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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85호
2020.5.30. (음 4.8 - 윤)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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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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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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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결함이 남들한테 나타나면 견딜 수 없이 짜증스러운 법. ― 네덜란드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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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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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답’을 알고 나면 허무해지는 게 있다. ‘철조망 통과 요령’이다. 군대에서는 ‘(철조망) 위로, 밑으로, 절단, 폭파, 우회’ 이렇게 다섯 가지 방법을 적시한다. 철조망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 뻔한 방법을 숙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전투나 이에 준하는 위급상황에서는 우왕좌왕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필드 매뉴얼(Field Manual), 흔히 ‘에프엠’이라 부르는 야전교범이 필요한 이유다. 기사 제목 “안이한 현장대처·지위체계 혼선…‘어이없는 정부’”에서 보듯 매체들은 ‘매뉴얼’이 없거나, 이를 지키지 않은 현실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매뉴얼’의 뜻을 ‘설명서’로 밝히면서, “‘설명서’, ‘안내서’, ‘지침’으로 순화”하라고 풀이한다. ‘응급상황 매뉴얼’, ‘현장학습 안전대책 매뉴얼’, ‘승객대피 매뉴얼’처럼 ‘서해 여객선 침몰 사고’에 즈음해 쏟아지는 ‘매뉴얼’은 곧 ‘지침(서)’인 것이다.
여객선이 침몰한 지난 수요일, 일터로 출근하니 책상 위에 ‘재난방송 내규’가 놓여 있었다. 두툼한 분량의 내규 가운데 ‘현장취재·방송 요령’에는 ‘(피해자들의) 심리적 안정 유도, 프라이버시 보호’ 지침도 들어 있다. ‘뉴스특보’ 진행자의 말에는 배려가 담겨야 한다. 갓 구조된 고등학생과 인터뷰하면서 대뜸 “당시 상황이?” “친구들은 어딨나?”고 묻는 것은 잔인하게 들린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특봅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재난상황 설명자에게) 어서 오십시오’ 따위의 상투적인 인사말은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때가 있다. 피해자 상황과 시청자 마음을 배려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17일 “일부 기자들의 섣부르고 경솔한 행동이 희생자 가족과 국민 여러분에게 상처를 줬다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통렬히 반성하고 있다”며 “재난보도준칙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2003년 ‘대구지하철 사고’ 직후 ‘재난보도준칙(안)’을 만들었지만 여태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 동통
‘냉온욕’이 편하지 않다. 서해 여객선 사고 이후의 일이다. 시원함이 아닌 냉탕의 싸늘함이 마음을 휘감는 느낌…. 배 안에 차올랐을 차가운 바닷물이 떠올라 소름이 돋기 때문이다. 피할 길 없는 ‘뉴스 특보’를 접하며 안타까움에 탄식하고, 관련 기사를 읽을라치면 가슴 먹먹해지는 탓에 숨 고르는 일이 많아졌다. ‘여객선 참사’로 일상의 변화를 겪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직업병’이 도진 것도 ‘일상의 변화’ 가운데 하나다. 뉴스 화법의 적절성 여부를 더 따지게 되었고, 곳곳에 널려 있는 ‘안내문’, ‘주의사항’ 따위의 문안을 더욱 꼼꼼히 톺아보게 된 것이다. 적절한 경고문과 주의·안내문은 안전사고를 막을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옷 입은 채 다림질하지 마시오’, ‘사다리로 사용하지 마시오’(시디 보관 케이스), ‘사람을 넣지 마시오’(세탁기), ‘아이를 앉힌 채 접지 마시오’(유모차) 따위는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안내문이다. ‘악덕소송’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폄하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이런 시시콜콜한 안내가 사고 방지에 도움 된다면 흰 눈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가슴 써늘하게 하는 냉탕을 빠져나와 열기 그득한 사우나탕에 들어서니 ‘주의사항’이 붙어 있다. 무심히 흘렸던 안내문 내용이 새삼 흐리터분하게 다가왔다. 의사 몇에게 적절한 내용인지 물어보았다. ‘순환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사람은 안 하는 게 좋다는 뜻’이라며 ‘(주의사항은) 더 구체적인 게 좋다’고 답한다. ‘발에 동통을 느꼈을 때(열기욕 중단)’의 뜻은 바로 새겨지지 않았다. ‘동통’을 찾아보니 ‘안구(瞳) 통증’, ‘움직일(動) 때 아픈 것’이라는 제멋대로의 풀이가 떠돈다. 