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신념을 의지로 실천한 참된 지식인 - 김시습
김시습은 유,불,선이라는 동양3대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가이자 타고난 천재성을 통한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기인이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룰 길이 없는 포부와 역량을 한탄하며 시대의 고아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꿈꾼 이상세계를 작품을 통해 승화시킨 고귀한 예술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반항하고 비판과 야유를 넘어 일종의 허무의식까지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이미 이루어진 현상을 또 다른 폭력으로 무너뜨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타도하려고도 하지 않은 중용적인 태도를 견지한 셈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자신의 일생을 한정 지어 버렸다 한다.
"모습은 지극히 약하고 말 또한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으로 너를 버릴지어다."
마치 자신의 삶을 예언한 말 같지만 차라리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차원에서 그는 표리부동한 인간사에서 신의를 지키며 일생의 시종을 일관되게 산 참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상체계의 핵심은 인간 의지에 기초한 현실적 실천주의라고 생각된다.
그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배격하고 스스로 땀 흘려 일하며 살아가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였으며, 백성의 행복과 평안한 삶이 무엇보다도 우선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언제나 강조하였다. 그러한 견지에서 보면 그는 철저한 민본주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신념과 의지를 현실에서도 실천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 체계는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주기 이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의지론적 실천 철학은 서경덕과 이율곡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으며 화려하고 독특한 조선 성리학의 당당한 한 줄기가 되었다.
총명하였지만 불행한 소년
김시습은 세종 17년(1435년)에 한성에서 충순위 김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이며 호는 매월당이다. 야사에 전해지기로 그가 태어나기 전날 밤 그의 사저 근처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이 똑같이 그의 집에서 공자가 출생하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그가 태어나서 장차 귀한 인물이 될 징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웃에 살던 경호 최치운이 논어에 나오는 말을 따서 배우면 곧 익힌다는 뜻으로 시습이라고 짓기를 권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러한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그는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고, 3살 때에는 이미 시를 지었으며, 소학 등의 책도 읽어 그 뜻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태어나면서 글을 알았던 생이 지지의 사람이었다. 5살 때에 수찬 이계전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공부하면서 그의 천재성이 장안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허조라는 정승이 어린 김시습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해 진위를 확인해 보고자 그의 집을 찾아갔다. 김시습을 만남 허주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 네가 글을 아주 잘 짓는다 하던데 이 늙은이를 위해 늙을 노자를 넣어 시를 한 구만 지어 주겠느냐?"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즉석에서 이렇게 시를 지었다.
"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도다."
허조는 과연 신동이라고 감탄하여 돌아갔고 이 소문이 급기야 대궐에까지 전해져서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은 지신사 박이창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박이창은 대궐로 불려온 어린 김시습의 능력을 여러 방명으로 시험해 본 결과 어느 곳 하나 그 나이의 아이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막힘이 없자 시중의 소문이 틀림없음을 왕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가상하게 생각하여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도록 지시하면서 김시습이 그 많은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려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분부했다. 이에 어린 시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각 필의 끝을 서로 묶은 다음 그 한쪽 끝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과연 신동이 났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계전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익힌 그는, 이어서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김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다가 별동 윤상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불과 10여 세에 벌써 익히지 못한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훌륭한 스승 아래에서 학업에만 열중하던 그에게 액운이 거듭 닥치기 시작했다. 15살에 어머니 장씨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 몸을 의탁하였으나, 3년이 못 되어 믿고 의지하던 외할머니마저 별세하자 다시 본가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있어 오히려 그에게 짐만 될 뿐이었다. 이러한 가정적인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학문에 몰두한 그는 가정 생활에 취미를 잃고 아예 삼각산으로 입산하여 수학의 길을 떠나 버렸다. 그 후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에만 전념하던 그에게 엄청난 소식이 전하여졌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통분을 금할 길이 없어서 꼬박 사흘 동안 망연자실하여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는 자기가 공부하던 모든 책을 모아 불태우고는 머리마저 잘라버리고 산을 내려와 세상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1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분노와 회한의 방랑 생활
아무 계획 없이 방랑 길에 나선 김시습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그의 명성이 높았던지라 어디를 가더라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더구나 자연의 섭리 그대로 꽃피고 낙엽 지는 산천경계를 호흡하니 속박되지 않은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하였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 지식인의 회한을 지울 수가 없었다. 관서지방으로 방랑의 길을 정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울적한 심정을 시를 짓는 것으로 달래면서 각지를 유랑하며 다녔다. 이렇게 관서지방을 3년여에 걸쳐서 돌아본 그는 24살 되던 해인 세조 4년(1458년)에 탕유관서록을 쓰고 나서 관동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관동지방의 유랑을 마쳤던 26살 때에도 탕유관동록을 정리한 후 이번에는 삼남지방으로 정처없는 나그네길을 다시 떠났다.
