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6호 - 2024.05.29. 수요일(음력 : 04.22.)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yunangel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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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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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사상의 밑바탕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 안와르 엘 사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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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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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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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누리꾼들이 흔히 틀리는 맞춤법 10가지를 조사해서 발표했다. 가장 많이 틀리는 게 ‘어의없다’로 나타났는데, ‘어이없다’로 써야 맞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의없다’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모두가 ‘어이’로 발음하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굳이 ‘어의’라고 써서 틀리는 걸까?
‘의’의 발음 탓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의’는 모음 ‘으’와 ‘이’가 결합한 이중모음으로, 시작할 때는 입술 모양을 ‘으’로 했다가 재빨리 ‘이’로 바꾸면서 내는 소리다. 그런데 ‘의’는 항상 ‘의’로만 소리 나지 않고 때에 따라 ‘이’나 ‘에’로도 발음된다.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어이가 없네”라는 조태오(유아인)의 대사는 큰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선 ‘의사’‘의논’ 같이 단어의 첫소리에 ‘의’가 나올 때는 이중모음 ‘의’로 정확히 발음해야 한다. 한편 모음 ‘의’ 앞에 다른 자음이 있을 때는 항상 ‘이’로 발음한다. 따라서 ‘희망’과 ‘띄엄띄엄’은 ‘히망’ ‘띠엄띠엄’으로 읽는다. 단어의 첫 음절이 아닌 경우에는 ‘의’를 ‘의’나 ‘이’로 발음한다. 예를 들어 ‘모의’와 ‘정의’는 ‘모의’ ‘정의’로 발음할 수도 있고, ‘모이’ ‘정이’로 발음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관형격 조사 ‘의’는 ‘의’뿐만 아니라 ‘에’로도 발음이 가능하다. 이에 ‘우리의 소원’을 ‘우리에 소원’으로 읽을 수도 있게 된다. 이런 발음 규칙을 잘 익혔는지 보려면 ‘민주주의의 의의’를 발음해 보면 된다. 글자 그대로 발음하기도 하지만 허용 발음에 따라 ‘민주주이에 의이’라고 발음할 수도 있다.
‘어이없다’를 ‘어의없다’로 적는 것은 평소 ‘주이’ ‘고이’로 발음하는 말들을 ‘주의’ ‘고의’로 적었던 습관을 그럴 필요가 없는 말에까지 과잉 적용했기 때문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Seong-jin Cho’ ‘Dong Hyek Lim’ ‘Sunwook Kim’
최근 클래식 열풍이 일고 있다. 조성진, 임동혁, 김선욱 등 세 명의 젊은 남성 피아니스트가 내놓은 음반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고 있다. 이들 세 명은 외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이들은 각각 ‘Seong-jin Cho’, ‘Dong Hyek Lim’, ‘Sunwook Kim’ 등의 표기로 외국에 알려져 있다. 조성진, 임동혁, 김선욱 등을 로마자(영문)로 바꾸어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표기는 로마자 표기법에 맞지 않는다.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각각 ‘Cho Seongjin’, ‘Lim Donghyeok, ‘Kim Seonuk’ 등이다. 먼저 성과 이름의 순서가 외국 인명처럼 되어 있는데, 외국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이니 그건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름은 그럴 수 없다. 이름은 붙여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 사이에 ‘-’을 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Dong Hyek’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우리말의 자음과 모음은 정한 바에 따라 로마자로 바꿔 적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Sunwook’은 영어식 표기로서 적절하지 않다.
반면 성은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와 더불어, ‘Cho’, ‘Lim’, ‘Kim’ 등의 관용 표기를 함께 인정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악가인 ‘조(Jo)수미’, ‘임(Im)선혜’ 등과 ‘조(Cho)성진’, ‘임(Lim)동혁’ 등은 동일한 성임에도 성의 로마자 표기가 서로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여권 및 카드에 자기 인명의 로마자 표기를 마음대로 써도 괜찮은 것으로 알지만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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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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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길 - 천상병
가도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무인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가도 무인지경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길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
지는 해 - 한용운
지는 해는
성공한 영웅의 말로(末路)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창창(蒼蒼)한 남은 빛이
높은 산과 먼 강을 비치어서
현란한 최후를 장식하더니
홀연히 엷은 구름의 붉은 소매로
뚜렷한 얼굴을 슬쩍 가리며
결별의 미소를 띄운다.
큰 강의 급한 물결은 만가(輓歌)를 부르고
뭇산의 비낀 그림자는 임종의 역사를 쓴다.
∼∼∼∼∼∼∼∼∼∼∼∼∼∼∼∼∼∼∼∼∼∼∼∼∼∼∼∼∼∼∼∼~~~~∼∼
카페, 프란스 - 정지용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빛두루 슨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 간다.
*
(옹 패롵 서방 ! 꿋 이브닝!)
(꾿 이브닝!)(이 친구는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는 이밤에도
경사 커-틴 밑에서 조시는 구료!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어다오.
내 발을 빨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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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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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백일(靑天白日)
靑:푸를 청. 天:하늘 천. 白:흰 백. 日:날 일.
[출전]《唐宋八 家文》〈韓愈 與崔群西〉,《朱子全書》〈諸子篇〉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빛나는 해라는 뜻. 곧
① 맑게 갠 대낮.
② 뒤가 썩 깨끗한 일.
③ 원죄가 판명되어 무죄가 되는 일.
④ 푸른 바탕의 한복판에 12개의 빛살이 있는 흰 태양을 배치한 무늬.
