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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9호 2023.1.1 일요일 (음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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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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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는 쉽지만 결혼생활을 계속하기는 조금 어렵다. 평생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연 최고의 예술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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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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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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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世界一周) - 김수영
그대의 길은 잘못된 길이다
-世界一周를 하고 온 길은 잘못된 길이다
-世界一周를 떠났다는 것이 잘못된 길이다
너무나 먼 잘못된 길이다
너무나 많은 잘못된 나라다
그 죄과(罪過)를 그 방대한 二十一개국의 地圖를
그대는 선물로 나에게 펼쳐보이지만
그대가 준 손수건의 암시(暗示)처럼
不吉한 눈물을 흘리게 했지만
그 분풀이로 어리석은 나는 술을 마시고
창문을 부수고 여편네를 때리고
地獄의 詩까지 썼지만
지금 나는 二十一개국의 정수리에
사랑의 깃발을 꽂는다
당신의 눈에도 보이도록 꽂는다
그대가 봉변을 당한 食人種의 나라에도
그대가 납치를 당할 뻔한 共産國家에도
보이도록
地獄의 詩를 쓰고 난 뒤에
그대의 출발이 잘못된 출발이었다고
알려주려고
모든 世界一周가 잘못된 출발이라고
알려주려고-
<1967.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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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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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지몽(巫山之夢)
巫:무당 무. 山:메 산. 之:갈 지(…의). 夢:꿈 몽.
[동의어] 조운모우(朝雲暮雨). 천침석(薦枕席).
[유사어] 무산지운(巫山之雲). 무산지우(巫山之雨).
[출전]《文選》〈宋玉 高唐賦〉
무산(巫山)의 꿈이란 뜻으로, 남녀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를 이르는 말.
전국 시대, 초나라 양왕(襄王)의 선왕(先王)이 어느 날 고당관(高唐館)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다. 그러자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첩(小妾)은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전하께오서 고당에 납시었다는 말씀을 듣자옵고 침석(枕席:잠자리)을 받들고자 왔나이다.”
왕은 기꺼이 그 여인과 운우지정(雲雨之情: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이별을 고했다.
“소첩은 앞으로도 무산 남쪽의 한 봉우리에 살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陽臺) 아래 머물러 있을 것이옵니다.”
여인이 홀연히 사라지자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 왕이 무산을 바라보니 과연 여인의 말대로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조운묘(朝雲廟)라고 이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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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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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2장 슬프도다, 관중이여
1. 이오 즉위
대부 호돌의 심계
이극은 백관을 조당에 모아 놓고 말했다.
"이제 여희의 일당들은 모두 다 죽었소. 이제 군위를 세울 때요. 그런데 공자들이 많으나 지금 책나라에 망명중이신 공자 중이가 가장 나이도 많고 또 어진 분이니 그분을 군위에 모시고자 하오. 나의 의견을 지지하는 대부들은 이 죽간에다 서명해 주기 바라오."
비정부가 나서며 말했다.
"이렇듯 큰일은 우리가 결정할 게 아니오. 우리 나라 원로이신 대부 호돌에게 여쭤 보고 지시를 받는 것이 좋을 줄로 아오."
이극은 즉시 사람을 시켜, 호돌을 모셔 오도록 수레를 보냈다. 그러나 호돌은 수레를 가지고 온 사람을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사양했다.
"나는 쓸모없는 늙은 사람이다. 그저 모든 대부들이 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전하여라."
사자가 돌아간 뒤, 호돌이 창문을 닫고 알지 못할 말로 혼자 중얼거렸다.
"내 자식 둘이 다 공자 중이를 따라 망명했으나 만일 그들을 귀국시키면 그들은 다 죽은 사람이다."
