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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8호 2022.12.12 월요일 (음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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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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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의 재산이요, 유일한 재산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다. 결코 그 재산을 남이 우리 대신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 칼 샌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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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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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표준어 제정, 국가 독점?…오늘도 ‘손사래’
오늘도 뭉그적거리다 마을버스를 놓쳤다. 처마 밑 길냥이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 언덕 위로 내달리는 버스를 쫓아가며 “여기요!” “버스!”를 외쳤지만, 무정한 버스는 못 들은 척했다.
2년 전 ‘국가 사전 폐기론’이란 자못 다부진 제목의 칼럼을 썼다. 올봄엔 <표준국어대사전> 전면 개정 소식을 듣고 ‘국가 사전을 다시?’라는 제목으로 무려 세 편의 칼럼을 썼더랬다. 줄곧 국가는 사전 편찬에서 손을 떼라는 얘기였다.
토론회를 제안했다. 국립국어원, 사전 편찬가,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시민들이 모여 말을 나누고 싶었다. 드디어 12월15일(목) 오후 2시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국가 사전과 언어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학술발표회가 열린다. 앞의 세 부류의 분들은 모셨다. 시민들만 오시면 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자리가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오시길(공교롭게도 다음날(12월16일) 한국사전학회에서 ‘규범 사전의 성격과 역할’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
국가가 성문화된 철자법(맞춤법)을 제정하고, 표준어를 선정하고(=비표준어를 지정하고), 사전 편찬마저 독점적으로 차지한 상황은 세계적으로 매우 이례적이고 괴이하다. 국가가 말의 규범(어문규범)을 독점하고 어떤 말이 맞고 틀렸는지 채점해주는 체계 속에서 언어민주주의는 요원하다. 이 체계를 바꿔야 한다. <표준사전>을 아무리 ‘현대적으로, 쌈박하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전 개정 작업은 이미 진행 중.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기다. 하지만 계속 흔들다 보면 혹시 모르지, 정류장을 좀 벗어나 멈춰 서는 버스기사를 만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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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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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星라디오 - 김수영
金星라디오 A 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五백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아내는 이런 어려운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
나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다
아이놈은 라디오를 보더니
왜 새 수련장은 안 사왔느냐고 대들지만
<1966.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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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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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용문(登龍門)
登:오를 등. 龍:용 룡. 門:문 문.
[반의어] 점액(點額). 용문점액(龍門點額). [출전]《後漢書》〈李應傳〉
용문에 오른다는 뜻. 곧
① 입신 출세의 관문을 일컫는 말.
② 영달의 비유.
③ 주요한 시험의 비유.
④ 유력자를 만나는 일.
용문(龍門)은 황하(黃河) 상류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는 협곡의 이름인데 이곳을 흐르는 여울은 어찌나 세차고 빠른지 큰 물고기도 여간해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오르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용문에 오른다’는 것은 극한의 난관을 돌파하고 약진의 기회를 얻는다는 말인데 중국에서는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입신 출세의 제일보라는 뜻으로 ‘등용문’이라 했다.
‘등용문’에 반대되는 말을 ‘점액(點額)’이라 한다. ‘점(點)’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인데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물고기를 말한다. 즉 출세 경쟁에서의 패배자, 중요 시험에서의 낙방자를 가리킨다.
후한(後漢) 말, 환제(桓帝:146~167)때 정의파 관료의 지도적 인물에 이응[李應:자는 원례(元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청주자사(靑州刺史), 촉군태수(蜀郡太守), 탁료장군(度遼將軍)을 거쳐 하남윤(河南尹:하남 지방의 장관)으로 승진했을 때 환관의 미움을 받아 투옥 당했다. 그러나 그 후 유력자의 추천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경찰청장)가 되어 악랄한 환관 세력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나날이 올라갔다. 태학(太學)의 청년 학생들은 그를 경모하여 ‘천하의 본보기는 이원례’라 평했으며 신진 관료들도 그의 추천을 받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알고, 이를 ‘등용문’이라 일컬었다.
[주] 황하 : 청해성(靑海省)의 암네 마친 산맥에서 발원하여 황토 고원을 침식하면서 동쪽의 발해만(渤海灣)으로 흘러 들어감.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 길이 4100Km. 황하(黃河)의 큰 지류인 위수(渭水) 유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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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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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1장 재편되는 북방
2. 진목공의 꿈
유여의 귀순
그 후의 일이었다. 서융(西戎)의 주인 적반이 진(奏)나라를 시찰하러 왔다. 그는 진나라가 자못 강성한 걸 보고서 크게 부러워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서융에 돌아간 적반이 유여에게 말했다.
