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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80호
2022.6.9 (음 5.11)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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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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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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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를 음악이 들려 준다. ― 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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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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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것의 가치
잡스럽다는 말의 ‘잡’은 순수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뒤섞인 것이라는 뜻이다. 대상의 가치를 낮추어 보는 말이다. ‘잡것, 잡놈, 잡년’과 같은 말은 아예 사람의 품격을 낮춰 보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순수’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잡’이란 말이 들어가도 그 의미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잡곡’이 건강에 더 좋다고 한다. ‘잡지’에는 이런저런 유익한 정보가 꽤 많다. ‘잡채’나 ‘잡탕’, ‘잡어매운탕’도 이젠 어엿한 메뉴에 속한다. 한때는 ‘잡기’와 ‘잡학’이라는 말에 깔보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도 다 ‘교양’ 속에 들어가 있다. 아직 ‘잡담, 잡소문, 잡음’ 등에는 부정적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잡담 같은 방송프로도 많고 잡소문 전하는 뉴스도 많다. 잡음은 오히려 기계 작동의 문제를 알려주는 신호음 구실을 한다. ‘잡초’도 환경 보전에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며 ‘잡념’이 새로운 착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잡상인’이라는 말은 잡스러운 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점포 가진 상인들이 고정된 점포를 가지지 못한 상인들을 경계하며 쓰는 말이다. 옛날의 과거시험에는 ‘대과’가 있고 ‘잡과’가 있었다. 대과는 요즘 말하는 인문학에 가까운 분야로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리고 잡과는 공학이나 의학 같은 기술직이었고 신분이 낮았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분야가 대세가 되었다. 요즘 어느 인문학도가 감히 공학과 의학을 잡과라 하겠는가? 그저 ‘문송합니다’ 하고 뒷전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시대 아닌가. 잡된 것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다양한 가치를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낡은 것도 새로워질 수 있고 작은 것도 더 커질 수 있는, 기회가 넉넉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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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중독증
1991년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사실상’ 별개의 나라가 되었다. 분명히 ‘조국은 하나다’였는데 ‘하나였다’가 된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를 가리키는 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한민국’ ‘우리나라’ ‘한국’은 다 같은 말인가? ‘대한민국’은 남한의 헌법상 국호이다. 특히 축구 응원에서 ‘대한민국’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도 남북 친선 축구에서는 그 말을 삼갔던 것만 보아도 그 느낌이 온다.
한 방송을 보니 “불가리아(약 11만㎢)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크기의…”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때의 ‘우리나라’는 남한(약 10만㎢)을 가리키는 셈이다. 베트남(약 33만㎢)에 대한 소개에서도 “우리나라의 약 3.3배에 달하는 면적에…”라는 표현은 우리나라를 남한으로 말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우리나라란 여권 없이 마음대로 쉽게 오가는 영토를 가리키는 셈이다.
반면에 ‘한국’이라 하면 남북한을 통틀어 가리키는 느낌이 든다.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한국 전쟁’ ‘한국어’ ‘분단 한국’ 등의 표현에서도 ‘한국’이 남북을 다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한국사’에는 북한 역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평창겨울올림픽 폐회식에서 토마스 바흐 올림픽위원장은 “한국과 북한이 평화를 위해 함께했다”고 치하했다. ‘남한과 북한’이라고 했다면 별로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한국과 북한’이라고 대등하게 나열한 것 자체가 마치 비문법적인 말 같아 보였다.
이러한 낯선 표현은 앞으로 국면이 바뀌어 가면서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한국이 남북한 같기도 하고 남한 같기도 한 여러 장면이 나타나는 경우 말이다. 이 모두 우리의 지독한 분단 중독의 후유증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낯선 말들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슬슬 그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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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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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정열 - 김수영
사면의 신문 위에 육호활자가 몇천개 박혀있는지 모르지만
너의 상상에서는 실제의 수십배는 담겨있으리라
이 무수한 활자 가운데에
신문기자인 너의 기사도
매일 조금씩은 끼이게 되는데
큰 아름드리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너는 네가 한 신문기사를
매일아침 게시판 위에서 찾아보는 버릇이 너도 모르게 어느덧 생기고 말았다
생각하면 그것은 둥근 옹이같이 어지러웁기만 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초점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이 초점을 바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낭만적 위대성을 잊어버린 지 오랜 네가
인류를 위하여 산다는 것도 거짓말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래도 누가 읽어줄지 모르는 신문 한구석에 너의 피가 어리어있는 것이
반가워서 보고 있는 것인가
기사라 하지만 네가 썼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가히 무관한 것
그러기에 한결 가벼운 휴식의 마음으로 쓰고 있을 수 있었던 것
오랜 피곤도 고통도 인내도 잊어버리고
새사람 아닌 새사람이 되어
아무도 모르고 너 혼자만이 아는
네가 쓴 기사 위에
황홀히 너를 찾아오는 아침이여
번개같이 가슴을 울리고 가는 묵은 생명과 새 희망의 무수한 충돌 충돌.......
누구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어오던
무색의 생활자가 네가 아니던가
자유여
아니 휴식이여
어려운 휴식이여
부르기 힘드는 사람의 이름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너무나 무거운
너의 짐
그리고 안락, 안이, 허위......
모두다 잊어버리고 나와서
태양의 다음가는 자유
자유의 다음가는 게시판
너무나 어려운 휴식이여
눈물이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는
게시판과 너 사이에
오늘의 생활이 있을진대
달관한 신문기자여
생각하지 말아라
「결혼윤리의 좌절
-행복은 어디에 있나?-」
이것이 어제 오후에 써놓은 기사대목으로
내일 조간분 사회면의 표독한 타이틀이 될 것이라고 해서
네가 이 두 시간의 중간 위에 서있는 것이라고 해서
어려운 휴식
참으로 어려운
얻기 어려운 휴식
너의 긴 시간 속에 언제고 내포되어있는 휴식
그러한 휴식이 찬란한 아침햇빛 비치는 게시판 위에서 떠돌아다니면서
희한한 상상과 무수한 활자를
너에게 눌러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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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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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교(刎頸之交) / 생사를 같이하는 친한 사귐. 또 그런 벗.
《出典》'史記' 廉頗 藺相如列傳
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유현(劉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原狀)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서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이지요."
"나는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소양왕을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 오지 않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어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袒負荊]'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하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刎頸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동의어】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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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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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꽃을 퍼뜨리는 기쁨 - 오윤현
세상 보기를 시인보다 더 평화롭게 살펴보고, 꽃을 자식만큼 사랑하는 노인이 바로 '꽃씨 할아버지', 최영만 씨(66세, 강원도 태백시)이다. 1968년부터 22년 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족두리꽃, 접시꽃, 분꽃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 물기가 차오르는 꽃씨를 전국 방방곡곡에 나누어 온 최영만 할아버지.
