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3호 - 2024.01.02. 화요일(음력 : 11. 21.)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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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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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가 누구였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버지를 어떤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느냐는 점이다. ― 앤 섹스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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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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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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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름, 한 손
받고 싶은 추석 선물 1위로 한우가 꼽혔다고 한다. 부동의 1위였던 현금은 2위로 밀렸다. 한우 값 폭등이 원인이라는 분석 기사를 보면서 주머니 사정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한우에 밀리긴 했지만 굴비도 예나 지금이나 최고급 선물에 속한다. 굴비는 아직도 새끼로 엮어 파는 전통이 남아 있다. 조기 같은 생선을 한 줄에 열 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 즉 20마리를 한 두름이라고 한다. 오징어도 20마리를 묶어 파는데 이를 ‘축’이라고 한다. 북어 스무 마리를 묶은 것은 ‘쾌’이다. 유독 스물을 나타내는 단위가 많다. 한약 스무 첩은 한 제이다.
‘고등어 한 손’하면 고등어 두 마리를 말한다. ‘손’은 한 손에 잡을만한 분량을 나타내는 말로 조기, 고등어, 배추 등의 한 손은 큰 것 하나와 작은 것 하나를 합한 것을 이른다. 미나리나 파 등의 한 손은 한 줌 분량을 말한다. 참 정겨운 표현이다. 그릇 열 개는 한 죽이다. 옷 열 벌도 ‘죽’이라고 한다. 버선 한 죽(열 켤레), 접시 한 죽과 같이 쓴다. 흔히 서로 뜻이 잘 맞을 때 ‘죽이 잘 맞다’ 고 하는데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한 접은 채소나 과일 100개를 묶어 세는 단위이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는 배추 두 접씩 김장을 하곤 하셨는데 요즘 배추 200포기 김장하는 집이 얼마나 될까 싶다. 마늘, 곶감 등도 접을 쓴다. 오이, 가지 등을 셀 때에는 ‘거리’를 쓰기도 한다. 한 거리는 50개이다. 김을 묶어 세는 단위는 ‘톳’이다. 김 한 톳은 백 장이다.
선물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이제는 사라져 가는 우리말도 많다. 단위를 나타내는 말들이 특히 그렇다. 추석을 앞두니 이런 말들이 멀어져 가는 게 더 아쉽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아주버님, 처남댁
한가위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명절이 가까워오면 국립국어원에는 가족 간의 호칭에 대한 문의가 급증한다. 호칭 문제는 지역뿐만 아니라 집안에 따라서도 다른 경우가 많아 표준안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실태 조사와 전문가 자문을 통해 마련한 ‘표준언어예절’에 따라 안내를 하고 있다.
가장 흔한 질문은 한 집안의 며느리나 사위들 간에 형제간 서열과 나이순서가 뒤바뀐 상황에 관한 것이다. 손윗동서이지만 나이가 더 어린 경우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손윗동서는 ‘형님’으로, 손아랫동서는 ‘동서’라고 부르면 된다. 다만 서로 존댓말을 쓸 것을 권한다. 손아랫동서에게는 동생에게 하듯 자연스러운 반말이 가능하지만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존댓말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며느리들과 달리 나이가 뒤바뀐 사위들 사이에서는 손윗동서에게도 ‘형님’ 대신 ‘동서’라고 하는 것이 허용된다. 며느리들 사이의 위계는 중시하면서 사위들 간의 서열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비판도 있지만, 전통과 관습의 영향이 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한 집안의 며느리와 사위들끼리는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전통적으로 시누이의 남편과 처남의 아내 사이에는 호칭어가 따로 없었다. 서로를 부르기는커녕 만날 일도 거의 없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결혼한 후에도 오누이가 가족과 함께 만나는 일이 잦아 서로를 부르는 말이 꼭 필요하게 되었다.
남편 누나의 남편에게는 남편의 형님을 부르는 말인 ‘아주버님’을, 남편 여동생의 남편에게는 결혼한 시동생을 부르는 말인 ‘서방님’을 쓴다. 처남의 아내를 부를 때는 손위인 경우 ‘아주머니’, 손아래인 경우는 ‘처남의 댁’이나 ‘처남댁’으로 부르는 것이 표준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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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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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술 - 천상병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것도 막걸리로만
아주 적게 마신다.
술에 취하는 것은 죄다.
죄를 짓다니 안 될 말이다.
취하면 동서사방을 모른다.
술은 예수 그리스도님도 만드셨다.
조금씩 마신다는 건
죄가 아니다.
인생은 고해다.
그 괴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술뿐인 것이다.
∼∼∼∼∼∼∼∼∼∼∼∼∼∼∼∼∼∼∼∼∼∼∼∼∼∼∼∼∼∼
낙원은 가시덤불에서 - 한용운
죽은 줄만 알았던 메화나무 가지에 구슬같은 꽃망울을 맺혀 주는
쇠잔한 눈 위에 가만히 오는 봄기운은 아름답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하늘에서 오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모든 꽃의 죽음을 가지고 다니는 쇠잔한 눈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구름은 가늘고 시냇물은 얕고 가을 산은 비었는데
파리한 바위 사이에 실컷 붉은 단풍은 곱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풍은 노래도 부르고 울음도 웁니다.
그러한 <자연의 인생>은 가을 바람의 꿈을 따라 사라지고
기억에만 남아 있는 지난 여름의 무르익은 녹음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일경초(一莖草)가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되고 장육급신이 일경초가 됩니다.
천지는 한 보금자리요 만유(萬有)는 같은 소조(塑造)입니다.
나는 자연의 거울에 인생을 비춰 보았습니다.
고통의 가시덤불 뒤에 환희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님을 떠난, 나는 아아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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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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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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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단(左袒)
左:왼 좌. 袒:옷 벗어 멜 단.
[출전]《史記》〈呂后本紀〉
웃옷의 왼쪽 어깨를 벗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편들어 동의함을 이르는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황후인 여태후(呂太后)가 죽자(B.C. 180) 이제까지 그녀의 위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유씨(劉氏) 일족과 진평(陳平)/주발(周勃) 등 고조의 유신(遺臣)들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한 조왕(趙王) 여록(呂祿), 남군(南軍)을 장악한 여왕(呂王) 여산(呂産)을 비롯한 외척 여씨(呂氏) 타도에 나섰다.
그간 주색에 빠진 양 가장했던 우승상(右丞相) 진평은 태위(太尉) 주발과 상의하여 우선 여록으로부터 상장군의 인수(印綬)를 회수하기로 했다. 마침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역기가 여록과 친한 사이임을 안 진평은 그를 여록에게 보냈다. 역기는 여록을 찾아가 황제의 뜻이라 속이고 상장군의 인수를 회수해 왔다. 그러자 주발은 즉시 북군의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한실(漢室)의 주인은 유씨이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여씨가 유씨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는 한실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 상장군 주발은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여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우단(右袒)하고, 나와 함께 유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좌단(左袒)하라.”
그러자 전군(全軍)은 모두 좌단하고 유씨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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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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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6. 평정 이후
유방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이게 무슨 놈의 나라 꼴인가! 무뢰배들의 집단이지!' 가슴을 쾅쾅 쳤다. 천하가 통일되어 나라는 안정되었지만 그동안 공을 세운 신하들은 술에 취하면 턱없이 큰 목소리로 전공을 다투고, 칼을 빼어 궁중의 기둥을 찍는 등 난장판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생사 고비를 수없이 함께 넘긴 신하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토록 만류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예 궁중에서는 연회를 없애버려?' 황제의 불만을 제일 먼저 눈치챈 사람은 숙손통이었다. 숙손통은 설(산동성)땅 사람인데 진나라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다하여 조정으로 불려갔다. 박사관으로 임명될 예정으로 출사하고 있었는데, 그때 진승이 산동에서 봉기했다. 놀란 2세 황제가 박사관들과 유자들을 불렀다.
"초나라 수비병 놈들이 기땅을 공격하고 진현까지 이미 쳐들어왔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승상 조고한테서도 아무 보고도 없고 아무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만 하는데 궁녀들 말로는 그 때문에 모두 불안에 떨고 있으니 짐으로서는 궁금하기 이를 데 없구려. 그대들은 모두 순수한 선비들이니 눈치보지 말고 제발 정직하게 말 좀 해주구려!"
그러자 박사들과 유자들은 저마다 나서서 멋모르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반란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반란이라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폐하께선 급히 군사를 동원해 반란군들을 치십시오!"
"반란 정도가 아닙니다. '반란'을 생각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역입니다. 잡아서 사형을 처해야지요!"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숙손통이 얼른 나섰다.
"여러 유생들의 설명은 모두 잘못입니다. 이제 천하는 통일되어 한 집안처럼 되었고 군현의 성벽 역시 허물어진 지 오래이며 무기 역시 녹여버려 아무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천하에 명시한 일 역시 옛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명철하신 폐하께서 백성들 위에 굳건히 군림하시며 법령 또한 잘 완비되어 있습니다. 백성 또한 각자의 직분에 충실하며 이런 정치를 사모해 모두가 사방으로부터 모여드는데 반란을 도모할 자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있다면 틀림없이 쥐나 개처럼 좀도둑질이나 하는 그런 떼거리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소문입니다. 이제 군수들이 도둑 잡는 위관들을 시켜 곧 좀도둑들을 잡아들일 것이니 폐하께서는 근심하실 필요가 도무지 없습니다."
2세황제는 숙손통의 명쾌한 설명이 그토록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대에게 비단 20필과 오 한 벌을 하사하겠소! 그리고 당장 박사관으로 임명하오!"
숙손통이 궁에서 퇴청해 박사관사로 돌아오자 여러 유생들이 빈정거렸다.
"아하, 선생. 그 참 잘도 아첨하십디다. 그토록 새빨간 거짓말을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폐하께 그렇게 말씀드립니까!"
그러자 숙손통의 표정이 엄숙하게 바뀌었다.