아플 동(疼), 아플 통(痛)이 어우러진 동통의 뜻은 ‘몸이 쑤시고 아픔’(표준국어대사전)이다. ‘주의사항’은 알기 쉬운 표현이어야 한다. ‘발이 쑤시고 아플 때’ ‘발에 통증이 있을 때’로 하면 될 일이다. 동통’은 ‘페인’(pain, 통증)의 번역으로 구식 표현이다. 신경과 의사의 말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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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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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서른이 되면 - 나희덕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려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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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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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4/4)
잔치를 치르고 나면 쓸쓸한 법이다. 그러나 3.1운동은 잔치는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에서 유행하는 부흥회 같은 감정의 잔치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부흥회 뒤는 쓸쓸한 법이지만 3.1운동 뒤는 결코 쓸쓸하지 않았다. 흥분이 지나간 뒤도 민중은 낙망하지 않았다. 그 증거를 우리는 촌 신문 김선달에서 본다. 3.1운동은 겉으론 실패라면 실패다. 만세를 부르면 독립은 세계에서 ‘거저 주는’줄 알았더니 그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의미에서 실패다. 그러나 실패인 줄을 차차 알면서도 민중은 결코 풀이 죽지 않았다.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을 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을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 부터였다. 운동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운동의 뜻은 민중이 하나로서의 의식을 가진 데 있다. 씨알의 싹이 튼 것이다. 싹이 텄기 때문에 첫번째 열이 지나갔어도 낙심을 아니한 것이다. 낙심 아니한 증거는, 만세 이후 일어나서 한동안 밀물처럼 성행하던 강연회, 교육열이 그것이다. 그것은 자라는 현상이다.
본래 한일합병이 생긴 이후의 나라 모양은 마치 옛 글귀와 같았다.
저만큼 깊은 물 다 쫄려니 고기 서로 먼저 도망하고
뼈다귀 한 조각 내던지니 개 서로서로 다투어라.
뜻 있던 사람은 고기요, 더러운 벼슬아치는 개다. 일이 글러지기 전에 어떻게든지 나라를 붙들어보려고 애쓰던 사람들, 판국이 바뀌니 자연 있을 수 없지. 그러므로 북간도로 서간도로 해삼위로 상해로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내가 어렸을 때는 예배당에서 기도만 하면 언제나 “해외로 나가 있는 이들올 보호해주십사”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 그 해외에 검은 머리로 나갔던 지사들이 흰머리 돼 돌아온 때 서로 물고 뜯고 죽일 줄은 꿈에도 못 생각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내가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소냐.
애끓는 이 노래는 그때 지사들의 심정이었간만 어쩌면 돌아와서 그리 될까? 그 다음에 글자 낱이나 배웠던 사람들은 “이젠 별수없지”하고 알게 되자 싹 돌아붙어 던져주는 죽은 제 동무의 뼈다귀 같은 주사, 순사 자리나마 착실하게 해먹어 보려고 노골적인 제뼈다귀 돌려놓은 개싸움을 하게 됐다. 그 중간에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백성이다. 성명없는 씨알이다. 그들은 못생겼기 때문에 도망도 못했고 해먹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덕택에 이 땅의 주인으로 되어 있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오 불망부쟁하는 것이 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명이 거기 내린다. 내릴 수 밖에 없다. 운동은 민중이 하늘의 소리를 잠깐 들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있는 동안 그만큼 빛이 있었던 것이요, 그 말씀 버리는 날 다시 흐지부지 뒤죽박죽이 됐다. 이조가 우리 5천 년 역사 중에도 가장 더럽고 고스란히 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망한 이유는 민중이 편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중이 분해 일어섰다면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성을 사람으로 알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이 그것을 제 나라로 알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실 바로 말한다면 일본 사람에게 망한 것은 이씨네 정부지 나라가 아니었다. 나라가 망했다면 벌써 그전에 망한 것이요, 그냥 있다면 합병 뒤에도 씨알의 가슴속에는 변함없이 까딱없이 있었다.
