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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28호
2012.11.28 (음10.15)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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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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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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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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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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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함바집, 노가다
“함바집 뒷돈 비리…경찰수뇌부 연루돼” “함바집이 뭐기에…건설현장 식사 독점공급 알짜 이권” “함바집 비리수사 확대…정·관계 로비도 포착” 등. 속칭 ‘함바집’ 운영권을 둘러싼 비리수사가 연일 기사화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 ‘함바집’은 건설 현장에 가건물 등을 지어 놓고 인부를 상대로 운영하는 식당이란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함바식당’ 또는 줄여 ‘함바’라고도 부른다.
‘함바’란 단어는 순우리말처럼 보이지만 공사장·광산 등에 있는 노무자 합숙소란 뜻의 일본어 ‘飯場(はんば)’에서 온 말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공사장의 임시식당이란 의미로 굳어져 사용되고 있다. 건설현장엔 아직 일본어투 표현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함바’도 순화해야 할 용어다. 국립국어원에선 이를 ‘현장식당’으로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노가다’라고 부르는 것도 문제다. “요즘 노가다 뛰면 얼마나 받아?”처럼 일상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노가다’ 역시 토목공사장의 막벌이 일꾼을 뜻하는 일본어 ‘土方(どかた)’에서 온 말로 ‘(공사판) 노동자·막일꾼·인부’로 바꿔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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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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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 성기완
누워있는인형이사람같아보이는것은 눈을뜨고있기때문이고 누워있는사람이시체같아보이는것은 눈을감고있어서다 실로그는자고있다 죽음은문밖의잠이고 잠은문을열지않은죽음이다 기억할수있는꿈은생활의거울이고 기억할수없는꿈은죽음의그림자다 흩어지는구름에서찰랑이는소리가나는것은 몸과마음이삶과죽음처럼 믿음과배반이사랑과증오처럼 노력과방탕이뼈와살처럼 오해와이해가피고름처럼 욕설과교성이타이어와콘돔처럼 이것과저것이모든것과nothing처럼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수갑을차고동행하는형사와죄수의운명은 장가방과아랑드롱의그것처럼결국같아진다 사람의옷은동물의거죽보다단연코보잘것없다 다다다단연코 강아지에게시달린양인형은진짜양처럼온순하다 인기척을느끼고개가벌떡일어나면 공기는그냄새를맡고도망질을친다 공기는고양이처럼쉬고있었던거다 개가연방드센기세로어둠을향해짖는이유는 달아난공기를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내됨됨이와관계없이시인인이유는 니가시인이아니기 때문이다 단지니가 나의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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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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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4. 가정과 가족을 위한 수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가정
완벽한 일요일 아침 10시 30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정은 완벽한 가정이었다. 아내는 일곱 살짜리 데리고 피아노 개인교사를 만나러 갔다. 열다섯 살 먹은 큰아들 녀석은 아직까지 늦잠을 자는 중이었다. 다섯 살짜리 막내 아들은 다른 방에서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선 인간처럼 묘사된 작은 동물들이 서로를 절멱 아래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나는 부엌 식탁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마침내 만화영화의 대량학살 장면에 싫증도 나고 텔레비전 리모콘 작동에도 시들해진 다섯 살짜리 아론 말라치가 내 공간 속으로 뛰어들어왔다. "나 배고파." 내가 물었다. "시리얼 더 먹을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다시 물었다. "요구르트 줄까?" "아니."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 안 돼?" 난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안 돼." 나는 아이스크림이 가공처리한 시리얼이나 항생물질이 들어 있는 계란보다 훨씬 영양가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문화적인 가치 기준에 따르면 일요일 아침 10시 45분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잘못된 일이다. 잠시 침묵. 4초가 지난 뒤 아이가 물었다. "아빠, 우린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았지? 그렇지?" 내가 말했다. "그럼, 아직 많이 남았지." "나도, 아빠도, 엄마도?" "그래." "아이삭 형도?" "응." "또 벤 형도?" "응. 너하고, 아빠하고, 엄마하고, 아이삭하고, 벤하고." "맞아, 아직 한참이나 남았어. 사람들이 다 죽으려면." 아론은 식탁 위의 내 신문 한가운데에 부처님처럼 가부좌를 틀로 앉았다.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니, 아론? 사람들이 다 죽다니?" 