 떨어뜨리지 않으면 이렇게 밤 알을 줍듯이 잡게 됩니다.”
그는 공자에게 “내 몸은 다른 사람보다 자유롭지 못하지만, 내 몸을 말뚝처럼 꼼짝하지 않고 나뭇가지같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매미의 날개만 봅니다. 이렇게 마음을 팔지 않으니 매미를 알밤줍듯이 잡습니다”라고 말했다.
한 우물을 파라
주리반특은 어리석기로 소문나고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인하는 석가의 제자이다. 석가는‘스스로 어리석음을 깨닫고 있는 어리석을은 어리석음이 아니다’고 그에게 말하고‘먼지를 털고 때를 벗어라’는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어리석었지만 이 말 한마디를 빗자루를 들고 정사 구석구석을 티끌없이 깨끗이 하는 일을 오랜 세월동안 계속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석가가 한 말의 오묘한 경지를 터득하여 인간 번뇌의 티끌까지 벗어버리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 석가의 큰 제자가 되었다. 사람이란 많은 것을 알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눈 것보다 어리석지만 파고들어 한 가지라도 이루어내는것이 중요하다.‘열두가지 재주에 저녁거리가 없다’는 속담은 이런 점을 무시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익혀서 안 될 일 없다(Practice makes perfect.)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듯이 무슨 일이나 반복하여 열심히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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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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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이 혼자서 - 주요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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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차올리 아침 해 - 권기환
아이들이 차올렸다.
아침 해를
노을이 타는 어제
차올린
그 아이들 풋볼이
꼬꼬 새벽을 딛고
하늘에
떠올랐다.
아침해로
바람을 휘젓고 날으던
어제 그 아이들, 함성도
참새 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째째짹......
까치 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까악, 깍......
고운 햇빛으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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