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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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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여백
공(空)과의 만남
유교의 전통을 지켜온 시골 한학자의 집안에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 좁은 뜻의 종교 밖에서 살았다. 내가 어려서 살아온 세계에는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신념은 있었지만 절대자에 대한 기도나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명상을 위한 시간이나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자의 세계를 종교적이라 한다면 그러한 세계는 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우리집 사랑 대청에서 바라다보일 정도로 가까운 300여 미터 정도 높이의 고룡산(높을 고, 용 룡, 뫼 산) 골짜기 중턱에는 절이 있었고, 20리 밖에 떨어진 공서지라는 동네 외곽의 황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프랑스 사람들이라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성당이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교나 기독교나 너무나 멀고, 너무나 생소한 세계였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이 오신 날이면 진달래꽃으로 붉게 덮인 고룡산에 있는 절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지고 불교신자이건 아니건 주변 마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새 옷을 입고 그곳에 가서 봄날 하루를 즐기곤 했다. 어린 나에게는 무척 높고 무척 먼 가기 힘든 곳이기는 했으나 한 학자이신 할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가서 그분이 사주시는 눈깔사탕, 엿가락 그리고 쑥떡 등을 즐겨 먹던 기억이 난다. 절은 단청으로 울긋불긋했다. 절 전체가 그렇고 그 많은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여다본 대웅전의 불당 역시 그렇다. 울긋불긋한 색깔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 아니 '귀신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느낌은 학교에서 단체로 소풍을 갔던 프랑스인들이 살던 20리 밖 성당 안 벽에 그려진 성화(성스러울 성, 그림 화)들을 보았을 때도 유사한 느낌을 가졌었다. 그런 것들이 종교라는 것과 관계된다면, 그것이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상관없이, 종교란 '이상스러운 것'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부처 앞에 촛불을 켜놓고 엎드려 불공을 드리고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며 기도하는 행위가 아무리 해도 기이하게만 보였다.
아직도 나는 회교도, 기독교도, 불교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나는 엄밀한 뜻에서 특정한 종교를 갖지 않았다. 사찰을 장식한 단청이나 성당을 장식한 여러 가지 십자가 모양이나 역시 울긋불긋한 성화(성스러울 성, 그림 화)들은 아직도 내 미학적 기호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요즈음 나는 그 뜻을 전혀 모르면서도 목탁을 치며 크게 불경을 외우는 스님들의 청량한 목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나는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말없이 기도하는 삶들의 경건한 모습을 볼 때 나 스스로 흐뭇함을 느낀다. 모스크 지붕에 올라가 내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어로 '알라 신'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회교 신자의 우렁찬 목소리는 나의 심금을 울린다. 내가 그 동안 위와 같은 종교에 대해 피상적이나마 공부를 했기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내 마음을 다 같이 사로잡고 깊숙이 울린다면 불경 낭독, 기도의 자세, '알라 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결같이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불교의 명상성, 기독교의 경건성 그리고 회교의 철저성에 끌린다. 나는 절대 신과 천당을 전제하는 기독교 및 회교의 교리와 아울러 무아(없을 무, 나 아)/ 무존(없을 무, 있을 존)과 궁극적 '무(없을 무)'/'공(빌 공)'에 대한 교리에 관한 책을 조금 읽었다. 나는 아직도 서양 종교의 절대 신의 존재나 천당,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믿지 않으며, 불교적 천당으로서 '서방 정토'나 '나'의 윤회, 따라서 불상 앞의 불공을 믿지 않는다. 서양 종교적 기도나 불교적 불공이 기복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점에서 종교적 신념이 필연적으로 기복적이라면 나는 그러한 종교를 따를 수 없다. 나는 기독교, 회교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불교 신자도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교들과의 지적 접촉으로 나는 지적 성장이 가져오는 쾌감과 영적 풍요가 동반하는 실존의 깊이를 경험했다고 여긴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세계관은 아무래도 알고 보면 기독교나 회교적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불교적이다. 나는 차츰 철학적으로 불교에 매료된다. 불교가 부처라는 한 인간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고, 그 가르침이 사성제(넉 사, 성스러울 성, 울 제), 고(쓸 고) 즉 삶의 고통, 집(모일 집) 즉 그러한 고통의 원인, 멸(멸망할 멸) 즉 그것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 도(길 도) 즉 그 방법으로 요약된다면, 언뜻 보아 불교는 깊은 철학적 혹은 종교적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극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삶에 대한 해석과 태도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가르친 부처는 철학자이기 전에 인류 영혼의 의사였으며, 의사이기 전에 평범한 그러나 자비로운 심성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부처의 평범해 보이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어떤 철학자도 쉽게 미칠 수 없었던 철학적으로 깊은 통찰력과 한없이 따뜻한 인간적 심성에 뿌리박고 있다.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그의 욕망이며, 이 같은 욕망은 자아에 대한 집착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자아의 존재를 의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데카르트의 철학적 호소력은 '무아/무존/공'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집약할 수 있는 부처의 가르침은 데카르트적 형이상학, 즉 우리들의 보편적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자아' 즉 '나'라는 고정된 존재는 물론 어떠한 사물 현상도 고정된 것은 없다. 즉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고정된 '있음'이 아니라 영원한 과정으로서 '되어감'이다. 윤회란 불멸하는 '나'의 재생이 아니라 부단히 그리고 영원히 변하는 나의 다양한 양상을 지칭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모든 것들을 고정된 영원 불변한 것으로 본 것은 사실상 '실체'가 아니라 그냥 '이름' 즉 '환상' 즉 공(빌 공)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무아/무존/공/은 '나' '존재' '유(있을 유)'의 부정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지칭하는 개념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현재 첨단 과학은 모든 현상의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영원한 변화/되어감의 우주에서 '나'가 하나의 환상인 이상 '나'의 죽음이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삶과 존재 일반에 대한 불교적 직관은 철학적으로 옳고 아름답다. 깊은 골짜기 아름다운 숲속 깊이 자리잡은 한국의 절로 들러가는 긴 길을 걸어가면서 불교적 공(빌 공)과 만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나는 해방감과 기쁨으로 가득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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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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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3장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백일곱번째 이야기 - 중도의 비유
한 사문이 밤에 독경을 하다가 갑자기 집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져서 출가한 것을 후회하였다. 생각 끝에 그는 다시 환속할 마음을 먹었다. 이를 감지하신 부처님은 그 사문을 불러다가 물었다.
