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2호 2023.6.04 일요일 (음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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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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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여행을 하고 싶어들 하지만 조심할 것. 인구가 이대로 증가하다가는 우주여행에서 돌아와 보면 다른 사람한테 자리를 뺐겼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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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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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장단음
햇병아리 아나운서 시절,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선배에게 불려갔다. “새집과 새:집이 어떻게 다르지요?” “네? 그러니까 그게…” 잘못을 하긴 한 것 같은데 감이 오질 않았다. 얘기인즉슨 내가 변진섭의 노래 ‘새:들처럼’을 ‘새들처럼’으로 잘못 소개했다는 것이었다. 새집은 ‘new house’, ‘새:집’은 ‘bird’s house’ 가 된다.
우리말에는 소리의 길고 짧음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말이 많다. 캄캄한 밤에 밤:을 먹었다. 눈:이 내려 눈에 들어갔다. 벌:집을 건드려 벌을 섰다. 한:눈을 파니까 한눈에 못 알아보지.
한자어의 경우 장단음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말은 셀 수없이 많다. 일부러 불을 지르는 방:화(放火)와 불을 막는 방화(防火)는 다르다. 어른을 뜻하는 성인(成人)은 단음이지만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聖人)은 장음이다. 집을 뜻하는 가정(家庭)은 짧지만 가:정법(假定法)의 가정은 길다. 경제용어인 선물지수의 선물(先物)은 짧고 남에게 주는 선:물(膳物)은 길다. 강원도 영동(嶺東)과 충북 영:동(永同), 전라도 광주(光州)와 경기도 광:주(廣州)는 장단음이 아니면 얼른 구별하기 쉽지 않다.
영어가 강세의 언어라면 우리말은 장단의 언어이다. 문맥으로 파악하면 될 것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젊은 세대일수록 장음을 단음으로 발음하는 경향도 뚜렷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말은 장단음을 지킬 때 뜻이 더욱 잘 전달될 뿐 아니라 말의 운율이 살아나 품위 있고 아름답게 들린다.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찾아보면 좋겠다.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 세상 아닌가.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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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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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 한용운
나는 서투른 화가(畵家)여요.
잠 아니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破怯)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이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敍情詩人)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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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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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8. 서역으로 가는 비단길(장건)
흉노 공략을 발단으로 한나라와 서방 제국과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 때 서방의 길을 개척한 것이 장건이다. 한나라의 하급 관리에 불과했던 장건은 흉노족에게 사로잡혀 있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귀중한 자료를 모아 후에 본국으로 들고 왔다. 이 보고 자료에 의해서 무제의 세계를 향한 꿈은 피어났고, 그 꿈은 차례차례로 장건의 후계자를 낳았다. 그러나 이 후계자들의 실태는 어떠했는가?
13년 만에 귀국한 장건
서방에 관한 지식은 장건에 의해 처음으로 전해졌다. 장건은 한중 지방 출신으로 낭(하급 관리)이 된 인물이다. 당시 무제는 흉노의 투항자들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흉노는 월지의 왕을 쳐부수고 그 왕의 두 개골로 술잔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월지는 서쪽으로 도주했으며, 흉노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적개심과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나, 협력해서 흉노를 공격할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때마침 흉노를 격멸하고자 기도하고 있던 한나라 조정에서도 이 정보를 바탕으로 월지와 손을 잡기 위해서 사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나라와 월지 중간에는 흉노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사자는 흉노의 세력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그 중임을 완수할 인물을 모집하기로 했다. 이때 스스로 응모해 월지로 가는 사자로 발탁되었던 사람이 바로 장건이었다. 사자가 된 장건은 흉노인 감보라는 사람을 데리고 출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행은 영내를 통과하다 잡혀서, 선우에게 압송되게 되었다. 선우는 장건을 구속하고 이렇게 문책했다.
"월지국이라면 우리 나라보다도 북쪽에 있지 않은가. 네가 월지에 도착할 길은 없다. 가령 내가 월나라로 사자를 보냈다면 한나라에서 잠자코 보내 주겠는가."
이리하여 장건은 흉노에 의해 10여 년간 갇혀 살면서, 거기에서 아내도 얻고 아이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나라 사자임을 나타내는 황제는 부절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었다. 흉노에서 오래 살게 됨에 따라 장건은 서서히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드디어는 야음을 틈타서 일행을 데리고 월지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일행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걸어서 수십 일 후에 대원 지역(중앙 아시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대원은 한나라의 강력한 힘과 풍부한 물자 소식을 전해 듣고 전부터 한나라와의 통상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원에서는 장건 일동의 도착을 환영했다. 그리고는 대원의 왕이 장건에게 물었다.
"우리 나라에 잘 와 주셨소. 그래, 일행은 대체 어디까지 가실 예정이오."
이에 장건은 말했다.
