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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95호
2022.6.28 (음 5.30)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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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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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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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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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물론 가끔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듣고도 그것을 분간할 줄 모른다면 똑같이 미치광이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 해리 S.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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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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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도발
말을 올바르게 쓴다고 하면 대개는 문법이나 맞춤법을 틀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사실 맞춤법이나 발음이 틀려 오해를 빚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맥락에서 어떤 ‘의도’를 의심받을 때 사태는 심각해진다. 그래서 말실수를 했으면 ‘적대적 의도’가 없었음을 이해시켜야 한다. 만일 그런 노력을 안 하고 방치하면 그것은 ‘언어적인 도발’이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일부 정치인들이 ‘교통사고’라든지 ‘세금도둑’이라는 말을 내뱉어 지탄을 받았다. 분명한 의도가 있는 도발이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윤리적인 맥락을 비틀어버린 것이다. 만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도 ‘총기사고’라 한다면 어찌 될까? 총을 쏜 사람의 행동은 안 보이게 된다. 결국은 말하는 이의 ‘의도’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제 때 징용당했던 조선인들을 이제부터 ‘구 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일컫기로 했다 한다. ‘징용’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곧 무엇을 ‘의도’하는지가 뻔히 보인다. ‘강제로’ 끌려갔다던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피해자’가 아닌 보통의 ‘취업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보통의 취업자들이었다면 이른바 ‘강점기’니 ‘식민지 시대’니 하는 말들 모두 일종의 착시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럴 때 왜 그들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일했는지 그리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에서처럼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중요하다. 2차 대전 때 큰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대감이 당시 연합국의 승리를 더욱 값지게 한 것과 같다. 유대인들도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죽은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야말로 전쟁 이후의 모든 보편적 윤리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도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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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큰사전
사전 편찬이라 하면 으레 학자들이나 출판사가 나서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 국어사전은 국가 기관인 문화부 산하의 국립국어(연구)원이 나서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전이 정부의 지원으로 편찬 중에 있다. 바로 통일부에서 지원하는 ‘겨레말큰사전’이라는 ‘작품’이다.
‘겨레말큰사전’은 남과 북이 공통 국어사전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야 통일 이후에 유용할지를 미리 설계해보는 사업이다. 이 사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오해가 있다. 무엇보다 남과 북의 언어를 한방에 통일하는 사전이라는 오해가 가장 크다. 실제 사용을 목표로 한 그러한 사전은 공통의 규범이 정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아마 이번 사전은 ‘서로 수용 가능한’ 공통 규범과 그 현실성을 검토하는 사전이라 말하는 게 옳을 듯싶다. 통일사전은 그러한 단계 없이 툭 하고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다. 독일은 분단 이전에 이미 공통된 규범을 완비했기 때문에 이러한 단계가 필요 없었다.
혹자는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하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통일이 되면 남과 북의 사전을 그냥 합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비꼬기도 한다. 그것은 남과 북의 철도를 마주 이어만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단순 논리이다. 또 너무 많은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에는 그간의 사전 편찬 진행을 힘들게 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넌지시 일러주고 싶다.
이 사전의 ‘편찬사업회’는 법정 사업 기관이기는 하나 시한이 정해져 있어 시간이 지나면 국회가 그때마다 기간을 연장해주어야 한다. 오랫동안 남과 북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다가 이제야 기지개를 켜면서 다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사업 기간도 국회에서 다소 여유를 주었다고 한다. 남은 기간에 그동안 밀렸던 행보를 힘차게 나가길 바란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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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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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 김수영
나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있는 보람이란 이것뿐이라고-
하루살이의 광무여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일을 방해한다
-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의 유희여
너의 모습과 너의 몸짓은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러우냐
소리없이 기고 소리없이 날으다가
되돌아오고 되돌아가는 무수한 하루살이
-그러나 나의 머리 위의 천장에서는 너의 소리가 들린다-
하루살이의 반복이여
불옆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벽을 사랑하는 하루살이여
감정을 잊어버린 시인에게로
모여드는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나의 시각을 쉬이게 하라-
하루살이의 황홀이여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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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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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 사물이 서로 화합하기 어려움을 일컫는 말.