당나라 중기의 시인/정치가인 한유[韓愈:자는 퇴지(退之), 768~824]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인데 그에게는 최군(崔群)이라는 인품이 훌륭한 벗이 있었다. 한유는 외직(外職)에 있는 그 벗의 인품을 기리며 〈최군에게 주는 글[與崔群書]〉을 써 보냈는데 명문(名文)으로 유명한 그 글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있을 터인데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모두 자네를 흠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봉황(鳳凰)과 지초[芝草:영지(靈芝)]가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며 ‘청천 백일’이 맑고 밝다는 것은 노예인들 모를 리 있겠는가?”
[주] 여기서 ‘청천백일’이란 말은 최군의 인품이 청명(淸明)하다는 것이 아니라 최군처럼 훌륭한 인물은 누구든지 알아본다는 뜻임.
당송팔대가 : 당(唐:618~906)나라와 송(宋:北宋, 960~1127)나라 시대의 여덟 명의 저명한 문장 대가(大家). 곧 당나라의 한유(韓愈:韓退之) 유종원(柳宗元:柳子厚),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歐永叔) 왕안석(王安石:王介甫) 증공(曾鞏:會子固) 소순(蘇洵:蘇明允) 소식(蘇軾:蘇東坡) 소철(蘇轍:蘇子由). 당송 팔가, 팔대가라고도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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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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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11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칭찬을 받고 싶은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허영심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공적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12
자신감을 잃어버리지 마라.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3
내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신감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개발할 때 가능하며 가끔씩 뼈를 깎는 아픔이 따른다. 현명한 사람은 덧없는 것을 버리고 영광을 선택한다.
14
오래 전부터 각 시대마다 세워진 사당이나 교회, 사원 등은 인간의 영생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괴로움과 고통을 잊기 위해 수백 가지의 미신을 만들어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려 한다. 그리고 그 환상을 통해 고통 없는 영원한 삶을 꿈꾼다.
15
역사가 주는 교훈, 고대의 인도인과 그리스인, 로마인, 이탈리아인들은 온화한 기후와 기름진 땅의 혜택을 받아서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신이나 악마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언제나 거기에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원을 훌륭하게 장식한 다음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이런 행동 속에는 환상과 현실이 혼합되어 있다. 환상이 현실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인생의 모든 일이 신의 보살핌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신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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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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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8. 장도영, 그는 야누스였는가?
제1군 휘하의 예비사단 사단장은 육군 준장 박영준(朴英俊)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상으로 너무나 유명한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의 아들이었다. 바로 이 예비사단이 폭동 또는 쿠데타 같은 위급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된 사단이었다. 이한림이 제공해 준 헬리콥터로 돌아왔다. 그도 출동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도 사단본부로 돌아오자 즉시 참모회의부터 소집했다. 그런 다음 그도 역시 임부택이나 마찬가지로 서울의 쿠데타 소식을 전해 주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사단장의 그 질문에 대해서 참모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 성큼 의견을 개진하는 자가 없었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한참만에 포병단장 육군 대령 황종갑(黃鐘甲)이 의견을 말했다. 황종갑이 침묵을 깨고 쿠데타지지발언을 하자, 이번에는 작전참모 육군 중령 역설하고 나섰다. 그랬으나 여타의 참모들은 여전히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이었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사람은 겨우 두 사람밖에 안 되는 게 아닌가? 이 두 참모의 의견만 듣고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설 수는 없다.) 박영준은 마음을 작정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사령관 이한림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한데, 이한림이 휘하부대에 출동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누군가를 통해서 서울 육군본부의 쿠데타 지휘본부인 상황실로 급보되었다. 당초 이한림은 새벽에 관사에서 각급 중에 쿠데타에 가담해 있는 장성이 있으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단장 박임항(朴林恒)이 바로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장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5월 15일인 전날 밤부터 1군 내의 중령급들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창대(曺昌大), 엄병길(嚴秉吉), 이종근(李鐘根)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업은 <5월 16일 새벽 5시, 거사했다는 방송이 나오면 즉시 사령관 이한림에게로 달려가 쿠데타 지지를 설득한다. 만일 이한림이 쿠데타 지지를 거부하면 체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업을 지니고 대기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듯 1군 내에 이미 쿠데타의 조직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박정희는 가만히 앉아서도 이한림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새삼 되뇌일 필요도 없을 줄로 안다. 그보다도 이한림은 큰 실수를 저질렀었다. 그 실수란 다름이 아니었다. 새벽 4시에 참모차장 장창국의 전화를 받은 이한림이 그 즉시로 박임항이 묵고 있는 숙소로 전화를 걸었던 사실이다.
"박 장군, 서울에서 박정희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빨리 부대로 돌아가 예하부대를 장악해 주시오."
그를 군단사령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우리에 갇혀 있는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면 어떤 결과가 되겠는가? 그를 군단사령부로 돌려 보내다니. 물론 이한림으로서야 박임항이 쿠데타 세력에 가담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를 취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하늘이 나를 살렸다.) 이한림의 전화를 받은 박임항은 도망치듯 군단사령부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래서 박임항만은 이날 아침 사령관 관사에 긴급 소집된 각급 지휘관 회의에 참석치 않았던 것이다.
