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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64호
2020.5.06. (음 4.14)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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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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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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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뒷걸음질을 해서 미래로 갈 수는 없다. - 조셉 허거샤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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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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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씨디로’
학창 시절 어느 겨울방학에 영동으로 이사한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원도로 가는 줄 알았더니 강 건너 서울로 이사한 친구였다. 강남(江南)보다 영등포의 동쪽인 영동(永東)이 널리 쓰이던 때였다. 전화 걸어 알아낸 새 주소의 동네 이름이 재미있었다. 이웃에는 ‘구정동’과 ‘뒷구정동’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 이름이었다. ‘진관내(진관외)동’과 ‘상수(하수)동’처럼 ‘내-외’, ‘상-하’로 나뉜 동네가 있던 시절이니 ‘앞-뒤’도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앞구정동’으로 쓴 편지는 제대로 배달되었다. 갈매기(鷗, 갈매기 구)와 친하게(狎, 친할 압) 지낸다는 뜻을 담은 정자 ‘압구정’을 까맣게 몰랐던 1970년대의 일이다.
압구정동을 비롯한 동 이름이 주소에서 사라진다.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이루어진 ‘도로명 주소’가 내년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전통과 역사를 담고 있는 지명을 없애면 전통문화를 누릴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이 나왔다. 여기에는 ‘체육관로’, ‘디지털로’ 따위는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기에 주소로 부적절’하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새 주소를 써도 지금껏 써왔던 동 이름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지번과 (도로명)주소는 이원적 체계로 운영’되고 ‘동 제도·명칭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임의적으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게 정부 방침이기 때문이다. ‘기존 주소 체계는 1918년 일제가 도입한 것’으로 ‘새 주소는 예전부터(1318년) 써왔던 집 중심 체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번호 사이는 ‘-’로 표기하고 ‘의’로 읽는다”는 대목은 왠지 반갑다.(안전행정부 자료) 하지만 ‘엘씨디로’(파주), ‘테라피로’(영주), ‘크리스탈로’(인천 서구)는 작명 취지를 떠나 손봐야 할 길 이름이다. ‘엘시디-’, ‘세러피-’, ‘크리스털-’로 해야 외래어표기법에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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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출-갹출
아나운서 사무실에는 다양한 문의 전화가 온다. 그 가운데 표준어와 표준발음, 맞춤법 관련한 내용이 빠질 리 없다. 아나운서는 우리말의 이모저모를 꿰뚫고 있다고 믿는 시청자들 덕분에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으니 고마운 일이다. 이런 질문은 저녁 이후 시간에 많다. 그 까닭은 ‘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느 것이 맞다 답하면 전화기 너머로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렇다. 아나운서는 ‘밥값(술값) 내기’의 심판자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아나운서들에게 걸려오는 전화에는 바람직한 언어 사용을 위한 제안이나 방송언어 오남용을 걱정하는 쓴소리를 담은 내용도 있다. 며칠 전 “방송에서 ‘더치페이’(Dutch pay)는 용인하면서 ‘분빠이’(分配)를 거부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는 전화를 동료 아나운서가 받았다. ‘더치페이’는 ‘각자내기’로 이미 다듬은 말(국립국어원, 2011년)이니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어에서 왔건 일본어에서 왔건 둘 다 ‘각출’의 뜻”이라며 이어간 시청자의 볼멘소리 때문에 문제의 초점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몇몇에게 물으니 30대 이상은 ‘각출’을, 20대는 ‘갹출’을 처음 듣는다 했다. 각출(各出)은 ‘1.각각 나옴 2.각각 내놓음’, 갹출(醵出)은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럿이 돈을 나누어 냄’이다. 어느 학원 강사가 “‘각출’은 같은 비용, ‘갹출’은 각자 능력껏 다른 금액을 부담하는 것”이라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밥값 5만원을 다섯 명이 1만원씩 내면 ‘각출’, 누구는 3만원을 내고 어떤 이는 5천원을 내서 5만원을 만드는 것은 ‘갹출’이니 ‘더치페이’에 딱 들어맞는 것은 ‘각출’”이라 밝힌 칼럼(ㅈ일보)도 있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2000년 이전 신문에는 추렴의 뜻인 ‘갹출’과 주식(경제) 용어인 ‘각출’(殼出)을 구분해 썼지만 최근에 국립국어원은 두 낱말을 한뜻으로 제시한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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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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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꽃 - 박해림
그녀의 목덜미에 저녁이 달라붙어 있다
둥글게 모서리가 깎여나간 시간
손으로 꾹 누른다
노랗게 번지는 기억들, 공중이 어지럽다
더러는 맥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한다
그녀의 길은 서랍장 안에 있다
유년의 길을 자꾸만 여닫고 싶어 한다
홀로 우두커니 벽을 밀어내기도 한다
기댈 곳 없는 허공이 흔들린다
겨드랑이에 숨어 있는 어둠
오래 잡고 지탱해야 한다는 듯이
달이 뜬다, 그 빛살을 끌어안고
노랗게 부풀던 그녀
손바닥 어지러운 잔금 사이로
노란 물감이 쉴 새 없이 묻어나온다
하수구로 쓸려나간 검정땟국물
수도꼭지에서는 밤새
노란 꽃잎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목덜미 촘촘히 달빛을 새겨 넣는다
저 숲을 달려운 오랜 밤의 이야기를
허공에다
혼자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다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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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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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219명의 생명을 구하다
베티 티스데일은 세계적인 영웅이다. 베트남 전쟁이 다시 가열되던 1975년 4월, 베티는 거리로 내쫓기게 될 4백 명의 고아들을 자기가 구해야만 한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전직 소아과 의사인 남편 패트릭 티스데일 대령과 함 께 다섯 명의 베트남 여아들을 입양한 상태였다. 그녀와 재혼할 당시 남편에게도 이미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 전인 1954년에 베트남에서 활약중인 미 해군 소속의 군의관 톰 둘리는 북 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난민들이 탈출하는것을 도왔다. 베티는 말한다.
"톰 둘리는 내게 살아 있는 성인으로 여겨졌지요. 그는 내 삶을 영원히 바꿔 놓았습니다."
톰 둘리의 저서를 읽은 베티는 휴가 때마다 14차례나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그가 세운 병원과 고아원들을 방문하고 자원봉사를 했다. 사이공에 있는 동안 그 녀는 월남 여성 부티나이 부인이 운영하는 안락 고아원의 고아들과 사랑에 빠졌다. 마담 부티 나이는 베트남이 공산 정권의 손에 넘어가던 날 베티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며, 훗날 조지아 주에 있는 베티의 집으로 와서 열 명의 자녀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안락 고아원의 고아 4백 명이 곤경에 처한 소식을 들은 베티는 즉각적인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그녀는 나이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알겠어요! 내가 당장 가서 그 아이들을 전부 입양하겠어요." 그녀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를 알고 있지 못했다. 다만 자기가 그렇 게 하리라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훗날 <안락의 아이들>이란 베트남 탈출 영화 에서는 셜리 존스가 베티역을 맡았다. 순식간에 베티 티스데일은 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도 위반 딱지까지 받아 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한 기금을 모았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며, 또 그렇게 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그 아이들이 공산주의 치하가 아니라 좋은 가정에서 성장하기를 바랐 을 뿐이에요."
그것이 베티 티스데일을 움직인 동기였다. 그녀는 일요일에 미국 조지아 주의 포트 베닝을 떠나 화요일에 베트남의 사이공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토요일 아침 무렵 4백 명의 아이들을 사이공 밖으로 긴급 공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베트남 사회복지과 과장인 단 박사는 열 살 이하의 아이들만 입양할 수 있으며, 그것도 아이들의 출생 증명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고아들이 출생 증명서를 갖고 있을 리 없다는 걸 베티 티스데일은 금방 직감했다. 베티는 당장에 병원의 소아과로 달려가 225장의 출생 증명서를 얻어 냈다. 그 리고 그 중 자격이 있어 보이는 219명의 아이들에 대해 출생 날짜와 시간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한다.
