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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6호 - 2024.07.22 월요일(음력 : 06.17)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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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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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 없는 인간은 기름 없는 등잔불과 같다. - 앙드레스 세고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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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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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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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엠지, 디엠제트
DMZ(demilitarized zone)는 교전국 쌍방이 협정에 따라 군사 시설이나 인원을 배치하지 않은 ‘비무장지대’로서 한반도의 경우 1953년 정전협정에 의해 휴전선으로부터 남ㆍ북으로 각각 2km의 지대에 DMZ가 조성되었다. 이후 DMZ는 남과 북의 화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긴장의 땅이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아 사향노루와 반달곰 등 각종 멸종 위기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런데 DMZ를 한글로 표기할 때 ‘디엠지’로 적어야 하는지, 아니면 ‘디엠제트’로 적어야 하는지가 논쟁거리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DMZ를 ‘디엠지’라고 부르고 적었지만 그동안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디엠제트’가 바른 외래어 표기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는 ‘Z’의 알파벳 자모 이름이 ‘지’가 아닌 ‘제트’이기 때문이다. 만약 ‘Z’를 ‘제트’로 적지 않고 ‘지’로 적는다면 또 다른 알파벳 자모인 ‘G(지)’와 혼동될 수 있어 ‘Z’의 알파벳 자모 이름은 지금도 표준국어대사전에 ‘제트’로 나와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Z’의 영국식 영어 발음인 [zed]보다 미국식 영어 발음인 [zi:]로 발음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비록 1970년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만화영화 ‘마징가 Z’를 사람들은 아직도 ‘마징가 제트’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올해 1분기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를 수정하면서 ‘디엠제트’와 함께 ‘디엠지’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해 표제어로 등재했다. 이는 ‘디엠지’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대중의 언어생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앞으로는 비무장지대 DMZ를 ‘디엠제트’와 ‘디엠지’, 어떤 것으로 불러도 되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케이크
요새는 미역국과 함께 생일상에 빠지지 않는 게 케이크인 것 같다. 그런데 케이크를 사러 가면 ‘케잌’이라는 표기가 많이 눈에 띈다. ‘케이크’와 ‘케잌’ 중에 맞는 표기는 무엇일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받침에 쓸 수 있는 글자를 제한해 두고 있다. ‘ㄱ, ㄴ, ㄹ, ㅁ, ㅂ, ㅅ, ㅇ’의 일곱 글자만 받침으로 쓴다. 그 밖에 ‘ㅋ, ㅌ, ㅍ, ㅊ’ 등이나 겹받침은 쓰지 못한다. 따라서 ‘케잌’이나 ‘라켙’, ‘커피숖’은 모두 틀린 표기다. ‘케이크, 라켓, 커피숍’ 등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받침에 대한 이러한 제약은 외래어에만 해당한다. 외래어가 아닌, 순우리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엌, 밭, 무릎, 꽃’ 같은 표기가 모두 가능하다. 이런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 외래어에는 쓰지 않는 받침을 고유어에 사용하는 이유는 이들 받침소리가 모두 발음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꽃’은 그냥 ‘꼳’으로 소리 나지만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만나면 ‘꼬치, 꼬츨’처럼 ‘ㅊ’ 소리가 발음이 된다. 따라서 ‘꼿’이나 ‘꼳’으로 적지 않고 ‘꽃’으로 적는 것이다. 그러나 외래어 단어는 그렇지 않다. ‘커피숍’을 예로 들어보면 ‘커피쇼비, 커피쇼베서’처럼 발음하지, 아무도 ‘커피쇼피, 커피쇼페서’로 발음하지 않는다. 그래서 ‘커피숖’이 아니라 ‘커피숍’으로 적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익’ 대신 ‘케이크’로 적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래어 표기에서는 이중모음 뒤에 k, t, p 소리가 나오면 받침으로 적지 않고, ‘크, 트, 프’로 적도록 하고 있다. 즉 ‘케이크’에서 마지막 음절 앞의 모음이 ‘에이’라고 하는 이중모음이기에 ‘케익’이 아니라 ‘케이크’로 적는다. 이것은 ‘브레이크, 마이크, 스테이크’ 등을 ‘브레익, 마익, 스테익’으로 적지 않는 것과 같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남산 위에 저 소나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애국가 가사 중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의 잘못이니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분이 있었다. 조사 ‘의’는 흔히 [에]로 발음하는데, 그 발음에 이끌려 표기까지 ‘에’로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발음은 그렇게 하더라도 표기는 당연히 ‘의’로 해야 한다. 그런데 ‘남산 위에’는 발음에 이끌려 ‘에’로 잘못 적은 경우라는 게 제언자의 주장이다.
이분의 주장처럼 애국가 가사의 맞춤법이 틀렸다면 큰일이다. 윤치호 선생의 1907년 자필 가사도 ‘남산 우헤’ 즉 현대어로 ‘남산 위에’이니, 유구한 역사 동안 어법에도 안 맞는 애국가를 불러 온 셈 아닌가.
그러나 애국가 가사는 일종의 시요, 따라서 문제의 ‘남산 위에’는 시적 표현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적 간결함을 추구하여 ‘남산 위에 있는 저 소나무’와 같은 표현에서 ‘있는’을 생략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동요작가 권오순이 지은 ‘구슬비’도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대롱대롱 거미줄에 옥구슬”로 시작하는데, 이는 ‘싸리잎의, 거미줄의’의 잘못이 아니라 역시 서술어가 생략된 시적 표현일 수밖에 없다.
시로서의 애국가의 특성은 곳곳에 보인다. 이어지는 구절 ‘바람서리 불변함은’도 ‘바람서리에 불변함은’에서 조사 ‘에’를 생략한 것이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역시 일반적인 서술 구조가 아니라 시적 축약이요 변형이다. 따라서 ‘남산 위에’를 굳이 ‘의’의 잘못으로 보기보다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시로써 노래로써 표현할 때 더 간절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 아닐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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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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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나의 가난은 -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바람 - 정지용
바람 속에 장미가 숨고
바람 속에 불이 깃들다.
바람에 별과 바다가 씻기우고
푸른 뫼ㅅ부리와 나래가 솟다.
바람은 음악의 호수
바람은 좋은 알리움 !
오롯한 사랑과 진리가 바람에 옥좌를 고이고
커다란 하나와 영원이 펴고 날다.