"너는 속세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거문고 타는 일을 했습니다."
"거문고 줄이 느슨하면 소리가 어떻더냐?"
"그러면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줄이 너무 팽팽하면 또 어떻더냐?"
"줄이 끊어져 소리가 나지 않게 됩니다."
"줄이 느슨하지도 팽팽하지도 않고 적당할 때는 어떠한가?"
"그러면 모든 소리가 고르게 납니다."
"수행도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정신을 집중함에 그 적당함을 아는 자가 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도를 닦는 사람은 쇠붙이에 비유될 수 있다. 쇠를 두드리며 점차로 몹쓸 부분을 버리면 나중엔 좋은 쇠그릇을 얻게 된다. 도를 닦을 때에도 점진적으로 마음의 때를 제거하며 한발한발 깊이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급하게 굴면 몸이 괴롭고 몸이 괴로우면 번뇌가 생긴다. 번뇌가 생기면 곧 수행하기 어려워지고 수행을 멈추면 죄를 짓기가 쉬운 법이니라."
<사십시장경>
백여덟번째 이야기 - 돌아온 아들
옛날에 어떤 사내가 어릴 때 가출하여 여러 지방을 떠돌면서 살았다. 그 사내는 어느덧 어른이 되었지만 궁핍한 날품팔이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한편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사방으로 그리운 아들을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한덕에 얼마 지나지않아 그 도시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된 아버지는 하루도 아들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내 나이 이제 늙어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 남들은 내가 큰 부자라고 부러워하지만, 자손이 없으니 이 재보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죽은 후에는 모두 남의 손에 들어가 흩어져버릴 게 뻔하다. 수십 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어느 날 아들은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살고 있는 도시에 오게 되었다. 그는 날품을 팔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여러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러나 워낙 어릴 때 아버지와 헤어졌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화려한 옷을 입고 휘황찬란한 가마를 탄 아버지의 모습에 그만 기가 질릴 뿐이었다. '이크, 저 이는 아마 왕족이나 귀족임이 틀림없다. 괜히 날품을 판답시고 얼씬거리다가는 나를 강제로 잡아다가 일을 시킬 줄도 모른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 일을 해주고 옷과 양식을 구해야겠다.' 그리고 그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가마 속에 있던 아버지는 우연히 그를 보고 한눈에 그가 아들임을 알아차렸다.
이제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찾았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하인들을 시켜 그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하인들이 달려가 그를 붙들자 아들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나를 붙잡는 것이오?"
그러나 하인들은 주인이 시킨 일이라 이유도 얘기 않고 억지로 데려가려고만 했다. 아들은 강제로 붙들려 가면 큰 일을 당하리라는 생각에 힘껏 버티다가 그만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을 강제로 데려올 필요는 없으니, 물을 뿌려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그냥 놔주어라."
부자는 아들이 아버지인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막대한 부에 기가 질려 그러는 줄 알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아들은 정신을 차린 후 그 도시 이곳저곳에서 날품을 팔며 겨우 연명하고있었다. 어느 날 부자는 하인들에게 아들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게 했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집에 가서 같이 일하면 삯을 두 배로 주겠소. 그렇게 어렵지 않은 그저 거름을 치는 일이오."
아들은 하인들의 말을 듣고 부잣집에 와서 일을 하게 되었다. 부자가 창문 틈으로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남루한 옷에 초췌한 꼴을 하고 있자 마음이 무척 아팠다. 부자는 곧 허름한 옷을 골라 일꾼처럼 변장하고는 아들에게 다가갔다.