아론이 말했다. "모두가 언젠가는 다 죽는다고 아빠가 그랬잖아. 모두 다 죽으면 공룡이 돌아올거야. 원시인들이 공룡 동굴 속에서 살았는데, 그때 공룡들이 와서 원시인들을 다 밟아 버렸어." 아론은 다섯 살밖에 안 됐지만 이미 삶을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궤도의 종착역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궤도가 언제 끝나 버릴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순간 나는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아이에게 신과 구원과 영원에 대해 설명해줘야 할 것인가?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일장연설을 해 줘야 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너의 육체는 하나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고, 네가 죽은 다음에도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영원히 함께 있을 거야." 아니면 아이를 불확실하고 걱정스런 상태 속에 그냥 내버려 둬야 할까?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실이니까 말이다. 아이를 불안에 찬 실존주의자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 것인가?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궁지에 부닥친 게 확실했다. 나는 말없이 신문을 응시했다. 캘틱 팀은 금요일 밤 경기마다 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래리 버드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건지 아론의 발이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예민한 성격 탓인지 지금이 매우 중요한 순간이고 아론의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면 정말로 나의 지나친 예민함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일 삶과 죽음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내가 신경 쓸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식탁 위에서 아론은 두 팔을 들고 떨리는 다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군인흉태'를 내고 있었다. 래리 버드가 화를 내고 있는 상대는 케빈 맥케일이었다. 아니, 케빈 맥케일이 아니라 제리 시칭이었다. 하지만 제리 시칭은 이제 캘틱 팀의 소속이 아니다. 제리 시칭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것이 죽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끝난다. 제리 시칭은 새크라멘토 팀이나 올란도 팀에서 활약하고 있든지, 아니면 영원히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아론이 어떻게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가에 대해 나는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애가 확고한 세계관, 사물이 영속한다는 느낌을 갖기를 원했다. 그리고 보니 수녀님과 신부님들은 나를 이해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내가 믿기에 인생은 축복 아니면 고통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장거리 전화조차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신의 팀에 소속되든지 아니면 펄펄 끓는 국물 속에 들어가야 한다. 난 아론이 뜨거운 가마솥 안에서 화상을 입는 걸 원치 않았으며, 그 애가 강한 믿음을 갖기를 원했다. 신경과민이나 불가피한 불안감 같은 건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것이 가능할까? 신, 영혼, 운명, 또는 그 무엇인가가 한 개인의 현존에 상관없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일이 가능할까? 존재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빵을 손상 없이 그대로 간직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먹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면 그 예민한 빵은 한 입 베어 무는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금방 조각나게 될까? 식탁이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아론이 군인 흉내에도 싫증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이용해 나는 연극 무대에 선 사람처럼 목청을 가다듬고 전문가다운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아론, 죽음이라는 건 몇몇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그때 아론이 말했다. "아빠, 나랑 비디오 게임하면 안 돼? 폭력적인 게임이 절대 아냐." 아론은 손짓까지 동원해서 설명을 했다. "마구 죽이는 다른 게임들하곤 달라. 그냥 때려서 쓰러뜨리기만 한다니까." 난 약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좋다. 우리 비디오 게임 하자.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어요." "뭔데?" 아론은 벌써 저만치 비디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다 말고 돌아서서 물었다. 내가 말했다. "먼저, 아이스크림 먹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또다시 완벽한 일요일 아침의, 완벽한 가정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이클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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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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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심층 심리와 정신분석학