3.1운동은 이제 그 잠자던 나라의 소리였다. 어째 그 나라가 깼나? 씨알의 가슴이 열렸기 때문이다. 왜 열렸나?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민중이 제대접을 받아본 것은 이 3.1운동이 처음이다. 말을 바꾸어 하면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때 와서야 처음으로 완전히 민중을 향해 부르짖었단 말이다. 갑신정변, 갑오경장이 다 실패한 것은 민중이 부르짖지 않은 것이 그 원인이다. 힘은 민에 있는데 그 운동을 꾸미던 사람들은 아직 옛날 봉건식의 머리였다. 그러므로 군벌의 쿠데타, 암살 같은 것으로 일을 해보려 했다. 거기가 잘못된 곳이었다. 이제 3.1운동에서는 인텔리층이 민중을 행해 겸손했다. 그러지 않고는 아니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전 민중이 다 일어난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네를 주인으로 부르는데 아니 일어날 리가 없다. 민중은 부르면 듣는 것이다. 정치가 겸손해서 민중에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일은 못한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한 시기를 짓는 사건이다. 그전의 역사는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 이제부터는 씨알의 역사다. 자주하는 민의 역사다. 그전에도 혁명이 있고 반항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계급이 하는 것이었고 군인이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민중이 자각해서 하려는 것이다. 그전에도 민족이 있었고 그 운동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사상적인 운동이다. 민족자결주의라는 주의아래 되는 운동이다. 전에는 쿠데타식의 정변으로 하려 했다. 이것을 민의 평화적인 반항으로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도 아직 날치기식의 폭력주의로 정권을 얻으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민중을 무엇으로 알고 있나? 민중을 대접하지 않는 자는 민중의 적이요, 민중을 적으로 삼는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사고 망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또 창 틈으로 길거리를 내다보며 민중이 호응하나 아니하나 형편을 보아 정치 행동을 하려는, 그렇게 민중을 이용하여 불 속의 밤알은 어리석은 민중더러 주워내라 하고 먹기는 제가 먹으려는 그런 야비하고 간악한 생각을 가지는 정상 때에도 이젠 민중은 속지 않을 것이다.
말 없다고 민중을 업신여기지 말고 민을 주로 모시고 절하고 호소하라. 그러면 대번에 천하를 손바닥 뒤집듯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없는 민중에게 그 명을 내리시는 것이요, 하늘말씀을 받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이다. 3.1운동은 그 좋은 증거다. 그럼 3.1운동은 왜 실패했나? 왜 만세로는 독립이 못됐나? 만세는 민중이 살았노라는 표시뿐이지 아직 완전히 깨어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독립은 실력이지 구호가 아니다. 언제 가서나 참을 해서만 독립은 될 것이다.