이에 이극은 공자 중이를 모셔 오기로 하고 붓을 들어 죽간에다 맨 먼저 서명했다. 비정부 이하 공화, 가화, 추단 등 삼십여 대부가 서명을 마쳤다. 일을 너무 급히 서둘렀기 때문에 뒤에 온 대부들 중엔 미처 서명을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번 여희 일당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상사 벼슬에 오른 도안이는 그 표문을 가지고 공자 중이를 모시러 망명중인 책나라로 갔다. 공자 중이는 도안이가 바치는 국내의 대부들이 보낸 표문을 받아 펴 봤다. 모든 대부들의 서명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호돌의 서명이 없었다. '음! 이상하구나!'공자 중이는 의심이 들었다. 그 때 곁에서 위주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모시러 왔는데 고국에 돌아가지 않으신다면 언제까지 나그네 신세로 마치시렵니까?"
중이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네가 알 바 아니다. 나에겐 형제가 많거늘 하필 나 중이여야만 될 것이 뭔가. 더구나 어린 해제와 탁자가 죽음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이든 형으로서 아픔이 어찌 없겠느냐. 그리고 그 일당으로 남아 있는 자도 많을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기는 쉬우나 다시 나와야 할 경우엔 어떻게 도망쳐 빠져나올 수 있으리오. 하늘이 진정으로 나를 도우신다면 내 어찌 나라없는 걸 근심하랴."
호언이 공자의 맘을 알고 권했다.
"상중에 일어난 변란을 기회로 삼아 본국에 돌아간다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공자는 가시지 마소서."
공자 중이가 머리를 끄덕인 뒤 도안이를 불러들여 부드러운 말로 사양했다.
"나는 부친에게 죄를 짓고 사방으로 도망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다. 부친이 생존시엔 조석 문안과 수라상 앞에서 모시는 효성을 다하지 못했고, 돌아가신 뒤에는 곁에서 하늘을 부르며 통곡해야 할 예의마저 다하지 못한 불효자이다. 이런 내가 어찌 변란이 일어난 기회를 엿보아 나라를 탐할 수 있겠는가. 너는 돌아가 모든 대부에게 다른 공자를 모시어 군위를 삼으라고 전하여라. 나는 지금 다른 생각이 없다."
이에 도안이는 하는 수 없이 책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되돌아가서 이극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이극은 다시 사신을 책나라로 보내 공자 중이를 모셔 오자고 주장했다. 대부 양유미가 말했다.
"공자면 누구나 군위에 오를 수 있소. 그러지 말고 공자 이오를 모셔 오도록 합시다."
이극이 대답했다.
"이오 공자는 욕심이 많고 잔인한 사람이오. 욕심이 많으면 신의가 없고 잔인한즉 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중이 공자를 모시는 것만 못하오."
양유미는 이극의 주장을 귀담아 들으려 않고서 자기 주장을 고집했다.
"중이는 오지 않겠다고 하니, 그래도 이오가 다른 공자보다 못할 거야 없지 않소?"
모든 대부도 오지 않겠다는 중이보다 이오 공자를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극은 하는 수 없었다. 이에 양유미는 도안이를 데리고 이오를 모셔 오려고 양나라로 갔다. 한편, 양나라에 망명중인 공자 이오는 그 후 어떻게 하고 있었던가. 공자 이오는 그간 양나라에 있으면서 양백의 딸과 결혼하고 아들까지 하나 뒀다. 그 아들의 이름을 어라고 했다. 이오는 양나라에서 양백 사위가 되어 세월을 편안히 보내며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나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는 기회를 보아 귀국할 요량이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 진헌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오는 즉시 여이생에게 명하여 양나라 군사를 빌어 굴성을 엄습했다. 여이생은 쉽사리 굴성을 점거했다. 이 때 진나라 순식은 국상을 치르랴, 여희를 받들어 모시랴 한참 바빠 변방 일을 따질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뒀었다. 그 뒤 이오는 다시 해제와 탁자가 피살되었다는 보고를 잇달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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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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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총각은 개를 무척 좋아하나봐