"경은 진나라에 가서 모든 걸 시찰하고 겸하여 진후(奏侯)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잘 보고 오시오."
이에 유여는 진나라로 갔다. 진목공은 유여를 맞이하여 궁원에서 함께 노닐면서 삼휴대로 올라갔다. 진목공은 대(臺)에서 굽어보이는 화려한 궁실들과 아름다운 궁원을 자랑했다. 유여가 물었다.
"이 모든 것을 만드는 데 귀신을 부렸습니까, 또는 사람을 부려 만들었습니까. 귀신을 부렸다면 귀신들이 괴로웠을 것이며, 사람을 부렸다면 아마 백성들이 참으로 힘들고 괴로웠겠습니다."
진목공이 그 말을 이상히 생각하고 물었다.
"그대 오랑캐 나라는 예악과 법도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지요?"
유여가 웃고 대답했다.
"예악과 법도가 중원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옛날에 성주들은 글로 법을 지어 백성과 굳게 약속하고서 겨우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점점 교만하고 음탕해져서 예악이란 명색만을 내세우고 실은 임금이 사치를 하고 법도의 위엄만 내세우고 아랫사람을 들볶았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원망은 나날이 높아가고 따라서 군위를 뺏기 위해 임금을 죽이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이 순후한 덕으로써 아랫사람을 대하므로 아랫사람은 충(忠)과 신(信)으로써 임금을 섬깁니다. 위와 아래가 한결같아 서로 속이는 일이 없고 글로 약속한 법을 서로 어기는 일이 없어서 특히 다스려야 할 필요조차도 없게 됐으니 이것을 지극한 다스림이라고 합니다."
진목공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진목공은 돌아가 유여에게서 들은 바를 백리해에게 말했다. 백리해가 대답했다.
"유여는 원래 진(晋)나라 사람으로서 비범한 인물입니다. 신은 전부터 그의 높은 명성을 들어왔습니다."
진목공은 더욱 불쾌했다.
"과인이 듣건데 이웃 나라에 성인이 있다는 것은 근심거리라고 합디다. 이제 유여처럼 훌륭한 사람이 오랑캐 밑에서 벼슬을 살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 진나라의 걱정이 아닐 수 있겠소?"
백리해가 의견을 내놓았다.
"내사 요는 기발한 지혜가 많습니다. 주공께선 이 일에 대해서 그와 함께 상의하십시오."
진목공은 즉시 내사 벼슬에 있는 요를 불러 이 일을 상의했다. 요가 아뢰었다.
"융주(戎主)는 궁벽하고 황량한 곳에 살므로 아직 중원의 번화한 음악을 모릅니다. 주공께서 시험삼아 아름다운 여자와 화려한 음악을 보내어 그 뜻을 흐리게 해보십시오. 한편 유여는 보내지 말고 적당한 시기까지 이 곳에 붙들어 두십시오. 오랑캐가 정치를 폐하다시피 게을러지고 따라서 그들의 상하가 서로 의심하게 되면 그 나라도 능히 빼앗아 우리 것으로 할 수 있거늘 하물며 그 신하 한 사람쯤이야 염려할 것 있습니까."
"그 말이 가장 그럴 듯하오."
그 뒤, 진목공은 늘 유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같은 그릇에 먹으면서 그를 적반에게 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건숙, 백리해, 공손지들이 교대로 늘 유여와 함께 사방으로 다니면서 지형을 살피고 진나라 군사들의 병세 강약을 시찰했다. 유여는 마치 진나라의 대부가 된 것처럼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 한편 진목공은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키고 음악에 정통한 사람 여섯을 골랐다. 드디어 내사 요는 그 미녀와 악공 여섯 사람을 데리고 오랑캐 나라로 가서 적반에게 바쳤다. 융주(戎主) 적반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날마다 음악을 즐기고 밤마다 그 아름다운 여자를 끼고 놀기에 정신이 빠져 마침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유여는 일 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진나라를 떠나 서융(西戎)으로 돌아갔다. 적반이 수상한 눈초리로 유여를 보며 말했다.
"진나라에서 뭘 했기에 이제야 돌아왔소?"
유여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신은 돌려 보내달라고 졸랐으나 진후가 굳이 붙들고 놓질 않아서 겨우 이제야 왔습니다."
