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성삼문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세조가 역모를 추궁하자 성삼문이 증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질을 불러 대질시키자 그제야 김질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된 것을 알게 된 성삼문은 김질의 배신을 통렬히 꾸짖은 뒤 태연히 사실을 인정하였다. 세조가 분기 탱천하여 역모의 연유를 추궁하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하려고 한 일이 역모이겠습니까? 신하가 제 임금을 원래대로 모시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세상이 다 아는 이치를 왜 나으리만 반역이라고 하십니까? 나으리께서는 평소 주공에다 자신을 견주어 말씀하셨는데. 대체 주공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탐하였단 말입니까? 하늘에 두 태양이 없듯이 신하에게도 임금이 둘이 있을 수는 없소이다."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군을 지칭하는 나으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정색을 하고 대들듯이 답변하자 세조는 더욱 노기 충천하여 추궁했다.
"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양위받을 때 막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 배반하는 거냐?"
성삼문이 대답했다.
" 대세를 어찌할 수 없었을 뿐이오. 반역을 막지 못했으니 물러가 죽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오. 그러나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므로 뒷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참아왔던 것이오."
세조가 다시 물었다.
" 네가 그 동안 나에게 신하로 칭해 놓고 이제 와서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니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그 동안 내가 주는 녹을 먹어놓고 이제와서 배반하면서 모반이 아니라고 강변하느냐? 명색은 상왕을 복위시킨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잇속만 차리려는 것 아니냐?"
성삼문이 대답했다.
" 상왕이 엄연히 계시거늘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는단 말이오? 나는 나으리의 녹을 한 톨도 먹은 바 없소. 나으리가 준 것은 그대로 쌓아 놓았으니 내 집을 뒤져 보면 알 것 아니오."
세조는 분노로 몸이 떨려서 더 이상 국문하지 못하고 형리들에게 작형에 처할 것을 명했다. 철편이 성삼문의 살을 태우고 뼈를 뚫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 나으리의 형벌은 독하기도 하구려."
이어서 성삼문은 세조 옆에 서있던 신숙주를 바라보고 일갈했다.
" 네 이놈, 전에 영릉(세종)께서 원손을 안으시고 산책하시면서 입직해 있던 우리에게 상왕의 후일을 당부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네 놈만이 그 일을 잊어버렸단 말이냐? 네 놈이 이렇게 극악할 줄은 차마 몰랐구나."
이 말을 들은 신숙주가 새파랗게 질려 버리자 세조는 신숙주를 국문장에서 나가게 한 후 박팽년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박팽년은 성삼문보다 더 심하게 세조를 아예 진사로 호칭하였다.
" 진사 어른, 원래의 임금인 상왕 전하를 모시려는 것이 어찌 반역이라고 하시오. 그 자리는 진사 어른의 자리가 아닌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세조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 네 놈은 이제까지 나에게 칭신하여 내가 주는 녹까지 받아 먹고서 이제 와서 나를 진사라 부를 수 있느냐?"
박팽년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 나는 진사 어른께 칭신한 적이 없소이다. 나는 충청감사로 있을 때 장계에도 신자 대신 거자를 써온 사람이외다. 의심 나시면 한번 확인해 보시구려."
이에 세조는 더 물어보지도 않고 성삼문과 같이 작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국문장은 뼈와 살이 타는 냄새로 진동했다. 그러나 악귀처럼 변한 세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응부를 국문했다. 유응부는 무인답게 더욱 세조의 심사를 찔렀다.
"그때 족하를 죽이고 상왕 전하를 복위시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뿐이오. 쳐죽일 놈의 배신으로 일이 틀렸으니 어서 빨리 죽이기나 하시오."
이어서 극형으로 반은 죽어가는 성삼문과 박팽년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한 마디를 던지고 죽을 때까지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아무것도 모르는 책상물림들과 대사를 함께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내가 미련하였다. 너희들이 말리지만 않았던들 수괴를 처단할 수 있었던 것을 거꾸로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위지도 끌려나와 취조당했지만 거칠게 항거할 뿐이었다.
" 나를 반역자라고 잡아들였으니 죽이면 될 것이지 구태여 무엇을 묻겠다는 것인가?"
