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5호 - 2024.07.01 월요일(음력 : 05.26)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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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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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경험은 어리석음 속에서 얻어진다. ― 사샤기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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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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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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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갖은
신문에서 어떤 운동선수 인터뷰 기사를 봤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는 말에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에 관심 많이 갖어 주시고, 경기장에도 많이 와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 선수는 그냥 ‘가져 주시고’라고 말했을 텐데, 기자가 굳이 ‘갖어 주시고’로 썼을 것이다. ‘갖어 주시고’는 틀린 표현이다. ‘가져 주시고’라고 해야 맞다.
‘갖다’는 ‘가지다’의 준말로서, 본말과 준말은 문장 안에서 서로 바꿔 쓸 수 있다. 그런데 준말인 ‘갖다’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는 결합하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다. 우선 ‘-게, -고, -다, -지’ 등 자음 어미와 결합할 때를 보자. ‘이 책을 가져다 두어라’ 대신 ‘갖다 두어라’라고 할 수 있고, ‘저리로 가지고 가세요’ 대신 ‘갖고 가세요’라고 해도 된다. 그런데 ‘-어(아), -은, -으니’ 등 모음 어미와 결합한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리로 가져 오세요’ ‘돈을 많이 가진 사람’ 등을 ‘갖아 오세요’ ‘갖은 사람’으로 줄여 쓸 수 없다.
따라서 ‘가지고/갖고’, ‘가지게/갖게’, ‘가지지/갖지’ 등은 둘 중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해 쓸 수 있으나, ‘갖다’에 모음 어미가 결합된 ‘갖아, 갖은, 갖으니’ 등은 틀린 표기가 된다. 반드시 본말인 ‘가지다’의 활용형 ‘가져, 가진, 가지니’로 써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갖은’이라는 말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갖다’의 활용형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또는 ‘골고루 갖춘’의 뜻을 지닌 관형사로서의 ‘갖은’이란 말이 따로 있다. ‘갖은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모셨다’거나 ‘갖은 양념을 넣어 만든 음식’ 등에 쓰인 ‘갖은’이 그 예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불법’의 두 가지 발음
“어, 이거 불법인데?”라고 했더니 옆 사람이 웃는다. 필자가 [불법]이라고 말한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뻡]이 아니냐고 한다.
‘불법(不法)’의 표준 발음은 [불법]이 맞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뻡]이라고 하듯이, 한자어의 발음은 예사소리가 된소리로 변한 경우가 꽤 있다. ‘문법(文法)’[문뻡]도 과거에는 [문법]이라고 발음하였다고 하니 적잖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 따라서 발음이 다르고, 그 결과 표준 발음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효과(效果), 논조(論調), 관건(關鍵), 교과서(敎科書)’ 등도 같은 예이다. 이 단어들도 [효ː꽈], [논쪼], [관껀], [교ː꽈서]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지만, 역시 [효ː과], [논조], [관건], [교ː과서]가 표준 발음이다. 적어도 공적인 환경이라면 이러한 표준 발음대로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국어 화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앞으로 현실음을 배려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방송 아나운서들의 발음만 보아도 ‘효과, 논조, 관건’의 경우 예사소리, 된소리 발음이 반반 정도이다. 그만큼 된소리 발음을 무조건 잘못된 발음으로 몰아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몇 년 전 ‘자장면’과 더불어 ‘짜장면’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였는데, ‘효과, 논조, 관건’ 등도 정도에 따라서 복수의 발음을 표준으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자장면, 짜장면’은 표기도 둘이지만 이러한 한자어들은 표기를 바꿀 필요도 없다. 두 가지 발음을 좀 더 폭넓게 인정한다면 화자들의 마음도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짜방’인가 ‘아자방’인가
지난 11일 지리산 칠불사 아자방 구들 보수공사 과정에서 복원 이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아궁이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 아자방 구들은 한 번 불을 지피면 온돌과 벽면에 100일 동안 온기가 지속된다고 하기 때문에 관심이 더욱 증폭됐다. 그런데 ‘아자방’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가. 표기대로 [아자방]이라고 발음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짜방]이라고 발음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짜방]으로 발음해야 한다.
아자방은 한자 ‘아(亞)’자 모양으로 방고래를 만들고 구들을 놓은 방으로, 가운데 한자가 글자 ‘자(字)’이다. 아자방은 바닥층과 침상으로 되어 있는데, 침상이 '다'자형(字形)으로 양쪽에 있고 방바닥이 십자형(十字形)으로 되어 있어 마치 그 모양이 ‘아(亞)’자를 닮았다고 해서 ‘아자방’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런데 뒤에 글자 ‘자(字)’가 오는 단어들은 ‘한자(漢字)’[한:짜], ‘문자(文字)’[문짜]의 경우처럼 ‘자’를 된소리로 발음한다. 이는 한자어의 발음에서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발음되는 조건, 즉 ‘ㄹ’ 받침 뒤에 ‘ㄷ, ㅅ, ㅈ’의 소리가 연결되는 경우 이외의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자어의 된소리 발음은 이처럼 수의적(隨意的)으로 된소리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의적인 된소리 발음 용례들에는 가점(加點)[가쩜], 기법(技法)[기뻡], 시비조(是非調)[시:비쪼], 유권자(有權者)[유:꿘자] 등이 있다.
같은 이유로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인 ‘정자각(丁字閣)’은 [정자각]이 아닌 [정짜각]이라고 읽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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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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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하늘 - 천상병
무한한 하늘에
태양과 구름 더러 뜨고,
새가 밑하늘에 날으다.
내 눈 한가히 위로 위로 보며
하늘 끊임없음을 인식하고
바람 자취 눈여겨보다.
아련한 공간이여.
내 마음 쑥스러울 만큼 어리석고
유한밖에 못 머무는 날 채찍질하네.
∼∼∼∼∼∼∼∼∼∼∼∼∼∼∼∼∼∼∼∼∼∼∼∼∼∼∼∼∼∼∼∼∼∼∼∼~~~~~~~
심우장( 尋牛莊) 3 - 한용운
소찿기 몇 해런가
풀기이 어지럽구야.
북이산 기슭 안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시잖으면
정녕코 만나오리.
찿는 마음 숨는 마음
서로 숨바꼭질 할제
골 아래 흐르는 물
돌길을 뚫고 넘네.
말없이 웃어내거든
소잡은 줄 아옵소라.
∼∼∼∼∼∼∼∼∼∼∼∼∼∼∼∼∼∼∼∼∼∼∼∼∼∼∼∼∼∼∼∼~~~~∼∼~~~~~
밤 - 정지용
눈 머금은 구름 새로
흰달이 흐르고,
처마에 서린 탱자나무가 흐르고,
외로운 축불이, 물새의 보금자리가 흐르고...
표범 껍질에 호젓하이 쌓이여
나는 이밤, (적막한 홍수)를 누워 건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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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진 - 김수영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그래도 그것은
돌아가신 그날의 푸른 눈은 아니요
나의 기아처럼 그는 서서 나를 보고
나는 모오든 사람을 또한
나의 처를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것이요
영탄이 아닌 그의 키와
저주가 아닌 나의 얼굴에서
오오 나는 그의 얼굴을 따라
왜 이리 조바심하는 것이요
조바심도 습관이 되고
그의 얼굴도 습관이 되며
나의 무리하는 생에서
그의 사진도 무리가 아닐 수 없이
그의 사진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하나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이요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같이
시계의 열두시같이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 ......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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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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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호빙하(暴虎馮河)
暴:사나울 폭(관용)/포. 虎:범 호. 馮:탈 빙. 河:물 하
[동의어] 포호빙하지용(暴虎馮河之勇)
[참조] 전전긍긍(戰戰兢兢). [출전] ≪論語≫ 〈述而篇〉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걸어서 황하를 건넌다는 뜻. 곧 무모한 행동.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용기의 비유.
공자의 3000여 제자 중 특히 안회(顔回)는 학재(學才)가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라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이를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노하거나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안회에게 어느 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왕후(王侯)에게 등용되면 포부를 펴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를 가슴 깊이 간직해 두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나와 너 두 사람 정도일 것이다.”
이 때 곁에서 듣고 있던 자로(子路)가 은근히 샘이 나서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도를 행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만약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임할 때 선생님은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무용(武勇)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자로는 ‘그야 물론 너지’라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대했으나 공자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거나 황하를 걸어서 건너는 것[暴虎馮河]과 같은 헛된 죽음을 후회하지 않을 자와는, 나는 행동을 같이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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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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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2. 허정 과도정권 출범
이날 흥분한 자유당 의원들을 진정시키고 의사당을 나온 이재학은 우두커니 서서 의원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그시 지켜 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우선 목욕부터 했다. 그리고는 서재로 돌아와 담배를 붙여 물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한 게 아닐까?) 담배를 붙여 물고 한 모금 길게 내뿜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개헌안에 서명을 할 때나 국회가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남들과 같이 어깨가 축 늘어지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소금물에 절인 배추같이 되지는 않았다. 졌다가 내려 놓았을 때의 거뜬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홀가분한 기분에 젖은 채 지난 20여 일 동안 태풍과도 같이 거세기만 했던 용돌이를 회상해 보았다.
"지탄의 대상이었던 이기붕이 자결로서 속죄했으면 그뿐이지 이제 우리더러 어쩌란 거야?"