"우리들은 한나라를 받들고 월지로 가는 길입니다. 불행히도 흉노에게 잡히어 뜻하지 않게 세월을 허송하다가 겨우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왕이시여, 저를 월지까지 보내 주실 분이 계시다면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제가 월지로 갔다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나라는 대왕에게 엄청난 예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장건 일행에게 안내와 통역을 붙여서 보내 주었다. 일행은 우선 강거(키르키즈 지방)에 도착했고, 이어서 강거 지방 주민의 도움으로 대월지 (우즈베크 지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에게 있어 한나라는 너무도 멀었다. 그러므로 협력해서 흉노를 보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행은 이 나라에서 1년 남짓 머문 끝에 귀로에 올라 강족의 영토를 통과할 무렵 또다시 흉노에게 잡혔다. 그런데 이 땅에서 거의 1년 동안 머무는 중에 선우가 죽고 좌곡려 왕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서 장건과 흉노인 아내는 한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드디어 조국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어 장건은 귀국할 수 있었다. 한나라 왕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장건 일행을 환영하고 장건은 태중대부로 승진하였다.
장건은 체력이 좋고 관대하여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 인품의 덕으로 그는 이국 사람에게도 호감을 샀다. 또한 감보는 흉노 출신으로 궁술에 능하여 식량이 떨어졌을 때에는 짐승을 잡아서 굶주림을 면했다. 한나라를 출발할 때, 장건 일행은 백 명 이상이나 되는 부대였으나 13년이 지나서 귀환한 자는 이 두 사람뿐이었다.
해를 따라 서쪽으로
장건이 실제로 발을 들여놓은 나라는 대원, 대월지, 대하, 강거의 네 나라이고, 정보를 가져온 주변국들만도 5, 6개국이나 된다. 그들은 이런 나라에 대해서 황제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대원은 흉노의 서남방, 한의 서쪽에 위치하며 거리는 1만 리쯤이나 됩니다. 그 땅에 인간이 정주하여 농경에 종사하며 벼와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듭니다. 또한 품종이 좋은 말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피땀을 흘리므로 선조는 천마의 아들이라 합니다. 도시마다 성곽을 쌓고 가옥에서 삽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합쳐 70여 성, 인구는 넉넉히 수십 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무기로는 활이나 창을 사용하며 기마전에 능합니다.
대원의 북쪽은 강거, 서쪽은 대월지, 서남쪽은 대하, 동북쪽은 오손, 동쪽은 한미, 우전입니다. 우전 서쪽 지대에서는 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아랄해)로 가고 동쪽으로는 동류하여 염택으로 갑니다. 오손은 대원에서 동북으로 2천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 풍습은 흉노와 같으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여 살지 않고 가축을 따라 이동합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수만 명으로 모두 용감히 싸웁니다. 이전에는 흉노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그 후 세력이 왕성해지더니 현재는 명목상으로만 흉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을 뿐 흉노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월지는 대원에서 서쪽으로 2, 3천 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대하, 서쪽으로는 안식, 북쪽으로는 강거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 민족으로 생활 양식은 흉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대충 20만 가량 될 것입니다. 이전에 강력했던 시기에는 흉노마저도 우습게 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흉노에서 묵특선우가 나타나서 월지를 격파하고, 또한 그 다음에 즉위한 노상선우는 월지왕을 죽여서 그 두 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월지의 생활권은 돈황, 기련산 일대였으나, 흉노와의 일련의 항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그곳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원 땅을 통과하여 서방의 대하를 공격, 그곳을 점령하고 규수 북쪽에다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 중에서 채 도망가지 못한 나머지 무리들은 기련산에 있는 강족의 거주지로 들어가 소월지라 칭하고 있습니다.
안식국은 대월지에서 서쪽으로 수천 리쯤 떨어진 데 있습니다. 안식 사람들은 정착해서 농경을 영위하며 벼,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성벽을 둘러쌓아 도시를 갖춘 것은 대원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아울러 수백 성에 달하고 면적은 수천 리 사방에 이르는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라는 강에 접하고 있으며, 교역 시장이 서고, 사람들은 수레와 배를 함께 활용하여 인근 제국뿐 아니라 때로는 수천 리 먼 나라와도 흥정을 합니다.
은으로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고 있고, 화폐 문양으로는 그때그때 왕의 초상을 사용합니다. 왕이 죽을 때마다 화폐를 다시 찍고 왕의 초상도 바꿉니다. 글을 쓰는 데는 약간 딱딱한 가죽을 사용하며 거기에다 문자는 옆으로 늘어놓습니다. 대하는 대원에서 서남쪽으로 2천여 리, 규수의 남쪽에 위치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착해서 성곽, 가옥을 갖추는 것이 대원의 경우와 거의 같습니다. 왕 한 사람이 전권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각 도시별로 영주가 분립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투력은 약하며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그 반면에 상업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서쪽으로 이동해 온 대월지에게 격파되어 완전히 예속되어 있지만 백여만이라는 풍부한 인구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중심 도시는 남시성이며 교역 시장에서는 가지각색의 물자들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대하 동남쪽에는 신독국(인도)이 있습니다."