이종환 형님, 그리고 최유라씨 혹시 개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무척 개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개하고 얽힌,정말 싫었던,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그런 일을 청취자 여러분들께서는 절대로 겪지 말라는 의도에서 이렇게 서두를 풀어볼까 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94년1월 제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에서 가장 힘든 작업인 백수시절을 보내고 있을때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계속 밤만 축내는 것도 눈치 보이고 또한 한겨울이라 마땅히 다닐 곳도 없던 터라 할 일 없이 이친구 저친구 집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아침에 신문배달을 해보지 않겠느냐며 아침에 운동도 되고 살도 빼고 돈도 벌고 좋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습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 집에서 놀면 뭐하냐 한푼이라도 벌러서 눈치밥 좀 면해보자는 심정으로 배달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주택 외곽지역과 아파트 중 배달하고 싶은 곳을 고르라는 국장님의 말을 듣고 전 당연히 주택지역을 원했지요.애냐구요? 아파트는 거의가 4-5층짜리 건물이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고 무엇보다고 주택지역은 오토바이가 지급된다는 말에 무조건 솔깃해서 하겠다고 했지요. 1월 그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저는 끗끗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달 정도를 돌렸을까... 이젠 웬만한 코스는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배달하는 지역은 시골동네라 집집마다 개를 키우는 집이 많았지요. 바로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겁니다. 어릴 적부터 '견 공포증'이 있는 저는 아침마다 저를 마중해주는 개들이 정말 싫었지요. 시골에선 다 그렇듯이 개를 묶어 놓고 기르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침만 되면 골목골목에서 저를 반겨주는 개들이 어쩜 그리도 많았는지 하루하루를 긴장과 공포 속에서 지내게 되었지요.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면 따라와 물고, 짖고, 왜 나만 그리 미워하는지 개들이 있는 골목마다 가슴을 졸이며 지나가게 되었지요. 정말 더는 못 참겠더군요. 그래서 신문배달이 3년 정도된 친구녀석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맨입으로 안된다는 녀석을 라면 한 그릇과 소주 한병으로 요리하고 그 비결을 듣게 되었지요.
“개는 말이다. 무조건 기선을 제압해야한다. 처음에 딱 마주치면 절대로 눈싸움에서 지면 안된다. 개한테 시선을 빼앗기면 엄청 피곤해 지는기다. 처음부터 무조건 인상를 쓰고는 한참동안 노려보는 기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바닦에서 돌을 줍는 시늉을 하며 아무소리나 큰소리를 지르는 기다. 욕을 하면 더 좋지. 보통 개들은 욕에 익숙해 있거든. 달려가는 거야. 대개 이쯤이면 거의 95%정도는 개들이 도망갈기다. 만약 그래도 도망가지 않는 녀석이 있거든 분명 지능이 모자라거나 겁이 없는 녀석일기다. 그럴땐 가지고 있던 돌을 사정없이 던지는 기다”
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보여주는데 까만 윤기가 나는 돌맹이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지 뭡니까? 자기는 전시를 대비해 늘 소지하고 다닌다나요. 이쯤되면 동네의 모든 개들을 평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게 될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더니만 자기가 배달하는 동네로 데려가더군요. 그 동네 개들은 그 친구만 나타나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게 여간 부럽지가 않았습니다. 전 그 다음날 바로 실행에 옮겼지요. 개들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혹시나 싶어 주머니에 넣어둔 돌멩이를 몇 번씩이나 확인하고는 만일을 대비해 좀 크다 싶은 것으로 열개씩이나 주머니에 넣었더니 다니기에 불편했지만 승리의 그날을 위해 참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든든하더군요. 그날 전 참으로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처음 만난 녀석은 누런빛이 나는‘코삐’라는 놈이었습니다.오늘도 역시 으르렁거리며 나타나더군요. 조금 긴장은 했지만 전 주머니의 돌맹이를 믿고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곤 눈에 힘을 주었지요. 녀석은 의외라는 듯이 조금 더 크게 으르렁거렸지요. 여기에 질세라 저는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리면서 입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눈에 더욱 힘을 주고는 녀석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지요. 녀석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군요. 이때다 싶었죠.
“이놈 !”
