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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2호 - 2024.9.15. 일요일(음력 : 8.13.)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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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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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한 사람이 백명의 학교 스승보다 낫다. - 조지 허버트(英 시인, 1593~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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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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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사흘 앞으로 다가 왔다. ‘추석(秋夕)’은 예기(禮記)의 ‘춘조월 추석월(春朝月 秋夕月)’이란 기록에서 옮겨온 것으로, 가을밤인 추석에 1년 중 가장 밝은 달빛을 볼 수 있어 상고시대부터 농경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석’을 ‘중추절(仲秋節)’이라고도 부르는데, 가을의 계절인 음력 7, 8, 9월 중 음력 8월이 가을의 중간이고 또한 15일이 8월의 중간이기 때문에 ‘가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명절’이란 뜻에서 추석을 중추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추석을 우리 고유의 표현으로는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그럼 ‘한가위’의 어원은 무엇일까. 먼저 ‘가위’는 ‘음력 8월 또는 가을의 한가운데’를 의미하며 ‘한’은 어떤 낱말 앞에 붙어서 ‘크다’는 뜻을 더해 주는 우리 고유의 말이다. 그래서 ‘한가위’는 ‘음력 8월 또는 가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날’이라고 의미를 풀이할 수 있다.
‘한’이 붙어서 ‘크다’의 의미가 더해진 단어로는 ‘한가위’ 외에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인 ‘한길’, ‘우리의 큰 글’이란 뜻의 ‘한글’ 등이 있다. ‘한가위’란 명절에 이처럼 ‘크다’는 뜻의 접두사를 붙이는 것은 추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명절인 까닭도 있겠고 또한 이 시기가 오곡백과가 탐스럽게 익는 계절이라 일 년 중 가장 먹을 것이 풍족한 계절인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추석 명절에 우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덕담을 서로에게 주고받는다.
올해 추석을 맞이하여 독자들의 가정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와 같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이 가득하기를 빈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온점과 마침표
지난 2014년에 문장부호 규정이 개정되면서 몇몇 문장부호들의 이름에 변화가 생겼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와 ‘,’의 이름이다.
‘.’는 가장 자주 쓰이는 문장부호지만 규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이것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개정 전까지는 ‘.’를 ‘마침표’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었다. ‘온점’으로만 불러야 했다. 본래 마침표는 ‘.’뿐만 아니라 ‘?, !’까지 아우르는 말이었다. 모두 문장 끝에 쓰여 문장이 끝났음을 나타낸다. ‘온점, 물음표, 느낌표’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마침표’ 또는 ‘종지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언어 현실에서는 마침표라고 하면 곧 ‘.’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오랫동안 규정과 현실 사이에 거리가 있는 채로 시간이 흘러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2014년에 규정을 개정하면서 언어 현실을 수용하여 ‘마침표’는 ‘.’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경하였다. ‘.’는 ‘마침표’와 ‘온점’ 두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대신 ‘?, !, .’의 통칭으로서 마침표는 없어지게 되었다.
‘,’도 개정 이전까지는 교과서에서 ‘반점’으로만 가르쳐 왔다. ‘마침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쉼표’도 본래 ‘반점(,), 가운뎃점(ㆍ), 쌍점(:), 빗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다. 모두 문장 중간에 쓰여 앞뒤를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개정된 규정에서는 ‘쉼표’를 ‘,’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경하였다. ‘,’는 ‘쉼표’ 또는 ‘반점’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통칭으로서 쉼표는 없어지게 되었다.
‘< >’와 ‘《 》’도 새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둘을 아울러서는 ‘화살괄호’, 따로 부를 때는 전자는 ‘홑화살괄호’, 후자는 ‘겹화살괄호’라 하면 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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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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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 천상병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저녁놀이 져가는 것이었다.
그 시간과 밤을 보면서
나는 그때
내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봄도 가고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도
빨가니 타서 아, 스러지는 놀빛
저기 저 하늘을 깎아서
하루 빨리 내가
나의 무명을 적어야 할 까닭을
나는 알려고 한다.
나는 알려고 한다.
∼∼∼∼∼∼∼∼∼∼∼∼∼∼~~~~~~~~~~~~~~~~~~~~~~~~~~~~~~~~
다른 한울 - 정지용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었으나
그의 안에서 나의 호흡이 절로 달도다.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낳은 이후
나의 날은 날로 새로운 태양이로세 !
뭇사람과 소란한 세대에서
그가 다맛 내게 하신 일을 지니리라 !
미리 가지지 않었던 세상이어니
이제 새삼 기다리지 않으련다.
영혼은 불과 사랑으로 ! 육신은 한낱 괴로움.
보이는 한울은 나의 무덤을 덮을 뿐.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에 사모치지 않었으나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한울을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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屛風(병풍) - 김수영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은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에 전면같은 너의 얼굴 우에
용이 있고 낙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도 어 높은 곳에
비폭을 놓고 유도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의 인장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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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 이해인
6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 한 점,
샤갈의 <푸른 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 내게 이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 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7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 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茶) 안에 녹아 내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 주고 있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 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 때면 더욱 작아 보이는 나의 얼굴.
8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 색 나팔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유순하고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9
귀뚜라미 노래소리에 깊어 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땅에 눕히듯이 작은 나무 침대 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10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 또한 당신의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달이 되어 뜰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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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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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여자여! 남자여!
현대 여성들의 권리와 사회적 특권은 표면적으로 매우 증대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여권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하는 미국에서조차 그렇다. 미국 여성이 지닌 참된 주권은 여전히 그 전통적인 왕좌, 즉 가정이라는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현대 여성들은 어느 정도 통솔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가족을 수호하는 행복한 천사로서 그럴 뿐이다. 결코 사무실에서는 그렇지 않는 것이다. 여성들이 사무실에 있으면 남성들은 가정과는 달리 동료로서 냉정한 비판의 화살을 쏘아대곤 하는 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편견의 저울과는 달리 여성들은 놀라우리만큼 일의 요령을 터득한다. 그리하여 어떤 종류의 일에 있어서는 남성보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곤 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이런 여성들이 능력보다는 우아한 분위기나 부드러운 환경에 기여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여성들은 그런 믿음에 기대여 자신을 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런 여성의 모습을 또 남성들은 성적인 매력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들은 그런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사회 생활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가 지나쳐 여성 자신의 존재가치가 손상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아왔다. 또 그런 시도는 불공평한 사건을 초래하기 일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름다움과 젊음이 성적인 매력의 전부라는 생각에 미혹되면 중년의 여성들은 흰머리와 화살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원수로 삼고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청춘이나 여성을 무기로 싸우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찍이 한 시인이 다음과 같이 경고한 그대로이다. '청춘의 샘이란 한낱 허망감이다. 그 누구도 태양을 힘으로 멈추게 하고, 가는 청춘을 되돌리 수는 없다.' 그것은 실로 무의미한 행동이다. 자신을 이겨내는 것은 오로지 실력과 불편부당한 사회에 대한 시각뿐이다. 그리고 잘못된 개념을 웃으며 극복해 가는 유머러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 늘어가는 자신의 백발에도 흥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헛된 꿈에서 벗어나라
인간은 어떤 동물들보다 성적인 욕망이 강한 존재이다. 때문에 인간은 그림이나 영화를 보고 성적인 자극을 받으며, 지나치게 변태적인 교양에 빠져들어 인간으로서 어버이로서의 본능을 누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란 실로 비정상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여성이 어머니가 아닌 남성의 상대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상적인 여성이란 완전한 육체적 균형과 매력을 갖춘 젊은 여성이라는 정의로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하다. 여성이 아기의 요람 곁에 있을 때만큼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 나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여성만큼 아름다운 위엄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어쩌면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나의 시각이 옳다고 믿고 있다.
인생은 유전된다
중국인의 전통적인 인생관은 한 개인이란 생사와 더불어 소멸해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식과 손자의 생명과 더불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축구 경기에 비유하면 센터나 하프백이 무너지더라도 게임은 계속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성패란 개념은 전혀 다른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개인의 인생이란 조상들로부터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왔고 자신은 또 자손들의 생명에 대한 한 시대의 끈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의 이상은 조상에게 욕된 삶을 살지 않으며, 자신에게 욕되지 않도록 자식을 잘 교육시켜야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는 누구나 마치 자신이 아이가 되어 세상을 다시 사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그 아이의 손을 잡거나 볼을 부비면 자신의 뜨거운 피가 그 안에서 펄떡이는 듯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 생애는 가족이란 나무의 한 마디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커다란 생명의 흐름의 일부임을 확신하기에 죽음까지도 기꺼워진다.