"난 그 아이들이 언제 어느 장소에서 탈출시켜 자유로운 미래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이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했다."
이제 베티 티스데일은 고아들을 탈출시킨 뒤에 임시로 묵게할 미국 내의 장소가 필요했다. 조지아 주 포트 베닝의 미군 부대는 난색을 표시했지만 베티는 포 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부대장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마 침내 부대 참모관실로 연락했을 때 전화를 받은 사람이 보 콜어웨이였다. 그는 아무리 긴박하고 중요한 구출 작전이라 해도 베티의 요청에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베티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까지 진행했는데 이제 와서 중단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보 콜어웨이가 조지아 주 출신인 것을 알고는 그의 어머 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 마침내 자정이 넘은 시각 에 그 참모관은 포트 베닝에 있는 한 학교를 안락 고아원 고아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아이들을 베트남 밖으로 수송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베티는 그레이험 마틴 미국 대사를 찾아가서 아이들을 위한 수송 수단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했다. 팬암 항공사의 여객기를 전세내려고 시도했지만 런던 로이드 사에서 보험금을 올리는 바람에 현재로선 협상이 불가능했다. 미국 대사는 베트남 정부에서 인정하는 서류들을 갖추기만 한다면 도움을 주 겠다고 동의했다. 고아들이 두 대의 공군 비행기에 나눠서 올라타는 동안 베트남 사회복지과 과장 단 박사가 마지막 탑승자 명단에 서명을 했다. 고아들은 모두 영양실조 상태였으며 병에 걸려 있었다. 아이들 모두가 한 번 도 고아원 밖을 나와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베티는 병사 들과 ABC방송국 직원들을 소집해 아이들을 치료하고, 수송하고, 음식을 먹이게 했다. 그 아름다운 토요일, 219명의 아이들이 자유를 향해 이송되는 순간 모든 자원 봉사자들의 가슴에 감동이 물결쳤다. 봉사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유를 선물했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필리핀에서 미국까지 가는 비행기 요금도 큰 문제였다. 유나이티드 항공사를 이용하는데 2만 1천 달러가 들었다. 요금은 베티의 남편인 티스데일 박사가 댔다. 만일 시간이 더 있었다면 베티는 고아들을 위한 무료 비행기표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으며,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아이들은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모두 입양이 되었다. 특히 장애아들을 입양시키는 일을 해 온 펜실베니아주 요크 시에 있는 트레슬러 루터 협회에서 아이들을 입양할 가정을 찾아 주었다.
베티 티스데일의 이 이야기는 당신이 삶에서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톰 둘리 박사가 말했듯이 '특별한 일을 하는 데는 평범한 사람이 필요한'것이다.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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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만 더
19세기에 쓰여진 어느 영국 소설의 웨일즈 지방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지난 5백 년 동안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매년 교회에 모여 기도를 올려 왔다. 자정이 되기 직전에 그들은 촛불을 켜고 찬송가를 부르면 서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시골 마을길을 걸어 낡고 버려진 돌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을 재현했다. 구유까지 완벽하게 만든 뒤, 그들은 소박하고 경건한 마음 속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가 차가운 12월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걸을 수 있는 사람 이라면 모두가 매년 이 행사에 참여했다. 그 마을에는 하나의 신화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사람 모두가 그곳에 모여 완벽한 믿음으로 기도를 하면, 자정을 알리는 시각에 예수의 재림이 이뤄진다는 전설이었다. 단, 모두가 완벽한 믿음으로 기도를 해야만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5백 년 동안 그들은 한 해도 빠짐없이 그 황폐한 돌집으로 가서 기도를 올려 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의 재림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한 주인공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주님께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 마을에 오시리라는 걸 정말로 믿 습니까?"
그는 슬프게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난 믿지 않습니다."
"그럼 왜 당신은 해마다 그곳에 가십니까?"
그 주인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만일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만 그곳에 없었던 유일한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자, 그는 그 정도의 작은 믿음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믿음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약성서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겨자씨만한 믿음만 갖고 있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문제아들이나 방황하는 청소년, 알콜 중독자,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 친구나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때는 더욱더 그런 작은 믿음 이 필요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사람을 해마다 빠짐없이 그 황폐한 돌무더 기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 작은 믿음 말이다. 그는 '이번 한 번만 더'하고 그곳으로 간 것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내가 해 낼지도 모른다는 그 믿음을 그는 잃지 않았다.
때로 우리는 모두가 희망을 포기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할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조차도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변화나 성장의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 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우리가 아주 작은 희망의 조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놀라운 성과를 올릴 수 있다. 친구여, 이번 한 번만 다시 돌아가기 바란다.
하녹 맥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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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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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穎而出(탈영이출)
脫(벗을 탈) 穎(이삭 영) 而(말 이을 이) 出(날 출)
사기(史記) 평원군우경(平原君虞卿)열전의 이야기. 전국시기,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 모수(毛遂)는 3년여를 묵으면서, 이제껏 어떠한 재능을 발휘해 본적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기원전 257년, 진(秦)나라의 공격으로 조(趙)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평원군은 효왕(孝王)의 명으로 초(楚)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가게 되었다.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모수가 나서서, 초나라까지 수행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모수는 군께서 저에게 좀더 일찍 기회를 주셨더라면, 저의 모든 재능이 일찍 드러났을 것입니다(乃穎脫而出). 라고 했다. 이에 평원군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초나라로 떠났다. 평원군은 초왕과의 협상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때, 모수가 한 손에는 칼을 뽑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초왕의 옷깃을 잡은채, 초왕을 설복시켜 동의를 얻어 내게 되었다.
脫穎而出 이란 모든 재능이 완전하게 드러남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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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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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3편
6. 섬기는 정신
내 사업은 만족스럽게 발전되어 갔지만, 나는 그것으로만 만족할 수는 없었다.내 생활을 한층 더 간소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과, 동포들을 위해 어떤 구체적인 봉사활동을 하여야겠다는 문제가 항상 마음을 들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어떤 문둥이 하나가 집 문간에 왔다. 나는 밥이나 한 끼 먹여서 보내 버리자는 심정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잠잘 자리를 주고, 상처를 잘 싸매주고, 그를 돌봐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무작정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럴 여유도 없었고, 그를 언제까지나 함께 데리고 있자는 의지가 내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계약노동자를 위한 정부 병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전히 평안하지가 못했다. 어떤 영구적인 성격의 인도주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 부드 의사는 성 에이단 선교회의 책임자였는데, 그는 아주 친절한 분으로서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었다. 파르시 루스톰지의 자선심덕택에 부드 의사의 책임하에 조그만 자선 병원을 하나 열 수 있게 됐다. 나는 그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약을 조제하는 데매일 한시간 내지 두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내 사무소에서 일하는 시간 중에서 그 시간을 내어 병원에 딸린 약국의 조제사의 자리를 담당키로 결심했다. 내 직업 사무의 대부분은 양도수속, 중재사무 같은 실내 사무였다. 물론 법정에서의 소송사건도 더러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비논쟁적 성격의 것이었고, 나를 따라 남아프리카에 와서 함께 있는 칸 씨가 내가 없을 때에 내 대신 일을 맡아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만큼 병원에서 일하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오전에, 병원을 내왕하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두시간 일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마음에 평화가 좀 왔다. 내가 하는 일은 환자의 병세를 알아보고, 그것을 의사에게 보고하고, 처방에 따라 약을 조재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나는 고통 당하는 인도인들과 가깝게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타밀, 텔루구, 또는 북인도의 계약노동자들이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서, 보어전쟁 때에 나는 자원하여서 군인 환자의 부상병들을 간호할 수가 있었다.