하면서 바닦에서 돌을 줍는 시늉을 하니까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겁니다. 통쾌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이기는게 어이없었고 그 동안 당한 것을 생각하니 더욱화가 나더군요. 전 그날 만나는 녀석들마다 초전박살, 임전무퇴, 백전백승이었지요. 그러기를 4일 만에 이제는 녀석들이 내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도망가더군요. 전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오장이 시원하고 육부가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아침마다 고민거리가 없어졌고 배달일은 무엇보다도 즐거웠습니다. 개들한테만은 절대적인 군림자였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한창 배달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가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 다니면서 저런집에는 누가 살까? 하고 늘 부러워하던 언덕위의 하얀 집, 아주 정원이 넓은 집에서 내일부터 신문을 넣어 달라는 겁니다. 이게 웬 떡이냐! (신문구독 요청을 받으면 수당도 받고 칭찬도 받고 아주 좋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자기 집에는 개를 3마리 키우는데 저녁에는 개를 풀어 놓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대문은 잠가 놓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대문사이에 꼭 신문을 끼워 달라는 겁니다.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저는 걱정하지 말라며 잘 넣어드린다고 인사까지 하고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개가 뭐가 무섭나!’ 자신이 있었지요. 저는 그집의 개들을 쭉 째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었지요. 외국산 개라서 그런지 만만치 않게 쳐다보더군요. 전 씩- 웃으면서 속으로 말했죠. ‘며칠만 기다려라. 귀여운 자식들...’ 그리고 배달하기를 며칠. 저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집은 언덕위에 있어서 아래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50미터 정도를 올라가서 신문을 대문에 끼워두고는 그 집 개들을 노려보고 주머니의 돌멩이를 한번 보여주고 주먹질도 한번하고 돌아서서 집 나무 밑에서 시원하게 볼 일도(꼭 거기가면 소변이 마렵데요)보고 담배하나를 물고는 유유히 하늘을 보고 다시 개들한테 인상을 쓰고는 내려오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날도 신문을 대문에 끼워놓고 개들을 찾으니 개들이 안 보이는 겁니다, 이 녀석들이 다들 자나? 하고 돌아서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있는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갑자기 뒤꼭지가 근질근질한 것이 아닙니까? 얼른 뒤 돌아 보니, 아 글쎄 그집 개들이 어느샌가 제 뒤로 다가와 제가 볼일을 보고 있는 걸 빤히 보고 있지 뭡니까.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 아!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데... 그러나 기선을 제압하기엔 보던 볼일도 남아있고 자세도 엉거주춤하고 걱정이 앞서더군요. 누가 대문을 열어논 모양입니다. 그러나 전 저를 달래며 ‘침착’,‘침착’을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볼일을 마치고 뒤돌아섰지요. 그때까지 녀석들은 외국산 개라서 그런지, 아니면 비겁하게 볼일을 보고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했는지 아무 행동이 없더군요. 그런데 뒤돌아 서자마자 으르렁거리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하얀 달빛아래 까만 개들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하얀 콧김에 아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저녀석들 한테 한 번씩만 물려도 최소한 상이용사 내지는 사망신고서 작성하러 동사무소에 사람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요. ‘이미 기선을 못 잡았으니 어쩌지?’ 그때 주머니의 돌멩이를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아뿔사! 