황제의 꿈
장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제가 대하에 있을 무렵, 공나라의 죽장과 촉나라의 직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장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 본 즉,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네 상인들이 신독국(인도)에 가서 그곳 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신독은 대하에서 동남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라로, 정착 생활을 영위하는 점은 대하와 거의 차이가 없지만 습기가 많고 덥다 합니다. 이 나라는 큰 강에 임하고 있으며 코끼리가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타고 싸움을 합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대하는 한나라에서 1만 2천 리요, 방향은 서남쪽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신독국은 대하에서 동남방 수천 리 밖에 위치하고 촉나라 산물이 유통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촉땅에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하로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강족땅을 통과하기는 길도 험할 뿐 아니라 주민의 환영도 못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약간 북쪽 길을 택하면 흉노에게 잡히게 됩니다. 이상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대하로 가기 위해서는 촉땅에서 출발하는 것이 거리도 짧고 방해받을 염려도 없을까 싶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무제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폈다.
'대원, 대하, 인식 등의 여러 나라는 모두 진귀한 산물도 많으며 정착해서 농사짓는 것도 중국 본토와 비슷하다. 그런데 군사력을 약하고 한나라 물자에 대한 욕구는 강하다. 더구나 이런 나라들의 북쪽에 위치한 대월지나 강거 같은 나라들은 군사력은 강하지만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한나라가 힘으로서가 아니라 계통을 밟아 이들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킬 수만 있다면 한나라 영토는 만 리 밖의 저쪽 끝까지 확대되고, 한나라 언어는 아홉 번이나 통역을 겪으면서 풍속이 다른 민족을 통일시킨다. 그렇게 되면 나의 권위는 이 세상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한 무제는 장건의 보고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장건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 대하고 가는 4개의 통로를 정하여 밀사를 내보내도록 하였다. 밀사는 모두가 천 리에서 2천 리쯤 전진했으나 그 가운데서 북쪽으로 향해 간 자는 저족, 작족에게 길이 막히고, 남쪽으로 간 자는 쉬주, 곤명 일대에서 앞길이 막혔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서방으로 1천 리 남짓 떨어진 곳에 코끼리를 사용하는 나라가 있는데 전월국이라 불리운다는 것과 이곳에는 촉나라 밀무역상들이 왕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는 이렇게 대하국과의 통로를 탐색하는 동안 처음으로 전월국과 통상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이전에도 서남 방면의 이민족과 통상을 시도했으나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도 통로가 발견되지 않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건의 '대하국과의 통상은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고 한나라는 다시 서남쪽 이민족과의 교섭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건, 다시 떠나다
한때 장건은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의 흉노 토벌에 참가했다. 그때 토벌군은 장건의 안내로 물과 풀이 있는 장소를 따라 전진했으므로 물과 말 사료의 공급에 곤란을 받지 않았다. 장건은 이 공으로 박망후의 칭호를 받았다. 기원전 123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 장건은 이광 장군과 더불어 흉노 토벌을 위해 또다시 출격했다. 이 토벌에서 이광 장군은 흉노의 포위망에 갇히어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 그때 장건이 이광 장군과 합류할 날짜에 도착하지를 못한 것이 패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처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한나라는 표기 장군 곽거병을 파견하여 서역 지대에서 수만 명의 흉노군을 격파하고 기련산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혼야왕이 부족민을 거느리고 한으로 하옥해 왔기 때문에 금성과 하서의 서쪽으로 남산을 따라 염택에 이르는 일대에서는 흉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흉노측은 이따금씩 척후병을 내보냈으나 그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2년 후 한나라는 또다시 선우를 공격하여 사막의 북쪽으로 쫓아 버렸다. 무제는 그 후에도 대하 등의 외국 사정에 대해 장건에게 묻는 때가 종종 있었다.
"제가 흉노 땅에 있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손에는 현재 곤막이라고 하는 왕이 있습니다. 곤막의 아버지 때에는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그때에 흉노가 이 땅을 침략하여 그 부친을 죽이고,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곤막을 들판에다 버렸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고기를 물어 아기에게 날라 주며 늑대가 찾아와서 젖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선우는, '신기한 일도 다 있구나, 필경 신의 아들일 것이다'하고 아기를 주워다 길렀습니다. 성장한 곤막은 군대를 잘 다루고 번번이 공을 세웠으므로 선우는 오손의 옛 부족민을 곤막의 지휘하에 넣고 서역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곤막은 부족의 경제력 향상에 힘을 기울이며 주변 부락을 습격하고 수만의 병사를 양성해서 거의 매일 침략전을 전개했습니다. 선우가 죽은 것을 기회로 곤막은 수하 부족을 이끌고 멀리 딴 곳으로 이동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흉노에 대한 조공을 거절했습니다. 흉노측에서는 유격대를 자주 내보냈으나 결국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곤막은 역시 신의 아들이라고 공격을 중단하여 명목상의 속국으로 방치하였으나 내심으로 흉노는 대대적인 공격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정세로 보건대, 선우는 한나라의 새로운 사족을 못쓰는 형편이니, 지금이야말로 오손에게 마음껏 선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손족을 혼야왕의 옛 땅에 거주시켜 우리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오손을 이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흉노의 바른 팔을 떼어 버리는 결과가 되며, 게다가 한번 오손과의 연합이 성립된다면 오손의 서쪽에서 대하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들을 모조리 길들여 속국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무제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장건을 중랑장에 임명하고 3백의 인원을 주었다.말은 한 사람에 두 마리씩, 소와 양은 만 단위의 숫자였다. 여기에 수천만 금에 해당하는 폐백을 들려 황제의 친서를 지닌 부사를 다수 수행시켰다.
