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6호 - 2023.11.10 금요일(음력 :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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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는 흔히 통찰력의 결핍에서 나오는 한편,
비겁은 대개의 경우 훌륭한 정보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피터 유스티노프(英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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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피동의 쓸모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는 특유의 저 말투로 어떤 장면을 실감나게 강조했다. 저래야 영화의 맛이 살았다. 효과 만점. 모든 표현에는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다.
신화처럼 완고하게 전해오는 명령이 있다. ‘이중피동을 피하라!’ 한 번으로 족한데 두 번이나 피동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정말 그런가? 안 써도 되는데 굳이 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설명을 못 할 뿐이지 쓸모없는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옛말에는 진정한 이중피동, 즉 피동접사를 겹쳐 쓰는 말이 꽤 있다. 예를 들면, ‘닫히이다, 막히이다, 잊히이다, 눌리이다, 밟히우다, 잡히우다’. ‘닫히다, 막히다, 잊히다’ 등은 오래전부터 피동사로 쓰였다. 시간이 흘러 이 말이 피동사인지 아닌지 흐릿해지니 ‘이’나 ‘우’를 붙여 피동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했다. 낡은 옷을 기워 입듯, 말도 닳아서 애초의 쓸모가 흐릿해지면 뭔가를 덧댄다. 피동사만으로는 피동의 의미를 나타내기엔 약해 보이니 ‘지다’를 덧붙였다. 장례를 치르는 자식이 육개장을 목으로 넘기며 “이런데도 밥이 먹혀지는군”이라고 할 수 있잖은가.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불가항력이랄까, 거리감의 강조랄까. 아니면, 변명의 장치랄까.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이용 ‘잊혀진 계절’).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쉽게 쓰인 시, 잊어지지 않는 눈짓, 잊힌 계절’이면 참 어색하다.
사전이나 맞춤법 검사기의 구령에 맞춰 걷지 말자. 나의 감각을 맞춤하게 담을 수만 있다면 어떤 언어도 가능하다. 삶이 그렇듯.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성적이 수치스럽다고?
얼마 전 뉴스를 보다가 ‘성적 수치심’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성적 수치심? 학업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얘기인가?’ 자세히 들어 보니 성추행 관련기사였는데 기자가 ‘성:쩍 수치심’을 ‘성적 수치심’으로 발음한 것이었다. 뜻을 생각하지 않고 글자에만 신경을 쓸 때 흔히 범하게 되는 오류이다.
학습이나 일의 실적을 나타내는 성적(成績)은 예사소리로 발음하지만 남녀의 특성을 나타내는 ‘성(性)’에 접미사 ‘적(的)’이 붙은 성적(性的)은 ‘성:쩍’ 즉 된소리로 발음한다. 마찬가지로 지적(指摘)은 ‘지적’으로 발음하지만 지적(知的)은 ‘지쩍’으로 발음한다. 내적(內的) 외적(外的) 공적(公的) 사적(私的)도 ‘내:쩍’ ‘외:쩍’ ‘공쩍’ ‘사쩍’이 된다.
하지만 ‘접미사 ‘-적’이 모두 된소리로 발음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 ‘성공적’ ‘근본적’처럼 예사소리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다. 대체로 한음절 단어에 붙을 때 된소리가 나지만 명확한 것은 아니며 관습적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방송 출연자가 ‘잠자리(잠을 자는 곳)’를 ‘잠짜리’가 아닌 ‘잠자리’(곤충)로 발음해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다. 합성어의 경우 표기상에는 사이시옷이 없어도 관형의 뜻이 성립할 때 뒤 단어의 첫소리를 된소리로 발음한다. 문고리(문꼬리), 등불(등뿔), 눈동자(눈똥자), 손재주(손째주), 발바닥(발빠닥) 등이 이런 경우이다.
불필요한 된소리도 피해야겠지만 제때 된소리를 발음해야 의미 전달이 잘 될 뿐 아니라 발음하기도 쉽다. 경음화의 모든 원칙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규칙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례별로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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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하여요. - 한용운
당신의 얼굴은 봄하늘의 고요한 별이어요.