아이들 양육 문제는 언제나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남아프리카에 와서 두아이를 낳았는데, 병원에서 봉사하는 일이 아이들 양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움이 되었다. 나의 독립정신은 언제나 시련을 당했다. 아내는 애기를 낳을 때는 가장 뛰어난 의술의 도움을 받기로 했지만, 정작에 가서 의사나 간호원이 우리를 내버려 두고 봐주지 않는다면 어찌할까? 그리고 또 간호원은인도인이어야 했다. 잘 숙련된 간호원은 인도에서 구하기가 힘드는데, 여기 남아프리카에서는 얼마나 더 어려울 것인가는 상상하기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산에 필요한 지식을 배웠다. 나는 트리부반다스 의사가 쓴 어머니가 알아 둘 일 이라는 책을 읽고, 그 책 안에 있는 지시에 따라 두 아이들을 양육했고, 다른 데서 얻은 경험으로 이것저것 참작을 했다. 간호원으로서의 봉사가 소용이 된 것은 주로 아내를 도와 주는 데서였는데, 두 번 모두 두달 이상이 가지 않았고, 아이들을 돌보는 데는 소용된 것이 없었고, 그것은 나 자신이 했다. 막내 아이을 낳을 때가 가장 어려웠다. 진통이 갑자기 왔는데, 의사를 곧 청할 수도 없고, 산파를 부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 산파가 거기 있었다 하더라도 애가 나오는 것을 도울 수는 없었다. 순산이 될 때까지 내가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내가 트리부반다스 의사의 책으로 그것에 대해 자세히 연구해 두었던 것이 무한한 도움이 되었다. 나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옳게 기르려면 부모가 갓난아기를 어떻게 다루며, 간호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데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주의해 연구했던 만큼 혜택을 입었다. 내가 만일 이것을 연구하지 않고 그 지식을 적용하지 못했다면 내 아이들은 오늘날과 같이 일반적으로 건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은 처음 다섯 해 동안은 배우는 것이 없다고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로 아이들이 다섯 살까지 배운 것은 그 후에는 결코 배울 수 없다. 어린이의 교육은 임신과 동시에 시작된다. 임신 순간의 부모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는 갓난아기 속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고는 임신동안 계속해서 어머니의 기분. 욕망. 성질 또는 그 생활 방식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태어난 후에 아기는 부모를 본뜨며 상당한 연한 동안 그의 성장은 부모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정말로 잘 인식하는 부부들이라면, 자손을 낳기 원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자기네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교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교를 자고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자의적인 기능이라고 믿는 것은 무지의 절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의 존속은 생식작용에 달려 있는데, 세계란 하느님이 노시는 곳이요, 그의 영광의 반사라면, 생식작용은 질서 있는 세계의 성장을 위해 마땅히 통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정욕을 참을 것이고, 자기 자손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행복에 필요한 지식을 자신이 갖추어, 그 지식의 은택을 후손에게 베풀게 할 것이다.
7. 브라마차랴(1)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내가 브라마챠라*1의 맹세를 하려고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던 때의 이야기를 할 단계에 이르렀다. 나는 결혼 이후 일부일처의 이상을 쭉 지켜왔고, 아내에 대한 성실은 내 진리에 대한 사랑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자기 아내에 대해서까지도 브라마차랴를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남아프리카에 와서 부터 였다. 어떤 사정이, 또는 어떤 책이 내 생각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었느냐 하는 것은 명백히 말할 수 없으나, 내 기억으로는 그 주된 요인은 이미 말한 바 있는 레이찬드바이의 영향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와 이야기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 어느땐가 나는 그를 보고 글래드스턴 부인의 남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극구 찬양한 일이 있었다. 나는 어디선가 글래드스턴 부인이 하원 의사당에까지 글래드스턴 씨가 마실 차를 꼭 준비해 가지고 갔다는 것과, 이것이 모든 행동을 규칙적으로 하기로 유명한 그들 부부의 생활에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시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덧붙여 부부의 사랑을 예찬하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레이찬드바이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 글래드스턴 부인의 남편에 대한 아내로서의 사랑과, 글래드스턴 씨와는 상관없이 하는 헌신적인 봉사와, 그 둘 중 당신은 어느 것을 더 칭찬하시렵니까? 가령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인이 그의 누이나 또는 헌신적인 종으로서 그와 똑같은 정성으로 그를 섬겼다면, 당신은 그때 뭐라고 하시렵니까? 누이나 종이 몸바쳐서 하는 그러한 실례가 있지 않습니까? 가령 당신이 어떤 남자 종이 하는 그런 사랑의 섬김을 찾았다 합시다. 당신은 글래드스턴 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느끼겠습니까? 내가 지금 말한 그 관점을 좀 생각해 보십시오."
레이찬드바이 자신도 결혼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말은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그 말은 나를 어쩔 수 없이 사로잡아 버렸다. 종의 헌신은 아내의 그것보다 천 갑절도 더 칭찬할 만하다고 나는 느꼈다. 아내가 남편에 대해 헌신하는 것은 별로 놀랄 것이 없다. 그 둘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헌신은 더할 나위 없이 당연한 것이다.그렇지만 주인과 종 사이에서 그 같은 헌신을 하려면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인의 견해가 점점 내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와 내 아내의 관계는 어떠하여야 할까 하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의 아내에 대한 성실은 내 아내를 내 정욕의 도구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정욕의 종인 한, 나의 성실은 아무 가치가 없다. 내 아내를 공정히 평한다면 그녀는 결코 요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브라마차랴의 맹세를 하는 것은 내게는 극히 쉬운 일이었다. 장애가 되는 것은 나의 약한 의지, 또는 정욕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내 양심이 깬 후에도 나는 두번이나 실패하였다. 실패한 이유는 그 노력을 하게 한 동기가 가장 높은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주된 목적은 아기를 더 낳지 말자는 데 있었다. 영국에 있는 동안 나는 피임에 관하여 약간 읽은 것이 있었다. 앞서 나는 채식주의의 장에서 알린슨 의사의 산아제한 선전에 관해서 말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일시적 영향을 준 것뿐이고, 그보다도 이러한 외적 수단에 반대되는 내적 노력, 한마디로 해서 극기를 주장하는 힐 씨의 생각이 내게 더 강한 효과를 나타냈고, 그것은 날이 감에 따라 영속적인 것이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린애가 더 필요치 않다고느끼자, 나는 극기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 따로 자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 일로 기진맥진이 된 후에야 자리에 들기로 했다. 이 모든 노력은 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의 지나간 날들을 회상해 볼 때에 내가 최종의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러한 성공되지 못했던 모든 노력이 합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최종의 결심은 1906년에 가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그때는 샤타그라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 것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보어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탈에서 일어난 줄루반란 때 나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변호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때에 나는 나탈 정부에 대해 종군할 것을 제의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장에서 말하겠지만 그제의는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일들은 나로 하여금 극기에 관한 생각을 심각히하게 하였고, 언제나 그런 것처럼 나는 이 문제를 내 협동자들과 의논하였다. 애기 낳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자녀양육과 공공봉사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내 확신으로 되어 갔다. 나는 반란 동안 종군을 하기 위해서는 요하네스버그의 내 살림을 걷어치우는 수 밖에 없었다. 종군한 지 불과 한 달만에 나는 그렇게 공들여 꾸며 놓았던 내 집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내와 애들은 피닉스에 데려다 두고, 나는 나탈 군대 소속 인도인 환자 수송대의 지휘를 맡았다. 당시 강제적으로 해야만 하던 행군을 하는 도중에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즉 내가 이러한 모양으로 공동체에 대한 봉사에 내 몸을 바치려면, 자녀와 재산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바나프라스다,*2 즉 가사에서 물러난 자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반란이 나를 붙잡았던 것은 불과 6주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짧은 기간이내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맹세의 중요성이 그전 어느 때보다도 더 명확해졌다. 맹세는 자유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열어 주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이때까지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내게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했고, 또 하느님의 은총을 믿지 못했고, 그래서 내 마음이 의심의 거친 바다에서 흔들리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세를 거부하는 가운데 사람은 유혹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고, 맹세로 얽매이게 되는 것은 방종에서 빠져 나와 참된 일부일처주의로 들어가는 길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노력을 믿지, 맹세로 나 자신을 얽매고 싶지않다. 는 말은 약자의 심리상태요, 필하려는 물건을 암암리에 바라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이 무엇이 어려운가? 뱀이 나를 물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뱀으로부터 도망할 것을 맹세한다. 그놈을 피해 보려고 단순히 힘을 써보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힘만을 써 보다가는 죽을 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단순한 노력은, 뱀은 나를 죽이고야 만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저 노력만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아직 결정적인 행동의 필요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 견해가 장래에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어떻게 맹세로써 나 자신을 얽어맬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이 종종 우리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도 역시 어떤 일정한 물건을 반드시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분명한 인식이 결핍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슈쿨라난드가 이런 노래를 부른 것이다.