그들에게 있어 최악의 비극이라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고 재산조차 지키지 못하는 못난 아들을 두었을 때이다. 이것은 만석지기 부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반대로 일찍 남편을 잃은 과부라 할지라도 똑똑한 자식만 있으면 빈곤이나 굴종, 때로는 박해조차도 몇 년이라도 참고 견뎌낸다. 중국의 역사나 문학을 보면 이런 여성들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남자들보다 현실적인 여성 감각으로 아이들에게 도덕적인 교육을 해나가는 여성들을 보면 간혹 아버지란 존재는 불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도 된다. 공자의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인을 이루면 늙어서는 화평을 즐기고, 젊어서는 정절을 배워, 안에 홀어미가 없고, 밖에 홀아비가 없다.' 그는 인간의 모든 본능이 먼저 충족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만족한 생활 속에 정신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며, 그것만이 참된 평화일 것이다. 또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 박혀 흔들리지 않는 평화이다.
노년은 아름답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며 높은 데로 거스르지 않는다.' 란 말이 있다. 이처럼 사람의 본능은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사람의 교양은 그 부모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노인에 대한 존경의 가르침은 만인의 교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효도의 기회를 잃고 있다. 마치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처럼 말이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이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이 만일 이 세상을 한 편의 시로 생각한다면 그 생애의 황혼녘은 가장 행복한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연스런 노경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는 말과 같다. 때문에 30세의 사람이 말할 때 20세 청년은 듣는 입장이 되어야 하지만, 그 30세의 사람도 40세의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전혀 편파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든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를 할 때에도 할머니가 입을 열면 그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 많은 세월의 다리를 건넌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종 미혼여성이나 부인들이 자신의 나이보다 젊어보이기를 원한다. 그만큼 젊음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자의 일생을 통해 가장 긴 해는 29세 때라고 한다. 때문에 어떤 여자는 4, 5년 동안 29세를 고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처럼 쓸데없는 일이 있을까. 상대방에게 연장자라는 믿음을 주지 않는다면 어찌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또 나이가 어리고서야 인생이나 결혼, 또는 세상의 모든 참된 가치에 대해 어떻게 지식을 얻었다 할 것인가. 나이는 어떤 경우 그 만큼이 지혜와 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있으므로 자식들이나 젊은이들은 보다 즐겁게 나이를 먹을 수 있다. 그들에게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나누어주고 그들 또한 그들의 뒤를 쫓아오는 세대에게 그것을 고루 분배해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이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군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다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수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넣고
떠나라.
김새진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중에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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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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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건축가 아폴로도로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빈치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성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부른 게 아니라, 성만 붙이면 같은 성을 가진 많은 사람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만은 성 대신 출신지를 붙여서 부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디어디 출신의 아무개라고 불리면, 그 사람은 성과 이름으로 불린 사람보다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유명인사였다는 증거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트라야누스 시대에 완성된 대표적인 공공건물에 모두 관여한 건축가였다. 로마 황제의 3대 책무는 소아시아 출신의 철학자인 클리소스토무스의 지적을 빌릴 필요없이 명백하다.
(1) 안전보장, 즉 외정.
(2) 국내 통치, 즉 내치.
(3) 현대식으로 바꿔 말하면 사회간접자본 정비.
(1)과 (2)를 정책화하려면 원로원 의결이 필요했지만, (3)만은 황제 의 재량으로 시행할 수 있었다. 제국 전역의 사회간접자본 정비에 드는 비용은 국고(아이라리움)가 아니라 황제 금고(피스쿠스)에서 나가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건설부 장관도 겸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성격에 따라 건축가와의 관계도 달라진다. (1) 황제 자신이 예술적 감각을 타고났기 때문에 아이디어는 황제가내고 건축가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일을 담당하는 경우. (2) 황제 스스로 예술적 감각을 타고나지 않은 것을 자각하고, 모든 것을 건축가에게 맡기는 경우. (1)의 대표적인 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지만, 아이디어가 로마인들의 감각과 맞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깎을 수밖에 없다 해도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를 건설한 네로 황제 역시 이 유형에 속할 것이다. (2)의 대표적인 예는 콜로세움을 세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트라야누스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건축가의 이름이 후세에 남는 비율이 높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빈치의 레오나르도'와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도'는 재능의 성질이 다르다. 아폴로도로스의 재능은 그에게 맡겨진 과제를 해결하는 데 투입되었지만, 레오나르도의 관심은 과제를 다루는 기본원리를 탐구하는 쪽에 쏠렸다. 아폴로도로스는 서슴없이 건축가나 건축기사라고 부를 수 있지만, 레오나르도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사정 때문인지, 토목·건축 부문에서 레오나르도의 재능은 도면 묶음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아폴로도로스의 재능은 오늘날에도 고고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있는 수많은 유적으로 남았다. 과학자라 해도 좋을 만큼 기본원리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는 점 외에, 모든 것을 맡겨줄 '황제'를 만나지 못한 것도 레오나르도의 불행이었다. 그러나 피렌체 태생도 아닌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를 발상지로 하는 르네상스 정신의 최고 구현자가 되었듯이, 다마스쿠스 태생의 그리스사람인 아폴로도로스도 가장 로마적인 건축가가 된다. 어떤 건축가도그보다 더 로마적일 수는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다 에스파냐 태생이면서도 로마 출신보다 더욱 로마적이 되려고 애쓴 트라야누스와는 잘 어울리는 짝이었을 것이다.
다키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트라야누스가 눈에 띄는 건설공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아폴로도로스를 도나우강에 붙잡아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또는 건축기사를 뜻하는 서양어-영어의 'architect', 이탈리아어의 'architetto', 프랑스어의 'architecte', 독일어의 Architekt'-는 라틴어 'architectus'를 어원으로 삼고 있다. 로마시대의 '아르키텍투스'는 군사용과 민간용을 불문하고 모든 공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인의 건설공사 자체가 군사용과 민간용을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도나 다리가 그 전형적인 예다 제1차 다키아 전쟁이 끝난 뒤 아폴로도로스에게 맡겨진 것은 교량 건설공사였다. 돌다리를 놓는 정도라면 군단에 반드시 소속되어 있던 기사(아르키텍투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 에게 부과된 임무는 대하 도나우강에 석조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대하에 다리를 놓은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50년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유럽에서는 도나우강에 버금가는 대하인 라인 강에 다리를 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다리는 본과 괼른 사이의 어디쯤에 걸려 있었다니까, 그렇게 긴 다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라인 강도 그 지점에서는 폭이 500미터가 채 안 된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다리는 목조였다. 트라야누스가 요구한 다리는 석조였고, 강폭도 라인 강의 두 배가 훨씬 넘는 도나우강 중류다. 다리를 놓는 목적이 로마 영토와 다키아 영토를 잇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강 양쪽에 조금 남아 있는 교각의 유적으로 아폴로도로스가 진두지휘하여 완성한 이 다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북쪽은 오늘날 루마니아의 투르누세베린(로마 시대에는 드로베타라고 불렸다)이고, 강 건너 남쪽은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 지방이다. 그러면 다리를 왜 이 지점에 건설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첫째, 다리를 건너 도나우강 북안에 이르면 거기서부터는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산맥을 돌아서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에 곧장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다른 전략 요충지와의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폴로도로스의 작품인 모양인데, 절벽을 깎아 만든 '타불라 트라야나'(Tabula Trajana)-오늘날에도 이 이름으로 불리지만, 지금은 물 속에 잠겨버려서 볼 수 없다-라는 길을 통해 로마 시대에는 비미나키움(오늘날의 코스트라크)이나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과 쉽게 연락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다리가 놓인 일대는 '가까운 모에시아' (모에시아 수페리오르) 속주에 속하는데, 이곳은 국경지대라서 2개 군단이 상주해 있었다. 베오그라드는 제4군단의 기지였고, 코스트라크에는 제7군단의 기지가 있었다. 또한 긴급할 때는 '먼 판노니아'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도읍인 아퀸쿰(오늘날의 부다페스트)에서 제2군단, '먼 모에시아'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노바에(오늘날의 스비슈토프) 기지에서는 제1군단의 활동범위 중심부에 건설되는 셈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제국의 최전선인 도나우강이 이 다리와 제국의 수도 인 로마의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이었다. 다리가 건설되는 지점부터 남쪽으로 로마 가도가 뻗어 있다. 이 길은 나이수스(오늘날의 니슈)부터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수스(오늘의 레시)에서 아드리아 해와 만난다. 아드리아 해로 나오면 거기서 이탈리아 반도까지는 빠르면 꼬박 하루, 늦어도 이틀이 걸릴 뿐이다. 이탈리아에 상륙하기만 하면, 로마까지는 어느 가도를 택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도로망이 완비되어 있었다. 또한 베오그라드에서도 로마 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달리면 아드리아 해 연안의 스팔라툼(오늘날의 스플리트)에 닿을 수 있다. 스플리트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항구도시 안코나까지는 아드리아 해만 건너면 된다. 황제가 직접 출동할 필요가 있을만큼 중대한 사태가 벌어져도, 교통편은 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길이 북이탈리아를 돌아서 로마로 가는 것보다 거리도 가깝고 시간도 절약되었다.