"젊은 사람이 참 안됐구만. 무슨 고생을 그렇게 많이 했길래 행색이 그러한가? 여기는 부잣집이니 일만 열심히 하면 호의호식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말게. 나는 나이로 봐도 자네 아버지뻘이니 앞으로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나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언제든지 의논하게. 나도 자네를 친아들처럼 돌봐주겠네."
그렇게 해서 부자는 아들과 함께 일하며 차츰 친해졌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흐르자 아들은 부자를 진짜 친아버지처럼 대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국왕과 대신 그리고 친척들을 초청한 다음 아들을 불러 옆에 세우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사실 이 사람은 내 아들이오. 나는 수십년 전에 아들을 잃고 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소. 그러다가 몇 해 전에 우연히 아들을 바로 이 도시에서 찾게 되었소. 이제 이 아들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어 가업을 잇게 할 참이오."
아들은 아버지의 뜻밖의 선언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 원래 저 부자가 나의 친아버지였구나. 나는 원래 부자의 재산에는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았는데, 이제 이 엄청난 재보가 다 내것이 되었구나.'
<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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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나폴레옹
프랑스 남부 코르시카섬 태생의 포병 지휘관 나폴레옹 보나파트는 이러한 혼란한 시기를 적절하게 이용하였고 1799년 쿠테타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강력한 지도력을 원하는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의 질서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조세핀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1804년에는 스스로 자기 머리에 황제 왕관을 올려, 프랑스에는 다시 왕정이 부활되었다. 혁명은 장밋빛 이상향 건설에 목표를 두기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혁명 공약도 혁명이 실패했을 때,‘그래도 그 뜻이난 동기가 좋았다’는 한마디를 남기기 위한 의미 밖에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 혁명을 보든 간에 ‘공약대로 된 혁명’은 하나도 없다. 혁명 주동자들은 구악을 없앤다고 혁명을 일으켜 구악보다 더한 신악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의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쉴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쉴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귀신은 ‘내가 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하고 가보니 그 집이 비고 깨끗이 소제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 귀신이 자기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그곳에 들어가 살자 그 사람의 상태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
일모도원
중국 초나라 평왕은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을 대역죄인으로 몰아죽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체포명령을 피하여 도망을 갔고 우여곡절 끝에 오 나라에 갔다. 그 곳에서 그는 이를 갈면서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오자서는 전략가 손무의 도움으로 초나라에 쳐들어가 수도를 점령하였다. 복수심에 불탄 그는 이미 10년 전에 죽은 평왕의 묘를 파헤쳐 그 시체에 매질을 하였다. ‘시체에 매질하기 300대. 그 때서야 멈추다’라고 사마천은 사기에 적었다. 이에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는 이 말을 듣고 “아무리 부형의 원수라고 하지만 너도 한때 평왕의 신하였는데 시체에까지 매질한 것은 너무하지 않았느ㅑ?“고 따져 물었다. 오자서는 “해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그래서 내가 천방지축 거꾸로 다니면서 이치에 어긋난 행동을 하였을 따름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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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7교시 가장 멋있는 비유법의 보기 -상징법,의인법, 활유법, 풍유법
1. 구체적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비유법
(1) 상징법이란
밤 파도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해운대 모레밭을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 지는 그 두 사람에게 장미꽃 장수가 다가왔다. 남자는 장미 한 송이를 사서 여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난 며칠 후,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백합 한송이를 수줍게 내밀었다.
그 남자는 장미츷 토해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또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하고 많은 꽃들중에서 하필이면 왜 백합을 그에게 내밀었을까? 우선 그 사람들이 주고 받았던 장미와 백합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자.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을 상징하고 백합은'순결'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나는 당신을 정열적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셈이고 여자는 "저는 순결합니다."하고 말한 셈이 된다. 이렇듯 상징법은 한마디로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느낌을, 그것과 잘 어울릴 만한 구체적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한 시울의 눈물을 줄 수 있는 작은 책
여기서 눈물은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다.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는 문장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눈물이 어떠한 감동이나 공감을 의미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 챌 수 있다. 같은 사람이 쓴 또 다른 문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 소박하기도 벅차기도 한 이내 꿈들을 언제...
. 내게는 꿈이 있다.
이글을 써 보낸 독자는 여기서도 꿈이라는 상징법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꿈이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각자 생각해 보도록 하자. 다만 꿈이란 우리가 가장 즐겨쓰는 상징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 이번에는 앞서 이야기한 장미를 가지고 직유법과 은유법, 상징법의 차이를 살펴 보도록 하자.
원래의 말(생각) ; 연결고리; 비유가 동원된 말(생각)
직유법 ; 정열적인 사랑 ; 처럼 ; 빨간장미 ;빨간 장미처럼 정열적인 사랑
은유법 ; 내 사랑은 ; 생략; 빨간장미 ;내 사랑은 빨간 장미이다.
상징법 ; 생략 ; 생략; 빨간장미 ;장미
(2) 흔히 쓰이는 상징들
가만히 보면, 상징법은 문장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흔히 쓰인다. 다음의 보기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읽어 보자.
. 깃발 : 그 나라, 그 학교, 그 단체를 상징한다.