"옳아! 무법천지로 권력을 휘두른 것은 만송이었지 우리였던가? 우리가 혁명 대상이 되고 우리가 만송의 잘못을 뒤집어 써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해? 그래 우리를 혁명 대상 취급하면서 우리더러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도장을 찍으란 말인가?"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어디 해볼 테면 무슨 죄가 있느냐?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이기붕한테 있지, 우리한테는 없다. 이렇게 배짱으로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이기붕이 그 허약한 몸을 가지고 지나치게 권력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모든 잘못을 이기붕한테 덮어 씌우려 덤볐다. 어제까지 이기붕이 없으면 당도 안 되고 나라도 안 될 듯이 갖은 미태로 아양을 떨고 꼬리치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간사스러운 동물이던가? 이 정도 반발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또 모른다. 한희석(韓熙錫), 임철호(任哲鎬), 장경근(張璟根) 등을 중심으로 한 소위
"뭐 개헌? 누구 마음대로? 혁명이 일어났다고 우리가 저희들 꼭두각시가 될 줄 알고 어디 할 테면 실컷 해보라지."
사실에 있어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죽일 테면 죽여라 하고 나자빠지는 날엔 개헌이란 도저히 성공하리라는 전망이 서지 않았다. 여기에 부채질을 한 것이 민주당 신파 내의 이른바 선선거 후개헌(先選擧 後改憲)론자들이었다.
"우리하고 손을 잡읍시다. 우리하고 손을 잡아 개헌론을 분쇄하도록 합시다."
이래서 어제의 적과 오늘의 적은 한편이 되고자 악수를 했다. 자유당 강경론자들과 민주당 선선거후개헌론자들이 악수를 한 것은 그들의 아니었다.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 이러한 심사에서였다. 그들이 이런 고약한 심사를 품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새 정부가 들어서 봐라. 그 새 정부란 10년 야당을 해온 민주당 정권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10년 동안 괄시받았던 서러움을 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치보복을 하려 들 테니.) 그들은 민주당이 반드시 정치보복을 하고야 말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자유당 사람들의 이러한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꿰뜰어보고 있던 민주당의 권중돈(權仲敦) 외 몇몇 국회의원들은정치보복을 엄단해야 한다는 대정부 긴급 그러한 긴급 동의안도 별 효력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당 강경파 의원들이 민주당 신파의 선선거 후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개헌을 훼방, 조금이라도 더 지금의 혼란스러운 사태를 연장해가며 살 길을 찾고자 몸부림친 것은 어쩌면 그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요, 인지상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이렇게 자유당 강경파 의원들이 살 길을 찾아내느라 몸부림치고 있을 때, 여기에 가담해 줌으로써 반개헌파 세력을 은근히 키워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자유당 내의 조경규(趙瓊奎)를 보스로 한 재건파였다. 3.15 전까지 자유당 내의 반 이기붕파로서 적지 않은 세력을 물실호기(勿失好機)라 속으로 상당히 쾌재를 불렀다. (이참에 자유당을 우리 재건파에서 한 손아귀에 거머쥐자!) 그들의 속셈인즉 바로 이것이었다. 350만의 당원을 자랑하던 자유당이다. 이러한 방대한 세력의 조직체를 하루 아침에 무너뜨려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이기붕한테 붙어서 돼먹지 않게 세력이나 부리려던 못난 자들(물론 그들은 강경파를 지목해서 하는 말이었다)을 밀어내고 재건파의 손으로 당을 재정비하자는 속셈을 차렸다. 보스인 조경규는 뻔질나게 민주당 신구파의 주요 간부들과 빈번한 접촉을
"당신들이 정권을 잡게 될 경우, 우리 재건파에서 자유당을 재건하는 것을 묵인해 주시겠소?"
그는 이렇게 애매한 태도로서 흥정을 걸었다.
"만일 당신들이 우리가 자유당을 재건하는 것을 묵인만 해준다면 당신들이 주장하는 개헌에 전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보내 주겠소."
이런 정치적 흥정에 김도연(金度演)과 유진산(柳珍山)은 선뜻 그러마고 약속하는 언질을 주었다. 김도연이나 유진산이 거침없이 정치흥정에 응해 준 것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다. (민심이 이미 자유당한테서 떠나간 지 오래지 않느냐. 자유당이 350만 이 아니라 출마해서 정계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게다.) 이런 계산이 서 있는 데다가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가로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4대 국회의 마지막 임무라 할 수 있는 개헌안을 속히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만일 혁명 기분에 젖은 대로 자꾸만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자극시키려 들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민주당 신파 사람들의 주장대로 선선거 후개헌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인즉,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리냐!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자유당 사람들을 달래고 무마시켜서 개헌안을 통과시켜 놓고 볼 일이다.) 이렇게 치밀한 계산을 해놓고 있었던 그런데 조경규란 사람은 민주당 구파하고만 정치흥저을 해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더라도 신파냐 구파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어쩌면 정권을 놓고 서로 자파에서 잡으려 들다가 끝내는 집안 싸움을 일으켜 갈라 서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신파하고도 적당한 흥정을 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 신파가 집권하게 될지 구파가 집권하게 될지 앞날을 가늠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니.) 이래서 그는 신파에도 동조하는 척하며 되도록 자기한테 이롭도록 교묘히 정국을 헤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강경하게 배짱을 부리던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과도정부에서 장경근, 박만원, 이존화(李存華), 신도환(辛道煥), 손도심(孫道心)에게 체포령을 내리는 동시에 한희석, 박용익, 임철호, 조순(趙淳) 등을 체포 구속해 버렸기 때문이다.
검찰의 태도는 마치 민주당을 대신하는 듯 추상 같기만 했다. 그렇다고 자유당 강경파 의원들이 풀이 죽었다고는 하나 고분고분 수그러들려 하지는 않았다.
"우리 자유당 없이는 개헌안을 통과시킬 수 없으며 일체의 정치보복은 배제할 것이라 장담하던 그들이 이제 새삼스럽게 우리 보스들을 잡아간다는 것은 명백한 그러니까 민주당에서 협력을 요구해 오는 일은 무슨 일이든 무조건 거부해 버리자는 태도로 나왔다. 정치 기상도가 이렇게 급변해 버리자, 당황한 것은 누구보다도 자유당 혁신파의 보스인 이재학이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국회의장인 곽상훈과 접촉하면서 정치보복을 금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여보, 삼연(三然), 이게 무슨 짓이요? 이렇게 정치보복을 하려 들면 점점 더 거세게 반발만 일으킬 뿐인데, 이래 가지고 무슨 수로 정국 수습을 하겠다는 게요?"
"글쎄, 나두 그런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곽상훈도 무척 딱한 눈치였다.
"우양(牛洋)을 만나 되도록 정치보복을 달라 부탁을 하긴 했소만 만사가 여의치 않은 모양이구려."
그것도 그랬다. 만일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라 지목되는 자유당의 강경파를 잡아넣지 않고서는 우선 분노에 끓고 있는 민중을 무마할 길이 없었다. 어쨌든 우선 분노해 있는 민중의 노여움을 풀어놓고 봐야 할 일이 아니든가. 그래서 과도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임철호, 박용익, 한희석, 이존화 등 강경파 의원들을 기어이 잡아넣을 눈치 같았다.이래서 이재학은 마냥 반발하려고만 드는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무마하기에 더욱더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무슨 욕을 먹든 신중하게 과거를 씻기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한결같이 바라고 있는 바이고, 우리는 그것으로 과거를 속죄하는 뜻으로 삼으면 될 게 아니겠소?"
이재학이 반발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위로하며 무마하려 들면 핏발 선 눈을 하고 대드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욕까지 얻어먹어 가면서도 내각책임제 개헌을 해주란 말이오? 그까짓 개헌을 해준댔자 어차피 자유당은 멸망해 버릴 길밖에 없는데, 뭣 때문에 민주당 놈들한테 동조를 해준단 말이오?"
"그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
"뭐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오?"
"내각책임제 개헌은 국민의 여망이란 말씀이외다. 우리가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동의하는 게 어디 민주당한테 동조해 주는......"
그래도 그들은 좀처럼 이재학의 설득을 수긍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까짓 내각책임제구 뭐구 다 된 굿인데 자폭해 버려요. 자폭해도 지금 당장 자폭할 것이 아니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표결하기 직전에 자폭해 버리는 거야. 무슨 꼴이 되나 보게."
