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사치하고 망하지 않은 사람 없다고 책망한 김용겸
김용겸(1702~1789)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제대, 호는 교교재다. 예에 밝아 매번 사대부 자제의 관례 때 갓을 씌워 주며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경계하는 빈의 자격으로 초대되어 의식을 진행하면서 사소한 실수도 없었다. 언젠가 이우당 조태채 사손의 관례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 물건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을 보고는 그만 그 집에서 나오자, 그 집 주인이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김용겸이 이렇게 꾸짖었다.
"사치하고 안 망한 사람은 없으니 나는 이런 관례 의식에 참여하고 싶지 않소."
주인이 무릎을 끊고 무수히 사죄한 뒤 즉시 꾸밈없이 검소하게 바꾸니, 김용겸이 그제야 의식을 진행하며 거듭 경계하고 돌아왔다.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자에게 좌우명이 될 시를 지어 경계한 정종로
정종로(?~?)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사앙, 호는 입재다. 우복 정경세의 사손으로 집안에 전해오는 학업을 잘 계승하여 상주 우상의 옛집에서 경서를 강론하니, 영남의 선비들이 그를 따라 배운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그가 제자 최상룡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천리 길 멀다 않고 찾아온 자네가 가련한데 석실에서 얼마 동안이나 글을 읽었던가 약석은 준걸들이 뒤끓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젊었을 때 재덕을 고상하게 닦아야 하네 학문은 세밀하게 철저히 하며 일 처리는 나무 다리를 건너듯 조심해야 하네 다시 소강절처럼 운명을 추산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초어편에 화답해도 무방하다네
역시 젊은 선비들을 경계하는 채찍이 되어 두고두고 암송할 만하다.
술과 시를 즐기며 경치 좋은 곳에서 숨어 산 이양연
이양연(1771~1853)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진숙, 호는 임연 또는 산운이다. 여덟 살 때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동그라미 속에 네모를 그리고 그 네모 안에 '인'자를 썼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삼재를 상징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장성해서는 성리에 대한 학설을 강론하여 밝히니, 홍석주가 그를 충청도 도사로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며, 헌종조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술을 마시고 시 짓기를 즐겼으며 풍광이 뛰어난 곳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당나라 때의 학자 부혁이 자신을 '높은 산의 구름이 끼는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한 것을 모방하였으므로, 고향에서는 그를 산운으로 불렀다. 어느 날 율곡 선생의 문집을 읽다가 어슴푸레 깨닫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지향하는 도가 여기 있다."
이어서 송나라 때 이연평이 세상과 단절하고 풀로 지은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은둔 생활했던 일을 자신의 공부하는 목표로 삼고, 마침내 온돌을 없애고 이불을 덮지 않으며 배고프면 솔잎을 씹고, 입으로 글을 외고 손으로는 글을 베끼기를 병이 들거나 먼 길을 갈 때도 중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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