요령부득
그 뒤 장건은 드디어 오손에 닿았다. 그런데 오손왕 곤막은 한나라 사자를 거만한 태도로 맞았다. 장건은 불끈 화가 났으나 그들이 한나라 물건에 대해서는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말했다.
"이것은 황공하옵게도 천자께서 보내신 물자이니 만일 왕께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으시다면 도로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곤막은 일어나서 사물을 경건히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에는 여전히 오만한 태도였다. 장건은 곤막을 설득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오손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혼야왕의 옛 영토를 소유 할 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면 우리 한나라는 옹주(제왕의 딸)를 왕의 부인으로 내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손의 내부는 이미 분열 상태에 있었고 왕도 노경에 이르고 있었다. 게다가 한나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멀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흉노에 대해서는 너무 오랫동안 속국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심이 발동하여 한에 접근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신들이 모조리 반대했다. 그리하여 왕도 이를 반대하여 단독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건은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요령을 알 수 없었다.(요령부득) 당시 곤막에게는 10명 안팎의 아들이 있고 가운데 아들이 대록이었다. 그는 강건하고 통솔력이 있으며 1만여 기를 거느리고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대록의 형이 오손의 태자였는데, 태자에게는 잠취라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으나 태자 자신은 젊어서 죽었다. 태자는 죽을 때 아버지 곤막에게 뒷일을 맡겼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취를 태자로 삼아 주십시오. 절대로 딴 사람을 태자로 삼지 마시옵소서."
곤막은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여 잠취를 태자에 봉했다. 그러나 대록은 노했다. 그 자리는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아우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하고 조카인 잠취와 아버지 곤막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곤막은 늙기도 했으려니와 평소부터 대록이 잠취를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취에게도 1만여 기를 주어 거주지를 이동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곤막 자신도 1만여 기를 가지고 스스로 방위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국민은 세 갈래로 분열하게 되었고, 곤막은 그저 명목상으로만 통솔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곤막으로서도 이런 배경이 있었으므로 장건과의 약정을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뒤 할 수 없이 장건은 같이 온 부사를 주변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 파견하고 자신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곤막은 길잡이와 통역을 딸려 장건의 귀로를 전송했다. 장건은 오손의 사자 수십 명과 답례로 받은 말 수십 두를 대동하고 돌아와서 그들에게 한나라의 국력을 과시했다. 장건은 이번의 큰 일을 완수한 공으로 9경에 끼었다. 그리고는 1년쯤 후에 장건은 죽었다. 장건을 따라 한나라에 왔던 오손의 사자는 한나라 인구의 풍부함과 왕성한 경제 활동을 상세히 관찰하고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다. 오손에선 그 말을 듣고 한나라를 중시하게 되었다. 다시 1년쯤 지나자 대하를 위시한 여러 나라에 사자로 갔던 장건의 부하들이 모두가 원지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로써 서북 여러 나라들과 한나라와의 교통이 열리게 되었다. 장건 이후의 사자들은 모두 박망후 장건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상대국에 대한 성의를 증명했고, 상대국 또한 이로써 한의 사절을 신용했던 것이다.
명마를 좋아하는 황제
박망후 장건이 죽은 뒤, 오손이 한과 교통하기 시작했음을 안 흉노는 화를 내며 오손 공격을 계획했다. 때마침 오손에 파견된 한나라 사자 가운데는 남쪽으로 진출하여 대원, 대월지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 후부터는 이 통로를 왕래하는 자가 잇따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흉노의 보복을 두려워한 오손은 사자를 한나라에 파견해서 말을 헌상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옹주를 부인으로 삼고 동맹국의 우의를 맺겠다고 청원했다. 무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했다.
"우선 약혼 예물을 받으신 다음에 옹주를 보내시도록 하시는 게 좋은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무제는 주역을 풀어 점을 치니, "신마가 서북방으로부터 찾아올 것이다."하는 괘를 얻었다. 그러는 중에 오손의 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었으므로 '천마'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피땀을 흘리는 대원의 말(한혈마)을 얻고 또 그것이 한층 더 좋은 말이었으므로 오손의 말은 '서극'이라 개명하고 대원 말을 '천마'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은 서쪽에 처음으로 성을 쌓고 또한 주천군을 새로이 설치하여 서북 제국과의 무역 근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한나라는 안식, 엄채, 여헌, 조지, 신독국으로 빈번이 사자를 내보내게 되었다. 더구나 무제가 대원의 말을 좋아하여 사신을 자주 왕래시키는 바람에 선발대와 후발대의 간격이 좁혀져 도중에서 서로 만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외국으로 향하는 여러 가지 사자는 큰 부대는 수백 명, 작은 부대라도 백여 명이며, 휴대하는 물자는 박망후가 갈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 후 행사가 관례화함에 따라 인원은 줄어 갔다. 한나라가 1년간에 내보내는 사자는 대강 10여 차례, 적을 때에도 5, 6차례는 되었으며 그들은 먼 나라인 경우는 7, 8년씩 걸렸고 가까운 경우에는 수년 만에 귀국했다.