이와 같이 극도로 비관해서 자포자기로 나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여간에 그러한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해서, 이재학은 자유당 소속 의원들로 하여금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서명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마냥 홀가분하기만 했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 이제부터 낚시질이나 부지런히 다닐까?) 그는 자신이 부정선거 원흉의 한 사람으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 양심에 꺼릴 것이 없으면 마음에 불안은 없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조각을 끝낸 허정 과도정권이 출범의 돛을 올리자, 그와 함께 검거 선풍이 불었다. <최인규 검찰에 자진 출두.> 신문에서는 최인규가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고 대서특필을 했으나 사실은 자진출두가 아니었다. 그는 체포되어 갔던 3.15 부정선거의 원흉은 많다. 원흉 중의 원흉은 최인규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람됨과 체포 경위에 대해서는 좀 소개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최인규, 그는 무척 호방한 사나이였던 것 같다. 호방은 미련하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미련하기가 곰 같은 친구 같으니, 아니 그래 일본이나 홍콩, 아니면 미국 같은 데로 달아날 일이지 도살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그가 서울 지방검찰청에 자진 출두했다는 신문기사에 접한 그의 친구들은 그가 진짜 제 발로 걸어들어간 줄 알고 이렇게 안타까워했다. 최인규, 그는 아무래도 미련하긴 미련한 위주상계로 달아났더라면 그는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마하니 나를 죽이기야 할라구.) 그는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련하기 때문에, 아니 호방하기 때문에 세상을 얕잡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 성품이 호방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의 호방한 성품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에게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X라는 여배우에게 반해 있었다(그녀는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명예를 위해 이름만은 굳이 숨겨둔다). 그러나 좀처럼 손길을 뻗치기가 어려웠다. 곁에서 지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속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해보자꾸나.> 호방한 사나이였고 보면 이런 말로 접근할 법도 한 일이었으나, 그는 크리스천이었다. 더구나 그는 출세에 혈안이 돼 있던 참이라 계집으로 말미암아 끓어오르는 정열은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이제 1차적인출세의 목표는 이룬 셈이었다. 출세를 위해서 쓰고 있던 크리스천의 가면도 내던질 때가 됐다. 내무부 장관의 감투를 썼다고 해서 <1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는 아니지만 <3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라고 하기에 족했다. 그가 무서워하는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과 국회의장 이기붕, 그리고 이승만의 호위인 곽영주 단 세 사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돈이 좀 필요하네. 한 천만 환쯤 수표로 한 장 만들어 주게."
총무과장이 천만 환짜리 보증수표 한 장을 만들어 주자, 최인규는 그걸 웃주머니에 넣고 부리나케청수장(淸水莊)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 여배우를 불렀다. 내무장관의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은 여배우 X에게 있어서도 일생 일대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장관이라는 감투의 마력에 이끌리어 X는 스스로 몸을 내맡겼다. 간절히 소망하던 여배우를 하룻밤 품고나자 사나이는 다음날 주머니에서 일금 천만 환짜리 보증수표를 호기있게 내던져 주었다.
"받아, 적지만."
사나이는 적은 액수라는 데에 힘을 주어 말하며 또 한번 호기를 부렸다.
"그렇다구 하룻밤 몸값으로 주는 건 아냐. 내가 얼마나 너를 사모하고 있었느냐 하는 정표로서 주는 거니까,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할 건 없어."
X는 그것이 하룻밤의 몸값이라고 하면서 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저 입이 딱 벌어질 뿐이었다. 영화 10편에 출연을 해야 만져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입 한 번에 일금 천만 환을 아낌없이 뿌릴 수 있는 사나이란 그리 흔치가 않다. 그것도 한국에서 엄지손가락쯤 되는 사나이라면 모를까 일개 내무부 장관으로서 그쯤의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사나이는 최인규를 내놓고는 달리 최인규란 그런 사나이였다. 통이 그쯤 되니까 3.15 부정선거 같은 사상 전무후무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장관 사표를 내던지고 나서 최인규가 은신해 있던 곳은 반도호텔이었다. 4월29일 아침 서울 지방검찰청 수사관들이 그의 방을 노크했다. 침대에 벌렁 나자빠져 있다가 노크 소리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 최인규는 숨을 죽였다.
"똑 똑 똑."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최인규는 그래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응답이 없자, 수사관들이 도어를힘껏 밀치고 들어왔다. 최인규는 용수철에 튕겨진 것처럼 후다닥 일어섰다. 단정적으로 물었다.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 씨죠?"
수사관의 손에는 어느덧 수갑이 들려져 있었다. (아아, 이제는 옴치고 뛸 수도 없게 되고 말았구나!) 최인규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에 넋을 잃고 말았다. 간덩이가 큰 사나이일수록 이런 경우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고 하던가? 또 다른 수사관이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검찰헤서 선생을 부정선거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하고 구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행해 주신다면 수갑은 채우지 않겠습니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장관에 대한 예우임이 틀림없었다. 수갑을 보고 혼비백산해져 있던 최인규는 번쩍 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선생."
최인규는 자기를 잡으러 온 수사관에게 <선생>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선생."
최인규의 목소리는 어느새 애원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기왕에 봐주시려거든 끝까지 좀 봐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수갑을 손에 들고 있는 수사관이 의아한 표정을 붙였다.
"다름이 아닙니다."
최인규는 목이 타는 듯 마른 침을 꿀꺽
"내가 숨어 있다가 체포당했다는 것과 자진 출두했다는 것과는 형량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수사관들은 최인규가 무슨 부탁을 하려고 했는지, 그 속셈을 헤아렸던 모양이었다. 두 수사관은 서로 눈길을 모았다. 어쩌면 좋겠느냐 하는 것을 눈으로 의논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최인규는 한껏 더 애원하는 목소리로 매달렸다.
"그렇잖아도 난 이승만 박사께서 하야하시고 이화장으로 옮겼다는 뉴스를 듣고 오늘이라도 자수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수를 해야만 그 어른께 누를 끼치지 않을 테니말씀입니다. 부정선거의 원흉은 이 이렇게 애원을 하느 사이에 최인규는 마음속에 결심을 했다. (그렇다. 모든 책임은 내가 한 몸에 걸머지자. 그 어른한테 누를 끼칠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일개 보험회사 사원에 불과했던 내가 외자청장이 되고 교통부 장관이 되고 내무부 장관이 되어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그 어른의 덕분이 아니더냐. 그렇다. 지난 모든 잘못은 모조리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깨끗이 죽는 거다.) 죽음에 대한 결심을 굳히고 나니 지금까지의 번뇌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수사관 앞으로 내밀었다. 수갑을 채우겠으면 채우라 해서였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수갑을 들고 있던 수사관이 그렇게 말하면서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최인규 구속의 과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서울 지방검찰청에서는 최인규를 체포하고는 자진 출두한 것으로 발표했다. 사나이의 소망에 마지막 꽃다발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5월 3일에 정식으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그쯤 인정을 베풀었다고 해서 조금도 나무랄 것은 없었다. 도망칠 수 있는 것을 도망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5월 3일, 이날 치안국장이었던 이강학도 구속되었다. 죄명은 모두 선거법 위반이었다. 전 내무부 차관 이성우(李成雨)와 지방국장이었던 정부 수립 직후 내무부 총무과장에서부터 입신출세의 길을 걸어 이기붕을 업고 자유당 제3의 실력자로까지 출세했던 한희석은, 4.19가 터지자 삼십육계 위주상계로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끝내 꼭꼭 숨지를 못하고 5월 7일에 잡히고야 말았다.
"뛰어야 벼룩이지 제 놈이 도망을 치면 어디로 도망을 쳐?"
정치를 하던 사람답게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고 떡 집안에 버티고 있었던들 욕이라도 덜 먹을 것을 치사스럽게 도망쳤다가 잡히는 바람에 그는 국민들로부터 바가지로 욕을 먹어야만 했다. 무식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던 10일에 구속되었다. 이승만에게 있어 곽영주만한 충견(忠犬)도 없었다. 그는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으로 이승만을 섬겨왔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내놓고 이화장으로 이사를 하자, 그는 이승만을 따라 이화장으로 따라가 잠시도 이승만의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검찰에서도 곽영주를 구속하는 데 있어서는 신중을 기했다.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 황은환(黃銀煥)은 하루 전인 5월 9일에 출두 명령서를 발송했었다. 정치깡패 이정재(李丁載), 임화수(林和秀) 사건 관계에 증언을 하라는 이유를 들어 출두 명령서를 발송했던 것이다. 옛날 같으면야 검찰에서 감히 출두명령서를 발송하지도 못했겠지만 설혹 쳐버렸을 곽영주였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뒤집힌 것이다. 출두하지 않았다가는 어떤 날벼락을 맞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5월 10일 오후 1시, 곽영주는 이승만이 점심 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서울 지방검찰청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승만의 안색이 흐려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뭐 별일 아닙니다. 몇 마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해서 다녀오려고 합니다. 곧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곽영주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이승만은 안스러운 모습으로 물러가는 곽영주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지가 못내 한스럽기만 한 것 같은 눈치였다. 검찰이 이화장으로 달려가 곽영주를 체포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에 대한 배려였다. 아무리 세상이 뒤집혔다고 해도 전직 대통령 앞에서 그의 경호원을 체포하는 무례한 행동은 삼가했던 것이다. (증인 심문 정도겠지.) 별반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검찰에 출두했던 곽영주는 출두 즉시 황은환에 의해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권력의 무상함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되는 한 순간이었다. 곽영주에 적용된 죄명은 <권리행사 방해혐의>였다. 반공청년단(反共靑年團)이라고 하면 국민의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어찌 국민이 그토록 혐오를 했겠는가. 그들은 반공을 위해서 뭉친 청년단체가 아니라 오로지 이승만, 이기붕의 정치적 전위대 구실을 하기 위해서 뭉쳤던 폭력단체였다. 그 청년단의 우두머리였던 신도환이 체포 구속당한 것은 5월 16일이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선거법 위반 및 횡령이었다. 전 재무장관 송인상(宋仁相), 전 산업은행 총재 김진형(金鎭炯)이 선거법 위반, 중뢰혐의로 구속된 것은 5월 17일이었다. 세칭 <민주당 전복 음모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전 법무장관 홍진기가 체포, 구속된 것은 5월 18일이었다. 