"모르는 소리. 오늘 나 아니었으면 그대들은 모두 호랑이 이빨 속으로 들어가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했소.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도망들이나 치시오.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게 문제가 아니라 얘기요. 곧 궁중 어사반들이 이쪽으로 달려와 '반란'이란 말을 사용한 그대들을 붙잡아 즉시 형리에게 넘길 것이오. 반발해도 소용없소. 그것은 말해선 안될 것을 말해버린 그대들의 잘못일 뿐이오!" 그렇게 말한 숙손통은 보따리를 싼 뒤 얼른 박사관으로부터 도망쳐버렸다. 설땅으로 도망쳐 갔을 때 항량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숙손통은 별 수없이 항량을 따르기로 했다. 그후 항량이 정도(산동성)에서 패한 후 초의 회왕을 따랐고 회왕이 의제 칭호를 받고 장사로 옮겨가자 그대로 남아 항우를 섬겼다. 다시 유방이 그 후 팽성으로 입성했을 때 숙손통은 유방에게 완전히 항복해 버렸다. 그후 유방이 항우에게 패해 서쪽으로 퇴각했지만 배반하지 않고 그 때부터 유방을 계속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숙손통은 유복을 입고 있었는데 유방의 신하중 하나가 이렇게 귀띔해 주었다.
"아직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한왕(유방)께선 선비 복장이면 질색하시는 분이란 말이오!"
그 때부터 숙손통은 자신뿐만 아니라 백여 명의 제자들에게도 초풍의 짧은 옷으로 바꿔 입도록 했다. 유방이 흡족해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유방은 어느날 숙손통에게 말했다.
"그대가 마음에 들었소. 그래서 부탁하는 건데 수하에 쓸 만한, 재능있는 인물이 있거든 추천해보시오."
"예, 있고말고요."
그런데 막상 숙손통이 추천한 인물을 보면 학문이 뛰어난 제자들은 한 명도 없었고 왕년에 떼도둑이었거나 아니면 주먹깨나 쓰던 자들뿐이었다. 숙손통의 처사에 그의 제자들은 불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선생님. 저희들은 오직 선생님만 믿고 이제까지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왕께 저희들을 추천해 주시지는 않고 엉뚱하게도 도둑놈들과 사기꾼들과 주먹패들만 소개시켰으니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숙손통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불평할 일이 조금도 아니다. 모르면 가만 있기라도 해라. 지금 천하가 돌과 화살과 칼과 창으로만 다투고 있는 이 때에 너희들의 학문적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너희들보다 저 쓰잘 데 없어 보이는 저놈들이 적장의 목을 베어오고 적의 깃발을 훔쳐내오는 데에는 훨씬 유용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 위인들만 추천했던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잊지않고 있으니 좀더 기다려라."
그제서야 제자들은 승복했다.
"선생님, 그토록 깊은 뜻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어쨌건 한나라로 천하가 통일된 이후 유방은 숙손통에게 직사군이라는 칭호는 주었으나 나라의 체통을 세우기 위하여 무슨 일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 때 숙손통이 어전으로 나아가 아뢰었던 것이다.
"폐하, 대체로 유생들이란 취하는 데에는 도움이 못되나 이미 이룬 것을 지키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신이 지금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 학자들까지 불러 조정의식을 제정코자 하는데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유방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의식이니 예법이니 그런 건 짐은 딱 질색이오. 그 공연히 번거롭기만 하지 않겠소?"
"그렇다고 궁중에 법도도 없이 폐하의 신하들을 무뢰배 집단들로 그냥 두시겠습니까."
"사실은 그게 고민이오."
"쉽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다소 번거롭더라도 의례는 있어야 국가의 체통이 서는 것입니다. 소신은 고대의 예를 근거로 하고 진대의 예의도 섞어서 새로운 것으로 완성해 보겠습니다."
"시험삼아 한 번 만들어 보기는 해보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짐이 쉽게 알아듣고 쉽사리 행할 수 있는 예법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야 할 거요."
"충분히 염두에 두겠습니다."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낸 숙손통은 공자의 나라 노나라로 가서 유명학자 30명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들 중 딱 두 사람이 거절했다.
"우리는 귀공께서 하려는 시도가 정통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참할 수가 없소."
노나라 유생의 대꾸에 숙손통은 화가 났다.
"참으로 한심하고 비루한 유생들이구려. 그건 옛적 얘기요. 시대의 변천이란 걸 그대들은 모르고 있소!"
어쨌건 숙손통은 참가를 희망하는 노나라 유생들과 황제의 측근들 중에서 학문하는 자들과 제자 백여 명을 궁중 예법을 만드는 일에 참여시켰다. 예법이 만들어지자 이번에는 실제로 해보기로 하고 모두를 야외로 데리고 나갔다. 참억새를 묶은 금줄에 석차를 적은 표지를 어깨에 두르고 모두 들판에 도열시켰다. 예식의 예행연습은 한 달 동안이나 거듭되었다. 어지간히 연습이 되었다고 생각한 숙손통은 그제서야 황제 유방한테 아뢰었다.
"나오셔서 한 번 보시지요. 폐하께서도 보실 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친림해 예식의 진행을 보고난 유방은 흡족한 듯이 말했다.
"좋소! 장중한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우선 쉬워서 좋소. 그 정도라면 짐도 쉽게 따라 할 수가 있겠소!"
맹렬한 연습이 끝난 시월 첫 조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마침 장락궁이 완성된 날이기도 해서 축하 겸 궁중의식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날이 밝자 의례 집행관인 알자가 참례자들을 데리고 차례로 궁정문으로 들어가게 했다. 궁정 뜰에는 전차 기병 보졸이 의관을 갖추어 무기를 들었고 그 전후 좌우에서는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참례자들이 궁정으로 들어서자 전령이 갑자기 소리질렀다. "모두들 뛰어!" 주위의 엄숙함에 놀란 참례자들이 엉겁결에 걸음을 빨리해서는 정해진 자리로 가서 도열해 섰다. 궁정 아래에는 낭중(시종)들이 각 계단마다 수백 명씩 양쪽으로 늘어섰다. 공신들과 열후들과 장수들이 서열에 따라 서쪽에 늘어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승상 이하 문관들이 역시 서열에 따라 동쪽에 늘어서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빈객을 관장하는 대신인 대행이 9계급(公. 候. 伯. 子. 南. 孤. 卿. 大夫. 士)을 일렬로 배치해 상의가 하달되게 하고 하의가 상달되도록 했다. 드디어 황제가 봉연을 타고 침궁으로부터 나오면 백관들은 치를 들고서서 엄숙하게 예를 올린다. 다음에는 제후와 여러 왕들과 봉록 6백석 관료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되어 어전으로 나아가 황제에게 하례를 올리는 것이다. 예식이 정숙한 가운데서 엄숙하게 진행되자 제후들과 여러 왕들과 신하들은 그 숙연함에 짓눌려 공경심을 드러내지 않거나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런 하례가 끝나면 큰 주연이 베풀어진다. 마구잡이로 먹고 마시는 술자리가 아니다. 일단은 모든 신하들이 꿇어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마시는 것이다. 서열에 따라 일어나서 황제에게 축수를 해야 한다. 술잔은 아홉 차례까지 돌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쯤 일어났다. 한수라는 장수가 큰 소리로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술자리는 처음이네!"
그럴만도 했다. 모두가 적당히들 취해 있을 즈음이었다. 다른 경우 같으면 벌써 신하들끼리 싸우느라고 멱살을 쥐든가 칼로 전각 기둥을 치든가 했을 만큼 취할 때였다. 그런 상태에 비하면 대단히 양호했지만 이미 궁중 법령이 엄하게 정해진 처지에서는 그것이 용서되지 않았다. 어사가 소리질렀다. "저자를 밖으로 끌고 나가라!"
무사들이 달려와서 발버둥치는 한수를 가차없이 끌고 나가버렸다. 주연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떠들거나 무례하게 소리치는 자는 다시 없었다. 예식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유방은 기뻤다. 그래서 감회를 말했다.
"짐이 오늘에사 황제가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소!"
그런 다음 숙손통을 가까이 불렀다.
"수고가 많았소. 그대에게 태상(예법, 제사를 주관하는 대신) 벼슬을 내림과 동시에 상으로 황금 5백 근을 하사하겠소."
일단 감사하면서 받은 숙손통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를 따라 고생한 제자들이 많습니다. 의례 역시 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함께 일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에게도 관위를 내려주십시오."
"오, 잊을 뻔했구려! 그들 모두에게도 낭관 벼슬을 주겠소."
숙손통은 퇴청하자마나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자, 내가 상으로 황금 5백 근을 하사 받아 왔다. 너희들의 생계비로 나누어 써라. 그리고 너희들 모두가 낭관에 임명되었다.!"
제자들은 환호작약했다.
"진정으로 우리 선생님께서는 성인이시다. 당세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계시는 분이란 말일세!"
그런데 숙손통이 황태자의 태부가 되었을 때였다. 고조 유방은 여전히 지금의 황태자를 폐하고 어린 조왕 여의를 황태자에 앉히고 싶어했다. 그래서 숙손통을 불러 의례 절차를 밟으라고 지시했다. 숙손통은 깜짝 놀랐다.
"아니 되십니다!"
숙손통의 완강한 저항에 유방도 놀랐다.
"어째서 아니 된다는 말씀이오?"
"옛날 진나라 헌공은 여희에게 빠진 나머지 그녀의 아들 해제를 태자로 세웠다가 그로 인해 진나라는 수십 년 동안이나 난리를 겪어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건 옛날 얘기요."
"가까운 예도 있습니다. 진의 시황제는 장자인 부소를 일찌감치 황태자로 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환관 조고는 막내 호해를 속임수로 이끌어 황태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결국 진나라는 조상의 제사를 끊게 하는 불행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황태자는 너무 유약하오. 여의는 짐을 닮아 활달하오. 그래서 활달한 여의를 황태자로 삼고자 하는 것이오."|
"지금은 난세가 아닙니다. 법도로 천하를 지키는 시대입니다. 거두절미하고 황태자를 폐해선 안 된다는 이유 딱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의 태자께서는 인효하십니다. 이것이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태자를 폐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는 여황후께서는 폐하와 동고동락해 오신 조강지처입니다. 그렇기에 여후의 아들인 태자를 어떤 명분으로든 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래도 적자를 폐하고 소자(여의)를 태자로 새우시려거든 먼저 소신을 주살하시어 목에서 흐르는 피로 대지를 적셔 주십시오!"
유방은 숙손통의 완강한 질책이 귀찮았다.
"아, 알았소. 그만두시오. 농담일 뿐이오."
"농담이라니오! 황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어찌 천하대사를 가지고 농담을 하십니까!"
"아아, 알아 들었소!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유방은 여전히 황자 여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했다. 궁전에서 주연을 베풀도록 지시했다. 궁중 잔치에 많은 신하들이 초대되었다. 그런데 유방은 태자가 생면부지의 인물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들은 누구요?"
네 명의 노인 모두가 하얗게 센 수염과 눈썹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의 눈에 유별나게 띄일 수밖에 없었다. 장량이 곁에 있다가 유방한테 대답했다.