"어머님께서도 꽃 가꾸기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초가집 앞 허술한 화단에 모란이나 도라지꽃, 봉선화 등을 가꾸셨는데, 꽃이 필 때쯤이면 내게 늘 '너도 남의 앞에 꽃이 되어라. 그리고 꽃을 사랑하거라'고 일러주셨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최영만 할아버지는 꽃이 지닌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라든가, 요염한 빛깔과 꽃에서 묻어나는 향취의 참맛을 몰랐다. 고향인 진천에서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는 1966년 가을 가까스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태백시 광산 보안지도소 수위로 취직했다. 낯선 곳으로의 첫 이주였다. 그런데 그가 태백에 와서 처음 본 것은 앞뒤로 꽉 막힌 검은 산과 새까만 시냇물, 그리고 공터에서 맘껏 자란 쑥대와 잡초뿐이었다. 마음의 쓸쓸함과 황량함을 뭐라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아침, 지도소 안을 청소하던 그의 눈에 싱싱하게 피어난 한 무더기 나팔꽃 넝쿨이 강렬하게 들어왔다. 나팔꽃은 그 진한 싱싱함으로 주위의 황량함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꽃 가꾸기였다. 그 다음해에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검게만 보이는 공터에 채소와 화초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지질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다음해부터는 고향의 어머니 생각도 간절하고, 또 억쎈 들꽃이라면 이 정도 땅에서도 굳세게 자라 줄 것 같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씨를 심어 보았다.
그해 가을 그는 처음 자기 눈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심은 작은 씨앗에서 저렇게 곱고 탐스러운 여러 송이의 꽃들이 피어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 마치 마술을 부려 놓은 것 같았다. 그해 가을 그는 자신에게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혜안을 키워 준 어머니에게 사랑의 보답으로 몇 가지 꽃씨를 보내 드렸다. 그후에도 몇 년 간 계속해서 많은 양의 꽃씨를 어머니께 보내 드렸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맙게도 마을 어귀에 그 꽃씨를 심어 아름다움을 가꾸어 내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이었어요. 꽃씨를 수확했는데 어머니께 보내 드리고 나서도 많은 양이 남았어요. 며칠을 궁리하다가,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해서 가까운 관공서로 무조건 보내 주었지요."
겨울이 물러가고 한참 지나서 민원 서류 한 통을 떼기 위해 면사무소에 들렀던 그는 우연히 인부들이 사루비아와 코스모스 씨앗을 정성들여 땅 속에 묻고 있는 것을 보았다. 씨앗의 출처를 물어 자신이 보낸 것임을 확인한 그는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갖게 됐다. 청와대를 비롯한 전국의 관공서로 자신이 모은 코스모스며 맨드라미, 봉선화, 해바라기 등속의 씨앗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꽃씨를 보내는 소박한 그의 일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러자 봇물 터진 듯 사람들의 주문이 쇄도해 왔다.
(샘터 기자)
일본을 다시 생각한다 - 김승한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한국인 자녀를 위한 학교엔 빈자리가 없었다. 도쿄의 경우엔 한국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한국 학교가 단 한 군데밖에 없다. 따라서 정원에서 한 명이 빠져 나가면 대기 신청 순위에 따라 전학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전학 첫날 아이는 담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첫 인사를 드렸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아이를 수용하게 된 학교측은 아마 내심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 걱정하시지 말라, 최선을 다해 교육할 터이니 긴밀하게 상의하자, 이웃나라 어린이를 학생으로 받게 되어 기쁘다는 인사까지 덧붙였다. 그리곤 아이에게 일본 단어 세 가지를 외우게 했다. 오미즈(물), 오테아라이(화장실), 이타이(아파요). 수업중에 목이 마르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그 말을 선생님께 하라고 가르쳤다.
교장 선생님은 한국 어린이를 책임지게 된 만큼, 자신과 담임 선생님도 한국어를 배워서 아이와 교류할 작정이라고 했다. 이쪽이 송구스럽기도 했고 의례적인 인사치레려니 하며 흘려 버리고 말았다. 전학했을 때는 여름이었다. 별탈 없이 그 해를 보내고 이듬해 정월이 되었다. 한겨울에도 거의 영상의 기온이던 도쿄에 함박눈이 쏟아지고 영하로 급강하했던 1월 중순, 새벽 출근길에 그 초등학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두툼한 방한복을 입은 한 노인이 빗자루로 등교길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마스크를 썼는데 낯이 익었다. 가가이 다가가자 노인은 마스크를 풀었다. 그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행여 미끄러져 다칠까 봐 선생님이나 관리인들보다 일찍 나와 눈을 치우는 게 분명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일본어로 아침 인사를 하자 교장은 한국어로 이렇게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추워졌지요?"
한국어를 배운 지 일곱 달 만에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일순, 놀라움보다는 전율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였다. 아이가 별탈 없이 학교에 다녔던 배경에는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철저함과 집요함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MBC 주일 특파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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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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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여백 - 박이문
영결식
코끼리는 죽어 쓰러진 제 새끼를 긴 코로 안타깝다는 듯 일으키려 애쓰다가도 발길을 돌려 초원의 풀을 뜯어 먹는다. 사자에 잡혀 먹히는 동료를 바라보는 사슴의 큰 눈은 어질고 슬퍼 보이지만 다른 무리들에 끼여 자리를 옮긴다. 동물들은 죽은 동료를 그냥 보낸다. 인간의 경우만은 다르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그 형태나 방식은 다르지만 누군가가 죽을 때 그를 그냥 보내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는 죽은 전우에게 십자가를 긋는 것으로 끝날 때도 있다. 셋방 한구석에 헝겊으로 둘둘 말은 할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남은 식구가 냉수를 갖다 놓고 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전통이나 종교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 조객들이 모이고 화려한 조화 속에서 분향도 올리며 조문을 읽는 영결식이란 이름이 붙을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영결식은 국가적 때로는 국제적으로 큰 행사가 될 수 있다.