내 친구 중에 로마에 사는 루마니아 사람이 있는데, 그의 부모는 루마니아 서부에 살고 있다. 그래서 로마에서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까지 비행기로 가서 다시 서부로 가지 않고, 사회 정세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동차로 고향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럴 때는 어느 길을 택할까? 로마에서 피렌체와 볼로냐, 파도바를 지나 트리에스테에 도착할 때까지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트리에스테에서 슬로베니아를 횡단하여 북동쪽으로 가는 것은 크로아티아 여행을 피하기 위해서다. 길을 돌아가게 되더라도 헝가리를 지나는 길을 택한다. 헝가리로 들어간 뒤에도 동쪽으로 가지 않고 북동쪽에 있는 부다페스트로 간다. 부다페스트부터는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2천 년 전의 로마인과 같은 길을 택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로마에서 아드리아 해안의 항구도시 안코나나 그 남쪽의 페스카라까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쉽게 닿을 수 있다. 이들 두 항구에서 스플리트까지는 자동차도 실을 수 있는 페리 선박이 다닌다. 또는 고속도로로 아드리아 해 연안의 바리까지 가면, 거기서 레시 남쪽의 디라키움(오늘날의 두러스)까지는 자동차도 실을 수 있는 연락선이 다닌다.
하지만 스플리트에 상륙한 경우에는 크로아티아를 지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가로질러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뒤 도나우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들어가게 된다. 알바니아의 두러스에 상륙한 경우에는 알바니아와 코소보를 지나고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 지방을 통과한 뒤 도나우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들어가게 된다. 통과하는 지방 이름만 보아도, 보스니아-헤르체고이나와 코소보에서 분쟁이 일어난 뒤에는 언론인도 아닌 일반인의 자동차 여행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투는 끝났지만 파괴된 도로나 다리는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일 테고, 여행하는 동안 숙소를 마련하기도 어렵고, 무기회수에 응하지 않는 주민이 적지 않기 때문에 치안도 불안할 게 분명하다. 로마 제국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로부터 1700년이 지나려하고 있는 지금, 이 지방을 여행하는 것은 오히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해져버렸다.
'팍스 로마나' (로마에 의한 평화)는 로마 제국 방위선 바깥에 사는 사람들, 로마인들이 '야만족' (바르바리)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습격으로부터. 제국 주민을 지키는 것만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평화'가 아니다. 로마 제국은 다민족 국가다. 이웃한 민족끼리는 사이가 나쁜 게 보통이다 사이가 좋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고, 따라서 행복한 상태라는 이야기가 된다. 패권 국가인 로마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민족 간에 일어나기 쉬운 분쟁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분쟁 조정에는 속주 총독이 먼저 나서지만,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황제가 친서를 보내거나 하여 중앙에서 훈령이 떨어진다. 이래서도 해결되지 않으면 로마는 주저 없이 군단을 파견했다 로마 시대의 그리스철학자 클리소스토무스가 지적한 황제의 3대 책무 가운데 두 번을 나는 '국내 통치'로 번역했지만, 원문에 충실하자면 '속주 통치'이다.
'팍스 로마나'는 외적을 배제하여 안전보장에 성공하는 것만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제국 내부의 분쟁을 수습하는 데에도 성공했기 때문에 '로마인에 의한 세계 질서'가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반 서민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어디에나 가장 가까운 길을 통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상태였다.
로마의 기술이 이룩한 결정체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트라야누스 다리'는 아폴로도로스의 지휘로 착공한 지 1년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된다. 공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사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석재나 목재를 다듬는 일에서는 보조부대의 속주병들이 활약했지만, 건축기술이 요구되는 주요 부분의 공사는 그런 일에 숙달되어 있는 군단병이 당당했다. 다키아족과는 강화가 성립되어 있다. 갑옷도 무기도 기지에 놓아두고 평복(투니카) 차림으로 작업했을 것이다. 로마인은 공사를 오랫동안 질질 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게다가 '트라야누스다리' 건설공사는 수량이 풍부한 대하에서의 작업이다. 조기 완공이 곧 성공적인 공사의 관건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라인 강에 놓은 다리는 열흘만에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강폭도 좁은데다 목조 다리였기 때문이다 강폭이 넓은 도나우강 중류에 석조 다리를 놓는 데 공사 기간이 1년 남짓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총력을 기울인 돌관 작업의 성과였을 게 분명하다. 또한 오랫동안 사회간접자본 공사를 하면서 축적된 체험과 숙련된 기술이 있었기에 그처럼 짧은 기간에 다리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다리의 완공을 기념하여, 그리고 이렇게 큰 규모의 다리를 도나우강에 가설한 로마의 기술력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 이듬해에 제스테르티우스 동전이 발행되는데, 여기에 새겨진 다리는 아치 모양의 무지개 다리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둥근 동전 모양에 맞춘 데포르메(변형)에 불과하다.
다리를 도로의 연장으로 생각한 로마인은 도로와 고저 차이가 없이 다리를 놓는 게 보통이고, 오르락내리락 형태의 다리는 모두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만들어진 다리다.
도로와 같은 높이의 다리를 건설하려면, 아래를 흐르는 강물이 불어날 경우도 계산하여, 수량이 늘어나는 봄에도 물에 잠기지 않는 높이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이쪽 강변에서 저쪽 강변까지 다리를 걸쳐놓아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쪽 강변에서 상당히 떨어진 내륙 지점부터 강 위를 지나 저쪽 강변에서 상당히 떨어진 내륙지점까지 다리를 놓을 필요가 있다. 당연하다고는 하지만, 거리도 길어지고 높이도 더 높아지게 된다. 다리를 놓는 지점의 지형 조건에 따라 다리 놓는 법도 다양하지만. 로마인이 짓는 다리의 기본원리는 결국 그 점에 귀착된다.
'트라야누스 다리'
다리에 관해 문외한인 내 설명을 계속 읽는 것보다는 도면을 보는 편이 일목요연할 테니까, 갈리아초가 지은 <로마의 다리>에 실린 도면을 소개하겠다. 우선 놀라운 것은 그 규모다
길이-1135미터
높이-27미터
너비-12미터
이것을 20개의 석조 교각이 떠받치고 있다.
교각의 길이-33미터
높이-14미터
너비-18.5미터 그 밑에는 목재가 빈틈없이 메워진다. 뜻밖에도 나무는 물에 강하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시가지 밑에는 수많은 목재가 메워져 있다. 또한 교각의 간격이 30미터가 넘기 때문에 3단층 정도의 선박도 지나다닐 수 있었다. 이 거대한 교각의 공사 방법은 우선 물 속에 빈틈없이 짠 나무 울타리를 세운 다음, 울타리 안에 갇힌물을 빼내고 그 안에 교각을 세우는 방식이다. 어느 교량 건설 전문가에게 물어봤더니, 기계화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원리는 오늘날에도 전혀 다를 게 없다는 대답이었다.
