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 제5장 장년시절
제5장 장년시절
파르티아 원정
기원전 55년 11월 말,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가, 그리스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이듬해 봄을 기다리지도 않고 시리아에 들어간 크라수스는, 전임 총독인 가비니우스한테서 물려받은 2개 군단과 스스로 편성한 6개 군단을 합하여 모두 8개 구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하지만 보통은 10개 대대가 1개 군단을 이루는데, 크라수스의 1개 군단에는 8개 대대밖에 없었다. 8개 군단의 보병 전력이라면 정원이 4만 8천명일 터인데 3만 8천 명밖에 안되었다. 그것은 국가의 지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총독에게는 속주를 방어하는 임무가 맡겨져 있었고, 속주 방어에 위험이 있다고 간주된 경우에만 외국을 침공할 수 있다. 크라수스가 취임했을 당시, 파르티아 왕국은 로마의 영역을 침범할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 돈으로 병력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자란 자기 주머니 끈을 푸는 데에는 서투른 족속이기도 하다. 크라수스는 자기 주머니 끈을 풀긴 했지만 대담하게 풀지는 않았다. 8개 대대만으로 1개 군단을 편성하고, 마음만 먹으면 10개 군단이나 되는 군사력을 보유할 수도 있었지만 군자금 부족을 이유로 포기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크게 줄어든 주머니를 다시 채우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시리아에 도착한 크라수스가 가장 열심히 매달린 일은 예루살렘신전을 비롯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의 신전에서 보물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저 술라조차도 나중에 변상했는데, 크라수스는 그것조차도 생각지 않고 약탈에만 몰두했다. 재산이 줄어드는 것이 부자에게는 무엇보다도 불쾌할 일이다. 이런 일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훈련은 소홀해졌다. 또한 총사령관의 행동은 자연히 병사들한테도 전염된다. 크라수스의 군단은 곤경도 참고 견디는 전사가 아니라 손쉬운 약탈을 꿈꾸는 사나이들의 집단이 되었다.
크라수스는 시리아에 부임하자마자 기원전 54년에 파르티아를 침공했는데, 이것이 뜻밖에도 간단히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사태를 더한층 악화시켰다. 적이 침공에 대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파르티아 영토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성공의 원인이었지만, 이 싱겁게 얻은 승리 때문에 총사령관도 졸병들도 파르티아인을 얕보게 되었다. 원래 정보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상대를 얕보게 되면, 별로 애쓰지 않아도 들어오는 정보를 모으는 일조차 게을리하게 된다. 카이사르와 같은 호기심을 갖지 않은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파르티아의 현재 상황이나 풍습이 아니라, 3년 전에 왕이 살해된 뒤 후계 문제로 일어난 내분 때문에 파르티아 왕국이 대외 문제에 소극적이 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것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품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배려해준 참모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고 독자들은 생각하겠지만, 군단장은 총사령관이 아니다. 시리아에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발휘해버렸다. 아직 군사훈련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본격적인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 것이다. 카이사르조차도 신병은 수송부대의 호위대 같은 곳에 대치하여 전투에 익숙해지게 하지 처음부터 다짜고짜 전쟁터에 투입하지는 않는다. 크라수스의 경우에는 8개 군단 가운데 6개 군단이 신병이다. 엄격하고 충분한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전력이 되지 않는다. 크라수스의 임기는 아직 4년이나 남아 있었다. 파르티아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원정을 강행하겠다는 것이 크라수스의 결심이었다. 참모들이 모두 모인 작전회의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료는 원정 시기에 관해 찬반 양론이 있었는지 여부는 전해주지 않지만, 원정에 어느길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크라수스가 택한 길에 대해 격렬한 반대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전해주고 있다. 크라수스가 노리는 파르티아의 중요 도시 셀레우키아로 가는 데에는 두 가지 경로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한 뒤 곧장 동쪽으로 나아가 유프라테스 강에 도달한다. 이 강을 따라 티그리스 강 서쪽에 있는 셀레우키아와 같은 위도까지 남동쪽으로 행군한다. 이렇게 하면 행군에 거치적거리기 쉬운 수송부대를 배에 실어 운반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행군한 뒤에는 티그리스 강을 향해 동쪽으로 곧장 사막을 가로지른다. 이 언저리까지 오면 사막지대의 횡단거리는 10킬로미터 남짓밖에 안된다. 이 길은 동방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가는 통상로이기도 했다. 둘째는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자마자 남동쪽을 향해 메소포타미아의 사막지대를 가로지른다. 티그리스 강에 도착한 뒤에는 이 강을 따라 셀레우키아로 간다. 