《出典》'楚辭'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란, 그 성질이 전혀 반대여서, 아무래도 타협하기 어려운 사이를 말한다. 다음은《楚辭》'칠간(七諫)'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사람 일의 불행을 슬퍼하여, 太命을 붙여서
함지(咸池)에게 맡긴다.
몸은 병을 얻어 쉬지 못하고,
마음은 湯임금과 같이 끓어오르네.
얼음과 숯은 가히 써 서로 함께하지 못하니,
내 본디부터 목숨이 길지 못함을 알겠구나.
홀로 괴롭게 죽어 즐거움이 없음을 슬퍼하여,
나는 나이가 아직 다하지 않음을 슬퍼한다.
氷炭不可以相竝兮
吾固知乎命之不長
哀獨苦死之無樂兮
措余年之未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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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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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여백
3. 시지푸스의 행복
삶의 보람
사람마다 그 내용은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가운데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어떤 이한테는 한 끼니와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잠자리를 발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한테는 권력을 잡거나 재산을 축적함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한 편의 뛰어난 시(때 시)를 쓴다든가 혹은 다른 이에게는 세계의 사조를 바꿀 수 있는 철학적 책을 저술함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한 소녀에게는 예쁜 인형 하나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 수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이 어떻든지간에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인생은 중요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성취함으로써 그것을 위한 우리들의 행동과 노력이 의미를 갖는다. 실존주의 작가이며 철학자로 알려진 카뮈는,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인생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를 아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 밖의 모든 중요성은 위와 같은 물음에 비교하면 과히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작가는 만약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부정적일 때 논리적으로 자살이 따름을 암시한다. 적어도 사춘기에 인생의 의미 문제에 부딪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순간적이나마 어쩌면 고통스러운 삶을 자살로써 해결하면 어떨까 하는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에 대한 감수성이 의심스럽다.
인생의 의미라는 개념에 있어서의 '의미'란 말은 가치를 뜻한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말은 삶이 가치를 갖고 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가치는 욕망을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욕망은 어떤 소원을 성취코자 한다. 욕망은 반드시 목적적이라는 말이다. 목적을 성취할 때에 어떤 행동 혹은 어떤 상황을 가치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인 욕망과 그 밖의 정신적 욕망을 초월할 수 없다. 이런 욕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가 중요할 수 있고, 그 여러 가지가 각기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고, 그 가치들을 충족시키려는 우리들의 수많은 행위에 의미가 부여된다.
그렇다면 인생이 의미가 있는가? 이런 물음은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돈을 버는 행위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과 똑같은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 만약 전자의 물음에 대한 가부간의 대답이 가능하다면 후자의 물음도 대답을 가질 수 있어야만 된다. 과연 그럴까?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우선 어떤 조건에서 인생에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공부가 의미를 갖는 것은, 내가 진리를 배우고 싶어하기 때문이며, 돈을 벌려는 노력이 의미가 있다면, 부자가 되는 것이 나의 욕망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이 의미가 있으려면 내 일생이 어떤 인격적 존재의 욕망이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존재를 편의상, 하느님 혹은 절대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대답은 오로지 신의 존재가 전제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니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대답이 확실치 않다면 '인생의 의미'의 유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물음이다. 인생이 의미를 갖느냐 아니냐는 물음에 대답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그런 물음이 불가능하다면, 카뮈가 암시하듯, 그리고 우리들이 젊었을 때 확신했고, 오늘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듯이 우리는 자살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인생은 즐겁게 살 만한 것이 못 되는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자살까지는 않더라도 슬퍼해야 할 것인가?