순 조선종
3.1운동을 돌이켜 생각할 때에 내가 잊지 못하는 두 인물이 있다. 하나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요, 또 하나는 내 평고 동창이었던 이문욱이다. 남강 선생에 관하여는 자연 말할 것이 있을 것으로 여기서는 그만두고, 이문욱 군에 관하여는 한 마디 아니할 수 없다. 그는 평안북도 박천 영미 태생이었다. 학교에서 3년을 같이 공부하면서도 별로 가깝지는 않았다. 그는 인상이 좋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어째 이따금 가다가 그렇듯 안과 밖이 서로 다르게 하시는지 모른다. 아마도 얼굴 딱지로 사람을 판단치 말라는 경고이실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그 얼굴을 보면 그 성격이나 맘씨가 짐작이 되는데. 그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실례는 그때 우리반에 또 하나 있었다. 김윤욱이란 사람인데 처음부터 알지도 못하면서 달라는 것 없이 미웠다. 나는 그래 그가 보기도 싫었다. 그런데 그 후 알고보니 그렇게 좋은 사람은 없었다. 이 이문욱 군은 미워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품격이 낮은 듯한, 못 생긴, 어득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래 속으로 늘 업신여겼다. 나는 워낙 맘이 약한 사람이니 밖에 내색은 아니했지만 반 중에도 좀 까부는 동무들은 쉬는 시간에만 나오면 그저 그를 놀려주는 것이었다. 별호를 귀신이라 불렀다. 머리는 언제 깎았는지 늘 귀를 푹 덮고 눈초리는 본래 내리 찢어진 데다가 누가 뭐라 해도 눈을 내리깔고 대답도 아니하고 마지못해 반항을 할 때는 또 혀가 좀 굳어서 말도 변변치 못했다. 어느 모로 보나 장가는 이미 간 사람 같은데 두루마기는 늘 때가 재작재가 묻어 있었다. 정말 나 보기에도 귀신 같았다.
만세를 부르는 날도 그가 어쨌는지를 나는 몰랐다. 그러고는 나는 학교에를 다시 가지 않았으므로 그의 일은 알지도 못하고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후 내가 동경을 거쳐 오산 모교에 와 있게 되었을 때 들려오는 말에 영미 부근 어느 동리에서 매우 뜻있게 사립 소학교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 한 번 찾아보려 했으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해 이젠 고인이 된 박승봉 형 댁에를 이따금 가게 되었으므로 그에게 그 얘기를 물었더니 의외로 그가 그 이문욱이라는 것이요, 두분이 서로 대단히 친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만나니 모양은 옛날의 궁상 그대로인데 병으로 퍽 약했었다. 그런데 듣고 놀란 것을 그가 평고에서 둘째번 만세 때에 주동이 되어 잡혀가 오랜 고생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학교는 퇴학맞고 돌아와 영미에서 신문 지국을 하여 일본 세력과 싸워가며 이날까지 왔다는 것이요, 학교도 경영한다는 그를 보고 나는 속으로 옷깃을 바로잡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귀신’이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다. 그 속에 그런 힘이 있었던가. 그를 업신여기던 똘똘하노라던 것들은 금일에 안재재요, 나는 스스로 부끄럽고 차마 말로도 못하는 사과를 하였다. 그 후 그는 몇해를 못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선 별로 알 사람도 없는 청춘을 청춘같이 누리지도 못하고 모르게 났다 모르게 죽는 깊은 산의 풀 모양으로 스러져버린 한 궁한 선비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따로 단단한 까닭이 있다.
그때가 일제시대에 점점 압박이 심해가는 때인데 언젠가 무슨 이야기를 해가다가 그 경영하는 학교의 "금년 졸업생이 몇이요?”하고 물으니 그 대답이 명답이었다. "순 조선종 여섯.” 그러고는 말을 이어 내가 모를까봐 걱정이나 하는 듯이 설명을 붙였다. "그거는 참 다시 더할 수 없이 가난한 것들이지.” 아닌게 아니라 나는 ‘순 조선종’이라 할 때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었다. 그 후 그것은 내 가슴에 칼처럼 박혔다. 하는 사람은 무심코 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 자체가 그러니 모르고 했을 것이다. 참은 모르고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듣는 나는 가슴을 찔렸다.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지 30년이 되는 오늘도 그 말은 내 귀에 있고 뼈에 꽂혔다.