그러나 찢어진 구름 사이로 돌아오는, 반달같은 얼굴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여쁜 얼굴만을 사랑한다면,
왜 나의 베겟모에 달을 수놓지 않고 별을 수놓아요.
당신의 마음은 티없는 순옥이어요.
그러나 곱기도 밝기도 굳기도, 보석같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름다운 마음만을 사랑한다면, 옥으로 만들어요.
당신의 시(詩)는 봄비에 새로 눈트는 금결같은 버들이어요.
그러나 기름같은 검은 바다에 피어오르는
백합같은 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좋은 문장만을 사랑한다면, 왜 내가 꽃을 노래하지 않고 버들을 찬미하여요.
온 세상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할 때에,
당신만이 나를 사랑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여요. 나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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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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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단평(月旦評)
月:달 월. 旦:아침 단. 評:평론할 평.
[준말] 월단(月旦). [동의어] 월조평(月朝評).
[출전]《後漢書》
'매달 첫날의 평’이란 뜻으로, 인물에 대한 비평을 일컫는 말.
후한(後漢) 말, 12대 황제인 영제(靈帝:167~189) 17년(184)에 일어난 ‘황건(黃巾)의 난(亂)’ 때 큰 공을 세운 조조(曹操)가 아직 두각을 나타내기 전 일이다.
그 무렵, 여남(汝南:호북성 내) 땅에 허소와 그의 사촌 형 허정(許靖)이라는 두 명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달 첫날[月旦]’이면 허소의 집에서 향당(鄕黨:향-1만 2500집, 당-500집)의 인물을 뽑아 비평했는데 그 비평이 매우 적절함으로 해서 평판이 높았다. 그래서 당시 ‘여남의 비평’으로 불리던 이 비평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조조가 허소를 찾아와서 비평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난폭자로 소문난 조조의 청인지라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 조조가 재촉하자 허소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태평한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리이되,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간웅(姦雄)이 될 인물이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황건적(黃巾賊)을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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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5장 포르큐스-괴물의 출생
13. 아레스
아레스(Ares, Mars)는 그리스 세계의 옛 전쟁신 혹은 군신으로, 로마인은 이탈리아의 전쟁신 마르스와 동일시하였다. 트라키아에서 마르스는 전쟁을 매우 좋아하는 신으로 등장하며 그 자매인 에리스는 전쟁이 나도록 선동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질투심을 부추겼다.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라고 하나 헤라가 데리고 온 아들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치 제우스가 아테나를 출생케 한 것처럼, 시문에서는 올레노스 근처 들에서 꽃의 여신 클로리스(로마에서는 플로라)의 도움을 받은 헤라가 이성 없이 꽃을 만진 것만으로 임신하였다고 읊고 있다. 헤라는 아레스를 프리아푸스에게 교육받게 하고 무용과 남성적인 모든 행동을 배우게 하였다. 아레스는 아글라우로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알키페가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에게 겁탈당하려는 것을 구하기 위하여 그를 죽였다 한다. 그러나 증인이 없어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열린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연유하여 이 언덕은 최고재판소로서 역사적 신기원을 이룩하게 되었다.
