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 최명희
13. 어둠의 사슬(2/4)
부부의 금슬인즉 어찌 아니 좋으리오. 끝으로, 수성의 여인도 대길하다. 남수여수는 병마봉침. 병든 말이 침을 만난 격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이제는 완치 쾌차하게 되리라. 물과 물이 모이면 여울이 냇물 되고, 냇물이 강물 되며, 강물은 바다를 이루듯이 기쁜 일이 날로 쌓이어, 지위는 더욱 높아지고 덕망은 점점 깊어져 만인의 존경르 받을 뿐만 아니라, 세사의 재물이 모두 이 골로 모여 끝이 없도다. 부부 서로 자나깨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 처음의 만남과 같느니, 효성이 지극한 자손이 집안에 만당하고 생기 가득한 일생은 안락을 다 할리라. 너희 아버님은 마흔여덟, 을미생이라. 사중금이시고, 나는 마흔셋, 경자생으로 벽상토여서, 금생토, 토생금, 서로 상생이란다. 남금여토로 만나면 산득토목, 산이 흙과 나무를 만난격이니 얼마나 부요하냐. 평생토록 좋은 집에서 부부가 해로 화락하고 자손이 번성한다 했다. 비단옷에 옥식이 가득하매 부러울 것이 없느니. 명예가 사해에 진동함을 만인이 칭송하리란다. 또 할머님은 올해 일흔둘, 경오생이시니 노방토로서, 비록 궁합을 맞추는 것은 아니나, 모자지간에도 토생금, 금생토, 앞서 말한대로 상생하여 좋으신가 싶더라. 양모 양자 사이가 저리 지극하기는 어려우니라. 자애와 효심이 고금에 없는 정경을 보자면, 과연 두 분이 합이 들기는 단단히 드신 모양 분명하다. 모자지간만 그러한 것 아니라 나하고 고부간에도 좋으시다. 만일 이괘로 남녀가 만난다면 남토여토 아니냐? 이는 개화만지라. 가지마다 꽃이 핀 격인즉 양토가 상합하니, 자손이 창성하고 효도를 잘하면 무병장수할 것이란다. 부귀한 풍류객이 되어 고루거각에 앉아 영화를 누리는데, 해마다 경사롭고 일마다 이로우니, 녹봉이 갈수록 두터워지리라... 듣는 귀도 오죽이나 보드라우냐. 이렇게 좋은 인연도 없는 것이 아니건만, 너희는 어쩌다 그렇게 만났을꼬. 그런 것 다 쓸데 없다고, 선비의 집안에 인륜지대사를 잡술에 의존할 것이냐고, 아버님 엄중히 꾸중하시고, 문벌 보아 성씨 보아 정하니 이렇지. 내 너희 내외의 정경이 하도 보기에 딱해서, 지난번에 사주 잘 보는 조생원이 사랑에 아버님 뵈오러 왔길래, 남모르게 부탁해서 적어 놓은 괘가 여기 이렇구나. 아무 말도 안하고 내 혼자 속으로만 알고 있으려다가, 기왕에 이러한 운수라면, 이제부터라도 명심 각골해서 어쩌든지 무사히 극복하는 쪽이 더 낫겠다 싶어 너한테 하는 말이다. 하기는, 사주 속같이 기묘한 것이 없어서, 궁합에는, 상극 중에 오히려 상생하는 명이 있나니. 사증금같이 모래 속에 묻힌 쇠나 차천금같이 비녀와 팔찌를 만드는 쇠는 너무나 강한 금이어서 불은 만나야 성취할 수 있듯이. 벽력화.천상화는 물을 만나야 복록과 영화가 성취할 수 있다더라. 이 둘 다 번갯불이니, 물 먹은 구름이 모여야 번개를 치고, 번개 쳐야 큰 비가 오는 이치를 보면 속뜻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렇게만 본다면 너희 둘, 괜찮은 것 같지만, 천하수와 대해수는 불보다 흙을 만나야 더 좋다는구나. 망망대해 외로운데 흙이라면 섬이나 육지를 말하지 않으랴, 반가운 맘 그지없고 음양이 상합하련만. 네 안은 너 만나서 큰 덕을 보겠으나, 너는 네 안 만나 어찌 풀어 나갈는지. 아깝고, 애돌와라.