싫어함 없는 내버림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욕망이 사라질때 버리자는 맹세는 자연적으로 또한 필연적으로 오는결과다.
*1. Brahmacharya : 한문으로는 금행이라 번역한다. 넓게는 모든 금욕을 의미하는 것이나, 특히 엄격히 성행위를 금하는 정결주의. 동정 생활을 의미한다. 옛날 인도의 전통으로는 인생을 네 시기, 즉 도제시기, 가장시기, 임간은퇴시기, 출가 곧 비구시기로 분류. 도제시기에는 스승 밑에서 엄격한 동정을 지키나, 가장시기에 가서는 결혼생활을 하여 자녀도 낳고 가장 노릇을 하게 되는데, 간디는 평생 동정을 강조했다.
*2. Vanaprastha : 브라마차랴에서 말한 임간은퇴를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구경목적인 모크샤, 곧 해탈에 이르는 공부는 이 제3기부터만 허락된다.
8. 브라마차랴(2)
충분히 토론하고 익히 생각한 다음, 나는 1906년에 그 맹세를 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 생각을 아내와 같이 의논한 일이 없었고, 다만 맹세를 하려는 때에야 아내와 의논하였다.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후의 결정을 할 때에는 정말 힘이 들었다. 내게는 있어야 할 힘이 없었다. 내 정욕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을까? 그때는 자기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없애 버린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느님의 붙잡아 주시는 능력을 믿고 걸음을 내디었다. 맹세한 지 20년,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내 마음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찬다. 자제가 다소 성공으로 실행되기 시작한 것은 1901년 이후부터였으나, 자유와 즐거움이 내게 온 것은 맹세를 하고 난 1906년 때부터지 그 이전에는 그런 경험은 없었다. 맹세를 하기 전에는 언제라도 맥없이 유혹에 넘어갔다. 이제 맹세는 유혹에 대하여 확실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브라마차랴의 위대한 잠재력이 나날이 내게 분명해졌다. 맹세를 한 것은 내가 피닉스에 있을 때였다. 환자 수송대의 일이 끝나자마자 나는 피닉스로 가서 거기서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로 돌아간 지 한 달 쯤 후에 사탸그라하의 기초는 놓여졌다. 내게는 알려지지도 않게 브라마차랴 맹세는 그것을 위해 나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샤타그라하는 미리 생각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온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전에 내딛었던 모든 발걸음이 나를 그 목표로 이끌어 주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나는 요하네스버그에서의 가정살림의 과중한 경비를 다 잘라 버리고 피닉스로 간 것은 마치 브라마차랴 맹세라도 하기 위한 것 같았다. 브라마차랴를 완전히 지킨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브라만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경전들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서히 경험을 통해서 내 속에서 자란 것이다. 거기에 대한 경전의 본문을 읽은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매일매일 맹세를 지켜감에 따라 나는 브라마차랴 안에 몸과 마음과 혼을 보호해 주는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브라마차랴는 이제는 이미 힘든 고행의 과정이 아니고, 하나의 위로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오는 날들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갈수록 자라가는 즐거움이라 해서 누구나 그것이 내게 아주 쉬운 일인 줄로 알아서는 안된다. 쉰 여섯을 넘긴 오늘에 있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가면 갈수록 그것은 흰 칼날 위를 걷는 일임을 나는 깨닫고, 순간마다 영원한 경각심의 필요를 느낀다. 미각을 조절하는 것이 이 맹세를 지켜가는 데 첫째로 요긴한 일이다. 미각을 완전히 절제하면 맹세를 지키기가 아주 쉽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지금 내가 음식 실험을 하는 것은 채식주의자로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브라마차랴를 지켜가는 사람으로서의 견지에서도 하는 것이다. 이런 실험의 결과 나는 브라마차랴를 지키는 사람의 음식은 많지도 않고 간단하며, 양념이 들지 않고 될수록이면 생식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섯 해 동안의 실험은 나에게 브라마차랴를 지키는 데 이상적인 음식은 신선한 과일과 굳은 껍질의 열매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 음식을 먹고 살던 때 내가 느꼈던 정욕에서의 해방의 쾌감은 이 음식법을 바꾼 후에는 맛볼 수 없다. 남아프리카에서 과일과 굳은 껍질의 열매만을 먹고 살 때는 브라마차랴를 위해 내 편에서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우유를 먹게 된 다음부터는 비상한 노력을 하여야 했다. 과일을 먹다가 어떻게 해서 내가 다시 우유를 먹게 됐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우유를 먹으면 브라마차랴를 지키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터럭만큼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만을 말해둔다. 그렇다고 해서 브라마차랴를 지키려는 사람은 다 우유먹기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기를 바란다. 다른 여러가지 음식이 브라마차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은 여러 번 실험을 거듭해 본 후에 결론지을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 살이 잘 오르게 하면서 소화가 잘되는 우유에 대치될 만한 과일을 발견하지 못했다. 서양 의사도 인도 의사도 이스람교 의사도 모두 나를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유가 약간 자극적인 것은 알면서도 아직은 아무에게도 우유를 그만두라고 권할 수는 없다.
브라마차랴를 외적으로 돕는 데 있어서 단식은 음식을 선택하고 제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이다. 감각이란 너무도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하려면 사방과 아래 위에서 완전히 포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는 힘을 못쓴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제어할 목적으로 단식을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유효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식이 아무 소용이 없는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계적으로 단식을 하기만 하면 감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줄 알고 몸으로 음식을 먹지 않을 뿐이지, 마음으로는 가지가지의 맛있는 것으로 잔치를 벌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단식이 끝나기만 하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마시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런 단식은 미각을 억제하는 데도 정욕을 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단식이 효력이 있으려면 굶고 있는 몸에 마음이 협력을 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한다면, 몸이 먹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음식을 마음이 싫어하게 되어야 한다. 마음은 온갖 육욕의 근원이다. 따라서 단식을 하는 사람도 계속 애욕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단식은 제한된 효력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단식을 아니하고는 불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단식은 브라마차랴를 지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브라마차랴를 지키려고 정진하는 많은 사람들이실패하는 것은, 브라마차랴를 지키지 않는 사람과 마찬 가지로 다른 감관을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노력은 마치 7,8월 불볕 밑에서 몸이 얼어드는 겨울 추위를 맛보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브라마챠를 지키는 사람과 안 지키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어야 한다. 양자간에 서로 비슷한 듯이 보이는 것은 외견상으로일 뿐이다. 그 차이는 대낮의 빛같이 명확한 것이어야 한다. 둘이 다 시력을 사용하지만, 브라마챠라를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사용하는데, 안 지키는 사람은 자기네 주위에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보기 위해 사용한다. 둘이 다 귀를 쓰지만 하나는 하느님의 찬송만을 듣고 있는데, 다른 하나는 더러운 것을 듣고 있다. 둘이 다 늦도록 깨어 있지만, 하나는 그 시간을 기도하는 데 바치고 있는데, 다른 하나는 시간을 사납고 거친 쾌락에 낭비하고 있다. 둘이 다 자기 배를 채우지만,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의 성전을 깨끗이 지키기 위해서 하는데, 다른 하나는 게걸스럽게 처넣어서 거룩한 그릇을 냄새나는 시궁창으로 만든다. 그처럼 둘은 서로 대립하는 두 극과 같이 살고 있어서 세월이 갈수록 그 둘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질 뿐이지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브라마차랴는 생각으로나 말로나 또 행동으로나 감성을 억제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위에서 설명한 그런 절제의 필요를 더욱 더 느낀다. 브라마차랴를 얼마만큼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한정이 없는 것처럼, 내버림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에도 한정이 없다. 그러한 브라마차랴는 한정된 노력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것은 다만 이상에만 그치고 말 것이다. 브라마차랴를 목적으로 정진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의 부족을 느낄 것이요. 자기 마음 깊은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애욕을 찾아내서는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부단히 분투할 것이다. 생각이 완전히 의지의 통제 밑에 있지 않는 한 완전한 브라마차랴는 안된다. 하자는 의지없이 하려는 생각은 단순한 감정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재갈 물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재갈 물린다는 말인데, 그것은 바람을 재갈 물리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마음의 억제도 할 수 있다.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최고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도달하는 데는 최대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도에 온 후에야 나는 그러한 브라마차랴는 단순한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달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과일식만 하면 모든 정욕을 뿌리뽑을 수 있다는 망상 밑에 힘을 쓰고 있었고, 그 이상 더 할 것은 없다고 자기 아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분투의 장을 미리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분명히 해두어야겠다. 즉, 하느님을 실현하자는 목적으로 브라마차랴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낙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자기의 노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만큼 하는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말이다. 절제하는 심령 앞에서는 감각의 대상은 사라지나, 그 맛은 남아 있다. 지극히 높으신 이를 깨달을 때 그 맛마저 사라진다. ( 바가바드 기타 3장59절) 그렇기 때문에 모크샤*1를 향하여 정진하는 자가 최후로 의지할 곳은 그이의 이름과 그이의 은총이다. 이 진리는 내가 인도에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1. Moksha : 해설. 세속과 정욕의 모든 구속과 유혹을 벗어 버리고 완전한 정신적 자유에 이른 경지. 옛날 인도 사상에서 인생의 목적을 넷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 마지막 것. 그 4대 목적은 (1)재산(Artha), (2)사랑(Kama), (3)의무 또는 법(Dharma), (4)해설(Moksh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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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손가락을 이식시켜 주세요 - 정혜숙
어느 날 아침,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의 일이다. 젊은 처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내가 막 출근하자마자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사람은 왠지 무척 초조하고 창백해 보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마침내 처녀의 어머니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저, 의사선생님, 제 딸이 다음달에 시집을 가는데..."