그 동안 동네 개들 위에 주름답고 다니느라 돌멩이가 필요없어서 모두 버려버린 것이 아닙니까? 후회해도 소용없고 유비무한의 정신을 늘 새기지 못한 제 자신을 원망햇지만 지금은 전시상태라 그것만 생각할 순 없었지요. 설령 있다고 해도 송아지만한 개 세마리를 동시에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옮겨 봤습니다, 옮기자마자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등에서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래서 작전을 바꿨지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개들을 향해 말했지요. ‘너희들 나와 있었구나. 잘 잤니? 무척춥지?’ 전 평소에 안 하던 애교를 부리면서 살살 내려갔지요. 아, 그런데 이것들이 내가 발만 옮기면 으르렁 거리는 겁니다. 이거 참 보통 큰일이 아니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상시에 잘 보일 걸 괜히 인상을 쓰고 겁을 준 걸 후회도 해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녀석들이 내 주위를 돌며 곧 물어버릴 듯이 으르렁 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많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만히 조심스럽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지요. 그리고 그중 제일 순하게 생긴 녀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착하다. 이쁘다.’를 연발했습니다. 역시 개들은 단순하데요. 그러기를 한 10분 지나니까 이녀석이 이제는 경계심을 풀고 눈을 지그시 감고는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기어오르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녀석들도 서로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닙니까. 말릴 수가 있어야지요. 한 녀석은 연신 저의 얼굴을 그 징그러운 혀로 문지르고 한 녀석은 무릎위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고 또 한 녀석은 자기도 해 달라고 자꾸 파고드는 겁니다. 참아야 한다. 어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수모를 참으며 아줌마를 불렀지요. 그것도 큰 소리로 부르면 녀석들 비위를 거스를까봐 작은 소리로 불렀습니다. “아줌마! 아줌마(아주작은 목소리로)” 들릴리가 있겠습니까? 때는 동지섣달 추운 겨울이라 다들 문을 꼭꼭 닫고 잘 테고 더군다나 새벽3시니... 게다가 주위에 집도 없는 언덕이라 난감하더군요. 여기서 오토바이까지는 50미터. 뛰어가면 될까? 안 되겠지. 이녀석들과 싸워볼까? 안돼! 1대3이면 불리하지. 더군다나 무기도 없고 ... 할 수없다. 끈기로 버티자. 그런데 이때! 갑지기 무릅이 시원해지는 겁니다. 꼭 곰같이 생긴 녀석이 제 무릎위에 걸터앉아서는 볼일을 보는 겁니다.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많이 참았는지 한참 동안이나 볼일을 보더군요. 그리고는 시원한지 제 얼굴을 혀로 문지르더군요. ‘참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30분, 1시간, 2시간... 저는 그 언덕에서 2시간 30분 동안이나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야 했습니다. 한쪽 다리는 젖어서 추위에 얼어있고 이놈 쓰다듬으면 저놈이 으르렁거리고 저놈 쓰다듬으면 저놈이 으르렁거리고 저놈 쓰다듬으면 이놈이 으르렁거리고...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못난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그때 그 순간에는 개 소변보다도 추위보다도 흉측스럽게 드러난 그놈들의 이빨이 더 무서웠으니까요. 개머리를 두 시간이상 쓰다듬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도 세 마리를 번갈아 가며... 전 해냈습니다. 그 추위와 싸우면서도 그 수모를 견디면서도 오직 살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이겨낸 겁니다. 그리고 2시간 30분 정도가 흐른후 나오신 아줌마! 제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던군요.
“총각은 개를 무지 좋아하나 봐요.”
저 머리에서는 오토바이 시동이 꺼지던군요. 기름이 다 떨어졌던 겁니다. 전 그날 주유소를 찾아서 오토바이를 끌고 추위에 얼은 다리 절룩거리며 다시는 개를 쳐다보지도 않겠노라고 맹세를 하고 또 했습니다.