“순 조선종, 다시 더할 수 없이 가난한 것들.”
문욱아! 너는 그 한마디를 남기기 위해 이 거지 같은 역사의 끄트머리에 나왔던가? 그 한 마디를 낳기 위해 너는 귀신이 됐던가? 저 백성을 잡아먹고 살찐 것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파리하다 죽었던가? 저 피를 빨아먹는 귀신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너 자신 귀신 같은 모양을 했었던가? 지금도 나는 눈을 감으면 내 가슴속에 텁수룩한 머리로 귀를 덮고 섰는 한 처참한, 그러면서도 빙그레 웃음을 띠는 한 형상을 본다. 이것의 나의 무엇보다도 좋은 3.1운동 기념상이다. 아, 그것은 이문욱이 아니고 이 겨레의 한 상징이던가?
죽을 때까지
만세가 지나간 후에 일어난 것은 강연회였다. 난물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 시커먼 살진 땅에 무수한 싹이 터 올라오듯 삼천리를 뒤흔드는 격동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차차,
“아니다. 배워야 되겠더라!”
하게 됐다. 그래 일어난 것이 연달아 밀려오는 물결처럼 골짜기를 찾아든 강연반이요, 그 뒤를 이어 일어서는 학원이었다. 그 많은 강연 중에 들은 것이 하나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남아 있는 것이 오직 하나 있다. 그것은 나의 걸음걸이가 변한 것이다. 나는 본래 뜻이 약하여 실행하는 힘이 아주 부족하다. 이날까지 격언, 좌우명 하는 것을 만들거나 써붙이거나 해보지 못했다. 나의 잘못을 알아 결심하고 고쳐본 것도 없다. 누가 묻기를 수양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무 대답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이 걸음걸이 하나만은 내 성격과는 다르게 내가 힘써서 해본 단 하나의 일이다. 본래 활발치 못한 겅격이어서 운동을 못하고 자랐다. 그런데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가지는 못하고 속만이 썩고 있는 즈음에 용암포에 강연회가 있다기에 들으러 나갔다. 연사는 한동안 이름있던 김미리사 여사였는데 무슨 얘길 해가다가 우리나라 사람들 활발한 기상이 없어 못쓰겠다고 하며 아주 통절히 말하여, “우리나라 청년들 걸음걸이가 모두 잠자러 집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했다. 듣고 나니 나보고 한 말 같아서 그것만은 참말 그 이튿날부터 실행하였다. 처음에는 일부러 뜻을 먹고 빨리 걸었는데, 그렇게 몇해를 하고 나니 그때는 하는 줄 모르개 빠른 걸음이 됐다. 이것이 나의 일생에 이루어본 단 하나의 일이다. 지금도 다른 칭친은 듣는 것이 하나 없어도 걸음이 빠르단 말은 듣는다. 젊어서는 길에 나서면 누구에게 떨어지고 싶은 맘 없었던 것이 지금도 내맘은 여전할 것 같건만 아무래도 내 뒤에서 나를 내뽑는 사람이 있을 때면.
“아, 후생이 가외로구나, 언지래자지 불여금호아?”
하고 한탄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남대문, 종로에 나가 보면 답답해 걸어갈 수 없다. 그저 입에서,
“바쁘기는 하다는 백성이 왜 이 꼴이냐?”