적반은 유여가 딴 생각을 품고 있는 걸로 의심하고 전처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유여는 적반이 밤낮없이 여자와 음악에만 빠져 도무지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 걸 보고서 거듭거듭 간했다. 그러나 적반은 유여가 간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목공은 사람을 비밀히 서융으로 보내어 유여를 초청했다. 드디어 유여는 오랑캐를 버리고 진(秦)나라로 귀순했다. 진목공은 유여를 맞이하여 그에게 아경(亞卿) 벼슬을 주고 건숙, 백리해와 함께 나랏일을 보게 했다. 마침내 유여는 진목공에게 서융을 치도록 계책을 아뢰었다. 이에 진나라 삼군(三軍)은 물밀듯이 서융으로 쳐들어갔다. 유여의 지시를 받은 삼군은 서융의 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무찔렀다. 적반은 진나라 군사를 도저히 당적할 수 없어 드디어 진에게 귀순하기로 작정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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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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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사랑의 길 위에서
-고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께
한번도
당신을 만난 적이 없지만
당신을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동해의 바닷바람, 가을바람이
가슴을 적십니다
당신의 그 온전한 봉헌은
우리를 울게 합니다
1909년 6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1936년 3월 사제로 서품되시고
1950년 10월 41세로 생을 마치실 때까지
당신의 매일은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타오른 불꽃이었으며
그분의 수난에 동참한 거룩한 미사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 가지 않고
죽음이 더 가까운 위험지대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신부님
어리석게도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단 한 명의 신자를 위해서도
사제는 희생할 의무가 있다며
스스로 피 흘려 제물되신 신부님
"교회의 앞날을 위해
나보다 더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고 그들의 월남길을 돕는
길잡이로 온갖 고초를 겪으시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신 분
감옥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고
어둠과 악취뿐인 방공호 속에서
총을 맞고 숨져 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보다 이웃을 더 많이 생각했던
당신은 진정 또 하나의 예수였습니다
죽어 가는 동료들의 신음소리 들릴 때마다
"응, 내가 가지요. 내가 도와 드리지요"
"물을 떠다 드릴텐데 일어날 수가 없군요"하고
극심한 고통중에서도 이웃을 향해
사랑의 헛소리를 되풀이하셨던 신부님
앉지 않고 꿇어서 고해성사를 들으시고
잠시 머물던 나그네와 헤어질 때도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강복을 주시며 눈물 흘리셨던 신부님
당신은 진정 위대한 성자
잊혀짐을 두려워 않는 겸손한 성자였음을
이제 우리는 다시 압니다
이웃을 살리는 사랑의 길이 되어
당신은 오래 전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죽음보다 강한 그 믿음, 그 사랑은
당신이 목숨 바쳐 사랑했던
한국 교회 안에, 우리 가슴 안에
더 깊이 뿌리내려 열매 맺고 있음을
하늘나라에서 기뻐해 주십시오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선한 목자로서
11년 동안 밤낮으로 애쓰시던
이곳, 양양성당에 와서
우리는 당신의 손때 묻은 기도서와
남루한 제의를 만져보며
사랑의 숨결을 느껴 봅니다
당신의 시신이 묻힌 원산
가깝고도 먼 북녘 땅을 바라보며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찬미했던 주님을
우리도 새롭게 찬미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갈라져서 상처가 많은
우리 겨레의 화해의 일치를 도와 주십시오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 행동이
당신처럼 두려움 없는 사랑일 수 있도록
더 깊고 큰 믿음을 뿌리내리게 해주십시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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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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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향녕편"
법학자. 소설가. 충남 아산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문교부 차관, 홍익대 총장 역임. 30년대에 '금성'에 단편 소설을 발표한 바 있는 이향녕은 춘원 이광수에 사사하기도 했다. 1959년 장편 소설"교육 가족"을 발표했고, 뒤이어 장편 "창산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로서보다는 법학 교수로, 변호사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었다.
