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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0호 2023.1.3 화요일 (음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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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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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품고 어리석은 자는 남들만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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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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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입
입이 하는 일이 적지 않다. 먹기, 말하기, 노래하기, 숨쉬기, 사랑하기, 토하기. 물어뜯기도!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순간순간 다른 신체 기관과 연결되어야 한다. 입의 이런 역할은 단어를 만들 때도 발자국처럼 따라다닌다. ‘입요기’ ‘입가심’ ‘입걱정’ ‘입덧’ 같은 말은 ‘먹는 입’과 관련이 있다. ‘입바람’ ‘입방귀’는 ‘숨 쉬는 입’과 연결된다. ‘입맞춤’은 당연히 ‘사랑하는 입’이겠고.
인간은 말하는 기계인지라, ‘입’이 들어간 단어에는 ‘말하기’와 관련된 게 많다. 입단속이야말로 평화의 지름길이란 마음으로 ‘말하는 입’ 얘기를 중얼거린다.
아침 댓바람부터 입담 센 몽룡과 입놀림 가벼운 춘향이 입방아를 찧는다. 서로 꿍짝이 맞아 입씨름 한번 없이 하나가 떠들면 하나는 “오호! 그래?” 하며 입장단을 맞춘다. 두 사람의 입길에 오르면 멀쩡한 사람도 순식간에 몹쓸 사람이 되어 입소문이 퍼진다. 이번엔 길동이가 입초시에 올랐다. 입바른 소리만 하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미움을 사고 있다는 것. 입심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길동은 두 사람을 살살 구슬리는 입발림 소리도 해봤지만 입막음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그렇게 입방정을 떨다가는 큰코다칠 거라고 겁박을 했더니 그제야 수그러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자기 발밑을 살피는 길뿐이다(조고각하, 照顧脚下). 발밑만큼이나 입도 잘 살피시길. 입에 담지 못할 말은 입에 담지 않으며, ‘입만 살았다’는 비아냥을 안 듣기 위해서라도 몸과 마음이 함께 살아 있는 새해가 되길 비나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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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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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界 - 김수영
6이 KBS 제二방송
7이 동 제一방송
그 사이에 시시한 周波가 있고
8의 조금전에 동아방송이 있고
8점 5 가 KY인가보다
그리고 10 점 5 는 몸서리치이는 그것
이 몇 개의 빤떼온의 기둥 사이에
딩굴고 있는 폐허(廢墟)의 돌조각들조다도
더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인국(隣國)의 음성
-물론 낭랑한 일본말들이다
이것을 요즘은 안 듣는다
시시한 라디오소리라 더 시시한 것이
여기서는 판을 치니까 그렇게 됐는지 모른다
더 시시한 우리네 방송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지금같이 HIFI가 나오지 않았을 때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소리보다도 더 發狂을 쳤을 때
그때는 인국방송이 들리지 않아서
그들의 달콤한 억양이 금덩어리같았다
그 금덩어리같던 소리를 지금은 안 듣는다
참 이상하다
이 이상한 일을 놓고 나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해본다
지금은 너무나 또렷한 立體音을 통해서
들어오는 以北방송이 불온(不穩)방송이
아니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지금 일본말 방송을 안 듣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미련도 없이
희한도 없이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도 내가 反共産主義者가
아니되기 위해서는 그날까지 엉성한
粗惡한 방송들이 어떻게 되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먼저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이런 극도의 낙천주의를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서 해본다
-아아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른 탓이다
<1967.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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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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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적지수(墨翟之守)
墨:먹 묵. 翟:꿩 적. 之:갈 지(…의). 守:지킬 수.
[준말] 묵수(墨守) [출전]《墨子》〈公輸盤篇〉
‘묵적의 지킴’이란 뜻. 곧
①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킴. ②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춘추 시대의 사상가로서 ‘자타 차별 없이 서로 똑같이 사랑하고 이롭게 하자’는 겸애교리설(兼愛交利說:兼愛說)과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한 묵자[墨子:이름은 적(翟), B.C. 480~390]의 이야기이다.
초(楚)나라의 도읍 영[호북성(湖北省) 내]에 도착한 묵자는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갔다. 그가 초왕을 위해 운제계(雲梯械)라는 새로운 공성기(攻城機: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만들어 송(宋)나라를 치려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북방에 나를 모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해 죽여 줄 수 없겠소?”
그러자 공수반은 불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의(義)를 중히 여기는 만큼 살인은 안하오.”
“사람 하나 죽이지 않는 게 ‘의’라면 왜 죄 없는 송나라 백성을 죽이려 하시오?”