한 포기의 활짝 핀 꽃은 아름답다. 한 마리의 학, 한 마리의 사슴은 우아하고 고귀하다. 그러나 한 포기의 꽃, 한 마리의 학이나 사슴이 각기 그들의 삶의 의미를 묻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그것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다. 추석날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그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몰라도 귀하고, 철 모르게 뛰노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는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귀중하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위해 애쓰며 사는 삶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꽃은 시들고, 한 마리의 학이나, 한 마리의 사슴은 죽는다. 물론 때로는 퍽 길고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한 사람의 일생은 영원한 시간에 비추어볼 때 짧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또 한 인간이 차지하는 공간은 무한한 공간에 비추어볼 때 무(없을 무)에 못지 않게 작다. 그렇다고 한 마리의 학, 한 마리의 사슴의 모습이 우아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산 어떤 종류의 인생이 보람없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체험해야 하는 여러 가지 고통이나 좌절감은 한 젊은이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짓게 하고 때로는 그를 허무주의자로 몰아넣고 최악의 경우 삶을 학대하며 자살의 길로 유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는 삶의 객관적 의미를 모를 뿐 아니라, 설사 그런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이르더라도, 한 인간의 삶 자체는 한 포기의 아름다운 들국화나 한 마리의 학이나 혹은 사슴의 존재처럼 존재하는 그것 자체로서 무한히 아름답고 고귀하고 값이 있으며 따라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존재 자체, 삶 자체가 그것만으로도 귀중하겠으나, 모든 존재, 모든 삶이 다 같이 귀중하고 가치가 있지는 않다. 모든 인간의 삶이 유별나게 귀중하다고 할 때도 모든 사람의 인생이 다 똑같이 가치 있고 귀중하고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운 인간의 삶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때 더욱 아름답다. 인간다운 삶은 인간이 각별히 타고난 기능을 발휘하는 데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능은 지적, 심미적 그리고 특히 도덕적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어떻게든 도덕적, 심미적 그리고 지적 가치를 최대한 실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한 사람의 삶은, 그가 당장 죽어 그의 육체가 곧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의 삶은 무한히 귀중하고 아름답게 승화된다.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삶 자체의 가치에 눈을 뜨고 삶 자체를 보다 귀하고 아름답게 창조해나가는 작업이다. 젊어서는 고통과 좌절감 속에서 인생을 저주할 수도 있다. 30년, 60년 아니, 90년 동안 삶의 형이상학적 혹은 종교적 의미를 찾아도 존재 일반, 우주 자체, 인생의 객관적이고 투명한 의미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생각할수록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비록 지적으로 우리들은 두터운 어둠에 가려 있어도, 우리는 그것들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엄숙함과 고귀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엄격하게 된다. 그러할 때 우리의 인생의 의미, 삶의 가치는 꽃처럼 피고 푸른 하늘처럼 높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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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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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3장
흔들리는 세상
2. 제족의 농간
송나라의 계책
한편, 정나라에서는 정장공이 죽고, 세자 홀이 군위에 올랐다. 그가 정소공(鄭昭公)이다. 그런데 정소공은 제족에 의해 쫓겨나고, 공자 돌이 군위에 오르니 그가 정여공(鄭廬公)이다. 그리고 이 정여공도 제족(祭足)의 배신에 의해 또 쫓겨났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임금을 갈아치우는 제족의 농간이 극에 이르렀다고 비난했다. 어떤 이는 그렇게 한 데에는 제족조차 어쩔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변명해 주기도 하지만. 아무튼 관중의 예측처럼 그는 간사한 꾀가 많아 몇 번이고 주공을 갈아치우는 몹쓸 짓을 번갈아 하게 되는데 그 전말은 이랬다.
정소공은 즉위하자, 여러 대부들을 각국에 사절로 보내어 정나라의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했다. 주환왕이 정나라를 치다가 패한 후 정나라에 대한 열국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제족은 송나라에 사절로 갔다. 그가 특히 송나라로 간 이유는 정소공의 동생 공자 돌이 송나라에 가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자 돌의 생모(生母)는 송나라 옹씨(雍氏) 집안 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옹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옹씨 집안은 송나라의 궁중과 사사로운 인연이 매우 깊었다. 그래서 송장공(宋狀公)은 옹씨 일가(一家)를 마치 자신의 일가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옹씨는 성격도 활달하고 출중한 외손(外孫) 공자 돌이 어떻게 하든 정나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틈이 나면 송장공에게 부탁했다.
"우리 공자 돌이 정나라로 갈 수 있도록 힘써 주시옵소서."
그럴 때마다 송장공은 대답했다.
"언제고 기회만 생기면 잊지 않고 주선하마."
바로 그런 때에 정나라에서 제족이 친선을 맺고자 사신으로 송나라에 당도했다. 송장공은 제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공자 돌이 정나라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는 제족에게 달렸다."