. 국화(나라꽃) : 그 나라 그 민족의 국민성과 민족성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나라꽃은
무궁화요, 북한의 나라꽃은 진달래 이며 일본의 나라꽃은 벚꽃이다.
. 황금 : 재물을 상징한다.
예)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황금에 눈이 어두워서 ...... 등등 . 우리의 태양 : 우리들의 희망, 우상을 상징한다.
. 서울의 달 : 서울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상징한다. 여기서 꿈은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을 뜻한다.
. 곱슬머리와 옥니 : 오기와 집년ㅁ이 강하고 영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 뿌리 : 전통 근본을 상징한다.
. 날개 : 자유나 상승할 수 있는 도구를 상징한다.
또한 상징법은 산문보다는 시에서 더 많이 쓰인다. 다음에 인용된 시를 읽어 보자.
창공을 움켜쥔 적이 있었다.
창공도 별것이 아니다.
내 손아귀 속에서 펄럭펄럭 가슴 두근거리고 있었다.
처마 구멍에 그물을 받치고 잡아 낸 참새 한 마리
그 참새와 한 구멍에 있다가 푸르륵
어둠을 가르고 날아간 다른 참새는
어느 창공을 헤메고 있을까
그때 실수로 날려 보낸 참새의
발목에 묶어 놓은 내 가슴속의 명주실 꾸리는 계속 풀렸고 어른이 되었다.
나는 지금 내 손아귀 속에 가슴 두근거리던
그 참새같이 누군가의 거대한 손아귀에
잡혀있다.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서울로
날고 또 날아 보아도 나는 내내 붙잡혀 있는 참새 한 마리 일 뿐 - 한승원의 <새>
여기서 새는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또 그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그 새를 억압하는 어떤 거대한 존재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하느님이라든지 부처님이라든지, 혹은 나를 지배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든지......
2. 사물이나 동물도 사람처럼 생각하는 비유법 - 의인법
아주 외로운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친구가 없어 늘 혼자 놀았다.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나 공놀이도 혼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아이에게는 딱지나 구슬이나 공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 아이에게는 그 딱지나 구슬 공들이 사람 못지않게 좋은 친구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 아이처럼 자기 주변에 널려있는 사물이나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그런것들이 사람하고 똑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 소, 말으 키우는 사람들이나 난초같은 식물을 기르고 분재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기 부모나 형제처럼 소중히 여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의인법은 새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람으로 여기고, 그것의 모양새나 움직임을 사람의 그것인 것 처럼 표현사는 방법이다. 그래서 의인법은 읽는 사람을 친근하고도 그윽한 정겨움 속으로 끌어 들인다.
.간지럼을 먹이듯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에 부끄러워 고새 숙이는 아카시아 잎사귀들
.잉크병, 그는 언제나 말없이 앉아 있다.
.도시락 뚜껑은 나를향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함께 늙어 온 그와 나는 늘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곤 한다. 내 우울을 먼저 알고 그는 꼬리를 치면서 산책을 하자고 조른다. 그는 앓을 때 나한테 미안해 한다. 나를 위하여 함께 즐길수 없음을 사과하듯이 여리게 꼬리를 치면서 안타까워 한다.
-한승원의 <개에관한 이야기>중에서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려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석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민태원의 <청춘예찬> 중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 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뺄 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운동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 이성부의 <봄> 중에서
3. 죽어 있는 것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비유법 - 활유법
글을 잘 쓰려면 우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답고 예쁘게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자기 한사람을 축복해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달도 해도 별도 구름도 무지개도 바람도 강물도 파도도...... 이 드넓은 우주 속에는 살아있는 것(생물)과 죽어있는 것(무생물)들이 있다. 가령 바위나 돌이나 산이나 강이나 바다는 죽어 있는 것이고, 사람, 뱀, 닭, 소 소나무, 메뚜기, 파리, 벌, 애벌레 따위는 살아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죽어있는 것들을 살아있는 것 처럼 표현하는 방법이 활유법이다.
.강물은 슬피 울면서 꿈틀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푸나무들도 우쭐우쭐 춤을 추고, 시냇물도 소리쳐 노래하고 있었다.
.자동차들은 눈을 부릅뜨고 식식거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 김수영의 <풀> 중에서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려졌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 가루를 흘려 보냈다. - 오정희의<중국인 거리> 중에서
그렇다면 활유법과 의인법은 어떻게 다를까?
의인법은 반드시 그 대상을 사람으로 여기고 표현하는 것이며, 활유법은 책상이나 바위 같은 무생물들을 생물로 여기고 표현하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4. 사람들의 잘못을 꼬집는 비유법 - 풍유법
(1) 당나귀 두 마리가 길을 가고 있었다. 앞에가는 당나귀는 황금 보따리를 싣고 가고, 뒤에가는 당나귀는 보리자루를 싣고 갔다. 황금을 실은 당나귀는 기세 당당하게 가고 있었으므로 방울이 요란스럽게 딸랑거렸고, 보리를 실은 당나귀는 기가 죽어 있었으므로 방울 소리가 그리 크게 나지 않았다. 얼마나 갔을까. 별안간 산모퉁이에서 도둑들이 나타나더니 방울 소리가 요란한 당나귀를 죽여버린 뒤, 황금을 모두 빼앗아 갔다. 살아난 당나귀는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생각했다. 황금을 싣지 않기를 얼마나 잘 한 일이냐 하고.