답변에 궁한 공수반은 묵지를 초왕 앞으로 안내했다.
“전하, 새 수레를 소유한 사람이 이웃집 헌 수레를 훔치려 하고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이웃집 누더기를 훔치려 한다면 전하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나이까?”
“그건 도벽이 있어서 그럴 것이오.”
“하오면, 사방 5000리 넓은 국토에다 온갖 짐승과 초목까지 풍성한 초나라가 사방 500리밖에 안되는 가난한 송나라를 치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과인은 단지 공수반의 운제계를 한번 실험해 보려 했을 뿐이오?”
“하오면, 외신(外臣)이 여기서 그 운제계에 의한 공격을 막아 보이겠나이다.”
이리하여 초왕 앞에서 기묘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묵자는 허리띠를 풀어 성 모양으로 사려 놓고 나뭇조각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공수반은 모형 운제계로 아홉 번 공격했다. 그러나 묵자는 아홉 번 다 굳게 지켜냈다. 이것을 본 초왕은 묵자에게 송나라를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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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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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2장 슬프도다, 관중이여
1. 이오 즉위
이오의 약속
한번은 굴성을 점령하고 있는 여이생으로부터 서신이 왔다. 이오는 그 서신에서 비로소 본국 대부들이 중이를 데리러 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오는 즉시 괵자와 극예와 함께 어떻게 하면 나라를 중이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상의했다. 날마다 상의를 거듭하고 있는 참에 양유미 일행이 이오를 모시러 온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오는 이 소식을 듣자, 손을 이마에 대고 안절부절 초조히 기다렸다.
"하늘이 나라를 중이로부터 뺏어 내게 주심이로다!"
이오는 일변 희색이 만면했다. 극예가 옆으로 다가서며 아뢰었다.
"중이인들 어찌 나라를 탐내지 않을 리 있습니까. 그런데 그가 귀국하지 않고 거절했다는 것은 필시 의심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경솔히 저들을 믿지 마십시오. 대저 국내에 있는 자들이 국외에 있는 사람을 모셔다가 군위에 앉히려는 것은 그들이 다 큰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에서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이극과 비정부 두 사람입니다. 공자께서는 앞으로 그 두 사람에게 뇌물을 듬뿍 줘야겠지만 그래도 안심해선 안 됩니다. 대저 호랑이 굴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날카로운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공자도 본국에 돌아가시려면 반드시 어떤 강국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진나라와 가까운 나라 중에선 진나라가 가장 강합니다. 공자는 사람을 진(秦)나라로 보내어 원조를 청하십시오. 진나라가 원조를 허락하면 그 때 귀국하셔도 좋습니다."
이오는 극예의 말에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그 후 양유미가 도안이를 데리고 당도했다. 이오는 이극에게 분양의 밭 백만 평과 비정부에게 부규의 밭 70만 평을 각각 하사한다는 글을 써서 봉한 다음, 그 문서를 도안이에게 내주며 본국에 돌아가서 일단 알리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도안이를 데리고 온 양유미는 이오의 서신을 받아 가지고 진나라에 가서 서신을 바치고 진목공(秦穆公)에게 아뢰었다.
"우리 진나라에선 모든 대부들이 다 공자 이오를 임금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이에 진목공은 건숙과 함께 이 일을 상의했다.
"지금 진(秦)나라는 과인의 힘을 빌어 질서를 잡으려고 하는 모양이오. 뿐만 아니라 지난날 상제께서 꿈에 과인에게 징조를 보이신 일이 있소. 과인이 듣기엔 중이와 이오가 다 어진 공자라고 합디다. 과인이 그들 중에 한 사람을 골라서 진나라의 군위에 오르게끔 도와줄 생각인데 누굴 도와 주는 것이 좋겠소?"
"지금 중이는 책나라에 있고 이오는 양나라에 있으니 우리 나라에서 다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주공은 어이하사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조위하고, 그리고 두 공자의 인품에 관한 보고를 들으려 않으십니까?"
"옳은 말씀이오."
진목공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에 공자 칩이 진나라 사자로서 책나라로 갔다. 공자 칩은 중이와 만나보고 진목공의 명의로써 조문했다. 서로 조문하고, 예가 끝나자 중이는 즉시 상주의 격식을 갖춰 안채로 들어갔다. 공자 칩이 그 곳 시자에게 청했다.
"공자 중이께서 시기를 보아 본국으로 돌아가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우리 주공이 원조하시겠다고 하셨소. 그러니 이 말씀을 좀 전해 주오."