29살이 되던 해에 삼남 지방의 유랑을 끝낸 그는 역시 탕유호남록을 짓고 문득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9년 동안의 방랑생활 동안 어느덧 가슴속의 회한은 희미해져 있었다. 유랑생활 동안 몸이 많이 수척해졌지만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책을 구하기 위해 세조 9년(1463년)에 한성으로 들어갔다. 실로 오랜만에 한성에 들른 그는 자신을 아껴주던 효령대군을 만나게 되었다. 세조의 큰아버지인 효령대군은 그때 일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살고 있었다. 효령대군은 김시습의 재능을 아까워해서 조카인 세조에게 적극 추천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그 당시 진행 중이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하였지만 공신 일색이던 조정 중신들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시 세상사가 역겨워져 경주에 있는 금오산에 내려가 칩거해 버렸다.
그 후 세조 11년(1465년)3월에 원각사 낙성식에 참가해 달라는 효령대군의 요청을 받고 다시 한성에 올라와서 원각사찬시까지 지어 주었지만 효령대군과 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금오산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그곳에서 그는 속세와 완전히 단절하고 6,7년을 살면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산거백영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썼다. 그러는 동안 세월도 흘러 세조와 예종이 연이어 죽고 어느덧 성종이 등극하여 있었다. 그가 37살 되던 성종 4년(1471년)에 또다시 효령대군의 청에 의해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20여 년 가까이 세상과 겉돌던 그로서는 번잡하고 이해에 얽힌 한성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 성동에 폭천정사를 세우고 이름 없는 민초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40고개를 들어서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천재의 한은 분노와 역겨움으로 인하여 세상을 야유하는 심정만이 가득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은 다분히 저항적이며 현실을 야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당시의 고관대작들이 그에 의해 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영의정 정창손과 달성군 서거정까지 그에게 질타를 받았지만 그들은 미친개에게 당한 정도로 여기고 크게 노여워하지도않았다. 그들도 김시습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터라 천재의 한을 일면으로 이해해 주었으며 망나니 같이 구는 그를 맞상대해 보았자 오히려 그들의 덕만 훼손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시습은 젊어서 많은 도움을 받아 고맙게 생각해 오던 신숙주도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증오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던 신숙주가 한번은 술취한 그를 자기 집에 재웠지만 깨고 나서는 몹쓸 일을 당했다는 표정으로 대꾸도 없이 그 집을 나오기도 하였다.
한번은 서강을 지나다가 강변 정자 벽에 한명회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젊어서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
그런데, 이 글을 본 김시습은 실소와 분통을 터뜨리고는 부자를 망자로, 와자를 오자로 고쳐 놓았다. 이렇게 두 글자를 고쳐 버리니 시의 뜻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 이러한 기인 같은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 시절 그는 책을 읽다가도 의분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기도 하였고, 시를 지어서는 마구 던져 버리기가 일쑤였다. 바른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혼이 나간 듯 살아가는 것이 그 당시 그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그는 이미 세상에서는 완전히 유리되어 불안정한 심신으로 10여 년을 보냈다.
환소, 또다시 방랑과 죽음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야유하며 살아가던 김시습은 47살이 되던 성종12년(1481년)어느 날부터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예상치 않은 그의 또 한번의 변신은 기인 같은 그의 일생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며서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이 그를 세상에 다시 나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먼저 조상에게 제문을 지어 올리고 그 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빌었다. 그러고는 안씨 부인을 맞아 가정을 다시 꾸미고 완전히 환속하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가정생활도 얼마 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끝나 버렸고, 성종13년(1482년)에 중전에서 폐출된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지는 것을 보고는 세상 만사가 허무하고 혐오스러워져서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특별한 교의가 있었던 유자한이 부사로 재직하는 양양으로 길을 잡고 떠났다. 그러나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그는 거기에도 얼마 있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 관동 각지방을 발 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머무는 곳마다 지방 청년들을 모아 가르치며 도학을 설파하기도 하였지만 현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었고 표리부동한 세상 인심을 비웃으며 살았다. 그는 20대 이후 평생을 바람처럼 떠돌면서도 오랫동안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밭을 개간하는 등 손수 일을 하며 지냈다. 스스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을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도 반드시 밭일을 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여전히 추악하고 가증스럽기만 하여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총명함과 열정적인 학문에의 꿈도 모두 묻어 버린 채 세상의 영원한 국외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세월이 회한을 씻어가기도 하였지만 가슴속까지 시려오는 외로움만은 견딜 길 없어 말년에는 병들고 지친 몸으로 충청도 홍산에 있는 무량사라는 한적한 절로 찾아들었다. 그는 젊어서 머리를 깍고 중처럼 살았지만 불교에 완전히 귀의했다기보다는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세조의 찬역에 저항하는 뜻으로 그러한 행동을 했었다. 그러나 불가의 정신을 통해 젊은 날의 허무를 달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길을 부처에게 의탁하고 싶었던지 병든 몸을 이끌고 한적한 산사로 찾아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성종 24년(1493년)에 59살을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말년의 10년 동안을 또다시 방랑생활로 보낸 끝에 최후를 낯선 사람들 품에서 맞이하였던 것이다.