"저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상산의 사호'입니다."
"무엇이? 저분들은 짐이 몇 해 전부터 그 인물됨을 듣고 여러 번 불러 들이지 않았겠소. 그 때마다 더욱 멀리 도망치던 그들이 무엇 때문에 태자를 따라 갑자기 입궐했단 말이오!"
"그야 태자는 유덕하기 때문이지요. 저 노인들은 벌써 태자의 스승이며 친구입니다."
"아아, 그렇다면 다 틀렸다!"
장량은 유방이 무엇 때문에 탄식하는지를 짐작했지만 모른 척하고 계속했다.
"폐하께서 저들을 몸소 불러 하산하게 된 동기를 물어보십시오. 태자의 유덕함이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동원공, 녹리선생, 기리계, 하황공이 유방 앞으로 불려왔다. 와서는 한결같이 절을 공손히 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유방이 물었다.
"짐은 몇 해 동안이나 그대들을 불렀소. 그러나 그럴수록 그대들은 더멀리 깊숙이 은둔해 버렸었소. 그런데 지금에사 내 자식을 따라 입궐까지 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
동원공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선비들을 가볍게 보시어 걸핏하면 꾸짓고 욕하십니다. 저희들은 그런 폐하한테서 욕을 당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멀찍이 숨어버렸던 것입니다."
"짐은 아니되고 결국 태자의 부름은 괜찮다는 얘기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태자의 사람됨은 인효공경하며 선비를 사랑하시어 천하 사람들이 태자를 위해서라면 목을 늘어뜨려 죽기를 원하는 자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태자를 따라 쾌히 입궐했던 것입니다."
유방은 한참 동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아, 귀공들이 아무리 번거로울지라도 짐으로선 부탁을 다짐해 둘 수밖에 없겠소. 부디 태자를 잘 지키고 보좌해 주시오!"
네 노인은 유방의 장수를 축원하고는 태자 곁으로 물러갔다. 유방은 즉시 척부인을 가까이 불렀다.
"그대도 저 노인들의 말을 들었소. 짐으로서는 태자를 갈아치우려 했으나 저 네 노인이 태자를 돕고 있는 한 여의를 새 태자로 책봉할 방법이 없소. 저런 경우를 두고 이미 태자라는 새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할 것이오. 이제부터 그대의 주인은 여황후이니 그를 참 주인으로 모시도록 하오!"
유방의 설명을 듣고난 척부인은 울음부터 터뜨렸다.
"여황후를 뫼시는 일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저희들은 죽습니다!"
"방도를 마련해 볼 테니 과히 걱정 마시오. 자, 그렇게 울고만 있지 말고 초나라 춤이나 한 번 추어보시구려. 짐은 그대를 위하여 초나라 노래를 불러주겠소." 척부인이 춤출 것을 거절하고 울기만 하자 유방은 악사들에게 거문고를 뜯게 하고는 직접 노래를 지어 불렀다. 홍곡이 높이 날아, 단숨에 천 리 가네 우익이 생기더니, 사해를 횡단하네 궁시는 있다마는, 어디에다 쏠 것인가! 물론 태자가 너무 커버렸다는 암시를 담은 가사였다. 그래도 척부인이 계속 흐느끼고 있자 유방은 기분이 언짢았는지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주연 역시 끝나고 말았다. 유방의 병이 다시 도졌다. 전날 경포를 징벌할 때 맞은 화살 때문이었다. 그것은 유방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극심한 통증을 동반해 오며 덧나는 병이었다. 여후는 병에 시달리는 유방을 만나기 위해 의원 안기를 데리고 들어갔다.
"폐하, 명의 안기를 데리고 왔습니다. 진찰해 보시지요."
그러자 유방은 안기쪽을 흘낏 바라본 뒤에 소리부터 질렀다.
"그대가 짐의 병을 고치겠다고?"
"물론입니다. 어떤 상처든 고쳐드릴 수가 있습니다."
유방은 더욱 경멸어린 표정을 띠었다.
"여보게, 짐은 일찍이 서민의 신분에서 일어나 삼척의 검으로 천하를 약취한 몸일세. 이것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나. 그래서 짐은 명이란 하늘에 있는 것으로 알지. 설사 편작이 살아온들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치겠는가. 부질없는 짓이지. 그만두게. 황금 50근을 줄 터이니 가지고 그냥 돌아가게. 짐의 병을 고치겠다는 그대의 성의는 고맙네."
안기가 하릴없이 물러나간 뒤 여후는 여전히 버티고 앉았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혹시 말입니다. 폐하께서 붕어한 후에 소상국마저 서거한다면 다음에는 누구를 상국으로 대신하면 좋겠습니까?"
"종참이 좋겠지."
"그 다음에는요?"
"왕릉이 옳을 듯하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해 진평이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오. 진평의 재지는 상국으로서 남음이 있지만 그에게만 의지하는 일도 어려울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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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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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51
사색하는 사람에게 위대한 사상이 찾아온다. 그러나 모든 사상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사상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색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색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은 한 사람의 사상가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색한 사상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사색하는 사람은 자신이 유명한 사상가라고 알려지기를 원하고 있으며 부와 명성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삶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 진정한 사색은 외부의 명성이나 판단에 의지하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에 처해 있을 때, 그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 그래서 그 문제가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될 때 사색의 의미가 찾아지는 것이다.
52
인간의 희망은 절망보다 격렬하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된다.
53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그대의 시간이다. 지금은 그대를 위해 예정된, 다른 모든 순간과 구별되는 영원하고도 특별한 순간인 것이다.
54
다른 사람의 행동을 내 행동의 거울로 삼을 수는 없다. 내가 하는 모든 해동은 나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환경이나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며 사회적인 관계 역시 그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과 나는 성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행위의 동기도 다르게 마련이다. 만약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고유함을 가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 고유함을 잃게 된다면 행위와 자아는 분리된다. 그러므로 깊은 사고와 냉철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55
좌절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만의 역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길로 들어선다.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만이 물결의 세기를 알 수 있다.
56
자존심이 자신의 우월한 가치를 확신하는 것이라면 허영심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그럼 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허영심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허영심은 그런 존중을 외부에서 간접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노력이다.
57
허영심은 사람을 수다스럽게 만들고 자존심은 사람을 과묵하게 만든다. 허영심에 들뜬 사람은 자신을 알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말을 하는 것보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에 대한 존중을 외부로부터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리고 그 시선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말이란 많이 하면 할수록 허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말의 함정에 빠져서 결국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58
사사로운 일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 좋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모습만을 보여주도록 하라. 철저히 남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에게 사사로운 비밀을 알리게 되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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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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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약탈자들에게 바꿔치기당한 유점사 오십삼불
1912년, 금강산지역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러 갔던 일본인 전문가 시키노와 야쓰이는 내금강께의 유점사에서 신라시대의 '53불신앙' 의 실상을 말해주는, 높이 약 7∼41cm의 작은 금동불상 50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53구 가운데 3구만 잃었을 뿐 거의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세키노와 야쓰이는 그들이 발견하고 조사한 유점사 53불중의 유존상들을 1917년과 1920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총독부 간행) 제5책과 제7책에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기적적인 대발견' 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때의 학술적인 조사·평가와 사진은 다른 일본인 무법자들에겐 일확천금할 수 있는 좋을 약탈거리이 정보였다.
1916년 3월,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운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마침내 금상산 유점사로 침입해 갔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본전인 능인보전으로 달려가서 그 안에 모셔져 있던 53불의 유존상 중에서 가장 값나감직한 신라유물 17점을 골라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백주의 약탈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사승이나 누군가를 위협하느라고 권력신분을 가장하여 개성에서 왔다고 큰소리를 쳐 결국 자기 노출의 실수를 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절에서 불상 도난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장 개성으로 범인 일당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범인에게서 도난품을 압수했다면서 일본인 순사(경찰)가 가져온 불상은 17점 전부가 아니라 9점뿐이었다.