시자는 안으로 들어가서 공자 중이에게 진나라 사자의 말을 전했다. 공자 중이는 곧 조쇠와 함께 이 일을 상의했다. 조쇠가 대답했다.
"본국에서 모시러 왔을 땐 거절하고서 그러고도 외국의 원조를 받아가지고 돌아간다면 비록 고국에 돌아간댔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공자 중이는 공자 칩이 있는 사랑채로 나갔다.
"귀국 군후께서 망명중인 나 같은 사람을 조문하게 하시고 더구나 임금의 자리까지 마련해 주시려 한다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이라 지금 아무런 보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어진 사람과 친하는 것이 보배라고 생각하며 세월을 보내는 중입니다. 이제 부군이 별세하셨으니 이 맘을 표현할 길이 없구려. 그러하거늘 내 어찌 딴 뜻을 두겠소."
말을 마치자, 중이는 엎드려 구슬프게 통곡했다. 그는 겨우 울음을 멈추고 공손히 공자 칩에게 경의를 표하고서 말없이 안채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자 칩은 중이의 마음이 반석 같음을 알았다. 그는 중이의 어진 마음을 찬탄하면서 책나라를 떠났다. 공자 칩은 그 길로 양나라에 가서 이번엔 이오를 조문했다. 서로 예법에 따라 조문하고 인사가 끝나자 공자 이오가 사정하듯 청했다.
"대부께서 군명을 받들어 이처럼 나라 잃은 사람을 조문하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무슨 좋은 방도가 있으시면 이 불쌍한 저에게 나아갈 길을 지도해 주십시오."
공자 칩은 이오에게 이런 좋은 기회에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이오는 머리를 숙여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고 곧 안으로 들어가서 극예와 상의했다.
"진(秦)나라에서 나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겠다는구려."
극예가 한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진나라에서 왜 우리를 돕겠다는 걸까요? 그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보물이나 무엇인가를 요구하려는 것입니다. 공자께선 본국 땅을 크게 떼어 그들에게 미리 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크게 땅을 떼어 주면 우리 진나라의 손해가 크지 않겠소."
극예가 강경하게 말했다.
"이러다가 공자가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시면 결국 양나라에서 한 필부로 일생을 마칩니다. 그러면 진(晋)나라의 땅 한 조각도 차지하지 못하십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본국을 다스리고 있는 참인데 공자는 무엇을 아끼십니까?"
이오가 다시 사랑채로 나가서 이번에는 공자 칩의 손을 잡고 간절히 청했다.
"본국에서 이극, 비정부도 나에게 귀국하길 청했소. 그 때도 그들에게 적지 않은 보답을 했습니다. 진실로 진후의 사랑에 힘입어 내가 본국으로 돌아가 사직을 맡게 된다면 하서 다섯 성을 다 귀국에게 바쳐 만분의 일이나마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오는 소매 속에서 다섯 성을 바치겠다는 문서를 내놓고 후덕한 표정을 지었다. 공자 칩이 슬며시 이를 사양했다. 이오는 안타까웠다. 아니 다급하고 초조했다.
"내게 황금 사십 일과 백옥 여섯 쌍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공자가 돌아가서 귀국 군후에게 말만 잘해 주신다면 나는 공자의 은혜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사양만 하던 공자 칩은 문서와 황금과 백옥을 말없이 받았다. 공자 칩은 진(奏)나라로 돌아가 중이와 이오를 각각 만나보고 온 경과를 진목공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진목공이 말했다.
"중이가 이오보다 훨씬 어질구나. 내 반드시 중이를 진(晋)나라 군위에 앉히리라."
공자 칩이 물었다.
"주공이 진(晋)나라에 임금을 세우려는 것은 우리 진(秦)나라를 위해서입니까, 또는 천하에 주공 개인의 이름을 드날리기 위해서입니까."
"진나라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천하에 과인의 이름을 드날리고 싶을 뿐이다."
"주공께서 진(晋)나라를 위해서라면 어진 임금을 앉히고,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자를 택하십시오. 그래야만 그를 조종해서 주공의 이름을 드날릴 수 있습니다. 어진 자는 우리보다 뛰어날 염려가 있습니다. 어질지 못한 자라야 우리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것을 취하시겠습니까?"
"그대의 말을 들으니 과인의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속이 시원하도다."