송장공은 심복을 불러 은밀히 계책을 일러 줬다. 그리고 태재(太宰) 화독(華督)에게 차후 일을 지시했다. 제족은 멋도 모르고 궁으로 들어가 송장공에게 예(禮)를 바쳤다. 예가 끝났을 때였다.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불문곡직하고 제족을 붙들어 묶었다. 제족이 큰소리로 외쳤다.
"외신(外臣)이 귀국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할말이 있으면 군부(軍部)에 가서 하여라."
송장공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를 던지고는 내전(內殿)으로 들어가 버렸다. 즉시 제족은 군부로 끌려갔다. 제족은 꼼짝 못하고 중죄인이 수금되는 군부에 잡힌 신세가 되었다.
화독의 회유
해는 지고 밤이 되었다. 그제야 태재 화독이 군부에 와서 주안상을 차리게 하고 제족을 모셔 들이게 한 후 술을 권했다. 제족이 술잔을 받지 않고 물었다.
"우리 주공은 귀국과 좀더 우호 친선하려고 나를 사신으로서 보낸 것이오. 아직 아무런 허물도 없거늘 어찌 이런 처사를 하시는 게요. 혹 우리 정나라와 풀지 못할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오? 아니면 사신으로 온 내게 불찰이 있는 것이오? 속시원히 알고나 이런 대접을 받읍시다."
제족이 언성을 높여 따지고 들자, 화독은 일부러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송나라와 정나라가 풀지 못한 구원이 있을 까닭이 없고, 또한 그대처럼 영특한 대부가 불찰이 어디 있겠소. 그런 이유는 결코 아니오."
"그럼 왜 이러는 것이오?"
화독은 술 한잔을 쭉 마시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대도 잘 아다시피 지금 귀국의 공자 돌이 우리 송나라에 와 있소이다. 그가 누구요? 우리 송나라에서 보면 옹길의 아들이니 바로 옹씨 외손(外孫)이고 우리 주공께는 친척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또한 그대의 나라에서 보면 분명한 선군의 아들인 정나라 공자가 아니겠소. 이제 그대는 공자 돌을 모시고 귀국하시오. 그리고 군위에 오르게 하시오. 그것이 그대가 할 일이오."
제족은 기가 찬 듯 어이가 없어 화독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희 선군께서는 세자에게 군위를 이어 왔소. 그런데 갑자기 공자 돌을 군위에 세우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그대는 다른 말은 하지 마시오. 우리의 뜻대로 따를 것인지 아닌지만 정하시오. 따를 수 없다면 그대의 목을 참(斬)하고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소. 나와 그대가 이렇게 마주앉는 것도 오늘 이 시각이 마지막이오."
화독은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험악한 얼굴이 되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제족은 와락 겁이 났다. 그래서 화독의 옷자락을 부리나케 붙잡으며 힘없이 응낙했다.
"말씀대로 따르겠소."
화독은 여전히 화등잔만 하게 눈알을 부라리며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말했다.
"우리 뜻을 따르겠다면 여기서 맹세하시오."
제족이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맹세했다.
"공자 돌을 정나라 군위에 올려 세우지 못하거든 천지신명이시여 이 제족을 벌하소서."
그제서야 화독은 머리를 끄덕이며 소리없이 웃고는 제족을 크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화독은 제족을 대접하고 군부에서 나와 곧 송장공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보고했다.
"주공의 뜻대로 잘 되었습니다."
이튿날이 되었다. 송장공은 태재 화독, 제족, 공자 돌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먼저 공자 돌에게 말했다.
"과인은 그대가 정나라 군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소. 그래서 오늘 정경 제족과 함께 이렇듯 자리를 함께 한 것이오."
그러자 공자 돌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며 맹세하듯이 다짐했다.
"돌은 신세가 불행하여 이렇듯 외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데 군후(君侯)께옵서 고국으로 돌아가 조상의 종묘(宗廟)를 모시게 해 주신다니 그 은덕을 어찌 이 짧은 혀로 다할 수 있겠나이까? 이 일이 성취되면 정나라의 큰성(城) 셋과 횐 구슬 백 쌍과 황금 만 일(萬鎰), 해마다 추수한 좋은 곡식 삼만 종(種)을 바쳐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송장공은 공자 돌의 말을 짐짓 모른 체했다. 그러자 태재 화독이 거들었다.