영결식이란 이름이 붙든 말든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의 절차는 틀림없이 의식의 일종이다. 의식은 사람들이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이나 혹은 한 사회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되새기고 기념하기 위한 행사다. 백일 잔치, 결혼식, 회갑연은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의식이다. 설날, 추석, 광복절 등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의식의 예가 된다. 이러한 날들이 개인으로서의 한국인에게 혹은 한 사회로서의 한국에게 잊을 수 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의식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새삼 긍정하게 된다. 의식의 절차를 밟으며 한 사회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것의 발전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다. 의식은 한 사람의 생존, 한 사회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러한 개인, 그러한 사회를 위해서 있다. 이처럼 의식은 그 의식의 주인의 삶을 위해서만 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영결식은 그 성격이 퍽 다른 의식이다. 이 의식은 막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절실하고 엄숙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좀더 고찰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될 것 같다. 영결식은 논리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의식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는 사체는 있어도 죽음이 이미 그 사람의 주체성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영결식을 올리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어떤 종교적 테두리에서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는 영혼의 존재를 믿을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죽은 당사자는 물론 의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나같이 유물론자여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경우에도 영결식이란 신중하고 엄숙한 의식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의 입장에 있다고 짐작된다. 그렇다면 의식을 구성하는 어떤 중요한 절차는 그 의미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 아끼고 귀한 이의 죽음은 처자나 부모나 친구나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없는 아픔과 슬픔을 가져온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가져왔던 물질적이거나 정신적 양식의 단절을 의미하는 이상, 그것이 나나 우리를 슬프게 함은 마땅하다. 이같이 살아남은 나 자신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슬픔과 걱정을 표현하기 위해 영결식을 한다면 육체의 죽음을 초월한 영혼의 삶을 믿지 않아도 이 의식의 의미는 이해된다.
영결식은 살아남은 사람의 인간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슬퍼하고 울고 조사를 읽는다고 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장을 장식한 조화, 제단에 놓인 음식, 비상한 어조의 조사, 지나간 이에 대한 찬사, 우리들의 통곡 등은 어떤 뜻을 지닐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렇게도 죽음을 슬퍼하는 그 사람은 관 속에 누워 차려놓은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조사를 듣지도 못하고, 우리들의 슬픔을 의식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영결식이란 의식 행위는 전혀 이해될 수 없고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철저한 유물론자도 의식을 올리고 영결식에서는 엄숙해진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와 생각에 모순이 있다 해도 이성이 도달할 수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성스러움이 삶과 죽음 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물론자도 기꺼이 참여하는 영결식이란 의식은 인간이 단순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제스처이다. 그것은 신이 없더라도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대자연은 유물론적으로만은 이해될 수 없다는 인간의 외침이다. 그것은 또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무한히 엄숙하고 성스럽다는 사실의 증거다.
옛 시골이 아니다
나는 작고도 보잘 것 없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일제 시대에 서울의 한 '높은 학교'에 입학, 기숙사에 들어가기까지 나는 한 시간 반이 걸리는 논두렁길, 밭두랑길, 야산 언덕길을 걸어 소학교를 다녔다. 5학년 때 전국 학생 대표로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고 일본을 여행하면서 보게 된 것을 제외하면 내가 본 한국 세계는 20리 길을 둘레로 한 고향의 모습이 전부였다. 50년대말까지도 6.25때 부산에서 보았던 모습과 서울 주변과 서울, 그리고 고향인 아산을 왕래하면서 볼 수 있었던 것이 내가 아는 한국의 전부였다. 무관심해서가 아니다. 나는 남달리 호기심이 많다.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라고 늘 자랑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낯설고 신비스럽기도 한 한국의 방방곡곡을 구경하고 싶었다. 다만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나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교통 조건 때문에 국내 여행, 특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우리는 미개발된 농경사회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지나가본 한국의 도시, 마을, 산천은 별로 없다. 그러나 최근 기차나 버스로 서울과 부산을 몇 차례 다녀봤고, 내 자신 자동차를 몰고도 왕래했다. 그만큼 우리의 경제적 상황이 좋아졌고 교통조건도 발달된 것이다.
과연 한국의 산과 들의 아름답고 우아함을 새삼 피부로 느끼게 된다. 한국은 어느덧 산업사회로 완전히 바뀌고 있다. 한국은 짧은 시간에 상상이 안 될 만큼 변했다. 그 속도와 그 변화의 크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한국의 개발은 끝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어떤 도시나 특수한 지방에 한정되지 않고 조용히 남은 시골이 따로 없다. 국토 전체가 움직이며 개발되고 공장화될 성 싶다. 한국은 정말 많이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50여 년 전은 물론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시골, 특히 '한국적'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한국은 이미 옛날의 한국이 아니다. 이런 느낌을 강하게 갖게 된 것은 불과 며칠 전 중부고속도로로 차를 몰면서이다. 이렇게 변한 한국, 이렇게 개발된 한국에서 내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강력한 인상은 '에너지'이다. 한국인의 야생적 활력이 눈에 보이고 피부에 와 닿는다. 그러나 나의 느낌은 착잡하고 나의 생각은 갈등을 일으킨다. 차도(수레 차, 길 도)를 따라 양쪽으로 전개되는 시골의 퍽 달라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흐뭇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쩐지 삭막한 느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산을 뭉개고 시골마을을 산업 단지로 바꾸는 이 '개발'에 자랑스러운 환희를 느끼면서도 우리의 국토와 우리의 마음이 황폐화되어간다는 슬픈 감정을 막을 수 없다. 시골의 현대화가 발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시골의 푸르고 조용한 정서를 메마르게 한다.
옛날 내가 태어나 자라던 사연 많은 고향집이 철거되거나 아니면 내가 꼬마 친구들과 뛰어 놀고 소에 풀을 뜯기고 개천에서 붕어를 잡던 고향 마을이 숫제 수몰되거나 아니면 불도저로 뭉개져 없어졌다. 적어도 한번 찾아가 둘러보고 싶은 고향집이 없다. 한번 돌아가 보고 싶은 고향이 없다. 고향은 시골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갖지만, 그런 시골이 없다. 내 고향집, 내 고향 마을, 내가 살던 시골만이 아니다. 한국인 모두의 고향집, 고향 마을, 시골이 없다는 말이다. 개발이라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만큼 물리적으로 전국토가 황폐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서울, 폐수로 오염된 낙동강, 어디를 가나 눈에 거슬리게 흩어진 비닐봉지류, 주차장으로 변해가는 고속도로, 그 많은 자동차 사고 등이 황폐하고 삭막한 오늘날 한국의 물리적 풍경이다. 상하를 막론하고 만연되어 있는 도덕적 부패, 천하게만 보이는 사치 풍조, 어디서나 떠들썩한 큰 갈등의 목소리, 다반사같이 일어나는 인신 매매, 어린이 유괴 사건, 끊임없이 보도되는 살인 사건 등도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들이다. 올림픽을 치르면서 세계 제일인 줄 알고 떠들썩댔던 것도 엊그제, 흑자였다가 갑자기 불어난 무역 적자, 도와줘도 고맙다는 소리를 못 듣고, 잘못해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게 된 풍조,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동안 한국인의 마음이 얼마만큼 들떠 있고 고갈되고, 빈곤하며 황폐화되었는가는 웅변으로 알려준다.