이에 진목공의 분부에 의해서 공손지는 수레 3백 승을 거느리고 양(梁)나라에 갔다. 그는 다시 이오를 모시고 진(晋)나라로 가서 그를 군위에 올려 세웠다. 진목공의 부인 목희(穆姬)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진(晋)나라 세자 신생의 여동생이었다. 목희는 어렸을 때 진헌공의 차비(次妃)인 가군(賈君)의 궁에서 자랐다. 그녀는 가군의 양육을 받았으므로 매우 심성이 바르고 덕성이 높았다. 목희는 장수 공손지가 이오를 진나라 군위에 올리러 가는 편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오는 목희의 친서를 받아 읽었다.
공자께서 본국에 돌아가 진(晋)나라 군위에 오르시거든 우리 가군을 각별 후대하오. 지난날에 나를 사랑하고 길러 주신 가군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 부탁하는 것이오. 그리고 듣자하니 모든 공자가 타국에서 목숨을 보존한다는데 그들이 무슨 죄가 있소. 옛말에 잎이 무성해야만 뿌리가 번영한다고 했소. 모든 공자를 다 본국으로 불러들여 우애 좋게 지내시오. 그래야만 이 몸의 친정도 부강하리라 생각되오.
이오는 목희의 비위를 맞추려고 명하신 대로 일일이 거행하겠다는 답장을 써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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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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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바지로 닦아버릴 거야
저는 환갑이 된 젊은 늙은이인데 우리집은 3대가 함께 삽니다. 손자, 손녀, 며느리, 아들, 그리고 우리 내외가 아담한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는데 항상 엄청 바쁘게 살아가는 고등학교 선생님인 며느리와 같이 살다 보니 6살된 손자놈이 어찌나 저를 따르는지 심지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때 아픔을 못이겨 울음을 터트릴 때도 ‘엄마’하며 우는게 아니라 우리집 상준(손자 이름)이는 이런 경우에도 ‘할아버지’를 불러 담당의사가 ‘이 애는 엄마가 없느냐?’고 물을 정도로 저를 지독히 따르는 놈이이지요. 웃움보가 터질 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제가 출근 준비를 하느라 큰방 화장실에서 칫솔에 가득 치약을 묻혀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상준이가 거실 쪽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뒤처리를 하려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허리는 잔뜩 구부린 자세로 저를 부르는 거예요. 제딴에는 무척 다급하고 힘겨운 동작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제 사정이지요. 그 동작을 보지 않는 저는 다급할 게 하나도 없지요. 처음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부르더군요. 하지만 전 압안 가득 칫솔거품이 넘칠 지경인데 대답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좀 뜸을 들였더니 이젠 좀 다급해진 소리로 부르더군요.
‘이재춘씨, 이재춘씨, 이재춘씨!’
상황이 이렇게 되고보니 이젠 제편에서 대답할 상황이 됐다 해도 괘씸한 생각이 들어 대답을 못한 게 아니라 안했지요. 얼씨구! 다음에 들리는 손자녀석의 더 큰 목소리는 절 매우 당황스럽게 하더군요.
‘재춘아, 재춘아, 재춘아, 빨리와서 닦아주지 않으면 아래 바지로 모두 닦아 버릴거야.’
그제야 제가 물로 입안을 정리하고 녀석있는 데로 쫓아가 때릴 듯 노려보고 한마디 했죠.
‘할아버지 이름을 네 친구 이름 부르듯 부르는 막된놈이 누가 있느냐.’
그런데 이녀석은 겁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라고 부를 때 바로 왔으면 이름 안 불렀을것 아니야. 다음에도 급할 때 불러서 안 오면 할아버지 이름을 부를 테니 내 기분 건드리지 말어 응?’
할말을 잊은 저는 누가 잘못한 것인지 결론을 못 내렸답니다.