이제 세조는 더 이상 취조할 의사를 버리고 모두 능지처참할 것을 명하였다. 박팽년은 형장에 가기도 전에 옥중에서 죽었고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는 낙형으로 처형되었다. 체포되기 전에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된 것을 깨닫고 가족과 함께 자결한 유성원을 포함하여 후세의 사가들은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르며 충절의 표본으로 삼았다. 단종 복위 운동의 기수들인 성삼문과 그의 동지들이 처형된 후 관련자들도 모두 검거되어 죽임을 당했다.
특히 성삼문의 가문은 멸문의 화를 당하고 말았다. 아버지 성승도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 동생과 아들 5형제에 이르기까지 남자는 젖먹이라도 살려두지 않았다. 가산은 몰수되고 여자들은 모두 관비로 끌려갔다. 가산을 몰수할 때 창고를 뒤져 보니 과연 세조에게서 받은 녹봉은 월별 표시까지 되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런 대대적인 숙청에도 안심하지 못한 세조는 상왕도 복위 운동에 책임이 있다 하여 노산군으로 강봉시켜서 영월로 귀양 보내는 비도덕적 파행도 감행하였다. 그 후 금성대군이 또 한번 복위 계획을 도모하였다고 하여 이 비운의 어린 왕은 폐서인 되었다가 세조 3년(1457년) 10월에 겨우 17살의 나이로 끝내 사사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수양대군은 그때도 관련자 모두를 주살하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도 관련이 있다 하여 그녀의 소생인 세조의 이복 동생들과 함께 죽였으며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의 소릉을 파헤치는 패륜까지 자행하였다.
사육신으로 역사에 남다
어린 군왕 단종의 비참한 죽음과 세조의 권력 유지를 위한 잔혹한 조치들은 당시 유신들과 민심에 큰 충격을 주었다. 생육신(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조여, 원호, 성담수)처럼 폐인을 자처하고 세상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두 차례에 걸친 반란도 발생하였다. 권신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도 세상을 비관하여 은퇴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의 인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한편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은 사지가 절단되어 형장에 그대로 버려졌고 잘려진 목은 전국에 돌려서 효수되었다.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감복한 이름 모를 사람에 의해서 형장에 버려진 신체의 일부가 거두어져 노량진 강변 야산에 묻혀질 수 있었고 전국에 효수되던 목도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곳곳에 묻혔다. 은진에 있는 성삼문의 무덤과 홍성에 있는 성승의 또 다른 무덤은 이에 연유된 것이다. 노량진 야산의 무덤들은 그 내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여자의 무덤같이 성만 표시하여 두었다. 이들의 이름 앞에 고유명사처럼 따라붙는 사육신이라는 말은 남효은이 지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비롯되었다. 사육신은 당시에는 역적으로 취급되었지만 사림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절의 문제가 중요시되자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성종대에는 사림의 영수 김종직이 용감하게도 성삼문은 충신이라고 말하고 또다시 변란이 생긴다면 자신이 성삼문이 되겠노라고 강변하기도 하였다.
성종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난하는 발언인데도 이를 묵인한 것으로 보아서 성군으로서 성종의 인물됨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이는 선조대에서 경연의 강관이 성삼문의 충절을 논하자 선조가 격노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역대 왕조에서 논란을 거듭하면서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면서도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한 것은 200여 년이 지난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 이때에 사육신의 관직이 회복되고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져 노량진 묘소 아래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원래 노량진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만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 사육신 묘역 정화 사업 때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도 추봉되어 묘지는 7기로 늘어났다.
사육신에 김문기까지 추가된 것은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는데 김문기는 거사 당시 궁궐 밖에서 군사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아 모의 과정에서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한 것이었다. 아무튼 만고의 충신으로 추모되는 사육신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면서 그들의 마지막 한을 한수 수의 시조로 남기기도 했다. 청구영연과 가곡원류를 통해 하위지를 제외한 5명의 시조가 전해져 온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 청정하리라. (성삼문)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박팽년)
창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 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날과 같아야 속 타는 줄 모르더라. (이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