ps. 개들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자주 쓰다듬어 줍시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평생 쓰다듬을 일을 하루만에 다 하는 수가 생깁니다. 그리고 전국의 신문 배달사원 여러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늘 주머니에 돌멩이를 잊지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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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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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2/3)
2
'성실'이란, 쉽게 말하자면 '정성스럽고 참되어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성, 실' 두 글자 가운데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이며, '성'이 유교의 도덕 사상 가운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의 개념을 깊이 다룬 유교의 고전으로서 '중용'이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중용'에서는 '성'을 단순한 윤리적 개념으로 이해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립함으로써, 윤리의 절대적인 바탕으로 삼을 것을 꾀하고 있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다. 성실하고자 힘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본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 첫째는, 성실을 '천리의 본연'이라고 이해한 주자학의 전통을 따라서, '성실은 천지 자연의 이법으로서, 만물의 실재와 생성을 좌우하는 기본 원리이며, 이 성실의 원리를 본받아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 조금도 망령됨이 없도록 살기에 힘쓰는 일은 인간의 도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둘째는, 정현의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서, '본래부터 성실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은 하늘이 낳은 성인의 도요, 수양과 노력으로써 성실의 덕을 닦고자 힘쓰는 것은 범용한 일반인의 도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위에 인용한 '중용'의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둘째 번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용'의 다른 여러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첫째 번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성 또는 성실을 천지 자연의 근본 원리로 보든 혹은 인간적 행위의 세계에 국한된 원리로 보든 그것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믿는 것이 유교 사상의 전통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는 지, 인, 용을 덕의 가장 주요한 것으로 가르쳐 왔거니와, 그 지, 인, 용의 공통된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인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성은 실로 인격을 완성하고 통일하는 기본 원리다. 성을 천지의 도니 자연의 이법이니 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끌어들인다면, 이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문제를 떠나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행위의 원리로서 볼 때, 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들의 상식으로도 그 윤곽은 알 수 있음직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거짓이 없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만 여기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함은 단순히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할 때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정성을 다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 있으며, 처지를 바꾸어 남의 사정을 깊이 고려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성실의 도는 결코 멀리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의 정'을 따라서 삼가 생각하고 삼가 행동하는 가운데에 바로 성실이 있다. 그러기에 '중용'에도,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람이 도라고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덕의 근본 원리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실의 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헛되이 먼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앞에 닥친 일에 관하여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같이 보이더라도, 일거일동을 참되게 함으로써 말과 행동 사이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곧 성실을 실천하는 길이다. '중용'에,'일상 행해야 할 중용의 덕을 실천하고, 일상 생활에서의 말을 삼감으로써, 행동에 부족함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애쓰고, 말에 지나침이 없도록 힘써 조심한다. 말은 행동을 돌이켜보고 행동은 말을 돌이켜본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조심을 하고,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앞뒤를 생각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는 지나치게 근엄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실의 근본 정신이 지나치게 근엄하고 쉴사이없는 긴장 속에 조심만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말한다면,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동시에 남에게도 충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교적 해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성실'의 근본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음'에 있는 것이요, 도학자적인 근엄성이나 실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위축된 소심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깊은 곳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름아닌 성실의 덕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성실은 참된 용기를 포함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행위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유교의 지도적 사상가들은 성을 지와 인과 용이 그 가운데 포함되는 큰 원리로 보고, 인격의 완성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덕목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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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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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9월 11일 톨리에 거리에서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리로 온다. 나는 오히려 여기에서 죽어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었고, 덕분에 나머지 일들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임산부 하나를 보았다. 그녀는 높고 따스한 담가를 따라 무겁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담이 없어지지 않았나 확인이라도 하는 양 자꾸 더듬어 보곤 했다. 물론 담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도를 꺼내 찾아 보았다. 시립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그렇다. 그 여자는 해산을 하러 가는 길인 모양이다.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걸어 가니 생 자크 거리가 나왔는데, 둥근 지붕의 큰 건물이 있었다. 지도에는 발 드 그라스 육군 병원이라 되어 있었다. 원래 이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골목길을 들어서니 사방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 복합적인 냄새 중에서도 유난히 요오드 포름 냄새와 감자튀김의 기름 냄새, 불안의 냄새가 강렬히 풍겨 왔다. 