(2) 이 세상에서는 너무 호화롭고 너무 당당하고 너무 오만하면,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해를 입을 수 있는 법이다. -<이솝우화> 중에서
이러한 것을 풍유법 이라고 한다.
(1) 에서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그냥 재미있게 늘어 놓았고
(2)에서는 독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물론 그 동물들의 이야기는 <시튼 동물기>에서 처럼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어낸 것들이다. 여기서 만일 (1)을 생략하고 (2)만 써 놓았다면 얼마나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이 되겠는가? .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
. 상여 내가는데 귀청 파 달라고 한다.
. 옹기점에서 돌팔매질하고, 우는 아기 꼬집어 주고, 불난데 부채질 한다.
. 혹을 떼러 갔다가 되레 하나 더 붙이고 왔다.
. 초저녁에는 살이 통통하게 찐 암송아지나 한 마리 잡았으면 하고 바라던 호랑이가, 새벽녘이 되니까 비루먹은 강아지라도, 쥐나 개구리라도, 하루살이라도 한 마리 잡혔으면 한다.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
. 하룻강아지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른다.
이러한 속담을 비유로 표현하는 것도 풍유법이다. 즉 풍유법은 인간들의 잘못된 행동을 직접적으로 꼬집는 것이 아니라, 속담이나 우화 등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독자가 숨겨진 뜻을 짐작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경고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속담은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보석 같은 지혜의 말이다. 민족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므로 해학이 있고, 재치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거부감이 없고 친밀하게 느껴진다. 우리 민족의 생활과 정서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잘 드러내는 글을 쓰려면 속담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글을 쓸 때 속담을 직접 활용해 본다면 더욱 유익할 것이다.
5. 글에는 글쓴이의 영혼이 담겨 있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영혼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우리들이 글을 읽는 다는 것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영혼과 만나는 일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영혼을 건강하고 아름답고 풋풋하게 가꾸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려면 좋은 글을 골라 읽어야 한다. 물론 차워높은 예술 세계 하고도 가까이 해야 한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고기를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생각해 봅시다.
1. 한마디로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느낌을, 그것과 가장 잘 어울릴만한 구체적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을 상징법이라 한다. 이러한 상징법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상징법이 잘 드러나는 예를 보자.
2. 의인법과 활유법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엄연히 차이가 있는 비유법이다. 두 비유법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설명해 보자
3. 우리는 생활을 해 나가다가 잘못된 일이나 훈계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흔히 속담이나 우화를 이용하여 상대편에게 깨우침을 주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글쓰기 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이처럼 속담이나 우화를 이용해 잘못을 꼬집는 비유법을 무엇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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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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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장
작은 행복
4. 예기치 않은 유랑(2/3)
위나라로 향하다
어린 이오 소년이 영상 땅을 떠나 위나라로 향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영상 땅에서 보면 위나라는 먼 북쪽이다. 좌붕 노인은 북쪽 추운 지방으로 떠나려면 봄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좌붕 노인으로서는 이번에 헤어지면 영영 이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봄에 떠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오와 그의 어머니는 겨울을 영상에서 지내고 이듬해 봄에 위나라로 떠난 것이었다. 봄 하늘은 맑게 개이고, 한낮 무렵의 햇살은 포근하고 따사롭기만했다. 뱃길로 송나라 땅에 들어서서 북쪽으로 향하는 일행은 마치 유람하는 일가족 같았다. 늙은 말을 끌고 가는 사내는 이오 소년을 보고 자신을 숙부(叔父)라 부르게 했다. 그는 이들 모자(母子)에게 최대한 친밀하고자 노력했다. 의형제의 가족과 서먹한 거리감을 없애 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집을 나선 후 내내 말을 많이 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지나는 곳마다. 낯선 곳에 온 모자의 난처함을 헤아리는 듯 민첩하게 움직였다. 사내는 오랜 공백을 한꺼번에 메우려고 모든 것을 동원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서 억지 꾸밈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의형의 일족을 수행한다는 데 크나큰 만족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면서 소년에게 장황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제 겨우 아홉 살 소년이라고 하지만 이오는 벌써부터 훌륭한 계산법을 익히고 있었다.
"병졸 조장이 되면 봉록이 100석이다."
이오는 사내의 말을 듣고 열심히 속으로 헤아리고는 생각했다.'하루에 곡식을 큰 그릇으로 세 번 담을 수 있는 정도로구나.' 소년의 이렇듯 빠른 셈을 알 리 없는 사내는 대부(大夫)가 되면 봉록이 몇 석이 되고, 경(卿)이 되면 몇 천 석, 그리고 식읍(食邑)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제후의 봉록은 누가 줍니까?"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이오 소년이 불쑥 물었다.
