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양'자 때문에 화를 당한 이이명
이이명(1658~1722)의 자는 양숙, 소자는 지인, 호는 소재이다. 민적의 아들로 지평 민채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숙종 6년(1680) 나이 23세 때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고, 12년(1686)에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30년(1704) 대제학에 추천되고, 32년(1706)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어릴 적에 한번은 옥당에서 숙직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식사를 마치자 아버지는 그에게 달리는 연습을 하게 하되 상번의 방에서 하번의 방 중간 청사에 이르기까지 수십 보를 달리게 한 뒤에 말하였다.
"밥이 내려 갔느냐?"
그리고 곧 글을 읽도록 하여 잠시라도 놀지 못하게 하였다. 이마가 넓게 트였으며 말소리가 매우 힘찼다.
숙종 43년(1717) 독대를 할 때 동궁(뒤의 영조)을 보호하기를 아뢰었고, 46년(1720)에 세제책봉의 고명을 받을 적에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과 함께 세제(뒤의 영조)를 세우기를 미리 청하고 빈청에 모여 각각 손바닥 속에 써서 보였으니 곧 '양(養)'자였다. 이는 곧 영조 잠저 때의 호인 양심헌의 '양'자를 가리킨 것이다. 마침내 대책을 결정하고 경종에게 아뢰어 세제를 세웠다. 경종 1년(1771)에 당인(소론)이 무함하는 소를 올려 손바닥에 써서 보인 '양'자는 곧 이이명의 자인 양숙의 '양'자라 하여 불궤로 탄핵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경종 2년(1722) 신임사화 때 체포되어 와서 한강에 이르러 화를 당하였다. 영조 1년(1725)에 복관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참형당할 때 휜 기운이 목에서 나와 하늘에 뻗친 이건명
이건명(1633~1722)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중강, 호는 한포재다. 민서의 아들이다. 숙종 10년(1684)에 진사가 되고, 12년(168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44년(1718)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1년(1721) 세자를 세울 적에 왕세제(뒤의 영조)를 책립하는 일로 세자책봉 주청사의 사명을 받들고 연경에 갔다가 임무를 완수하고 경종 2년(1722)에 환조하여 신임사화 때 홍양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사자에 의해 처참되고 처자식까지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절필시를 지었다.
나라에 목숨 바치는 단심 있으니 죽고 사는 것은 저 하늘에 맡기네 외로운 신 오늘날의 슬픔은 선왕을 뵈올 면목이 없는 것일세
참형당할 적에 목에서 흰 기운이 나와 무지게처럼 하늘에 뻗쳤다.
백수의 노신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세제책립을 반대한 조태구
조태구(1660~1723)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덕수, 호는 소헌이다. 숙종 9년 (1683)에 생원이 되고, 12년(1686) 종제 조태채와 문과에 동방급제하고, 46년 (1720)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1년(1721) 이복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정할 때 조태구는 앞서의 노론 사대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창황히 입궐하여 선인문으로부터 청대하니 최석정, 이광좌, 이조, 한배하, 김연, 이태좌 등이 뒤따라 당도하여 같이 입시하였다. 조태구가 나아가 아뢰었다.
"백수의 노신이 살아 있은들 또한 무엇을 하겠습니까? 세제 세우는 명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시면 신 등은 죽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이어서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이 때 소론과 노론의 당쟁은 극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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