어느 도시든지 여름이면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그리고는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은 집을 한 채 보았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집이었지만 문 위에는 상당히 또렷한 글씨로 "간이 숙박소"라고 씌어 있었다. 출입구 옆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읽어보았는데,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그 밖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멈춰 서 있는 유모차 안에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통통하고 푸른 빛이 돌았으며 이마에는 종기 자국이 선명했다. 종기는 다 나아서 그것 때문에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고, 입을 벌린 채 요오드 포름과 감자 튀김을 불안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창문을 열어 놓고 자는 것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나의 잠버릇이다. 전차는 내 방을 지나 빵빵거리며 질주한다. 자동차가 내 위로 지나간다. 문이 닫힌다. 어디선가 유리창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나고, 나는 커다란 조각들이 웃는 소리와 작은 파편들이 킥킥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갑자기 다른 쪽에서, 그러니까 집안에서 둔탁하고 갇힌 듯한 소음이 들려온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온다. 오고 있다. 쉬지 않고 오고 있다. 거기 있다. 거기에 한참 서 있다. 마침내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 소녀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다. "입닥쳐. 듣기 싫어." 전차가 몹시 흥분해서 달려오고, 저 너머로, 모든 것 너머로 달려가 버린다.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행여 질세라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간다. 개가 짖는다. 개라는 동물은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른다. 아침 무렵에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듣는 것은 한없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다 갑자기 잠이 들었다. 이것은 소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침묵이다. 큰 불이 나면 자주 극도로 긴장된 순간이 들어선다. 분수처럼 치솟던 물줄기가 약해지고, 소방관들이 더 이상 사닥다리 위로 기어올라 가지 않고,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있다. 소리도 없이 시커먼 돌림띠가 밀려 올라가고, 사정없이 솟구치는 불길을 뒤로하고 높은 담이 소리도 없이 기울어진다. 모든 것이 정지하고, 어깨를 움츠리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로, 끔찍한 일격을 기다린다. 여기서의 침묵도 그런 것이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것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오고, 여는 때 같으면 늘상 사라졌던 곳에서 그치지를 않는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내면이 내게 있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오늘 편지를 한 장 썼다. 그러면서 문득 여기 머무른 지 3주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곳에서였더라면, 가령 시골에서의 3주라면 하루와 같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몇 해가 흐른 것 같다. 더 이상 편지 따위는 쓰지 말아야겠다. 내가 변해 가고 있음을 누군가에게 말해 무엇하겠는가? 만약 내가 변해 가고 있다면 당연히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그 무엇이라면, 당연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 낯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말했던가?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그렇다, 이제 시작했다. 아직은 잘 안 된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을 잘 이용할 작정이다. 예컨대 얼굴 수가 몇인지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얼굴 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모두들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한 얼굴을 몇 년 동안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얼굴은 망가지고, 더럽혀지고, 주름지며, 여행 중에 끼었던 장갑처럼 늘어난다. 그런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그 나머지 다른 얼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잘 보관한다. 그들의 아이들이 그것을 달고 다녀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기르는 개가 그것을 달고 나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안 될 것도 없지 않는가? 얼굴은 얼굴일 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섬뜩할 정도로 재빨리 하나씩 하나씩 얼굴을 만들어 내고, 갈아 치운다. 처음에는 영원히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마흔 살도 채 안 돼서 이미 마지막 얼굴이 나오게 된다. 물론 그것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경우이다. 그들은 얼굴을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마지막 얼굴은 일주일만에 해지고 군데군데가 종이장처럼 얇아진다. 그러고는 조금씩 조금씩 밑바닥이 드러나서 얼굴이라 할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른다. 결국 그들은 그 모양을 하고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그 여자, 바로 그 여자는 두 손에다 얼굴을 파묻은 채 아주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노트르담 샹 거리의 모퉁이에서였다. 나는 그 여자를 보자마자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가엾은 사람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는 방해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에게 어떤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그 텅 빈 거리는 따분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제대로 뗄 수도 없었다. 나막신이라도 신은 것처럼 걸을 때마다 사방에서 따각따각하는 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나 재빠르고 격렬하게 일어났지만 두 손은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얼굴의 텅 빈 형식이었다. 이 여자의 손만 보고 그 손 틈으로 드러난 갈갈이 찢겨 있는 얼굴을 보지 않기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손 안에 있는 얼굴을 보는 것도 끔찍했지만, 상처를 입고 드러난 얼굴 없는 머리는 훨씬 더 무서웠다. 무섭다. 일단 무섬증을 느끼면, 이에 대항해서 뭐라도 해야만 한다. 여기서 병이 나는 것은 매우 추한 일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시립 병원으로 옮겨 버린다면, 틀림없이 나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그 병원은 쾌적한 병원이고, 환자도 엄청나게 많다. 여기에서는 파리 성당의 전면을 제대로 살펴볼 수도 없을 지경이다.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그 안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왔을 게 뻔한 자동차에 치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소형 마차들은 계속 경적을 울린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환자일지라도 이 빌어먹을 병원으로 똑바로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사강 공작의 마차라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들은 완고하게 마련이어서, 마르틸 가의 고물상 르그랑의 마누라가 이곳으로 실려 올 경우라도 파리 시 전체의 교통을 차단시킬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독한 소형 마차들에게는 가장 숭고한 죽음의 고통이 그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매우 자극적인 반투명 유리창이 끼워져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위의 상상력 정도면 충분하다. 상상력이 더 풍부해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면 곧 그러한 추측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난다. 그러나 덮개 없는 합승 마차와 정상 요금에 따라 운행되는, 덮개를 열어 젖힌 시간제 전세 마차가 오는 것도 보였다. 임종의 시간을 맞는 데에 2프랑이 드는 것이다.