아들아, 내 아들아, 금쪽같은 내 새끼야. 너는 임술생 개띠라, 생년에 천예가 들었단다. 참 이상도 하지. 네가 난데없이 악기를 들고 와 동경으로 음악공부를 하러 가련다 했을 때, 온집안이 발칵 뒤집여 소동이 나고, 이 어미도 무한히 놀랐다마는, 너한테 '연천예'가 들어 그러했던가. 속말로 팔짜 도망은 못한 더다니, 맞는 말인가. 아나, 한번 읽어 보렴. (연입천예: 연에 천예서이 드니) (지모과인: 지혜와 꾀가 뛰어나도다) (목교수기: 눈이 정교하고 손재주가 있으니) (일일홍재: 날로 재물이 늘어가리라) (의식유족: 옷과 밥이 풍족하니) (안과세월: 편안히 세월을 보내리라) (백년금궁: 백년의 금술궁이) (부조지탄: 고르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약불연야: 그렇지 아니하면) (조자난양: 일찍 둔 아들을 기르기 어려우리라) (순유춘풍: 순하면 춘풍이요) (역리추상: 거스르면 가을의 서리로다) 내가 너희 이씨 문중에 시집와서 이날까지, 너의 누이 손위로 둘 있는 것, 하나는 상하고 하나는 잃었다만, 금지옥엽 너를 얻고 모든 시름 다 풀리어, 저 앞엣말 하나도 과한 데 없이 살아왔단다. 헌데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네가 혼인하고 취처하여 새사람 들어오고는 자고 새면 근심이 석 삼이니. 집안이 화락하지 못하면 자연히 몸과 마음은 건공중에 정처없이, 바깥으로만 나돌게 되는 것을 어미가 왜 모르겠느냐.
바깥이란 으레히 바람이 많으 법. 그 바람은 여자로 해서 일으키는 경우가 태반 아니냐. 음풍에 한 번 휘말리면 망신하기는 잠깐이라. 강모야, 내 아들아. 부디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조심하거라. 아무리 조신한 여염의 아낙일지라도 그 운수에 망신살이 뻗치면 도리 없나니, 바람에 옷자락만 펄럭여도 샛서방을 보았다고 소문이 나는 법이란다. 아가, 너의 올 신수가 사나워 그 몹쓸 망신살이 들었느리라. 조생원이 적어 준 것이다. 펴 보아라. (망신입명: 망신살이 명에 들어오니) (색정신지: 남녀간의 정욕을 삼가라) (관재구설: 관가의 재앙과 구설이) (간간유지: 간간이 있을 것이로다) (수다노력:비록 노력은 많아도) (불신불성: 힘을 못 펴고 이루지 못한다) (장생동대: 만일 장생을 한 가지로 띠었으면) (귀인지격:귀인의 격이로다)
어머니, 어머님. 그만하십시오. 이미 그 모든 경계의 말씀이 부질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몸은 흙덩어리에 불과한데, 굽이치는 운수는 급류의 물살입니다. 흙이 어찌 물을 이기겠습니까? 이미 저의 허리를 깍아 먹고 있는 것을, 이제 한순간이면 중허리가 무너지며 내 몸뚱이느 내려앉고 말 것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시고... 이미 일은 일어날 대로 일어나 버리고 말았는데 ... 어머니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고...그다지도 구구한 여러 말씀으로 다짐을 하고 또 하시오니, 꼭두각시처럼 처량하십니다. 어머니.
수명을 타고났으면 귀인의 격이라 한다지만, 오래 살면 무엇 하며, 설혹 귀인이라 한들 또 무엇 하리. 구구 절절이 자신의 모습과 짓거리를 있는 대로, 마치 명경으로 들여다본 듯이 적어 내놓은 조생원의 달필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그렇다면 강모가 오유끼를 만난 것은 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네는, 아무리 흉액일지라도 피할 도리가 없었던 운명의 가로막대였는지도 또한 모를 일이었다. 머리부터 길목을 가로막고 기다리던 그네는, 고사정의 요리집 '모찌즈끼'에서 손님으로 온 그를 천연스럽게 맞이하였을 터이니, 율촌댁이 강모를 앉혀 놓고 골백번씩 다짐한 말들도 한갓 부질없는 바람 소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남의 사주를 손바다처럼 들여다보는 조생원의 경계도 쓸모 없는 휴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만 셈이었다.