하고 욕이 나오다가 만다.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걸이는 놓지 않으련다. 3.1운동이 몰아쳐 내세워준 이 걸음 늦추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뚱뚱해 앉았을는지 모르고 세력있는 자는 자가용 자동차 안에서 바크샤처럼 드러누워 갈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으련다. 장안 길거리를 두리번거려도 내가 주워 가지라고 떨어진 금덩이는 없을테니 나는 가난한 순 조선종 틈에 씨어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걷고 싶다. 영원히 영원히 빠르나 급하지는 않게, 뚜벅뚜벅 걸으나 느리지는 않게, 길이길이 걸었으면!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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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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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中送炭(설중송탄)
雪(눈 설) 中(가운데 중) 送(보낼 송) 炭(숯 탄)
송사(宋史) 태종기(太宗紀)의 이야기. 북송(北宋) 초, 토지 겸병을 둘러싼 귀족들의 분란이 심해짐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도 몹시 궁핍해졌다. 서기 993년, 즉 북송 태종 순화(淳化) 4년 봄, 빈곤을 참지 못한 농민 왕소파(王小波)와 이순(李順)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사천(四川)에서 봉기하였다. 그 해 겨울, 여러 날 동안 눈이 내리고 날씨 또한 매우 추웠다. 태종인 조광의(趙光義)는 왕소파와 이순 등의 농민 봉기에 두려움을 느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 다시 봉기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사람을 시켜 몇몇 어려운 노인들과 가난한 백성들의 집에 돈과 쌀, 땔감을 보냈다(賜孤老貧窮人千錢米炭).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민심을 수습하려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부를 잘하는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이 일을 역사에 기록하게 하였다.
雪中送炭 이란 급히 필요할 때 필요한 도움을 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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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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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형님의 휴가 - 조희완
전방에서 근무하는 형이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일이 임박해서 객지 생활 하는 나에게 들렀다. 휴가 기간 동안 형은 시골집에서 뭘하면서 지냈는지 몸이 많이 야위었다. 집안이 풍족하다면 별다른 생각이 없겠으나 가난하다 보니 괜히 형이 애처롭고 안타깝게 보인다. 이런 게 내 마음을 억누르는 가운데 오랜만에 형과 함께 저녁을 같이 했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호의인지 밥상은 맛있게 요리된 불고기와 갖가지 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데없는 진수성찬이 약간은 의아했으나 늘 고생만 하는 애처롭게 생각되던 형에게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나로서는 형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게 기뻤다. 이튿날 형은 몸 건강히 맡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을 남기고 귀대했다. 그날 저녁, 하숙집 아주머니로부터 어제 저녁 형이 준 돈으로 음식을 차렸고 밀린 하숙비까지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형은 휴가 동안 일이 바쁜 시골에서 억척스럽게 막일을 하여 얼마간의 돈을 장만한 것이었다. 모처럼의 귀중한 휴가를 그렇게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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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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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은 모두 시계를 갖고 있다
잠
휴식기에 들어 잠을 자다가, 잠을 깨어 활동기로 넘어가는 일은 밤과 낮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러분 누구나 잠을 참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잠에 대한 욕구는, 포유동물에 있어서는 가장 근본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본능적인 행동은 뇌의 중심부인 시상하부가 조절하고 있다. 우리 사람을 포함한 포유류는 잠을 자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곤충을 포함한 무척추동물에게 있어서는 운동 기관이 정지하는 상태가 반드시 깊은 잠을 자는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동물의 경우에는 잠을 자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 대사 작용의 강도와 정도를 조사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야생 동물의 잠을 자는 습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다양한 동물이 각기 독특한 자세로 잠을 자는데, 이들은 신경이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잠 자는가 싶다가도 금방 눈을 뜨고 쏜살같이 도망쳐 버린다. 따라서 야생동물이 잠자는 모습은 운이 좋을 때가 아니면 거의 보기 어렵다.