이날 이중재(李重宰)와 정기섭(鄭起燮)도 체포, 구속되었다. 전 전성천(全聖天), 전 서울특별시장 임흥순(任興淳)은 5월 20일에 구속되었다. 특히 임흥순은 부통령 장면 암살미수사건에도 연루되어 있던 자였다. "백두산 호랑이다!" 이 한마디로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만큼 권세를 부리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金宗元)이 구속된 은 5월 20일이었다. 이 자는 곽영주 이상 무식하기 짝이 없던 자로서 이승만의 총애를 방패로 해서 자행한 불법, 무법은 한 권의 소설을 엮고도 남음이 있을 지경이었다. 김종원이 구속될 때 서울시 경찰국의 장영복(張永福)과 오충환(吳忠煥)도 구속되었다. 잡아들여야 할 굵직한 자들은 아직도 정부에서 이재학, 임철호, 박용익(朴容益), 정존수(鄭存秀),정문흠(鄭文欽), 조순(趙淳) 등을 잡아들이고자 국회에 그들에 대한 구속 동의요청을 한 것은 5월 23일이었고, 이 동의요청은 5월 26일에 가결되었다. 굵직한 사람들은 또 있을 텐데? 그렇다. 3.15 부정선거 당시의 각료들 가운데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전 문교부 장관 최재유(崔在裕), 전 농림부 장관 이근직(李根直), 전 보사부 장관 손창환(孫昌煥), 전 부흥부 장관 신현확, 그리고 전 상공부 장관 구용서(具鏞書), 전 한국은행 수석 부총재 김영휘(金永徽), 4.19 당시의 치안국장 조인구(趙寅九) 등이 5월 30일에 체포, 이것으로 잡아들여야 할 굵직한 자들은 거의 다 잡아들인 셈이었다. 물론, 이 밖에도 잡아들여야 할 자들은 아직도 많았다. 그러나 허정은 <과도정부 응급실론>에 따라 우선 응급처치를 위해서 이들 굵직한 자들만 잡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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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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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로마의 대화재
서기 64sys 7월 18일부터 19일에 걸친 밤, 대경기장 관중석 밑에 들어차 있는 가게에서 일어난 불은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삽시산에 가까운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으로 번졌다. 여름철이면 로마에서는 자주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시로코라는 남서풍이 맹위를 떨친다. 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평소에는 서늘한 서풍이 부는 로마 시가지도 순식간에 기온이 올라가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시로코가 며칠동안 계속 부는 일은 별로 없지만, 그해 여름은 달랐다. 밤사이에 팔리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까지 집어삼킨 불길은 '수부라'(서민층 주거지역)로 번지고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황제 일가의 저택이 몰려 있었고,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이 저택들이 모두 잿더미가 된 것이다. 첼리오 언덕은 위쪽에는 고급주택이 늘어서 있지만, 아래쪽은 서민의 집들로 메워져 있었다. 맹렬한 불길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별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새로 건설하는 도시에서는 훌륭한 도시계획 재능을 발휘했지만, 자기네 수도인 로마에서는 이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로마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도시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도시계획에서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되는 언덕을 일곱 개나 가진 도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의 수도'가 된 뒤로는 유입 인구가 많아서, 로마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백만 인구를 거느린 대도시가 되어있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벽돌로 물려받은 로마를 대리석으로 물려주겠다고 호언했지만, 그것은 공공건물에 한정되었다. 계속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려면 '인술라'라는 5-6층의 공동주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인술라'는 중하층과 하층 주민을 위한 주택이다. 따라서 벽은 석조라도 바다과 천장에는 목재를 사용한다. 그리고 주거 공간을 조금이라고 넓히기 위해 이층 이상은 내닫이창이 도로 쪽으로 튀어나온 구조가 많다. 가뜩이나 좁은 도로가 양쪽에서 튀어나온 내닫이창 때문에 더욱 좁아졌다. 또한 이 아파트는 바깥벽을 이웃 아파트와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공동주택 사이에는 빈터가 없고, '인술라'들이 벽을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불길이 번지면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부자들의 호화로운 단독주택에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제국의 경제력 향상을 반영하여, 이들의 저택에는 대리석이나 모자이크가 많이 사용되어 있었지만,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른 들보는 목재다. 그림이나 문양이 그려져 있긴 하지만, 목재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하인 숙소나 창고로 쓰이는 위층 바닥도 목재다. 문이나 창틀도 목재다. 들보로 불길이 옮겨 붙으면 지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죔쇠로 연결한 석재를 들보로 쓴 곳은 신전이나 회당이나 극장 같은 공공건물뿐이었다. 소방대는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소방대 조직은 7개 대대, 소방수는 7천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고무가 없던 시절, 테베레 강물을 호수로 날라 불을 끄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소화 작업은 물동이에 담아서 릴레이식으로 나르는 수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소방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직 불타지 않은 건물을 부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중에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엿새째 저녁에야 겨우 불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은 잠시뿐, 이번에는 동쪽에서 불어온 강풍에 불씨가 되살아났다. 불길은 또다시 사흘 동안 맹위를 떨쳤다. 결국 '세계의 수도'는 아흐레 동안 불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불이 났을 당시, 네로는 무더위를 피해 로마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해변도시 안치오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로마에서 불이 난 것은 그 이튿날 알았다. 그것을 알자마자 네로는 두 필의 말이 끄는 수도로 들어갔다.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별궁은 무사했지만, 26세의 황제는 별궁에 편안히 앉아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재민 대책을 진두 지휘했다. 네로의 입에서는 차례로 명령이 떨어졌고, 그 명령은 신속하고 확실하게 집행되었다. 재난을 모면한 구역 중에서도 도심과 가까운 마르스 광장 주변의 공공건물은 모두 이재민 수용소로 개방되었다. 신전인 판테온(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 현재의 판테온이 아니라,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 투표장인 사이프타 율리아, 폼페이우스나 옥타비아의 이름을 붙인 회랑... 지붕이 있는 건물은 모두 이재민에게 제공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공공건물을 둘러싼 빈터에는 근위대 병영에서 가져온 수많은 천막이 쳐졌다. 로마 군단 병사들은 행군하는 동안 밤마다 임시 숙영지를 짓기 때문에, 천막을 치는데에는 능숙했다. 마르스 광장에는 질서정연한 대규모 천막촌이 출현했다. 네로는 이재민 수용과 함께, 전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식량 공급도 잊지 않았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는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밀도 있었고, 그 밀을 몽땅 로마로 운반하라고 명령했다. 오스티아 가도와 테베레 강을 통해 수송된 밀은 불길이 미치지 않은 구역의 제분소로 보내졌고, 이재민들에게 밀가루나 빵으로 배급되었다. 하지만 밀가루로 만든 로마식 수프나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로마 근교의 도시나 농촌은 치즈나 채소나 과일을 공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족하지 않은 것은 음료수뿐이었다. 이것은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9개의 수도 덕분이었다. 이재민에게는 모든 것이 무료였지만, 그들 중에는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에 사는 친척이나 친지를 찾아간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네로는 로마에서 팔리는 밀의 가격을 1모디우스(약 7리터)당 3세스테르티우스로 인하했다. 평소 가격은 10세스테르티우스였다. 불에 타 죽거나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거나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사람의 수가 어느 정도였는지,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은 대강의 수치도 남겨두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야외극장 붕괴사고로 인한 사상자 수는 명확하게 기록했지만, 서기 64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죽은 사람의 수는 기록하지 않았다. 현대의 연구자들 중에는 건물 피해는 막대했지만 인명 피해는 적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영화 '쿠오 바디스'는 반로마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가 과장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대화재로 '세계의 수도'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이후, 수도 로마는 14개 행정구로 나뉘어 있었다. 로마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도시인 만큼 질서정연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로마인들은 넓은 도로나 광장으로 각 행정구의 경계를 명확히 해두었다. 이 14개 행정구 가운데 전소한 행정구는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하는 제10구, 대경기장이 있는 제11구, '수부라'가 있는 제3구였다. 모두 도심 중의 도심이지만, 포로 로마노와 신전으로 가득 차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은 피해를 면했다. 대리석으로 지은 공공건물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소한 행정구는 제2구, 제4구, 제7구, 제8구, 제9구, 제12구, 제13구 등 7개 행정구였다. 로마 북서부에 있는 제7구와 제9구는 2차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무사했던 행정구는 제1구와 제5구 및 제6구, 테베레 강 서쪽에 있는 제14구를 합하여 모두 4개 행정구에 불과했다. 모두 로마의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다. 불이 대경기장이라는 도심에서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재건
14개 행정구 가운데 3개 행정구가 전소되고 7개 행정구가 반소되었으니, 이를 복구하는 작업은 사실상 본격적인 재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황제 이름으로 제국 각지에 재건을 위한 의연금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리옹에서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로마는 의연금으로 4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보냈는데, 이것은 리옹이 로마 재건을 위해 보내온 의연금과 같은 액수였다고 한다. 갈리아 속주의 수도인 리옹이 4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보냈다면, 그보다 훨씬 풍요로운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키아에서는 훨씬 많은 의연금을 보내왔을 것이다. 티베리우스가 지진 피해를 당한 지역에 지원금을 보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로마 제국에서는 재해가 일어났을 때 서로 원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네로는 로마를 재건하는 작업도 진두 지휘한다. 황제의 명령은 이제까지 로마인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네로는 화재에 강할 뿐 아니라 좀 더 쾌적하고 아름다운 로마를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1) 도로의 폭을 전보다 넓게 규정하고, 시내 도로도 가능한 한 직선으로 하도록 노력한다.
(2) 주거용 건물의 높이는 60보(약 17미터)가 넘어서는 안된다.