도나우강 북쪽 연안의 드로베타와 연안의 폰테스 사이에 놓은 이 다리는 교각만 석재로 되어 있고 교체는 목재로 되어있다. 로마인은 육교나 수도교라면 전체 길이가 1킬로미터 가까이 되더라도 모두 석조로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트라야누스 다리'가 석재와 목재의 혼합형인 것은 다리 전체의 중량을 줄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각에는 다리를 떠받치는 기능만이 아니라 강물의 흐름에 저항하는 힘까지 요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다리처럼 수십 미터가 아니라 1킬로미터가 넘는 강의 물살을 견뎌야 했다. 이런 공공건설의 경우에는, 공사에 참여한 군단이나 대대 이름을 석재에 새기는 것도 로마의 관습이다. '트라야누스 다리'에 현재 남아있는 부분만 보아도, 제2 히스파니아 대대와 제3 브리타니카 대대 및 제1 크레타 대대가 공사에 참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대별로 불리는 것은 속주 출신 병사로 구성되는 보조부대인데, 이들 대대는 제1차 다키아 전쟁에 참전한 부대다. 따라서 트라야누스는 다리 건설공사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병사들을 원래의 주둔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원기둥'의 부조에도 동전의 도안에도 '트라야누스 다리'는 상하로 나뉜 2층 구조로 묘사되어 있다. 아래층은 무거운 병기나 식량을 실은 짐수레, 보통 3열 종대로 행군하는 중장비 보병이 이용하고, 위층은 경비병이나 민간인이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로마 제국은 국경 안팎의 교류를 금지하지 않았다. 아니, 금지하기는커녕 장려하기까지 했다. 사람과 물자의 평화적인 교류가 왕성해질수록 국경 바깥에 사는 야만족의 약탈 의욕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그것을 문명화라고 불렀지만
로마 시대 최대의 토목공사인 '트라야누스 다리'는, 그보다 100년 뒤에 살았던 카시우스 디오의 말에 따르면 "야만족이 이용하는 것을 꺼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목조 부분이 해체"되지만, 다리자체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 후 다리가 보강되었다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 말기에 야만족의 침입이 격화할 무렵에는 목조 부분이 파괴되어, 다리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래도 6세기 무렵부터는 한 세기에 한 명 꼴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있었던 것 같고, 17세기에는 석조 교각뿐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도면이 그려진다. 19세기 중엽에는 본격적인 연구서도 간행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도나우강을 대형 선박운행에 활용하기 위해 교각을 모두 폭파해버렸다. 심하게 파손되긴 했지만 그 무렵에도 여전히 강물 속에 서 있던 교각은 이로써 완전히 모습을 감춘다. 오늘날에는 연구자들이 그린 복원도와 '로마 문명 박물관'에 있는 축소모형을 통해 다리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절의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1900년 전의 옛날로 돌아가보자. 이렇게 큰 규모의 다리를 1년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해버린 로마의 위용을 코앞에서 목격한 다키아왕 데케발루스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로마로서는 전부터 로마 영토였던 도나우강 남쪽의 폰테스와 제1차 다키아 전쟁 이후 로마의 기지가 된 도나우강 북쪽의 드로베타를 연결했을 뿐이라는 변명이 성립된다. 그리고 이제 동맹관계가 되었으니까 '트라야누스 다리'를 통해 양국의 교류가 촉진되고, 양국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변명도 성립된다. 그러나 드로베타에서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까지는 제1차 다키아 전쟁 때 로마군이 지은 석조 숙영지가 이어져 있고, 이들 숙영지에는 로마군이 아직도 머물러 있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다키아왕을 도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여 겨지지만, 거기에 대해 글을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쨌든 다키아 쪽에서 보면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로마의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데케발루스는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강경하게 나간 덕분에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 데 성공한 체험을 잊을 수 없었다. 황제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2차 다키아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데케발루스는 이번에는 전략을 바꾼다. 파르티아 왕을 움직여 동쪽과 북쪽에서 로마제국을 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파르티아 왕의 궁정에 다키아 사절이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파르티아 왕국은 로마와 접촉하기 시작한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의 방위선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은 갖고 있지만 로마를 공략할 수 있는 군사력은 갖지 못한 나라였다. 이 나라가 로마 영토를 위협하는 것은 왕이 바뀔 때 국외에 강경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국내의 반대파를 억누를 필요가 생겼을 때뿐이라고 해도 좋다. 서기 105년 당시의 파르티아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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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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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6화 전생의 남편을 섬기는 스크라
캘커타에서 약 60Km 떨어져서 캄바라는 마을이 있다. 스크라는 1954년 3월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겨우 한살 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다가 목침만한 나무토막을 집어서 껴안고는 "미누, 미누" 하며 마치 아기를 달래듯 어루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베개나 나무토막을 보면 꼭 그것을 껴안고 "미누, 미누" 하였다. 그러더니 차츰 말을 익히게 되자 전생의 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트파라 마을의 라사라라는 지역에서 '그 사람'과 케토우, 카르나와 함께 살았으며 미누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영화구경을 갔다 오는 길에 맛있는 요리를 먹은 이야기도 했다. 그러더니 아버지에게 바트파라에 데리고 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서도 갈수 있다.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크라의 아버지 K. N. 센 구프라는 철도원이어서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바트파라를 열차를 타고 자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캘커타에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트파라가 실제로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바트파라 가까이에 사는 직장 동료인 파르에게 스크라가 하는 말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파르는 바트파라 마을에 그의 친척이 있다고 하면서 라사라라는 지역이 있는지 또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파르의 회답을 받고 구프라는 스크라를 데리고 바트파라에 가기로결심했다. 그 회답은 이러했다.
"바트파라 마을에는 분명히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조카 중에는 미누라는 아이가 있다. 미누의 어머니 마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 죽었다. 1948년 1월의 일이다. 그 집 주인은 아므리타랄 차크라바트리라고 하는 바라문계급이다."
이 회답의 내용에 따라 스크라를 미누의 어머니로 가정해 보면 꼭 들어맞는 것이다. 이리하여 스크라가 다섯살이 되던 1959년 여름에 파르의 친척이 주선을 하여 바트파라에 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차크라바트리 가에도 알렸다. 스크라의 아버지 구프타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서 스크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교차로가 많고 사잇길이 많아 복잡한 길인데도 조금도 헤매는 기색이 없이 전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서는 마나의 시아버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미누의 삼촌인 케토우와 카르나도 알아보았다. 딸 미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축제용 수레인 라스를 넣어두는 건물이 있는 것도 지적해냈다. 라스를 두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라사라'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스크라의 전생기억에서 특이한 점은, 결혼하여 지낸 수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마나가 그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친정 식구들을 거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 집을 방문하여서도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첫방문 이후에도 스크라는 바트파라 마을을 자주 방문하였고, 그녀의 전생기억도 많이 나타났다. 한번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말 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식사 때에마나의 남편인 하리단과 함께 먹게 되면 언제나 그가 남긴 것을 그대로 먹곤 했다. 인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 부부간의 정법(定法)인 것이다. 스크라의, 딸 미누에게 대한 애정은 무척 커서 미누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서도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와했다. 또 스크라는 많은 옷을 넣어둔 옷상자 속에서 마나가 사용하던 세 벌의 옷을 골라내었다. 마나가 쓰던 재봉틀을 보자 반가운듯이 만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 재봉틀은 마나 생전에 열심히 일하던 것이다.
스크라의 전생기억은 세살에서 일곱살 사이에 가장 또렷하였고, 그 이후로는 차츰 희미해져갔다. 전생기억이 흐려짐에 따라서 하리단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차츰 냉담해졌다. 그래서 그녀가 열두살쯤 될 때까지는 하리단의 방문을 환영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어린소녀가 전생의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열다섯살때에는 재혼한 하리단이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간 뒤에 "저 사람들이 자꾸 가까이 오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열일곱살이 되자 전생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말하고 있다.
제7화 전생의 가정에 애착을 가진 마릭카
인도의 베로레 시(市)에 살던 '데비'라는 처녀는 1949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녀의 언니 곧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폰테이세리에 살고 있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서는 1956년 7월 집의 아랫층을 세를 놓았다. 이 일층에 세든 사람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친척으로 그 집에는 1955년 12월 4일생인 딸 마릭카가 있었다. 마릭카는 자라면서 윗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되었다. 그녀가 네살이 채 되기 전에, 처음으로 윗층의 모우로 가시가마니의 집에 놀러왔다가 거기서 의자위에 있는 수놓은 쿳션을 보더니, 그것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그것은 여동생인 데비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10년도 더 전에 죽은 여자가 만든 거야"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러자 마릭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여자가 바로 나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그녀는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처음에는 '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동생의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우가시가 마니의 아내는 "아주머니라고 불러라" 하고 마릭카에게 가르쳐 주었다. 마릭카는 이 '언니'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지고 기회만 있으면 '윗층집'에 올라와 놀면서 될 수 있는한 많은 시간을 이 '언니'와 함께 있으려고했다. 이 '언니'는 마릭카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죽은 데비와의 유사점을 많이 발견했다. 목욕하는 방법이나 당황했을 때의 몸짓같은 것도 닮았으며, 남의 앞에서 좀 거만하게 걷는 걸음걸이도 닮았다. 또 마릭카의 카레 요리 솜씨는 나이에 견주어 꽤 상당한 솜씨인 것 같았다. 마릭카가 자기의 전생이 데비였노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뒤에'언니'는 그녀를 베로레 시에 있는, 자기의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집에서 커다란 사진 앞에 가서는 "나의 부모야"라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데비의 부모 사진이었다. 집안 식구의 사진을 보여주니까 그녀는 이집 주인인 오빠를 가리키며 "이건 나의 오빠야, 그렇지만 지금은 집에 없어"라고 말했다. 실제로 데비의 오빠는 이때 직장 관계로 먼 곳에 있었다. 얼마 후 마릭카는 데비의 오빠와 만났을 때에도 이 사람을 바로 '오빠'라고 알아보고서 '언니'와 마찬가지로 강한 애정을 보였다.