그녀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옆에 앉아 있는 딸의 손을 감싸 쥐었다가 펴더니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제 딸이 어렸을 적에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잘못해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그런데 손가락 네 개는 어릴 때 이식을 시켰는데, 나머지 한 손가락은 아직 이식시키지 못했어요. 저, 선생님. 지금도 이식 수술이 가능할까요? 딸이 시집갈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어서 저 애나 저나 매일 눈물이에요. 저의 손가락이라도 이식시키고 싶어서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느새 그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네. 이식 수술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떤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결혼한 날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는 딸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이식시키려는 어머니의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고 말았다. (간호사)
검불 장사 콩나물 장사 - 김금흥
올해 예순넷이 된 저는 레슬링 선수 장창선의 에미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라고 창선이가 내 늙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줘, 꽃을 달고 시장에 나왔습니다. 저는 인천 신포 시장에서 평생 동안 콩나물만 팔며 살아왔습니다. 콩나물 팔아서 딸 둘, 아들 하나 굶어 죽지 않게 잘 키우고 손주까지 봤으니 이제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남들은 창선이 같은 효자 아들을 두었으면서 왜 아직도 콩나물 장사를 하느냐고 합니다만, 저는 이 장사를 안하면 할 일이 없습니다. 창선이와 며느리도 제발 좀 시장에 나가지 말라고 해서 크게 싸움까지 했습니다만, 이제는 제 고집에 지쳐서 더 이상 말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몸이 성하니까 그렇지, 몸만 아파 봐라. 콩나물 장사 하고 싶어도 못한다."
아들이 사업을 해서 풀칠할 만하다고 늙은 에미가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뭘 합니까. 이렇게 시장 바닥에라도 나와 앉아 있는 게 더 좋은 걸요. 10원때기, 100원때기 하는 검불 장사인 콩나물 장사를 한다고 어디 큰돈을 버는 겁니까. 그날그날 물건 값 떼고 손주들 사탕이라도 사들고 들어가는 게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지 결코 돈이 그리워서 하는 장사는 아닙니다. 이 장사로 창선이 운동시켜서 은메달('64년 동경 올림픽 때를 말함)을 따게 하고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즐겁고 고마운 일입니다. 새벽에 시장에 나와 콩나물,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 미역줄기 같은 것들을 매만지면 무척 즐거워집니다. 그중에서도 나물 가운데 가장 어른 격인 콩나물을 수북수북 추스르면 저는 마치 제 손주 녀석과 같은 마음이 됩니다. 요즘은 불경기라 그런지 이 장사마저도 잘 안됩니다. 그래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싶지, 남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이대로 주저앉아 있습니다. 못 팔면 안 먹고, 팔리면 밥해 먹고, 조금 팔면 죽 쑤어 먹고 살면 됩니다. (이 글은 기자가 장창선 씨의 어머니를 인천 신포 시장으로 찾아가 받아 적은 것이다.)
콩나물 장사의 아들 - 장창선
콩나물 장사 40년. 이것이 일흔의 나이로 돌아가신 지 이제 백일도 안된 우리 어머니를 설명하는 말의 전부이다. 1966년 '세계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내가 금메달을 딸 때도 어머니는 콩나물을 파느라 내 소식을 모르셨다. 텔레비전을 본 시장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금메달을 땄다"고 알려 주었고, 방송국에서 "콩나물 장사 아들이 세계에서 1등을 했다"며 취재를 하려고 어머니에게 달려와서야 겨우 금메달 소식을 들으셨다. 내가 귀국하던 날, 트랩을 내려서자 여전히 고쟁이에 돈주머니를 찬 어머니는 그만 내 앞에 풀썩 엎어져 한없이 우셨다. 강한 줄만 알았던 우리 어머니, 고생으로 다져진 어머니의 다부진 모습만 보아 온 나는 그때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그후 어머니는 아들의 금메달 덕에 콩나물 좌판 하나 마련한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때까지 남의 가게 처마 밑을 전전하시다가 겨우 시장 한복판에 변변한 자리 하나를 마련하신 것이다. 내가 선수 생활을 마치고 조그만 전자 대리점을 차렸을 때도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를 그만두지 않으셨다. "거, 장 서방, 어머니한테 너무 하는구먼!"하는 시장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싫었고, 이젠 먹고 살 만한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창피한 것 같아 좌판을 부수면서까지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다투고 나면 일주일씩 좌판 앞에서 새우잠을 자고 음식을 굶으면서까지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 생활을 고집하셨다. "네가 레슬링을 버릴 수 있느냐?" "내가 건강하니 이 정도로 움직이고 손주들 세뱃돈도 주지"하는 말로 오히려 나와 아내를 설득하였다.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해서도 "콩나물 몇 사발이요? 50원입니다" 라고 헛소리를 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우리 자식들이 결국은 지고 말았다. 자식들 눈에는 안돼 보이지만 그것이 어머니의 생활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전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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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 홍윤숙
거울아 거울아
자식들은 성장함에 따라 부모를 자신의 라이벌, 경쟁 상대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글을 쓴답시고 바쁜 어미의 뒤통수를 하얀 눈으로 흘겨보던 딸들의 주눅든 마음을 가끔가끔 느꼈었으니 나또한 내 아이들의 무언의 라이벌이었음직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느끼는 최초의 경쟁 상대는 부모다. 그것은 좋은 뜻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좋은 경쟁 상대는 삶의 동력이 되고 추진력이 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자극이 되며 스스로 목적을 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결국 아이의 좋은 경쟁 상대가 되어주는 일이 부모의 첫 번째 과제가 아닐까 싶다. 손끝이 매운 어머니 밑에서 배운 딸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게 마련이다. 그런 한편에서 아이들은 역시 부모에게 영원한 보호자이기를 원한다. 경제적으로 급하면 언제나 의지해오고 정신적으로 중요한 인생의 상담역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같이 놀아주는 놀이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고, 또 때로는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보호자, 라이벌, 친구 그리고 지도자 그런 의미에서 부모란 인생의 달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와 경우에 따라 적절히 이 네 가지 역할을 구사해내야 한다. 가령, 보호자 역할이 지나치게 강해질 때 아이들은 반발하거나 허약해진다. 과보호란 방임과 다름없이 아이에게 유독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라이벌 의식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도 우스워진다. 보모자식간의 정이 끊어지고 적대감만 조장된다. 너무 엄격해도 아이들과의 사이에 벽이 생기고 너무 응석만 받아주어도 버릇이 없어진다. 부모가 무능력할 때 자식은 부모를 허술히 대하고 부모가 지나치게 권위적일 때 또한 자식은 부모를 경원한다. 참으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부모자식의 관계다. 장성한 자식에겐 할말이 있어도 하지 못한다. 서운하고 섭섭한 일이 있어도 속으로 울고 겉으로는 웃어야 한다. 샴처럼 웃는 얼굴만 보아온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을 알 리 없다. 요컨데 부모는 몇 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힘든 역할을 평생동안 해내야 한다. 어찌 부모의 역할뿐이랴. 직장에 있어서 선후배 동료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동료는 동료끼리 선후배는 선후배끼리서로 몇 개의 얼굴을 요구하며 그 적절한 사용을 연구해야 한다. 사회에서 지도적 입장에 선 사람들은 어쩌면 그 몇 개의 얼굴을 갈아 끼는 데 숙달된 명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안 될 때 고지식하게 한 가지 얼굴밖에 연출하지 못할 때 샴처럼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달인으로 몇 개의 얼굴을 가진 세상의 부모들이 나이를 먹고 늙어갈수록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는 생각들을 숨겨두고 남 모르게 울고 있다고 생각할 때 다시금 인생의 막막함에 할말을 잃어버린다.