(3) 건물 사이의 공간은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2.5보(약 70센티미터)를 엄수하고, 여유가 있으면 공간을 더 넓게 둔다. 그리고 모든 건물은 각각 별도의 외벽을 설치한다. 외벽을 공유하는 것은 엄금한다.
(4) 건물에 사용하는 들보는 목재가 아니라 석재로 한다.
(5) '인술라'에도 안뜰을 갖출 것.
(6) 도로에 면한 주택의 방화대책으로, 주택을 지을 때는 도로 쪽에 기둥이 있는 포치를 설치한다. 이 포치 건축비는 국고에서 부담한다.
(7) 잔해를 철거하는 작업 끝나는 대로, 토지는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한다.
(8) 자신들이 거주할 집이나 임대용 주택(인술라)을 기한 안에 재건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포상금을 준다.
(9) 주택용 건물 소유자는 안뜰에 저수조를 설치하고, 거기에 언제나 물을 체워두어야 한다.
(10) 수도관 복구작업은 각자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고, 수도 담당자에게 맡겨야 한다. 이것은 로마에도 괘씸한 자들이 있어서 수도관에 구멍을 뚫어 물을 훔치는 자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압일 떨어져, 길가나 광장에 설치된 공동수도를 이용한 소화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나온 반성이었다.
(11) 잔해는 모두 테베레 강변으로 운반할 것. 오스티아에서 밀을 실어온 배는 돌아갈 때 이 잔해를 실어갈 것. 이런 잔해는 오스티아 늪지대 매립공사에 활용되니까, 지정된 곳 이외의 장소에 버려서는 안된다.
이것은 모두 재난을 당한 뒤의 재건책이었다. 재건에는 돈이 든다. 속주 각지에서 들어오는 의연금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네로는 나중에 이야기할 '도무스 아우레아'건설을 통해 로마 도심부를 개조하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앞에서 잠깐 언급한 화폐 개혁-개혁이라기보다는 '손질'-을 이 시기에 실시했다. 그것은 7.8그램의 순금으로 만들어진 아우레우스(금화)의 무게를 7.3그램으로 줄이고, 3.9그램이던 데나리우스(은화)의 무게를 3.4그램으로 줄인 것이었다. 데나리우스는 원래 100퍼센트 순은으로 만들었지만, 이 함유량도 92퍼센트로 떨어졌다. 아시스(동화)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2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이후 87년 만의 화폐 개혁이었다. 연구자들 중에는 이것을 평가절하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첫째, 3세기에 로마 제국의 경제력이 쇠퇴했을 때 이루어진 수많은 평가절하와 비교해볼 때, 네로의 절하 폭은 너무 작다. 고작 0.5프램이다. 둘째, 원로원도 시민들도 이것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평가절하는 경제력의 쇠퇴를 부여주지만, 네로 시대는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와 인프라 정비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무렵이라 로마 제국의 경제력이 계속 향상되고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통화량을 늘릴 필요가 생기는데, 그렇다고 해서 금광이나 은광에서의 산출량이 경제성장과 비례하여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근대에 지폐를 개발한 것이지만, 고대인은 지폐를 생각지 못했다. 금이나 은의 산출량은 전에 비해 조금밖에 늘어나질 않았는데 경제 성장률은 높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대책은 금화나 은화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액면가칭돠 실제가치의 일치가 산용할 수 있는 화폐의 조건이었던 시절에는, 이물질을 섞어 함유량을 낮추는 것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실제로 경제력이 쇠퇴한 3세기의 화폐 개혁은 함유량을 낮춘 것이 특징이다. 1세기인 네로 시대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대화재 후의 재건과 '도무스 아우레아'를 통한 로마 개조 작업 때문에 네로에게 돈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기가 '나쁘다'고해서 결과도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네로가 '손질한' 금화와 은화는 오현제 시대를 거쳐 서기 215년에 카라칼라 황제가 화폐 개혁을 단행할 때까지 무려 150년 동안 계속 유통되었다. 우리 귀에 익숙한 평가절하와는 달리, 네로의 화폐 개혁은 로마 제국의 경제력 향상을 반영했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타당한 개혁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건설과 재원 확보를 통한 네로 황제의 로마 재건책은 시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재난을 당한 사람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힘을 합쳐, 로마 재건 작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로마는 전보다 더욱 질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햇빛이 집 구석구석까지 들어오게 되어, 더위를 전보다 더 견디기 어려워졌다는 불평이다. 하지만 네로를 혹평하는 역사가 타키투스도 네로의 이 로마 재건책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한 유효적절한 시책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은 남자의 꿈이다. 로마에는 권력자가 사재를 털어 공공건물을 지어 조국에 바치는 전통이 있었다.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기보다, 로마에서는 명예를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기증받은쪽은 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그 건물에 붙이는 것으로 답례했다. 네로는 자기도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로가 생각한 것은 폼페이우스 극장이나 카이사르 포룸이나 아우구스투스 포룸 같은 개개의 건축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 돈이 아니라 국비를 사용한다. 그러나 네로는 국비를 사용할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네로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첼리오 언덕 아래의 저지대를 지나 에스퀼리노 언덕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도심부를 뜯어고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우리는 첼리오 언덕 아래의 저지대에 우뚝 서 있는 콜로세움이 없는 로마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콜로세움은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펼쳐져 있는 포로 로마노의 유적을 통해 바라보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건재했던 시대의 포로 로마노는 지금처럼 기둥이나 돌덩어리가 흩어져 있는 유적이 아니라, 신전이나 회당이나 각종 기념비가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서 있는 여러개의 신전이 바라다보였고,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면 당당한 카이사르 포룸이나 아우구스투스 포룸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심 중의 도심인 이 일대는 공공건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런데 역대 권력자들이 다투어 지은 것치고는 저속한 인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주랑을 예로 들어보아도, 지붕을 얹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렇게 많은 기둥은 필요없다. 하지만 기둥이 늘어서 있는 것 자체로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건축물도 한곳에 모여 있으면 위용과 힘을 자아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신전을 짓는 것이 그리스인의 미의식이라면, 로마인의 미의식은 많은 건물을 한곳에 모아놓음으로써 위용과 힘을 증대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네로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 네로가 생각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아르카디아'라고 부른 목가적 이상향을 로마 도심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에스퀼리노 언덕에 이르는 50만 제곱미터의 땅을 모두 사용한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이 바로 것이었다. 팔라티노 언덕 밑에서 '도무스 트란시토리아'(굳이 번역하자면 '통행실'이라고나 할까)가 시작된다. 구조는 기둥이 늘어서 있는 주랑 형식이고, 한복판에는 높이가 4미터나 되는 네로의 황금상이 서 있다. 그곳을 지나 오피우스 언덕까지 가는 길의 오른쪽, 오늘날 콜로세움이 서 있는 저지대는 드넓은 인공호수로 변모한다. 오피우스 언덕에 서있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의 본관 정면은 이 인공호수를 향해 열려 있다. 그리고 그 본관 배후에 있는 에스퀼리노 언덕 전체는 동물들을 놓아기르는 자연공원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인공호수에 담을 물은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티볼리에서 끌어오기로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오피우스 언덕에서 호수를 바라보는 쪽은 모두 기둥이 세 줄로 늘어서 있는 주랑으로 되어 있고, 그 전체 길이는 1.5킬로미터나 되었다. 본관도 넓고 기발해서, 살롱의 천장은 회전하도록 되어 있고, 사람들의 머리 위로 꽃잎이 흩뿌려지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치와 기술의 정수와 꿈을 모두 투입한 것이 '도무스 아우레아'였다. '도무스'는 개인 집을 뜻한다. 이 어마어마한 건조물에 '도무스'라는 낱말을 붙인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같다. 이 '황금 궁전'에는 울타리도 없고 벽도 없다. 황제 전용 구역에는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겠지만, 인공호수와 자연공원에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로마 도심에도 푸르름을 가져오자는 것이 네로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생태학자가 있었다면, 네로의 생각에 동의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도시에 대한 로마인들의 생각은 네로와는 달랐다. 로마인들은 도시, 특히 도심에는 도시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되고, 푸르름은 교외 산장이나 해변 별장에서 만끽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별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서, 별장의 정원을 가꾸는 데 기울이는 정성은 요즘 영국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 그런데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아니라, 이제야 드디어 인간에게 어울리는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도시에서는 정원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시민들의 반감을 산 것은 당연했다. 네로로서는, 그러니까 '도무스 아우레아'를 찾아와 푸르름을 만끽하라고 말할 작정이었겠지만. '도무스 아우레아'는 결국 네로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인공호수 예정지에 콜로세움을 짓고, 네로의 황금상 머리부분은 태양신의 머리로 교체했다. 티투스 황제는 정원 자리에 목욕탕을 지었고, 트라야누스 황제는 본관을 허물고 거기에 대목욕탕을 지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도무스 트란시토리아' 자리에 신전을 지었다. 이리하여 '도무스 아우레아'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시민들의 반감은 황제들의 파괴행위를 정당화한 동시에, 네로의 도시관이 로마인의 도시관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드넓은 호수보다 드넓은 콜로세움, 동물을 놓아기르는 자연공원보다 시민의 휴식처인 목욕탕이 로마인들에게는 한결 적절한 도시 활용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네로는 또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공사 재개 시기를 잘못 잡은 것이다. 서기 64년 초에 착공한 '도무스 트라시토리아'가 완공을 눈앞에 두고 대화재로 전소되자, 네로는 공사 재개를 서둘렀다. 재난을 당한 시민들을 배려했다면 시기를 늦추었을 텐데, 네로는 그런 배려조차 하지 않았다. 네로는 이재민 주택 재건에도 진력했지만, 자신의 궁전을 재건하는 데에도 진력하고 말았다. 이것은 '도무스'를 문자 그대로 황제의 '사저'로 받아들인 일반 시민을 자극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가 로마 전체를 사유화하기 전에 로마에서 이사가자는 농담이 유행했다. 게다가 대화재로 전소한 지역이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 예정지와 거의 일치했다는 것이 시민들의 의심을 샀다. 사유재산을 철저히 보호한 로마에서는 아무리 황제라 해도 땅이 필요하면 소유자한테 사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땅을 사려면 소유자들과 일일이 교섭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하지만 불타버리면 주인도 체념하니까 사들이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네로가 방화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스스로 연주하는 리라 소리에 맞춰,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의 트로이 함락 장면을 읊었다는 소문이 불행을 탄식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27세의 네로는 사람들의 반감이나 적개심에 익숙지 않았다. 그들을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까 호감을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때까지의 네로는 간혹 시민들의 웃음거리가 될 때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사랑받는 황제였다. 그런데 황제가 된 뒤 처음으로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네로는 당황했다. 사람들의 적개심을 어떻게든 다른데로 돌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기가 화를 당할 거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런 경우, 못된 꾀를 일러주는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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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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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 상처입은가슴(운디드 하트) - 델라웨어 족
"누구나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이른 아침이면 홀로 깨어..."