아침 8시.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밀실에서 마주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계엄령부터 선포해 놓고 보자.> 박정희는 한사코 강권했으나 장도영은 그것은 내 권한이 아니다. 대통령과 협의를 해서 결정할 문제다라고 앵무새 외듯 하며 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논전이었다. 생각해 보라. 장도영은 이미 쿠데타를 진압하기로 굳게 마음에 다짐해 놓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랬으면 <나는 쿠데타 그 자체를 찬성할 수가 없다. 원대복귀하라> 하고 처음부터 주장을 고수했어야 옳았다. 그것을 장도영은 박정희가 계엄령부터 선포해 놓고 보잔다고 해서, <그건 내 권한이 아니다. 대통령과 협의해서 결정할 문제다> 하고 계엄령 태도부터가 벌써 장도영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해도 좋다고 한다면 거기에 동조하겠다 그건가? 그렇다면 장도영은 쿠데타를지지하기로 마음을 바꾼다는 얘기가 되는 게 아닌가. 장도영과의 담판에서 박정희는 손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도영의 생각을 바꿔놓기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좋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다."
박정희는 상황실로 들어갔다. 쿠데타 지휘본부인 상황실로 들어오자 박정희는 급히 김종필을 불렀다.
"계엄문제에 대해서 장 장군이 도무지 언제까지나 합법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구 허니, 임자가 방송국으로 가서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방송을 해버리게."
"알겠습니다. 일단 선포를 해놓고 나중에 대통령의 추인을 받아도 될 줄로 압니다."
김종필은 그렇게 말하고 최영택(崔英澤)과 함께 부리나케 바깥으로 나갔다. 해군 참모총장 중장 이성호(李成浩), 공군 참모총장 중장 김신(金信), 해병대 사령관 중장 이성은(李聖恩) 이 세 사람이 육군 참모총장실로 들어선 것이 바로 김종필과 최영택이 상황실을 막 나설 무렵이었다. 그들 세 사람이 이 시간에 함께 육군본부로 찾아온 것은 쿠데타의 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육군 참모총장실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는지 박정희가 몇 사람의 쿠데타 주체자들을 거느리고 다시 총장실로 들어섰다. 세 사람을 맞자 육군 참모총장실에서는 국군 수뇌회의가 열렸다. 먼저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주체자들이 왜 쿠데타를 단행했는가 하는 데 대한 명분론을 그럴싸하게 설명했다. 그 설명이 끝나자 박정희는,
"해군, 공군, 해병대 모두가 우리 육군하고 보조를 같이 해서 혁명을지지해 주면 고맙겠소."
쿠데타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정희는 <우리 육군하고 보조를 같이 해서> 운운했지만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선 육군 부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세 사람은 대꾸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 세 사람은 박정희가 내세운 <쿠데타 명분론>을 귀담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당한 명분론이라고 동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아침 국군 수뇌회의에서는 어떤 문제가 논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미루어 짐작컨데 쿠데타군측에서 집요하게 <혁명을지지해 달라>고 간청을 하자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게 된 세 사람이, <육군에서 지지하면 우리도 지지하겠다>고만 했고, 이 한 문제만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산회한 것이
"혁명을 지지해 주십시오!"
"육군에서 지지하면 우리도 지지하겠소."
"그러지 말고 지금지지성명을 내주십시오."
"글쎄, 육군에서 지지성명을 내면 우리도 내겠단 말이오."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문답만을 되풀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침 8시 30분.
이성호, 김신, 그리고 김성은 세 사람이 돌아가려고 육군 참모총장실을 나섰을 때였다. 쿠데타 주체자로 보이는 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세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혁명 지지성명을 내주시오."
입수했는지 세 사람의 코 앞에 마이크를 들이대며 쿠데타 지지성명을 내달라고 아주 위압적으로 요구했다. 김신이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아직 육군도 지지성명을 내지 않지 않았소? 육군이 지지하면 우리들도 지지하기로 했으니 그리 아시오."
"안 됩니다. 지금 당장지지성명을 내주십시오."
마이크를 들이댄 자는 지지성명을 내지 않으면 결코 이 자리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몸가짐을 했다. 세 사람은 너무나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원 이런 무례한 놈들을 봤나? 아무리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해서 이다지도 무례할 세 사람은 치미는 울화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무례한 놈들이라는 표정으로 둘러싼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하긴, 쿠데타를 일으키는 그 순간에 이미 위계질서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었다. 그 따위 위계질서에 매여 있어 가지고는 쿠데타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내건 쿠데타 주체자들로서는 위계질서를 무시해 버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렀을지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적잖이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 어서 혁명을 지지한다고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마이크를 들이댄 자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핏발만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 중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은 정참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야아 이놈들아, 나도 불알을 달고 있는 사내자식이야! 육군이 지지한다면 우리도 지지한다는데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아?"
복도 유리창이 쩌렁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별을 세 개나 단 장성의 호통이었다. 그 호통에 마이크를 들이댄 자는 조금 찔끔해지는 눈치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만의 얘기고 그 자는 계속했다.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고 나가십시오."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정훈감실 차감인 육군 대령 원충연(元忠淵)이 놀란 표정을 하고 호통치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자, 어서 가시지요."
원충연은 세 사람을 감싸듯이 하고 둘러서 있는 무리들을 헤치며 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어느 한 장교가 달려나와 원충연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대령님은 계단까지 가시지 마십시오."
"왜?"
"계단 아래에는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저 세 사람이 계단을 내려갈 때 양쪽에서 집중사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뭐야?"
그 말을 들은 원충연은 하마터면 기절을 해버릴 뻔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좀더 말씀을 나누다 가십시오!"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좀더 말씀이나 나누다 가라고 했다. 그러한 원충연의 행동이 도리어 세 사람의 의심을 품게 해준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사코 계단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원충연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구 좀 나와서 도와줘!"