견물생심의 건달들
장건이 외국과의 통로를 개발한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그를 수행했던 관리들은 서로 다투어 외국의 진귀한 산물이나 무역 통상의 이익을 들먹이며 사자로 갈 것을 지원하고 나섰다. 무제는 이런 나라들이 보통 사람들이 가고자 원하는 곳이 아니므로 그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허락하고 이들에게 부절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관리와 민간인 가운데서 강력을 불문하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사절의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사자의 자격 기준을 넓힌 것이다. 그 결과 원래의 사명을 완수하기는커녕 도중에서 답례품을 착복하고 사라지는 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무제는 이 무리들이 외국 사정에 정통해 있다는 점을 평가해 행적을 상세히 조사하고는 중죄에 처한 후, 속죄할 기회를 준다는 이유로 다시 사자를 지원하도록 했다. 주변국과의 교통이 활발해질수록 사자가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늘고, 한편 태연히 위법 행위를 행하는 자도 늘었다. 수행하던 하급 관리들도 타국의 산물과 풍습을 자꾸 선전했다. 이에 대해서 조정은 허풍을 떠는 자는 정사로 임명하고 소극적인 자는 부사로 발탁했으니, 허풍 떠는 자나 건달들이 모두 사자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사자가 된 자들은 예의 없이 빈곤한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물건을 횡령하고 이것을 싸게 팔아서 외국 무역의 이익을 얻는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국들도 한나라의 사자들이 하는 말이 각각 다른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여기까지 군대가 오지는 못하리라 판단하여, 식량의 공급을 하지 않아 사자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한나라 사신끼리 식량에 궁한 나머지 서로 공격하는 추대를 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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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지리(漁父之利)
고기 잡을 어. 父 아비 부. 之 갈 지(…의) 利 이로울 리.
[동의어] 어부지리(漁父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견토지쟁, 전부지공(田不之功),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출전]《戰國策》〈燕策〉
어부의 이득이라는 뜻으로, 쌍방이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을 챙긴다는 말.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燕)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연나라 소왕(昭王)은 종횡가(縱橫家)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온 소대(蘇代)에게 혜문왕을 설득해 주도록 부탁했다. 조나라에 도착한 소대는 세 치의 혀 하나로 합종책(合縱策)을 펴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했다.
“오늘 귀국에 돌아오는 길에 역수(易水:연/조와 국경을 이루는 강)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蚌蛤(방합)]가 조가비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鷸(휼)]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 사납게 이곳을 지나가던 어부에게 그만 둘 다 잡혀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이옵니다. 연/조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疲弊)케 한다면, 귀국과 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秦)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이옵니다.”
혜문왕도 명신으로 이름난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를 중용했던 현명한 왕인 만큼, 소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과연 옳은 말이오.”
이리하여 혜문왕은 당장 침공 계획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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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밤이면 밤마다
결혼 10년째인 줍 애청자입니다. 제 남편 잠꼬대 애기를 해 볼까 합니다. 결혼 후 1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죠. 자다보니 분위기가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제 신랑이 낑낑대며 장롱을 밀고 있는 겁니다.
“자기야, 왜 그래?”
“응, 벽이 무너져서. 장롱이 쓰러진다. 빨리 와서 받쳐!”
순간 이게 웬 날벼락인가. 아직 혼인신고도 안했으니 이서방네 족보에도 못 오르고, 법적으로 처녀이지 난 처녀귀신이 되는 게 아닌가? 그 짧은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하며 벌떡 일어나 장롱을 밀었죠. 그러나 제 남편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게 아닙니까? 전 살그머니 장롱에서 손을 떼봤죠. 무너지기는커녕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유를 물었으나 기억을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남편의 첫 잠꼬대 목격입니다. 그후로도 남편의 잠꼬대는 계속됐죠. 이제 몇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자다가 이상해서 눈을 뜨면 항상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느날 쥐를 잡겠다고 휴지통이나 베게를 냅다 던집니다. 그것도 그냥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낮은 포복자세로 한눈을 지그시 감고, 다른 눈은 어느 한쪽을 향해 노려보다가 수류탄 던지듯이 던지는 겁니다. 또 어느 날은 주방이며 화장실, 작은 방까지 불을 켜고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한 손은 조용히 하라는 듯이 입에 갖다 대고 살금살금 살핍니다. 이유인즉,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는 거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꿈을 꿀 당시에는 물어보면 다 얘기를 해줍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물어보면 기억을 전혀 못하는 겁니다. 지난 봄에는 강원도로 야유회를 가 적이 있습니다. 남편을 배웅하며 잠꼬대를 조심하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죠. 그러나 그 버릇 남 안주더군요. 일행 중 한명이 자다가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제 남편이 바로 자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주먹을 불끈 쥔 채 두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더랍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그머니 돌아누워서 자는 척했더니 제 남편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코까지 골며 자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 몇 번을 망설이다가 제 남편에게 어젯밤 행동에 대해 물었으나 기억을 할 리가 없죠. 그날 밤, 이 소문이 퍼져 서로들 제 남편과는 동침을 꺼려 혼자서 편히 잤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자다 말고 애들방으로 뛰어가더니 작은 애를 안고 안방으로 다시 오더군요.