크라수스는 길안내를 맡은 아랍 귀족의 건의를 받아들여, 두 번째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몸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겠다고 말해온 아르메니아 왕과 합류하는 데에는 이 길이 편리하긴 했다. 아르메니아군은 북쪽에서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모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메소포타미아의 사막 지대를 횡단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격론 끝에 결국 총사령관의 의견이 다른 의견을 제압했다. 크라수스는 시리아 속주를 방어하도록 1개 군단을 남겨놓고, 나머지 7개 군단을 모두 이끌고 출정했다. 2만 9천 600명의 중무장 보병, 투석이나 활을 사용하는 경무장 보병 4천, 게다가 크라수스는 전직 집정관답게 수많은 하인과 노예도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이들까지 합하면 통틀어 4만 명에 가까운 전력이었다. 여기서 크라수스가 알지 못한 파르티아 왕국의 상황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동방 무역으로 부를 쌓은 파르티아 왕국은 과거의 페르시아 제국 영토에 육박할 만큼 광대한 땅을 영유하는 대국이 되어 있었다. 서쪽 경계는 유프라테스 강이다. 하지만 유프라테스 강과 지중해 연안 사이에는 시리아의 사막이 가로놓여 있어서 경계가 선을 그은 것처럼 뚜렷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서쪽의 대국 로마와의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북쪽 국경의 3분의 1은 아르메니아 왕국과 접해 있다. 이 아르메니아가 어느 쪽에 붙는지도 항상 문제였지만,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가 잇따라 공세를 편 결과, 기원전 1세기 중엽인 이 무렵에는 아르메니아도 로마의 동맹국이 되어 있었다. 북쪽 국경의 3분의 1은 카스피 해에 면해 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카스피 해 동쪽에 사는 고원 민족과 접해 있었다. 남쪽 경계는 페르시아 만. 그리고 동쪽 경계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문명권에 들어왔지만, 그후 셀주크 왕조의 실정으로 권력이 공백 상태가 되었다. 그 틈에 북쪽의 고원 민족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생긴 것이 바로 파르티아 왕국이다. 오늘날로 치면 이라크와 이란에 해당한다. 서방 문명인 헬레니즘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한 페르시아 문명의 후계자를 자처한 것도 당연하다. 통치제도도 페르시아와 비슷한 절대군주제였다.
나라의 경제 기반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농업과 상공업이다. 상업도 공업도 모두 수준이 높았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상업과 공업은 로마의 '기사계급'(경제인)에 해당하는 이른바 부르주아 계급은 낳지 않았다. 국가는 왕과 귀족층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시민이라는 그리스나 로마식 개념은 전혀 없었다. 이런 종류의 사회제도에서는 당연한 귀결이지만, 군사력도 지배층이 독점했다. 중무장 기병이 주요 전력이고, 그들의 주요 무기는 창이었다. 고원 기마민족의 후예인 만큼 기병 개개인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등자가 없는 시대, 기마민족의 전통을 갖지 않은 기병의 공격력은 어깨와 팔의 힘을 합친 것에 불과하지만, 말의 옆구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는 데 익숙한 경우에는 기사의 어깨와 팔 힘만이 아니라 말 자체의 돌격력까지도 기병의 공격력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르티아에서는 페르시아 시대의 전차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배층이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징집된 서민으로 이루어진 보병이나 경무장 기병(활을 무기로 삼는 경기병)은 전력으로 중시되지 않았다. 이 약점을 찌른 것이야말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성공한 주요 원인이었지만, 대왕의 적 페르시아가 사라지고 파르티악 대신 들어선 뒤에도 중무장 기병을 존중하는 전법을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전제국가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상례라 해도 좋은 후계자 싸움이, 기원전 57년에 프라테스 3세가 암살되자 두 아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싸움에 이겨서 왕위에 오른 것은 형인 오로데스였다. 동생인 미트라테스 왕자는 시리아로 망명했다. 크라수스는 이것을 이용하면 좋았을 것이다. 임기는 5년, 침공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가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망명한 왕자만이 아니다. 광대한 영토를 갖게 되면 당연한 일이지만, 파르티아 왕국도 다 민족 국가였다. 피지배계급으로 만족하고 있는 페르시아인이 있었고, 왕국의 서부 지역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식민정책으로 이주해온 그리스인들이 많았다. 파르티아에 사는 그리스인은 로마의 패권하에 있는 지중해 동부 지역의 동포와 밀접한 통상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파르티아인의 지배에서 로마의 지배 밑으로 들어가는 데에도 별로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양보다는 질로 파르티아 왕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동방의 그리스인 공동체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걸 무시한 것도 크라수스의 실책이었다.