정신분석학은 의식하기 어려운 정신의 심층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또한 이 심층 의식과 관계 있는 일상생활의 심리 현상에 대해서 연구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병리학과 심층심리학을 기초로 정신분석학을 체계화했다. 프로이트는 마르크스, 니체,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현대 사상에 일대 충격을 가져다준 정신 분석학자이다. 그는 유태인으로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당시 유태인에 대한 박해로 인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개업 의사가 되어 일생 동안 정신분석학 연구에 몰두했다. 말년의 프로이트는 서른 세 번이나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프로이트의 학설은 충동론, 인격 구조의 이론(심적 장치론), 심층 의식론, 심적 기제론, 방어 기제론, 신경증론, 꿈의 해석론 등 여러 분야로 나누어진다. 정신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은 심리학의 과제이다. 그러나 모든 정신 현상이 직접 관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처럼 일상생활의 의식과는 전혀 분리되어 있어서 의식과 상관없이 행동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 정신분석학은 보통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정신의 심층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또한 이 심층 의식과 관계 있는 일상생활의 심리 현상에 대해서 연구한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심층 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 최면술이나 전기요법 등을 사용했으나 곧 포기하고 자유 연상법을 채택했다. 연상법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계속해서 연상하게 함으로써 의식 내의 감정적 복합을 알아내는 방법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증(노이로제)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유 연상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방법을 이용해서 그는 의식의 내면을 탐구하고 동시에 신경증을 치료했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준 친구 브로이어의 두 가지 관찰 프로이트는 친구 브로이어의 관찰을 기초 삼아서 1893년과 1895년에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빈의 정신과 의사 브로이어가 프로이트에 영향을 미친 관찰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브로이어는 히스테리 증세를 지닌 안나라는 미모의 젊은 여성을 진단했는데 그녀는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자주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안나는 꿈꾸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브로이어는 꿈꾸는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환자의 말이 마음속 깊이 그녀가 품고 있는 것과 관계 있다고 여기고 안나가 중얼거린 말들을 기록한 다음에 그녀를 최면 상태에 끌어들인 후 그 말들을 다시 들려줌으로써 그녀의 마음 깊이 사무쳤던 사건들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 안나는 중병 앓는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너무 울어서 멀쩡한 눈이지만 눈물이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안나는 브로이어의 치료를 6개월 정도 받고 정상인으로 돌아왔으며 그 후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여성 운동가가 되었다. 브로이어는 환자 치료에 최면요법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브로이어의 치료를 받은 또 다른 환자는 물 마시기를 거부하는 증세가 있었다. 브로이어는 이 환자를 최면 상태로 끌어들인 다음 환자로 하여금 마음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게 했다. 이 환자는 가정교사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을 이야기하면서 가정교사가 마시던 컵에 든 물을 그녀의 개가 마시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마음속에 품었던 것을 털어놓음으로써 환자는 지금까지 억제해 왔던 분노를 터뜨리고 차츰 컵의 물을 마실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의 관찰과 치료를 근거로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고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신경증의 증상은 잊혀졌던 과거의 일들과 관계가 있으며 그 일들을 회상함으로써 증상이 제거될 수 있다. 환자는 과거의 일들을 억제하고 있어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으므로 그것이 신체의 여러 가지 증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의 일들을 재현시켜 주지 않으면 환자는 치료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이 연구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과를 이끌어 냈다. 우선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증상은 우연히 발생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의해서 발생되어 결정된다는 심적 결정론에 도달했다. 다음으로 그는 증상의 원인은 무의식적인 것이므로 환자 자신은 그 증상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 번째로 그는 증상의 원인, 곧 억압이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증상의 원인이 불쾌한 체험이었다든가 또는 다른 경향과 충돌하기 때문에 의식에 떠오르지 않게 의식의 심층에 묻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무의식 안에 발산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억압 충동은 어떤 계기를 맞이해 말이나 행위로 터져야만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카타르시스(세제 요법) 이론을 제시했다.