죽을 때 그는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관곽을 무량사 근처에 안치했다가 3년 후에 장사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모습처럼 안온하였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스님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그의 시체를 화장하고 사리를 보관하는 돌탑을 세워 그 뼈를 거두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렀으며,10대에는 자신의 존재조차 몰각할 정도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20대에는 세상을 한탄하여 천하를 주유하였으며, 3,40대에는 잠시 세상에 돌아오기도 하였으나 현실을 비판하며 사색과 수도에 정진하다가, 50대에 이르러 초연히 속박의 허울을 벗고 자연으로 돌아간 고독한 지식인이었다.
김시습의 사상적 근저
김시습은 이색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음양에 의해 설명하는 태극설을 주장했다. 즉, 우주만물이 조화하는 근원을 태극이라 상정하고, 사물의 현상을 포괄하고 귀속시키는 음양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양에 의해 사물의 사상과 팔괘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오행에 희하여 만물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음양은 결국 하나의 본질을 양면으로 바라본 이원론적인 관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만물의 근원이자 우주의 본체인 태극이라는 것을 그 존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는 도가적인 사유가 게재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태극은 만물의 근원적 이치로서 변할 수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태초부터 영원까지 바뀌지 않는 가치였다. 그가 세조의 왕권 찬탈에 저항하여 현실과 타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세조는 인간의 도리를 말살한 존재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태극에서 음양으로 이행되는 이유는 태극의 동정에 의한 것으로 보고 여기에서 만물의 생성, 변화, 소멸이 연유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우주 천지가 하나의 태극이지만 만물 모두에도 태극이 깃들여 있으므로 하늘, 땅, 사람의 3재가 서로 상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후 천인상감설의 기초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도 천상이나 삼신산 같은 선경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도가 사상의 일면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는 잘못된 현실에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사육신처럼 생명을 걸고 투쟁적으로 항거하지도 않았다. 다만, 당시 권력층의 요청을 완강히 거절하고 세상을 버린 채 유리 방랑하여 세속적 관점에서는 비참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적응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싸우지도 않으면서 자학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는 금오신화의 주인공을 통해 대신 답변을 보냈다. 금오신화에는 만복사 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5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질곡 같은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서 인습의 굴레까지 던져버리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생의 세계로 나래를 펴고 들어갔다. 실로 그의 삶의 자세를 대변한 것이고 번민과 고통 속에 그가 결정한 또 다른 선택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포기하고 내동댕이친 것으로 비쳐지지만,그로서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명으로 이생규장전의 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자. 이 작품은 단순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보면 2가지 상반된 주제로 대비되어 있다. 전반부의 내용은 아내가 도적에게 비명에 죽게 되어 사랑이 타의에 의해 파괴된 것을 묘사하였으며, 후반부에서는 환생한 아내와 3년간 다시 꿈 같은 세월을 보냈지만 그 아내와 다시 이별하자 그 길로 병들어 죽고 만다는 내용이다. 전반부의 주제는 타의에 의해 비롯된 비극을 그려서 말 그대로 결과로서의 비참함이었지만, 후반부의 주제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된 비참함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보면 똑 같은 비극적 결말로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주어진 것과 선택된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그의 메시지였다. 살아있는 줄 알았던 아내가 사실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이 더 큰 고통이었지만, 그 결말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김시습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비참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그 길을 찾아가는 삶의 방식도 있다는 것이었다. 공자가 일찍이 논어에서 설파한 대로 슬퍼하되 상처받지 않아야 하고 즐거워하되 음탕해서는 안된다. 는 중용의 삶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의지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는 한 가지 사례가 있다. 30대 후반에 상경하여 성동 땅에서 농사 짓고 살던 때의 일이다. 그가 경작하던 전답을 어떤 권력있는 자의 끄나풀이 빼앗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모른 체하고 상대방이 농사를 다 짓도록 방관하고 있다가 추수할 무렵이 되어 갑자기 찾아가 자기 땅을 내놓으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상대방이 이에 응할 리 없자 그 일은 송사로 발전되었다. 그 결과는 정당하기도 하지만 논리 정연한 그의 승리로 끝나서 결국 땅을 되찾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승소 문서를 받아 가지고 나오면서 크게 한 번 허탈한 웃음을 날려 보내고는 그 문서를 갈가리 찢어 개울 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세상을 비웃고 못된 인간들을 희롱하는 자세이기도 하지만 타인에 의해 휘둘려지는 삶을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불교와의 관계