아레스의 연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프로디테와의 관계였다. 둘의 부정한 소문을 들은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스토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마법의 망으로 현장을 덮치고 올림포스 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부정현장을 공개하였다. 아레스는 포세이돈이 개입한 후에야 겨울 풀려날 수 있었다. 크게 망신을 당한 아레스는 망을 보라고 한 알레트류온이 졸았기 때문이라고 하여 벌로 그를 수탉으로 변신시켰고,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정사를 남편에게 알린 헬리오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헬리오스의 아이들을 집요하게 학대하였다. 아레스는 티탄족과의 전쟁에서 오토스와 에피알테스에게 붙잡혀 15개월 동안 유폐되었는데 굶어 죽기 직전까지 헤르메스에게 발견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트로이 전쟁에서는 트로이쪽에 호의를 가진데다 특히 사랑하는 아프로디테가 이례적으로 트로이를 비호하였기 때문에 자신도 트로이쪽에 가세하였으나 용맹한 디오메데스에게 부상을 당해 곧 천상으로 철수하였다. 그는 디오메데스에게 당한 분통을 억지로 감추면서도 제우스와 아테나가 자기의 적수에게 예리하고 실수 없는 무기를 주었다고 불평하였다.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신은 아레스를 싫어하였으나 자매인 에리스와 연인 아프로디테, 무엇이든 지하에 넣어 두는 욕심쟁이 하데스만은 그를 좋아하였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자주 인간의 전쟁에 개입하여 비호를 하거나 방해를 놓았는데 이는 자신들을 숭배하는 인간이나 용사를 구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레스만은 전쟁에서 적이건 우군이건 또는 정의의 싸움이건 아니건, 용맹하건 겁쟁이 건 관계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공격하고 유혈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아레스를 수호신으로 받드는 도시는 거의 없고 옛적 그리스 세계에 아레스 숭배가 보편화되지 않았다. 이는 에리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레스는 폭력을 좋아하고 광폭하였지만 악의 신은 아니었다. 로마로 들어오자 호전적인 성격의 로마인은 이 아레스를 무한히 영광의 신으로 숭배하고 도시의 보호신, 군주의 선조신으로 앙모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필리피 전을 끝내고 로마에 가장 훌륭한 신전을 건립하여 마르스(아레스) 신에 봉헌하였다. 당시 마르스를 모시는 사제들의 학교를 살리라 하였고 사제들은 누마라는 곳에서 하늘에서 내린 신성한 방패 안킬라를 지켰다. 아레스는 일반적으로 벌거벗은 노인의 모습이거나 혹은 헬멧과 창 및 방패를 지닌 상으로 표현된다. 때로 무장하고 긴 수염을 가진 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두필의 준마(Flight.Terror)가 끄는 이륜전차를 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레스 제단은 말의 피 또는 이리의 피를 묻혀 호전성을 나타냈다. 까치와 솔개를 공양했는데 탐욕성과 탐식성이 있기 때문이며, 스키타이인은 나귀, 카리아인은 개를 바쳤다. 식물로는 개밀이라는 풀을 바치는데 전쟁터나 혹은 사람 피로 물든 땅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아레스는 각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데 예컨대 사비니족은 에뉴알리오스, 가울 사람은 카말로스, 카르타고에서는 마메르스라 하였다. 로마인은 그라디부스, 마보르스, 퀴리누스, 살리숩술루스라고도 하였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에게서 에로스(큐피드), 안테로스 및 하르모니아를, 아스튜오케에게서 아스칼라포스와 이알메노스를, 아글라우로스에게서 알키페를, 아게노르의 딸 데모니케와의 사이에서 몰로스, 퓰로스, 에우에노스 및 테스티오스를 두었다. 또한 로물루스, 오이노마오스, 뷰티스, 트락스, 트라키아의 디오메데스 등의 아비이기도 하다. 검사의 신이며 남성답고 호전적인 활동 오락에 관여되는 신으로 로마인은 원정에 나설 때 마르스 신전을 찾아 기원을 올렸다. 그러면 신상의 손에 지닌 창이 엄숙히 흔들려 응답을 하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전쟁의 신이 로마의 안전을 지키니(Mars vigila!)'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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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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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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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쾌락을 선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현명한 자는 산을 오르는 고통을 참고 견디다가 결국 정상에 올라 자연의 위대함에 경이를 보내게 된다.
32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나의 애무에서 비롯된다. 행복이나 불행은 결국 아 자신의 느낌과 사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나 경험들은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다. 행복과 불행은 나의 의지와 경험에 대해 우리는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각자가 서로 별개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의 작용만이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하라. 삶에 지친 그대에게 지혜와 용기를, 위안과 자신감을 선사할 것이다.
