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담수(?-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이수, 호는 문두이다.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합격, 교리가 되었다. 단종 때 나라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자 사촌 성삼문과 더불어 왕실을 도우면서 죽더라도 마음을 변치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성삼문이 죽게 되자 성담수도 무서운 국문을 받았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서 공주로 돌아갔는데,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성담수는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묘 밑에 숨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태평이었다. 한번도 서울에 간 적이 없고 자신이 명문세족임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농부로 보았다. 그의 조카 성몽정이 경기 감사가 되어 본 고을을 순시할 때 숙부 성담수의 주소를 몰라 수소문 끝에 찾았다. 그의 집을 찾아가니 쓸쓸한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였고, 앉을래야 앉을 만한 변변한 자리조차 없었다. 탄식하고 집에 돌아온 감사 성몽정은 숙부에게 자리를 보냈다. 그러나 성담수는 곧 자리를 돌려보냈다. "이런 좋은 자리는 우리 같은 가난뱅이 집에는 맞지 않지" 이때 나라에서 죄인의 자제들을 참봉을 시키고 그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관의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성담수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를 읊고 낚시로 소일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숙이다. 언젠가 성담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온종일 강변에 앉았다가 강물에 발 담그고 곤하게 잠들었네 꿈속에서 갈매기와 만 리를 날다가 깨어나니 몸은 석양에 누워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