~~~~~~~~~~~~~~~~~~~
헬리콥터 - 김수영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여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로밖에는 못해왔기 때문이다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젊은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
헬리콥터의 영원한 생리이다
1950년7월 이후에 헬리콥터는
이나라의 비좁은 산맥위에 자태를 보이었고
것이 처음 탄생한 것은 물론 그 이전이지만
그래도 제트기나 카아고보다는 늦게 나왔다
그렇지만 린드버어그가 헬리콥터를 타고서
대서양을 횡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동양의 풍자를 그의 기체안에 느끼고야 만다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을
우리는 좁은 뜰안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이러한 우리의 순수한 치정을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 자유
- 비애
더 넓은 전망이 필요없는 이 무제한의 시간 우에서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낙하시켜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과감한 너의 의사 속에는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긍지와 선의가 있다
너의 조상들이 우리의 조상과 함께
손을 잡고 초동물세계 속에서 영위하던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을
너는 또한 우리가 발견하고 규정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에 네가 전하는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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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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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3 편 영혼과 윤회
제 1 장 영혼은 있다
3. 영혼사진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에 의해 영혼이 있다는 것은 확인되었는데 영혼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원혼(怨魂)이라고 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단순히 전설로만 이해하려 들지만, 사실, 우주과학 시대라는 요즘에도 그런 일은 더러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의 사건은 1848년 3월 31일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 주에 하인즈 빌이라는 촌락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마을에 독일계 사람으로 폭스라는 이가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폭스가 이사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때 폭스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가족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냥 들어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만히 있노라니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해서 나중에는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기는 사람이 아니고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이름은 로스이고 이 집에서 죽었는데 자기의 시신이 지하실에 묻혀 있으니 그것을 파내서 장례를 치루어 달라고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폭스의 가족들은 놀라서 경찰을 불러 지하실을 파 보니 과연 시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생각해 보니 폭스가 이사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하실에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정확히 아는 것을 수상히 여겨 폭스를 연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또 영혼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를 장례까지 치러 주었는데 이렇게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고 하며 자기를 죽인 사람은 앞집에 살던 죠지백이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이 다시 그 죠지라는 사람을 잡아 조사를 해 본 결과, 과연 그가 살인범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국에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영혼은 과연 존재하고 인간이 영혼과 접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51년에는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심령학회가 조직되었으며, 그로부터 1세기도 더 지난 1972년 12월에는 미국 로체스터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하인즈 빌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여 뉴욕시 73번가에 8미터높이로 기념비를 세운 한편,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활발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영혼이 나타났다는 일화는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신문에도 몇 번 보도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재임 시에 네델란드의 유리아나 여왕이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왕은 백악관에서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자기의 시녀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 앞에는 링컨 대통령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터라 한눈에 그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왕은 그렇지 않아도 백악관에 영혼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실지로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자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옆방의 시녀들이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나와서 여왕을 간호했는데 그때까지 링컨 대통령의영혼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녀들도 영혼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여왕이 혼자서 보았다면 환상이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녀까지 함께 보았으니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역시 링컨 대통령의 영혼을 여러번 보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에도 그 부인이 링컨 대통령의 영혼을 보았다고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거짓말이라고 하여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증거가 뚜렷합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영혼사진을 찍어보자고 해서 사진을 찍어 신문에 보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 사진은 나도 본 적이 있는 데 링컨 대통령이 살아 있던 때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영혼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 특징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영혼은 모양을 드러냅니다. 그것을 여러사람이 봅니다.
둘째로, 영혼은 말을 합니다. 이 말하는 것도 여러 사람이 듣습니다.
세째로, 영혼은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눈에도 보입니다. 한 예로 여러 사람이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에 영혼이 나타나면 말이나 개들도 겁이 나서 숨는다고 합니다.
네쩨로, 영혼이 물체를 이동시킵니다. 잠가 놓은 문을 연다든지 방안의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 놓기도 합니다.
다섯째로, 영혼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합니다. 영혼을 보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지만 그래도 그것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사진으로 담는 데에 성공했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혼사진이 최초로 성공한 것은 지금부터 일 백여년 전인 1861년 미국 뉴욕시에 살던 멈러Mumler 씨에 의해서입니다. 멈러 씨가 하루는 교외에 가서 풍경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현상을 해 보니 나무 밑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진을 찍을 때는 나무 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뒤에 멈러 씨는 다시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으면서 주위를 두루 살피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상을 해 보면 역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 차례 반복을 해 보았으나 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멈러 씨는 너무 이상해서 그 사진을 들고 인근 주민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진에 나타난 사람은 5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멈러 씨는 그래서 이번에는 주민들과 함께 다시 그 자리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멈러 씨의 사진은 영혼사진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영혼사진사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하루는 친달 부인이라는 여자가 그에게 와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현상을 해 보니 부인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있는 링컨 대통령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신이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미리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이라고 하면 링컨 대통령의 사진을 구해다가 거짓된 영혼사진을 찍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부인은 신분을 숨기고 얼굴까지 가리고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멈러 씨는더욱 유명해지고 큰 돈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멈러 씨가 이렇게 유명해지자 정부 당국에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이 사건은 대법원에까지 올라가게 되어 마침내는 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언론인까지 동원시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조사단은 멈러 씨와함께 그가 처음으로 영혼 사진을 찍었던 곳에 가서 다시 사진을 찍게한 뒤에, 모두가 엄중하게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현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영혼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법원도 그의 사기혐의에 관해 결국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멈러 씨의 영혼사진 사건인데 1869년 4원 22일 자 뉴욕타임즈에 상세히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영혼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직접 사진을 찍는 데에 성공한 사람도 있는데, 그가 영국의 허드슨 William Henry Hudson입니다. 그 당시에 월레스 A. Wallacc(1823~1913)라는 유명한 박물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다아윈과 같이 진화론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월레스는 허드슨의 영혼사진 이야기를 듣고 허드슨에게서 자기도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사진에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찍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월레스는 그 사진을 보고 영혼사진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학계에 그 사진을 첨부해서 보고서까지 제출했다고 합니다. 월레스와 같은 대과학자가 영혼사진에 대해서 거짓으로 증언할 리가 없으므로, 이것은 믿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영혼사진을 찍으면 거기에 나오는 영혼이 어느 때,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영국의 호우프 Hope(1863~1933)라는 사람은 신분이 확인된 영혼사진을 무려 삼천 장이나 촬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쯤 되면 그 누구도 영혼사진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크룩스 Sir William CrooRes(1832~1919)도 호우프에게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진에 자신의 죽은 부인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크룩스 씨도 영혼사진이 결코 거짓이 아닌 사실임을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영혼사진은 많은 사람이 직접 찍고 또 이름난 과학자나 저명인사들이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스스로 증언까지 하게 됨으로써,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믿을 수 없다 하여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일이 이 정도가 되면 영혼이 있다는 것은 의심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혼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곧, 영혼이란 정신체인데, 죽은 사람의 정신체인 영혼이 카메라에 비친다고 하면 산 사람의 정신 작용도 카메라에 나타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의 세리우스 Ted Serios라는 사람이 이에 관하여 열 두해에 걸쳐 연구하여 마침내 성공하였습니다. 카메라를 준비해두고 그 앞에서 자동차를 생각하고 있으면 자동차가 사진에 나타나고, 빌딩을 생각하면 빌딩이 찍힙니다.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모두 사진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생각사진(念寫)이라는 것으로, 세리우스는 이런사진을 여든장쯤 찍었습니다. 그 때에 아이젠버드 Eisenbird 라는 교수가 이 사람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3년 동안 연구하였습니다. 속임수가 있는가 하여,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또 이렇게 실험 해보고 저렇게 실험해 보았으나, 결국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사진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젠버드 교수는 <세리우스의 세계>라는 책을 출판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제, 생각사진까지 입증되고 보니,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사진으로 찍을 수가 있느냐는 의문은 더 이상 나올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혼이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영혼의 물질화