33
현실의 객관적인 모습은 변하기 쉽다. 그러나 주관적인 의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행복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형태보다도 의식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세르반테스는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감옥에서도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를 쓸 수 있었다. 그는 갇히고 폐쇄되었다는 외적 환경보다는 의식을 자유롭게 풀어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다.
34
어느 누구도 불행을 피할 수는 없다. 현명한 사람도 어느 정도의 불행은 겪을 수밖에 없다. 불행한 일이 벌어진 후에 ‘다르게 행동했다면 일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야’라고 한탄하면서 후회하지 마라. 후회는 자신을 고문하는 일에 불과하다.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불행을 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35
우리는 대개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나 정신 수양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재물을 얻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쾌락이나 물질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물질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정신적인 자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언제나 순간적이고 육체적이며 시간적으로는 영속성이 없는 향락을 통해 행복을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정신적인 풍부함이나 깊이 있는 지식보다는 자신의 인생에 위안을 줄 수 있는 외부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근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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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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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욕망 - 마르틴 콜랭
제 3 부
무의식적 욕망
- 무의식적 욕망의 구성
의식에서부터 유래하는 욕망의 충동들은 꿈을 꾸게 하는 데 기여하지만, 꿈이 생겨나도록 하는 강한 작용은 다른 곳, 즉 무의식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비유를 써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낮 동안의 사고가 꿈의 기업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업가는 우리가 말하는 관념을 가지며 이관념을 실현시키려는 욕구를 가지지만 자본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그러므로 기업가는 자금을 마련해 주는 부자를 필요로 한다. 꿈을 꾸는 데 없어서는 안될 심리적인 투자를 하는 이 부자는 낮 동안의 사고가 어떠했던지간에 항상 무의식에서 유래된 욕망이다"
프로이트, "꿈의 과학"
"꿈을 유발시키는 바람은 그 바람이 현실적일 때조차도 유아기에서 오는 심층적 인상들에 의해 강화된 것이다. 보통 유아기의 장면은 암시에 의해서만 꿈속에서 분명한 내용으로 표현되며 해석에 의해서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꿈의 해석"
그러므로 욕망의 충동들은 꿈을 꾸는 사람이 의식하는 생활과 관계되므로 알아볼 수가 있지만(프로이트는 이 욕망을 낮 동안의 흔적이라고 부른다)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지니지 못한다. 핵심을 이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아기에 발단을 두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심리적 안정이 요구하는 대로 왜곡되어져 상상의 방법으로써 만족되기를 바란다. 무의식적인 욕망들은 계속 억제를 받아 왔다. 이 억제란, 충동과 관련된 표상들(사고, 영상, 기억들)을 무의식 속에서 쫓아내거나 그대로 간직하는 심리과정으로 정의된다. 정신력은 의식적인 표현에 대립하고 의식의 표현은 자아체계에 있어서 불만의 위험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말에 의하면 무의식은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체계이며 충동을 나타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충동은 한 번 억압되었다 하더라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충동은 표현되고 쾌락을(무의식 체계의 관점에서) 생산해 내기 위해서 꿈의 작업이나 무의식적 메카니즘의 유연성으로 사용한다. 실제로 쾌락은 충동적인 에너지를 배설해 냄으로써 생산된다. 무의식적인 욕망은 반드시(선택적이고 왕성하며 창조적이기까지 한) 기억의 흔적에 관련되어 있다. 이 욕망은 행동에 의해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족의 첫번째 경험에 반사되는 기호들의 배치에 의해 성취되어진다. 성취는 또 표상의 상상 단계에서 실현되어져 그것이 만들어 내는 만족은 환상적 성질은 지니며 실제로 성취된 만족을 다시 되풀이한다. 라깡은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관계를 욕망이 재현시킨다라고 말한다.
기억의 흔적이란 정의는, 사건들이 기억 속에 새겨 넣어지고 정신 현상의 다른 각체계 속에 정리되는 방법을 가리킨다. 이중 어떤 것들은 적절한 상황 속에서 의식적인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나머지는 무의식 속에 숨겨지게 된다. 프로이트가 다음의 문헌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그러한 기억의 영상들이다.