"앞으로 이 일이 성공하거든 정나라 정사(政事)는 모두 제족에게 맡기시게나."
화독은 말을 거들고 나서 준비한 서약서를 꺼내 공자 돌과 제족이 함께 서명하게 했다.
"이것은 모두 우리 스스로가 다짐하고 믿는 신의의 징표요.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라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자 돌은 군위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제족은 위협에 굴복하여 모두 해괴한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렇게 해 놓고 나서 송장공은 슬며시 이야기를 바꿔 혼담 이야기를 꺼냈다.
"과인이 듣기에 제족에게는 미혼인 여식(女息)이 있다 들었소. 공자 돌의 외사촌 옹규(雍糾)와 통혼(通婚)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번에 아예 옹규를 데리고 정나라로 돌아가 혼례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게 해주시오."
제족은 그저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마침내 공자 돌과 옹규는 평복을 입고, 장사꾼처럼 가장하고서 제족의 수레 뒤를 따라 정나라로 갔다.
정여공의 탈출
제족은 귀국한 후 공자 돌과 옹규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병이 나서 거동을 못했다고 소문을 냈다. 그리고 궁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 대부들이 모여 그의 부중으로 문병을 갔다. 제족은 대부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케 했다.
"아니...... 병환중이라 들었는데 벌써 쾌차하신 것입니까? 참 다행한 일입니다."
제족이 의관을 갖추고 앉아 있으니 대부들은 놀랍고, 축하하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족은 안색을 크게 찌푸리며 대답했다.
"병은 몸에 생긴 게 아니라오. 나라의 일 때문이오. 선군(先君)께서 공자 돌을 송나라로 보낼 때 송후(宋侯)와 은밀히 약조한 바가 있다고 하오. 그래서 이제 송후는 병차 6백 승을 일으켜 우리 나라를 쳐서라도 공자 돌을 군위에 세우겠다고 합니다. 이러니 내가 병이 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겠소이까."
대부들은 크게 놀랐다. 성급하게 뭐라 할 때가 아니다 싶어 모두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 있었다. 제족이 대부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말했다.
"송병(宋兵)의 침공을 막는 길은 단 한 가지, 지금의 주공을 폐하고 공자 돌을 모시는 길 외엔 없소. 지금 우리 집에 송나라에서 공자 돌이 와 계시오. 어찌들 하시겠소? 이렇게 모두 모였으니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합시다."
제족의 말이 끝나자 눈치 빠른 고거미가 사태의 진행을 재빨리 알아챘다. '제족은 이미 공자 돌을 군위에 올릴 결심이구나.' 고거미는 이런 일에 어떻게 처신해야 자신에게 득(得)이 될지 알고 있었다. '앞장서야만 생색을 낼 수 있고, 나중에 논공행상할 때 벼슬자리 얻는 데도 좋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습니다. 이제 새 주공을 모셔 새로운 정나라를 계획하는 것은 사직의 큰 복입니다. 어서 새 주공을 뵈옵고 싶습니다."
고거미가 앞장 서서 분위기를 유도했다. 다른 대부들은 제족과 고거미가 이미 사전에 묵계를 하고 자리를 마련했나 싶어 얼떨결에 찬동하고 만다.
"고거미의 말씀이 합당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대부들이 모두 굽신거렸다.
제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 방을 나가더니 공자 돌을 데리고 들어와 윗자리에 모셨다.그리고 고거미와 함께 주공에게 하듯 먼저 나붓이 절했다. 대부들은 일이 이쯤되니 어찌할 것인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시에 섬돌 아래로 내려가 모두 꿇어 엎드려 새 주공을 맞이하듯 예의를 차렸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제족은 이미 준비한 두루마리 천을 꺼내 새로운 주공을 모시기로 했다는 내용 아래 자기 이름을 쓰고 대부들에게도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 연명부를 궁에 있는 정소공에게 보냈다. 그런데 연명부에는 아무도 모르는 제족의 비밀 장계(狀啓)가 끼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번에 송나라에 가서 그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이 충성을 바쳐 죽는다고 하더라도 주공께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을 알고 그들의 요구에 일단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부들과 함께 일단은 공자 돌을 새 주공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주공께서는 이런 대세를 따르시어 잠시 군위를 떠나 있으시옵소서. 신이 기회를 보아 복위시켜 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말을 어기는 자에게 천벌을 내려 다스리소서.