깨어진 그릇
광복 전에, 나는 경남에서 군수 노릇을 한 일이 있다. 광복이 되자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나마 속죄가 될까 하여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이 전비에 대한 속죄가 되는지에 관해선 지금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가장 신성한 사업이다. 그런 사업에 죄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속죄를 한답시고 교육계에 들어온 것이 교육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 학교 평교사 되기를 바랐다. 기왕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기초가 되는 일부터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국민 학교의 평교사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국민 학교 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었다. 도청에서는, 차라리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학교의 교사가 되라고 권했다. 나는 한사코 국민 학교에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자격 없는 사람을 발령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교장은 관리직이므로 나의 경력을 참작하여 발령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동래군의 어느 국민 학교 교장이 되었다.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한 것은 1945년 12월 초순, 날씨가 퍽 쌀쌀했다. 광복을 맞은 지 4개월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교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교장이 온다는 바람에 무척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택이 학교 안에 있어서, 이삿짐을 운동장가에다 풀어 놓았다. 그리고, 사람을 사서 짐을 나를 작정이었다. 그랬더니, 상급반 아이들이 달려들어 이삿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모두 사택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궤짝을 열어 보니 사기 그릇은 거의 다 깨져 있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남의 소중한 그릇을 다 깨어 놓았는가? 나는 아이들을 몹시 미웠다. 그리고, 이 철부지들을 어떻게 상대하며 살아갈까, 차라리 중학교로 갈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 날, 나는 깨어진 그릇들을 바라보며 우울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사택을 나왔다. 사택을 막 나오는데 꼬마들이 달려와,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하며 매달렸다. 남루한 옷,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과 손, 그들은 나의 모처럼의 새 단장을 마구 더럽혔다. 나는 또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버릇 없는 놈들이 어디 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국민 학교에 온 것을 또 한 번 후회했다. 조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정중한 어조로 일장 훈시를 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나의 위엄을 떨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줄이 엉망인데다가 제멋대로 떠들고 주저앉고 옆 사람을 쿡쿡 찌르고, 무질서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런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질까, 교육의 길은 이렇게 험난한 것인가, 나의 뜻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서글픈 생각이 가슴 속에 꽉 차 왔다. 나는 조회가 끝나자 산길을 혼자 걸었다. 잠시도 학교에 있기가 싫었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산길을 걸어 어느새 범어사 경내에 들어섰다. 갑자기 청정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문득 나의 과거가 회상되었다. 동족을 괴롭힌 죄 많은 인생, 나는 큰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래도 용서되어 새로이 인생을 출발할 수 있게 된 나에게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교육의 길이 험난하면 할수록 나의 속죄의 길은 넓혀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삿짐을 굴리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릇을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되어 부임하는 마당에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고독한 사람이겠는가? 천진 무구한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어린이들의 호의가 뼈아프도록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또 내 새 단장을 더럽힌 꼬마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들어 나의 새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내가 결코 제외된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때낀 얼굴과 손, 나는 갑자기 달려가 그들을 덥석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의 훈시를 듣는 어린이들이 만일 일사 불란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처음 보는 나를 무섭게 알고 경계하는 뜻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무질서를 탓한 건, 나에게 대한 그들의 친근감의 표현을 내가 오독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무질서한 모습들이 정답게 다가왔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또, 코를 흘리는 꼬마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그 중 한 놈을 덥석 껴안아 주었다. 그 후 나는, 나의 그릇을 깬 그 어린 손, 나의 옷을 더럽힌 그 코흘리개들의 때 낀 손, 그리고 무질서로써 나를 따르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만족과 사랑을 느끼었고, 날마다 희열에 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매, 이제 내가 교육의 길에 들어선 지 20년, 나는 때때로 그 깨어진 그릇, 그 때 낀 어린 손들을 생각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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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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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3부 국어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국어 공부, 어떻게 해 왔나(2/2)
다음은 중학국어 책이다.
- 이렇게 사람이면 누구나 언어는 사용한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다를지라도, 누구나 언어로써 의사 소통을 한다. 우리는 언어로 새 소식을 듣고 알리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 가진다. 우리는 언어로 다투기도 하고 화도 낸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조상의 많은 업적을 이어받을 수도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더 깊고 많은 지식을 아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힘의 원천은 언어이다. (중학 국어 1-2)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주 단순하여 누구든지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우리가 보통으로 지껄이는 쉬운 말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는데, 이 글은 공연히 한자말을 써서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여기 나오는 말 가운데서 일곱 번이나 나오는 언어 란 말은 모두 말 이라 고쳐쓰는 것이 좋다. 언어를 사용한다 고 한 것도 말을 한다 고 하면 그만이다. 이 글을 쉬운 말로 고쳐 다시 써 보자.
- 이렇게 사람이면 누구나 말을 한다. 비록 하는 말이 서로 다르더라도, 누구나 말로 생각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말로 새 소식을 듣고 알리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 가진다. 우리는 말로 다투기도 하고 화도 낸다. 우리는 말과 그 말을 적은 글 때문에 조상의 많은 업적을 이어받을 수도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더 깊고 많은 지식을 쌓아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힘의 원천은 말이다.