“아니 왜 그래?” 울지도 않는데...?”
“응, 불이 났어. 큰 불이 났어.”
또 잠꼬대 시작이구나 싶어 장단 좀 맞췄지요.
“그래, 큰일이네. 지혜는?”
“안되겠다. 불길이 너무 거세게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
그러더니 남편은 다시 잠을 청하는 겁니다.
다음날 아침.
“꿈속에서도 남녀 차별하는 거야? 구하려면 큰 애부터 데리고 와야지 그게 뭐야?”
그러나 남편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던군요. 한번은 TV를 보고 있는데 소파에 누워 있던 남편이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갑자기 기계체조 선수처럼 몸을 홱 돌려 거실 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지더군요. 또 무슨 꿈을 꾸나 싶어 보고만 있었죠. 그랬더니 벌떡 일어나 소파 틈새로 손을 넣어 뭔가를 찾더군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소파를 벽에서 거실 가운데로 끌어내는 겁니다. 저러다가 아마 소파를 들어 올리려고 할저도 모르겠다 싶어 말했죠.
“왜 그래 또?”
“응, 큰 뱀장어야. 이 속으로 들어갔는데 잡았다가 놓쳤어.”
그러고는 계속해서 수색을 하는 겁니다.
“그래? 야 크네. 알았어. 이제 그만 자자.”
저는 남편을 달래서 재웠죠. 또한 남편은 낮에 있었던 일을 밤에 잠꼬대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이 고스톱을 했는지 포커를 했는지 일이 잘 풀리는지 안 풀리는지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죠. 더구나 잠이 들었을 때 굼금한 것을 물어보면 다 대답을 합니다. 이러니 제 남편은 제 손바닥 안에 있을 수밖에요. 며칠 전 추석 때의 일입니다. 저희 친정에는 저를 포함해서 1명의 아들과 7명의 딸들이 있습니다. 아래로 셋만 미혼이고 위로 다섯은 결혼을 했죠. 명절날은 각자가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오후가 되면 친정으로 다들 모입니다. 20여 명이 넘게 말입니다. 낮에는 남자들은 집 앞 냇가에 가서 낚시를 해서 저녁에 붕어찜이랑 매운탕을 해서 술자리가 벌어졌습니다.
잠잘 때가 문제였죠. 남편의 잠꼬대 버릇을 아는지라 저희 부부와 얘들, 그리고 친정부모님이 안방에서 잤죠. 설픈 잠이 들었을 무렵입니다.
“야, 빨리 벌려봐. 이것 봐라 무척 크지? 이렇게 큰 것은 처음 본다.”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눈을 떠보니 제 남편 그림자가 창쪽에서 주무시고 계신 친정 엄마 옆자리에 앉아 있는게 아닙니까?
“자기야, 나 여기 있어. 이쪽으로 와. 왜 거기서 그래?”
그랬더니 남편은 “빨리 벌리라니까. 이것 봐 정말 크지?”
기가 막히더군요. 그러나 용기를 내서 불을 켰죠. 남편은 한손에는 파리채를 다른 한손엔 베개를 들고 있는 겁니다.
“왜 그래?”
“응, 이것 봐 크지? 월척이야. 이렇게 큰 것을 낚시로 잡았어. 어망 빨리 벌리라니까.”
전 이불을 탁탁 쳐서 펴놓고 말했죠.
“자 여기 어망에다 담아. 정말 크네.”
그러자 남편은 이불 위에 베개를 놓더니 이불을 오므려 물에 담가놓듯 살그머니 던지는 겁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 친정에는 웃음꽃이 피었죠. 잠꼬대도 유전인가요? 제 아들과 딸애도 잠꼬대가 너무 심해요. 잠꼬대 광경을 카메라로 찍으면 코미디 영화 한편의 흥행작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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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4장 올림포스 신 시대 및 그 외 신들
11. 코토스
코토스(Cottus)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로 50개의 머리와 100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헤카톤케이레스(백수거인족)의 한 명으로 규게스, 브리아레오스와 형제간이다.
카이오스
카이오스(Caeus, Coeus)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로 포이베와 결혼하여 레토와 아스테리아를 낳았으며,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는 트로이젠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휴페리온
휴페리온(Hyperion)은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테이아와 결혼하여 아우로라(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낳았다. 그를 태양신 헬리오스로 표현하기도 한다.