정소공은 연명부와 제족의 비밀 장계를 읽고 난 후 자신이 외로운 처지임을 알았다. 군사를 모아 한바탕 승부를 걸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이미 모든 대부들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그는 내궁으로 들어가 비(妃)와 부둥켜안고 울더니 그날 밤에 간단한 행장을 꾸려 위나라를 향해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공자 돌이 군위에 오르니 정여공(鄭屬公)이다. 그 뒤 제족은 정나라 정사를 도맡아 결재했고, 옹규는 제족의 딸과 결혼하면서 정나라 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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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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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14교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실 혹은 꿈의 세계
- 동화와 동시 쓰는 요령을 익혀라
1. 동화 쓰기
여섯 살 먹은 아이의 거짓말
여섯 살 난 동생이 내가 학교에 가고 없는 사이에 내가 애지중지하는 나의 앙증스러운 낫을 들고 꼴을 베러 나갔다. 아버지가 며칠전에 대장간에서 만들어다가 준 낫이엇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와 꼴을 베고 있는 동생은 들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한데 동생의 손데 들려있는 낫 끝이 5센티미터쯤 끊어져 버리고 없었다.
"아니 너 이것 어찌된 거야?"
하고 내가 낫을 빼앗아 들면서 묻자 동생은 대뜸 "저쪽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이 낫 끄트러미를 덥썩 잘라먹고 날아가 버렸어"하고 대답했다.
"뭣이 어쩌고 어째? 이 자식 거짓말 하는 것좀 보게? 파랑새가 어떻게 낫 끄트머리를 잘라먹는단 말이냐?" 나는 기막혀 하면서 소리쳐 말했다.
"참말이여"
동생은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진정으로 우겨댔다.
또 한 아이의 거짓말
초등학교 일학년인 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자기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엄마, 우리학교 변소 속에 아기가 하나 빠져서 응아응아 하고 울고 있어."
어머니는 그 아이를 앞세우고 학교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사려 깊었으므로 덮어놓고 선생님께로 달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를 앞장세우고 아기 빠져 울고 있다는 변소간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두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 말을 하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변소간 속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아기는 없었다.
"정말로 아기가 울고 있었어?"
"그래요"
"어디에서?"
"여기서요."
아이는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현실과 동화적인 현실
이런 경우 여섯 살 동생의 말은 진실인가. 정말로 파랑새가 낫 끄트머리를 잘라먹은 것인가. 형의 꾸중을 모면하기 위해 꾸며 댄 말인가. 어린아이의 머리로 어떻게 파랑새가 쇠로 낫 끊어 먹는 행위를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또 한 아이는 어떻게 변소간 속에서 아기가 빠져 울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일까. 그 거짓말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어린이들의 성장과정에는 '동화기'가 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현실과 꿈 속의 현실을 분별하지 못한다.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과 현실속에서 본 것을 분별하지 않고 그냥 '어디에서 이러이러한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것을 어른들은 거짓말이라고 무시하거나 추궁을 한다. 그들의 거짓말이 아닌 거짓말을 무조건 거짓말이라고 규정지어 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는 사람은 동화나 동시를 쓸 자격이 없다. 동화를 쓰려는 사람은 먼저 현실과 동화적인 현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그 두 현실을 분별하지 않고 한데 버물러 현실화 시킬 줄 알아야 한다. 다음의 동화 한편을 읽어 보자.