무력했던 중들은 9점만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그 이상 문제삼지 못했다. 또 그 불상들의 조형적인 양식이나 세부적인 형태에 평소아무런 지식도 관찰도 없었던 중들은 돌아온 9점 가운데 6점은 능인보전에서 도난당했던 유점사 전래의 신라유물이 아니고 일본인 악당들이 개성에서 지능적으로 바꿔치기 한 원위치 불명의 보잘것없는 수상들이란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범인을 추적했던 일본인 순사는 개성에서 쉽게 그들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범인들에게 매수되어 악질적인 음모에 가담했다. 그들은 개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거나, 아니면 범인들이 어디서 또 약탈해 갖고 있었던 듯한 전혀 별개의 대단찮은 작은 불상 6점에다가 유점사에서 훔쳐온 것 중에서 조각수법이나 형태가 가장 떨어지는 3점을 붙여 도합 9점을 경찰이 압수·반환시키는 것처럼 꾸몄다. 이 음모는 완전히 성공했다. 돌아온 9점의 불상조차도 3분의 2가 형편없는 것으로 바꿔치기된 사실에 의심을 품은 중은 그때 유점사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후 유점사에서 깨끗이 절취한 14 신라불상들을 '유점사 전래상' 이라는 족보까지 붙여 공공연히 국내외로 암매·유출시켰는데, 현재 보스턴미술관이 언젠지 모르게 입수해 갖고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 은 그중의 하나로 1917년의 (조선고적도보)에 사진과 조사기록이 수록돼 있다. 또 일본인으로 요코다, 이토 등이 그때의 유점사 도난품을 입수·소장하고 있었으나 오늘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유점사 오심삼불 해설, 황수영 편, 1967년). 한편 1935년 3월에 총독부박물관의 촉탁이던 일본인 가야모토와 사와가 14일간 유점사의 53불을 다시 본격 조사했는데, 뒤에 그들이 작성한 복명서에는 1910년대의 조사보고에 수록된 원래의 전래상은 36점뿐이고, 엉뚱한 것이 6점(1916년에 일본인 도둑들이 바꿔치기한 것), 그리고 과거의 조사보고에 있는 것 중의 11점(사실은 전의 고적조사 보고에 이유 없이 빠진 3점을 합쳐 14점)은 도난당하고 없으며, 따로 1930년에 송만공선사 등이 발의하여 당시 경성미술품제작소에서 새로 만들어 보충한 8점의 금동여래상과 보살입상이 있었다고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8·ㅜ15해방 이후 북한지역인 금강산 유점사의 53불이 어찌되었는지, 해방 직후에 누군가가 모두 싸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과 평양으로 옮겨져 갔다는 미확인 정보가 전할 뿐이다(앞의 (유점사 오십삼불 해설) ).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의 수난사
한일협정으로 1966년에 일본정부가 한국에 반환한 과거의 약탈 및 불법반출 문화재 가운데는 일부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5점의 불상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그중에 귀국 즉시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희귀한 백대리석 조각품인 보살좌상이 있다. 좌고 92.4cm, 목이 부러졌으나 깨끗이 붙였고, 이마의 백호로 끼워졌던 큰 보옥을 누군가에게 탈취당했을 때의 상처를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형태의 걸작 미술품이다. 원위치는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의 한송사터. 1880년께의 어느날 밤, 무서운 태풍으로 절간 건물들이 완전히 찌부러진 뒤로 백옥(백대리석)으로 만든 불상 둘과 비신을 잃은 귀부만이 남았더라는 전설의 절터이다. 동해안의 황량한 한송사 절터의 두 백옥불상(보살좌상) 중의 하나는 머리가 부러져 나간 데다가 오른쪽 팔도 무참히 깨져 나간 상태였으나 또 하나는 크게 파손된 데가 없는 완전한 상이었다. 완전한 보살좌상은 한송사가 폐사가 된 후, 즉시 인근의 칠성암이란 작은 암자에서 가져갔다. 그것은 사암 사이에 흔히 있는 자연스런 이전이었다. 그리고 약 30년이 지났을 때 그 완전한 백옥불상을 찾아 일본으로 빼돌리려는 일본인 무법자가 나타났다. 한일합방의 직후인 1911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강릉 측후소의 기사였다는 설이 있는 와다라는 일본인이 한송사터의 모래밭에 몹시 파괴된 불완전한 형태로 버려져 있던 백옥불에 완전한 짝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한 마을사람을 잡고 만일 그 행방을 수소문해서 알려주면 후하게 사례하겠다고 은밀히 유혹했다. 돈이 유혹을 받은 마을사람은 즉시 사방으로 탐색한 끝에 마침내 그 소재지를 확인해냈다. 그 정보는 즉각 와다에게 제공되었고, 반출음모는 당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는 한송사터에서 약 30리 떨어진 언덕의 칠성암을 곧바로 찾아갔다. 그리곤 암자를 지키고 있던 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한송사터에서 옮겨온 불상을 양도하라고 윽박질렀다. 거부했다가는 어떤 화를 입게 될지 몰라 겁을 집어먹은 중은 겨우 "불상을 천좌시키려면 반드시 격식을 갖춘 예불의식을 가져야 한다" 는 조건을 말했을 뿐이었다.
일본인 악당은 매수금으로 미리 준비했던 몇 푼의 돈을 칠성암의 허약한 중에게 집어주고는 암자 밖의 풀숲에 모셔져 있던 걸작 백옥불상을 아무런 장애 없이 탈취할 수 있었다. 그때 이미 머리는 부러져 있었다. 탈취자 와다는 그것을 본국 정부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입명출세를 계산한 이용물로 삼을 속셈이었다. 그는 장정 두 사람이면 거뜬히 들 수 있는 좌고 1m 미만의 석불을 어렵지 않게 주문진 선착장으로 운반한 후, 배에 실어 도쿄의 제실박물관(지금의 국립박물관)으로 직행시켰다. 1911년 10월의 일이었다. 그후 이 석불은 '재선와다가 기증함' 이란 카드와 함께 55년 동안이나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이상이 1966년에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며 일본정부가 한국에 반환한 문화재들 속의 걸작 대리석 조각품으로 귀국 즉시 국보가 된 '석조보살좌상'의 수난의 내력이다. 다행히 강릉에서의 불법반출 당시의 확실한 기록과 내막이 1912년 1월에 발행된 일본의 (고고학잡지)에 소개돼 있어 일제 초기의 맹랑한 일본인 악당이었던 와다의 범행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있는데, "그때 그 불상의 반출자인 재선 모씨(와다를 지칭)로부터 발견 및 반출경위를 들었다" 는 일본인 필자는 또, "불상이 (강릉에서) 도쿄로 반출된다고 할 때에 나는 그 보물을 볼 수 있었다.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고 덧붙이고 있다. 한편 와다는 머리와 오른팔이 깨져 나간 탓으로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당하지 않고 한송사 옛터 모래밭에 그대로 남아 있던 불완전 백옥불까지도 강릉 측후소 마당에 실어다 놓았다. 그 상태만으로도 귀중한 고려시대의 백대리석 조각품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오랫동안 강릉시 명주군청 마당에 옮겨져 있다가 현재는 강릉향토사료관에서 보호되고 있다. 보물 제81호로 지정돼 있다.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된 유덕사터 석불좌상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는 헌병과 총칼을 앞세운 무단정치로 악명 높은 식민지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의 문화재 보호에 있어서는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 공포와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등 적절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1915년의 총독부박물관 설립과 고적·유물의 수집·연구, 전문가를 동원한 연차적인 고적조사, 그밖에 개인적으로 진상받아 총독관저에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최대 걸작 불상의 하나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과 기타 소장품 일부를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평가의 근거가 돼 있다.
그러나 이 데라우치도 만 6년 동안의 총독 재임기간 중 이 땅의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무수히 혹은 진상받아 일본으로 빼돌린 후, 자기 고향에 '조선관' 이라는 개인 수집품 진열관까지 세웠었다는 내막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진열관 건물 자체가 서울의 경복궁에서 계획적으로 뜯어간 것이었다는 사실은 데라우치가 얼마나 이중적인 식민지 통치자였던가를 입증해주고도 남는다. 작고한 이홍직 교수가 1964년에 써서 남긴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언급돼 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에 막대한 (한국의) 미술품과 전적을 수집해서 경복궁 안의 건물까지 이건하여 '조선관' 이라 칭하고 거기에 보관하고 있어서 유명하였는데, 그후 이것은 산일되어 지금 그 일부가 야마구치 현립 단기여자대학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밟혀져 있지 않다."(사학연구,18집)
1913년께의 일이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라는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아주 품위 있는 신라시대의 완전한 석불 '석가여래좌상' 을 목격하고 몹시 탐을 내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데라우치 총독은 그의 관저(당시 남산 밑의 왜성대) 정원 한쪽에 경주의 오히라 집에서 본 그 탐나던 석물이 어느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시에 눈치 빠른 오히라의 충성스런 소행에 미소를 금치 못했으리라. 하룻밤 사이에 경주에서 서울의 총독관저로 진상된 그 석불좌상은 오직 좌대부의 하대석만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1939년에 그 하대석을 찾으려고 경주로 내려갔다가 결국 실패한 총독부박물관의 한 조사자가 그때 현지에서 확인한 다음과 같은 과거의 상황을 복명서에 적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할 제 그 석불을 보되, 재삼 되돌아보며 숙시하기에 당시 소장자였던 오히라가 총독의 마음에 몹시 들었음을 눈치채고 즉시 서울 총독관저로 운반하였다고 함."
그 석불은 본시 경주 시외인 월성군 내동면 도지리에 있는 유덕사터에 남아 있던 유물이었다. 그것을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거리낌없이 저지르던 수법 그대로 불법반출해다가 자기집 마당에 버젓이 놔두고 자랑하던 오히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하여 서울로 올라온 '석조석가여래좌상' 은 계속 남산 밑의 왜성대에 그대로 전해지다가 1927년에 경복궁 뒤에 총독관저(지금이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 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
굴불사터 사면석불의 수난
일제 밑에서 한국의 종류의 문화재가 얼마나 처참하고 어이없게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거나 파괴당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조사·파악하고 있는 오늘의 국내 전문가들은 특히 굴욕의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를 "완전 무법과 묵인된 약탈의 시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반출 혹은 약탈한 우리의 문화재는 부지기수란 표현이 모자랄 정도라고 말한다. 황수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일합방에 앞서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귀중한 보물탐색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인 상인 또는 무뢰도당의 손으로 산간벽지의 고사암 또는 암굴과 같은 봉안처에서의 불법반출과 사찰 등에 보존되어 오던 불상·사보류에 대한 약탈행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절터 등에 남아 있던 석조미술품의 대량 반출이나, 세계사상 그 유례가 다시 없는 수만 고분의 도굴행위 등은…, 작품 그 자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아니 지니고 있던 학적 무형의 가치를 박탈당하고 일괄 유물과 분리되어 환금과 탈취의 표적으로만 취급되었다. 이곳에 우리 고대 문화재의 박해와 해명을 위하여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중대한 타격이 일제 초기에 있었다."( (역사학보), (반가사유석상소고), 1960년 )
현재 보물 제121호로 지정돼 있는 경주시 동천리 굴불사터의 자연암 '사면석불' 의 남쪽면에 해당되는 고부조는 석가여래삼존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본존 석가여래의 머리 부분과 오른쪽의 협시보살상 전체를 정으로 쪼아 떼어간 악당이 있었다. 곧 "완전 무법과 약탈의 시대" 에 있었던 기막힌 수난의 하나였다.
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사면석불' 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린 것은 1914∼191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을 들고 온 무법자에 의해 석가여래의 불두와 전신상의 협시보살 부분이 감쪽같이 떼어져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일본인 학자나 관계전문가들은 애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체함으로써 1960년 무렵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그 부분을 주목하고 의심한 전문가가 없었다. 1960년께였다. 당시 문교부 국보보존위원회 위원이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과 이홍직·황수영 교수 일행이 경주의 유적을 조사하러 갔다가 굴불사터의 '사면석불' 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일행의 화제가 드디어 반세기전에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떼어 간 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예리한 눈으로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간송이었다. 일행은 긴장하여 그 자리에서 세밀한 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큰 바윗덩이의 암면 부조의 하나인 남쪽면의 오른쪽에서 본존상의 머리와 협시보살상 전체를 기술적으로 쪼아 떼어간 정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그 보살상의 가장자리로 이어져 있던 천의 자락이 얇고 섬세한 부분까지는 도저히 떼어갈 수 없었던 점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몇 해 후 한일회담 문화재관계 한국대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황수영 교수는 교토대학 고고학 연구실에서 1915년께에 찍은 경주 굴불사터 '사면석불' 의 사진 원판들을 보았다. 거기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 있었다. 불두와 보살상을 떼어 간 직후의 사진이어서 그 자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희고 생경한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은 판명되었다. 1969년에 문공부와 문화재관리국이 간행한 (문화재대관) (보물편) 중편의 '굴불사터 석불상' (사면석불) 도판해설은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면석불의 남면상은 원래는 삼존상으로 만든 것이지만 일제 때에 오른쪽 보살상을 완전히 떼어 가고 본존상의 머리까지 떼어 간 참혹한 수난을 입었다."