가재나 뱀은 몸을 빳빳하게 세운 기묘한 모습으로 잠을 잔다. 어류는 호수나 강의 밑바닥 쪽에서 잠자는 적이 많다. 조류는 머리를 날개 밑에 파묻고 잠을 자고, 박쥐는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고래나 물개와 비슷하게 생긴 강치, 바다표범의 일부는 바닷물 속에서 잠을 자는데, 호흡을 할때만 수면으로 떠올라 온다고 한다. 나무늘보는 몸은 구부려 공 같은 모습을 하고 잠을 자고, 여우는 그 탐스러운 꼬리를 베개 삼아 잠을 잔다. 코끼리는 한밤중에 겨우 2시간 정도만 잠자는데, 건강한 코끼리는 코를 빙빙 감고 옆으로 길게 누워 풀을 베개 삼아 잠을 잔다. 그러나 병이 들거나 걱정이 있는 코끼리는 눕지 않고 선 채 잠시 잠을 잘 뿐이다. 기린도 머리를 높이 쳐든 채 2, 3시간만 잠을 잔다. 때로는 잠깐 동안 머리를 바닥이나 자신의 등에 내려놓고 잠을 자기도 한다.
잠을 자고 싶다는 욕구는 피곤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동물이 가진 생물 시계의 작용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사실 잠은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한참 동안 쉴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정한 시간동안 잠을 자도록 진화해 왔을 것이다. 우리가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이유는 뇌의 미세한 장치가 밤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므로, 그 동안 뇌의 기능이 저하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수도 있다. 잠을 자는 시간 중에는 소변의 양도 감소하고 체온도 내려간다. 또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나 목이 마르다는 느낌도 없어진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은 서커디언 리듬을 나타내는 생물 시계가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신체를 조절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잠에 관한 가장 충격적인 현상이라면 고차적인 신경 중추가 부분적, 혹은 전면적으로 기능을 저하시켜, 객관적으로 볼 때는 무의식이라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과 같은 잠을 자는 것은 지능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동물에 국한된다. 결국 이런 식의 잠을 자도록 유도하는 것은 고차원의 중추 신경계이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도중 근육은 이완된다. 따라서 물질 대사는 감소하고, 체온은 내려가며, 호흡은 깊고 늦어진다. 맥박수도 줄고, 혈액 속의 이산화탄소는 많아진다. 동시에 소화 작용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다양한 종류의 자극에 대해 잠을 방해하지 않고 생리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 잠은 뇌의 일부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어떤 억제된 상태가 피질 전체에 퍼져, 저차적인 부분에 이르는 상태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정밀한 실험의 결과가 이런 설명을 뒷받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뇌피질의 어느 부분에 한참 동안 계속해서 일정한 자극을 주면 우울병에 걸리거나, 바깥 세상에서 오는 자극에 응하는 힘이 약해져서 계속 잠만 자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다양한 종류의 자극이 주어지면 그 동물은 민첩하고 활발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잠을 자고 있는 상태와 자고 있지 않은 상태를 확실하게 구별하는 기준은 없다. 잠을 자지 않을 때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것은 흥분 상태가 우위에 있는 상황을 단순하게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포유동물의 경우에는 아침이 되어 코티솔(부신피질 호르몬의 하나)의 양이 많아지면 깨어나고 저녁이 되어 잠이 적어지면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고 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철학시를 썼던 이래로, 사람들은 개도 꿈을 꾼다고 생각해 왔다. 잠을 자고 있는 개 앞에다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음식을 놓으면 잠자는 개의 입은 음식을 베어무는 것처럼 턱을 움직인다. 또 1911년에서 1912년에 있었던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 종군했던 군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잠을 자면서, 마치 전쟁터의 광경을 다시 보는 것처럼 흥분해서 높은 소리로 울고 발굽을 찼다고 한다. 사람과 함께 사는 침팬지가 잠을 자다가 때로 야생의 울음 소리를 내면서 우는 일이 있는데 이는 나쁜 꿈을 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꿈은 상당히 주관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동물의 꿈은 동물과 의사 소통을 할 수단이 발견되지 않는 한,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람은(그리고 다른 포유류들도 역시) 꿈을 꾸면서 일상 생활에서 직면하는 심리적인 갈등을 풀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극히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잠이란 역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잠이란 단지 멍청하게 시간만 축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기를 가진 리듬 있는 환경에 잘 적응해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 한 번 생물 시계의 서커디언 리듬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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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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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뒤늦은 오기
그때까지 나는 누구를 속여본 적도 없었고, 속아본 적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중앙정보부에 있던 사람이 누군가를 속여가며 이득 취할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나를 속여서 득 보고자 하는 사람이 어찌 또한 있었겠는가. 순식간에 2천만 원을 날리고, 껍데기뿐인 공장 하나를 인수한 것이 말하자면 내 경영인생의 시작이었다. 흔히 서로 속이고 배신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인 것처럼 말한다. 나도 그 당시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고, 나 혼자만 바보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째야 할지 몰라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중에 옛 은사의 소개로 백정규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기술력이란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고, 엔지니어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풍전기공에 활력을 심어주었다.