그날은, 강모가 근무하고 있는 부청 학교과에서 결산회식을 가진 날이었다. 강모는 고보를 졸업하고느 바로 부청에 취직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숙부 기표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기표는 자신의 아들 강태도 전주 부청에 심어 놓았으며, 바로 뒤이어 강모 또한 과는 다르지만 같은 청사에서 일하게 서두렀다. 그때 연일 연야 계속된 정리 작업으로 지쳐 있던 직원들은, 결산이 끝난 날인 만큼 처음부터 들떠서 야단스럽게 모찌즈끼의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앉자마자
"여자."
라고 소리쳤다. 오래 기다릴 것이 없이 이윽고 술상이 들어오고, 화려하게 머리를 빗은 여자 몇 사람이 따라 들어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였다. 모쯔즈끼는 이급 요리점으로, 뚱뚱하고 작달막한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는 집이었다 .그곳은 유다르게 술맛이 좋다거나, 요리 솜씨가 뛰어난 집은 아니었지만, 모찌즈끼의 여자만큼은 소문이 난 터였다. "모쯔즈끼로 가자." 하고 말할 때는 "새 여자가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공공연한 속뜻이 숨겨져 있을 정도였다. 그곳의 주인은 검붉은 일본 남자였다. 도무지 일본에서 무엇을 하다가 조선까지 건너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걸식을 하던 부랑배 아니면 사람 장사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놈 눈구녁을 좀 보아. 실배암같이 간교하단 말씀이야."
"듣고 보니 그렇구만. 그 누루꾸룸안 희자위에서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걸 나두 봤지."
"아무러면 어떤가. 우리한테야 나쁠 게 없잖어? 한 바퀴 그놈이 조선 팔도를 휘이 돌고 오면, 방방 곡곡에 파묻혀 있던 이쁜 일색들만 걷어오지 않던가배?"
"허기는 .굴비 두름이 따로 없더라."
언젠가 그는, 보리쌀 한 말에 젊은 처녀를 사 가지고 온 일도 있다고 했다. 길고 긴 봄날의 햇볕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베어 먹어야 할 만큼 허기진 보릿고개 때의 일이었다. 그는 해마다 봄철이 되면, 마치 사냥의 때를 기다리던 포수처럼, 허리에 전대를 띄고 며칠씩 길을 떠났다. 그가 도는 곳은 일정하지 않았다. 서해안과 남해안, 그리고 가원도의 산골짜기, 지리산 기슭이며, 전마선을 타고 가는 손바닥만한 섬조각에도 그는 갔다. 그러나, 그가 특히 좋아하는 곳은 남도 일대였다. 삼남에 연이은 흉년과 기근이란 무슨 숙명이나 업보와도 같이 끈질겼다. 나찰이 그보다 더 악착 같을 것인가. 몸이 검고 눈이 푸르고 머리털이 붉을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그 악한 귀신도 일찍이 본 바 없으니 굶주림보다는 덜 무서웠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부황난 사람이 죽어갔고, 살가죽이 누렇게 붓고 들뜬 한 무더기 가솔이, 바가지를 옆구리에 하나씩 차고 다리를 절룩이며 어디론가 동냥을 떠나갔다. 발을 둘둘 감은 다 떨어진 헝겊 쪼가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런 황토 먼지를 풀석거리게 하였다.
"가만 둬도 죽든지 거러지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납지요. 기왕에 그리될 바에야 저를 따라오는 것이 백번 낫습지요."
모찌즈끼의 주인은 두툼한 붉은 입술을 번들거리며 웃었다.
"굴뚝의 연기 냄새만 맡아도 저는 그 속에 앉아 있는 사람 냄새를 분별할 수 있습지요. 틀려 번 일이 없어요."