서방의 패권자 로마, 그것도 3대 실력자 가운데 하나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것이 분명해진 단계에서, 이들을 맞아 싸워야 할 파르티아 쪽에는 한 청년 귀족이 있었다. 오리엔트의 귀공자들이 즐기는 것들, 즉 호화로운 궁전, 화려한 옷차림, 미녀들을 모아놓은 하렘, 피지배자에 대한 학대 등을 즐기는 남자였지만,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파르티아 왕궁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역사에서는 그리스식 호칭인 수레나스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는 그는 파르티아에서도 최고의 가문 출신으로, 즉위하는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지위에 있었다. 오로데스가 동생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수레나스의 힘이 컸다고 한다. 갓서른 살이 된 이 청년 귀족이 로마와 파르티아가 처음으로 충돌한 이때 파르티아 쪽의 전략을 담당했다. 우선 오로데스 왕은 파르티아 군대를 거의 다 이끌고 북쪽에 있는 이웃 나라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 군대를 이끌고 로마 쪽에 가담하겠다고 약속한 아르메니아 왕을 자기 나라 안에 못박아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크라수스는 수레나스가 상대한다. 다만 수레나스가 이끄는 병력은 기병 1만에 불과했다. 보명 3만 4천과 기병 4천을 거느린 크라수스에 대해 기병 1만으로 어떻게 싸울 작정이었을까. 수레나스는 파르티아의 전통적 주요 전력인 중무장 기병까지도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는 왕에게 맡겨버렸다. 그에게 남은 병력은 귀족만이 가질 권리가 있는 사병뿐이었다. 사병은 소수의 중무장 기병을 제외하면 활을 무기로 삼는 경기병(경무장 기병)이 대부분이었다. 오리엔트 국가들이 경기병을 전력으로 중시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깨에 짊어진 화살통의 화살을 다 쏘아버리면, 아무 쓸모도 없는 비전투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적은 경기병의 화살이 다 떨어질 때 까지만 버티면 된다. 화살을 다 쏘아버린 경기병은 활 외에 창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맨손으로 말에 올라탄 병사에 불과하다. 수레나스는 이 문제점을 해결했다. 1천 마리의 낙타 등에 화살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동행시킨 것이다. 화살통의 화살이 다 떨어지면 낙타한테 달려가 다른 화살통을 집어들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다. 이것을 되풀이하면 종래처럼 경기병이 금방 비전투원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경기병이 중시되지 않은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경기병의 활은 말 위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고정하여 사용하는 석궁에 비해 무게가 가벼울 수밖에 없는데, 무게를 가볍게 하면 사정거리가 짧아지고 꽂히는 힘도 약해진다. 로마군 병사들이 사용하는 견고한 타원형 방패에 맞으면 튀어나올 뿐이다.