개발은 주어진 자연의 변형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파괴를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자연,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국토가 개발되어야 하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그 자연, 그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지 않고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로는 가까이는 일본, 멀리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있다.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정신적 빈곤을 가져와야 할 이유가 있는가. 어떻게 보면 전세계는 자본주의 체제로 완전히 변신해 가고 물질 만능주의에 차츰 더 물들어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훨씬 앞서 개발되고 풍요해진 서유럽 사회가 정신적으로 우리 사회만큼 거칠게 황폐화되고 삭막하지는 않다. 문제는 물질적 풍요를 찾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어떤 가치를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그러한 풍요를 이룩하느냐에 있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보다 사람다운 삶을 위해서 국토는 계속 개발되어야 한다. 다른 민족, 다른 문화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 세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기술적 경쟁에서 낙후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개발과 우리의 경제에 큰 문제가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바다. 지금 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상황이 병들어 있음에 눈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에게 국가적으로, 아니 민족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이겠는가? 경찰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고 감옥도 더 많이 지어야 할 것이다. 관공서나 개인, 기업에서 과소비 억제 운동을 하고 주부들의 저축운동도 필요하다. 30분 더 일하기, 30분 덜 쉬기 운동과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비의 증가도 필요하다. 곳곳에서 수시로 모임을 갖고 맹세를 하고 구호를 부르며 현수막을 크게 세울 필요도 있고 냉철하고 객관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정책의 설정과 실행이 요청되기도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진단은 피상적이며, 위와 같은 문제 해결책은 임시 변통적 미봉책에 불과하다. 근본적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심성(마음 심, 성품 성)에 있고, 그 문제의 해결은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 삶에 있어서의 가치관을 반성하고 고쳐가는 데 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유치하다고 할 만큼 얕다. 엊그제만 해도 후진국의 가난에서 허덕이며 잘사는 이웃을 선망해왔으면서 경제적으로 좀 좋아졌다고 해서 우리는 마치 세계 제일의 부강한 국민이 된 것처럼 큰소리를 쳤다. 과소비 현상, 물꼬가 터진 듯이 밀고 밀리면서 해외로 떠나는 관광객들, 해외에서 땅속으로 들어가도 부끄러울 만큼, 천하고 야만스럽고 또 오만스럽게 추태를 부리는 많은 여행자들의 행태는 문화인임을 자부하는 우리 국민들의 정신적 수준이 얼마만큼 얕은가를 말해준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물질주의자다. 우리의 경제에 금이 가게 하는 사치 풍조와 과소비가 우리들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증명한다. 해외를 자주 드나드는 부유층의 소위 '귀부인'들이 파리나 뉴욕 그 밖의 도시의 최고급 상점에서 이른바 '쇼핑'하는 꼴을 보면 우리 사회에 물질주의가 얼마만큼 깊이 물들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돈이면 된다는 황금 만능 사상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적 재산의 축적과 그것을 과시하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물질주의는 우리의 도덕적 무감각과 통한다. 우리는 스스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칭해왔다. 그러나 냉정히 반성하면 우리 속에서 그러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 눈치를 보면서 법을 지키거나 형식적으로 어떤 도덕적 교훈을 지키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 태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남의 인격을 존중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늘 생각하는 태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덕적이었다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혼란스러운 현실에 부딪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업인과 지식인들이 조금이라도 도덕적 의식을 가졌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거칠고, 불공평한 물질주의 풍조에 물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 모두가 강한 도덕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공정하고 보다 깨끗하고 보다 밝은 사회가 됐을 것이다. 우리들이 다 같이 도덕적이었다면 오늘날의 물질주의, 과소비, 무역 적자, 기술 개발의 낙후성은 이미 해결됐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함께 도덕성을 존중하며 살아왔더라면 우리들은 외국에서 그렇게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의 모든 문제는 보다 간결한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으며, 철저히 진실을 탐구하는 정신으로 살고 있지 않으며, 우리 자신에게 '성실'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보다 조용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고 성실할 수 있는 정신적 자세를 찾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철저해야 한다. 물질적 자연의 개발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개발을 해야 한다. 자연의 개발도 정신의 개발에 바탕을 둘 때 보다 옳고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황폐한 심성을 의식하고 그것을 푸르고 아름답고 품위 있게 고쳐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언제나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는 일이다. 우리의 높은 정신적 품위가 개발될 때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자연개발도 비로소 귀한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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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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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아흔세번째 이야기 - 어리석은 고집
옛날에 두 친구가 있었다. 한 사람은 똑똑했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우둔했다. 어느 날 똑똑한 친구가 우둔한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둘 다 집이 가난하니 뭔가 할 일을 찾아보세. 우리는 친한 친구니까 함께 힘을 모아 일을 해보세. 먼저 산으로 가 들짐승이라도 잡아서 팔아보는 게 어떤가?"
의견이 일치한 두 사람은 성을 나와 돌아다니다가 한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쓸 만한 물건은 거의 없었고 길가에 약간의 황마만 널려 있었다. 똑똑한 이가 말했다.
"저 황마라도 서로 반씩 나누어 가지고 가세."
황마를 짊어진 두 사람은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또 다른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마사가 땅바닥에 널려 있었다. 똑똑한 이가 말했다.
"마사는 가볍고 가늘어서 휴대하기 편한 데다가 값어치도 황마보다 높네. 나는 황마를 버리고 마사를 가지고 갈 참이네."
그러자 우둔한 이가 말했다.
"나는 이미 황마를 봇짐에 단단히 틀어맸으니 버릴 생각이없네."
똑똑한 이는 황마를 버리고 마사를 매었다. 그리고 길을 계속 가다가 이번에는 마포를 보게 되었다. 다시 똑똑한 이가 말했다.
"마포는 바로 마사로 짠 것이네. 한 필의 마포를 만들자면 수많은 마사가 있어야 하네. 나는 마사를 버리고 마포를 갖고 갈 생각이네."
우둔한 이는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이미 황마를 봇짐에 단단히 틀어맸으니 그것을 버리고 마포를 챙길 생각이 없네."
똑똑한 이는 마사를 버리고 마포를 봇짐에 틀어매고는 계속해서 길을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면화를 보게 되었다. 그때 똑똑한 이가 말했다.