그와 나의 만남은 운명적이기도 했다. 사기를 당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장 문만 열어놓고 있는 상태였건만, 백정규는 이상할 정도로 풍전기공 입사를 고집했다. 당시 멀쩡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나 역시 그의 우직한 심성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대번에 의기투합하고 폐허나 다름없는 공장에 뛰어들었다. 백정규를 얻고 나니 현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게 모자란 현장경험은 백정규가 보완하고, 백정규에게 모자란 관리업무는 내가 맡아보았다. 현장이 움직여주니 나도 죽을 각오로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사업이라는 것도 점차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속은 건 속은 것이고, 이제부터라도 풍전기공을 살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오기라면 오기였다.
사업경험이 없다는 것만 문제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 현장직원들이 부품을 사다 달라면 즉시 청계천으로 달려서 필요한 부품을 사다 주었다. 거래처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찾아가서 몇 번이고 도와 달라고 애걸을 했다. 그러다 보니 별 치욕스런 꼴을 다 겪었지만, 더 큰 자존심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청소도 직접 하고 은행도 내가 다녔다. 나는 직원들에게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시켜 달라'고 공공연히 부탁했다. 허수아비 사장이라고 무시하던 예전 직원들도 차츰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 사람으로 입사한 백정규도 자연스럽게 현장책임자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풍전기공은 점차 '내 공장'이 되어 갔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금형 사업을 시작했다. 기술력 확보를 위해 고심하던 나는 수소문 끝에 시오이 세이치라는 일본인 퇴역기술자를 초빙해왔다. 월급 150만 원에 체류비 50만 원, 한달에 한 번 씩 일본 여행경비 50만 원, '총 250만 원을 주기로 했으니 80년대 초반의 임금수준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시오이 세이치는 말 그대로 장인(장인)이었다. 육십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기계 앞에만 앉으면 미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정밀한 금형을 만지면서 장갑을 낄 수 없다며 항상 맨손으로 쇠와 기름을 만졌다. 풍전기공 직원들은 시오이 세이치로부터 고도의 금형 기술을 새로 익혔다. 오래지 않아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풍전기공으로 가라'는 말이 부천공단에 나돌 정도로 우리의 기술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금형 제작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대신에 사업적인 안정성이 없었다. 항상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속도가 붙어주질 않았고, 그 때문에 대개는 납품기일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이쪽에서 먼저 문제가 생겼으니 흐지부지 잔금 떼어먹히는 일도 잦았다. 더구나 금형은 납품으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각 현장상황에 따라 예상치 못한 트러블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A/S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공장 분위기를 일신하고 금형 사업에 새로 적응하는 와중에도 빚쟁이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전임사장의 빚을 가지고 자꾸 나를 괴롭히니 참을 수가 없었다. 갚아줄 돈도 없거니와 갚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세상물정을 몰랐던 것이다. 무조건 버티고 있으려니 갖가지 말썽이 일어났다. 험한 언사들이 오가는가 하면, 기계를 실어가려는 사람들과 거친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새로운 기분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어리석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너무나 많은 과거들을 책임져야 했다. 여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욕심만 있었을 뿐, 여전히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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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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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telope Canyon in the USA, Arizona.]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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