반세기 전에 일본인 악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떼어져 간 비운의 '사면석불' 남면의 석가상 불두와 그 옆의 보살상은 지금 일본의 어느곳에 가 있을까.
도둑맞은 관덕동 석탑의 돌사자상 한 쌍
30여 년 전에 경북 의성군 단촌면 관덕동의 '삼층석탑'(현재 보물 제188호)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 마멸이 심한 암수 한 쌍의 돌사자가 있다. 암놈의 크기는 높이가 52cm, 수놈은 35cm. 특히 암사자상에는 배밑 양편과 앞발 사이로 들어가 젖을 빨고 있는 세 마리의 새끼사자가 귀엽게 곁들여져 있는데, 이런 자연스런 사실표현의 어미와 새끼사자의 상은 시대를 불문하고 국내 유일의 진귀한 조각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동양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일찍부터 일본인 전문가들도 경탄했었다. 1934년 1월에 발행된 일본의 (건축잡지)에 의성 관덕동 석탑에서 일찍이 네 마리의 돌사자상을 조사했던 일본인 전문가 후지시마가 다음과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석탑에서) 가장 흥미있다고 말할 것은 상층기단 위의 네 귀퉁이에 놓여 있는 4개의 석사자이다. 마멸되긴 했으나 자세히 조사해보건대 암·수 두 쌍이다. 암사자는 겨드랑 밑으로 새끼사자를 넣고 젖을 빨게 하였다. 암사자를 곁들임은 중국에서도 송대 이상으로 오래된 것을 구하기 힘들며, 조선에서는 각 대를 통하여 그 예가 없고, 일본에서도 가마쿠라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발견할 수 없다. 동양에서 아사(새끼모양의 조각품)로 최고의 예가 된다."
문제는 이 일본인 전문가가 경탄해 마지않은 유물 평가에 있지 않다. 후지시마가 그런 얘기를 써서 발표한 지 5년 후인 1939년에 이르러 그때까지 관덕동 삼층석탑을 분명히 장식하고 있던 그 두 쌍의 네 마리 돌사자 중 상태가 더 완전했던 것 같은 한 쌍을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후지시마의 앞의 글로 미루어 도둑맞은 한 쌍 중의 암사자도 역시 현재 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암사자처럼 젖을 빨고 있는 새끼들은 배 밑에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네 마리 돌사자 중 몹시 깨지고 마멸이 심한 한 마리만 남겨 놓고 두 차례에 걸쳐 세 마리를 약탈해 간 사실과 똑같은 악랄한 일본인 무법자의 소행이었다. 후지시마는 두 쌍(네 마리)의 돌사자가 고스란히 놓여 있을 때에 관덕동 삼층석탑을 조사했다. 그러나 일본인 무법자의 석탑 및 돌사자의 일괄약탈 및 반출기도는 그 전에 있었다. 후지시마도 그 사실을 적고 있다.
"탑 전체(돌사자 포함)가 1931년에 대구의 모씨(물론 일본인 골동품상이었거나 배후의 교사자)에게 팔려 해체가 착수되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단념하고 종전과 같이 다시 쌓아 올렸다고 한다."
해방 후 전문가들이 현지를 조사하고 주민들에게 들은 바로는, 대구에 살던 어떤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탑을 사서 모조리 해체한 후 탑재들을 하나씩 가마니로 싸서 의성역으로 실어 내갔을 때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일대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일본인 무법자와 그 일당의 석탑 반출음모는 주민들의 살기등등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고, 그후 탑재들은 주민들에 의해 원위치로 되옮겨져 가서 예전대로 복원되었다. 1차 수난 때엔 돌사자들도 무사했었다. 그러나 이 사자들의 안전은 결국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1939년 어느날, 두 번째로 악당들이 침입해 왔다. 새끼사자를 거느린 두 쌍의 돌사자 중 보존상태가 좋은 쪽의 한 쌍이 목표물이었다. 그들의 범행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후지시마가 '한국의 유일한 유물일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오랜 귀중한 조각품' 이라는 가치 평가와 함께 위치를 소개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들은 그 돌사자 약탈작전을 아주 간단히 해치울 수 있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뒤늦게 관덕동 삼층석탑을 고적·유물로 등록시키고(현재 보물 제188호), 한 쌍을 도둑맞고 한 쌍만 남은 돌사자를 현지의 보존이 어렵다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갔다. 1939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도난당한 한 쌍의 돌사자는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고, 경주박물관에서 보호하고 있는 마멸이 심한 한 쌍만이 보물 제202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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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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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윤병한의 부탁을 받은 송원영은 조금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국무총리를 면회하고자 찾아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이 국무총리를 만나고자 하는 것은 태반이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취직 부탁이 아니면 이권 청탁 이런 것들이었다. 총리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만나게 해주려 했다간 총리는 몸뚱이가 백 개라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국사를 돌볼 시간을 갖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총리 면회신청을 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 윤 의원, 어지간하면 총리의 시간을 아실 만한 국회의원들까지도 자꾸 총리만을 만나려고 하니?"
송원영은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총리 면담 주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거 와 이러능기요, 송 비서관? 내가 개인적인 일로 총리를 만나려고 하는 줄 아시오? 중대한 정보가 있어서 만나려는 거요, 중대한 정보가 있어서."
윤병한은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 때문이라는 것을 큰소리로 떠들고 나서 송원영의 귀에 바싹 입을 대고 소근거렸다.
"여보 송 비서관, 여기 이분이 군부 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 왔단 말이오."
"군부 쿠데타 계획?"
곤두섰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장면 국무총리 암살미수 사건> 같은 것이 벌어져 모두가 긴장에 쌓여 있을 때였다. 이 사건은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인 박대완(朴大完)이란 자가 주모자가 된 매우 우스꽝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긴장해 있는 가운데서도 송원영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친구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총리를 만나려는 게 아냐?) 하는 생각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웃자, 윤병한의 눈꼬리가 치켜졌다.
"여보, 이게 웃을 일이오? 더구나 구체적인 증거까지도 가지고 왔는데?"
증거까지 가지고 왔단다. 그렇다면 총리를 만나려는 수단이라고만 해석할 수도
"알겠습니다. 총리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송원영은 앞장서서 나가며 비서관 정주성(鄭周成)에게 따라 오라고 눈짓을 했다. 총리 집무실로 들어섰다.
"윤병한 의원께서 총리께 중대한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윤병한을 만나 줄 필요가 있어서 안내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정 비서관이 배석해 있도록 하시오."
송원영은 정주성에게 귀엣말로 말하고 물러나왔다.
"중대한 말씀이라니 무슨 말씀인가요?"
장면이 나직히 물었다.
"예, 다름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에 대한
"군부 쿠데타?"
장면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예."
윤병한은 안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장면 앞에 펼쳐 놓았다.
"여기 적혀 있는 자들은 모두 군부 쿠데타 모의에 가담해 있는 자들입니다. 살펴보십시오."
장면은 그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제일먼저 눈 속으로 파고든 이름이 <제2군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라는 직함과 계급 그리고 이름이었다.
"박정희? 박정희가 어떤 사람이지?"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정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을까? 그의 사상적 경력, 그리고 1951년 5.26 정치파동 때 이종찬에게 쿠데타를 건의했던 사실 등을 알고 있었으면 장면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기만 했던들, 장면은 좀더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지 않았을까? 장면은 그 메모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육군 소장 이주일(李周一)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 밖에는 태반이 육군 중령의 이름들이었다.
"윤 의원이 이 명단을 용케 입수했구려. 이 명단을 어떻게 입수했소?"
"예, 바로 이 오 사장이 제보해 주었습니다."
장면에게 소개했다. 이 신사의 이름은 오인환(吳仁煥), 한양공업(漢陽工業)주식회사 사장으로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군부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김덕승(金德勝)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제시대 때 만주땅에 주둔해 있던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정보원으로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관동군이라고 하면 포악하고 악명 높은 군대였는데 그 관동군의 정보원이었다고 하면 그 인물이 만주땅에서 어떤 짓을 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하자 <만주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만주땅에서 돌아온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그가 광복군(光復軍)에 몸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전(戰前) 광복군이 아니라 전후(戰後) 광복군이었다. 8.15 해방이 되자, 광복군에서는 북경(北京)에 광복군 초모처를 설치하고 북지(北支) 또는 만주땅에서 일본군 군적에 있던 한국 청년들을 모아서 광복군에 편입했던 것이다. 그가 관동군 첩자짓을 했다는 것을 광복군 초모처 요원이 알았던들 광복군에 편입시켜 줄 리가 없었다. 그가 박정희라든가 이주일 등 5.16 군사 쿠데타 후에 쿠데타를 성사시키는 데 협조를 했다고 해서 군사정부에서는 중앙일보 자리 건물을 주어 산업박람회를 열어 치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뒤에는 마사회(馬事會) 회장 감투를 씌워주기도 했었다. 전두환(全斗煥)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중국 요리집을 경영했다던가. 김덕승은 5.16 군사 쿠데타 전에는 <김용천>이라는 가명으로 행세를 했다. 전후 광복군에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군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군납도 하고 그 일의 중개업도 하는 등 그러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한양공업 사장인 오인환에게 대구에 내려가 있는 김용천 아니 김덕승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온 것은 1961년 5월 2일이었다. 제2군 사령부에서 큰 공사를 맡게 되었으니 즉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공사를 맡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부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대구로 달려 내려갔다. 오인환을 맞은 김덕승은 그를 중화원(中和園)이라는 중국 요리집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서니 거기에는 벌써 선객들이 있었다. 어깨에 번쩍번쩍하는 별들을 달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이 어른은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각하, 이 어른은 참모장 이주일 소장 각하."
김덕승은 자못 의기양양해져 장군들을 소개했다. 오인환의 가슴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제2군 사령부에 큰 공사가 있다고 하더니 과연 틀림없는 일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자신이 부담하리라 작심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군들하고는 초대면이었으나, 그들의 환심을 사두고자 해서 호기있게 놀았다. 진탕 술을 퍼마신 다음에 여관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김덕승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여관으로 찾아가기 전에 부사령관 관사로 박정희부터 찾아갔다.
"각하, 오인환 그 사람 어떻습니까?"
"글쎄, 내가 보기엔 괜찮은 사람 같은데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오?"