그가 소리쳤다. 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사람이 바로 원충연의 동생인 육군 대령원갑연(元甲淵)이었다.
"이 세 분을 어서 총장실로 모셔."
원충연은 동생을 보자 다시 한번 소리쳤다. 가로막아 섰다. 그리고는 몰이를 하듯이 세 사람을 총장실 쪽으로 몰고 갔다. 세 사람은 점잖은 체면에 항거도 못하고 끝내는 밀려서 다시 총장실로 들어갔다. 다시 총장실로 밀려 들어선 세 사람은 마치 연금을 당한 상태가 되어 한동안이나 시간을 까먹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 세 사람이 연금상태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장도영과 박정희 등이 청와대를 방문하기 위해 총장실을 나설 때 동행하면서였다. 그들 세 사람은 원충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그러면 계단 밑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세 사람이 계단을 내려올 때 갈겨버려라!> 하고 명령을 내렸던 자는 과연...
아침 9시.
KBS의 라디오에서는 9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리더니 곧 행진곡이 잠시 흘렀다. 그러다가 행진곡이 뚝 멎으며 귀에 익은 아나운서 강찬선(康贊宣)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군사혁명위원회는 오늘 오전 9시를 기하여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령 제1호 비상계엄령 선포.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기 4294년 5월 16일 9시 현재로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4294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부의장 육군 소장 박정열
아마도 박정희의 한자 이름을 김종필이 흘려썼던 모양이었다. 강찬선은 박정희라로 읽어야 할 것을 박정열이라고 오독을 했다. 스튜디오 안에 들어간 강찬선이 주어진 원고를 정확하게 읽는지 감시하고 있던 최영택이 황급히 강찬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박정희, 희, 희."
강찬선은 원고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정정했다.
"실례했습니다. 부의장 육군 소장 박정희였습니다."
계엄령 선포를 알리고 난 강찬선은 이어서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호>에 대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호.
군사혁명위원회는 위원회령 제1호로서 대한민국 전역에 긍하여 단기 4294년 5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선포 실시하였음. 본관은 계엄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 국내질서의 유지와 치안확보상 필요한 한도 내에서 엄정하게 이를 운영할 것임. 국민 제위는 군을 신뢰하고 국가재건을 위한다음 사항을 포고함.
1. 일체의 옥내.옥외 집회를 금한다(단, 종교단체는 제외한다)
2. 수하를 막론하고 국외 여행을 금한다.
3. 언론, 출판, 보도 등은 사전검열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치안확보상 유해로운 시사해설, 만화, 사설, 논설, 사진 등으로 본 혁명에 관련하여 선동, 왜곡, 과장 비판하는 내용을 공개하여서는 안 된다. 본 혁명에 관련된 일체 기사를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하며 외국통신의 전재도 이에 준한다.
4. 일체의 보복행위를 불허한다.
5. 수하를 막론하고 직장을 무단히 포기하거나 파괴, 태업을 금한다.
6.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를 금한다. 다음날 아침 5시까지. 이상의 위반자 및 위법행위자는 법원의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극형에 처한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제1호 포고령이었다. 이 포고령을 낭독하는 강찬선도 소름이 끼치는 모양이었다. 읽고 난 그의 안색이 마냥 창백하기만 했다. 그럴 것이었다. 위의 사항을 위반했을 때에는 극형에 처한단다. 뉘라서 제1호 포고령 방송을 듣고 소름이 끼치지 않았겠는가. 서울의 경우, 아마도 라디오를 갖고 있던 가정치고 이 방송을 듣지 않은 가정은 단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이미서울 장안은 이때쯤에는 이원엽이 등 말할 수 없이 어수선해져 있었고 방송에서는 새벽 5시 혁명공약을 방송한 뒤로 그것을 되풀이해서 방송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군 사령관 육군 중장 이한림은 휘하에 5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제1군단장 육군 중장 임부택, 제2군단장 육군 중장 민기식, 제3군단장 육군 중장 최석, 제5군단장 육군 중장 박임항, 제6군단장 육군 소장 김응수. 사나이 마흔 살에 장군으로서 호령할 수 있는 군단을 5개 군단씩이나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긍지요, 자랑이라 할 수 있었다. 하기야 정일권(丁一權) 같은 사람은 나이 서른세 살에 육.해.공군 있었지만 그것은 건국이 일천한 데다가 김일성 괴뢰도당의 불법남침으로 말미암은 과도기 때의 얘기니까 비교할 것도 못 되겠지만.