한자말은 아니지만 다를지라도 -로써 따위 말은 글에서만 써온 말이니 살아 있는 입말로 고쳐 쓰는 것이 좋다. 이런 우리말로 된 글말도 요란한 한자말로 된 문장에 잘 섞여 쓰인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날마다 언어를 사용하여 생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매우 적다. (같은 책)
이 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날마다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말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적다 이렇게 쓸 것이다. 여기 한문글자를 묶음표 안에 적어 놓았는데, 한문글자가 있어야 이런 말을 알 수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한문글자 없이 이런말을 읽도록 해 놓았고, 더구나 사용한다 는 말은 초등학교 1학년 책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한문글자를 배운다면 아주 한문책으로 시간도 따로 정해서 배우는 것이 옳다. 이렇게 우리말을 우리 글로 적는데까지 쓸데없이 한문글자를 끼워 놓으니, 이래서 우리말은 안 쓰고 한자말만 쓰게 된다. 말과 글이 어지러워지고 병드는 근원이 여기에 있다.
-올바른 발음 생활. (같은 책, 글제목)
일하는 생활 이라든가 공부하는 생활 이라면 말이 된다. 밥 먹고 놀기만 하는 생활 해도 말이 된다. 그런데 말하는 생활 하면 좀 이상하다. 이런 말은 실제로 쓰이지 않는다. 머리로 말을 만들어 내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글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말이다. 이런 말을 쓰니까 말이 어려워지고 글이 어려워진다. 말글살이 란 말도 언어 생활 을 바꿔 놓은 말이고, 이런 말을 쓰지 말자고 하는 까닭이 이렇다. 올바른 발음 생활을 해야 한다 고 할것이 아니다 올바른 발음을 해야 한다. 든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올바르게 발음해야 한다 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말살이가 잘못되었다 는 말이면 글을 잘못 쓰고 있다 든지, 글을 잘못 읽고있다 든지 해야 할 말이다.
- 우리가 미래를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보다 밝은 미래를 얻고자 노력한다면, 우리의 앞날은 한결 더 희망적인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더 좋은 미래를 성취하자. (같은 책)
우리말로 앞날 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교과서에서 이렇게 미래 를 쓰도록 가르치니까 신문이고 잡지고 광고문이고 모조리 미래 라고 쓴다. 이 글을 쉬운 우리말로 고쳐 써 보자.
- 우리가 앞날을 밝게 긍정해서 보고, 더욱 밝은 앞날을 얻고자 노력한다면, 우리 앞날은 한결 더 희망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더 좋은 앞날을 이뤄내자.
- 신라어는 본래 오늘의 경주 지방에서 사용되던 언어였는데, 이 지방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세하게 됨에 따라, 그 언어도 점차로 그 세력을 뻗쳐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 언어는 마침내 우리 민족 전체의 언어가 된 것이다.
- 우리 나라의 언어 통일은 이탈리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탈리아에 있어서도, 그 남쪽에 치우쳐 있는 오늘의 로마 지방이 정치적으로 세력이 커지고 문화적으로 우월해짐에 따라. 그 언어가 이웃 언어들에 영향을 끼쳐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언어, 즉 라틴어가 되었던 것이다.(중학 국어 3-2 )
이 글도 여러 가지로 잘못된 말이 많은데, 깨끗한 우리말로 다듬어서 다시 써 본다.
- 신라말은 본래 오늘의 경주 지방에서 쓰던 말이었는데, 이 지방이 정치로나 문화로 우세하게 됨에 따라, 그 말도 차츰 그 세력을 뻗쳐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 말은 마침내 우리 겨레 전체의 말이 된 것이다.
- 우리 나라의 말 통일은 이탈리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탈리아에서도, 그 남쪽에 치우쳐 있는 오늘의 로마 지방이 정치로 세력이 커지고 문화로 우월해짐에 따라, 그 말이 이웃 말들에 영향을 끼쳐 그것들을 없애고,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말, 곧 라틴어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국어 교과서에 나온 글 몇 군데를 살펴 보았는데, 이 정도만 해도 학생들이 국어 공부를 어떻게 해 왔는가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쉬운 우리말은 버리고 어려운 남의 나라 글자말을 배운다고 머리를 썩혀온 것이 국어 공부였던 것이다. 국어 공부가 제 나라 말을 버리는 공부가 되어 있다니, 이것은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엄연한 사실은 지금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고, 우리 모두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고 이어갈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말을 장송하는 행진이라 볼 수밖에 없다. 요즘 일간신문마다 나오는 대학입시준비 국어 논술 문제를 보면 대개는 별 것 아닌 내용인데 말만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런 문제에 시달려야 하는 학생들이 참으로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으니 바보 같은 어른들이 어렵게 써 놓은 글은 무슨 글이든지 모조리 쉬운 우리말로 바꿔서 읽는 슬기를 지니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디 학생들만은 글을 어렵게 쓰는 바보가 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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