파르티아의 귀공자는 이 결점도 개선했다. 보통 활과 크기도 같고 무게도 별로 다르지 않지만, 석궁으로 쏜 화살의 공격력에 더 가깝도록 개량한 것이다 개량법은 간단했다. 활의 구부러진 부분을 하나가 아니라 둘로 하고, 쇠붙이를 붙여 활시위를 강하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간단한 개량으로 파르티아 경기병이 쏘는 화살의 사정거리는 세 배로 늘어났다. 중무장 기병에 비하면 경무장 기병의 사회적 지위는 낮다. 파르티아 제일의 명문 귀족이지만 나이가 젊은 수레나스는 중무장 기병보다 경무장 기병을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1만기의 경무장 기병대를 거느리고 크라수스를 기다렸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자마자 벌써 난관에 부닥쳤다. 우선 희망을 걸고 있었던 아르메니아 왕이 참전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해왔다. 자국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참전할 수 없다고 말하면, 로마군 총사령관도 참전을 강요할 수 없다. 이어서 길안내를 맡은 아랍 귀족이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아르메니아가 참전하지 않는 것을 알고 로마군의 앞길에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일설에 따르면 그 아랍인은 로마군을 사막지대로 유인하는 임무를 띤 첩자였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부터 불안한 요소가 많은 진격이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가로놓인 사막지대를 횡단하는 것도 상책이 아니었다. 아르메니아군과 합류할 가망이 사라졌을 때, 첫 번째 길로 되돌아가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던 길을 조금만 되짚어가서, 유프라테스 강을 떠나지 않고 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사막지대에 발을 들여놓은 크라수스의 머릿속에는 그 사막을 빨리 횡단할 생각밖에 없었다. 행군은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중동지방의 5월은 지중해 세계의 5월과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크라수스는 유프라테스 강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에게 단 며칠의 휴식도 주지 않았다. 강렬한 햇빛을 가려주는 것도 없는 건조지대를 40킬로그램이나 되는 짐을 짊어지고 행군하는 것이다. 훈련도 충분히 받지 않은 병사들은 규율도 흐트러지기 쉽다. 모래와 더위와 갈증은 자제력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더욱더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오늘날의 이라크에 있는 셀레우키아로 갈 계제가 아니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300킬로미터도 채 가기 전에 벌써 적군이 모래언덕 위로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의 국경으로 따지면 아직 시리아 국내에 있고 이라크로는 들어가지 않은 지점이었다. 여기서 행군을 저지당했으니까 적국 영토로 너무 깊이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변명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적의 출현을 목격한 크라수스는 당장 진형을 폈다. 좌익에는 회계감사관 카시우스가 이끄는 기병 2천, 중앙에는 구단장 옥타비우스가 이끄는 보병, 우익에는 아들 크라수스가 이끄는 갈리아 기병 1천을 주력으로 한 2천 기가 포진했다. 하지만 중앙의 보병대가 얇게 옆으로 퍼져 있는 것이 총지휘를 맡은 크라수스의 마음에 걸렸다. 적의 중무장 기병(그는 아직 적군이 경무장 기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에게 돌파당할 것을 염려한 크라수스는 측면 공격에도 잘 견딜 수 있도록 직사각형의 진형을 정사각형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사막은 평지가 아니다. 모래언덕으로 기복이 많다. 이런 지형에서는 정사각형 진형이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 기복이 많은 지형에서 진을 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왔을 때에는 아직 포진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사막에서는 말발굽이 일으키는 모래먼지 때문에 적군이 실제보다 많아 보인다. 게다가 적군 기병의 원형 방패를 덮은 금속면에 강렬한 햇빛이 반사되어 적군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파르티아 병사들을 점점 불안하게 만드는 가운데, 로마군은 오리엔트 군사력의 주력으로 알려진 중무장 기병의 공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공격해온 것은 로마인의 예상과는 다른 적군이었다. 수레나스는 로마군이 전개한 진형을 보자마자 어떤 공겨으로도 로마군의 정사각형 포진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경기병에게 공격명령을 내렸지만, 그것은 공격으로 적진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격으로 적을 유인하여 적군 스스로 진형을 무너뜨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로마군에서 궁병은 경무장 보병에 속한다. 주력부대가 아니라 전투 초기에 화살을 쏘아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사정거리도 기껏해야 50미터에 불과하다. 그런데 파르티아 기병의 화살은 그 세 배나 되는 사정거리를 갖고 있었다. 아군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적군은 정확하게 화살을 쏘아온다. 게다가 로마군 병사들은 잠시만 참으면 적군 궁병의 화살이 다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화살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화살은 끊임없이 비오듯 쏟아지고, 영문을 모르는 로마 병사들은 불안해졌다. 이 끝없는 화살과 불안이 로마군의 견고한 정사각형 진형을 여기저기서 무너뜨렸다. 이렇게 되자 전투의 주도권은 완전히 파르티아 쪽으로 넘어갔다. 파르티아 경기병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군과 떨어져 싸우고, 게다가 활이 무기이기 때문에 떨어져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은 사막을 종횡으로 질주하며, 한데 뭉쳐서 방어하는 로마군 병사들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렸다. 양떼 주위를 달리면서 양을 한 마리씩 죽이는 것과 비슷했다. 또는 활쏘기 연습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수레나스의 고안으로 개량된 활은 돌파력도 강했다. 로마군의 방패마저 꿰뚫을 정도니까 갑옷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훈련 부족이 이에 따른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수레나스 병법 앞에서는 보병보다 기동력이 훨씬 뛰어난 기병조차도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무기는 창과 칼이다. 