"면화는 마포보다 값이 더 나가고 휴대하기도 편하니 면화를 챙겨야겠네."
그러나 우둔한 이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나는 이미 황마를 봇짐에 단단히 틀어맨 상태네. 게다가 그것을 들고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어떻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똑똑한 이가 우둔한 이가 말을 듣지 않자, 자기만 마포를 버리고 면화를 챙겼다. 그후에 그들은 면화사를 보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흰색 면포 그리고 계속해서 백동, 백은, 마지막으로 황금을 보게 되었다. 똑똑한 이는 무언가 보일 때마다 계속 바꾸어 짊어졌고, 우둔한 이는 시종일관 황마만을 고집하였다. 똑똑한이가 우둔한 이에게 말했다.
"황금이 없었더라면 나는 백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네. 만약 백은이 없었더라면 백동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 그리고 백동, 면호, 면화사, 면화, 마포가 없었더라면 마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네. 또 마사마저 없었더라면 황마를 가지고 있었을 테고. 그러나 지금 여기에 황금이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황금의 가치가 가장 높지 않은가? 자네가 황마를 버리고 나도 백은을 버린다면 우리 둘 다 황금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네."
그래도 우둔한 이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나는 이미 황마를 봇짐에 단단히 틀어맸고 또 그것을 가지고 먼 길을 왔으니 버리긴 싫다네. 자네는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나는 상관하지 않고 이 황마를 가지고 가겠네."
똑똑한 이는 백은을 버리고 황금을 갖고 돌아갔다. 집안 사람들은 그가 멀리서 오는 모습을 보고 모두 기뻐하며 뛰어나와 환영했다. 똑똑한 이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우둔한 이는 황마를 가지고 집에 돌아갔다. 집안 사람들은 그를 보고서도 기뻐하지 않고 환영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비웃기만 했다. 우둔한 이는 그제서야 후회막급한 심정이 되었다.
<장아함경>
아흔네번째 이야기 - 사막에서 물과 풀을 버리면
옛날에 두 사람의 상인이 각자 오백 명씩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 그곳에 가려면 광활한 사막을 지나야 했으므로 함께 모여 떠나기로 했다. 그 동안의 경험에 따라 그들은 꽤 많은 양의 물과 풀을 준비하여 사막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한 야차귀가 대상의 무리를 발견하고 미모의 소녀로 둔갑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걸치고 머리에 현란한 장신구를 단 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대상의 무리가 다가오자 그녀는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먼 길을 가시느라 피곤하시죠? 그런데 그 많은 물과 풀을 지니고 있다니요? 이 근처에 물과 풀이 아주 많은 곳이 있으니, 이젠 필요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것들을 버리고 저를 따라 물과 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게 어때요."
그 말을 듣고 한 우두머리 상인이 수하들에게 물과 풀을 모두 버리게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우두머리 상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생각에 잠겼다. '사막에서 물과 풀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저 한 사람의 말을 순순히 따를 수는 없다. 게다가 저 미모의 소녀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잖는가?' 물과 풀을 버린 우두머리 상인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소녀를 따라 반나절쯤 갔지만, 물과 풀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 막 물어보려고 하는데, 이미 그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그들 모두는 사막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물과 풀을 버리지 않은 우두머리 상인과 그 수하들은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서 장사를 잘할 수 있었다.
<잡보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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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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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나만의 글쓰기 비법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지 않은 글쓰기 강의
글을 쓰는 데에는 왕도가 없다. 이것은, 글이란 것은 반드시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써야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뜻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 글쓰기 강의를 시작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내가 소설가에 뜻을 두고 글쓰기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에 참고했던 글쓰기 공부에 관한 몇 가지 책들은 한결같이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열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문학병이 들었고, 그때부터 글쓰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그 어느 누구의 강의나 저서를 통해서도 글쓰기의 비법다운 비법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지금 나의 문장쓰기, 구성하기, 글 속에 주제담기 비법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된 것이다. 지금 내가 하려는 글쓰기 공부 강의는 나의 그러한 많은 시행착오의 일화와 그것을 통해 얻어진 나만의 비법을 후배들에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준 <문학사상사> 여러분에게, 이 책을 위해 여라가지로 도와준 제자 박창희에게 깊이 감사한다.
제1교시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이란 어떤 것인가, 생명이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글
1. 엿장수 이야기
옛날에 장사하는 수법이 탁월하여 돈을 많이 번 엿장수 한 사람이 있었다.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하고 궁리하던 한 청년이 그 엿장수를 찾아갔다.
"저에게 장사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청년이 그 엿장수에게 간곡히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엿판을 하나 만들어 짊어지고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장사하는 법을 배우시오." 청년은 그 엿장수가 시키는 대로했다. 탁월한 엿장수가 엿판을 짊어진 채 앞장서 가고, 청년은 제자가 되어 뒤를 따랐다. 앞장을 선 스승 엿장수는 가위질 소리를 멋들어지게 내고, 엉덩이춤에다 어깨춤까지 추면서, "둘이먹다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르는 울릉도 호박엿 사시요오" 하고 노랫가락을 섞어 가며 외쳤다. 뒤따라가는 제자 엿장수는 그 소리를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목구멍 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앞장서 가는 스승 엿장수가 뒤따르는 제자 엿장수에게 얼른 따라해 보라고 재촉했다. 제자 엿장수는 조금 전에 스승 엿장수가 소리친 말을 열심히 따라 외웠다. 한데 앞장선 스승 엿장수가, "첫사랑의 맛같이 새콤달콤한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엿 사시요오" 하고 말을 바꾸어 소리쳤다. 뒤따르는 제자 엿장수는 또 그말을 열심히 외웠다. 그러자 스승 엿장수는 또 말을 바꾸었다.
"장가 못 간 총각은 장가가게 하고, 시집 못 간 처녀는 시집가게 하는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그러고는 제자에게 얼른 따라해 보라고 재촉했다. 제자 엿장수는 또다시 조금 전에 스승이 한 말을 머릿 속에 외워 담았다. 그런데 스승 엿장수는 곯리기라도 하듯이 또 말을 바꾸어 소리쳤다.