우리 인디언은 나무와 풀, 짐승과 사람, 별과 모래 같은 것들이 한결같이 위대한 정령의 품에서 나왔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면 다시금 그 품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이고, 누구도 타인의 길을 지시하거나 명령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평원을 걸어가다가 만난 들쥐는 들쥐만의 세계에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비록 그가 이 생에서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위대한 정령은 그것을 하나의 배움의 과정으로 여기실 것이다. 나뭇가지에서 노려보는 찌르레기는 찌르레기만의 세계에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설혹 그가 다른 나무에 앉은 찌르레기에게 약간의 미안한 행동을 했다 해도 그것 역시 배움의 과정에 포함될 것이다. 들쥐는 찌르레기에게 들쥐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찌르레기는 들쥐에게 찌르레기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 인디언들 역시 누구에게 자신의 믿음을 선전하고 강요하는 것을 금기고 삼고 있다. 위대한 정령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 우리 인디언은 홀로 평원의 오솔길로 나아가 그곳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묵상에 잠긴다. 사방이 고요하고 가끔씩 들리는 찌르레기 울음소리나 풀섶에서 들쥐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방해꾼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내면과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평원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홀로 사방이 고요한 곳에서 자신과 만나고 위대한 정령과 만나는 일에 익숙해 있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악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그곳이 곧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인도하는 성직자들이다. 우리는 그밖의 또 다른 교회를 원치 않으며, 우리를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답답함을 느낄 따름이다.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전사가 입술이 하얗게 되고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듯이, 홀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갖지 못한 사람은 그 영혼이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래서 인디언은 아이들을 키울 때 자주 평원이나 삼림 속에 나가 홀로 있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한다. 한두 시간이나 하루 이틀이 아니라 적어도 열흘씩 인디언들은 최소한의 먹을 것을 가지고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문명인들은 그것을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한 인간이 이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기 확인의 과정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간은 신 앞에서 겸허해진다. 자연만큼 우리에게 겸허함을 가르치는 것도 없다. 자연만큼 순수의 빛을 심어 주는 것은 없다. 자연과 멀어진 문명인들은 문명화되는 속도만큼 순수의 빛을 잃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듯이 우리는 영혼의 갈증을 느낄 때면 평원이나 들판을 걸어나간다.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는 홀연히 깨닫게 된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없다는 것을. 대지는 보이지 않는 혼들로 가득 차 있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곤충들과 명랑한 햇빛이 내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기에. 그 속에서 누구라도 혼자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혼자뿐이라고 주장해도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원의 한 오솔길에서 귀를 기울인다. 부산한 소리들 너머에서 평소에는 듣지 못하던 어떤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것을 강의소리라고도 하고 신성한 산의 소리라고도 한다. 그 소리는 곧 자기 자신의 소리이며, 위대한 정령의 소리다. 물론 우리 인디언들 사이에도 문명인들처럼 자기가 그 신성한 산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누구나 두려움을 헤치고 자기 희생을 통해 그 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각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가 인디언이든 아니든, 누구나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도 자주. 특히 이른 아침이면 홀로 깨어 평원에 어리는 안개와 지평의 한 틈을 뚫고 비쳐오는 햇살 줄기와 만나야 한다. 어머니인 대지의 숨결을 느껴야 한다. 가만히 마음을 열고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보거나 꿈꾸는 돌이 되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지의 한 부분이며, 대지는 곧 오래 전부터 자기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디언 천막을 열면 들판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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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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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 이미륵 / 옮긴이 : 전혜린
나는 국경에 있는 커다란 강에 다다랐다. 도처에는 사람의 키만큼이나 큰 갈대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밭과 논은 매우 드물어서 나는 잘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도록 무장한 병정들이 순시하였고 총성이 울렸다. 도피자가 가장 많이 왕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벽에는 더욱 총성이 잦았다. 나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농부나 어부의 도움으로 다음 마을까지 인도되어 어떤 조그마한 어부의 초가집에 닿았다. 거기서 사공이 강을 건널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밤에는 나와 똑같이 강을 건너려는 두 학생이 왔다. 그들은 나보다 더 어린 것 같았다. 창백하게 겁에 질려 있는 그 중의 한 소년은 열 일곱 살도 미처 안 된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앉아서 줄곧 앞만 응시하고 있었으며, 도망치려고 한 것을 후회하는 것 같이 보였다.그 이튿날 밤에야 어떤 늙은 어부가 나타나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달빛이 밝아 쉽게 발견될 것 같아서 떠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공은 달빛이 밝을 때만 국경 경비가 그리 심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그를 믿고 갈대밭 사이로 거의 알 수 없는 조그마한 길을 따라갔다. 이렇게 한 시간 남짓이나 도망쳐서야 한 작은 숲에 닿았다. 사공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만치에서도 비슷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두 어부가 나타나 우리들을 인도하여 갈대 사이를 한참 더 걸어 마침내 강변에 도달하였다.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여기 강물은 하구에 가까와서 강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마치 바다처럼 멀고도 넓었다. 우리들이 꼼짝 않고 서 있는 동안 어부들은 한참 서로 속삭이더니 잠자코 통나무처럼 된 배를 뗏목에서 풀었다. 이 배는 너무나도 작았기 때문에 두 사람만이 간신히 앉을 수 있었다. 한 어부가 우리들을 한 사람씩 일엽 편주에 태우고 넓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지극히 조용하고 소리없이 넓은 강 위를 노를 저으며 갔으므로 '마치 영원에의 항해같이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강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우리들은 멀리서 몇 방의 총성을 들었다. 나와 함께 탄 어부는 웃으면서 잠자코 있으라고 손짓했다. 나중에야 그는 그것이 철교에서 내려 쏘는 경고의 총성일 것이라고 속삭였다. 빛나는 수면 위에서는 결코 우리를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 우리들이 대안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어부는 우리들에게 다음 중국 국경 도시까지 세 시간이 걸리는 길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고는 작별했다. 우리들은 잠시 동안 그대로 서서 세 척의 배가 서서히 고국으로 노저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묵묵히 낯선 만주 땅의 자갈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중국 도시에 도착하여, 어부가 가르쳐 준 대로 오랫 동안 한국 음식점을 고생스럽게 찾았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았다. 우리 곧 잠에 떨어졌다. 그날 오후에 우리들은 서로 헤어졌다. 우리 셋 중의 가장 나이 어린 애는 장춘으로, 나이 많은 애는 심양으로 출발하였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중국의 거리를 걸어갔다. 사람들은 좁은 거리에 범람하였고 금문자로 된 많은 간판이 걸려 있었으나, 건물은 검고 사람들의 의복은 푸른 빛이었으므로 음울하게 보였다. 이곳은 한국 도시보다 훨씬 더 생기가 있었고 시끄러운 것 같았다. 도처에는 생소하고 이상한 냄새가 감돌았다. 나는 도시를 떠나 한 번 더 강을 보기 위하여 언덕으로 올라갔었다. 조용히 푸르게 빛나는 강은 저녁 노을에 잠긴 양쪽 언덕 사이의 모래밭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주 가깝게 반 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대안의 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물을 널고 있었다. 부인과 처녀들이 집 앞에 앉아서 저녁에 끓일 콩 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들은 장난치며 씨름을 하고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막을 길 없이 흐르고 흘렀다. 이편은 모든 것이 크고 음침하고 진지하였으나, 저편은 모든 것이 잘고 괘활하였다. 언덕에는 빛나는 초가집들이 신재해 있었다. 또한 많은 굴뚝에서는 벌써 저녁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멀리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산맥과 산맥이 달아 물결치고 있었다. 산은 햇빛에 빛났다. 또다시 황혼의 아름다운 빛에 물들었다가 서서히 푸른 노을에 잠겨 갔다. 나는 먼 남쪽의 골짜기며 시내가 있는 수양산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소년 시절 언제나 저녁 음악을 들었던 이층탑 건물도 눈앞에 선했다. 나는 한 번 더 저 남쪽에서 들려 오는 황홀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소리없이 압록강은 흘렀다. 어느새 날은 저물어 어두워졌다. 나는 다시 언덕을 내려와 철도로 걸어갔다. 기차가 북쪽으로 달리는 동안 음울한 하늘이 무한한 평야를 덮고 있었다. 이 드넓은 평야는 나를 무척 놀라게 하였다. 내가 고향에서 산과 언덕과 개울 그리고 좁다란 협곡만을 보아 온 까닭이리라! 나는 드넓은 평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을 때, 언제나 약간 언덕진 것을 상상하였지 이처럼 평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아무런 고지(高地)도 저지(低地)도 없이 그냥 평탄하기만 했다. 어디선가 폭풍이 일어나 두꺼운 먼지 구름이 몰려왔다. 나는 옛날에 몽고족과 만주족의 기마 대굼이 어떻게 해서 몰려온 것인지를 상상할 수가 있었다. 남쪽은 하늘이 맑게 개어 창백한 월광이 온 벌판을 비치고 있었다. 만주의 수도인 심양도 역시 이러한 무방비 평야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 육중한 성벽은 무서운 성의 인상을 주었다. 중앙 아시아에서 불어오는 폭풍과 몽고 사막에서 날려 오는 먼지에 둘러싸인 이 성이 바로 반 아시아에 확장된 만주 세력의 본거지였다.