아침 9시.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은 휘하의 군단에 대해서 총점검을 해보았다. 어느 부대고 모두 완벽하게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아직 제5군단장 박임항이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쨌거나 출동태세를 총점검해 본 이상에는 그는 출동명령을 내리면 그뿐이었다. 야전군이란 물론 북괴의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요 이상에는 북괴군과 꼭같이 간주해서 대처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전화를 받았다고 해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출동명령을 내릴 경우, 적지 않게 피를 흘리게 될 텐데 그렇게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면이나 윤보선이, <즉시 출동해서 반란군을 진압하라!> 하는 명령이 있었다면 싫든 좋든 그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아침 9시.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장면이나 윤보선한테서 출동하라는 명령이 없는 것이다. 이 명령이 없는 것이 그에게 출동명령을 <통수권자의 명령 없이 어떻게 출동을 명령할 수 있단 말인가?> 속된 말로 충분히 말이 되는 구실이었다. 만일 제1군 휘하의 어느 군단에서 출동명령을 내렸다가 그 군단의 작전지역에 구멍이 뚫렸다고 판단한 북한 괴뢰군이 6.25 때처럼 불시에 또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족간에 피 흘릴 수 있는가?> 흔들리고 있던 이한림으로서는 통수권자의 출동명령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제2공화국 때에는 <통수권>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어느 쪽에 귀속돼 있는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 자기에게 있다고 해서 입씨름을 벌이기조차 했었지만, 이한림으로서는 대통령이든 국무총리든 어느 한쪽에서라도 출동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서슴지 않고 그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동족간에 피를 흘릴 수는 없지 않느냐 해서 망설이고 있었던 이한림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출동명령이 없는 것을 기화로 해서 휘하부대에게 진압출동을 명령할 것을 보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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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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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철학자 세네카
실용 학문인 독해력이나 문장력, 수학, 제국 동방의 통용어인 그리스어와 서방의 언어인 라틴어 등을 가르치는 교사는 수도 로마에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외아들에게 제왕 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아그리피나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철학자를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정교사가 아리스토텔레스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는지도 모른다. 아그리피나가 점찍은 것은 코르시카 섬에 추방되어 있던 철학자 세네카였다. 후세 연구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로마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공화정 시대에는 키케로, 제정 시대에는 세네카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기원전 4년에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성장한 곳은 로마다. 원로원에 들어간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 로마로 이주했다. 원로원 의원이라도 에스파냐 출신은 로마에서는 신참자다. 신참자는 자식 교육에 열성을 쏟는다. 세네카 집안의 삼형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삼형제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루키우스의 재능이 두드러졌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말기에 소년기를 보낸 세네카는 국가 로마의 지도층에게는 명예로운 책무로 여겨진 공직에 취임한다. 35세 무렵인 서기 31년에 공직 경력의 출발점인 회계감사관을 지냈다. 당시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였다. 회계감시관을 지낸 사람은 황제만 거부하지 않으면 원로원 의석을 얻을 수 있다. 세네카의 재능은 원로원 회의장에서 꽃을 피운 모양이다. 덕분에 자신도 꽤 재치있는 웅변가였던 칼리굴라 황제한테 미움을 받게 되었다. 칼리굴라는 뭔가 구실을 붙여 세네카를 사형시키려 했지만, 칼리굴라의 측근들이 그자는 그냥 내버려두어도 이제 곧 죽을 테니까 구테여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하여 헤네카를 구해주었다. 세네카는 재치있는 사람으로 인기가 대단해서, 연회를 베푸는 사람들은 서로 그를 초대하려고 야단이었다. 이런 방종한 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인지, 당시 세네카는 결핵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칼리굴라 시대에는 무사했지만,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메살리나 황후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이번에는 메살리나가 그의 재주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클리우디우스의 누이동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메살리나파 살롱에 단골로 드나든 것이 진짜 이유였다. 물론 그런 이유만으로 추방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황족 여자와 간통한 죄를 물어서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했다. 서기 41년이니까, 그의 나이 45세에 당한 불운이었다. 화려한 수도 생활에 익숙한 세네카에게 코르시카 생활은 죽도록 따분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8년 동안에 걸친 유배는 세네카에게 두가지 선물을 주었다. 첫째, 어쩔 수 없이 자연에 묻혀 소박한 식사를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한 덕에 건간을 회복할 수 있었다. 둘째, 다른 낙이 없기 때문에 문필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그리피나가 손을 써서 황제의 추방해제령이 내려진 뒤, 귀국한 철학자는 옛 친구들이 눈을 크게 뜰 만큼 건강해져 있었다.
아그리피나의 뛰어난 점은 아들이 황제가 될 때까지 제왕 교육을 시킬 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아들이 제위를 계승한 뒤에도 그 보좌역을 맡을 수 있는 인물로 세네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로마 황제의 '문'을 세네카에게 맡긴 것이다. 그렇다면 '무'를 맡길 수 있는 인물도 필요하다. 아들이 황제가 될 때까지는 무술을 가르치고, 황제가 된 뒤에는 무술로 아들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그리피나는 그 역할을 맡아줄 사람으로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선택했다. 세네카는 에스파냐 태생의 로마 시민이지만. 부루스는 남프랑스 출신의 로마 시민이다. 원로원에서 두각을 나타낸 세네카와는 달리, 부루스는 군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개 병졸로 시작하여 대대장까지 진급했다. 역사가 몸젠은 티베리우스 등용한 속주 출신 인재들을 '티베리우스 문하생'이라고 불렀는데, 부루스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천재적인 번득임은 부족하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무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나이는 세네카보다 대여섯 살 젊었던 모양이다. 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아그리피나는 '문'인 세네카에게는 원로원 의원 이상의 지위를 주지않았다. 이것은 아들이 황제가 된 뒤 보좌관 역할을 핱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는 공적인 지위가 없으면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루스를 근위대장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1만 명의 정예로 이루어진 근위대는 로마 교외에 병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도 조직적인 군사력을 가진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리하여 아그리피나는 당대 최고의 재능을 자랑하는 철학자와 로마인보도 더 로마인다운 무인을 12세에 아들에게 붙여주었다. 소년 시절부터 관계를 맺으면 누구한테나 친밀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아그리피나는 이 점도 고려하여 아들의 선생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소년 시절의 가정교사 역할만이 아니라 황제가 된 뒤에 보좌관 역할까지 맡을 인물로 선택된 사람이 둘 다 본국 출신이 아니라, 한 사람은 에스파냐 출신이고 또 한 사람은 남프랑스 출신인데도, 이것을 문제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로마제국은 본국이 속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속주까지도 품안에 끌어안은 운명 공동체였다는 증거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사람은 아그리피나만이 아니었다. '해방노예 3인방'이라고 불린 세 명의 그리스 출신 비서진이 있었다. 이들이 반대하면 아그리피나의 계획도 순조롭게 추진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이것을 내다보고, 미리 대책을 강구했다. 황후를 간택할 때 그녀를 후보자로 추천한 팔라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해방노예 3인방' 가운데 하나다. 이 팔라스에게는 펠릭스라는 동생이 있었다. 아그리피나는 팔라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 이 약속을 지켰다. 클라우디우스를 움직여 펠릭스를 유대 장관에 임명한 것이다. 유대를 다스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해방노예 출신 장관은 그 어려운 임무를 꽤 잘 해냈다. 아그리피나에게는 사람을 보는 안목도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아그리피나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제1단계를 끝냈다. 뒤이은 제2단계는 아들 도미티우스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아그리피나와 팔라스와 협려관계가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게다가 아그리피나는 '쇠는 뜨거울 때 두드리라'는 원칙도 알고 있었다.