"바람만 스쳐 가도 사람 냄새가 나고말고요."
"덜 익은 처녀의 풋비린내는 말씀입지요, 봉창을 철벽같이 해 놔도 그게 묘한 거예요. 저절로 공중에 퍼지는 걸입쇼."
모찌즈끼의 주인은 야마시다 주임이 내미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으며 그런 말을 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강모의 눈에는, 걸붉은 그 남자의 열 손가락이 낙지발처럼 보였다. 지어 부칠 땅도 없거니와, 땅이 있다 해도 공출로 보리쌀 한 톨 남겨 놓을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대로 죽어가거나 동냥아치가 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유녀로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쪽이 더 낫기는 나은 것일까.
"오늘은 누구냐? 얼굴 좀 보자."
야마시따는 호기롭게 소리치며 좌중의 젊은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오유끼는 야마시따와 강모의 사이에 앉았다. 그네는 얼굴을 공손하게 숙이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절을 했다. 수그린 고개의 뒷목이 깊이 파아고, 앞쪽의 깃은 가슴의 흰 살이 거의 드러나보일 만큼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오유끼는 황금빛 공단 바탕에,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보라색 오비를 매었다. 그 오비의 ㅂ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연지의 탓이었는지, 그녀의 입술에도 보랏빛이 돌았다. 그래서 추워 보이기도 했다. 얼굴로 보아서는 아직 어린 여자가 분명한데, 표정은 측은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강모가 오유끼의 모습을 일별하며 미처 시선을 거두지 않은 그 순간에, 투박한 손 하나가 불쑥 침벌하듯 시야로 튀어 들어왔다. 야마시다의 손이었다. 손은 오유끼의 기모노 앞에서 흡반처럼 붙더니 깃을 헤치며 안쪽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강보는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못 볼 것을 보았다든가 하기에는 이미 농탕해져 버린 자리였다. 다만 그가 상기된 것은, 방해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야마시따는 아예 오유끼를 감싸 안더니 흰 목에 붉은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오유끼는 야마시따보다는 더 어른인 양 그가 하는 짓을 내버려 둔다. 별반 거역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지도 않은 몸짓으로 조그맣게 앉아 있는 그녀에게 강모가 이름을 묻는다.
"오유끼입니다."
야마시따에게 잡힌 몸을 풀며 그네가 대답한다. 힐끗 강모를 돌아본 야마시따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무어라고 큰 소리로 농을 지껄이며 오유끼를 강모 쪽으로 떠밀어 넘겼다. 강모는 엉겁결에 그네를 받아 안았다. 그네는 따뜻하게 감겨 왔다. 그네에게서는 복숭아 냄새가 났다. 후끈 더운 기운이 끼치면서 입술에 까스라기가 일어난다. 혀끝이 안으로 말려들어 말이 목젖 너머로 넘어가 버린다. 강모는 당황하여 오유끼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도 오유끼는 반대였다. 오히려 팔을 감아 강모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네의 살이 닿는 곳이 뼛속까지 저르르 우리면서 녹아내리는 듯한 노곤함에 어지러웠다. 오유끼는 한 마리의 계집이었다. 강실이나 효원이 같은, 막막하고 사무치는 존재가 아니라, 뭉클 손 안에 잡히는 실물인 것이다. 조금 전에 야마시따가 마음대로 만지며 노닥거렸으나,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은 오유끼, 바로 그 전에는 또 누군가가, 또 이 다음에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이 어루만지고 희롱하고 떠나간다. 아무나찾아올 수 있고, 아무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 여자, 희롱이 죄를 묻지 않는 오유끼. 짓밟은 값을 돈으로 치를 수 있는 계집. 밟히려고 작정하고 이렇게 나와 앉은 사람. 서러운가, 오유끼.
"오유끼...좋은 이름인데...? 나가이 가후의 여인이로구나."
강모는 나지막이 숨소리로 말했다. 오유끼는 강모의 턱 밑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소를 지었다. 말의 뜻을 알 수는 없었으나 손님이 하는 말에 대한 인사이며 교태였다. 그네의 눈빛은 신열이 돌아 붉게 물든다.