우리나라에도 옛날 이야기에 보면 영혼이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옵니다. 이를테면 어떤 선비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던 어느 날, 그 아가씨가 친정에 간다고 해서 따라가 보면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다못해 들어가서 물어보면 그 아가씨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그 날이 바로 그 여자의 제삿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산 사람이 영혼과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옛날 이야기로만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영혼을 기술적인 방법으로 산 사람처럼 나타나게 해서 같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영혼의 물질화'라고 하는데, 앞에서 영혼사진을 입증했던 크룩스라는 학자가 바로 이 작업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케디 킹이라는 여자의 영혼을 물질화시켜 여섯달 동안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 하는 것 따위가 보통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 이야기도 하고, 손님이 오면 접대도 하는 등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먹지 않는다는 것과, 몸무게를 달아보아도 무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싸 가지고 자기 집에 가서 펴 보았더니 머리카락이 온데 간데 없다고 합니다. 또 바로 옆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과학자인 크룩스가 영혼을 물질화시켜서 여섯달 동안이나 함께 지낸다고 하자 그 소문이 영국 나라안에 모두 퍼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때의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그 케디킹이라는 영혼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수천 장이나 되는데 내게도 여러 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근사(近死)경험이니 영혼사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흥미거리로서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들입니다. 물질적인 현상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불생불멸한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불생불멸이라면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이 거듭되어 왔는데 그 많은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지, 아니면 따로 영혼만이 사는나라가 있는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윤회(輪廻)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때는 학자들이 윤회설은 인간들에게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 일뿐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불생불멸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자 이러한 주장은 사라지게되었습니다. 실지로 전생과 윤회가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과학적인 통계까지 나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6도(六道)윤회를 이야기합니다. 6도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여섯 세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업(業)에 의해 6도를 윤회합니다. 인간이 되기도 하고 개나 소 같은 축생이 되기도 하니, 이 윤회는 바로 자신이 행한 바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앞날의 일이 전생에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決定論)이나 숙명론(宿命論)과는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에게 나쁜 일이 닥치면 자기의 업이나 팔자 탓으로 돌려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리잘해도 업이 두텁고 팔자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록 현재에 받는 과보(果報)는 지난날의 업에 의해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선업(善業)을 닦는 것은 지금의 자기 자신의 의지입니다. 물 속에 있는 무거운 돌을 입으로만 떠오르라고 외친다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돌을 떠오르게 하려면 스스로 힘을 쓰든지 기계의 힘을 빌든지 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이러한 윤회사상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것이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믿는 것입니다. 결국 이 윤회 사상에 의하면 영혼은 따로 거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을 거듭하면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5. 사자(死者)의 서(書)
티벳 지방에 전하는 경전 중에 바르도 토에돌 Bardo Thodol 곧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는 사람(死者)과 죽음에 대한 안내서로서, 죽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것 만으로도 그 영혼은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은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고, 둘째 부분(초이니드 바르도Chonyid Bardo)은 죽음 직후에 잇달아 일어나는 꿈과 같은 상태를 설명하며, 세째 부분(시드파 바르도Sidpa Bardo)은 출생 충동과 출생 이전의 과정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죽음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는 보통 49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 사자(死者)의 영혼이 나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부처님의 말씀인 대승경전을 읽어 주거나, 또는 [사자의 서]에 나오는 글을 읽어주면 좋은 곳으로 왕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지내는 것은 이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의 서]에 나오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근래의 연구인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증언, 곧, 근사경험과 너무 비슷합니다. [사자의 서]에 보면 숨이 끊어질 때에 밝은 광명을 경험할 것이라 하면서 그것은 마음의 본래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자(死者)의 영혼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그들을 부르는 소리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므로 마침내사자는 실망하고서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이 [사자의 서]는 티벳의 승려들 사이에서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다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00년대의 일이니만치, 어느 누가 이 책을 미리 보고 마치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꾸며서 말했다고는 볼 수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예나 지금이나 죽음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똑같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영혼을 중음신(中陰神) 곧바르도Bardo라고 합니다. 이 중음신은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두려워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 이 때 선업(善業)이 강하면 곧 안정을 되찾고 바로 다음 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가족 친지의 울음소리가 너무 강하게 들리면, 그만 세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올바른 길을 찾아가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좋은 곳으로 왕생하라고 염불이나 경을 독송해 주는 것입니다. 이 중음신들은 자기의 업력(業力)에 따라 다음 생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데 7일 만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49일을 채우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영혼이 있다는 것과 그 영혼이 다음 생을 받아 다시 태어 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이것이 종교적인 상상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어 왔습니다. 윤회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기의 전생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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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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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3권
2. 경제 재건의 걸림돌 (1/3)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 이익인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으면 모두가 한결같이 고개가 숙여질 말들을 한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부닥치면 정권담당자는 정권유지 차원에서 그리고정치집단은 그 집단의 이득을 위한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좀 혹독한 평을 하자면 정치인들이야말로 이중 인격의 소유자들이라 할 수 있다. 1961년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좀 안정됐다고는 하나 경제적인 위기는 충격요법과도 같은 그 어떤 처방을 내리지 이럴 때에 한줄기 빛이 비추어졌던 것이다. 다름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에서 경제시찰단을 보내겠다고 통보해 왔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한국에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했던가? 그것은 한마디로 좋게 말해서 한국의 어떤 부문을도와줘야 한국이 경제 재건을 이루어 놓을지 그것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가 무슨 사회사업이나 하는 것과 같은 착한 마음에서 한국을 도와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경제 재건은 동북아시아의 안보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국이 경제 재건을 이루지 못하고 비틀거릴 경우 침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일본의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당초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 재건문제에 대해서 시큰둥한 태도를 취해왔다. 그것은 일본으로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한국의 정정(政情)이 내일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냥 불안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일본 정부가 새해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은 장면 정권의 능력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이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역시 구제불능이야!> 하고 옛 시각대로 멸시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면 정권이 모든 사회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사회를 안정시켜 놓는 것을 보자 <오호라, 제법인걸> 하고 못내 감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본 정부는 <이 기회에 장면 정부를 친일 정부로 만들어 버리자>는 속셈에서 미소 작전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장면 정권을 친일 정권으로 만들어 버릴 우 일본은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었다.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에 예속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국가 이익 또는 개인 이익을 위해서는 속성이다. 명분은 명분, 실리는 실리라는 계산이 어찌 없었겠는가. 제2차 대전에 패망한 일본이 경제부흥을 이루어 기아와 빈곤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전쟁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케 함으로써 일본이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전쟁만 터지지 않았던들, 일본의 경제 재건이란 아득하기만 한 꿈이었다. 일본 경제가 어찌나 가속적으로 성장했던지 1960년대에 들어서는<신무천황(神武天皇:신화시대의 초대천황) 이래의 호경기>라고 하면서 일본인 자신이 급속하게 성장하는 그들의 경제에 놀라움을 일본에서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요청해 오자, 장면 정권은 두말 않고 이것을 승낙했다. 이 기회에 일본 자본을 들여다가 한국의 경제를 부흥시켜 보자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일본 자본의 도입을 발상한 것은 재무부 장관 김영선과 민주당 정책의장 주요한이었다. 이들은 1월21일의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기획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경위로 보아 한.일 회담의 조기타결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국교 전이기는 하지만 일본 자본을 도입해서 경제 재건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공자님도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의를 있는 정부가 어떻게 하면 국민을 배불리 먹이고 잘 입혀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느냐 해서 이모저모로 연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국교정상화 전이지만 일본 자본의 도입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당 정권은 일본 자본의 도입문제에 대해서 <그게 좋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자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손님들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그들의 신세를 져야 하느니만큼 그들 경제시찰단을 환영하는 위원회를 만들도록 합시다> 해서 환영위원화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구파였던 신민당으로서는 못마땅했다. 또 대통령 윤보선도 못마땅해 했다. 특히 윤보선은 신민당 당수인 초청해서, "장면 정권 사람들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요, 없는 사람들이요?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에 일본 자금을 도입하겠다니, 그래 이번엔 우리나라를 일본의 경제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수작이요, 뭐요?" 하며 노골적으로 성토했다.
"막아야지요. 막아야 합니다."
김도연도 맞장구를 쳤다. 유진산은 두 사람의 말만 듣고 있을 뿐 일절 입을 열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유진산이 못마땅했던가? 윤보선이,
"진산은 어찌 생각하시오?" 하고 물었다.
"글쎄올시다."
글쎄올시다라니? 그럼 진산은 일본 윤보선은 다분히 공격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유진산은 사실에 있어서는 일본 자금을 들여오는 데 있어 윤보선이나 김도연처럼 그렇게 부정적은 아니었다. <꿩 잡는 것이 매 아니더냐. 경제를 재건하려면 어차피 외자도입은 불가피한 일인데, 그 돈이 일본놈 것이면 어떻고 대국놈 것이면 어떻단 말이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함부로 사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은 신민당 간사장이라는 당직 때문이었다. 물론 진산이 신민당의 제2인자였고 보면 반대하는 사람을 눌러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 전체가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또 이렇게 대통령 윤보선이 일부러 불러 자리였던 만큼 그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두 분한테 바라는 것은 일본 자금 도입을 막기 위해서 거당적으로 이것을 막을 조치를 강구해 달라 그것이외다. 우리가 아무리 곤궁하다 해도 국교정상화 전에 일본 자금을 들여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윤보선은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빌어 명령하듯이 당부했다.