네로의 등장
서기 50년, 황후가 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에 아그리피나는 아들 도미티우스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로 삼는 데 성공했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브리타니쿠스라는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내가 데려온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도미티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남편을 이런 말로 설득했다. 브리타니쿠스는 생모를 잃은 뒤로는 걸핏하면 우울해지고, 마음도 약하다. 그리고 이제 겨우 아홉 살이니까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런 브리타니쿠스를 친동생처럼 여기고 보호해줄 사람으로는 네 살위인 도미티우스가 가장 적합하다. 현재 열세 살인 도미티우스를 양자로 삼아서 브리타니쿠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시키면, 법률상으로나 혈연으로나 형제관계가 된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뒤에도 브리타니쿠스는 강력한 측근을 갖게 된다. 아그리피나의 설득을 납득했는지, 아니면 아그리피나가 집요하게 졸라대자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서명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클리우디우스 황제는 친아들보다 네 살 위인 의붓자식을 양자로 삼고, 그 양자와 친딸 옥타비아를 약혼시키겠다고 공표했다. 아그리피나의 아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로 바뀌었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출신 부족인 사비니족의 말로는 '과감한 사나이'라는 뜻으로, 클라우디우스 씨족 남자들의 전형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아그리피나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걸음을 쉬지 않고 착실히 내딛고 있었다. 이듬해인 서기 51년, 네로가 14세가 되기를 기다려 성년식을 올렸다. 대개는 17세에 성년식을 치른다. 빨라야 16세이고, 16세도 안된 나이에 성년식을 치른 예는 없다. 성년식을 치르면 노예나 평민과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투니카밖에 입을 수 없는 나이에서 벗어나, 발목까지 내려오는 토가를 입을 권리가 인정된다. 토가착용이 허용된다는 것은 공적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14세의 나이에 성인으로 인정받은 네로는 예정 집정관의 권리도 부여받아, 21세가 되면 집정관에 선출될 권리를 얻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프린켑스 유벤투스'라는 칭호도 얻었다. 이것은 '젊은 제일인자', 의역하면 '황태자'라는 뜻이다. 이런 대우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손자들에게 준 것과 같은 대우였다. 또한 아그리피나는 이런 일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군단의 병사들에게-그리 대단한 액수는 아니지만-네로의 이름으로 돈을 나누어주고, 경기대회를 개최하여 서민들을 초대하는 등, 네로의 지위가 강화된 것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은 해에는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취임시키는 계획도 실현되었다. 황제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질 뿐이었다. 2년 뒤인 서기 53년, 네로와 옥타비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게다가 아직 16세밖에 안된 네로를, 성년식도 치렀고 결혼까지 한 몸이라는 이유로 원로원 회의장에 데뷔시켰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로에게는 아직 의석이 없다. 그래서 네로는 정책입안자로서 원로원의 의결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원로원에서 첫무대를 밟았다.