마릭카에게 있어 데비로서의 전생기억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느날 마릭카가 있는 자리에서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끼리 우연히 소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러자 마릭카는, "나는 '카운다비'의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카운다비의 젖을 송아지처럼 빨던 강아지도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데비가 살았을때 그녀는 한 마리의 암소에게 '카운다비'라는 인도 왕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러나 이 소는 마릭카가 태어나기 훨씬전에 죽고 없었다. 또 마릭카가 말한 강아지는 카운다비가 새끼를 낳고 난 뒤에 그 젖을 빨아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은 이 소와 개의 이야기를 마릭카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마릭카의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 대한 애착은 대여섯살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에 대한 것보다도 더 강한 애착을 갖는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는 전생에 대한 애기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들 앞에서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데비의 형제, 자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릭카의 사례에서는 그녀의 집이 '언니'가 살고 있는 한 건물 안으로 이사를 했다는 이상한 우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데비의 생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어떤 자극 요인이 있을 때에만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제8화 형의 아들로 환생한 위지라트네
이 이야기는 1947년 1월 스리랑카의 무갈칼토타에 태어난 위지라트네의 이야기이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10여년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다. 이미 몇 아이를 기른 후였지만 이런 모습의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왼쪽 가슴에 둥글게 패인곳이 있고, 또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은 손바닥에서 잘 벌어지지 않으며 다른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선인장처럼 손바닥 끝에 왼손 손가락의 첫째 관절 정도의 길이로 나와 있을 뿐이어서,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손바닥의 연장인 것처럼 달라붙어있었다.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선천적인 불구자는 전생에서 한 행위의 업보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아이가 두살이 좀 지났을 때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기의 손이 이처럼 조막손인 것은 전생에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아들의 이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 말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20년 전에 그의 동생이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때 동생 하미가 자기는 죽어서 형님 댁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라트란 하미는 자기 아내인 포디 메니케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리랑카의 결혼 풍습은 두 단계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법률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다음에 혼례식을 올려 완전한 부부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부부가 되어도 몇 달 동안은 친정에서 그대로 지내다가 뒤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남편의 집으로 가면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라트란 하미와 포디메니케는 법률적 부부관계였다. 1927년 10월 14일 하미는 관례대로 정식 혼례를 치루기 위해 아내를 데리러 처가집에 갔다. 하미는 기쁜 목소리로 메니케를 불렀지만 메니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인사를 하였는데 하미는 혼례식을 앞둔 말쑥한 신랑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장모와 같이 들어온 하미는 아내인 메니케가 밥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건넸으나 메니케는 여전히 묵묵무답이었다. 게다가 메니케는 하미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큰 소리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하미는 흥분한 채로 그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점심 때가 못 되어서 하미는 다시 메니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메니케의 집으로 들어온 하미는 방으로 들어가 갑자기 메니케의 등을 칼로 찔렀다. 메니케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온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고 하미는 도망치는 메니케의 뒤를 쫓아가서 다시 크리스 칼을 휘둘렀다. 그 때 누군가가 하미를 때려눕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이미 메니케는 숨을 거둔 뒤였다.
행복한 삶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 그와 정반대로, 두 사람은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1928년 7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7년,하미의 형 집에 위지라트네라는 소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실은 나의 전생의 형이다. 나는 전생에서는 라트란 하미였고 옷갈칼토타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형당하던 그때의 상황을 위지라트네는 전생기억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수형이 행해지기 직전에 나를 위해 한 스님이 최후의 독경을 행하였다. 검은 헝겊이 머리에 씌어졌다. 트랩이 빗겨졌다. 나는 형의 일만생각했다. 그리고 목이 조이는 것을 느끼고 불이 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간다는 느낌이 되었다." 위지라트네가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후, 그가 네다섯살이 되었을 때에, 콜롬보대학 교수가 이 사례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그 뒤에 행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부분이 당시의 재판기록과 일치했으며 어떤 부분은 재판기록에는 빠진 것도 있었다고 하였다. 하미의 결혼관계에 대해 재판 기록에는 미혼(未婚)이라고 되어 있다. 위자라트네 자신의 전생기억에 의하면 '하미'는 메니케에 앞서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첫아내는 병으로 죽었는데 이 일이 하미의 불행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메니케의 살해사건을 재판기록에서 찾아보자. '일단 메니케의 집을 사건 당일 뛰쳐나온 하미는 얼마 후 크리스를 들고 다시 되돌아가서 메 니케를 죽였다'는 것이 재판에서의 사실인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위지라네트의 전생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니케는 모하티하미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모하티하미는 메니케가 전생의 나, 곧, 라트란 하미와의 결혼을 거부하도록 그녀를 설득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메니케의 집에서는 그날 아침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뭔가가 끓고 있었다."
"결혼 최종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트란 하미)는 메니케의 집에가서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메니케는 거부했다."
"아내가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5마일 떨어진 우리 마을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 위에서 크리스를 갈았다."
"메니케를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또 메니케의 집에서 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던 사나이를 보았기 때문에 메니케를 찔렀다."
이상의 전생 발언은 현실의 재판에서의 범인의 진술처럼 현장감이 있다. 당시에 크리스를 갈던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는 그 뒤 몇 십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위지라트네가 현세의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또 재판기록에 의하면 하미는 "나는 모하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져 체포되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크리스를 휘둘렀다. 애초부터 살인할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고의의 살인이라고 인정되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여기에 대해 위자라트네의 전생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메니케가 나의 집에 오기를 거부했을 때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을 가지고 죽였다."
"모하티하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을 메니케 집의 가정부에게 들켜서 그것은 허사가 되었다."
"죽이고 난 뒤에 모하마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다."
이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은 앞서 말한 "크리스를 갈았다"고 한 발언과 마찬가지로 재판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재판 기록에만 의지해서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집행까지의 한달 동안을 하미는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하미의 사형 집행 며칠 전, 형 티레라트네가 주선하여 부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회가 십여 명의 스님들에 의해서 하미가 수감되어 있는 감방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하미는 말했다.
"형,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형의 아들로 환생해서 다시 올거야."
이 '환생의 약속'은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곧 "사형집행 오일 전에 형이 형무소에서 나를 위해 거행해 준 법회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으며 법회에 참석한 스님 들의 이름까지도 말했다.
한 스님에 의해 최후의 독경이 행해진 사실과 검은 헝겊을 머리에 씌운 것은 사형집행의 관례로 보아서 당시에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목이 조여드는 느낌과 불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가는 느낌 등은확인할 수 없다. 위지라트네는 나중에는 전생의 일만이 아니고 죽은 뒤의 일까지도 기억해 내고 있다. 즉 영계(靈界)의 일이라든지 위지라트네로 태어나기 전에 "새가 되어 살았다"라든지 하는 중간적 전생의 것들이다. 어느 것도 확인해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죄인은 인간보다 낮은 동물이 되어 환생 한다는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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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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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관하여 - 몽테뉴 / 손우성 옮김
나는 이 감정에서 가장 면제된 자들의 축에 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여기 정가를 매겨 놓은 것처럼 특별한 기호(嗜好)를 가지고 이 심정을 존중하는 면이 있지만 나는 이것을 좋아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예지(叡智), 도덕(道德), 양심(良心)에 옷을 입힌다. 어리석고 망측스런 장식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이 낱말에 괴악(怪惡)하다는 뜻을 붙였다. 왜냐 하면 이 심정은 언제나 해롭고 언제나 철부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는 이것을 겁 많고 비굴한 소질이라고 보며, 그 파의 학자들에게 이 심정을 금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투스가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잡혔을 때, 사로잡힌 자기 딸이 노예복을 입고 물을 길러 가느라고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는, 그 친구들의 주위에서 모두 울부짖는데도 그는 땅만 내려다보며 말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또 자기 아들이 죽음의 길로 끌려 가는 꼴을 보고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부하 하나가 끌려가는 포로들 속에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치며 대성 통곡하더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최근에 우리 나라 태공 한 분이 트리엔트에 있을 때에, 자기 맏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 그 형은 온 집안의 기둥이며 영광이던 인물이다. ― 그리고 얼마 뒤에 둘째로 희망을 두던 동생의 부고를 듣고도 이 곡경(曲境)을 모범적인 굳은 마음으로 버티며 견디어 냈는데, 며칠 뒤에 하인 하나가 죽으니까, 이 마직막 변고에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아까워하는 꼴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가 이 마지막 충격에만 마음이 동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는 슬픔이 차서 넘치게 된 형편에 있다가 그 위에 더 일이 덮쳐 오니, 그의 참을성의 한계가 무너졌던 것이다.
우리 이야기도 다음 말을 첨가하지 않아도 똑같이 판단된다. 그것은 캄비세스가 프삼메니투스보고 어째서 그가 아들딸의 불행에는 마음이 격하지 않고 있다 부하의 불행은 참아 내지 못했느냐고 묻자 “이 마지막 불행은 눈물로 마음속이 표현되지만, 첫번의 두 사건은 마음 속을 표현할 모든 한계를 넘은 것이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저 고대 화가의 착상도 이런 경우와 부합될 것이다. 그는 이피게니아가 희생되는 장면에 참석한 인물들의 슬퍼하는 표정을, 각자가 이 죄 없는 예쁜 소녀의 죽음에 대해서 가지는 관심의 정도에 따라 그의 예술의 극치를 다하여 그린 다음에, 이 소녀의 부친에 이르러서는 마치 어떠한 표정으로도 슬픔의 정도를 표현할 수 없는 것같이 그 얼굴을 덮어서 그려 놓았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시인들은 저 가련한 어미, 니오베가 아들 일곱을 먼저 잃고 나서 연달아 같은 수의 딸을 잃었을때에, 이 가혹한 참척(慘慽)을 당하고는 그만 바윗돌로 화하고 만 것으로 보여 주고 있다. - ‘그녀는 슬픔에 젖어 화석이 되었다.' (오비디우스)
이는 한 참변이 사람이 참아 낼 수 있는 한도를 넘게 충격적일 때, 우리가 겪는 저 멍청하니 말문이 막히고 귀가 먹도록 넋을 잃은 심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진실로 비참한 일을 참는 것은,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정신 전체를 뒤집어 엎고, 그 행동의 자유를 잃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단히 언짢은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에 몸이 얽매어 얼어붙듯 하며, 모든 동작이 오그라져 붙었다가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 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나와 얽매었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는 식이다. -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 준다.’ (베르길리우스)
페르디난트 왕이 부다 시 주위에서 헝가리 왕 요한네스의 미망인과 싸울 때의 일이다. 독일 장수 라이샤크는 어느 기사의 시체를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그 기사가 이 전투에서 지극히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심상(尋常)하게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런데 이 장군은 사람들과 함께 그가 누구인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보았더니 바로 자기 아들이었다. 모두가 기 광경에 울부짖는데도 혼자만은 소리도 눈물도 없이 서서 눈 하나 까닥 않고 아들의 주검을 응시하다가 끝내는 슬픔의 힘이 그의 정신을 굳혀서 그대로 빳빳이 죽어 땅에 쓰러지게 하였다. - ‘얼마나 속이 타는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미지근하게 속 태우는 것이다’ (페트라르카)
이는 견디지 못할 격정(激情)을 표현하고자 자는 애인드의 말이다.