"그럴 생각입니다."
역시 김도연은 타고난 호인이었다. 그는 군말 않고 윤보선의 당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진산은 좋다, 싫다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과연 구파였던 신민당이 집권을 했더라도 반대의 입장을 취했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신.구파 어느 파에서 집권을 하더라도 경제 재건의 문제에 관한 한은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하기야 미국이나 영국 또는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 차관을 주려고 했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한국 같은 나라에 차관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에서 차관을 주겠다고만 한다면 거침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야만 백성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만일 구파가 집권했더라도 일본 자금을 기꺼이 한국이 처해 있는 현실인 것을 어쩌랴. 그렇다면 왜 신민당에서는 일본 자본의 도입문제에 게거품을 물고 반대하고 있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장면 정권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쓰러뜨리고자 해서였다. 국가이익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여도 없고 야도 없는 것이 일본의 정치인들이었으나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가이익보다는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먼저 전제해 놓고 문제를 풀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러니 일본인들이 <조선놈은 쓸모가 없는 놈들이다>고 욕을 해도 싸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민당만이 아니었다.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고 재야의 인사들 가운데서도 있었다. 그들은 과거 중국대륙에서 의열단(義烈團)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투쟁을 벌여 온 인사들이었다. 익히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의열단은 주로 테러를 통해서 항일운동을 벌여 온 단체였다. 그런 만큼 과격한 면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더러운 놈들, 어디서 돈을 꾸지 못해 왜놈들한테서 돈을 꾸어 쓰겠다는 거야? 안 된다 안 돼! 일본놈들한테는 귀떨어진 동전 한닢 꾸어써도 안 된다."
그들은 서둘러 반일투쟁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위원장에는 유석현(柳錫鉉)을 앉혔다. 의열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반일의 횃불을 밝혀 들자, 이른바 독립투사들이 너도나도 바치고도 해방된 조국 땅에서 단 한번도 빛을 보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다. 장면 정권이 조각을 끝냈을 때 조각 명단을 살펴본 그들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해야 출세를 할 수 있다니까> 하며 심히 못마땅해 했었다. 각료들 가운데 조선총독정치 시대에 관료를 한 자들이 많다고 해서였다.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울분도 쌓일 만했다. 의열단 출신자들이 반일의 횃불을 밝혀 들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국교정상화 이전에 경제교류를 하려는 그 망동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일본 경제시찰단의 내한도 실력으로 저지하고야 말 테다."
했다. 신민당의 반대에 재야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서자 딱하게 된 것은 집권당인 민주당이었다.
"이런 답답한 사람들 같으니, 오늘의 위급한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러는데 덮어놓고 반대만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저 쏟아지느니 한숨이요, 한탄뿐이었다. 야당과 재야가 한통속이 되어 반대의 소리를 높이 외쳐대고 있으니, 민주당으로서는 정책을 강행할 수도 없어 <좋다, 그렇다면 일본 경제시찰단 환영위원회를 해체하겠다. 일본 자본 도입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면 이런 국내의 사정이 일본 정부에 알려졌던 모양이었다.
"뭐가 어째? 일본 경제시찰단의 방한을 야당이 반대하고 있다구? 그래 그렇다면 그만두라구 해! 우린 저희들을 도와주려고 했지, 뭐 우리가 한국에서 어떤 이익을 취할려고 한 줄 알아?" 하면서 경제시찰단의 방한을 연기하도록 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그것이 1961년 1월 23일의 일이었다. 국무총리 장면의 실망은 컸다. (저런 딱한 사람들을 봤나, 저 사람들 저렇듯 자꾸 감정적으로 반대를 일삼다가 나중엔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럼 뭘로 경제건설을 하겠다는 거야?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잖았어? 아니면 장면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한.일 예비회담은 1월 25일에 다시 도쿄데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도 감정이 있는 동물이고 보면 경제시찰단을 보내려다 오히려 망신만 당한 꼴이 되어 버렸으니 예비회담이 재개됐다고 해서 그 전도가 순풍에 돛단 듯이 진척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일 예비회담은 재개되자마자 벌써 이견이 노정되어 입씨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견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한국측은 <종전(終戰)과 함께 한국에서 가져간 2만 톤에 이르는 한국 선적 배를 돌려줄 것과 재산청구권으로서 6억 달러를 요구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일본측은 몹시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6억 달러가 뉘집 아이 이름이더냐 하는 그런 표정으로,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유는 이쯤에서 일.한 회담을 깨 버리자는 속셈에서 그런 제의를 하는 거요?"라며 역습해 왔다.
"우리는 충분히 그쯤 요구할 근거가 있는 거요."
한국측도 결코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이 6억 불의 청구는 일본이 36년간한국을 쥐어짜 먹은 침략의 가대가로 요구한 <배상청구>는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 때 벌어졌던 한.일 회담에서 한국측이 제시했던 8개항 중의 제 2항목에 대한 요구액이었다. 즉, 대 조선총독부 채권의 국.공채를 비롯해서 체신국 관계의 각종 저금, 연금, 간이 생명보험 등의 채권을 종합한 액수였다.
"6억 달러의 산출 근거가 뭐요? 그것을 증빙할 만한 산출 근거를 분명히 제시해 주시오" 하고 일본측은 요구해 왔다. 6.25 때 모든 증빙서류가 될 만한 것은 다 불타버려 없어졌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일본측이 증빙서류를 요구하는 것은 치사스러운 행위였으나 당연한 요구였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36년간을 두고 한국민들이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소화시켜야 했던 국.공채를 비롯해서 각종 체신저금, 간이 생명보험 등의 액수가 6억 불을 상회하면 했지 그에 미치지 못할 리는 하여간에 다시 재개된 예비회담은 이런 상호간의 이견으로 해서 다시 또지지부진 소걸음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마치 축제라도 벌인 듯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첫 대여투쟁에서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일본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것을 막았으니 그들로서는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조금만 더 밀어붙여.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장면 정권은 쓰러지고 말 테니까!> 신민당 지도부는 이런 판단을 했던 것이었을까? 새해에 들어와 대여공세를 갖가지로 벌이기 시작했다. 그 있는 5부 장관에 대한 소환령이었다. <민주당 내각에 차출되어 있는 구파 5부 장관은 즉시 자진사퇴하고 본가로 돌아오라. 만일 돌아오려 하지 않을 때에는 소환결의를 하겠다.> 야당인 신민당이 김도연 명의로 소환령을 내린 것은 1월 12일이었다. 처음 장면 내각이 출범을 앞두고 구파에게 5개 부처의 장관 자리를 할양해 주었던 이유는 신.구파가 하나가 되어 정국을 이끌어 가자는 장면의 깊은 속뜻에서였다.
"민주당 놈들 그 꼴이 도대체 뭐야? 학생 덕분에 정권을 잡았으면 좀 정치다운 정치를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 아냐!"
밤낮 신.구파 사이에 으르렁거리고만 있으니 민주당 전체로 향하고 있는 국민의 질타를 의식한 장면은 국민에게 <화합정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 해서 구파에게 5개 부처의 장관 감투를 할양해 주었던 것이다. 이때는 아직 구파가 분당을 하기 전이었다. 그들도 귀를 가지고 있었으니 국민이 질타하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들었기에 우선 민심수습부터 하는 차원에서 장면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김도연이 5부 장관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4부 장관이라고 해야 옳았다. 왜냐하면 구파로서 장면 내각의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가 국무원 사무처장(지금의 총무처 장관에 정헌주(鄭憲柱)는 입각과 함께 구파에서 탈퇴해 신파로 변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김도연이 5부 장관에게 소환령을 내리며 만약에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소환 결의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말을 들은 조재천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소환결의를 해? 어디에서? 민의원에서? 아니면 자기 사무실에서? 그래, 그 소환결의가 효력이 있다는 거야? 있다면 한번 해보시라지.) 하기야 뭐 김도연이 무슨 효력이 있을것이라고 해서 소환결의 엄포를 놓았겠는가. 그는 그저 정치적인 압력을 넣기 위해서 그런 엄포를 놓았을 뿐이었다. 장면은 좀 평온해진 정국에 다시 불을 붙이려 하는 심술궂은 행위가 못마땅했지만 다시 불렀다.