아이디어와 연설 원고는 아그리피나와 세네카의 합작품이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16세의 네로는 생기발랄하고 재치도 풍부했다. 연설주제는 네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트로이 전쟁터로 유명한 소아시아 일리오스의 주민한테서 들어온 청원을 지지하고, 그 땅의 주민들을 속주세 면제 대상으로 지정하는 ns제에 대한 가부를 물었다. 네로는 트로이가 함락되었을 때 거기서 도망쳐 이탈리아로 흘러들어온 아이네아스가 로마인의 기원이라는 점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면서, 아무리 먼 옛날 일이라 해도 같은 피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속주세를 면제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역설했다. 일리오스가 그리스어권에 속한다는 이유로 연설은 그리스어로 이루어졌다. 귀를 기울이는 원로원 의원들도 통역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로마인은 두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제는 최근에 일어난 볼로냐 화재의 이재민들에게 지원금을 보내는 문제였다. 볼로냐는 본국 이탈리아 안에 있는 도시다. 따라서 연설도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네로는 피해 규모가 지방자치단체에서 처리하게에는 너무 커서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원금 액수는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로 하자고 제안했다. 셋째, 에게 해의 로도스 섬에 자유도시의 권리를 다시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네로는 다시 그리스어로 역설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들의 조상이 남긴 업적으로 자유도시의 권리를 인정받고, 내저의 자치와 함께 면세권도 인정받고 있었다. 로도스 섬도 이 두 도시 못지않게 빛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주민의 면세권은 영원히 지속되는 권리지만, 로도스 주민에게는 영구적인 권리까지는 보장하지 않더라도 속주세 면제는 인정해주어야 마땅하다고 네로는 말했다. 네 번째 주제는 역시 최근에 일어난 소아시아 남부의 지진에 관한것이었다. 이곳은 풍요로운 속주니까 국가의 지원금은 필요없지만 주민의 자력 갱생을 돕기 위한 면세조치는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네로는 5년 동안 속주세를 면제해주자고 제안했다. 소아시아는 그리스어권에 속한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는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아무리 통역이 필요없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해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은 아니꼽지만, 이때 행한 연설은 젊은 네로가 높은 교양과 통치자로서의 자질도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심어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의원들이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의 제안은 모두 가결되었다. 네로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그거야 어쨌든 속주에서 일어난 재해에 대해 로마 중앙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티베리우스 시대였는데,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이 재해 대책이 완전히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피해애 따라 지원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피해가 큰 것이 보통인 지진의 경우에는 우선 중앙정부가 지원금을 보내 그것으로 긴급지원과 사회간접자본 복구가 이루어진다. 이재민들에게 개인적으로 의연금이 지급되지는 않지만, 피해 정도에 따라 3년 내지 5년 동안 속주세라는 이름의 직접세가 면제되었다. 세금은 내지 않아도 좋으니까 사회간접자본을 제외한 복구작업은 자기 힘으로 하라는 것이다. 주민 대다수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본국 이탈리아나 로마 시민이 이주하여 건설한 식민도시는 원래 직접세를 면제받고 있기 때문에, 재해를 당해도 면세조치는 없다. 그 대신 지원금 액수가 늘어난다. 로마인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절묘하게 구사할 수 있는 민족은 없었다.
만년의 클라우디우스
이 무렵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62세가 되어 있었지만, 아내인 아그리피나에게 계속 휘둘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심성의껏 나라를 다스리는 태도는 여전했다. 비서실장인 나르키소스가 아그리피나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클라우디우스를 정성으로 보필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리타니아 정복에 착수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현재의 잉글랜드는 일단 제패했지만, 현재의 웨일스 지방에 병력을 보낸 뒤로는 좀처럼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악지대로 들어간 곳에서 갑자기 기세를 잃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애를 먹고 있었다. 총사령관을 몇 년에 한번씩 교체한 방식이 좋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우수하긴 했지만 결코 천재적인 전략가라고는 할 수 없어TEk. 3개 내지 4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던 것도 제패가 늦어지는 이유였다. 전선에서 싸워보기는커녕 군단 경험도 없는 클라우디우스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로마군의 브리타니아 제패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나중에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인재들이 군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 서방의 또 다른 전선의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방위선에서는 고착이라고 해도 좋은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로마의 동맹국으로서 도나우 강 하류의 방위를 분담했던 트라키아 왕국은 티베리우스 시대에 왕실의 대가 끊긴 뒤로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지만, 거기에 근거를 둔 티베리우스의 방위체제는 3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흑해에 출몰하던 해적까지도 잠잠해진 상태여서, '팍스 로마나'는 변경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로마에 의한 평화'는 제국의 남쪽 변경에도 확립되어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방위와 치안을 어지럽히는 것은 사막 건너편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습격해오는 유랑민이다. 하지만 마우리타니아 왕국이라는 완충지대가 없어진 뒤에도, 그리고 주요 전력을 1개 군단밖에 배치할 수 없는 실정에서도 로마는 속주민으로 조직된 보조병을 활용하여 이곳을 지키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안전보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까다롭고 문제가 많은 곳은 동방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길은 요원했다. 서방의 적은 문명도가 뒤떨어진 야만족인 반면에 동방의 적은 민도가 높은 파르티아 왕국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동방에 있는 중소 규모의 전제군주국들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그것을 파르티아와의 완충지대로 삼는 것이 공화정 시대부터 일관된 로마의 기본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전제군주국은 정세가 불안하다. 왕위를 둘러싼 내분은 전제군주국에서는 일상적인 일이고, 그때마다 제국 전역이 동요한다. 왕실들은 혼인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분은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나라의 간섭을 초래하는 게 보통이었다. 왕이 죽을 때마다 정세가 불안해지는 것은 로마의 유일한 가상적국인 파르티아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내분이 파르티아 국내에만 국한되면, 파르티아를 공략하지 않기로 결정한 로마에는 강 건너 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곤란한 것은 새로 왕위에 오른 파르티아 왕이 자신의 위세를 보이려고 이웃나라인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는 것이었다.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 침공이 새 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왔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가 오리엔트 방위망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는 나라다. 서기 51년에 또다시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4개 군단에는 대기 명령이 떨어진다. 시리아 총독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전투 개시가 불가피하다고 긴급 보고를 보낸다. 이 시기는 네로를 양자로 맞아들인 시기였지만, 클라우디우스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마에는 다행하게도 겨울철에 군대를 철수한 파르티아가 이듬해 봄에도 다시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해의 아르메니아 침공은 기묘한 형태로 수습되었다. 그래도 로마는 전보다 더욱 파르티아 왕의 동향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방에 상존하는 또 다른 문제는 유대였다. 유대교도들은 자신들의 특수성을 내세워 로마화를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당시의 로마화는 곧 보편화를 뜻한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 반대하지만 않으면 그들의 특수성을 인정해주는 로마의 종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대인 통치는 같은 유대인에게 맡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여 해롯 아그리피나에게 유대 전역을 맡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해록 아그리파가 죽은 서기 44년부터는 로마의 직할 통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후계자인 아그리파 2세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서기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성장한 아그리파 2세를 유대 왕위에 앉히기로 결정한다. 다만 이 젊은 유대 왕은 성실함에서는 아버지를 능가햇지만 군주의 자질은 부족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그런 젊은이가 유대 전역을 통치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대를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 처음에는 그 가운데 3분의 1만 아그리파 2세가 다스리게 하고,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로마에서 파견된 두 장관이 분담하여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에는 유대를 양분하여 아그리파 2세와 로마 장관 1명이 분할 통치하는 체제로 바뀌었지만, 예루살렘과 그 주변은 로마의 직할 통치 구역으로 남았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로마인과 신권정치를 요구하는 유대교도의 동거는 항상 폭탄을 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해묵은 불화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중동이 화약고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땅에 부임하는 총독이나 장관이나 군단장들은 임지로 떠나기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알현한다. 부임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을 이런 중책에 임명해준 황제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러면 클라우디우스는 으레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야말로 그대에게 감사해야 하오. 그대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짊어지고 있는 제국 통치라는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사람들이니까."