"제후의 봉록?"
숙부라는 사내는 잠시 말문을 닫고 찬찬히 소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소년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제후의 봉작은 왕이 했다."
사내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왕은 누가 시켜 줍니까?"
"......."
사내는 소년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불쾌한 생각이 안 들었다. 그렇다고 질문에 합당한 말로 대답하기에 적절한 것도 없었다.
"하늘이 시킨다."
사내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는 무엇이라 합니까?"
"재상이다. 그를 일컬어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 했다."
이런 대화를 나누며 일행은 위나라로 향했다. 그 때 위나라에서는 큰 변고가 일어나고 있었다. 위환공이 갑자기 죽고, 위환공의 이복 동생 주우가 군위에 오른 것이었다.
이야기는 잠시 지난 날로 돌아간다.원래 위환공의 선군(先君) 위장공(衛莊公)의 부인은 제나라 여자로 이름을 장강(莊姜)이라 했다. 장강은 몹시 아름다웠고 품성이 고왔으나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위장공은 서둘러 비(妃)를 들여놓았다. 그녀는 진(陳)나라 진후의 딸로 이름을 여규라 했다. 그러나 이 여규도 어쩐 일인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여규에게 예쁜 친정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대규라고 하였다. 대규는 언니가 위나라로 시집올 때 따라왔었다. 흔히 잉첩이라고 하는 제도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큰아들 이름은 완(完)이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진(晋)이라고 했다. 그런데 장강은 다른 여인이 낳은 아들이지만 조금도 시기하지 않고 대규의 큰아들 완(完)을 마치 자신의 친 소생처럼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래서 완(完)은 올바르고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또 장강은 젊은 궁녀를 위장공에게 추천했다. 그 궁녀의 몸에서도 아들이 하나 태어났다. 그가 주우였다. 진(晋)과 주우(州 )는 모두 장성하면서 성질이 횡포하고 음탕한 짓을 즐겨했다. 주우는 특히 무예를 좋아하여 각종 무기나 전쟁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위장공은 성실하고 심성이 착한 큰아들 완(完)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진이나 주우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우는 막내였기에 부친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웬만한 잘못을 해도 그대로 방임했다. 한번은 대부 석작이 위장공에게 간했다.
"신이 듣건대, 대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옳고 바른 것으로 가르칠 뿐 사사로움을 용납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더이다. 공자(公子)들의 경우 무릇 총애하심이 지나치면 반드시 성격이 교만해지고 자칫 방자하여 폐해가 나라에 미친다 합니다. 미리 방지하시옵소서."
위장공은 석작의 말을 유의하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공자 진이 위장공의 첩으로 내궁에 들어와 있던 이강(夷姜)과 사통(私通)했다. 그러고는 아들까지 낳았다. 위장공은 크게 노하여 펄펄 뛰었다. 공자 진은 재빨리 아들을 민가(民家)에 맡기고 자신은 국외로 도망쳤다. 위장공은 진이 달아나자, 이강을 내궁에 감금하고 이보다 부끄러운 일이 있겠느냐 하여 발설조차 못하게 했다. 마침내 세월이 흘러 위장공이 늙고 병들어 세상을 뜨자, 큰아들 공자 완이 뒤를 이어 군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위환공이다. 위환공은 성격도 그렇고 매사에 무난한 뒤처리를 했다. 모나지 않는 것을 제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박력이랄까 군주로서의 위엄은 부족한 듯했다. 한편 대부 석작의 아들 가운데 석후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주우와 매우 친했다. 한번은 이들 둘이 사냥을 나갔는데 그 곳 백성들을 얼마나 들볶았던지 항의하는 농민들의 소요까지 일어났다. 그 때 위환공은 그저 무난히 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석작은 집에 돌아오자 아들을 묶어 놓고 심하게 매질한 후 빈 방에 감금시켰다.
"누구든 일체 출입을 못한다!"
감금 당한 석후는 그날 밤 방 벽을 뚫고 도망쳐 주우의 부중으로 갔다. 주우는 석후를 집 안에다 숨겨 주었다. 석작은 이를 알았다. 그러나 공자 주우의 부중 일에 참견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더 이상 도망친 아들에 대해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주우와 석후 두 사람은 더욱 기탄없이 굴었다. 드디어 둘이서 군위를 빼앗아 주우가 군위에 오를 계책까지 꾸미게 되었다. 그러던 중 주나라에서 주평왕이 붕어했다는 부고가 왔다. 그리고 태자가 병이 나서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임(林)이 왕위에 오르게 됐다고 하였다. 그가 바로 주환왕이다. 위환공은 선왕의 죽음을 조문하는 동시에 신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주나라로 가야만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석후가 주우에게 계책을 털어놓았다.
"드디어 때가 왔소이다. 내일 주공이 주나라로 떠난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공자는 내일 서문에서 전송하는 잔치를 베푸시오. 그리고 서문 밖에다 무장한 가솔들을 미리 매복시켜 두시오. 전송하는 술잔이 몇 순배 돌기를 기다려 품고 있던 단도로 찔러 죽이면 그만입니다. 만일 주공의 수하들이 순종치 않거든 그 자리에서 모조리 참하시오. 이러고 보면 군위를 손쉽게 얻을 수 있지요."