므네모슈네
므네모슈네(Mnemosyne)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로, 목동으로 변장한 제우스와 피에리아에서 아홉 밤을 지내고 1년 후에 아홉 명의 뮤즈를 두었다. 므네모슈네는 기억(memory)이라는 뜻이며, 시에서 뮤즈의 어머니를 메모류(Memory)라고 부른다. 또한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을 받아 마시는 보이오티아의 샘물을 므네모슈네라고도 하였다.
호라이
호라이(Herae)는 봄, 여름 및 겨울의 계절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다.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에우모니아(질서), 디케(정의) 및 이레네(평화) 3자매가 그들로, 올림포스 신들과 같이 배석하여 모든 것을 성장하게 하고 꽃을 피우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 언제나 환영받고 향연에 초대되었다. 또한 아프로디테의 딸들 혹은 시녀라고 부르는 성 창녀도 호라이라 하는데, 황도 12궁을 도는 시간의 춤을 추며 신들의 산파역을 하고 지상의 호라이(사원 창녀)를 이끌고 성적 비밀 의식에서 남자를 가르쳤다. 고대의 창부들은 높은 지위와 학식으로 존경받았으며 여왕처럼 떠받들어졌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들 세 여신을 탈로(싹틈), 아우코(성장) 및 카르포(수확)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사물의 성장을 관장하는 자연의 3여신으로 추앙하였다. 호라이는 모이라이와 자매간이나 성격이 다르고 우아한 여신으로 꽃과 식물이 있는 들판에 나타났다. 그러나 카리테스나 마찬가지로 신화상 어떤 특이한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다. 후기 우화에서 꽃과 풍요를 상징하는 플로라는 서풍신 제퓨로스의 아내가 되어 카르포스라는 아들을 두었다.
12. 오케아노스
오케아노스(Oceanus)는 강력한 권세를 가진 바다의 신으로 지상과 자하계의 주류를 이루는 강(알페오스, 페네이오스, 스트류몬 등)을 지배하였다. 우라노스와 폰토스 혹은 가이아의 아들이며, 동생 테튜스를 아내로 맞아들여 오케아니데스라 부르는 많은 딸을 두었다. 그 중 하나인 에우류노메는 그녀의 남편 오피온과 함께 크로노스 이전에 티탄족을 지배하였는데 크로노스와 레아에게 밀려나 바다로 도피하였고 천공에서 떨어진 헤파이스토스를 테티스와 함께 구조하여 환대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카리테스와 아소포스를 낳았다 한다. 도 다른 딸 칼리로에는 크류사오르와 결혼하였으며 에키드나, 오르토스 및 케르베로스가 그 소산이라는 설도 있다.
호메로스에 의하면 모든 신의 아버지가 이 오케아노스이며, 자주 신들의 예방을 받는다고 한다. 그는 긴 수염을 가진 노인으로 파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먼 곳으로 항해할 때는 존엄하게 모셔지는 신이다. 거신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어느 쪽에도 관여하지 않아 승리한 신족에게서 원한을 사지 않았고 타르타로스로 밀려나지도 않았다. 주로 육지 주변의 바다의 파도치는 것을 다스렸다.
네레우스
네레우스(Nereus)는 우케아노스와 테튜스의 아들로, 에게해에 사는 바다의 신이다. 여동생 도리스를 아내로 삼고 아름다운 인어(요정) 50명을 두었는데, 이 요정들을 네레이데스라고 부른다. 그는 빨간 머리카락에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대개 그의 딸들이 그를 에워싸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다. 매우 지혜가 뛰어나며 앞일도 잘 예측하는 재능을 가진 그는 에게해 세계의 가장 옛 신으로 모셔졌으며 바다의 이름이 되었다.
13. 푸리아이
푸리아이(Furiae, Furies:에리뉴에스)는 지하계에 있는 정의와 복수의 3여신으로 단수형을 푸류이다. 폰토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데스의 말에 따르면 이들 여신은 말수는 적으나 잔혹하기 이를데 없고 더구나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와 형제나 혈족을 살해한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으며 해의 신도 감히 계도를 어기지 못하였다. 아들 크로노스에게 거세된 우라노스의 피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뉵스와 아케론의 딸, 혹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딸이라고도 한다. 세 딸 중 알렉토는 머리카락 올이 가는 뱀으로 되어 있고 횃불을 지니고 있다. 티시포네는 머리에 뱀을 걸고 곤장을 들고 있으며 인간에게 역병.질병을 가지고 찾아간다. 메가이라는 신들의 심부름으로 인간의 죄를 처벌하는데 질병 중에서도 마음의 병이나 죽음을 가지고 방문한다. 일설에는 지하 명계에서는 푸리아이, 지상에서는 하르피아이, 천상에서는 디라이라고 하며, 주신 제우스 가까이 배위하여 지상의 죄지은 인간에게 가장 혹독한 벌을 주었다. 그리스인은 에리뉴에스라는 이름을 꺼려 부드럽게 에우메니데스라고 불렀다.