중소 군주국을 지원하거나 유대교도를 달래가면서 로마 제국의 동방을 다스리는 것은 번거롭고 골치아픈 일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체를 로마가 직할 통치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 군사력의 질과 양을 생각하면 직할 통치도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주화하는 것과 그 지방을 속주로 계속유지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동방 전체를 속주로 유지하는 것은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4개 군단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국 전역의 방위력인 25개 군단 15만 명의 군단병과 15만 명 가량의 보조병이 로마가 가질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였다. 브리타니아 정복을 결행한 클라우디우스도 2개 군단밖에는 증원하지 않았다. 군사력을 더 이상 늘리려면 로마 제국도 어딘가에서 무리를 해야 한다. 손쉽게 할 수 있는 '무리'는 안전보장비로 여겨진 속주세를 인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속주세를 올리면 속주민의 반발을 초래한다. 반발을 억누르려면 군사력을 더욱 증강할 필요가 있다. 이 악순환은 절대로 피해야 했다. 군단병의 수를 25개 군단 15만 명으로 정한 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군단은 로마 제국의 주요 전력이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 소유자만이 지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시민(병역 해당 연령인 17세 이상의 남자)의 수는 통틀어 500만 명이었다.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100만 명이 늘어나서 600만 명이 되었다. 이론상으로는 군단을 25개에서 30개로, 군단병은 15만 명에서 18만 명으로 늘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23년 동안이나 제국을 다스리면서 시민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보았을 텐데도 군단병을 한 명도 증원하지 않았고, 브리타니아 정복을 결행한 클라우디우스도 2개 군단 1만 2천 명을 증원했을 뿐이다. 게다가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제패한 뒤에는 이곳에 2개 군단만 주둔시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되면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25개 군단으로 되돌릴 수 있을 터였다.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클라우디우스도, 그리고 그후의 황제들도 대부분 'security'(영어)의 어원인 'securitas'(라틴어)를 군사적에만 의존하는 안전보장이 아니라 현대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종합안전보방으로 생가하고 있었다. 군사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는 사회 형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를 위해 로마는 본국과 수도에 필요한 주곡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방침조차 바꾸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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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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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계절
얼굴에내리는비(레인 인 더 페이스) - 훙크파파 족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나의 이름은 얼굴에내리는비(레인 인 더 페이스)이다.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이곳에 왜 왔는가? 연어떼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첫 연어떼가 강물로 거슬러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기 때문에 연어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일은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마치 전투를 벌일 양 온 것으로 생각하진 말아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 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문명인들의 도시 풍경은 얼굴 붉은 사람의 눈에는 하나의 고통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이 야만인이라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장소라는 곳이 없다. 봄의 나뭇잎 소리를 듣거나 곤충의 날개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아마도 내가 야만인이라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일 테지만, 당신들의 도시에서 들리는 소음은 귀를 욕되게 할 뿐이다. 인디언은 물웅덩이의 수면으로 내리꽂히는 바람의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한다. 한낮에 내린 비에 씻겨진 바람 그 자체의 냄새를 좋아한다. 미국산 소나무의 향내도 마찬가지다.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기는 더없이 소중한 것! 그것은 동물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똑같이 숨결을 나누어갖기 때문이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사람처럼 당신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악취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런 식으로 당신들 자신의 잠자리를 계속 파헤치고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인가 당신들은 스스로의 폐허에서 숨이 막혀 깨어날 것이다. 들소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야생마들은 모두 길들여지고, 숲의 은밀한 구석까지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하다. 그리고 산마다 목소리를 전하는 전선줄이 어지럽게 드리워져 있다. 덤불숲은 어디에 있는가? 없어져 버렸다. 독수리는 어디에? 사라져 버렸다. 들짐승이 사라진다면 인간이라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들짐승들이 저 어두운 기억의 그늘 속으로 모두 사라지고 나면 인간은 혼의 깊은 고독감 때문에 말라죽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똑같이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당신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러니 사냥이니 날쌘 동작이니 하는 것에 대해 굳이 작별을 고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연어떼를 보았으니 이제 나와 나의 부족은 행복한 얼굴로 돌아간다. 어쩌면 또 한번의 행복한 겨울은 짐작에 그칠 뿐, 나의 부족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꿈일지 모른다. 당신들 문명인들에게 밀려, 살아남기 위해 고통받아야 할 막막한 겨울 들판으로 뿔뿔이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본 연어떼의 반짝이는 춤을 나의 부족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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