"내적인 욕구로 인해 생긴 흥분은 우리가 내적 변화, 또는 기분 전환의 표현이라고 부르는 운동성 속에서 출구를 찾아내려고 한다. 배가 고픈 어린애는 필사적으로 울어대거나 불안해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부의 욕구로 인해 생긴 흥분은 지속적인 행위에나 반응을 나타내고 순간적인 충격에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란 우리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낯선 간섭을 받은 어린 아이의 예에서) 내적인 흥분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만족을 경험함으로써만 생겨날 수가 있다. 이러한 경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억의 영상이 욕구를 자극하는 기억의 흔적과 연관될 어떤 지각작용(위의 예에서는 음식물이 해당된다)이 있다는 점이다. 욕구가 느껴지자마자 이미 맺어진 관계에 의해 심리적 충동이 일어나 기억 속에다 이러한 지각작용에 의해 기억된 영상들을 새로이 집어 넣으며, 또한 지각작용 자체도 새로이 유발시킨다. 이는 즉 첫번째로 맛본 만족의 상황을 다시 재현시킨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운동이다. 지각작용이 투자한 모든 것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지름길이 된다. 이러한 지름길이 실제로 답파되도 그 결과 욕망이 환각 상태에 도달하게 되어지는 심리기관의 최초의 상태에 대해 가정하지 못할 이유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최초의 심리적 활동은 지각작용의 일치를 목표로 삼는다. 이는 다시 말해서 지각작용의 반복을 목표로 하며 여기에 욕구에 대한 충족이 연관된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무의식의 체계는 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욕망이란 꿈에서 나타나는 유일하며 충동적인 정신력이다. 하지만 욕망이 단지 꿈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인 욕망의 충동은 낮 동안에도 역시 분명하게 나타나곤 한다. 강박관념과 같은 전이현상은 우리에게 그것들이 전의식을 통해 의식과 자발적인 운동성에까지 힘껏 파고들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꿈은 우리에게 무의식과 전의식간의 검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고, 따라서 우리는 이 검열을 재인식하고 그것을 우리의 정신건강을 지켜 주는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 하지만 이 수호자가 밤 동안에 경계를 소홀히 하여 무의식 속에 억압된 충동이 표출되도록 내버려 두거나 환각적 퇴보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감시검열관이 잠을 자러 가 버릴 때(우리는 이 감시검열관이 깊이 잠들지 않는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 그는 움직임으로 통하는 문을 닫기 때문이다. 보통 때엔 억제된 무의식으로부터 발생된 충동은 무대 위를 왔다갔다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다. 그러한 충동들은 무해하다. 왜냐하면 충동은 유일하게 외부세계를 변하게 할 모터기를 작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잠자는 상태는 수호해야 할 요새의 안전을 보장한다. 비판적 검열이 밤에는 허술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검열이 비정상적으로 쇠약해지거나 무의식의 선동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됨에 의해서 전의식은 포위되고 운동성으로 나아가는 문들은 열려져 힘의 변동이 나타날 경우에만 위험이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충동적인 움직임은 다름 아닌 욕망의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신체계내에 이러한 충동들이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 욕망의 움직임
충동은 언제나 만족되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충동이 그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충동의 대상 속에서이다. 충동에 비해 대상은 변수적인 요소이다. 무의식 과정의 운동성은 충동이 지닌 힘이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갈 수 있도록 한다. 충동이 대상에 대해 특별히 밀착해 있는 관계를 병적 집착이라고 부른다. 육체적 흥분에다 근원을 두는 어떤 에너지 속에 들어 있는 충동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충동은 자신을 선동시키는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는 외부세계의 대상이나 혹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의 도움으로 달성된다.