억압된 관념은 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최면요법의 한계를 발견하고 자유 연상법을 제시했다. 그는 <꿈의 해석>과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를 저술해 일상인의 심리 현상을 연구했으며 말이나 글의 잘못은 모두 심층 의식(무의식)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밝혔다. 차츰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원인이 성적인 요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성의 이론에 관한 세 가지 논문>에서 억압된 관념은 성적인 것이며 성욕은 이미 유아의 구강기부터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동의 발달을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 및 잠복기로 구분하고, 구강기에는 입으로 빠는 것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고 항문기에는 배설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며 성기기에는 아동이 직접 자신의 성기를 접촉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성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했으며, 또한 신경증의 원인을 억압된 과거의 사건보다 성적 소질에서 찾고자 했다. 그는 정신적인 비정상 상태가 성적 요소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아 범죄와 종교 심리 그리고 문학과 정신병 치료에 있어서 성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신분석학 연구를 계속했다. 뒤이어 프로이트는 인격 구조를 연구하고 인격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로 의식적 자아, 원시적이고 충동적인 자아의 심층 부분인 이드, 그리고 유아 시절 부모의 교육에 의해 형성된 초자아(양심) 등 세 가지를 말했다. 여기에서 의식적 자아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알고 있는 '나'이며 이드는 심층의 충동이고 초자아는 유아기에 어른들에 의해서 주입된 도덕적 및 관습적 생각들이다. 크게 보면 인간의 의식은 의식적 자아와 심층 의식(이드와 초자아)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말년의 프로이트는 심층 의식의 충동을 본능으로 보고 이 본능 또는 힘을 죽음의 충동과 삶에의 충동으로 나누어 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개인 심리에 치우쳤고 또한 지나치게 성적 요소를 강조했기 때문에 말년에 제자로부터 반박당했다. 융과 같은 제자는 스승 프로이트와 다른 각도에서 정신분석학을 탐구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개인 심리 연구에 치중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확장해 사회 심리 연구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더 강하다. 마르쿠제나 하버마스, 프랑스의 리쾨르나 라캉 등은 프로이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철학자 또는 심리학자이다.
융의 집단무의식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 고전적 정신분석학을 대표하는 정신분석학자이다 융은 처음 몇 년 간 프로이트를 추종하면서 인간의 정신과정의 근원을 성충동으로 여겼으나 곧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와 결별하였다. 융은 더 이상 프로이트의 결정론을 따를 수 없었다. 융은 인간의 정신과정(심리과정 또는 영혼과정)을 집단무의식, 개인무의식 및 자아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집단무의식은 태곳적으로부터 현재까지 경험한 것들이 심층 의식에 쌓여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암흑과 뱀을 무서워한다. 원시인들은 밝고 따뜻한 태양과 캄캄하고 차가운 밤을 경험했으며, 공룡과 같은 파충류 앞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장기간 축적되어 심층 의식을 이루며 이것이 바로 집단무의식에 해당한다.
우리들 각자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히고 다양하게 행동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기술이나 행동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곧 자동적으로 처리한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심층 의식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한다면 개인의 심층 의식은 개인적 무의식이다. 그런가 하면 각 개인은 언제나 의식적인 나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자아이다.
인간은 누구나 지각하고 기억함으로써 인지하고 사유하며 판단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정서와 감정을 표현한다. 집단무의식(원시형: Archetyp)과 개인무의식 이외에 인지하고 사유하고 의식하는 나는 자아이지만 두 가지 심층 의식과 자아를 통합하는 것은 자기(Selbst)이다. 융이 보기에 바람직한 인간이란 얼마만큼 균형 잡힌 자기를 소유하는가에 달려 있다. 융의 정신분석학은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꿈을 분석하고자 한다.
신정신분석학자들이 보는 기본적 욕구의 원천 아들러, 프롬, 호나이, 설리반과 같은 신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의식적 자아가 기본적 욕구의 원천을 가진다는 프로이트와 융의 고전적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신정신분석학자들은 기본적 욕구의 원천을 프로이트처럼 성충동으로 보지도 않고 융처럼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들러는 인간이 소유한 기본적 욕구의 원천은 바로 열등감이라고 한다. 인간은 외딴 섬에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창조적 자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열등감이야말로 인간을 보다 바람직한 삶을 향하여 발전시키는 기본적 욕구의 원천이며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한 사람인 프롬은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학 이론을 전개한다.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상반되며 갈등하는 다섯 가지 기본 욕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소속욕, 초월욕, 착근욕, 정체욕, 준거욕이다. 예컨대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한다.
현실의 삶에서 상반되며 갈등하는 욕구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인간상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갈등하는 욕구들을 반영하는 사회조건 또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조건은 인간의 삶을 특징짓는 중대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여성 정신분석학자 호나이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충동이나 욕망)를 불안으로 본다. 심층 의식 안에 억압되어 있는 욕구는 신경증적 불안으로서 이것은 바로 기본 불안이다. 이 기본 불안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것을 원하는 신경증적 불안이다: 애정, 이성, 자신의 영역, 권력, 타인 지배, 명예, 자기 찬미, 성취, 독립, 완전. 우리 각자가 이들 열 가지 기본 불안을 어떻게 충족시키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간상이 결정된다.