주우는 크게 기뻐했다.
이튿날 일찍이 주우는 집안의 장사를 무장시켜 서문 밖에 매복시키고 스스로는 궁중으로 갔다. 위환공은 주우가 서문 밖 행관(行館)에 전송 잔치를 마련하고 모시러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래서 홀가분한 심정으로 함께 잔치 자리로 갔다. 주우가 술을 따라 위환공에게 바치며 말했다.
"형후(兄侯)께서 먼 길을 가시는지라 조촐한 자리나마 받들어 전송하나이다."
위환공은 동생의 뜻이 고맙기만 했다.
"이렇듯 어진 동생을 걱정케 하니 심히 미안하다. 내 이번에 떠나면 불과 한 달 남짓 후에 돌아오리라. 그동안 나랏일에 관심을 갖고 보살피되 항시 세심하여라."
주우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형후께서는 아무 걱정 마소서."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였다. 주우는 돌아서서 금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다시 위환공에게 바쳤다. 위환공은 그 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친히 그 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서 아우에게 직접 권했다. 주우는 일어나서 두 손으로 잔을 받다가 실수한 듯이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우는 황망히 잔을 주워 친히 씻었다. 위환공은 다시 잔을 올리라고 하고는 그 잔에다 술을 부었다. 바로 그 때 주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뜻 뒤로 돌아가, 품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뽑더니 그대로 위환공의 등에다 내리꽂았다.
"으아악!"
외마디 소리와 함께 이미 칼날은 등을 뚫고 앞가슴까지 나와 있었다. 위환공은 썩은 짚단처럼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날이 주환왕 원년 춘삼월 무신일(戊申日)이었다.
위환공을 모시고 왔던 신하들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주우 부중의 장사들이 행관을 에워싸고 반항하는 위환공의 시종 몇 명을 죽이자 모두 무릎을 꿇고 자기 살길만 도모하는 것이었다. 주우는 이렇게 한 후 즉시, 주공께서 급살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주우는 드디어 군위에 올랐다. 시간이 흐르자, 백성들은 주우가 한 일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주우가 석후와 짜고서 형을 살해하고 임금 자리를 강탈했다고 욕하기 시작했다.
"천하에 고약한 놈이로다."
임금 자리에 앉은 주우는 백성들의 인심이 잡히지 않았음을 알았다. 더욱이 사흘째 되던 날부터는 자신이 형을 살해했다고 욕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주우가 심복들을 불러 모았다.
"민심이 흉흉한데 이럴 때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길밖에는 없다. 장차 어느 나라를 대상으로 삼았으면 좋겠는가?"
한 심복이 대답했다.
"우선 천하에 어진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소문을 내십시오. 그 후에 병사들을 모으고 전쟁할 준비를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먼저 대부 석작을 모셔오십시오. 그는 백성들의 신망이 두텁습니다."
주우가 즉시 석후를 불렀다.
"경의 아비를 입조시켜 국사를 의논하려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과인이 직접 모시러 가볼까?"
석후가 대답했다.
"신의 아비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압니다. 주공께서 친히 가실지라도 만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신이 군명(君命)으로 만날까 합니다."
석후는 궁중에서 나와 오랜만에 집으로 가 부친의 얼굴을 뵈었다.
"새로 군위에 오르신 임금께서 아버지를 공경하며 사모하십니다."
백발이 성성한 석작이 아들에게 꾸짖듯이 물었다.
"내가 필요한 까닭이 있을 게 아니겠느냐? 말해 봐라!"
석후가 사실 그대로 말했다.
"아직 군위가 안정되지 못하였기에 부친을 모셔다가 백성에게 안심도 시켜 주고 지시도 받을까 함입니다."
석작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구나 군위에 오르면 조정에 가서 품하고 인증(認證)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 새 주공이 낙양에 가서 천자를 뵈오면 왕은 보불(예복)과 면(모자)과 수레와 의복을 내줄 것이다. 그것을 받고 봉명하면 비로소 임금이 된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어찌 딴 소리를 하겠느냐."
"참으로 좋은 말씀이십니다."
석후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까닭없이 임금이 바뀌었다고 직접 조정에 들어가면 왕이 필시 의심하리니, 어떤 방도를 찾아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교해 주십시오."
석작이 지시했다.
"지금 진후는 주왕에게 모든 충성을 바치고 있다. 그래서 주왕은 진후와 매사를 상의하고 있다. 그러니 새 주공은 우선 진나라에 가서 잘 말하고 진후로 하여금 다리를 놓아 조정에 들어간다면 무슨 난처할 것이 있겠느냐."
석후는 감탄하고 곧 주우에게 가서 아비의 생각을 전했다.주우는 크게 기뻐하고는 석후와 함께 예물을 준비한 후 진나라로 떠났다. 그날 밤 석작은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혈서를 한 통 썼다. 그리고 심복를 불렀다. 그에게 혈서를 내주며 신신 당부하며 간곡히 분부했다.