김시습은 생애의 대부분을 머리를 깎고 승려 행세를 하였지만, 불법에 따라 화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매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점에서도 불교에 대한 그의 생각의 일단은 읽을 수 있다. "부처를 섬기되 먼저 인애로써 중생을 편안히 하는 것이 그 근본이고, 법을 찾더라도 무엇보다 그 지혜를 배워서 사기를 감철함이 우선하여야 한다"고 설파한 것에서도 그가 불교를 따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신실한 불교도이기 보다 유학자로 평가받기를 원했으며, 그의 사상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있었다. 그가 불승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하게 된 근저에도 그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 이 점은 그 후 유학자들이 그를 조선 성리학의 사종으로 추앙하는 점으로도 명확히 증명되고 있다. 이런 그의 내면적 의식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성현이 가르치는 참된 길을 버리고 이단의 길을 가는 말종이라고 비판했다. 그에 대하여 김시습은 이렇게 대응하였다.
" 논어나 맹자도 결국은 옛사람들이 전해준 것일뿐이다. 참된 진리란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을 통하여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진리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설사 성현의 가르침이라도 헛된 일이다."
이렇듯 그는 척불숭유의 획일적 정신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학문적 포용력을 발휘한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단호하게 실천해간 신념가이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을 이념적 가치 기준으로 삼았지만 천년 이상을 민족의 신앙으로 자리잡아온 불교와 전통적인 도가 사상까지 포괄하여 그 합치점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현실에서는 극히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던 그가 학문에 있어선 오히려 개방적인 포용력을 발휘한 셈인데, 결국 그에게 있어서 불교는 외양이었고 내면은 여전히 성리학적 기조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호방한 기상은 서경덕의 기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율곡에 이르러 주기론으로 이론적 체계가 잡혔다. 김시습처럼 한때 출가하였다는 의심을 받던 율곡이 김시습전을 지어서 그의 행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후로 유학자로서 김시습의 면모가 재평가되었다.
김시습은 실패한 지식인인가?
그의 인생 행로가 세조의 왕권 찬탈을 인정할 수 없어 바뀌어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서도 현실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꼿꼿한 성미를 가진 김시습은 부정한 무리들이 정권을 차고앉아 위세를 자랑하는 모습을 견디지 못했고, 그나마 권력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현실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또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인정되어 스스로도 이상이 높았던 그였기에 세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주유천하 하며 감정의 불은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약삭빠르게 권력에 빌붙은 인물들이 출세라고 하여 거들먹대는 꼴을 도저히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젊어서는 자신의 상대로도 여기지 않던 인물들이 부귀 영화를 독차지하고 있는데, 자신은 몇 두렁의 땅도 겨우 얻어 연명해야 하는 불공평한 세상사가 한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때를 놓친 인간의 푸념이라고만 매도할 수는 없다. 그는 그 때라는 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던져 버렸기 때문에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었다. 다만, 부당한 현실이 역겨웠을 뿐이고 꿈이 높던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는 세상에서 기회가 없다는 인식이 고통스러웠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의 탈속적인 삶이 실패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사림의 등장 이후 조선에서는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은 그와 같은 인간상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인정하였고, 지금의 시대에도 변신과 적응에 능한 인물보다는 자기가 배운 원칙에 충실한 인간형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현실에 참여하지 않고 비판과 야유를 보냈지만, 그의 삶 전체를 그것으로 소모시킨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의 새로운 체계를 세워서 16세기 이후 유성, 발전하는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고려시대의 패관문학에서 싹트고 있던 고대 소설을 개척하여 문학사에 끼친 공적도 지대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배운 학문과 도리를 현상의 삶에서 그대로 실천한 신념의 인간이었으며 진리 탐구에 있어서는 포괄적 시각을 가진 학문적 자유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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