거시기가 뭐시기여
저는 고향이 전남 나주 고흥반도의 섬중 하나인 나로동에서 태어나 14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고향의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이 저를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오늘 소개할 주인공인 ‘김거식’, 클거자에 심을식자, 뭘 크게 심으라고 지은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오늘 이 친구의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에 띄는 자그마한 딸기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장난기 많고 용감무쌍했던 저의 주동하에 일제히 저희들은 최대한 낮은 포복으로 딸기밭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크고 잘 익은 딸기만 골라 먹어댔습니다. 한마디로 딸기밭은 엉망이 돼버린 거죠. 그런데 딸기를 따먹느라 정신이 팔렸던 터라,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전혀 몰랐습니다. 어쩐지 밭이 질퍽하다 했더니 아 글쎄 딸기밭에 거름준다고 뭐시냐 그걸 뿌려놨더라구요. 겨우 그 사실을 알앗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죠. 옷은 흙에다 그거에다 완전히 ‘냄새나는 거지’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그 냄새 때문에 우린 잡혔습니다. 두 놈은 그 와중에도 도망을 갔고, 제일 많이 묻었던 우리 네 놈만 주인아저씨한테 끌려갔습니다. 어린 저희들이었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무조건 잘못을 빌었는데 아저씨는 학교에 알려 혼내야한다, 부모님께 찾아가 보상을 받아야 한다며 어디 사는 누구냐를 물었습니다. 하나 둘씩 대답을 했죠, 우선 제가 먼저, “예 저는 아랫동네네 사는 희탭니다.” 또 한 녀석도 “예, 저도 같은 동네 장환입니다” “또 세 번째 녀석도”예 같은 동네 순돌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김거식이란 놈 차레였는데, 이 녀석이 겁이 많이 났는지 막 더듬더라구요. “예, 저... 저... 저는 거...거...거식긴데요” 아저씨왈 “뭐 거시기, 애 임마, 이름대라니까 거시기는 무슨놈의 거시기야? 이름이 뭐야?” 그러자 얘는 더 놀라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거시기 맞는데요? 진짜 거시기라니까요” “이 짜식이, 거시기가 니 이름이냐? 마빡에 피도 안 마른게 거시기는 알아가지구. 야 임마, 너도 거시기 달고 다니냐? 아저씨는 자길 놀리는 줄 알고 마구 화를 내는 겁니다. 우리는 쪼그라들어서 더 이상 아무 밀도 못하고 마주보며 서로의 뺨을 때리는 벌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이렇게 일차 거시기 사건을 마치고 다음해에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라 근처 다섯개의 초등학생들이 모두 그 중학교로 몰려오눈데 처음 만나는 남자,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김거식군의 이름이 또 문제였습니다. 남자애들은 괜찮은데 여자애들은 거식이의 이름을 부르는게 쿤 애로사항 중의 하나였습니다. “야, 거식아? 그게 이름이여, 물건이여?” 정말 학기초엔 매일 그 이름 때문에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께 질문을 하면 이런 저런 대답을 하면서 “거시기 뭐냐?” 이럴 때마다 김거식은 “예”하고 대답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몇 개월 지나니까 좀 덜해지더러구요. 이제는 얼굴 붉힐 일 없으려니 하고 방심한 채 같이들 집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왠 50대 중반의 아줌마가 걸어오시더니 우리들 앞에 멈춰서시는 게 아닙니까? “ 왜 그러세요 아줌마?” 그 아줌마는 우리들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시며 말하셨습니다. “음 요놈은 어디에 누구 새끼고? (웃어른의 표현이 그렇더러구요, 자식을 새끼라고 하시더만요.) 요놈은 누구네 새끼고?" 그러더니 김거식이를 보시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만 있자, 또 저놈은? 아, 저놈은 거시기 새낀데." 뭔가 헷갈리시면서 그대로 욕이 돼버리는 순간이었죠. 거식이가 대답했습니다. "아줌마 제 이름이 거식입니다. 김씨네 둘째 아들 김거식입니다." "맞다, 맞어. 거시기, 거시기지." 아주머니는 거식이의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났다시며 가던 길을 가셨습니다. 이 친구는 이렇듯 사건도 사연도 많았지만 6개월 전에 결혼을 해서 잘살고 있습니다. 이제 아들, 딸을 낳으신 사람들이 그러겠죠? '거시기 새끼네'라고요. 늘 기억나는 친구를 팔아봤습니다. 표현이 좀 이상했어도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옛날의 추억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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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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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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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이란, 첫째로 참됨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셋째로는 참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강한 용기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 '성실'을 인생의 길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라고 숭상해 온 것은 비단 유교 내지 우리 동양만의 전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 고금의 여러 나라와 여러 시대는 가기 고유하고 특색 있는 윤리 내지 가치의 체계를 발전시켜 왔으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체계에 있어서나 성실은 도덕적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요청으로서 숭상되어 왔던 것이다. 서양의 윤리 사상에 있어서도 '성실'은 올바른 인간 생활의 기본 원리로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숭상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는 곧 덕'이라 하여 참된 인식을 매우 중요시했거니와, 그들이 말하는 '지', 즉 참된 인식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일컫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위한 실천의 지침으로서의 지혜를 포함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도 근본에 있어서 상통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사상계를 장악한 것은 기독교였으며,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덕으로서 숭상을 받은 것이 '사랑'과 '믿음' 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랑'과 '믿음'이 성실한 마음을 떠나서 진실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중세 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도 