개미처럼 바지런한 여자
젊은이들 몇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인상'이라는 화제가 나왔다. 한 젊은이가 "나는 청바지, 빨간 셔츠에 긴 머리 아가씨가 좋더라."고 말하자 다른 젊은이가 "되게 야하고 섹시한 여자구나."했다. 그러자 또 다른 젊은이가 "난 좀 달라. 뭔가 감춰져 있는 여자, 궁금증을 느끼게 하는 여자가 좋아."했다. 그리고 세 번째 젊은이는 "분위기를 맞쳐주는 여자, 도서관에 가면 열심히 독서하고 맥주집에 가면 맥주도 마시고 산에 가면 엄살 없이 산도 잘 오르는 여자."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쏟아져 나왔다. "형제 사랑하고 부모님 공경할 줄 아는 여자", "정조관념 강하고 참을성 있는 여자","바가지 긁지 않는 여자","돈에 대해선 절대로 모르는 여자"...와글 와글 와글...(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 이야기였다.) '맙소사, 누군지 모르지만 느네들 장가가기 힘들것다.'라고 생각하며 나는 혼자 웃었다. 이야기는 좀 다르지만 얼마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국민학교 3학년인 한 계집애 이야기였다. 학교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다 말고 아이는 느닷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을 불려고 분 것이 아니라 입을 오물거리다 저도 모르게 휘파람 소리가 나온 것이다. 선생님은 당연히 야단을 치셔야 했다. 남자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코를 꼭 잡고 비틀었다. 그러나 아프게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의 그 후 행동이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시간만 있으면 휘파람 부는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엄마가 하도 이상해서 "그렇게 휘파람을 불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아이는 생글거리며 "휘파람을 잘 불면 선생님이 또 코를 꼭 잡아줄 것 아냐!" 하더라는 것이다.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의 그 섬세한 감성이 그냥 웃음으로 들어넘 길 수 없게 하는 이야기였다. 뭐라고 할까. 담임선생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어린 마음에 수놓는 그 감정의 무늬가 너무도 예쁘고 귀엽다 못해 측은해지기조차 하던 것이다. 여자란 그렇게 어린 나이때부터 이미 여자로서의 특이하게 섬세한 감성을 타고나는 것인가 싶어 공연히 가슴이 찐해지던 것이다.
여자란 원래 여자에게 가혹하다. 같은 일이라도 상대가 남자일 때에는 애교로 봐주면서도 같은 여성일 때는 용서 없이 비판하고 헐뜯는다. 절대로 관대하지 않다. 한 단체에서 회장을 선출하는데 입후보자는 남녀, 두 사람이었다. 보기엔 여성 입후보자가 유력해 보였다. 유권자 수만도 여성이 우세했다. 그러나 결과는 남성이 되었다. 표를 분석해보니 여성 유권자가 거의 남성 쪽에 투표한 것이었다. 같은 여성인데도 여성에 대해 인색하고 신뢰하지 않은 것이다. 질투도 몇 프로 가산되어 있는 듯했다. 협량하고 소견 좁고 인색하며 시기함이 어찌 여자뿐이랴만 이런 여성들의 고질적 속성들이 결국은 다른 사람 아닌 자신드르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인 것을 좀 알았으면 싶다. 몇 해 전 일본에 갔을 때 어느 출판사에서 홍보용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여성이여, TV를 끄라! 주간지를 덮어라!" 였다. 기발한 포스터의 글귀며 거기 찍힌 지적인 여성의 사진이며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요컨대 여성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남성 못지않은 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TV나 들여다보고 주간지나 뒤적거려서는 안 된다. 제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사실 일하기 싫고 만사 귀찮아 저녁마다 어린이 프로에서, 코미디, 연속극드라마, 뉴스, 논단 등 텔레비전 앞에 턱을 받치고 앉았다가도 그 포스터 생각이 나면 혼자 쑥스러워지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사실 나처럼 게으르고 두서없이 잘 잊어버리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여자로서 다른 여성들에게 요구할 자격이나 권리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렇게 철이 없고 부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여성들에게 당신들만은 그러지 말고 이러이러하라고 당부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바라고 싶은 몇 가지 주문을 한마디로 집약해 말한다면 나는 개미처럼 바지런한 여자가 제일 좋다. 바지런하여 하루 24시간을 48시간쯤으로 늘려 쓰는 만큼의 효과를 거두는 여성이 제일 슬기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새벽이면 자명종소리와 함께 자동인형처럼 발딱 일어나 가족들의 식사며 도시락을 챙기고 라디오의 FM 방송을 들으며 청소와 빨래를 손수 후다닥 해치운 다음 재빨리 화장하고 옷 갈아 입고 모임에 나가는 여자, 시장보기, 꽃꽂이, 서예, 문화강자 등에 바지런히 쫓아 다니는 여자, 모과차,유자차, 포도주, 살구주, 각종 밑반찬 제때 제철에 잘 만드는 여자(내가 절대로 잘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남편에게 가끔 편지로 속마음 열어 호소하는 여자, 남편의 늦은 귀가 시가엔 신경 쓰지 않고 그 시간에 소설 읽고 시 읽고 일기 쓰고 음악 들으며 생각하는 여자, 집안 어딘가에 늘 꽃 한 송이 떨어지지 않게 꽂아놓는 여자, 그리고 나이 오십을 넘어도 아홉 살짜리 계집애의 저 공명판처럼 섬세하게 울리는 감성을 지닌 여자, 나는 그런 여자가 좋다. 단순 소박하고 개미처럼 바지런한 여자, 그런 여자가 좋다.