"어떻게 하시겠소? 구파에서 소환령이 내렸는데 돌아가겠소? 나는 여러분이 그대로 내각에 머물러 있어 주기를 희망하고 있소만?"
"소환이라니요? 그런 무식한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원래 민주당원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 거취는 내가 정하지 제3자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용훼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교통부 장관 박해정이 역정을 냈다. 그의 말은 내각에 그냥 머물러 있겠다는 간접적인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난처해진 것은 3부 장관이었다. 장관감투가 얼마나 매력적이던가. 그냥 눌러 있자니 본가에서 <정치적인 지조도 없는 쓸개빠진 놈이야!> 하고 매몰찬 공격을 퍼부을 것이 틀림없었고, 돌아가자니 장관감투를 내놓아야 할 것이 아쉬웠다. 그러니 망설이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면이 눌러 있고 싶으면 그냥 눌러 있으라고 하지만, 글쎄 장면이 얼마 동안 장관감투를 보장해 줄 것인지, 거기에 대한계산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뭐, 이 자리에서 당장 귀추를 결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오. 하루 이틀 차분히 생각을 해보고 나서 의사표시를 해주도록 하시구려"하고 덧붙였다. 나용균은 장면의 그 태도가 좀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면이 <여러분은 절대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린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우리하고 정치적인 생명을 같이 하도록 합시다. 내가 총리직을 내놓게 된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까지는 고락을 같이 하도록 합시다.> 왜 이렇게 좀더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를 못하느냔 말이다. 그러면 즉석에서 <예, 좋습니다. 내각에 머물러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간명하게 태도 결정을 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말하는 투로 보아서는 <나갈 테면 나가고 머물러 있을 테면 머물러 있거라> 하고 어정쩡하게 말을 하니 진퇴유곡이 아니냔 말이다. 나용균은 속으로 이런 불만을 되씹고 있었다. "아니오. 박사님, 나는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즉석에서 의사표시를 한 장관이 있었다. 그는 국방부 장관 권중돈(權仲敦)이었다.
"물러나겠단 말씀입니까?"
장면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국군은 체제상으로나 작전상으로나 본궤도에 올랐으므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장면이 담담한 어조로 권중돈의 사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나용균은 또 울컥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금방 머물러 있어주면 좋겠다고 해놓고 어디 있어.) 그는 당장 장관감투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 감정을 억지로 눌렀다. (좀더 생각해 보고 난 연후에.) 그는 이렇게 마음에 다짐을 주었다. 권중돈을 제외한 나머지 3부 장관이 아직 거취를 결정하기도 전에 이철승(李哲承)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소장파가 신풍회(新風會)라는 서클 간판을 들고 나왔다. (아하, 조각 때 제외되었던 소장파들이 이번에 4부 장관이 물러날 듯하니까 도당을 지어 총리한테 압력을 넣어 소장파의 입각을 관철하겠다는 속셈이렷다!) 이철승이 신풍회 간판을 들고 나오자, 때가 때인지라 누구나가 그렇게 단정적인 당초 소장파는 끼리끼리 모이고는 있었으나 무리를 짓지는 않았었다. 그저 젊은이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결된 행동을 보여주는 데 불과했었다. 신파, 구파로 갈라져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판국에 소장파마저 서클 간판을 들고 나오면 국민적 이미지 문제도 있고 해서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장관감투를 배정할 때에 하예 소장파를 뒷전으로 물리치고 노장들끼리만 나누어 쓰자, <언제고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목을 늘여 학수고대하던 그 기회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늙은이들한테 도전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똘똘 뭉치는 길밖에 없어. 이참에 우리도 단결된 힘을 촉구해야 한다구.> 그래서 들고 나온 서클 간판이 신풍회였다. 물론 그들은 관심있는 자들의 단정적인 판단과 4부 장관 감투를 노리고 서클을 표면화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4부 장관이 감투를 벗어던지고 옛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신풍회의 주동인물은 이철승을 우두머리로 해서 김재순(金在淳), 조연하(趙淵夏), 함종빈 등으로서 그들은 이미 대학 재학 때의 학생운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철승은 고려대학교 재학중에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 반탁.반공의 선봉에 서서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가 큰 특이한 존재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전국학생총연맹은 해체의 비운을 겪었으나, 그때의 맹원들이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요소요소에 박혀 있었다. 따라서 이철승의 잠재적인 힘은 가히 측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만일, 그가 언제든지 때를 만나 한판 벌이려 할 것 같으면 요소요소의 맹원들은 하던 일도 내동댕이치고 달려나올 수 있을 만큼 인간적인 유대가 지속되고 있기도 했다. 민주당 소장파에서 신풍회 서클 간판을 들고 나오자, 신민당 소장파도 거기에 적잖이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민주당의 젊은 친구들한테 질 수야 없지 않은가. 우리도 미래에 대비해서 젊은 친구들끼리 하나로 뭉치세> 하고 분주하게 소장파는 청조회(淸潮會)라는 서클 간판을 들고 나왔다. 민주당 소장파가 새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에서 서클 명칭을 신풍회라 호칭했으니, 자신을은 맑은 발마을 일으킨다는 뜻에서 청풍회(淸風會)라 호칭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청풍회는 아무래도 신풍회를 모방한 것 같은 인상이 짙었고, 그건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억세고 기운찬 명칭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지를 모은 끝에 청조회라 호칭했던 것이다. 이 청조회의 중심인물은 분당 전의 원내부총무를 역임한 김영삼(金泳三)을 비롯해서 박준규(朴浚圭), 오상직(吳相稙) 등이었다. 표현한 것은 신풍회였다. 대변인 김재순은 이렇게 말했다.