역시 '성실'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세로 시대가 바뀐 뒤에도, 철학 사상과 사회 사상에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의 덕을 숭상하는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 내려 왔다. '르네상스'라는 정신 혁명을 일으킨 사상의 흐름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거니와, 그 휴머니즘의 핵심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굳센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나 권위 또는 화석화한 고정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서, 인간 자신이 진실로 믿는 바를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기를 결심한 용기가, 르네상스라는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곧 '성실'의 정신에 통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배반하는 것보다 더 크게 '성실'의 정신에 어긋나는 태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한 르네상스 이래의 시대 정신은 여러 가지 방면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문학과 미술에 있어서는, 종교에 예속되어 있던 종정의 지위를 탈피하여 예술을 위해서 예술에 몰두하는 자주적 예술가들의 탄생을 보았으며, 작가의 눈에 비친 인간과 자연을 있는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세속주의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새로운 기풍의 대두를 보았다. 새로운 시대 정신이 종교와 교회 내부에서 발휘되었을 때 이른바 '종교 개혁'이라는 큰 운동이 전개되었거니와,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역설한 것은 외면적 형식의 종교를 물리치고 내면적 양심의 종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물질로써 행하는 선업보다도 정신으로써 행하는 신앙이 본질적으로 소중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요구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즉 '성실'의 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17세기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대륙 및 영국의 철학 사상에서도, 우리는 역시 '성실'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배제하고 오직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에서, 그리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박해의 위협과 많은 돈이나 높은 지위를 약속하는 크나큰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로지 자기의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서 살다가 죽은 스피노자의 생애에서, 우리는 '성실한' 마음의 극치를 발견한다. 버클리, 로크, 흄 등이 대표하는 '경험론'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합리론'과는 근본적으로 맞서는 철학의 체계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충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그랬듯이 영국의 경험론자들도 역시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철학적 탐구의 발판으로 삼을 것을 꾀하였다. 다만, '확실하고 명백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관해서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이 스스로에게 준 대답이 서로 달랐던 까닭에 결과에 있어서 그들은 크게 대립되는 두 가지의 철학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선천적으로 이성에 주어져 있는 관념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대륙의 학자들은 합리론에 이끌려 갔고, 감관에 비친 경험적 심상이 가장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은 영국의 학자들은 경험론으로 이끌려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자신이 믿는 능력을 따라서 충실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려고 애쓴 점에 있어서, 모두 성실한 마음의 주인공들이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종합하여 근세 철학을 크게 체계화한 칸트에게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가장 뚜렷한 구현을 본다. 칸트의 철학에는 그 모든 방면에 성실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고 보아야 가겠지만, 특히 그의 윤리 사상에서, 그리고 그의 실천 생활에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모범적인 구현을 보고도 남는다.
칸트가 실천 이서의 근본 법칙으로서 정립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가르침은,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과 같은 정신의 표현이요,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한 칸트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근대 인권 사상의 근본 정신을 철학적 언어로써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 공자의 가르침이나 인권 사상은 모두 성실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며, 성실한 마음 없이 그 참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이다. 현대는 물량 문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실할 정도로 어지럽기 짝이 없는 시대다. 인간이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 함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즉 성실성을 잃는다는 뜻도 포함한다. 금전과 권력 또는 헛된 이름의 노예가 되는 가운데, 인간 본연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대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식들은 말한다. 