접근하지 않는 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적군은 화살을 비오듯 퍼부어 로마군 기병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군의 기병 4천 기도 방어에만 급급한 보병과 다름없는 고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군이 오리엔트 군대와 싸운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제쳐놓더라도, 폰토스 왕 미트라다테스에게 두 번이나 대승한 술라가 있고, 수적으로 10배나 우세한 아르메니아 군대에도 완승을 거둔 루쿨루스가 있었다. 특히 마르메니아의 전술과 파르티아인의 전술은 아주 비슷했다.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을 때 승부를 가르는 것은 총사령관의 임기응변이다. 그런데 크라수스는 이때도 정석대로의 전술을 답습했을 뿐 거기에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우익을 지키는 아들에게 기병 2천 기를 모두 이끌고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상황을 타개하려면 공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공격명령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카시우스가 이끄는 기병대에도 동시에 공격명령을 내려야 옳다. 그러면 보병만 남게 되기 때문에 그럴수 없다면, 하다못해 아들 크라수스한테는 아군이 숨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적군 경기병의 공격을 방해하는 임무만 부여하고, 그 이상깊이 추격하는 것은 강력하게 금지했어야 한다. 카이사르는 기병대가 패주하는 적을 너무 깊이 추격하다가 고립되는 것을 집요하게 피했다. 그런데 총사령관의 아들 크라수스는 추격을 자제하기에는 너무 젊었고, 게다가 파르티아군의 예기치 못한 전술에 우롱당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파르티아의 귀공자는 로마의 젊은 장군의 2천 기와 함께 공세로 나온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휘하의 모든 기병에게 후퇴명령을 내렸다. 퇴각으로 위장한 후퇴는 교묘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깊이 추격한 청년 크라수스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되돌아가려 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거리까지 유인되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파르티아군 기병 1만기가 로마군 기병 2천 기를 포위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아랑곳 하지 않고 돌격하는 갈리아의 정예 기병도 수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나누어준 갈리아 기병의 모두 전사했다. 청년 크라수스는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모래언덕 너머로 간신히 피신했지만, 포위망을 돌파할 가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 채로 붙잡히는 것을 두려워한 젊은 장군은 자결을 선택했다. 부하 장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남은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두 포로가 되었다. 파르티아 기병의 총퇴각으로 한숨 돌린 로마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전사자를 치우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그것도 일단 끝나, 로마군이 진형을 정비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 적군이 무언가를 던져왔다. 그것은 젊은 크라수스의 목이었다.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 로마군 속에서, 총사령관 크라수스는 그제야 비로소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주요 원인인 불굴의 정신에 눈을 떴다. 총사령관 말에서 내려 병사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큰 소리로 호소했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인 나의 불행이니까, 너희들이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된다. 로마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생각해야 할 일이라고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와 같은 인품도 호소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카이사르라면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그 특유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기만 하면 병사들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다. 병사들은 지휘관의 얼굴을 보면서 싸운다. 아무리 큰 소리로 호소해도, 효과는 호소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크라수스의 군대는 총사령관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혼란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로마의 명예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적과 맞선 장병들도 적지 않았지만, 분산된 상태에서의 고군분투로는 현상을 타개할 수 없었다. 전투라기보다 일방적으로 전사자의 수를 늘렸을 뿐이다. 밤의 장막이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을 때에야 일방적인 살육도 마침내 끝났다. 오리엔트 병사들은 밤에는 절대로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 파르티아 기병대도 모래언덕 저편으로 물러났다. 로마군도 이제 드디어 선후책을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로마군의 혼란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크라수스는 막사에 틀어박혀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기만 했다. 옥타비우스와 카시우스는 총사령관을 위로하며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밖에서는 부하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백인대장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훈령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대대장들은 총사령관의 막사에서 나온 두 참모를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서 야영하고 있는 적군을 야습했다면, 군사적으로는 효과가 적다 해도 심리적인 효과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도박 같은 작전은 총사령관의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다. 결국 옥타비우스와 카시우스는 고개만 끄덕인 크라수스의 승인을 얻어, 야습은커녕 한밤중의 퇴각을 명령했다.