"시어머니가 이 엿을 먹으면 주름살이 펴지고, 며느리가 먹으면 나온 입이 들어가는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엿사시요오"
그 때까지 제자 엿장수는 한마디도 외치지를 못했다. 스승 엿장수가 제자 엿장수를 향해 무얼 하고 있느냐고, 얼른 따라 외쳐 보라고 재촉했다. 제자 엿장수는 그 재촉에 못이겨, 앞장선 스승 엿장수가 소리를 지른 다음에 기껏, "내 것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앞장서서 다니는 스승 엿장수의 엿은 사는데, 뒤따라 다니며 "내것도" 하고 외치는 제자 엿장수의 엿은 사려고 하지 않았다. 제자 엿장수는 사람들이 왜 자기의 엿을 사려고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덨다. 그는 슬픈 목소리로, 스승이 외친 다음에 곧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고 또 외쳤다.
"내 것도오"
이 세상에는 그 스승과 같은 엿장수가 한 사람만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제자 엿장수는스승 엿장수를 따라서 "내것도오" 하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기의 호박엿을 먹어보고 또 먹어 본 다음에 그것의 맛과 향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혼자서만 외칠 수 있는 독특한 말(상업적인 기술 혹은 상업적인 구호)을 연구해 내야 한다. 그것을 연구하려고 자기의 호박엿을 맛보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자. 자기의 혓바닥마저도 달크무레한 그 호박엿물을 따라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리려 할 만큼, 그맛디 달고 구수하고 새콤하게 느껴 졌다. 그리고 그것을 삼키고 나자 뱃속이 개운해 지고, 머릿 속이 환해 지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얼굴 살결 또한 희어지는 것 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말을 외치면 디는 것이다.
"혓바닥까지 넘어가는 훌륭한 호박엿이요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인 아들 딸한테 먹이면 지능지수가 높아지고, 중학생인 아들 딸들판테 먹이면 국어, 수학, 영어 시험에 모두모도 백점만 맞게 되는 호박엿이요오 고등학생인 아들딸한테 먹이면 대학에 누워서 들어가게 되는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처녀가 먹으면 피부가 고와지고 총각들이 먹으면 힘이 세어지는 호박엿이요오"
제자 엿장수가 이렇게 자식들의 교육문제와 피부미용에 대한 소리를 곁들어 외친다면, 기껏 사랑놀음의 말만 앞세우고 외치는 스승 엿장수 보다 훨씬 많은 엿을 팔 수 있지 않을까?
2.누가 써도 마찬가지인 글
글을쓸 때, 우리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첫째, 누가써도 마찬가지인 글을 써서는 안된다.
(1) 까마귀과에 속한는 종으로, 우리나라의 외딴 섬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번식하는 흔한 텃새이다. 몸길이는 약 45센티미터이며, 암수의 깃털은 동일하다. 머리, 등, 가슴, 꽁지는 광택 있는 검은색이며 배는 흰색이다. 날개의 일부분은 흰색이며 나머지 부분은 진한 청록색이고, 부리와 다리는 검은색이다. 주로 시골, 인가 주변, 들판, 야산 도시의 공원 등에서 무리를 지어 산다. 둥우리는 소나무, 아카시아, 밤나무, 미루나무, 버드나무 가지위에 짓고, 여섯 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개구리, 곤충, 보리, 쌀, 콩 등을 먹는다.
(2) 남아메리카 원산지인 식물로 우리나라에 오래 전에 들어와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고 있는 바늘꽃과의 두해살이 풀이다. 높이는 50-90센티미터쯤 자라고, 굵고 곧은 뿌리가 나는데 한 개 혹은 여러개의 대가 곧게 자란다. 뿌리에서 나온 잎은 사방으로 둥글게 퍼지며, 줄기에서 나온 잎은 끝이 뾰족한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7월과 9월 사이에 노란 꽃이 피고, 잎 겨드랑이에 한 개씩 달린다. 저녁 때에 노란색으로 피었다가 아침에 햇빛이 비치면 곧 시드는데, 약간 붉은 빛이 돈다. 꽃받침은 네 개로 두 개씩 함쳐지며, 꽃이 피면 뒤로 젖혀진다.
(3)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은 북한과 남한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남한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나라이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립니다. 대한 민국은 면적이 좁으며 사람들이 많이 살아 인구밀도가 높습니다. 그리고 춘하추동이 뚜렷합니다. 봄은 따듯하고 온갖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납니다. 여름은 매우 덥고, 8월은 1년중 가장 더운 달입니다.
(4) 우리나라의 국기는 태극기로, 태극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나타내는데, 네 귀에는 건(하늘), 곤(땅), 감(물), 이(불)를 나타내는 검은색의 네 괴가 있다. 우리나라 꽃은 무궁화 이며, 국가는 안익태님께서지으신 애국가이다.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70퍼센트가 산지 인데, 대부분 복쪽과 동쪽이 높고 서쪽과 남쪽이 낮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 있어 계절풍기후를 이룬다. 겨울에는 삼한 사온 현상이 아타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위애 든 보기 (1)은 '까치'에 관한 글의 일부이고, (2)는 '달맞이꽃'에 대한 글의 한 대목인데, 백과사전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3)과 (4)는 ;우리나라'라는 제목의 글로서, 독자들이 보내온 글 중에서 두편을 골라 앞부분을 인용했다. 이 글들은 모두 누가 써도 마찬가지인 내용의 글이다. 내용과 문투가 이미 어떤 생각의 틀 속에 들어가 있는 상식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 주어진 어떤 제목을 앞에 놓고, 그 제목이 주는 고정 관념에 얽매이게 되면 이렇게 백과사전 투의 상식적인 글을 쓰게 도니 . 이런 글을 '기술하는 문장의 글' 이라고 말하는데, 아무리 매끄럽게 다듬고 수식어들을 동원하여 치장을 하고 엄살을 피우더라도 절대로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읽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곧 생명이 없는, 죽은 글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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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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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2. 하늘의 뜻인가?
도망친 사내
이 때,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왕명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위반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먼 시골 사람들은 아무 소문도 못 듣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시골 부부가 나타났다. 여자는 쑥대로 만든 전통을 여러 개 묶어 머리 위에 이고, 남자는 산뽕나무로 만든 활을 짊어지고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해지기 전에 팔고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바삐 걸었다. 마침 순찰중이던 사시관이 이를 보고 달려왔다.
"이 년놈을 포박하여라!"
사시관의 수하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여자의 팔부터 움켜 쥐었다. 순간 뒤따라오던 남자는 짊어지고 있던 산뽕나무 활을 날쌔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죽어라 하고 나는 듯이 달아났다. 사시관들은 그 여자를 좌유에게 데리고 갔다. 좌유가 잡혀 온 여자와 물품을 살핀즉 아이들의 동요와 맞아 떨어졌다. 좌유는 곧 왕궁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달아난 남자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았다.
"한 여자가 법을 어기고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을 팔기에 잡아왔습니다. 마땅히 참형에 처하고 이를 널리 알리겠습니다."