아기별 공주는 참으로 기이한 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섬의 한 가운데에 동상이 하나 있고 거기에는 초가 한 채만 있었습니다. 마당은 겨우 다섯 걸음쯤의 넓이였고 담이나 울타리도 없었습니다. 마당 밖으로는 검은 갯바위들만 있고, 거기에는 굴과 해초들과 게와 새우와 어린 물고기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기별 공주는 마당 끝에 선 채 그 초가를 살폈습니다. 초가의 툇마루 위에 이상스러운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머리칼과 수염들이 어깨와 가슴을 덮을 만큼 길었고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아기별 공주는 섬찟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뒷걸음질 쳤습니다. 바다에 산다는 도깨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곧 그 젊은이를 보고 놀란 스스로를 꾸짖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혼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아하, 그 엄마 꿀벌이 이 젊은이한테도 콧노래 부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나 보다.' 자세히 보니 그 젊은이는 서서 걸어다닐 수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 초가 모퉁이에는 짚더미가 쌓여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검불을 깨끗하게 추려 낸 샛노란 속짚으로 새끼를 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새끼를 열심히 꼬았는지, 젊은이의 손바닥은 부르텄고 손가락들은 빨갛게 닳아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때껏 꼬은 새끼줄들을 국수의 사리처럼 사려 묶어서 다른 모퉁이와 뒤란에 쌓아 놓았습니다 그 새끼줄의 사리 더미는 처마보다 더 높았습니다. 젊은이의 수염과 머리칼들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두 눈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에 살고 있는 한 동무별의 해맑은 등불을 생각나게 하는 눈 "아저씨는 무얼 하려고 이렇게 새끼를 꼬는 거에요?" 아기별 공주는 그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새끼꼬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아기별 공주는 호기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고기를 잡으려고 그래요?" "네가 보시다시피 나는 걸을 수가 없는 사람이지 않니? 그런데 어떻게 고기를 잡을 수 있겠니?" 젊은이는 고개를 더 세차게 저었습니다. "그럼 새끼줄을 다른 어부한테 팔려고 그래요?" 젊은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발 좀 가르쳐 주세요.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새끼를 계속해서 꼬고 계시는지?" 젊은이는 한동안 새끼를 꼬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보름달을 우리 집 앞에 묶어 놓으려고 그런다." "네?" "앞으로 두고 보아라, 우리집 앞에는 밤이면 밤마다 보름달이 떠 잇을 것이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여요" 아기별 공주는 그에게, 그것이 하늘의 법과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임을 설명해 주려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아기별 공주가 그 설명을 하려고 입을 열기 전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떤일을 참으로 열렬히 소망하고, 정성을 다하면 되지 않은 일이 없다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다. 나는 내가 오래전에 한번 소망한 대로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늙은 어머니가 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아기별 공주는 아들에게 허황된 소망을 가지도록 거짓마을 한 어머니에게 따지고 싶었습니다. "할머니의 가엾은 아들은 평생 동안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양식의 가책도 없으십니까? 보름달을 묶어 놓는일 그것이 할머니의 가엾은 아들의 소망대로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단다, 정말로 보름달을 묶어 놓겠다고 소망하면...... 실제 하늘의 보름달은 아닐지라도 그 아이의 마음속의 보름달은 항상 환히 떠 있지 않겠니?" 하고 나서 그의 늙은 어머니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세상의 일은 소망한 어떤 결과보다는 그 소망을 위하여 열과 성의를 다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란다." -한승원의 동화 <별아기 바다꿈> 중의 <새끼꼬는 젊은이의 > 전문
(1) 동화는 시간의 순서대로 진술해야 한다.
동화를 읽는 사람은대개 어린이들이다. 동화 독자의 생각은 매우 단순하다. 그러므로 사건을 진술하는 순서를 시간 순서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2) 단문을 써야 한다.
잠에서 깨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으므로, 영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바쁘게 세수를 하였고,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동화에서는 복문이나 중문은 피해야 한다. 읽는 사람이 어린이들 이므로 복문과 중문은 그들의 정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잠에서 깨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습니다. 영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바쁘게 세수를 하였습니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3) 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쯤 이어야 한다.
<새끼 꼬는 젊은이의 섬>이라는 이 동화에서는 아기별 공주와 젊은이와 그의 어머니 이렇게 세 사람만 등장한다.
(4) 구성은 단순해야 한다.
동화 <새끼 꼬는 젊은이의 섬>에서는 세 사람만 등장하므로 세 주인공 사이의 갈등 대립이 있을 뿐이다.