앞다투어 달아나는 혼란 속에서 로마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사자를 매장하지도 않고, 4천 명이나 되는 부상자도 내버려둔 채 패주한 것이다. 목적지는 현재 위치보다 조금 북쪽에 있는 카레(오늘날 터키의 하란)였다. 오래 전에 파르티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의 도시다. 크라수스는 이곳에 소규모지만 로마군 수비대를 남겨놓고 있었다. 무질서한 패주는 사막에 태양이 뜬 뒤에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카레로 도망쳐 들어가기 전에 추격해온 파르티아 기병대에 꼬리를 잘리듯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래도 카레로 피신할 수 있었던 병사는 1만 명이 넘었다. 1만여 명의 병력은 2개 군단에 해당한다. 버티려고 마음먹으면 버틸 수도 있는 병력이었다. 하지만 카레의 주민인 그리스인들이 군량제공에 소극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이국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상황변화에 민감하다 해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카레에 틀어박혀 저항하기도 어려워진 로마군은 5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시나카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도시가 농성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우스는 5천 명을 이끌고 떠났다. 크라수스도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뒤따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크라수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카시우스가 이탈했다. 기병 500기를 데리고 북쪽이 아니라 서쪽의 안티오키아를 향해 달아나버린 것이다. 옥타비우스가 이끄는 5천 명은 시나카 성에 들어갔지만, 크라수스가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다. 카시우스의 이탈이 다른 병사들한테가지 전염되어, 총사령관을 따라가는 병사가 갈수록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병 500기를 이끌고 탈주한 카이우스와는 달리, 보병의 탈주는 적을 이롭게 했을 뿐이다.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진 자는 포로가 되었다.
기원전 53년 6월 12일, 크라수스와 수레나스가 처음 대결한 지 사흘째에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참모장 옥타비우스는 5천명의 병사돠 함께 시나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사령관 크라수스는 3천 명으로 줄어든 나머지 병사와 함께 겨우 시나카에 접근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수레나스가 나타났다. 1만 기에 달하는 적의 기병을 보고 크라수스는 가까운 언덕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적은 당장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수레나스는 로마군 총사령관을 생포할 속셈이었다. 그는 로마군과의 싸움에서는 이미 이겼다고 판단했다. 승리를 완벽하게 장식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 바로 로마군 총사령관을 산 채로 붙잡아 왕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파르티아 기병대는 크라수스가 틀어박혀 있는 언덕을 포위했다. 하지만 생포할 속셈으로 공격하는 것과 죽일 작정으로 공격하는 것은 공격하는 방법이 다르다. 옥타비우스가 보낸 원군 덕분에 로마군의 반격이 처음으로 성공했다. 파르티아 기병대의 공세를 처음으로 물리친 것이다. 수레나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포로로 잡은 로마 병사 몇 명을 풀어주면서, 수레나스의 목적은 로마군 총사령관을 생포하는 것이고, 만약 그를 수레나스에게 넘겨주면 로마 병사들은 모두 자유가 될 거라고 전우들에게 전하게 했다. 로마군 병사들 사이에 이 말이 퍼졌을 때쯤, 수레나스는 로마군 총사령관에게 강화를 제의하면서, 강화 조건을 의논하기 위해 직접 만나 회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제의의 참뜻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크라수스도 물론 눈치챘다. 그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이 그를 둘러싸며 회담에 나가라고 요구했다. 크라수스는 만약 자기가 죽더라도 그것은 적의 속임수 때문이지 아군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전해달라는 말을 참모들에게 남기고, 진영을 떠나 혼자 적을 향해 걸어갔다. 옥타비우스는 총사령관을 혼자 보낼 마음이 나지 않아서, 장교들을 데리고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일단은 로마의 전직 집정관에게 어울리는 일행이 되었다. 수레나스는 크라수스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는 우선 걸어오는 로마군 총사령관을 말 위에 앉은 채 맞이한 자신의 결례를 격조 높은 그리스어로 사과했다. 그리고는 이런 자리에서는 강화를 교섭하거나 조인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강가에 따로 장소를 마련해두었으니까 거기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말한 다음, 마부를 시켜 말을 끌고 오게 했다. 말이 한 마리뿐인 것을 보고, 옥타비우스는 자신의 염려가 옳았음을 확인했다. 참모장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마부를 찔러 죽였다. 로마군 장교들도 이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양쪽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규모 충돌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로마 쪽은 장교들만 싸움에 가담했다. 크라수스도 옥타비우스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병사의 칼이나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로마 군단병의 글리디우스 검-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도입한 이래 로마군의 정식 칼이 된 짤막한 양날 검-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아마 옥타비우스나 참모 가운데 누군가가 로마군 총사령관이 포로가 되는 것을 막고 싶어서 그를 찔렀을 것이다. 지휘관을 잃어버린 로마군은 도주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삼두정치'의 일원이고 로마 제일의 부호이며 로마 경제계의 대표격이었던 크라수스는 이렇게 해서 61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머리와 오른팔은 잘려서 파르티아 왕에게 바쳐졌다. 파르티아인들은 살찐 크라수스와 비슷한 체격의 포로를 골라 여자로 분장시켜 끌고 다니면서 조롱을 퍼부었다.