"너, 그 여자를 아느냐?"
알 리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물어 본다. '오유끼'는 그 허무한 냉소주의자 나가이 가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였다. 일찍이 히로쓰 류우로의 문하에 들어가 습작을 한 그는 일본 고래의 춤과 피리, 만담 등을 공부하다가, 1903년에는 미국으로, 또 4년 후에는 불란서로 마음껏 떠돌던 사람. 나가이 가후는 세기말 문예에 도취되어 그 아름다움을 글로 썼다. 그는 에도 예술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향락 퇴폐를 문단에 불러일으킨 사람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의 향락기주의는 인생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무너지게 하고 스러지게 하는 것들에 대한 무력한 증오가, 차라리 그를 냉소적인 시인으로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퇴폐와 윤락의 밑바닥에, 닿으면 나가이 가후는 느끼었다. 그래서 에도 문화를 찬미하고, 그 자신의 나날을 향락에 내던지며, 화류계에서 소재를 취하여 시문을 썼던 것이다 .강모는 그를 좋아하며 즐겨 읽었다. 그 중에서도 묵동기담.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리라. 오유끼는 그 소설 속의 여자이다. 사창, 거리의 여인. 그러나 순진하고도 열정적인 오유끼. 동경 뒷거리의 인정과 풍속이 서글프게 물들어 있는 배경에 나타난 한 문사는, 허무의 세계에서 그림자처럼 배회한다. 그는 보잘것 없는 창부 오유끼에게 끌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차츰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그녀와 끝내 동화되지를 못한다. 진창에 날리는 흰 눈은, 꽃잎처럼 내려앉아 짓밟히며 진창이 되고 만다. 질척거린다.
"결국 인생에는 달콤한 조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생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한낱 꿈에 불과할 뿐."
이라고 쓸쓸히 체념하고 마는 주인공.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오유끼'는 바로 너이냐? 너는 책 속에서 걸어 나왔느냐? 강모는 실소한다. 그리고 안겨 있는 오유끼의 흰 손목을 잡는다. (손목을 잡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사람이 있다. 바라보아도 안되는 사람이었지. 그래서였던가.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바로 본 일이 없고, 그 사람도 나를 바로 본 일 없었다. 언제나 돌아설 듯 빗기어 그 자취마저도 아련했던 사람. 그런데 나는, 손목보다 더한 것을 부러뜨리고 말았었다. 그러고도 그 사람을 버리고... 짓밟은 그 자리에 말 한 마디 남겨 놓지 않은 재 도망치고 말았느니. 그다지도 애절하던 이름이 이제는 이대도록 두로워 꿈길에서조차 들릴까 무섭기만 하다. 그뿐이냐. 알 수 없는 손아귀에 덜미를 잡힐까 봐 허둥지둥 기껏 숨어든 곳은 또 어디였던가. 허울은 아내였으되 마음은 가지 않던 여인에게 내 허망함을 부려 버리려 했었다. 나는 비겁한 사람. 허깨비. 어느 것 한 가지도 떳떳하게 행하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한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누군가는 한 사람이 능히 열 가지 일을 하건만, 나는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나에게 바라는 바는, 백 가지 천 가지가 넘는다.이 무슨 고달픈 운명인가. 그저 나 하나 소리 없이, 내생긴 대로, 막힌 데 없이, 걸린 데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오유끼. 너의 이름이 오유끼라고 했느냐? 내가 네 손목을 잡는 것쯤이야 죄 될 리도 없으려니와, 너 역시 내 모가지를 조이지는 않을테지? 너는 계산하면 그만이니까.) 자욱한 안개는 숨겨진 넋을 짓누르고, 우뚝한 태산은 사람의 숨통을 짓누른다. 오로지 누르고, 누르고,누르는 것들. 강용한 자들의 악력은 질긴 나무의 뿌리처럼 억세다. 모가지를 틀어쥐고 놓아 주지 않는다. 그럴 뿐만 아니라 덜미를 잡힌 재 버둥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덤벼들면 덤벼드는 꼴을, 주저앉으면 또 그 주저앉는 형상을 낱낱이 들키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내가 나도 싫다. 진저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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