이 유명한 병원은 무척 오래 되어서, 클로비스 시대에도 이미 그 병원 안에 있는 몇 개의 침대에서 죽어 간 환자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559개의 침대에서 사람들이 죽어 간다. 물론 대량 생산 방식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대량생산인 탓에 각각의 죽음이 썩 훌륭하게 치러지지는 않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워낙 많이 죽어 나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훌륭하게 완성된 죽음을 위해 뭔가를 하려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는 풍족하게 죽음을 치러 낼 수 있을 법한 부자들조차 나태하고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독자적인 방식으로 죽고자 하는 소망은 점점 드물어진다. 얼마 안 있으면, 독자적인 삶만큼이나 드물어질 것이다. 맙소사, 그것이 전부이다. 세상에 태어나서는, 이미 모든 것이 만들어져 있어 그저 사서 입기만 하면 되는 기성품 같은 삶을 산다. 그리고 이내 사람은 세상을 떠나고 싶어하거나 혹은 떠나도록 강요를 받게 된다. 이제 죽음을 위한 아무런 수고도 필요 없다. "선생, 이것이 당신의 죽음이오." 그러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것과 같이 덧없이 죽는다. 그리하여 사람이 갖고 있는 질병의 일부인 죽음에 이른다.(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든 질병을 알게 된 이후, 여러 치명적인 결말이 질병에 속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병자는 속수무책인 셈이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깊이 감사하면서 기꺼이 죽어 가는 요양소에서는 그 시설에 알맞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기꺼이 봐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집에서 죽을 경우에는 당연히 훌륭한 계층에 어울리는 점잖은 죽음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상류 계급의 장례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놀랄 만한 관습들 전체가 잇따라 나온다. 이때 가난한 사람들은 그 집 앞에 서서 실컷 구경한다. 가난한 자들의 죽음은 진부하고 별반 격식도 없다. 그들은 대충 들어맞는 죽음이면 만족한다. 그것은 조금 헐거워도 괜찮다. 가람들은 여전히 조금씩 자라나고 있으니까. 앞여밈이 채워지지 않을 정도로 꽉 죄거나 숨이 막힐 정도로 목이 죄일 때에만 문제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아는 사람도 없는 고향을 생각해 보면, 이전에는 사정이 달랐던 게 틀림없다. 예전에는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듯이, 죽음 또한 자신들 속에 내재한다고 믿었다(혹은 그렇게 예감했다). 아이들은 조그마한 죽음을, 어른들은 커다란 죽음을 갖고 있었다. 여자들은 뱃속에, 남자들은 가슴 속에 죽음을 담아 두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독특한 품위와 조용한 자부심을 가져다주었다. 늙은 시종관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브리게도 당신 안에 죽음을 담아 두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죽음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두 달 동안 계속되었고 앞채에까지 들릴 정도로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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