그러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움을 걱정하는 바로 그 심정 가운데 역시 성실을 희구하고 성실을 열망하는 마음은 살아 있는 것이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현대인 역시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성실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철학자들이 각각 자기들 나름의 관점에서 성실의 회복을 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거니와, '성실'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심각한 각도에서 다룬 사람들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이라 하겠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성실'의 개념은 서양 윤리학에서 보통 말하는 '성실'과 같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유교에서 가르친 '성'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진실되고 속임이 없이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존주의 사상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같은 뜻의 '성실'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며, 그들이 강조한 역점에도 개인에 따르는 차이는 있었다. 니체와 같이 저속한 물질 문명 속에서 대중화하고 평균화하여 옹졸하게 된 인간의 현재를 초월하고, 인간 자체의 본성을 성실하게 추구하면서 병들고 오염된 인생을 안이와 자기 기만으로 받아들여 어물어물 살아 갈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용감하게 극도의 회의와 허무를 직시함으로써, 다시 절망을 극복하고 참된 창조적 인생을 되찾으라고 가르친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하이데거와 같이, 퇴폐적인 일상 생활 속에서 평범한 세상 사람으로 타락 해 있는 현재의 나를 단호한 결단으로써 박차고 나와 죽음을 앞에 둔 유한자 인간으로서 무를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본래적인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상식과 호기심, 그리고 모호한 생각 등으로 인하여 가려진 비진리의 상태로부터 나 자신을 탈환함으로써 인간 내지 실존의 참모습을 그 본래성과 전체성에 있어서 드러내도록 하라고 역설한 철학자도 있었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같이, '인간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는 전제 위에서, 창조자로서의 자유로운 판단으로 가치의 척도를 설정하고, 이 척도를 따라서, 추악하고 타락해 있는 현실을 적극적인 참여로써 성실하게 개조하라고 호소한 사상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셀과 같이, 나와 나 자신, 나와 너, 나와 신이 서로 교제 하는 공동적 참여 속에서 내가 바치는 '성실'의 정도를 따라서 '존재'의 정도가 좌우된다고 전제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기울여 헌신해야 할 절대자인 신에게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대할 때 신이 내 앞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여, 성실한 신앙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희망을 찾으라고 설교한 스승도 있었다. 이와 같이,'성실성'을 힘주어 주장한 실존주의자들이 마음 속에 형성했던 '성실'의 개념은, 그들의 철학 내지 인생의 문제를 바라본 각도의 차이에 따라서 개인적인 차이를 가졌으나, 그들의 사상의 바탕에는 뚜렷이 일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었다. 돈과 기계와 헛된 이름으로 병든 불량 문명 속에서 타락하고 속물화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우리 인간이, 솔직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용감한 결심으로 바른 길을 선택하여, 인간다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성실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것을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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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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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9월 11일 톨리에 거리에서
오래 되고 길쭉하게 생긴 귀족의 저택은 이 죽음을 치르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할아버지의 몸이 점점 불어났기 때문에 곁방을 더 지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다른 방으로 옮겨 다니고 싶어하셨고, 그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더 이상 가서 누울 방이 남아 있지 않으면 격노하시곤 했다. 그러면 하인과 하녀, 그리고 늘 할아버지 곁에 두셨던 개들이 모두 줄지어 계단을 올라, 집사가 앞장선 가운데 증조 할머니께서 임종하셨던 방으로 갔다. 그 방은 23년 전 증조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여는 때 같으면 그 누구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커튼이 걷혀지자, 한 여름 오후의 강렬한 햇살이 겁먹고 깜짝 놀란 모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비추었고 천이 걷혀진 거울에 반사되었다. 사람들도 햇살과 다름없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하녀들은 어디부터 먼저 손을 대야 할지 몰라했다. 젊은 하인들은 모든 것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늙은 하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금 들어와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 이 폐쇄된 방에 관해 들었던 모든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도 모든 물건에서 야릇한 냄새가 나는 이 공간에 들어오게 된 개들이 굉장히 흥분한 것 같았다. 몸집이 크고 길쭉하게 생긴 러시아산 사냥개들은 안락의자 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춤이라도 추는 듯 흔들거리며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러다가는 문장에 새겨진 개들 마냥 일어서서 가느다란 앞발을 백금으로 된 문틀에 기댄 채, 바짝 긴장하여 날카롭게 보이는 얼굴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당 이쪽 저쪽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누런 장갑을 끼고 있는 듯한 털을 가진 몸집이 작은 닥스훈트는 마치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져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창가에 있는 넓은 비단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붉은 빛이 도는 털을 가지고, 불만스러워 하는 듯이 보이는 포인터종 사냥개는 금빛 책상다리의 모서리에다 등을 문질렀다. 그 바람에 세브르산 접시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상 위에서 달가닥거렸다. 물론 영혼도 없고 졸음에 취한 듯한 이 방의 물건들에게는 끔찍한 시간이었다. 심지어는 누군가의 성급한 손에 의해 난폭하게 펼쳐진 책갈피에서 장미 꽃잎이 흩날려 짓밟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작고 연약한 것들을 잡아서 망가뜨리고는 얼른 그것을 제자리에 놓았다. 모양이 망가진 많은 것들을 커튼 아래에 숨기거나 난로 앞 금빛 격자망 뒤에다 던지기까지 했다. 때때로 무엇인가가 양탄자 위에 떨어져 감춰지기도 했고, 딱딱한 쪽마루 위로 요란스레 떨어지기도 했다. 