"청조회의 출범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젊었습니다. 세대감각이 잘 맞는 우리 소장파가 이념적으로나마 제휴를 한다면 얼마든지 이 나라 정치를 쇄신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청조회 출범에 대한 환영사라기보다는 국무총리 장면에 대한 협박이었다. <알아? 우리 소장파가 당을 초월해서 뭉칠 수 있다는 것을 아느냔 말야? 그러니까 이번 개각에서도 우리 소장파를 제외시키는 날엔 청조회하고 제휴해서 독자적인 행동을 할 테니까 알아서 하라구!>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슬쩍 뒤집어서 한 것뿐이었다. 신풍회에 서명한 민의원 의원은 32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청조회 회원은 한 20명 가량 됐으니까, 그들이 제휴만 이룰 수 있다면 장면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무슨 일이든 브레이크를 걸 수가 있었다. 장면으로서는 미상불 골치 아프게 됐다. 그래서 보스의 체면상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신풍회는 단순한 친목단체로 알고 있지만 만약에 앞으로 당내에 파벌을 형성하려는 의도적인 움직임이 있을 때에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보았다. 그러나 신풍회는 눈썹 한번 찡긋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웃었다. <뭐, 강력한 조치를 취하시겠다구요? 아니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면 어떤 방법으로 당에서 내몰겠다는 거요, 뭐요?> 물론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끼리끼리 얼굴을 맞댄 자리에서는 거리낌없이 수군거렸다.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정치제도는 이런 점에서도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대통령중심제도에서는 통상 대통령이 집권당의 총재가 되는 것이 통례인데 그럴 경우 대통령이 한 말씀 하게 되면 그 말이 옳든 그르든 끽소리 못하고 그저 곡두재배하며 <지당하옵니다>만을 연발한다. 물론 이는 정치적 후진국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이 내각책임제의 정치제도하에서는 만일 국무총리의 말이 귀에 거슬린다 할 것 같으면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신풍회가 감히 협박적인 언사를 농하거나 반발 따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건 어림 반품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라고 감히 협박적인 언사를 농하거나 반발을 하려 들어! 하기야 죽음을 작심하기만 하면 나랏님 상투도 잡는다 했으니까 죽음을 작심한 경우는 제외하고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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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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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서기 69년 12월 21일~ 79년 6월 24일)
콜로세움
오늘날에도 도시 로마를 삽화 하나로 표현하고 싶으면, 누구나 콜로세움을 택할 것이다. 이 콜로세움을 건설한 사람이 바로 베스파시아스 황제다. 따라서 이 원형경기장의 정식 명칭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theatrum) 형태는 그리스인이 창안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반원을 두 개 합쳐놓은 원형극장은 그리스어로 '한 쌍'을 뜻하는 '암피'(amphi)를 붙여서 '암피테아트룸'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개최되는 행사의 종류에 따라 의역하면, 원형경기장이나 원형투기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이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처음 건설된 것이다. 정확히는 타원형이지만, 이 양식의 야외경기장은 완전히 로마인의 창안이다. 수도 로마에 건설된 이 원형경기장만 '콜로세움'이라는 통칭으로 불린 것은 네로의 거대한 입상(콜로수스)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다'를 건설 할 당시, 자신을 본뜬 거상을 세우게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거상을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얼굴 부분을 네로에서 태양신으로 바꾸었다. 파괴하지 않은 이유는 이 거상이 그 규모 때문에 민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콜로세움(Colosseum) 건설 현장은 네로가 인공호수를 만들 작정이었던 평지다. 공공 건축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포로 로마노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포룸' 근처에 네로가 고안한 대로 넓은 인공호수를 만들었다면, 시민들이 푸른 초목과 맑은 공기를 즐기면서 산책할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희생하면서까지 5만명이나 수용 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을 세웠을까. 제7권에서 네로를 다룰 때 나는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인공호수나 동물을 놓아 기르는 자연공원을 포함한 '오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자체가 로마 도심에 푸르름을 도입 하려는 네로의 수도 개조 계획일 거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이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한 이유는 도시 활용에 대한 네로와 당시 시민들의 견해 차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를 좋아하는 네로는 수도 로마를 그리스식 아르카디아(이상향)로 바꿀 작정이었겠지만, 교외에 별장을 갖는게 보통인 당시 시민들은 도시란 푸르름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네로는 말할 것이다. 자연공원이나 인공호수에도 사람들이 모일 테고 즐길 수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역시 다르다.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과 집단으로 즐기는 것은 다르다. 도심은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 뿐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무언가 하나의 일에 함께 참여해야만 완전히 활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공호수를 버리고 콜로세움을 세운 베스파시아누스가 도심 중의 도심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로는 또 반박할 것이다. 도심에는 이미 대경기장(키르쿠스막시무스)이 있었다고. 이탈리아어로 '치르코 미시모'라고 부르는 이 대경기장은 전차경주에 활용된 거대한 경기장으로서 당시에도 이미 15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25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넓으면,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참여의식을 한곳에 집중시키기가 어려워진다. 너무 넓어서 그것이 확산되어버리는 것이다. 5만 명 정도라면, 게다가 그 5만 명이 폐쇄된 공간에 집중되어 있으면, 사람들의 참여의식도 더욱 강해진다.축구 경기장을 머리에 떠올리면 그 느낌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콜로세움은 황제와 서민들이 얼굴을 맞대기에는 딱 알맞은 넓이였다. 5만 명이라 해도, 인구 백만의 도시인 로마에서는 지나치게 넓지도 좁지도 않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 콜로세움은 오락장만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에 대한 찬성이나 비판을 받는 곳이기도 했다. 시민들도 그 점을 정확히 이해했다. 인공호수에는 비판적이었던 그들이 콜로세움 건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은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도 최고의 걸작이다. 그렇게 규모가 큰데도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나 단조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아치 양쪽에 원기둥을 세우고, 아치모양의 공간에는 입상을 세우는 형태가 연속되어 있는데, 1층에 사용된 기둥은 중후한 도리스식, 2층의 기둥 양식을 바꾸어 답답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없앴다. 이를 흉내냈다는 무솔리니 시대의 신도시 에우르의 건물과 비교해보라. 게다가 출입구를 교묘히 배치하여, 사고라도 일어나면 15분 만에 모든 관객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고 하니, 기능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다. 투기에 사용하는 맹수는 지하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담당자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지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관중을 로마의 강렬한 햇빛에서 보호하기 위해, 돛을 만들 때 사용하는 범포로 관중석 위를 덮었다. 콜로세움에서 행사가 열릴 때마다 미세노 해군기지에서 온 해병들이 그 작업을 했다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오늘날에도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지상에 우뚝 서 있는 콜로세움을 볼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 시대의 3분의 1 규모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지배하게 된 뒤, 로마의 공공 건축물은 죄다 석재 공급처로 바뀌어버린다. 콜로세움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떼어서 가져가 버렸다. 아치마다 놓여 있던 수많은 입상들도, 벽면을 덮고 있던 대리석판들도 모두 제거한 뒤에 남은 '뼈대'가 오늘날의 콜로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는 육체의 눈만으로 보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콜로세움도 그런 눈으로 볼 필요가 있는 대상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평화 포룸'을 건설하여 평화와 질서의 회복을 부각시키고, 콜로세움을 건설하여 오락을 제공하는 동시에 황제와 일반 시민의 관계를 부각시킨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시민들도 하나같이 지지를 보냈지만, 무엇보다 앞서는 것은 돈이다. 네로의 방만한 재정운영에다 1년 동안 내전의 무질서가 계속된 뒤인지라, 무엇보다 국가재정을 건전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국가 재정을 재건한 면에서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어떤 연구자는 그가 최고의 국세청장감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율도 올리지 않고, 함부로 새로운 세금을 만들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세수를 늘릴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하여 그것을 성공시킨 사람이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말하기 전에, 로마의 국가 재정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재정 재건
로마 제국의 재정에 대한 세부 내용은 연구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그 내용이 명확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로마인이 세제를 중시하지 않고 그때그때 임시변통으로 무책임한 세제를 시행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넓고 얕게 세금을 걷는 것을 지향하는 세제야말로 선정의 근간임을 잘 알고 있었던 로마 황제들이 전체적으로는 치밀한 세제를 마련하고 개별적으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대처했기 때문에, 그 모든 세제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가 되자, 각지에 할거하는 봉건 제후나 호족들이 제멋대로 세금이나 통행료를 징수하는 무정부 상태가 생겨났고, 그래서 로마 시대의 세제에 대한 관심까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고대 로마의 세제에 대한 사료도 아직 존재했을 테지만, 베껴서 남길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여 방치해두는 바람에 소실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각 사료에 산재해 있는 기록을 토대로 추측해 보면, 로마 제국의 세제는 대충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입
1. 세금 징수에 의한 수입
(a)직접세-고대 도시국가에서 시민의 권리는 국정에 대한 참여이고, 의무는 병역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도시국가(폴리스)아테네의 시민들도 병역 의무는 있었지만 직접세를 낼 의무는 없었다. 로마도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제국이다. 군단병이 되려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제국의 안전보장을 담당하는 로마 시민에게는 직접세가 부과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아테네와 로마의 차이점이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본국 이탈리아 태생이나 속주 출신 로마인만이 아니다. 속주 태생이라도 25년 동안 병역을 마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고, 의사나 교사는 치료나 교육에 직접 종사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정치적 이유(카이사르가 피정복 지역의 유력자들에게 인심좋게 나누어준 경우)나 개인적인 이유(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게 준 경우)로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로마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점과 함께 직접세가 면제되는 것도 로마 시민권이 보장하는 직접적인 이익이었다. 따라서 직접세의 태반은 속주세가 차지하게 된다. 로마 시민권이 없는 속주민은 제국의 안전보장을 담당할 의무를 면제받으니까, 안전보장 비용을 부담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속주세를 부과하는데, 이윤을 낳는 재산과 인간에게 부과된다. 세율은 소득의 10퍼센트로 정해져 있었다. 여자와 어린애와 노인은 이윤을 낳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과세 대상에서 제외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 시민권 소유자에게만 부과되는 직접세도 존재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안한 이 상속세는 고대에는 어디에도 없었던 세금이다. 세율은 5퍼센트. 다만 육촌 이내의 친족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해마다 내야 하는 세금도 아니었다. 그밖에 노예의 신분을 버리는 자에게 부과되는 노예해방세가 있었다. 세율은 노예로 팔릴 경우 본인에게 매겨지는 가격의 5퍼센트였다. 이 세금 대해서는 제6권에서 설명했다.