"네, 그렇습니다. 저하고는 금전상의 거래도 잦았고......."
"그래서 내가 부탁한 군자금을 그 사람한테서 조달하려고 불러내렸나?"
"네, 그렇습니다. 제 주위에는 그만한 사람밖에 없어서......."
군사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는 박정희는 군자금 조달이 막막했다. 그래서 김덕승을 불러내렸다. 그리고는 쿠데타에 필요한 자금 5백만 환만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김형, 그래 그 사람이 돈을 선뜻 내놓을 것 같소?"
박정희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 같았다. 사실에 있어서는 김덕승도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큰 공사를 따내게 되었다고 내려오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뭐라고 하면서 5백만 환을 달라고 해야 할지......?"
박정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각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지금 각하께서 추진하고 있는 일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겠단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박정희는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여전히 담배만 빨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에는 담배 한 개피를 다 태우고 난 뒤였다.
"김형이 믿을 수 있다고 자신하거든 생각대로 해보시오."
김덕승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오인환은 인사를 생략하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공사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오 사장."
김덕승은 오인환을 불러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 다음 오인환의 의중을 떠보았다.
"공사 내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우선 나한테 5백만 환만 먼저 줄 수 있겠소?"
"그야 공사만 확실하게 따낸다면야....... 하지만 어떤 공사인지,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을 알아야 나도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게 아니오?"
당연한 대꾸였다. 공사 규모가 몇 푼짜리이지도 모르면서 5백만 환이란 대금을 선뜻 내놓을 미친 놈이 어디 있단말인가. 5백만 환이 어느 정도의 큰돈인지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1961년 5월 당시(쿠데타 직전)의 쌀값을 소개하면, 한 가마니(10말)에 도매로 1만 9천 5백 환이었다. 그러니까 5백만 환을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2억 8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오 사장, 꼭 공사 내용을 알아야만 돈을 줄 수 있겠소? 나를 믿고 줄 수는 없겠소?"
오인환은 힐끔 김덕승의 표정을 살펴봤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이놈아 너 같은 브로커를 뭘 믿고 5백만 환이라는 큰돈을 주어?)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입으로 뱉아 내는 대답은 좀 부드러웠다.
"나는 사업가올시다. 5백만 환이란 돈이 크다면 클 수도 있고 작다면 작다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 공사 내용을 알아야만......."
"알겠습니다."
김덕승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 내 얘기하죠. 공사치곤 아주 큰 공사요."
"큰 공사라면 어느 정도로 큰 공사냔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요."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
무슨 뜻인가,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라니? 오인환은 얼핏 납득이 가지않았다.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김 선생, 속시원히 툭 까놓으시죠? 어떤 돌리기만 하십니까?"
"그러게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라고 하지 않았소?"
이렇게 말하고 김덕승은 지금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툭 털어놓았다. 오인환은 놀랐다.
"아니 장도영 장군도 가담돼 있단 말입니까?"
오인환은 장도영이 어떻게 해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게 됐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던 것이다. 장면은 놀라기보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김 무엇인가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장도영 장군도 가담돼 있다고 했소?"
장면이 따지듯이 다시 물었다.
"가담돼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장도영 장군을 업고서 할려고 한다 했습니다."
오인환은 조금 걱정을 했다.
"그게 모두인가요?"
오인환이 힐끔 윤병한을 바라보았다.
"있었던 사실은 모두 말씀드려요."
윤병한이 재촉했다. 오인환은 다시 장면을 바라보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는 김덕승은 비밀을 털어놓는 사실이 아무래도 좀 불안했던 털어놓고 잠시 오인환의 감정의 변화를 살피고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당신은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의 비밀을 알고 났으니 이 비밀을 지키지 않는 한 당신의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됐소. 그리고 당신은 이 시간 이후부터 당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두시오."
김덕승은 협박을 했다. 일제시대 관동군의 첩자노릇을 하던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썼던 것이다. 제 버릇 개 주랴. 오인환은 그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오한을 느꼈다. 김덕승은 이런 협박 한마디로 그치지를 않고, 또 하나의 협박을 보탰던 것이다.
"이제 오 사장은 돈을 내놓지 않고는 못 없다면 모를까, 능력이 있는 이상엔 싫든 좋든 우리의 요구 조건을 들어줘야 할 거요. 싫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들의 비밀을 누설시키겠다는 얘기밖에 되지않으니 말이오. 어떻게 하겠소? 언제 돈을 마련해 주겠소?"
김덕승은 마치 맡겨둔 돈을 받아내려는 듯한 투의 말을 했다. 오인환은 오금이 저리며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는 절망감도 일었다.
"김 선생, 2,3일만 여유를 주십시오. 돈을 반드시 마련해서 드리겠습니다."
오인환은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만일 거절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기를 치려는 게 아냐? 하는 생각이 번갯불처럼 일었다.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까짓 돈 5백만 환이 없어 한 사업가를 협박해서 돈을 울거내려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긴 그랬다. 박정희는 제2군 부사령관이었다. 2군의 어떤 공사를 주겠다고 가짜 계약서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틀림없어, 이 사나이는 쿠데타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려는 거야.) 이것이 사기냐 아니냐 하는 것을가려내자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김덕승이란 인물이 박정희하고 어느 정도로 한 가지만 알아내도 군사 쿠데타의 진부는 가려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인환은 한두 가지 꾀를 부렸다.
"김 선생, 난 대구는 초행이라 이왕에 내려온 김에 구경이라도 하고 올라갔으면 하는데, 박 장군한테 말씀해서 차를 좀 얻어쓸 수 없겠습니까?"
오인환은 청을 했다.
"그러십시오.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김덕승은 선선히 대답을 하고 여관 대청마루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려는 모양이었다. 오인환은 두 귀를 대청마루 쪽으로 바싹 모았다. 박정희한테 전화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20분쯤 되었을까? 밖에서 클랙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가 보실까요?"
김덕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과연 별판에 두 개의 별이 달려 있는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인 것만은 틀림이 없군. 그렇다면 쿠데타 계획도 사실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박정희가 보내준 차에 올라 대구를 한바퀴 돌았다. (쿠데타 계획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 구경하는 동안 오인환은 마냥 번민만을 거듭했다. 마련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른 체 내버려 두었다가 쿠데타가 성공하기라도 하는 날엔 김덕승은 보복을 하려 들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김덕승과 함께 대구 시내를 일주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김 선생, 실은 내가 어젯밤에 몽땅 털어서 술값을 내버렸더니 수중에 무일푼이 돼 버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서울까지의 차표를 좀......."
오인환은 노자돈을 요구했다. 사실 수중에 무일푼이 돼 버려서 노자돈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는 스스럼이 없는 사이가 됐다는 것을
"나도 마침 가진 돈이 없는데......."
김덕승은 꽤나 면구스러운 모양이었다. 서울까지의 기차표 값이 얼마라고 그만한 돈도 갖고 있지 못한단 말인가? 명색이 사업가라면서.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김덕승은 다시 또 대청마루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시 또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려는 눈치인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방으로 돌아온 지 한 30분 뒤에 박정희의 운전수가 서울까지의 기차표를 전해 주고 돌아갔다. 여관방을 나서기 전 오인환은 다짐하듯이 물어보았다.
"김 선생, 쿠데타의 영도자로 장도영 장군을 모시기로 한 것이 틀림없습니까?"
틀림없다면 돈은 어김없이 마련해 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틀림없습니다."
김덕승은 한마디로 잘라 대꾸했다.
"김 선생께서 친히 장 장군을 만나보셨습니까?"
"나는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박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틀릴 리가 있겠습니까?"
오인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이렇게 물었다.
"내가 5백만 환만 내놓게 되면 나도 대한민국 청부공사에 한몫 끼게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오 사장이 5백만 환만 내놓게 되면 오 사장의 공로야말로 오인환은 김덕승과 단단이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도착하자 꼭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김덕승한테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들었던 그의 마음은 그만큼 두려움에 휩싸여져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사흘 동안을 두문불출하며 번민을 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고발을 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돈을 마련하는 척 동분서주하면서 시간을 끌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끝내, 오인환은 고발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다고 군 수사기관이나 경찰에 고발할 수는 없었다. 쿠데타를 계획해 놓고 있는 사람들이고 보면 어디에 손을 뻗쳐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윤병한을 찾아가 의논을 했다. 그랬더니 윤병한은 당장 총리를 만나자고 하며 이리로 끌고 온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장면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흐음 하고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국토방위를 하라고 쥐어준 총칼이지 그게 어디 정권을 뒤집어 엎으라고 쥐어준 총칼인가?"
또 한번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이상에는"
빨리 손을 쓰는 윤병한은 꽤나 초조한 모양이었다. 장면은 거기에 는 대답을 않고 기립해 서 있는 비서관 정주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서 송 비서관더러 어서 좀 올라오라고 해."
비서관 정주성이 공보비서실로 내려왔다. 그의 표정이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송원영은 그러한 정주성을 의아한 듯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윤 의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상세한 말씀은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어서 위로 올라가 보십시오. 총리께서 부르십니다."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놀라움에 호들갑을 떨 법한 일이었으나, 그는 조용히 말하며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장면이 부른다는 말에 송원영은 부리나케 다시 총리실로 올라갔다. 윤병한과 오인환은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 있었다.
"송 군, 지금 즉시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하고 이태희 검찰총장을 들어오라고 해주게."
지시하는 장면의 표정도 사뭇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장면의 부름을 받고 먼저 달려들어온 사람은 장도영이었다. 그는 총리실로 들어서자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장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좀 앉으시죠."
장도영이 쇼파에, 장면하고는 대각선으로 앉았다.
"바쁘실 텐데 들어오라고 해서 미안하오."
장면은 이렇게 운을 떼고 난 뒤,
"장 장군을 들어오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고 박정희라고 하는 2군 부사령관이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데 장 장군은 알고 계시오?"
장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보가 총리의 귀에까지 들어갔지?) 그는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으나 시침을
"각하, 쿠데타라니요? 그 사람은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구요?"
"네, 각하! 그 사람 지금까지 쭈욱 제밑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장도영은 어째서 이렇개 박정희를 두둔하고 나섰던 것일까? 자기를 지도자로 업고 쿠데타를 할 것이라는 박정희의 말에 행여나 대권을 잡을 호기라고 내심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요?"
장면은 도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곤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참모총장직에 있는 한 쿠데타에 대한 염려는 놓으셔도 됩니다."
장도영은 다시 한번 자신있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여간에 장 장군, 박정희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니 조사해서 나한테 보고를 해주시오."