"네 지금 곧 진나라에 가서 이를 대부 자검께 드리되, '진환공에게 바쳐 주시오' 하고 아뢰어라. 이는 비밀리에 해야 하느니라. 조심해서 완수하여라."
이리하여 석작이 보낸 밀사가 주우보다 한발 앞서 진나라에 당도했다. 그 혈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외신 석작(外臣 石斫)은 백 번 절하면서 진현후전하(陳賢侯殿下)께 아룁니다. 위(衛)는 보잘것 없는 작은 나라이지만, 불행하게도 임금을 죽이는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반역한 공자 주우와 외신의 자식 석후가 높은 자리를 탐하여 일으킨 참변입니다. 이 두 역적놈을 죽이지 않으면 천하에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외신은 늙고 병들어, 능히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으니 그 죄(罪) 어찌 다 말로 할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역적이 나란히 수레를 타고 귀국에 입조할 것입니다. 그것은 외신이 계책을 세워 그리 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귀국이 두 역적놈을 잡아서 죄를 다스린다면 이는 천하(天下)에 다시 없는 의(義)이며 어찌 위나라만의 행(幸)이라 하겠나이까. 외신 돈수 백배하여 현명하신 전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진환공(陳桓公)은 석작의 혈서를 빠짐없이 다 읽고 대부 자검에게 방도를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자검이 아뢰었다.
"그런 놈들을 용서하면 우리 나라까지도 물듭니다. 이제 그 놈들이 진으로 오는 것은 죽을 자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찌 놔둘 수 있겠습니까?"
진환공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미리 준비하여 두 놈을 사로잡도록 하여라."
자검은 즉시 계책을 세워 두었다. 이튿날 주우는 석후와 함께 진나라에 당도했다. 둘은 임금과 신하로서 자못 뽐냈다. 진환공은 전혀 내색을 않고 공자 타(咤)에게 분부했다.
"성 밖까지 나가서 그들을 성의껏 영접하고 객관에 머물러 있게 조치하여라."
성 밖까지 영접나간 공자 타가 주우에게 공손한 자세로 진후의 뜻을 전했다.
"우리 주공게서 내일 태묘(太廟)에서 귀후(貴侯)와 상견하시겠다고 하더이다."
주우는 진후의 자신에 대한 예의가 자못 은근한 걸 보고 매우 기뻐했다. 다음날, 진나라 태묘의 넓은 뜰에는 횃불까지 밝혀졌다. 진환공은 주인 자리에 앉고, 왼편에는 빈객을 영접하는 사람을 두고, 오른편에는 들어와 예(禮)를 고하는 사람을 서게 했다. 모든 법도는 정연했다. 이윽고 석후가 먼저 태묘에 이르렀다. 문 앞에 보니 큰 패가 서 있다. 그 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써 있었다.
:신하로서 충성치 못한 자와 자식으로서 불효한 자는 태묘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석후가 은근히 놀라면서 대부 자검에게 물었다.
"이 패를 세운 것은 무슨 뜻이오니까?"
자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것은 우리 선군께서 남기신 유훈(遺訓)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잊지 않고자 저희 주공께서 패를 세워 후인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석후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태묘 안으로 들어가 주우를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이번에 주우의 법가가 당도했다. 석후는 법가에서 내리는 주우를 부축했다. 주우는 큰 띠에 구슬을 차고 진나라 태묘에 섰다. 바야흐로 국궁하고 예를 행할 차례가 되었다. 그 때까지 진환공 옆에 서 있던 자검이 문득 안색이 변하며 벽력 같은 소리로 외쳤다.
"이제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임금을 죽인 역적 주우와 석후를 잡는다. 이 두 역적 외에 위나라에서 온 수행원들은 모두 안심하여라."
자검의 호령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좌우에서 매복하고 있던 범 같은 무사들이 달려나왔다. 무사들은 단번에 주우부터 잡아 묶었다. 석후는 크게 당황하여 패검을 뽑으려 했으나 칼이 칼집에서 뽑히기도 전에 붙잡혔다. 주우와 석후를 따라온 위나라 병사들은 모두 태묘 밖에 있었다. 그들은 태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자검은 품 속에서 석 장의 혈서를 꺼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밝혔다. 위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그제서야 주우와 석후가 붙잡힌 걸 알았다. 그들은 빈손으로 위나라를 향해 돌아갔다. 진후는 곧 주우를 참하고 석후를 수감한 후 석작에게 통보했다. 석작은 가신(家臣) 누양견을 보내어 수감되어 있는 아들 석후의 목을 자르게 했다. 그후 석작은 대부들의 뜻을 모아 공자 진(晋)을 모셔다 군 위에 앉히기로 했다. 마침내 형(邢)나라에 도망가 있던 공자 진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주우의 목을 무궁(武宮)에 바치고 선군의 원혼을 위로했다. 그리고 위환공을 위해 다시 발상한 뒤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위선공(衛宣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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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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