‘가벼운 신세로다!
사랑은 내 감각마저 빼앗는도다. 그대를 한번 보자
레스비아여. 나는 얼이 빠져
그대에게 할 말도 나오지 않는도다.
혀는 굳어지고 미묘한 불길이 온몸에 퍼져
귀가 울리고 눈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카툴루스)
이와 같이 격렬하게 불타 버리는 것 같은 정열의 발작에는 비탄이나 말을 늘어놓기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때에는 마음은 심각한 생각으로 무거워지고 몸은 치우쳐 사랑에 녹아 버린다. 어떤 때는 그래서는 안 될 시각임에도 우발적인 무기력 상태가 생겨나며 극도에 달한 열기에 사로잡힌 애인들을 얼리어 재미를 보려는 좋은 기회를 허사가 되게 한다. 실컷 마음놓고 맛보게 하는 정열은 범상한 정열에 지나지 않는다. - ‘가벼운 심려는 요설(饒舌)이고, 큰 심려는 망연 자실(茫然自失)케 한다.’ (세네카)
뜻밖의 기쁨이 불시에 닥쳐 와도 똑같이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내가 가까이 하자, 트로이 병사들이 사방에서
내게 쇄도해 옴을 보자 그녀는 혼비백산,
황천의 환상에 억눌린 듯,
이 광경에 몸은 얼어 붙고 체온은 그녀의 골격을 버리며
그녀는 실신하여 쓰러졌다가 얼마를 지난 뒤에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베르길리우스)
저 로마의 여인이 칸네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기쁜 나머지 놀라 죽은 일이나, 너무 좋아서 숨을 거둔 소포클레스와 폭군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로마 상원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표창했다는 소식을 듣고 코르시카에서 죽은 저 탈바의 이야기는 제쳐놓고라도, 지금 이 시대에도 교황 레오 1세가 그렇게 소원하던 밀라노 함락의 보도를 듣고는 기뻐 날뛰다 열병으로 죽은 예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용렬하다는 두드러진 예로 변증법 학자 디오도르스는 학교에서 그리고 민중들 앞에서 남이 내놓은 논법을 전개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극도의 수치감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린 일이 옛사람들에 의해서 주목되고 있다.
나는 이런 맹렬한 격정에 사로잡히는 일이 드물다. 나는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하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을 씌워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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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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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8장 두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첫 (십년기 ) 민병대 (1/2)
전쟁은 멀리 나폴리 왕국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행로를 같이하고 잇던 피렌체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사자로 가 있는 동안 계속해서 전쟁 소식을 전해 달라는 닦달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전투가 없다가 그가 떠난 직후인 12월 28일, 프랑스 군은 가릴리라노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에스파냐 군의 잘 닦인 군기와 보병대의 용맹성, 그리고 운과 재주를 겸비한 지휘관 콘살보 덕분이었다. 패전군은 설상가상으로 겨울의 매서운 날씨와 싸워야만 했다. 피에로 데 메디치 역시 바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다 익사했는데, 이는 시종 멍청하고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프랑스 군의 궤멸로 인한 실망과 불안이 더 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피렌체의 평시민 정부는 피에로의 이 같은 죽음에 축하라도 보내야 할 판이었다. 나폴리 왕국 내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고 에스파냐 군에 대패한 데다가, 스위스 막시밀리안의 의중은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루이 왕은 장차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지 에도 너무 바빠 동맹국을 돌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려되는 바는 콘살보가 프랑스를 롬바르디아에서도 축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그 첫 타격이 토스ㅌ카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이미 피사에다 지지 기반을 만들어놓았으며, 시에나 루카에서도 여러 계획들을 진행시키는 등 그곳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로마냐 문제까지 끼어 있는 상황에서, 피렌체인들로서는 마치 대장군(콘살보의 별명 - 옮긴이)의 망치와 베네치아의 모루 사이에 놓여 있는 심정이었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이 사태가 얻허게 돌아가는지, 왕의 준비 태세와 의중이 어떠한지를 즉즉시 파악하고자 햇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1504년초, 그들은 당시 피렌추올라에 가 잇떤 니콜로 발로리르 사절로 보냈다. 그는 이미지로 따나기에 앞서, 그에게 도움이 될 만환 일을 일러주기 위해 급히 그곳으로 파견되었던 마키아벨리로보터 지시 사항을 들었다. 하지만 서기장에게는 또 다른 긴여행이 기다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발로리가 아직 궁정에 도달하기도 전데, 콘살보의 의중에 대해서는 새 정보를 알아냈지만 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공화국은 애가 타사 다시금 마키아벨리를 급히 그에게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단히 긴급을 요하는) 자신의 임무를 두고 6일안에 도착해 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사실 그렇게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를 파견한 일은 좀 이사하게 보일 수도 잇다. 왜냐하면, 피렌체는 이미 왕의 궁정에 새로운 훈령을 주어 신임 대사를 보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편지로 지시만 내리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굳이 마키아벨리를 보내게 된 것은 s서신 우송이 미답지가 못하다는 이유 말고도, 그가 이 모든 협상의 추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잇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사람들, 특히 곤팔로니에레가 그의 판단력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는 1504년 1월 19일자로 그에게 내려진 훈령 속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당신의 이번 여행은 현재 진행중인 준비 상황을 관찰하고, 그것데 대한 당신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첨부하여 우리에게 '즉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곳 주재 대사의 판단을 믿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월 20일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는 22일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지시받은 대로 그곳의 프랑스 사령관인 샤를 당브와즈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즉 프랑스의 도움이 없다면, 피렌체로서는 그냥 앉아서 점령당하든가 아니면 점령하려는 자들과 협정을 맺을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앙브와즈는 이에 대해, 자신은 콘살보가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왕이 우방을 결코 못 본 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무제를 궁정에 상세히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사절로서 바라던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와 헤어지며, 그는 큰소리로 (아무 걱정 말라)고 소리쳤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다 자신의 프랑스어 실력을 슬쩍 뽐내면서, 이 말을 전하고 있다.
그는 다음날 밀라노를 떠나, 27일 왕이 잇는 리용에 도착하였다. 밀라노에서 뺏겼던 시간을 뺀다면, 그는 6일만에 오겠다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대사부터 만나러 갔다. 이 두 니콜로는 서로 오랜 친구 사이였고,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99쪽을 보라 - 옮긴이), 발로리는 마키아벨리에게 정감 어린 편지들을 보내곤 했던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는 한 통의 편지에서 더욱 정겨운 마음이 느껴진다. (나는 형제가 없기 때문에, 당신을 나의 형제처럼 생각하고 싶소. 당신도 그렇게 대해 주었으면 하오. 이는 우리끼리의 약속이오) 따라서 둘의 사이는 틀림없이 좋았을 것이므로, 발로리가 10인위원회의 명으로 그에게 온 마키아벨리와 같이 분별 있는 사람을 괜히 의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문필가로 약간을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대사는 스스로 보고서를 쓴 뒤 혼자 서명하였다. 다른 임무에다 그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독자적인 보고서를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지에서의 시간을 통틀어서 그가 쓴 편지는 두 통뿐이었다. 그 중 중요한 내용을 담은 첫 번째 편지의 경우, 그는 단지 발로리가 쓴 것을 확인하고 추인 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곤팔로니에레와 내밀한 편지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왕은 그간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한 상태라 접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니콜로는 다음날 루앙을 만났다. 앞서는 두 명의 사절 중 하위 직급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이제 상위 직급의 위치에서 그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자신이 온 이유를 밝혔다. 그는 루앙에게 콘살보와 베네치아에 관해서, 그리고 주변의 적대적인 공화국들과 피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말인즉 일러하였다.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은 왕이 무엇을 도와 줄 수 있는지, 또 피렌체가 과연 그것에 의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만약 우방이 도와주지 못한다면 적과 악수하는 수 밖에 또다른 도리가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추기경은 (불쾌하다는 듯이 화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불평 조로, 피렌체인들은 프랑스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느냐고 되받았다. 다음은 발로리의 전언이다. (그러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구하려 한다면 우선 어떻게 성벽을 지킬 것이가를 숙고해야 한다는 점과 교황과 시에나와 페루자가 콘살보에 대한 방여벽ㅇ 역할을 할 서이라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추기경은 교황와 시에나는 믿을 수 있을까? 페루자는 교황의 것인가? 라는 말을 되묻듯이 되풀이하고는 이야기를 중단시켜 버렸다.