1)아기별 공주가 한 섬에 들어서서 장애인 젊은이를 발견한다.
2)젊은이의 희망을 안타까워하는 아기별 공주
, 3)깨닫게 해주고 싶은 아기별 공주
4)어머니와 아기별 공주의 만남
5)어머니가 한 말 - '마음속의 달과 소망을 가지고 열과 성을 다하며 사는 삶의 고귀함에 대하여'
(5) 주제가 교훈적이기는 하되 설교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진실' 이상으로 교훈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진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야기 속에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젊은이의 삶 그 자체가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진실'인 것이다.
(6) 동화는 소년 소녀 소설과 다르다.
소년 소녀 소설은 현실 속의 어떤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데, 동화는 꿈속의 현실과 현실을 섞고 버물러 승화 시킨다.
(7) 동화에서는 대개 경어체의 문장을 쓴다.
평서체의 문장은 냉철하고 딱딱하고 속도가 빠르다. 거기에 비하여 경어체 문장의 맛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속도가 완만하다. 타이르고 달래는 듯한 잔잔한 소호력이 있다.
2. 동시쓰기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아이들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의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아이의 마음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엇을 보든지 그것을 전혀 새롭게 발견하려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배워 가는 아이들은 눈에 띄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저것이 무어야?" 혹은 "어째서 그러는 거야?" 하고 묻곤 한다. "비는 왜 하늘에서 내려?"하고 물었을 때 어른이 "구름이 비가 된단다"하고 대답을 하면 "왜 구름은 생겨났어? 그것이 왜 비가 돼?"하고 또 거듭 묻는다. "저 산모퉁이 바가지 엎어놓은 것 같은 것, 저게 무어야?" "무덤이란다." "무덤이 무어야?" "죽은 사람을 땅에 묻어 놓은 것이란다." "왜 사람은 죽어?" "나이를 많이 먹으면 다 죽는단다." "사람들은 왜 나이를 먹어?" 아이들의 발견하려는 의심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고 발전한다. 그렇다고 그 어린 것에게 사전적인 설명을 해 줄 수도 없고 과학 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설명을 해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아이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니까. 그럼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인가. 아이에게는 어떤 해답이 필요한가. 삶의 참 모습 혹은 아름다운 순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바람이
숲속에서 버려진 빈 병을 보았습니다.
"쓸쓸할 거야"
바람은 함께 놀아 주려고
빈 병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보오, 보오"
맑은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습다.
- 문삼석의 <바람과 빈 병>
위의 동시에는 빈 병과 바람이 등장한다. 그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 관계는 사귐이다. 그것들의 사귐을 알아낸 것은 아름다운 진실의 발견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살아있고, 가슴과 머리를 가지고 있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생각하고 눈물을 가지고 있다.
논바닥 황토에 빨간 오리밥
황새 먹이하라고 빨간 오리밥
하얀 눈밭에 빨간 찔레 열매
산새 굶지 마라고 빨간 찔레 열매
-손동연의 <먹이하라고>
위의 시 두 줄에 등장하는 것은 논바닥, 오리밥, 황새들이고, 뒤의 두 줄에 등장하는 것은 눈밭과 찔레열매와 산새 들이다. 그들은 긴밀하게 관게지어 있고 그 관계는 우주의 순리를 말해 준다. 시인의 역할은 그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한데 그것이 아이의 눈을 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시 속에 들어있는 음악성이다. 그 음악성은 아이들이 그 오리밥이나 찔레 열매를 보고 고개와 어깨를 들석거리며 노래하듯 소리쳐 대는 모습을 떠오르게 하고, 읽는 사람의 가슴으로 하여금 즐거운 춤사위를 아주 단순하게 그리며 손뼉을 치게 만든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시 속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동화적이고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질긴 생명력이 담겨 있다.
생각해 봅시다
1. 동화, 동시 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2. 동화의 문장은 왜 단문이어야 하고 왜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야 하고 구성이 단순해야 하는가?
3. 동시를 쓰는 사람의 역할은 결국 무엇이겠는가?
4. 동화에서는 왜 경어체를 쓰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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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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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1910년대에 미국에서 촬영된 젊은 시절의 찰리 채플린..]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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