나는 마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나는 거기에서 이전엔 마적이었고, 오늘날 만주 지방을 낡은 제도로 지배하고 있는 장작림 장군이 살고 있는 궁전을 보았다. 성벽 밖에 있는 처형장의 광경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이 처참한 처형장의 한가운데에는 행위가 집행되는 큰 정자가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처형된 자의 묘가 있었다. 묘 앞에는 한결같이 비와 먼지로 퇴색된 나무 관에 이름, 연령, 직업이 적혀 있었다. 심양의 기차역에는 대합실이 있었다. 아무런 덮개가 없이 강한 정오의 햇빛이 비치는 곳에 나를 북경으로 실어다 줄 황색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차는 곧 만원이 되었고, 으례 연발하는 기차의 출발을 기다렸다. 이미 가을인데도 날은 무더워 점점 견딜 수 없었다. 예정보다 기차는 한 시간 늦게 발차하였다. 이 급행차 출발에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자 곧 기차는 예상치 않았던 급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푸른 하늘 아래 옛날에는 중국과 만주간의 무인 완충 지대였던 7백 마일의 요동 평야를 지나갔고, 밭과 집과 묘지를 지나갔다. 한번은 근처에 항만이 나타났고, 또 한 번은 멀리서 산정과 산맥이 떠올랐다. 기차는 자꾸만 저 오랜 역사의 중국을 향해 달려갔다.저녁이 되었다. 승객들은 좁은 의자나마 몸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씩 잠들기 시작했고, 또 차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기차는 발해만을 따라 서쪽으로 질주했다. 한밤중에야 달이 반쯤 조명한 차내를 비치기 시작했다. 내가 잠깐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었을 때 기차는 이미 정거해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움직이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랐다. 아직 새벽의 반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높고 푸르게 빛나는 산이 하늘에 솟아 있었고, 그 위에는 회백색으로 빛나는 담이 하늘과 닿아 있었다. 그것이 2천 년 전의 위대한 제왕 전시 황제가 쌓게 한 만리 장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깊은 전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역사책에서 배운 것은 결코 전설이 아니었었다. 2천 년 전, 으례 번영하는 나라에 침입하는 야만족을 방비하기 위해 돌멩이를 산 높이까지 짊어지고 올라가 이 요새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이 저 위에서 일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더 낡은 성벽은 푸른 하늘에 밝게 빛났다. 중국과 만주의 국경 도시인 산해관에 정거하였다. 관리가 여행자의 모든 짐을 완전히 조사하기까지 한나절이 걸렸다. 모든 중국 사람은 처음에는 짐을 푸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만을 이야기했다. 관리는 그것을 참을성 있게 듣고는 그래도 짐을 풀어야겠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여행객은 물었다.
"그 속에 아편이 들어 있지 않나 봐야 하오."
"없습니다."
중국인은 또 한 번 말하고는 웃었다.
"그렇지만 짐 내용을 직접 봐야만 하겠습니다."
관리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이 새 규칙이니까요."
세 명의 관리가 마침내 우리 객차 안을 떠날 때까지 조사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숨을 내쉬었다. 차는 서서히 전진하였다. 긴 전실(前室)을 통과해서는 조심스럽게 이민족의 문지방을 넘었다. 만리 장성이 우리를 둘러쌌다. 나는 천진에서 북경으로 가지를 않고 시간을 아낄 심산으로 곧 남경행 기차를 탔다. 북경도 또한 볼 만한 도시이긴 하나 나 자신은 북쪽에 위치한 중국의 기질보다는 오히려 타타르 민족의 기질을 더 가진 이 도시를 보고 싶은 욕망이 컸었다. 남경해 열차에서 볼 것은 잘 익은 보리밭 사이를 따뜻한 가을 햇빛 아래 도도히 흐르는 강이었고, 붉고 푸른 돛을 단 수많은 돛배의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수나라의 향락적인 황제가 제국의 남쪽으로 항해하기 위하여 만들게 한 바로 그 삼천리 운하였다. 그 배는 절세 미인이 비단 그물로 낮에는 천천히, 달빛 아래서는 더욱 천천히 끌고 갔다고 한다. 그는 이미 그 보다 이천 년 전쯤에 이 밭들을 방황하면서 인류에게 사치와 명성을 경고했던 위인을 잊었으리라. 우리는 공부자가 탄생한 노라나 - 지금의 산동 지방 - 를 다렸다. 그의 현명함 때문에 오늘도 중국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과욕하고도 부지런하고 평와스러운 민족이 된 것이다. 나는 얼마나 고분(古墳)에 순례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의 묘에 참배하고, 적어도 그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그렇지만 나는 나의 갈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나는 그가 한 번쯤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마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축복된 가을 하늘 아래, 숲속에 숨겨져 있는 회색 지붕이며 누른 곡식 이삭이며 나무와 관목이 있는 작은 언덕이 전개되어 있었다. 다음날 저녁 기차가 정거했을 때는 아주 캄캄하였다. 모든 사람이 기차에서 내렸다.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로 가서 바꾸어 타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들을 따라 내렸다. 나는 갑작스레 잠이 깨었기에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좁은 통로를 지나 어둡게 빛나는 물처럼 보이고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은 평판 앞에 섰다. 수없이 많은 배의 작은 불빛이, 알지 못할 어둠 속에서 흘러 내릴 것 같은 물 위를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떤 까닭 모를 전율을 느꼈다. 나는 주저하면서 높은 건물을 돌아 선교(船橋)에 가서 크고 빛나는 원청정에 '양자강(揚子江)'이란 글을 읽었다. 그 역사도 오랜 양자강....
조그마한 배가 한 적씩, 많은 여객을 태워 어두운 강으로 나가 남경을 향하여 남으로 저어 갔다. 배 아래엔 그 많은 골짜기에서 흘러 내린 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숱한 시인이 그를 찬양했다. 이 강물은 오미산 아래의 평야에서, 적벽에서, 치산에서, 동정호에서 흘러 내렸다. 그처럼 자주 동정호에 관해서, 강남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던 나의 누이가 이 오랜 물위에 내가 탄 배가 떠 있는 것을 알기난 하랴? 그렇게 나를 위해 주던 어머니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알기나 하랴? 그리고 그처럼 소동파를 이야기하던 아버지는 이미 잠들어 대지의 품속에 계시고....모든 것은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어둠 속에서 뱃전의 물소리만이 철렁거렸다. 강을 건너자 수많은 목재가 깔리고 천정이 있는 길과 도로를 지나, 역마차가 나를 어느 여관으로 안내하였다. 이튿날 우연히도 같은 집에 기숙하고 있는 고국 사람이 남경의 여러 구경거리를 안내해 주었다. 이곳은 북쪽 도시에 비하여 모든 것이 섬세하고, 생을 즐기고 있었고, 심양의 이중 삼중의 담 대신 이곳은 운하와 수양버들이 있었다. 북쪽에서는 힘센 병정들이 총을 들고 순시하는데, 여기서는 섬세한 부인들이 배를 저었다. 가느다란 창살이 있는 집들, 날씬하게 올라간 지붕, 운하에 걸려 있는 목교(木橋)는 물과 잘 조화되어 빛나고 있었다. 오후엔 역마차를 타고 명태조의 묘를 참배하러 시외로 나갔다. 이 황제는 약 오백 년 전에 중국을 지배했고, 원제국이 파괴한 이전의 제국을 재건하였었다. 그는 애당초 절식을 하는 중이었고, 그의 첫 귀의자도 역시 걸인이었다. 그러나 그 중은 걸인이면서도 비밀 계획을 품었었고, 그의 눈에는 때때로 아는 사람만이 아는 초인적인 광채가 발했다. 한국 전설은 말하기를 이 걸식승이 한국의 황해도 태생이라고 했다. 작은 한국은 언제나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 중은 전 한반도를 걸식한 다음 만주로 갔다. 여기서 유명한 이성계 - 자기 자신도 중국의 길을 향하고 있는 - 를 만났다. 이 두 젊은이는 한 외롭고 늙은 여자가 살고 있는 작은 집에서 날을 밝혔다. 노파는 두 사람을 떡과 술로 대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가난한 노파는 매우 고귀한 술잔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금으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으로 된 것이었다. 장래에 자신 만만한 지배자로 자처하는 이성계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금잔을 나에게 주고, 은잔은 저 거지에게 줄 테지.'