너무나 사치스런 이 물건들은 결코 참아 내는 법을 몰랐으므로 여기저기 부서지고 날카롭게 흩어지거나 거의 소리도 없이 깨졌다. 만약 누군가가 이 모든 사건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불안하게 지켜 온 이 방을 내려다보며 모든 충만된 몰락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단 하나 "죽음"일 것이다. 바로 울스가르 마을의 크리스토프 데틀레프 브리게 시종관의 죽음이었다. 검푸른 제복 위로 팅팅 부풀어 오른 할아버지는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된 낯선 얼굴에 눈이 감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 않아도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침대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었던 그 첫날 밤 이래로, 할아버지는 침대를 지독히 싫어해서 이를 완강히 버텼다. 게다가 준비된 침대는 할아버지에게 너무 작았다. 그래서 양탄자 위에 누일 수밖에 없었다. 땅바닥으로는 도통 내려가려 하시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할아버지는 거기에 누워 계셨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개들은 하나 둘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유독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에 털이 뻣뻣한 개만은 주인 곁에 앉아서 넓고 텁수룩한 앞발 하나를 크리스토프 데틀레프의 크고 회색 빛이 도는 손위에 얹어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하인들도 방보다 조금 더 밝은 흰 복도 바깥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방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크고 어두운 물체를 몰래 힐끔거렸다. 그들은 그것이 시들어 버린 물건 위에 덮어놓은 커다란 옷에 지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남은 게 있었다. 결코 시종관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7주전부터는 어느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이 목소리는 크리스토프 데틀레프의 목소리가 아니라 크리스토프 데틀레프가 지니고 있었던 죽음의 목소리였다. 크리스토프 데틀레프의 죽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울스가르 마을에서 살고 있으면서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닥치는 대로 그들에게 요구했다.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구했고, 푸른 방을 요구했고, 작은 살롱을 요구했고, 홀을 요구했다. 개를 요구했고, 사람들에게 웃으라, 말하라, 놀아라, 조용하라고 요구했다. 모든 것을 동시에 요구하기도 했다. 친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했고, 스스로 죽게해달라고 요구했다. 소리소리 질러 요구했다.
밤이 찾아오고, 극도로 피곤하여 밤새워 지키지 않을 하인들 중 몇 사람이 막 잠에 들려고 할 때면, 크리스토프 데틀리프의 죽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으르렁거려서, 처음에는 함께 짖었던 개들마저 급기야 입을 다물었다. 개들은 드러누울 생각조차 못하고 그 길고 가느다란 떨리는 다리로 버티고 서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광활한 덴마크의 은빛 여름밤에 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마을에 들려 오면, 사람들은 폭풍우 치는 밤마다 으레 그랬듯이 일어나 옷을 입고 그 소리가 그칠 때까지 말없이 등불 주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해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여인들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방으로 가서 철통같은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렇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마치 여인들 자신의 몸 속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그 여인들은 일어나기를 간청하여 희고 품이 넓은 옷을 입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다른 사람들 틈에 끼여 앉았다. 때마침 새끼를 낳던 암소들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어 음메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달 수를 다 채우고서 새끼가 영 나오려고 하지 않자 사람들은 암소의 몸에서 죽은 새끼를 끄집어냈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피곤에 절어서 낮에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건초를 들여오는 일조차 잊어버렸다. 일요일이 되어 희고 평화로운 교회로 갈 때면, 그들은 더 이상 울스가르 마을에 주인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그들은 이 주인이 너무나 끔찍했던 것이다. 그들 모두가 생각하고 기도 드렸던 것을 목사는 교단 위에서 큰소리로 설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밤을 새웠고,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교가 끝나면, 밤새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경쟁자를 가지게 된 종이 울렸다. 그렇지만 종이 아무리 힘차게 울린다 하더라도 그 경쟁자에게 대항할 수는 없었다. 물론 모두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젊은이는 시종관의 대저택으로 달려가 자신의 더러운 갈퀴로 나리를 쓰러뜨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그의 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그가 그런 일을 할 만한 재목인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그 지방 사람들은 시종관을 좋아했고 불쌍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이 젊은이처럼 느꼈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울스가르 마을에 살고 있었던 크리스토프 데틀레프의 죽음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죽음은 10주 전에 왔었고 10주 동안 머물렀다. 그 동안 죽음은 이전의 크리스토프 데틀레프보다 더 강력하게 군림했다. 죽음은 항상 왕과 같은 존재였고, 그것은 끔찍한 왕으로 불려졌다. 그것은 수종증에 걸린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종관이 평생 지니고 있었고 스스로 부양했던, 고약하고 호사스런 죽음이었다. 시종관 자신이 생전에 평온하게 누릴 수 없었던 오만과 욕심, 그리고 지배력이 이제 울스가르 마을에 자리를 잡고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죽음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런 식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브리게 시종관은 어떻게 여겼을까? 그는 힘들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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