파데스
파데스(Fates:모이라이)는 뉵스와 에레보스의 세 딸로 운명의 여신이며, 제우스와 테미스의 딸 혹은 바다 신의 딸들로도 표현되며 로마에서는 파르카이라 하였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이 운명의 여신들에 의하여 전 생애가 결정된다. 세 딸 중 가장 어린 클로토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아기의 운명의 실가닥을 찾아 뽑아내는 여신이다. 둘째인 라케시스는 운명의 행방을 짜는 여신이며, 아트로포스는 검은 복장을 하고 증오의 가위로 가차없이 운명의 실을 잘라 생명을 끊어버리는 여신이다. 헤시오도스 이후에는 노파로 표현되었으며, 그들이 가진 권력은 대단히 막중하고 넓어 최고의 신 제우스조차 그 명령에 따라야 했다. 이들에 대한 신화는 별로 없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철학과 종교적 의미가 함축된 상징 신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이름인 모이라가 원래 분배나 추첨(제비)의 뜻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확물이나 토지의 분배는 이 여신의 입회하에서 이루어졌다. 운명의 여신 위어드(Weird)라고도 한다.
스틱스
스튝스(Styx)는 오케아노스의 딸이자 그녀가 지배하는 지하계의 강 이름이기도 하다. 제우스와 티탄족 간에 벌어진 큰 싸움에서 제우스를 도왔고, 이에 따라 스튝스 강물에 맹세하면 그 누구든 감히 어기지 못하며 제우스도 어길 수 없었다. 유사시대에도 이 강에 맹세하는 행사는 계속되었다. 고대 신앙에서는 스튝스 강을 건너 죽음-재생의 나라에 도착한다고 믿었다. 실존하는 강은 그리 크지 않은 크라티스 강의 지류로 코린토스 만으로 흐르고 있다. 스튝스는 명계의 호화스러운 궁전에 살며 티탄 신족인 팔라스와 결혼하여 크라토스(지배), 비아(폭력), 젤로스(경쟁), 니케(승리)를 낳았다..
스틱스 강에 어린 아들 아킬레우스를 담그는 테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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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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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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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은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지 못한 나만의 독특한 성격이다. 그런 개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힘이라는 열쇠를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사랑은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 사랑의 정열은 어느 누구에게나 잠재적인 형태로 숨어 있고 그 정열이 외부로 드러날 때, 우리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생명의 시발점은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비롯된다. 이러한 사랑 속에서 잉태된 생명의 성격은 두 사람이 만든 정열에 따라 독특하게 발현된다.
23
가장 큰 행복이란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24
강렬한 사랑은 두 사람이 느끼는 사랑의 기준이 일치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상형이 모두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이유로 남자는 자신에게 부족한 특질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선택한다. 이것은 여자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주위에서 정열적인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랑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메꾸어 완벽하게 만들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욕구는 사랑을 할 때 확연하게 드러난다. 자신에게 부족한 특질을 가진 사람을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를 정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도 정열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이성과 감정이 불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나타난다.
25
정열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위대한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열정적인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훌륭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잘 어울리는 감정과 성격으로 서로 이해하고 아낀다고 해도 여기에서 그친다면 정열적인 사랑은 일어나기 힘들다.
26
사랑은 우정과 다르다. 비슷한 감정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에는 정열이 있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정열이 없다면 아무리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생겨날 수 없다. 성격이 서로 어울리지 않더라도 사랑이 성립되는 경우는 정열이 없다면 아무리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생겨날 수 없다. 성격이 서로 어울리지 않더라도 사랑이 성립되는 경우는 정열이 그 두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27
소유를 향한 욕망은 강력한 힘을 낳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성에게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원한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상대방으로부터 거절을 당하면 너무나 큰 좌절을 경험한다. 좌절은 사랑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좌절한 연인은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불행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너무나 깊이 병들게 한다.
28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사랑 다음으로 달콤한 것은 미움이다. 증오는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려 한다면 그 미움은 끝내 풀리지 않는다. 미움은 그 감정을 없앨 때에만 풀리게 된다. 증오의 불씨는 마음 속에서 억누르면 그 증오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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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루어지면 행복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한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넓게 생각하면 인류의 생존과 계승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사랑에 대한 의지는 사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종족에 대한 의지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안겨 주는 감동만큼이나 숭고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환희와 고뇌를 동시에 선물한다. 시인들이 수천 년 동안이나 사랑을 묘사하면서 전혀 싫증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사랑보다 흥미롭고 감각적인 주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가지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당신은 완벽하고 진실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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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의 생존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의 사랑은 성욕이라는 통로를 통해 미래의 후손들과 연결된다. 미래의 후손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찬미라는 구름 안에서 진정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연인에 대한 찬사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그 찬사의 최종적인 목적은 자신의 후손을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것은 연애가 결국은 상대방을 자기 소유로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랑은 다른 사랑에 비해 이기적이며 육체적이다. 이러한 사랑은 타인을 생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기를 앞세우는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이성간의 사랑에는 끊임없는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사랑을 의식하는 것, 내가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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