다음날, 추기경은 발로리와 마키아베리에게 좀더 누그러진 태도로 대하였다. 그는 현재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두 왕들 간에 휴전 협상이 진행중임을 전했다. 그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여부가 다음주쯤이면 결정 나겠지만, 어는 경우든 피렌체는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상황이 휴전으로 갈지 또는 프랑스의 강력한 도움으 받는 것이 될지, 어느 족이든 확실한 사실을 피렌체에 보고할 수 있을 때까지는 떠나는 일을 연기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30일, 그들은 왕을 접견하여, 앞서 루앙에게 한 이야기를 그에게 다시 되풀이했고 역시 똑같은 대답을 받았다. 피렌체의 두 사절과 프랑스 궁정의 다른 두 인물 간에도 똑같은 내용의 설전이 오갔다. 그 중 하나는 로베르테였고, 다른 하나는 투키디데스를 번역한 클로도 드 세이쎌이었는데, 발로리는 그들을 향해 (재빨리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련한) 피렌체의 기민성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견한 것도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다. 11일 휴전 협정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3년이었고 양측은 각각의 동맹국들을 거명할 수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프랑스는 피렌체를 지명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물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출발을 연기하다가, 3월초가 되어서야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우리는 그가 언제 피렌체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4월 2일 피옴비노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임무는 당시 시에나의 영토 안에서 전쟁 준비로 의심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잇는 데 대해 그 곳 지방 연주와 의견을 나누면서, 피렌체는 그의 영지가 보존되기를 원하므로 서로의 공동 이익을 위해 그를 도울 의사가 있음을 알린 뒤, 그로 하여금 피렌체와의 옛 우호 관계를 재개하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공화국으로서는 다른 나라가 자신의 소극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실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예비 임무들을 진지하게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파견된 주요한 목적은 훈령 끝머리에 나타나 잇는 대로, 그쪽 지역에서는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영주의 모든 품성들, 사람들의 성향, 시에나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또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등을 면밀히 관찰하기 바라오.)
파쎄리니의 허풍과는 달리,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그곳 영주와 그가 다스리는 영지의 가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서기장은 며칠안에 일을 끝내고는 서기국의 편지 쓰는 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사로 싸우던 두 나라 왕이 휴전 협정을 체결하자, 그곳은 갑작스런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로마냐 쪽의 베네치아인들은 이제 그들이 획득했던 영토로 만족하고 있었다. 호전적이었던 교황의 역시 호전적인 조카인 줄리오 2세는 여전히 (확고한 권력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제는 긴 공성전이 되어버린 지루한 피사 전쟁만 없었더라면, 당시는 아마 옥타비아누스의 평화 시대를 다시 구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이 시기에 우리의 관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공한들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담아오다가 당시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 군사에 대한 몇몇 생각들이다. 청년기 이후, 전쟁은 그에게 용병대의 저열함과 모반의 경향 그리고 배신 행위들과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그들로 인해 파괴되는 모습을 숱하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시기국에서 궁정에서, 전장의 소요 속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왔던 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이후 그는 그러한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대의 용맹성이여
이탈리아인의 가슴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있구나
라고 읊은 페트라프카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는 로마냐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한 집당 한 명씩 정발된) 그곳의 농민들이 돈 미켈레의 고된 훈련 끝에 어엿한 병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mfl고 피사인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용병대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스스로를 방어하는 모습도 목격하였다.
물론 영예로운 코무네의 민병대((milizie) 혹은 (la Ordinanza). 이를 민병대로 옮긴 것은 당시의 용병대에 반하는 개념에서이며, 현재와 같이 졍규군이 아닌 사병(사병)이란 뜻에서가 아니다. 물론 시민군 miliaia cittadina 또는 자국군 armi proprie 등의 옮긴말도 가능하며, 이 역시 마키아벨리나 리돌피가 실제로 쓰고 있는 말들이다. 앞의 경우는 중세 봉건 영주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실제로 모병 대상자는 대개 콘타도의 농민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좀 도시 반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역어라고 생각된다. 뒤의 경우는 조금 거리가 있는 말이다. - 옮긴이)에 대한 기억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거의 이백년이 지난 당시의 상황에서 시민과 농민을 모병한다는 생각은 피렌체인들에게는 아무래도 무모하고 허황되게 보일 만큼 낯선 것이었다. 읍도파 문인 도메니코 체키가 (피렌체를 지키기 위한 성스럽고 고귀한 개혁 방안 Riforma santa e preziosa)에서 주워섬기고 있는 그렇게 많은 기발한 방법들 중에서도 체격이 좋은 시민들을 군으로 훈련시킨다는 괴상한 생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 당시 피사 전쟁과 그 외의 이러저러한 용도로 콘타도 지역에서 징집된 (코만다티 comandati)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병대로 보는 것이 나으며, 단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활용되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은 국민병에 대한 정치 이론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여 정규적인 소집과 확고한 법령에 의하여 정부 관리의 통제 하에서 운용되는 민병대를 창설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처럼 기상천외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굳은 신념에다가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동생인 추기경이 그에게 보여준 큰 호의 덕분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가 추기경에게 이 계획에 관해 처음으로 이야기 한 것은 로마에 사절로 가 있을 때인 듯하다. 분명한 것은, 당시 그들 사이에 이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고, 추기경이 아주 즉각적이고도 열성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그 계획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와 곤팔로니에레를 비롯하 몇몇 유력 시민들과 그 문제를 의논한 결과 그는 조심성 많은 피렌체인들의 회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기란 아무래도 매우 힘들겠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7년 전 정무위원회가 무장 호위대를 갖추게 하자는 말이 나왔을 때 기를 쓰고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이 그렇지 않아도 종신 임기인 지금의 곤팔로니에레를 아예 종신제 참조로 만들려는 음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케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이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마키아벨리는 반 쯤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1504년 5월 24일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고 5일 뒤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았다. (민병대에 대한 반대는 그 방안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건전한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네. 그리고 그것은 사적인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그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네. 거기서 주저앉지 말기 바라네. 언젠가는 그 일을 자랑스러워 할 때가 올 테니까. 다른 보답은 없더라도 말이네.) 사실 그는 다른 어떤 보답도 받지 못했지만, 그 때문에 훗날 영예는 얻게 되었다. 그의 앞길을 예언하는 듯한 이러한 격려가 피렌체 서기장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추기경의 애정 어린 배려는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가장 친애하는 동료)라고 불렸으며, 대부가 되어 준 것 외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우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마침 군사 문제를 주 업무로 하던 서기국 일과 병행해 나갔다. 그때 피렌체는 피사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작전은 상례대로 주변 농작물을 갈아엎고, 리르바파타를 재탈환하고, 도시를 먹여살리는 외부의 도움을 차단하는 조치들을 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피사에 대한 원조는 오직 아르노 강 위쪽의 바다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머저 강 어귀에다 좁다란 랠리선을 가진 일단의 수비대를 배치한 뒤, 강의 물줄기를 돌려 피사인들을 말려버릴 계획을 추진하였다. 곤팔로니에fp는 물을 잘 아는 피렌체와 외국 전문가들을 부추김으로 이 계획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공화국 돈 7,000두카토를 웅덩이 속에 밀어넣고,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우리 서기장의 펜만 수없이 닳아없어지게 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마키아벨 리가 이 안을 지지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톰마시니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릇 위대한 인물이라면 실수가 있을 리 없고 특히 그의 전기 작가를 위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증거를 더 확인하지 않고도 이에 대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개의치 않겠다. 우리는 서기장과 그 계획의 주도자인 곤팔로니에레간의 관계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주 기발하고 대담했던 그 계획의 성격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마키아벨리적인 천재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인다.