(b)간접세-로마 제국에는 크게 두 종류의 간접세가 있었다.
관세-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각 지방의 경제력에 따라 1.5퍼센트내지 5퍼센트의 관세가 부과되었지만, 제정으로 바뀐 지 100년이 지난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는 지방의 경제력 격차도 줄어든 듯, 5퍼센트가 제국 전역의 관세율로 정착된 것 같다. 다만 이집트 세관을 통해 들어오는 향료나 비단, 보석 같은 동양의 사치품에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붙었던 25퍼센트의 관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매상세-일종의 소비세로, 세율은 1퍼센트였다. 다만 주식인 밀은 네로 황제 시대부터 비과세되었다. 세금징수에 의한 수입은 이 정도였다.
2. 국가 소유의 금, 은, 동 및 기타 광산에서 들어오는 수입 로마 제국은 국영사업을 되도록 피했지만, 광산만은 국유화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을 중시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국 안에서 유통되는 통화의 액면가치와 소재가치를 일치시키는 것은 정부의 책무였기 때문이다.
3. 국유지를 임대하여 얻는 수입 로마가 본국이나 속주에 갖고 있는 '국유지'를 전부 합치면, 문자 그대로 광대하다. 대부분은 경작지였는데, 그것을 농민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국가와 농민을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지만, 카이사르가 집정관 시절인 기원전 59년에 성립시킨 '율리우스 농지법'에 따라 소작인의 차지권은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차지권의 세습도 인정되었고, 땅을 빌린 뒤 20년이 지나면 차지권을 양도할 수도 있었으니까, 소작인이라기보다 생산시설을 국가에서 빌린 자영업자 같은 느낌이다. 차지료는 1년 수확의 10퍼센트였던 모양이다. 이 비율은 농지가 아니라 목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가 통상적이 세입이다. 농축업자의 경우는 '물납'이라 하여 생산물로 세금을 냈다. 그밖의 임시 세입으로 다음 두 가지가 추가된다.
(a)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매각하여 얻는 수입.
(b) 국가 반역죄로 사형이나 유배형에 처해진 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얻는 수입.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임시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제국이 된 이후 로마는 정복보다 방위를 주목적으로 삼게 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이 국가 반역죄로 원로원 의원을 고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가를 운영하는 데 피할 수 없는 세출은 어떠했을까. 언젠가 미야자와 기이치 씨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이 경제 전문가에게 평소에 품고 있던 의문을 물어보았다. 로마 제국에 비하면 오늘날의 선진국들은 하나같이 세율이 높은데, 왜 그러냐고. 미야자와씨는 사회복지비 탓일 거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고대 로마에는 사회복지를 위한 세출이 없었을까.
세출
1. 군사비
황제의 책무 가운데 하나는 안전 보장과 식량보장이었다. 평화가 유지되면 경제도 활성화하고, 따라서 안전보장은 식량보장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대해 로마 제국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는 브리타니아 제패를 계속하고 유대에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28개 군단을 유지해야 했다. 28개 군단이라면 주전력인 군단병은 16만 8천 명. 보조인력인 보조병도 그와 거의 같은 수다. 이 병사들에게 국가는 거처와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고, 해마다 급료를 지급해야 한다. 또한 군단병이 20년 뒤에 만기 제대할 때는 퇴직금을 주는 제도도 있었다. 고대에는 보기 드문 제도다. 역사가 타키투스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려면 비용이 들었다.
2. 공공사업비
그래도 광대한 로마 제국을 둘러싸고 있는 긴 방위선을 30만 정도의 병력으로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많은 병사나 무거운 무기를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위해 건설한 로마식 가도망이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다리도 도로의 연장으로 생각했다. 돌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오다가 나무 다리를 건넌다는 생각은 로마인과는 인연이 없었다. 도로가 포장되어 있으면 다리도 포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도 도로에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형태로 포장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었다. 또한 도로망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제방이나 운하가 필요하면, 그것도 도로망의 일부니까 당연히 건설했다. 앞에 있는 것이 바다나 하천일 때는 항만공사를 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이런 사회간접자본은 당초 목적이 군사인 탓도 있어서, 군단병들이 공사를 담당했다. 이런 설정 때문에 군사비와 공공사업비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두 가지를 분리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당시의 고속도로망인 로마 가도망은 민간에게도 개방되었고, 게다가 통행료도 없이 공짜였으니까. 신전을 짓는 것도 역시 국비로 충당되는 공공사업이었다. 다신교 민족이라 신전의 수도 많았다. 로마인은 유피테르나 아폴로나 베누스(비너스) 같은 신들만이 아니라, 화합(콩코르디아) 같은 추상적인 개념까지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신들을 모시는 신전 건축공사는 '소키에타스'(societas)라고 불린 사기업에 입찰을 거쳐 위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키에타스는 영어 'society'의 어원이다. 이와 같은 공사 방식은 신전만이 아니라 상하수도, 공중목욕탕, 경기장 등의 건설공사 같은 중요한 공공사업에도 적용되었다. '평화 포룸'과 콜로세움도 사기업이 공사를 위탁받아 건설했다. '소키에타스'는 대부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자금 제공자가 자본을 모아서 설립했기 때문에, 주식회사의 초기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수도 로마에 잇는 주요 공공 건축물들은 공화정 말기에 개인이 사재를 털어서 지은 경우가 많았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품페이우스 극장, 카이사르 포룸, 율리우스 회당, 율리우스 투표장 등이다. 이런 공공 건축물들은 개인이 기부한 것이므로, 건축 당시에는 국비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건축물도 유지 보수는 반드시 필요하다. 공공사업비의 적지 않은 부분이 도로나 상하수도, 공공 건축물을 수리하고 복구하는 데 사용되었다.
3, 인건비
광대한 제국을 운영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수도 로마에 근무하는 집정관, 법무관, 회계감사관, 안찰관 같은 정부 고위직은 무급이지만, 수도에 근무하더라도 사무직 관료는 유급이다. 또한 속주에 근무하는 총독에게는 필요경비가 인정되었고, 총독 밑에서 일하는 사무직 관료는 당연히 유급이었다. 이들에게 지출되는 인건비도 상당한 액수였을게 분명하지만, 로마 제국은 그 넓은 영역을 다스린 것치고는 뜻밖에도 관료 왕국으로 변하지 않았다. 징세 사무를 포함하여 많은 업무를 민간에 위탁했기 때문이 아닐까. 수도 로마에도 관청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관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4. 축제비
이것도 다신교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지만, 로마인의 휴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신들에게 바쳐진 축일이다. 축제비가 많이 든 이유는 신전에서 거행되는 제사 의식에 드는 비용보다 신에게 바친다는 명목으로 의식이 끝난 뒤 으레 벌어지는 각종 경기대회에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에게 휴일은 신전에서 신에게 기도를 드린 뒤 경기나 투기를 즐기는 날이었다.