주선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부했다.
"그 여자를 참(斬)하고 활과 전통을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불태워 버려라."
한편 사내는 달아나면서 자기 아내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되돌아가 살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사내는 멀리 도망친 곳에서 잤다. 이튿날이 되었다. 소문이 떠돌았다.
"어떤 시골 여자가 나라에서 금지한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을 팔러 가다가 북문(北門) 근처에서 사시관에게 잡혀 참형으로 죽었다네."
사내는 그제서야 산뽕나무 활과 쑥대 전통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아내는 잡혀 죽었고 자신은 도망치는 신세인 것을....... 사내는 더 멀리 도망쳤다. 얼마나 갔을까.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 그제서야 사내는 죽은 아내를 생각하면서 신세를 한탄하고 슬피 울었다. 동시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자기 자신을 정말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달아났다. 마침내 멀리 강변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문득 한 곳을 바라보았다. 온갖 새떼들이 날며 울며 야단이었다. 사내는 이상하게 여겨 그 곳으로 가까이 갔다. 웬 갓난애가 강물 위에 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기의 등 밑에는 커다란 자라가 받치고 있었고 새떼들은 주둥이로 아기가 강물에 빠지지 않도록 잡아당기며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사내는 기겁하고 놀라 부르짖었다.
"괴상한 일이로다!"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갓난애를 안고 나왔다. 갓난애는 그제서야 까르르 하고 웃기 시작했다.살펴보니 계집애였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기가 왜 물에 빠졌는지 모를 일이나 온갖 짐승들이 애를 보호하려고 한 걸 보면 분명히 하늘이 내놓은 귀한 인물일 것이다. 일단 데리고 있으면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길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자신의 베적삼을 벗어서 갓난애를 싸고 품에 안았다. 그리고 우선 피할 곳을 생각했다. 그는 포성(褒城) 땅으로 향해 갔다.
주유왕과 미녀 포사
주선왕 다음에 주유왕(周幽王)이 뒤를 이었다. 주유왕은 천성이 난폭할 뿐더러 예의를 몰랐다. 그래서 어머니 강후(姜后)는 어질기로 소문난 신백(申伯)의 딸을 왕비로 삼고 그 사이에 난 아들 의구(宜臼)를 태자로 세운 후, 왕비의 아비 신백에게 후(侯)를 봉했다. 이는 장차 왕의 무절제에 대비하고 후사를 염려한 대책이었다. 주유왕은 왕 위에 오른 후 처음에는 별탈없이 지냈다. 그런데 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때부터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복(喪服)을 입고도 술과 고기를 삼가하지 않았고, 추호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포성 땅 포향(褒珦)이 이런 주유왕의 어질지 못한 행동을 간했다. 그러자 주유왕은 화를 내며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래서 포향은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 포향의 아들 홍덕은 아비를 구하고자 비단 3백 필을 주고 한 미녀를 사서 주유왕에게 바쳤다. 이 미녀의 이름이 포사(褒似)였다. 주선왕 때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을 팔러 북문에 나타났다가 아내를 잃고 도망쳤던 시골 사내가 십여 년 전 강물에서 건졌던 그 계집아이가 바로 이 미녀였다. 주유왕은 홍덕이 데려온 여자를 보자 매우 흡족하여 이렇게 분부했다.
"포향을 출옥시키고, 지난날 벼슬을 내려 줘라."
그날 밤 주유왕은 포사를 잠자리에 데리고 들었다. 그 후로 주유왕은 앉으면 무릎 위에 포사를 올려놓고 일어서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실 때면 잔 하나로 마시고 식사 때엔 같은 그릇으로 먹었다. 그야말로 포사의 치마폭에 빠지고 만 것이다.
3. 포사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다
비단 찢는 소리
포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 만했다. 주유왕이 이렇게 빠져든 것은 호색한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주유왕은 십여 일씩 아침 조례에도 나가지 않고 포사 곁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포사는 웃음이 없는 여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이제까지 웃어 본 적이 없었다.주유왕은 어느 틈엔가 포사의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언연일소(焉然一笑)
'이 여자가 웃으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던 중에 그녀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백복(伯服)이다. 주유왕은 태자 의구를 폐(廢)하고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순전히 포사를 즐겁게 해주고자 함이었다. '자기 아들을 세우면 좋아서라도 혹시 한 번쯤 방긋하고 웃어 줄는지도 모른다.' 포사는 웃지 않았다. 아니 자기 아들이 태자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러자 주유왕은 아예 신후(申后)마저 폐하고 포사를 왕후(王后)로 세웠다. '이번에는 혹시.......' 주유왕은 포사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그녀는 웃지 않았다. 왕은 악공들을 불러 재주껏 흥을 북돋아 보도록 했다. 모두들 흥겨워하건만 포사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마침내 하도 답답해서 왕이 물었다.
"도대체 그대는 무슨 소리를 좋아하는고?"
"첩은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지난날 손으로 비단을 찢었을 때 그 찌익 하는 소리가 꽤 상쾌하게 들렸습니다. 그 외엔......."
이 말을 들은 주유왕은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이후 주나라 궁중에서는 매일같이 비단을 백 필씩 쌓아놓고 왕후(王后)인 포사 앞에서 찢는 일이 벌어졌다.그러나 포사는 웃지 않았다. 사실 포사는 비단 찢는 소리를 정말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싫지 않은 정도였다.
실수로 오른 봉화
주유왕은 매우 답답했다. 그래서 기분 전환도 할 겸 여산(驪山)으로 행차를 했다. 여산 아래에는 별궁(別宮)이 있었다. 그 별궁에서 잔치를 크게 벌였다. 대소 신하들은 물론이고 궁지기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먹고 마시며 질탕하게 놀았다. 그날 여산에 세워진 봉화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원래 봉화대는 서쪽 오랑캐(西戎)가 번창할 때 그들이 왕성(王城)으로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산 아래 20여 개 소에 장작을 쌓아놓고 대비하는 것이었다. 만일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면 봉화를 올려 인근의 제후들에게 구원을 청하고 호경(鎬京)에는 변고를 알리는 긴급 신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잔치에서 술취한 병사들이 실수하여 불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봉화가 오르자, 불빛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그 불은 1백 리 밖에서도 환히 볼 수 있었다. 모두들 호경(鎬京)에 큰 변이 생긴 줄로만 알았다. 제후들은 제각기 병사를 거느리고 달려왔다. 사면 팔방에서 구원군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오랑캐는 커녕 그저 누각 위에서는 질탕한 음악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누군가 훈련을 하다 실수라도 했는가?'