"이를테면 갓난아기에게 있어 구강점액분비 단계에서 보이는 흥분은 젖을 빠는 방법으로 이 흥분을 해소시키기 위해 젖을 찾도록 자극하거나 대신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빨도록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충동의 개념을 심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개념적 경계로 정의 내린다. 사실상 육체적인 흥분은 충동 속에서 반드시 심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우리는 단지 전형적인 표본에 의해서만 충동을 인식한다. 결국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은 무효화되고 만다. 이러한 개정은 기본이 된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볼 때,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욕망을 지배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정신구조를 나타내고 그의 건전함이나 신경쇠약을 유인해 내는 것은 충동의 심리적 표현들간의 관계이며 이것들의 체계화이고 자아와 이 체계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렇게 매우 복잡한 조직은 정신생활의 발동기인 무의식적인 욕망으로 연결된다.
욕망과 상상의 세계
본래 만족감의 경험은 기억력의 흔적을 통해 환각적 형태로 다시 튀어 오른다. 즉, 꿈에서 마치 실재의 사건인 양 경험되어진다. 쾌락은 꿈에서 표상되어지지만 실제로는 이와 동시에 억압된 요소를 방출하려는 충동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욕망의 상상적 만족이 반드시 실제적 만족의 경험에 고정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상상 속에서의 만족은 다른 사람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에 의한 경험을 재현할 수도 있어 이 경험에다 우리를 일치시킨다. 이러한 상상 속에서의 재현은 충동적 목표를 실현시키므로 쾌락을 느끼게 해준다. 위와 같이 되기 위하여 충동은 방어의 강력한 메카니즘을 이용하는 자아의 금지와 타협한다. 대상을 바꾸는 것은 욕망의 술책 중의 하나이다. 욕망의 대상은 욕망의 이유가 되지 못하며, 결국 무의식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어떠한 특정 대상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무의식적 욕망의 만족은 얼마든지 그 구실을 바꾸어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은 그의 심상이나, 혹은 그 대상과 관계를 갖는 상징적 대리체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이러한 기호들이 참조하는 것은 결국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이란 가공의 구조 속의 한 요소인 것이다.
실제로 욕망은 우연히 얻어진 환상이 아니며, 환상은 개인의 정신체계 속에 분리되어진 요소가 아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전체에서 체계의 개념을 강조한다. 그런데 체계내에 있는 요소 각각은 단지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기능을 갖는다. 환상은 주체가 존재하며, 그가 금지의 과정에 의해 다소 왜곡된 방법으로 무의식적 욕망을 성취시키는 상상 속의 시나리오로 정의된다. 욕망은 환상에 의해 실현되며 환상의 언저리에서 조직되어져, 환상은 욕망이 알아보기 힘든 형태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변형 중의 하나가 반대되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충동의 능동적인 목표는 수동적인 것으로 바뀌어 표현된다. 이를테면 남을 괴롭히거나 쳐다보고 싶어하는 것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관찰 당하는 것으로 대신되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은 욕망과 이 욕망을 상상에서만 충족시켜야 한다고 규제하는 금기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욕망 자체는 모호한 상태로 결정되어지는데, 이는 욕망에게 표시를 남기고 욕망이 자리 없는 존재, 즉 억제되는 존재가 되게 하며 자신의 능력과 기만에다 욕망을 바치는 질서구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떠한 욕망을 존재하게 하며, 이 욕망을 완곡한 방법을 써서 상상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금기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전체 정신생활은 적절한 역동성과 시간성에 따라 그의 내용을 개조하고 새로운 것을 포함시키는 환상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결론
욕망은 결핍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결핍이고, 욕망의 대상은 결핍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욕망을 어떤 대상을 차지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라깡은 욕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모든 경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욕망은 딱히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욕망이다. 또한 동시에 모든 활기의 근원이 되는 것도 이 욕망이다"
라깡, "세미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병합된 문화나 타인과의 일반적 관계를 일컫는다. 인간은 때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서 다른 사람에게 결핍된 것이 되고자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이 인간 속에서 말을 하며 하나의 기호체계로 조직되는 것이다. 욕망의 디딤돌인 주체는 통일된 주체나 압축된 나인 존재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 야기된 주체의 분열인 존재 열망이다"
라깡, "분석집"
욕망을 느끼도록 선동하고 이를 구성하는 것이 질서 상태라면 어떻게 해서 욕망을 질서 상태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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