5. 사회복지비
'소맥법'에 따라, 수도에 사는 시민에게는 매달 5모디우스의 밀을 무상으로 배급받을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어 있었다. 그 역사는 오래 되어서,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그라쿠스 형제 가운데 동생)가 성립시킨 법안이 '소맥법'의 시작이었으니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시대부터 헤아리면 거의 200년 동안이나 계속된 제도다. 처음에는 빈민들에게 주식인 밀을 시가의 60퍼센트 가격으로 배급했지만, 이것이 정쟁의 도구로 변한 결과, 기원전 1세기부터는 마침내 무상배급제도가 정착되었다. 제정 시대에 접어든 뒤, 무상배급을 받는 사람의 수는 약 20만 명이었다. 이들은 일인당 5모디우스(약 30킬로그램)의 밀을 매달 공짜로 받을 수 있었다.
배급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은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다. 지역을 수도 로마로 한정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난한 자들이 흘러드는 곳은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또한 직간접으로 황제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분명히 밝히는 것도 수도에 사는 이 '유권자'들이었다. '소맥법'은 결국 유권자 대책이기도 했다. 여자와 10세 이하의 어린이는 무상배급을 받을 자격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이론적으로는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계급에 속하는 '소키에타스' 사장도 마음만 먹으면 무상배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맥법'의 진짜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주는 데 있다. 그래도 유권자 대책이니까, 대상을 빈민층으로 한정하면 효력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로마 당국은 묘안을 짜냈다. 한 달에 5모디우스의 밀을 공짜로 받을 수 있는 배급권과 축제 행사장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신청하면 당국이 그것을 심사해서 증명서(Tesserae frumentariae)를 발급해주는데, 이 증명서를 받으려면 신청자 본인이 출두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서민이나 해방노예와 함께 마르스 광장에 길게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다가 아는 사람이나 친구를 만나는 창피도 견뎌야 한다. 요컨대 창피와 시간 낭비라는 무형의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다. 이 방법은 정말로 복지를 필요로 하는 자들만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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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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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동화사 - 점을 쳐서 정해진 절의 위치
동화사와 파계사를 창건하여 신라 5악의 하나인 중악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했던 심지라는 승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도 팔공산 일대의 사찰에서는 '심지왕사'라 하여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떠받들어 오고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은 의외로 드물다. 삼국유사와 동화사, 파계사 사적지에 그의 행적이 얼핏 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족적은 동화사 일대, 파계사 및 은해사 지역 등 팔공산 남쪽 기슭에 꽤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 속에서 그의 면모는 비바람결에 씻겨버려, 그가 남긴 불사의 흔적들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심지는 신라 말기 때 승려이다. 그는 41대 헌덕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왕자로서의 호사를 버리고 '학문에 뜻을 둘 나이(15세)'에 출가, 산문에 든다. 그가 출가한 곳이 어딘지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한동안 팔공산에서 정진했다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그는 신라말기의 고승 진표율사의 법제자인 영심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원광/신표/심지로 이어지는 독특한 신라 점찰 법맥을 이룬 사람이다. 점찰법은 '점찰선악업보경'에 근거한 것이다. 이 경전은 지장보살이 나무쪽을 던져 길흉선악을 점치는 법과 참회하는 법을 밝힌 것이다. 이 경에 의한 법회가 점찰법회이다. 신라에서는 원광법사가 점찰보를 만들고, 이 법회를 처음 열었다. 점찰법회는 유교의 주역괘풀이와 비슷한 것으로도 보여진다. 주역의 대나무간자(점치는 대쪽)는 64개이지만, 점찰경의 간자는 1백 89개로 되어 있다. 점찰법회의 상세한 기술이 없어 어떻게 이 법회가 열려 왔는지, 심지 이후의 법맥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법회는 불교와 무속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과 더불어 동화사가 그 법맥을 간직하고 있었으리라고 여겨질 뿐이다.
삼국유사에는 심지가 진표율사의 점찰간자를 전수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가 팔공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마침 속리산의 영심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하여 과종법회(진리를 깨달아 도를 여는 법회)를 연다는 소문을 들었다. 심지는 급히 속리산으로 갔으나 도착이 늦어 참례에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땅에 자리를 깔고 뜰에 엎드려 법회에 예를 올리고 참여했다. 7일이 지나 큰 눈이 내렸다. 그러나 그가 있는 땅의 10자쯤은 눈이 날리고 내리지 않았다. 승려들이 이 신기한 일을 보고 그를 당에 오르라고 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그가 당을 향해 예배할 때 팔굽과 이마에 피가 흘렀다.
점을 쳐서 정한 절터
법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에 보니 그의 옷주름에 간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그걸 가지고 되돌아가 영심에게 알리니, "간자는 함 속에 있다"고 하여 찾아보았다. 과연 두 개가 없었다. 심지가 간자를 돌려주고 돌아가다가 다시 보니 여전히 간자가 옷에 붙어 있었다. 이에 영심이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어 봉행하라"고 패쪽을 심지에게 주었다. 심지는 그걸 받아 돌아오다가 산신을 만난다. 그는 산신과 함께 "땅을 가려 이 신성한 간자를 봉안하겠다'고 말하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간자를 던졌다. 그 간자는 숲속의 한 우물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법당을 세웠다. 이곳이 바로 동화사 자리이다. 이 얘기로 미루어보면, 이 설화는 동화사 절터를 정할 때, 점을 쳐서 자리를 잡은 것을 상징한 것이라 추측된다. 또는 점찰법의 특징을 갖고 이 절이 세워졌으리라고 추측도 된다. 그러나 동화사 사적기에는 동화사 창건은 이보다 훨씬 앞서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년)에 심지왕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심지는 창건자가 아니라 중건자가 된다. 당시 심지가 중건할 때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꽃이 피어 절 이름을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사적기는 연대적으로 모순이 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23대 법흥왕 이후이다. 소지왕(21대)은 그 이전인 만큼 사찰이 창건될 수가 없다. 동화사 경내에 남아 있는 옛 유물들은 모두 신라 후기의 것이다. 그런 만큼 흥덕왕 7년(832)에 절이 처음으로 조성됐으리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사라진 우물의 원형
10여 년 전에 필자가 동화사를 들렀을 때 동화사의 서북쪽편 대웅전 왼쪽 요사체 뒤에 오래 된 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 우물이 바로 심지가 간자를 던졌을 때 간자가 빠진 우물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이 살았던 고려 중기 때까지 그 우물 옆에는 첨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간자를 모신 사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며, 간자도 없어졌다. 다시 우물은 시멘트로 조잡하게 조성하여 옛 우물의 표가 나지 않는다. 당시 절의 한 스님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옛우물은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원래의 우물은 가로 2m, 세로3m 가량의 직사각형 화강암으로 다듬은 것으로, 지표에서 1m가량 된 대단히 견고한 우물이었다고 한다. 4~5년 전까지도 우물 주위에는 당시 우물의 유물인 화강암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우물은 조선 말기까지만해도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듯하다. 그러다가 절에 수도시설이 되고 난 뒤부터는 빨래터로 바뀌었으며, 결국 돌들은 축대 등으로 빠져나가고, 콘크리트 우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최근에 그 우물을 다시 찾았으나 우물은 사라지고 없고 우물이있던 자리에는 시멘트가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절에서 일을 보는 한 아주머니에게 우물을 언제 없애버렸느냐고 물으니 3~4년 전에 그랬다고 했다. 그 우물은 동화사 절터를 잡을 때 지표가 됐던 중요한 것이었으나 그 중요성이 후손들에 의해 망각되어 버린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화사에는 입구의 마애불좌상(보물 2백43호)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2백 48호) 등 심지가 조성했다는 통일신라 후기의 유물들이 꽤 남아 있다. 심지는 특히 불사를 좋아하고, 예술적이 자질이 있은 듯하다. 파계사뿐만 아니라, 은해사 뒤편의 중암암 3층석탑도 그가 조성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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