4만 명에 달했던 크라수스의 원정군 가운데, 카시우스와 함께 이탈한 기병 500기를 비롯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달아나 목숨을 건진 사람은 1만 명이 채 안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사람은 1만여 명. 이 1만여 명의 병사들은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모두 파르티아 왕국의 북동부 끝에 있는 방어기지 메르프로 보내져 그곳에서 평생 동안 병역에 종사해야 했다. 메르프는 오늘날의 이란에도 속하지 않을 만큼 북쪽에 있다. 옛 소련의 투르크멘 공화국에 있는 마리가 바로 옛날의 메르프다. 이것은 유형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전사자는 2만 명에 이르렀다는 계산인데, 단 며칠 동안의 전쟁에서 로마는 7개 군단이나 되는 병력을 총사령관과 군단장. 대대장. 백인대장 및 은독수리의 군단기와 함께 몽땅 잃어버린 셈이다. 로마인들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패배는 로마 공화정 700년 역사속에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기원전 390년에 켈트인(로마인들의 호칭으로는 갈리아인)에게 일시적이나마 수도 로마를 점령당한 쓰라린 경험. 두 번째는 기원전 321년의 '카우디움의 굴욕'. 삼니움족에게 패한 로마군이 무장을 해제당하고 적병들의 꼬나쥔 창 사이를 지나간 끝에 겨우 휴전하는 불명예를 맛보았을 때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기원전 216년에 칸나에 회전에서 한니발에게 당한 완패의 경험이다. 이때 로마군은 7만 명의 병력을 잃고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갈리아인에 대해서는 그후 로마가 잇따른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그때의 굴욕은 이제 잊어도 좋은 상태가 되었다. '카우디움의 굴욕'은 불명예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했지만, 결국 삼니움족도 로마에 흡수되었다. 칸나에의 패배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한니발에게 승리한 자마 회전으로 설욕했다. '카레의 패도'도 로마인의 기질로 보면 언젠가는 설욕해야 마땅하지만, 그것이 알려진 기원전 53년 가을에 로마는 그럴 계제가 아니었다. 설욕전을 펼 만한 힘을 가진 두 인물은 각각 수도 로마와 갈리아에서 발을 뺄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설욕은 단순히 기분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파르티아가 로마에 이긴 것은 오리엔트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지금까지 로마 편이었던 아르메니아 왕국이 파르티아 쪽으로 돌아섰다. 또한 기세가 오른 파르티아군은 로마 속주인 시리아를 공격해왔다. 쓸 만한 병사를 모두 긁어 모아 방어에 힘쓴 카시우스의 노력으로 파르티아군의 침공은 저지되었지만, 그것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패잔병이 잘 싸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파르티아 쪽에 수레나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셀레우키아로 개선하여 한창 의기양양해 있던 수레나스는 축하연에서 마신 술도 채 깨기 전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의 명성이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한 오로데스 왕이 사고를 위장하여 죽여버린 것이다. 경기병을 전력화한 젊은 장군은 이라하여 30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파르티아인들은 낙타와 경기병을 짜맞춘 독창적이고 효율적인 전술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창안한 사람이 죽으면 그가 창안한 것까지 잊어버리는 것은 외엔트의 결함이다. 옥시덴트(서방)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그가 이룩한 일은 계속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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