제후들은 맥이 빠졌고, 병사들은 투구를 벗어 땅바닥에 던지며 분개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예 지쳐 쓰러졌다. 별궁 누각에서 잔치를 벌이던 주유왕과 포사가 난간에 기대어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랑캐의 침입은 없었소. 더 수고할 필요가 없으니 돌아들 가시오."
근방 제후들은 왕의 전령을 듣자 모두들 맥없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그 때였다. 포사가 부지중에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주유왕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웃는 포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주유왕의 혼백을 쏙 빼놓았다.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주유왕은 자신의 넓적다리를 꼬집어 보았다. 현실이었다. 분명히 생시의 일이었다. 그날, 봉화대에서 실수한 병사가 왕에게 불려갔다. 병사는 죄를 지었으니 목숨을 잃지나 않을까 겁을 냈다. 그런데 병사는 오히려 큰 상을 받았다. 병사는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봉화대에 실수로 불을 질러 큰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부터 주유왕은 심심하면 봉화를 올리게 했다. 몇 번은 제후들이 달려 왔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아무리 왕비를 위해서라지만 이제 그만 자제해야 되지 않는가.' 밤낮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차를 몰고 달려오는데, 이것이 한 여자를 웃기기 위함이라니....... 마침내 봉화가 올라도 제후들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헛고생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신국(申國)에서는 주유왕에 대한 원한이 깊어졌다. 신후(申侯)의 딸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고, 외손자는 태자에서 밀려났으니 원한이 생길 만했다.
욕정(慾情)으로 지는 별
신후는 서쪽 오랑캐 군사를 움직여 호경을 치기로 했다. 사자가 신후의 서찰을 가지고, 금과 비단을 실은 수레를 거느리고서 견융에게 군사를 청하러 떠났다.
"호경만 함몰하면 부고(府庫)에 있는 금과 비단을 맘대로 가져가도 좋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융주(戎主)는 쾌히 승낙했다. "중국의 천자가 정사를 잘못하기 때문에 국구(國舅)인 신후께서 나를 불러 무도한 주유왕을 없애고 동궁을 위(位)에 세우려 하시니 이는 평소 고대하던 바로소이다."
융주는 즉시 병차 1만5천을 3대로 나누었다. 신후도 병사를 일으켜 호호 탕탕 호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마침내 오랑캐와 신군(申軍)은 연합하여 주유왕이 있는 왕성을 치게 되었다. 신후와 융주가 이끄는 연합군은 왕성을 세 겹으로 에워쌌다. 주유왕은 이 소식을 듣고 대경 실색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느냐?"
신하들이 아뢰었다.
"여산의 봉화를 올려 구원군을 청하시옵소서. 각국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오면 그 때 안팎으로 협공하여 오랑캐와 신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왕은 곧 여산으로 사람을 보내 봉화를 올리게 했다. 이윽고 푸른 하늘 저편에서 불길과 연기가 끊임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제후는 커녕 병차 한 대도 달려오지 않았다. 제후들은 지난 날에 봉화로 몇 차례나 희롱당했기 때문에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또 그 여자를 웃기고 싶어진 모양이군.'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강성한 오랑캐 병사들의 날카로운 공격은 밤낮없이 진동했다. 드디어 성문이 부서지고 오랑캐 병사들이 성 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그리고 만나는 여자마다 능욕했다. 성 안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주유왕은 다급했다. 급급히 조그만 수레에다 포사와 백복을 태우고 비밀문을 열고 달아났다. 마침 사도(司徒)인 정백우(鄭伯友)가 궁성 안으로 들어 오다가 이를 보고 달아나는 왕의 뒤를 쫓아가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왕은 놀라지 마소서. 신이 어가를 보호하리다."
그들은 함께 여산을 바라보고 도망쳤다. 그들은 도중에 쉬다가 역시 늦게야 도망쳐 오는 윤구(尹球)와 만났다. 윤구가 아뢰었다.
"융병들은 이미 궁궐을 모두 노략질했습니다. 쓸 만한 물건을 끌어내 자기들 수레에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을 질렀습니다. 모든 궁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주유왕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주유왕이 여산에 이르자, 정백은 다시 봉화를 올렸다. 불덩어리와 연기가 구천(九天)에 솟아올랐다. 그러나 구원병은 결국 오지 않았다. 오히려 여산까지 추격해온 병사들이 여산의 별궁을 에워싸고 악머구리들처럼 소리쳤다.
"음탕 무도한 임금은 도망칠 생각을 말라. 하늘의 뜻을 알고 목을 바치거라!" 기진 맥진한 주유왕은 포사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흐느꼈다. 그 때 정백이 들어와 아뢰었다.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가를 보호하겠습니다. 우선 오랑캐의 예봉을 피하시어 이 곳을 빠져나가 신의 나라로 가시옵소서. 그 곳에서 제후들을 모아 왕성을 회복하시는 게 상책입니다."
주유왕이 목멘 소리로 부탁했다.
"이는 모두 짐의 잘못이오. 그대 뜻을 따르겠소."
정백은 즉시 여산의 별궁 앞에다 불을 질렀다. 별궁 앞에서 불길이 솟자, 융병들은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정백은 주유왕을 이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장모(長矛)를 휘두르며 앞길을 열고, 윤구는 포사와 백복을 보호하 며 주유왕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그들이 얼마 가지 못했을 때였다. 융병들은 주유왕 일행이 도망친 걸 알고 즉시 풍우처럼 달려와 앞길을 가로막았다. 융병을 거느린 자는 소장(小將) 고리적(古里赤)이었다. 정백은 크게 소리치며 직접 고리적에게로 달려들었다. 서로 어우러져 교전한 지 불과 수 합만에 정백은 날카로운 창에 찔려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정백이 죽자 고리적은 즉시 주유왕이 탄 수레를 사로잡아 융주에게로 끌고 갔다. 융주는 수레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곤포를 입고 옥대를 두른 것으로 보아 주유왕이란 걸 알았다. 그러자 융주는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훌쩍 수레에 뛰어오르더니 단칼로 주유왕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어린 백복을 찔러 죽였다. 다만 포사는 죽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융주는 포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였다. 수레의 통 속에 숨었던 윤구도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다. 융주가 포사를 자기 수레에 싣고 돌아가 비단 방장 안에서 재미를 본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융주는 매우 흡족했다. 융주는 포사를 자신의 애첩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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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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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피터르 브뤼헐이 오크 판위에 그린 유화, 네덜란드 속담] 위키백과 2011. 9. 그림을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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