장면은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네, 각하."
장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은 모양이었다.
"그럼, 각하, 물러가겠습니다."
장도영은 거수경례를 붙이고 총리실에서 물러났다. 그는 문을 열기 직전 장면과 눈총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군사 쿠데타 어쩌고 하며 제보를 한 놈들이 너희놈들인 모양이구나. 괘씸한 놈들!) 육군본부로 돌아온 장도영은 즉시 대구에 있는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박 장군. 좀 조심들 해야겠소. 박장군이 중심이 돼서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으니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소."
장도영의 전화를 받은 박정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장 장군이 나를 감싸주고 있는 이상엔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제는 오히려 마음놓고 일을 추진할 수가 있다. 장면의 부름을 받은 검찰총장 이태희(李太熙)가 총리실에 나타난 것은 장도영이 물러간 직후였다. 평안남도 강동(江東) 태생인 이태희는 이때 나이는 꽉 찬 오십이었다. 남에게 주는 인상이 꼭 검찰총장에 알맞는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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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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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칼리굴라 황제 (재위:서기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로마 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3단 노가 보통이었던 시대에 칼리굴라는 노가 10이나 되는 초대형 선박을 만들었다고 한다. 돛은 능직으로 짜서 햇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비단으로 만들고, 배 안에는 욕실과 살롱에 침실까지 갖추어져 있고, 갑판 위는 회랑식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배에 초록색 잎이 무성한 나무와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서 잔치를 벌이는 호사스러움을 즐겼다고 한다. 칼리굴라 시대부터 1천 400년이 지난 르네상스 시대에, 만능 천재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선배인 레온 바티스카 알베르티가 오랜 중세동안 줄곧 전해 내려온 전설의 진상을 규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로마에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네미 호에 로마 시대의 배들이 가라앉아 있다는 전설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잠수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이 배를 탐색하는 작업은 실패로 끝났다. 18세기에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다. 20세기에 들어와, 고대 로마를 짝사랑한 무솔리니의 주선으로 대대적인 탐색 작업이 재개되었다. 당시는 고고학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물을 빼낸 호수에서는 1천 900년 전의 배 두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척 다 바닥이 평평한 것은 이 배들이 항해보다는 떠 있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한 척은 길이가 67미터에 너비가 20미터, 또 한 척은 좀더 커서 길이가 71미터에 너비가 21미터였다. 배에서는 바닥 마감재로 보이는 갖가지 색깔의 대리석 조각이나 모자이크, 조상에서부터 청동제 선구와 조리기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는 여기서 발굴된 유물만을 보관하기 위한 박물관을 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유감스럽게도 선체가 소실되어버렸다. 지금은 불타지 않은 대리석이나 모자이크나 청동제품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두 척이 칼리굴라가 만든 배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료는 지금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에는 칼리굴라 말고도 전대미문의 일을 해낸 황제가 많았지만, 그들이 만든 배는 거의 다 공공 용도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인용으로 배를 만들고, 게다가 변덕의 산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낭비를 일삼은 것은 칼리굴라의 장기였다. 그렇긴 하지만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푸른 나무가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조용하고 아담한 네미 호에 배라기보다는 별장이라는 느낌을 주는 놀잇배를 띄워놓고, 조용히 수면을 미끄러져가는 선박 위에서 잔치를 즐기는 것은 더없는 쾌락이었을 것이다. 칼리굴라는 무엇에서 이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로마 시내를 흐르는 테베레 강에 떠 있는 섬은 그 당시부터 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어린 시절에 아버지 게르마니퀴스에게 이끌려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유산인 화려한 나일 강 유람선을 타본 경험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네미 호에서 발굴된 로마 시대의 배 두 척은, 전쟁 때 불타기 전에 연구해본 결과, 고의로 침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배에서 불이 난 것도 아니고, 망가져서 침몰한 것도 아니었다. 칼리굴라가 살해된 직후에 그와 관련된 것은 모두 폐기되었으니까, 호수 위의 호화로운 놀잇배도 어쩌면 그때 침몰당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칼리굴라 이후의 어느 황제도 이 배를 타고 즐겼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자금 마련책
칼리굴라가 즉위한 지 3년도 지나기 전에 황제의 사유재산은 물론 국가 재정까지 파탄난 것이 분명해졌다. 티베리우스가 남긴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흑자는 각종 오락 스포츠를 제공하느라 벌써 오래전에 탕진해버렸다. 그후로는 이리저리 돈을 변통해서 구멍을 메우고 있었지만, 즉위한 지 3년째가 가까워질 무렵에는 변통할 방법도 바닥나버렸다. 그래도 칼리굴라는 이제까지의 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가 없었다. 우선 낭비는 그게 무엇이든 갈수록 심해지는 숙명을 갖는다. 둘째, 일반 시민들이 칼리굴라가 베푸는 진수성찬에 입맛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칼리굴라도 '돈이 떨어지는'것을 두려워했다. 26세의 칼리굴라에게는 돈 마련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지만, 자신의지지 기반은 원로원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던 것이지만. 지출을 줄일 수 없는 이상, 재정 파탄에서 벗어날 길은 수입을 늘리는 것뿐이다. 제국의 경제는 계속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70년이나 계속된 평화와 그동안 이루어진 제국 전역의 사회간접자본 정비,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에 따라 각 민족과 각 도시에 자주권을 부여하는 통치 원칙이 경제력 향상으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통계가 있었다면, 로마 제국의 경제력은 완만하나마나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조세 수입은 가만 내버려두어도 자연히 늘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퍼센트밖에 안되는 세율이라도, 제국의 경제성장을 가장 정직하게 반영하는 매상세를 칼리굴라는 폐지해버렸다.
10퍼센트인 속주세율을 올리는 것은 돈에 쪼들린 칼리굴라도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다. 속주세는 피지배자인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지만, 세금이 많아지면 속주민도 봉기한다. 고대에는 전제군주국이든 자치를 인정받고 있는 '자유도시'든 관계없이 직접세는 10퍼센트라는 게 불문율이자 상식이었다. 속주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군단을 파견해야 하기 때문에 지출만 늘어날 뿐이었다.
방만한 재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급히 재정을 건전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고식적인 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난해져버린 것은 칼리굴라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유복하거나, 유복하지는 않더라도 가난하지는 않았다. 진짜 가난뱅이한테는 칼리굴라도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대기는커녕, 빈민구제를 위해 밀을 무상으로 배급하는 일은 그대로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굴라가 궁리해낸 몇 가지 자금 마련책을 추적해보아도, 비참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쓴웃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칼리굴라는 이 방면에서도 대단한 아이디어 맨이었다.
그는 황실의 가재도구와 패물에서부터 노예까지 경매에 내놓기로 했다. 하지만 경매는 수도 로마가 아니라 속주 갈리아의 수도 격인 리옹에서 하기로 했다. 왜 로마가 아니라 리옹인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 세 가지로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로마에서 하는 것은 아무래도 창피했다. 둘째, 칼리굴라는 그 물건들을 되도록 비싸게 팔 생각이었지만, 가재도구도 패물도 노예도 시세대로 팔아서는 그다지 큰돈은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칼리굴라 자신도, 그리고 황실여인들도, 당시의 상류층이나 해방노예 출신인 벼락부자들에 비해 특별히 사치스런 물건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물건을 좀더 비싸게 팔려면,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침대라든가, 리비아가 애용한 패물이라든가, 태어났을 때부터 황실 가족을 모신 노예 등, 현대식으로 말하면 부가가치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황제 일가를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수도 로마의 주민을 상대하기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황제 일가에 대한 경의와 동경이 강한 속주민을 상대하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셋째, 아무리 황제 일가에 대한 경의와 동경이 강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 일부러 로마에서 알프스를 넘어 리옹까지 물건을 가져가는 이상, 운송비를 포함해서 시세보다 비싼 값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이 경매에는 갈리아 전역에서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거다. 속주까지 포함한 제국 전체의 경제력이 향상되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거야 어쨌든, 돈많은 속주민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하던 침대에 누워 무슨 생각을 했을 까, 칼리굴라가 직면해 있던 궁핍 상태는 경매로 마련한 정도의 돈으로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는 속주민에게만 부과되는 10퍼센트의 속주세를 올릴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속주세의 감소로 이어지는 길은 철저히 틀어막았다. 요컨대 속주민의 로마 시민권 취득을 사실상 허가하지 않게 된 것이다. 로마 시민이 되면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칼리굴라는 이미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속주민의 아들에게만 시민권 취득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속주민이 일단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면 그 사람의 가족과 친족한테도 시민권을 주고, 자손 대대로 시민권을 세습할 권리까지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직계 아들한테만 시민권을 주기로 하자, 속주 출신의 로마 시민들은 불만을 품고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준 '디플로마'(증명서)를 내보이며 항의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그렇게 낡은 증서는 무효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칼리굴라가 직계 아들의 로마 시민권 취득을 인정해주기로 한 것은 속주세를 늘리는 것보다 로마군의 병력 확보를 더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주민도 '보조병'으로 25년간의 병역을 마치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고, 그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이미 로마 시민권을 얻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 소유를 조건으로 하는 '군단병'에 지원할 수 있다. 이리하여 로마는 지원제를 고수하면서도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칼리굴라도 이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궁핍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지출을 줄이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새로운 세금을 궁리해냈다. 다만 세제의 기본 골격은 신격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것이므로 그것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칼리굴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제를 조금 손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로마에서는 민사재판의 대상이 되는 금액의 40분의 1, 즉 2.5퍼센트를 재판이 시작된 단계에서 국고에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재판이 진행되는 도주에 고소를 취하하면 이 돈을 납부할 의무는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칼리굴라는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그 돈을 납부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또한 시내에서 팔리는 땔감에도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지만, 세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밝혀주는 사료가 남아 있지 않다. 역시 세율은 알 수 없지만, 매춘업자와 창녀에게도 수익금의 몇 퍼센트를 세금으로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심지어는 짐꾼한테도 하루 번돈의 8분의 1을 세금으로 부과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의 다양한 자금 마련책을 재미있게 열거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퍼진 소문을 100년 가까이 지난 뒤에 그가 주워 모은 게 분명하다. 대부분은 믿기 어렵지만, 칼리굴라가 남의 유언장에까지 개입한 것은 로마의 실정을 생각하면 뜻밖에 현실적인 자금 마련책이었다. 로마인들은 평소에 자기가 존경하던 타인을 유산 상속인으로 지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6촌까지의 친족만 공제 대상으로 규정한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세는 많은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세금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유산 상속인 명단에 자기 이름도 넣으라는 강제 규정을 만들었다. 상속하는 유산은 현금보다 부동산이 많고, 노예나 검투사처럼 '살아 있는 재산'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칼리굴라는 유산을 물려받자마자 경매에 부쳐 현금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세법은 6촌 이외의 사람이 상속하는 경우에는 5퍼센트의 상속세를 국고에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과연 칼리굴라가 이 상속세를 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신설한 상속세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에게만 부과되는 세금이다. 칼리굴라가 유산 상속에 손을 댔다는 것은 곧 로마 시민의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짐꾼이나 매춘업자나 창녀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아닌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부과된 세금은 모두 피지배자에 대한 세금으로 받아들여져서, 지배자인 로마 시민의 불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료에 부과된 세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유산 상속에 손을 대는 것은 지배자를 자처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를 직접 겨냥하게 되었다. 법의 민족인 로마인은 사유재산을 철저히 존중하는 정신이 강하여, 부자든 가난뱅이든 침대 하나까지도 누구한테 물려줄 것인가를 유언장에 명시하는 관습이 정착되어 있었다. 따라서 칼리굴라가 한 일은 사유재산권 침해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칼리굴라는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을 잊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 돈이 들지 않는 한 국가나 개인이 제공하는 볼거리나 오락 스포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제공한 사람에게 지지를 아끼지 않지만, 자기 돈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 그때까지의 지지를 거두어 버리는 법이다. 칼리굴라가 즉위하자마자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시민들이 조금씩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칼리굴라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갈리아로
황제에 즉위한 지 2년 반이 지난 서기 39년 가을, 27세의 칼리굴라는 느닷없이 갈리아로 떠났다. 그때부터 이듬해 여름에 수도로 돌아올 때까지 7개월 동안 칼리굴라가 무엇을 했는지는 고대의 역사가들이 남긴 글을 통해 대충 알 수 있지만, 왜 그런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대의 역사가들도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후세의 연구도 추측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칼리굴라에게 부족한 것이라고는 군사적인 영예뿐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한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칼리굴라는 '제일인자'(프린켑스)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을 병사들이 존경하는 뜻으로 부르는 호칭이다. 카이사르가 그렇게 불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도 '임페라토르'였는데, 칼리굴라만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칼리굴라가 명실공히 '황제'가 되고 싶었다면, 즉위한 직후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을 때 결행한 편이 성공률도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밤낮없이 떠들썩한 축제로 세월을 보냈다. 즉위한 지 2년 반이 지난 칼리굴라에게 군사적인 영광 이외에 부족했던 것, 아니 그보다 훨씬 절실하게 부족했던 것은 '돈'이 아니었을까.