내가 싫어하는 여자는 다음과 같다. 시들어 보기 흉한 꽃을 며칠씩 그대로 내버려두는 여자, 바늘 실의 준비성 없이 거리에서 튿어진 옷을 빈침으로 꽂고 다니는 여자(나도 가끔 그에 속하는 여자지만), 어깨에 허연 비듬이 떨어져 있는 여자, 긴 손톱에 때가 끼여 있는 여자, 눈썹에 너무 짙은 아이라인, 아이섀도로 얼굴을 가면처럼 만드는 여자, 몇십만 원짜리 옷을 겁도 없이 카드로 척척 사는 여자, 신문 광고란의 바겐세일만을 골라 다니는 여자, 음식점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여자, 대중목욕탕에서 수도 꼭지를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틀어놓고 철철 물을 내버리는 여자. 글세 어떨까, 이런 여성들은? 내 안에도 어쩌면 그같은 속성이 숨어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적지 않은 대목에서 가슴이 뜨끔거리던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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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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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역사 - 조르주 장
제2장 신의 발명품
설형문자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널리 펴져 나가고 있을 때 인근의 이집트와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는 다른 문자체계가 발달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문자를 신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 진흙, 그리고 파피루스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과 이집트학 학자들이 나일 삼각주의 수많은 기념비에 쓰여 있는 상형문자 체계의 비밀을 해독하지 못했다면 이집트 역사는 대부분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설형문자가 딱딱하고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자체계라면 상형문자는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인간의 머리, 새, 동물, 식물, 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적이고 매혹적이며 생동감이 있다. 수메르인과 고대 이집트인은 거의 같은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그림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서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쟁은 아직 가설에 머물러 있으며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집트인은 토트 신이 문자를 발명한 뒤 인간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인의 문자체계를 가리키는 상형문자(hieroglyoph:그리스어 hieros와 gluphien에서 유래한 것으로 hieros는 '신성', gluphien은 '새기다'라는 뜻)는 실제로 '신들의 글자'를 가리켰다. 가장 오래도니 상형문자로 쓴 기록은 B.C.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상형문자가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그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이 문자는 이집트가 로마인의 지배를 받던 서기 390년까지 별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몇 세기 동안 사용 기호가 약 700개에서 5,000개 정도로 늘어났다.
수메르인과 달리 이집트인은 훨씬 더 효율적인 문자체계를 만들어 냈다. 메소포타미아의 원시문자가 유치한 선형에서 서서히 진보하여 정교한 문자체계로 발달했다면 상형문자는 처음부터 진정한 문자체계로 정착했다. 할 수 있다. 상형문자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문자는 거의 완벽하게 구어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문자는 콥트어(3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이집트인이 쓴 고대 이집트의 언어, 콥트 교회의 예배에서는 현재도 사용하고 있음:역주)의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부분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둘째, 구체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도 잘 나타낼 수 있었고, 농업, 의약, 법전, 교육, 종교예배, 전승, 기타 문학 일반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문자의 독창성과 복잡성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따른다. 첫째는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전형적 그림으로 구성된 그림문자이다. 이 문자들을 서로 겹쳐 사용하면 추상적인 개념도 표현할 수있었다. 둘째는 표음문자이다. 같거나 다른 형태의 표음문자가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이집트인이 사용한 레부스 체계는 초기 수메르인이 사용한 것과 유사하다). 셋째는 한정부호이다. 이것은 문맥 속에서 한 기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지적하는 것인지 알려 주는 부호이다.
해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 아름다운 글자꼴
이 그림문자 체계는 정말 신들의 문자였다. 일반적으로 신의 이름이나 파라오(이들 또한 신으로 간주되었다)의 이름이 문자 속에 나타날 때는 그 둘레에 타원형 테두리 장식을 둘렀다. 이렇게 하면 그것의 신성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상형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을 수 있는데, 앞에 놓인 사람이나 새의 머리 방향으로 문장의 방향을 지시했다. 글씨를 읽는 사람들도 같은 방향으로 눈을 굴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늘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기념비나 신전의 벽이 오시리스나 아누비스 같은 중요한 신이나 파라오의 조상 바로 옆에 위치하면 문장의 앞에 놓인 인간이나 새의 얼굴은 그 조상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했다. 이렇게 되면 읽기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어 문장의 해독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상형문자는 또한 밑에서 위로 쓸 수도 있었고 좌우로 1행씩 교대하는 좌우 교대서식으로 쓸 수도 있었다. 이서식은 부스트로페돈(boustrophedon)이라고 하는데, 소가 밭을 갈 때 좌우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에서 유래했다(이 단어는 그리스어 bous와 strephein의 합성어로 앞의 것으 '소', 뒤의 것은 '방향을 바꾸다'라는 뜻:역주).
상형문자는 대단히 매력적인 글자이다. 신전의 벽과 무덤의 내벽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을 칭송하고 있다. 상형문자 자체가 신성한 물건인 양 느껴질 때도 있다. 돌에 새겨 넣었거나 그림으로 표현한 상형문자에는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의 눈에는 아마도 그것이 신의 계시로 만들어진 물건처럼 보였을 것이다. 상형문자는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이었지만 종교의식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설형문자가 담겨 있는 유물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수많은 기념비와 문서들은 고대 이집트에 고도로 발달된 문화가 있었음을 증언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문자의 도움을 빌려 역사를 기록하고, 왕들의 계보를 작성하고, 왕족의 결혼이나 전쟁 따위 중요한 사건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문자와 함께 역사가 태어났고, 문자의 도움을 얻어 비로소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문자체계는 거대량을 기록하고(초기 수메르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법전과 성혼서약을 작성하고, 물품 매매계약을 작성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그것은 또한 문학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 문학은 아주 다양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내용이 풍성하다. 여기에는 도덕적 격언, 신과 왕에게 바치는 찬사, 역사적 사건이나 모험담, 사랑의 노래, 서사시, 우화 등이 포함되어있다. 고대 이집트 문학 가운데 오늘날까지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B.C. 13세기에 존속한 19왕조 시대에 상형문자로 쓰인(사자의 서 Book of the Dead)를 들 수 있다.
[사자의 서 /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언, 마법, 의술, 약전, 요리, 천문, 시간의 측정 등을 다룬 지리책이나 과학책도 만들었는데, 이 책들도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그전에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든 태음력은 B.C. 3000년경에 태양력으로 바뀌어 1년은 365와 1/4일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권위와 특권의 상징이었다. 이집트의 필경사는 물론 서예의 대가였고 따라서 교육의 대가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교육은 곧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암기해야 할 기호의 숫자와 상형문자의 복잡성을 감안할 때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수련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열 살쯤 되었을 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몇 년 배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재능 있는 학생은 어른이 될 때까지 학업을 계속할 수 잇었다.
이집트 스승의 교육방식은 쓰기, 읽기를 통한 암기였다. 학생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소리내어 문자를 읽었다. 그리고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를 반복했는데, 처음에는 필기체인 신관문자로 쓰다가 나중에는 정체인 상형문자로 썼다. 교육수단으로는 체벌이 효과적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래서 이집트 격언에는 이런 말도 있다. "남자아이의 귀는 등에 달려있다. 등을 Eoflalus 말을 잘 듣는다." 아주 둔한 아이는 좁은 방에 가두기도 했다. 필경사는 강력한 사회계층을 형성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기술 때문에 왕만큼 위세가 있었다. 특히 왕이 자기를 신이라고 생각하여 쓰기, 읽기, 산수 등을 배우려 하지 않을 때에는 이들 계급의 위력은 더욱 대단해졌다. 메소포타미아 필경사가 주로 진흙판을 이용한 데 비해 이집트 필경사는 다양한 필기소재를 이용하여 글씨를 썼다. 그들은 돌에 상형문자를 새겨 넣기도 했지만, 훨씬 부드럽고 질이 좋으며 다루기 쉬운 파피루스도 이용했다.