그러나 노파는 이성계의 생각과는 반대로 하였다. 이성계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위대한 사람이 조그마한 일 때문에 쓸데없이 굴 것인가? 이튿날 이 두 사람이 노파에게 하직하고 막 길을 떠나려 할 때 노파는 이성계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저 사람 혼자 중국으로 가게 해라. 너의 길은 동방에 있다."
이 순간 중은 작별하려고 돌아섰다. 그때 이성계는 그의 눈에서 초인적인 빛을 보았다. 그 후 이성계는 한국으로 돌아와 왕조를 세웠다. 그때 그는 같은 시기에 중국에 명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큰 범의 석상이 서 있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는 한 시간이 더 걸렸다. 석상으로 둘러싸여 급경사가 진 길을 천천히 올라가서 여러 개의 대문과 마당을 지나 거의 산처럼 크고 앞을 가로막은 둥근 언덕에 닿았다.
석양녘에는 높은 죽림을 지나 시내로 돌아왔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나는 젊은 남녀를 만났다. 그들은 이야기하며 노래를 부르면서 산보하고 있었다. 수천 년을 이야기해 주는, 돌아가는 길의 남경땅은 얼마나 좋았는지....어떤 버들가지도, 새소리도, 산들바람도 또한 어느 식당도 나는 친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저녁에는 그리 크지 않은 녹색과 금색으로 단장된 아늑한 방에서 우연히 만난 그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그는 동양 사람이 잘 아는 중국 생활이며 남경의 구경거리를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여기서 공부한 뒤에 이웃 도시에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서야 우리는 작별하고, 나는 위층에 있는 조그맣고 푸르게 칠해진 놋침대가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화장대와 흰 장농과 수놓은 양산이 좁은 방을 채우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가며]
콜롬보에서는 비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잔교(棧橋)로 달려가 실론 섬을 소개하려고 하는 안내자를 따라갔다. 사이곤에서는 안내자가 없어 구경을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들과 섞였다. 많은 사람의 무리가 천천히 시내로 움직였다. 도시는 조그마한 인도의 상점 외에는 유럽 양식의 집들이 서 있어서 서울이나 상하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으나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배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시내를 벗어나 대나무 못과 종려나무 재배지를 지나 어느 큰 집이 외로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물관이라고 했다. 거기엔 수천 주의 불상이 서 있었다. 안내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설명하고, 우리들은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완전히 피로할 때까지 그 안내자를 따라다녔다. 우리들 사이에는 많은 예술가와 승려가 있었다. 이들은 이 짧고 귀중한 시간을 불상 연구에 바치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관람객의 대부분은 설명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불상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조용히 서기만 하면 곧 주머니에서 안내서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는 저 귀찮은 팁의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안내했던 시간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리고는 출범에 늦지 않기 위하여 숨가쁜 걸음으로 우리는 배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구름을 쓸어 버린 것처럼 하늘이 깨끗하고 맑게 개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순수하게 짙은 푸른색 하늘에서 태양이 비쳤다. 갑판은 거의 비어 있었다. 더위를 잘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 인도 사람들까지 모두가 시원한 선실에 남아서 책을 읽었다. 너녁이 되자마자 갑판은 활기 있어 보였다. 배에 모여 있는 모든 민족의 여행자들이 갑판으로 나와서 각기 자기들대로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 한국 사람들끼리도 다섯이 모여 말 잘하는 김씨의 자기 고향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고향 사람 하나가 약간의 술과 얼마 안 되는 프랑스 과자를 준비해 왔다. 우리들은 차례로 저녁 이야기 때에 약간의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것이 몇 주일 전부터 습관이 되어 있다. 이 과업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술과 기타 음료는 식사시에 부수물로써 마개를 딴 뒤에 제공되었고,이때 외에 더우기 저녁에는 기타 기호품의 판매는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들은 식당 보이에게 우리 중의 누구 하나가 거짓 발작을 일으켜 강장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게 하기엔 여간 설득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얼마 되지 않은 배당에도 우리들의 기쁨은 더욱더 컸다.
일시 한국 왕조의 수도였던 고도(古都) 송도에서 자라난 김은 유명한 집안의 수많은 일화를 알고 있었고, 그 것을 차례로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들은 뱃머리에 아주 가까운 교반 옆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장소였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파도 소리에 섞였다. 우리는 학문적인 이야기로 깊이 파고드는 중국 사람도 방해하지 않았고, 서로 속삭이며 이야기하는 인도 사람도 방해하지 않았다. 안남인들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그들 숙소는 많은 상자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국어, 중국어, 인도어가 하나의 독특한 소리의 혼돈으로 짜여졌다. 때때로 일제히 조용해졌다가는 또 벌집처럼 와글거리곤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잠들기 시작하였다. 다만 우리 김씨만이 고향에 관해서 조용히 이야기했고, 여객선 포올르카 호만이 달빛 밝은 인도양의 어느 곳을 헤엄치고 있었다.
[마르세유 항구]
배는 지부티에 기항하였다. 이런 괴상한 이름은 내 평생 처음 들었다. 나는 우리 배가 석탄 때문에 이 외떨어진 아프리카의 한 모퉁이에 입항한다고 들었다. 이 항구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래가 깔린 언덕에는 입구에 두 종려나무가 서 있는 단 하나의 흰 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일사병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과 몇 사람만이 상륙하였다. 한국 사람들도 오랫 동안 궁리한 끝에 조그마한 보트를 타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타는 듯한 해안을 건너갔다. 직사 광선 아래의 모든 것은 비참하게 보였다. 돌로 쌓은 제방이며 모래 언덕이며 조그마한 정원을 뒤로 한 카페에는 흑인 아이들이 부채질하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육지 내부로 들어갔다. 우리는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이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한 작고 외로운 집 앞에 섰다. 이것은 마치 인도의 학교처럼 보였다. 늙은 한 인도인이 벽 가운데에 앉았고, 약 스물 명의 어린이들이 벽을 따라 입구에 이르기까지 앉아 있었다. 모든 어린애 앞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손으로 쓴 독본이 펴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원주민 마을에 갔다. 두 줄의 집들이 좁은 거리에 서 있을 뿐이었고, 길은 햇볕에 타고 있는 사막에서 다른 사막으로 향해 뻗어 있었다. 집 안팎에는 흑인 남녀가 서서 그들의 크고도 맑은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좁은 거리로 갔다가 속히 되돌아왔다. 사막 한가운데의 이 마을은 얼마나 외로와 보였는지 몰랐다. 우리들은 입구에서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곧 우리 배로 돌아왔다. 그곳엔 졸졸 흐르는 시내도 없고 과일나무도 물결 치는 곡식 밭도 없었다. 다만 두 개의 빈약한 그늘을 지워 주는 집의 대열만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고요한 달밤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리는 홍해(紅海)를 항해하였다. 어느 이른 아침 봉운이 나를 깨워 갑판으로 인도하였다.
"시나이 산."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주 먼 거리에 검푸른 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산정을 가리켰다.
그날 밤 우리들의 배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였다. 고생스럽게 대 여객선은 모래 언덕 사이의 좁은 물길을 간신히 지나갔다. 좌우로 쓸쓸한 풍경이 창백한 달빛 아래에 전개되었다. 천천히 우리들이 걷는 것보다도 별로 빠르지 않은 속도로 수없이 휘황 찬란한 창을 가진 배가 처참한 빈 사막을 미끄러져 갔다. 점차로 공기는 험악해졌고, 파도는 높아졌으며 때때로 시원한 바람이 갑판 위에 불었다. 다시금 봄이 왔다. 배는 고요히 흔들리면서 짙은 청색의 지중해의 하늘 아래로 나아갔다. 북쪽에는 크고 작은 섬이 나타났다.
봉운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리스 도서(島嶼)다."
그때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그리스!"
나도 부르짖었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을 비록 멀리에서나마 바라보았다. 산호(山弧)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안개에 싸인 채 그것들은 유럽 해변을 따라 갔다. 오후 늦게 파도는 높아졌다. 해는 두꺼운 구름 뒤로 사라졌고 점점 더 어두워졌다. 선원들은 돌아다니며 곧 태풍이 닥칠 것을 알려 주며 선실로 들어가기를 권했다. 곧 이어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졌고, 파도가 심하게 출렁거렸다. 차차로 갑판은 비었고 태풍이 불어왔다. 거선은 자꾸만 더 기울어지고, 바다의 거품 속에 마치 호두 껍질처럼 춤을 추었다. 배의 반이 파도에 잠기고는 곧 올라와서 다시금 깊이 가라앉으려고 하였다. 선실에서는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배도 신음하고 '키이! 키이!' 소리를 내면서 폭풍우와 싸웠다. 그것은 밤새 계속되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제껏 한 번도 그런 폭풍우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는 모든 것이 마치 환영처럼 사라졌다. 해가 빛나고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하였다. 배는 아무런 요동 없이 떠갔고, 시실리 섬의 에트나(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활화산)에서는 봄바람의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우리들의 배는 유럽 땅을 밟기 위해 점점 더 육지를 접근하였다. 기선은 멧시나(시실리 섬에 있는 도시명) 해협을 지났다. 산이 가까워졌다가는 멀어졌다. 집들이 서 있는 언덕이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햇볕 든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았다. 기차가 해변을 따라 터널로 들어가는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마침내 유럽 땅을 밟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감격해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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