당시의 로마는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주력인 군단병만해도 15만 명, 보조병도 역시 15만 명 정도였다.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조차도 전투에서는 로마를 이길 수 있지만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다고 믿었을 정도다. 그리고 이 병력의 동향을 정할 권리는 최고사령관인 칼리굴라에게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팍스 로마나'를 지키는 데 필요한 군사력으로 30만 병력을 유지했고, 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더 이상 확대하는 것을 유언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칼리굴라가 그것을 어길 수는 없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하지만 방위선을 쳐놓은 채 쳐들어오는 적을 격퇴하는 것만으로는 방위선을 유지할 수 없다. 우선 쳐들어온 적을 격퇴하고, 다음에는 달아나는 적을 따라 적지로 쳐들어가 적지에서 적에게 타격을 준 뒤에 방위선으로 돌아와서 종래의 방위체제를 다시 구축하지 않으면 '방위'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라인 강 서쪽 연안에 늘어서 있는 로마 군단 기지는 아우구스투스시대에는 겨울철 숙영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제국 방위체제의 기반을 이루는 상설기지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것인 라인 강 동쪽 연안에 사는 게르만족에게 앞으로는 라인 강을 건너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게르만족이 라인 강 서쪽으로 쳐들어올 기미만 보이면 라인 강을 건너가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실제로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 땅에서 철수를 결행한 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마 군단은 게르만족의 발호를 막기 위해 자주 라인 강을 건너 군사력을 행사했다. 또한 라인 강을 제국의 방위선으로 삼기로 한 것 자체가 칼리굴라시대에는 아직 현실적인 개념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다. 엘베 강까지 이르는 게르마니아 땅의 제패를 죽을 때까지 꿈꾸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영역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 경계선이 라인 강을 의미하는지 엘베 강을 의미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칼리굴라 시대부터 10년 뒤에 태어난 역사가 타키투스조차도, 게르마니아 제패를 게르마니쿠스에게 맡겨두었다면 엘베 강까지 정복할 수 있었을 텐데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군사적 성공을 질투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믿었다.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를 제압한 자'라는 의미의 별명이고, 칼리굴라는 그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서기 39년 당시의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아 제패를 꿈꾸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위업을 완수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군사적 영예는 없을뿐더러, 전리품이나 게르마니아를 속주화하여 들어오는 속주세는 당시의 칼리굴라가 직면해 있던 궁핍 상태를 단숨에 해결해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갈리아에 들어간 칼리굴라는 리옹에서 잠시 지낸 뒤 라인 강 전선을 방문했다. 하지만 무슨 사정 때문인지-어쩌면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군단장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르지만-게르마니아 땅으로 진격하지는 않았다. 8개 군단과 보조부대를 합하여 10만 명 가까이나 되는 병력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처지였고, 게르마니아 땅으로 진격한다면 수도 시민들이 환호하며 지지했을 게 뻔한데도 그것을 단념한 것이다. 그래도 사소한 군사행동은 있었다. 오늘날에도 적의 코앞에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서기 39년 10월에 칼리굴라가 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최고사령관이기도 한 칼리굴라는 산야를 가득 메운 병사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제군의 힘과 사기는 적과 맞섰을 때를 위해 온존해두기 바란다"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게르마니아 땅으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칼리굴라는 다음 후보지로 브리타니아에 눈을 돌린다. 브리타니아 침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작한 이래 100년 가까이나 방치된 채였다. 방치해두어도 로마에 곤란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도버 해협에 가까운, 즉 갈리아에 가까운 오늘날의 켄트 지방에 사는 부족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칼리굴라가 브리타니아 침공을 생각한 데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브리타니아의 유력한 부족 내부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고, 그 싸움에서 패한 자들이 갈리아로 도망쳐와서 로마의 군사개입을 간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격당했기 때문에 반격한다는 로마의 전통적 개념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말하자면 칼리굴라의 브리타니아 침공은 별다른 근거도 없는 즉흥적인 착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황제의 착상이라 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다. 우선 침공에 필요한 병력을 어디에서 끌어오느냐는 문제가 있다. 갈리아에는 리옹에 주둔해 있는 1천 명 정도의 병력밖에 없었다. 라인 강에서 이동시키려 해도, 전선을 비워둘 수는 없다. 8개 군단 가운데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2개 군단뿐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3개 군단이 주둔해 있었지만, 여기서도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은 1개 군단뿐이다. 결국 2개 군단에 해당하는 수의 지원병을 모집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전쟁 비용을 염출하는 문제가 더욱 절실해진다. 돈을 마련하는 것은 칼리굴라에게 가장 골치아픈 문제다. 정신력이나 사기 같은 불확실한 요소보다는 병력의 수나 무기, 군량같은 확실한 요소를 먼저 준비한 뒤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이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을 만큼, 보급선 확보는 사령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쟁을 시작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고, 이 현실에 누구보다도 먼저 직면하는 사람이 바로 사령관이다. 칼리굴라는 승리한 뒤의 전리품과 속주화한 뒤의 속주세 수입을 기대하고 브리타니아에 눈을 돌렸지만, 군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이쪽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국고가 그렇게 빈약해진 주요 원인은 칼리굴라 자신이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불만스러웠는지, 칼리굴라는 도버 해협 앞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는 시위를 벌였다. 병사들에게 모래밭에 흩어져 있는 조개를 줍게 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말했지만, 이것은 줍게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열병식을 치르기 위해 북부 갈리아까지 끌려온 병사들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니까 조개라도 주운 게 분명하다. 칼리굴라가 한 일은 모래밭에 정렬한 병력을 사열하고, 모래톱 끝에 등대를 세운 것뿐이었다. 두 달 뒤인 서기 40년 5월 말에 칼리굴라는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통칭 '포메리움'이라고 불리는 도심에는 들어가지 않고, 개선식을 거행하기로 한 8월 31일까지 로마 근교에서 지냈다. 개선장군은 개선식 날까지 도심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로마의 전통적 관습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개선식이라 해도,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몰고 행진하는 정식 개선식이 아니라 말을 타고 행진하는 약식 개선식이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오바티오'라고 한다.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요구하는 대로 의결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군사훈련과 열병식밖에 하지 않은 사람에게 정식 개선식까지 허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칼리굴라는 만족한 모양이다. 약식인데도 일부러 자신의 28세 생일에 맞추어 개선식을 거행했다. 약식이라도 개선식에 참가한 병사들한테 '임페라토르'라는 호칭만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선식을 끝낸 뒤, 칼리굴라는 손쉬운 자금 마련책에만 관심을 쏟게 되었다. 7개월에 걸친 속주 순행은 궁핍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손쉬운 자금 마련책은 부유층으로부터 빼앗는 것이었다. 부유층은 곧 원로원 계급이다. 거기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국가반역죄 처벌법'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줄 알았던 공포시대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다시 시작되었다. 칼리굴라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칼리굴라의 두 누이동생은 유배되고, 죽은 누이동생 드루실라의 남편이었던 레피두스와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인 게툴리쿠스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즉위할 당시의 열광적 지지는 차츰 시들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칼리굴라와 원로원은 이제 완전한 대결관계로 바뀌었다. 일반 서민층은 자기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부유층이 타격을 받으면 당연히 환영할 터인데도, 그들조차 원로원 계급을 동정하게 되었다. 인간은 너무 많이 받으면 싫증을 내는 법이다. 일반 시민들도 칼리굴라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자금 마련이 벽에 부딪치고 시민의 열기도 식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는지, 칼리굴라는 제국의 동방 일대를 시찰하러 가기로 마음먹는다. 오리엔트는 풍요로운 땅으로 알려져 있었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칼리굴라의 즉위에 열광한 것은 서방보다 오히려 동방이었다. 동방에서는 자금을 마련하기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칼리굴라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문제가 그 앞에 나타났다. 이것 또한 그 원인은 칼리굴라 자신에게 있었다. 그 자신의 언동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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