이 수공 작전에 건 마지막 희망도 가을에 닥친 첫 홍수 속에 떠내려가 버렸다. 바로 같은 때, 마치 강물처럼 마키아벨리의 시심이 가느다랗게 분출되었다. 10월도 마지막으로 치닫던 그때, 그는 샤를 8세의 침입으로 서두를 잡아 ( 10년 동안 이탈리아가 기울인 노력과 2주동안 '자신이' 기울인 노력)을 보여주는 550행짜리 시 한수를 완성했던 것이다. (첫 (십년기 Decenale) 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시의 형식을 빌려 1494 -1504년의 10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피렌체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위의 (2주동안)이라는 표현은 이 시가 14-5일 만에 씌어 졌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온 날이다. 미완성으로 남은 두 번째 (십년기)가 있으면, 이는 1504-1509년의 일을 다루고 있다 - 옮긴이). 이 시에서 모든 일의 출발점인 서두의 경우, 우연은 별다르게 기능하지 않지만, 끝맺음 부분에 가서 발렌티노(연전히 그의 운명적이 군주인)의 마지막 행적을 다룰 때에는 상당한 작용을 하고 있다. 줄리오 2세의 마지막 발톱을 피해 가까스로 몸을 피한 그는 처음으로 콘살보의 환대를 받으나 뒤에 그로부터 배신당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읊고 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네
그리스도에 거역했던 자가 받을 만한 만큼.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후 (바쁜)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자신의 영웅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발렌티노는 에스파냐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전투중에 그곳에서 죽었다. 한때 이탈리아의 역사 무대 위에 발을 내디뎠던 그는 이제 마키아벨리에게는 정말 (무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십년의 이야기는 한 악한의 쓸쓸한 최후로 마감됨으로써 민요 풍의 노래 un cattare di dandamento popolaresco((십년기)를 (민요풍)이란 부른데 대한 디오니소티의 반론과 리돌피의 재반론에 관해서는 이장의 주 33을 볼 것 - 옮긴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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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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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선물과 성의
선물을 받고나선 선물에 대한 투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이 생각하고 준 선물이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면 그만이다. 선물이 비싸니, 싸니, 좋으니, 나쁘니 하면 선물한 사람에 대한 고마움은 줄어들고 오히려 결점만 눈에 들어오는 결과를 낳는다.
가난한 자가 밝힌 등불 하나
석가모니가 사위국의 어느 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난타란 여자는 의지할 곳이 없고 가난했기 때문에 거지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그녀는 석가모니를 공양하기 위해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걸어다니며 자비를 받아 겨우 10원을 얻어냈다. 10원을 가지고 기름을 사려고 하다가 기름집 주인은 10원으로는 기름을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 무엇에 쓰려 하느냐고 물었다. 난타는 가슴속의 이야기를 했다. 주인은 그녀를 불쌍히 여겨 충분한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등에 불을 붙여 정사의 석가모니에게 바쳤다. 난타의 성심으로 바친 등불 하나는 한밤중까지 계속 빛나고 다른 등불이다 꺼진 뒤에도 계속 빛났다.
과부의 동전 두 닢
예수 역시 부자의 큰 돈 헌금보다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더 크게 보았다. 예수는 부자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있던 중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고는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가운데 일부를 헌금하였지만 이 과부는 가난 속에서도 가진 것 모두를 바쳤다.“고 하였다. 가난한 사람에게 받은 선물의 경우 금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예와 비례를 따지면 안 된다고 기록하고 있는 예기처럼, 주는 사람의 진심을 보아야지 성심으로 주는 선물에 대하여 값을 따져서는 안된다.
선물보다는 주는 사람의 성의를 중요시하라. (Never look a gift horse in the mouth.)
말은 이빨의 상태에 따라 나이와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다. 선물로 받은 말의 입 안을 살펴보는 것은 선물의 값어치를 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도 현금의 액수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심을 저울질한다고 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다 깨끗한 것 같아 보여도, 마음을 살피는 하느님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현굼 액수를 보지 않고 헌금한 사람의 마음을 본다.
군인과 명령
군대는 일정한 조직과 질서에 따라 편제된 장병의 집단이다. 하는 일은 국토 방위다. 군대는 위계 질서를 생명으로 하고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 사회이다.
하극상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는 용기만 있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 영관급 장교’를 모아,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구성된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쿠테타를 일으켰다. 그는」혼자서 진급하여 대장까지 오른 후 전역하면서 ‘자기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된다’고 눈물을 흘리며 강조했다. 그의 쿠테타는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를 생명으로 하는 군에 하극상이라는 치명적인 전통을 세웠다. 그가 18년간 권력을 독점한 후 비명에 가자, 역사는 속성대로 되풀이 되었다. 옛날 박정희 소장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두환 소장은 실권을 장악하자 대통령, 국방장관, 대장, 중장 등 자신의 직속 상관들로부터 차례로 경례를 받았다. ‘정치를 함에 어찌 사람을 죽이리오’란 말이 논어에 있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악의 무리를 모조리 죽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계강자의 질문에 공자가 타이르며 이른 말이다. 공자는 아무리 악한 백성이라도 살리는 데 의의가 있으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전두환 소장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수백명의 무고한 양민의 시체 위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공과는 역사가에 의해 굴절없이 판단되어야 할 것이나 하극상이라는 치명적인 전통을 거듭 세운 것은 대한민국 군대에 저지른 큰 죄악이었다. ‘군인이 용기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반란을 일으킨다’고 논어는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춘추는 ‘옳지 못하면서 강한 군대는 바로 쓰러지기 마련이다’고 전한다. 군인은 확고한 국가관과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국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춘추에 나오는 무인의 일곱가지 덕을 보자. 군인이 지켜야 할 수칙이다.
첫째, 난폭한 자를 제압시켜야 한다. 둘째, 무기를 거두어 싸움을 중지시킨다. 셋째, 나라와 국가 원수를 보전한다. 넷째, 공을 세워야 한다. 다섯째, 국민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여섯째, 모든 사람을 화합하게 한다. 일곱째, 제물을 풍족히 하여 생활을 안정시킨다. 이러한 일곱가지 덕을 갖춘 군대는 정의의 군대로 젊고 씩씩하다. 참된 군인은 의를 바탕으로 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한다.(The first duty of solder is obedience.)
용기만 있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집단은 ‘깡패의 집단’이지 참다운 군대는 될 수 없다.
우는 아이
예수는 말했다.“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놔두고 그 한마리를 찾으러 가지 않겠는가?“
의로운 사람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긴다는 성경의 말씀이다.
우리는 잘 사는 이웃보다 못 사는 이웃을 위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밉더라도 ‘떡 하나 더 주는 셈’ 치고 신경을 써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눈을 뜬 두 장님
예수와 제자들이 여리고(얼마 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국에 넘겨준 도시로 예리고 또는 제리코라고 부른다)로 갈 때 많은 군중이 그를 따랐다. 두 장님이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따라가던 군중들이 그들을 보고 조용히 하라고 윽박질렀으나 그들은 더 큰소리로 악을 썼다.
“주여,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예수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을 만지자 그들이 눈을 뜨고 기뻐 날뛰면서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의 절규가 없었으면 예수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삐꺽거리는 바퀴에만 기름을 치듯, 적극적으로 뒤어들고 외치는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벙어리 속마음은 그 어미도 모른다’고 한다. 원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표현하자.
우는아이에게 젖준다.(The squeaking wheel gets the grease.)
삐꺽거리는 바퀴에 기름을 치듯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나 물건에 더 관심이 간다는 말이다. 고기는 씹어야 제 맛이 나고 말은 해야 맛이 나는 법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크게 말을 해야 한다.
큰 고기와 송사리
사람들은 금고를 열고 돈을 훔쳐가는 도적을 막기 위해 자물쇠로 단단히 채운다. 그러나 큰 도둑은 그 금고를 통째로 가져가 버린다. 범행의 흔적이 없어서 쉽게 잡을 수가 없다. 예수는 “눈 먼 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잡아내고 낙타는 통째로 빠지게 하는구나.”라며 작은 일만 신경쓰고 큰 일은 소홀히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나무랐다.
발호. 대나무로 만든 통발을 뛰어 넘는다는 뜻이다. 송사리는 통발에 남지만 큰 고기는 통발을 뛰어넘어 도망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어쩌면 거미줄 같은 세상이다.파리나 조그만 곤충은 거미줄에 걸려 거미의 밥이 되지만 큰 새는 그 거미줄을 뚫고 다닌다. 크게 나쁜 짓 하는 사람은 교묘히 빠져 나가는데, 작은 도둑은 붙잡혀서 경을 치른다. 좀도둑은 교수형을 당하고, 큰 도둑은 잘 먹고 잘 산다. 몇천만원이나 몇억원을 먹은 국회의원 ‘나리’들은 ‘떡값’이라고 법망을 피해가는데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몇천 원’ 받으면 붙잡혀서 경을 치른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사람이고, 성현은 큰 도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다.’라는 장자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게된다.
큰 고기는 빠지고 송사리만 잡힌다. (Little thieves are hanged, but great ones e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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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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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챈 바람 - 노원호
새싹들이 빠끔
고개 내미는 것을
바람은
바람은
눈치챘는지
살랑살랑
봄비 한 줌 뿌려 놓고
꽃들이 방글방글
웃고 싶은 것을
바람은
바람은
눈치챘는지
햇살 한 줄기
사알살 뿌려 놓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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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송년식
노란 꽃은 더 노랗게
빨간 꽃은 더 빨갛게
비야, 봄비!
손목을 잡아 달라는 것 같아
손목을 잡아 주면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봄 속살 속속들이 젖어드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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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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