벌써 5,000년 전에 사용된 종이, 펜, 잉크
파피루스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식물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파피루스를 이용하여 밧줄, 매트, 샌들, 돛 따위 많은 일상용품을 만들었으며, 그 섬유질 줄기를 이용하여 종이와 유사한 필기소재를 만들어 글쓰기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들은 파피루스 줄기를 가느다란 조각으로 자르고 이것을 겹쳐 붙인 다음, 이렇게 만든 한 켜 위에 다른 켜를 90도 각도로 덧붙였다. 그런 다음 힘을 주어 건조시키고 다시 닦아 낸 뒤, 전분풀을 이용해 약 20장 정도의 파피루스를 세로로 이어 붙여 3.5~4.5m 또는 7~8m 길이의 두루마리 파피루스 용지를 완성했다. 필경사는 왼손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왼쪽으로밀어내면서 오른손으로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글씨를 적어 넣은 부분을 말아 쥐면서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두루마리가 길기 때문에(가장 긴 것은 39m나 된다)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글씨를 썼다. 두루마리는 무릎사이에 꽃아 넣고 무릎 위에 펼치면서 사용했다. 필기도구로는 용도에 따라 한쪽 끝을 베어내거나 뭉툭하게 부러뜨린 갈대가 사용되었는데 길이는 약 20cm 정도 였다. 걸쭉한 흑색 잉크는 물과 검댕을 이용하여 만들었고접착제를 사용했다. 제목이나 소제목, 장의 시작 부분은 황화제이수은이나 산화납으로 만든 붉은 잉크로 썼다. 한편 이집트 정부는 파피루스의 제조를 독점했다. B.C. 3000년경부터 파피루스는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수출되었고 이집트에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 같은 독점이 가격을 상승시켰으므로 이집트 국내 필경사와 그 제자들은 큰 불만인었다. 그 결과 팔림프세스트(사용된 파피루스에서 글씨를 지워 내고 재생한 파피루스)가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파피루스의 가격이 비쌌음을 방증하는 사실이다.
[기원전 3세기 파피루스 편지]
석회석과 도자기류는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서를 기록할 때만 사용되었다. 일상적인 필요에 따라 보다 빨리 쓸 수 있는 두 가지의 다른 분자가 상형문자 체계에서 발생했다.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를 그리는 것은 상당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한 작없이었다. 이토록 정교한 기호를 이용하여 글씨를 쓴다는 것은 일상생활에는 적절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빨리 해야 하는 일을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필경사들은 보다 빨리 쓸 수 있는 필기체 상형문자를 개발해 냈다. 이것을 신관문자(신관문자: hieratic. 그리스어 hier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성하다'는 뜻)또는 성직문자라고 했는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B.C. 485?~424?)에 따르면 사제들이 처음 이 문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신관문자도 상형문자와 마찬가지로 그림문자, 표음문자, 한정부호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 세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관문자의 기호는 원래의 그림과는 다르게 변모되어 갔다. B.C. 650년경 상형문자와 신관문자가 함께 쓰이고 있을 때 또 다른 문자체계가 등장했다. 연자를 많이 쓰는 이 문자는 훨씬 빠르고 쉽게 쓸 수 있었으며, 신관문자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갔다. 이것을 민중문자라고 하는데 나중에 이집트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신관문자와 민중문자는 모두 상형문자의 변형으로 만자체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역주). 참고로 샹폴리옹이 상형문자를 해독해 내는 계기를 마련해 준 유명한 로제타 스톤에는 같은 내용이 상형문자,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의 3개 문자로 쓰여 있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민중문자만 보고 모자인 상형문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고대 민중문자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학자들은 콥트어 구어를 연구하여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한 구어에 대해 많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콥트어는 민중문자의 일부 기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샹폴리옹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려면 콥트어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신비에 싸여있는 크레타 선문자
B.C. 2000년경에 상형문자는 그 형태가 완성되었고 이집트 문명도 같은 시기에 널리 퍼져 나가 상형문자로 쓰인 유물을 많이 남겼다. 또한 이 시기에 크레타섬과 그리스 본토에서는 학자들에게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던 문자체계가 발달했다. 19세기 중엽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글씨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 기호들은 동석(비눗돌의 일종) 인장의 표면이나 진흙에 새겨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파이스토스 원판에 새겨진 기호들은 문자의 역사상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1906년에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이 대형 원판의 양면에 나선형으로 쓰인 45개의 기호는 현재까지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사용되는 고대 중국의 문자 체계
중국의 문자 체계는 독특하다. B.C. 2000년경에 만들어진 이 문자는 B.C. 1500년경에 기호로 되었고 B.C. 200~A.D.200 년 사이에 체제가 완비되어 오늘날까지 별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상형문자와 설형문자는 여러 세기 전 아라비아문자로 대체된 반면, 중국의 문자는 단 한 번도 그 모습이 바귀지 않았다. 다만 원래 붓과 먹으로 글씨를 썼으나 펜이나 볼펜을 사용한다는 점, 인쇄소의 인쇄기가 타자기에는 웬만한 한자가 모두 들어 있어서 사용하는 데 별 불편이 없으나, 글자가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서예에서 중시하는 내리긋는 획의 호방한 남성적 분위기와 위로 올려칠 때의 가녀린 여성적 분위기를 낼 수 없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도 문자를 신이 내려 준 것이라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한자의 탄생에는 삼황(고대 중국 전설상의 복회씨, 신농씨, 황제 세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 관여했다고 한다. 특히 황제는 B.C. 26세기에 살았던 인물로, 천체와 자연의 생물, 특히 새와 동물의 족적을 연구하여 한자를 만들었다고 전한다(황제는 글자의 제작을 명했고 실제로 작업을 한 것은 사관 창헐 이었다고함:역주).
시인 우웨이예는 "황제가 글자를 만들어 놓고 근심을 한 나머지 밤새 울었다."고 울었는데, 시인의 말대로라면 글자의 발명이 환란 중의 환란이었던 셈이다(시인은 식자우환의 의미로 이렇게 쓴것같음:역주). 한자의 역사를 조명해 줄 더욱 결정적 자료는 1890~1899년 황하의 대홍수 때 발견된 귀갑 과 녹골의 파편들이다. 이 파편들 속에 가장 오래된 한자의 흔적이 들어있는 것이다(여기서 발견된 것이 갑골문자인데 이것이 한자의 원형임:역주). 한자 전문가인 비비안 올턴은 이렇게 말한다. "제사장은 구갑의 한 면에다 질문이 담긴 한자를 쓴다음 그 반대 면을 불에다 들이댄다. 그 불이 귀갑을 갈라 놓으면 그 갈라진 모양에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어낸다." 그들은 귀갑의 균열을 신의 계시라고 믿은 것같다. 질문을 적은 한자는 위에서 아래로 쓰여있었다. 모든 문자체계의 첫걸음이며 중요요소인 그림문자가 한자에서는 아직도 존재한다. 어디서나 문자의 첫 시작은 같은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수메르인, 이집트인, 히타이트인, 크레타인 등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중국인의 경우 문자의 시작은 그림문자였다. 즉, 그림문자를 단독으로 쓰거나 아니면 조합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주 다른 문명권에서 발달했어도, 각 지역의 문자체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일부 그림문자들은 그 형태가 아주 유사하다.
한자는 정교한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아주 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림문자는 급속하게 전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한자에서도 초기의 그림요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한자는 시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여러 기호의 조합인 특정 한자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용'을 가리키는 용 자에 '귀'를 가리키는 이 자를 붙이면 '귀머거리' 농자가 된다. 용의 귀로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니 귀머거리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시적인 표현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자의 진정한 본질은 하나의 소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시' 라는 음소는 '알다' '힘' '세계' '맹세' '가다' '일' '좋아하다' '보다' '보다' '믿다' '가다' '시도하다' '설명하다' '집' 등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들 한자는 다른 부수와 결합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보통 하나의 한자는 기본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부수와 발음을 나타내는 음소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의 서예를 보면 한자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한자를 쓸 때에는 반듯한 네모꼴을 유지해야 하며 사전에 정한 필순에 따라 써야한다. 이처럼 서체의 시각적 효과를 강조했기 때문에 아라비아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한자는 대단히 아름다운 장식적 요소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서예는 중국 미술의 빼놓을 수 없는 한 장르가 되었다. 한자는 중국 구어(중국 구어는 남쪽과 북쪽이 너무 달라 한자를 쓰면서 말하지 않으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보다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하여 중국문화를 하나로 결속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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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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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외젠 들라크루아 1830]
위키백과 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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