설리반에 의하면 자아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관계에서 생긴 가상적 개념이다. 우리는 습관적 역동과 인격화에 익숙하다. 인간 관계에서 습관적 역동에 익숙한 사람은 큰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우리들은 각자가 나름대로 사람들을 멋대로 평가하는데 이것이 인격화이다. 대상을 정확히 인지할수록 습관적 역동에 잘 적응할 수 있으므로 설리반은 인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신정신분석학을 대변하는 프랑스의 현대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대해서는 독립된 절을 마련해서 따로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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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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廢寢忘食(폐침망식) 廢(폐할 폐) 寢(잠잘 침) 忘(잊을 망) 食(밥 식)
송사기사본말(宋史記事本末) 왕안석변법(王安石變法)에 실린 이야기다. 북송(北宋)시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인(文人)인 왕안석은 신종(神宗)년간에 두 차례 재상을 지냈다. 당시 일부 귀족들이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납세(納稅)를 거부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이 날로 악화되자, 재상으로 있던 왕안석은 변법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무리들의 반대에 부딪혀 두 차례 모두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왕안석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널리 제자백가서를 읽고, 각종 이론들을 진지하게 연구함으로써 형공신학(荊公新學)을 정립하여 변법의 이론으로 삼았다. 그는 강동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저명한 학자인 주돈이(周敦 )를 만났다. 그는 주돈이와 여러 가지 사상 문제를 토론하며 밤을 세웠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문제들을 몇번이고 생각하며, 잠 자는 것, 밥 먹는 것까지도 모두 잊어버렸다(安石退而精思, 至忘寢食).
廢寢忘食 이란 잠 못자고 끼니를 거를 정도로 바쁘거나 매우 열심히 공부함 을 비유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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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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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19. 거짓의 혹
40년전 영국에는 비교적 소수의 인도 학생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결혼을 했던 터인데도 보통 총각행세들을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고등학교거나 대학이거나 학생은 다 총각이었다. 공부하려면 결혼해 가지고는 안된다는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산 좋은 시절에는 그 전통이 있었다. 학생인 다음에는 어김없이 다 브라마차리*1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와서 우리는 조혼을 하게 됐는데, 영국에서는 이것을 실상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 가 있는 인도 청년들은 결혼했다는 말을 하기 부끄러워했다. 숨기는 데는 또다른 이유도 있었다. 즉, 그것이 알려지는 날에는 그들이 묵은 집 처녀들과 함께 나다니거나, 놀거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는 것은 비교적 순진한 일이었다. 부모들은 장려하기까지 했다. 거기에서 젊은 남녀의 그러한 교제는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젊은이는 누구나 다 제 짝을 골라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인도 청년이 영국에 와서 그런 관계를 함부로 갖다가는(영국 사람에게는 아주 예사로운 거지만), 비참한 결과에 빠지기가 매우 쉽다. 사실 그런일이 많이 있었다. 나는 우리 청년들이 그 교제 때문에 유혹에 빠져, 진실치 못한 생활을 택하게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교제는 영국 청년의 경우는 전혀 무죄한 것이지만 인도 청년에게는 못마땅한 것이다. 나도 그 전염병에 걸렸었다. 이미 결혼을 했고, 한 아들의 아버지면서도 서슴지 않고 총각인 체 했다. 그러나 속임꾼이 되어서 행복한 것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수줍어하고, 말 안하는 버릇이 나를 건져 더 깊은 물에 빠지지 않게 했다. 내가 말만 하지 않는다면, 어떤 아가씨도, 나와 말할 재미가 있고 같이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겁많은 나의 성격도 과묵한 성격과 거의 비슷할 것이다. 벤트너에서 내가 여자 집주인과 함께 들어 있던 집 같은 그런 가정에서는, 여자 집주인 딸이 손님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우리 여자 집주인의 딸이 하루는 나를 데리고 벤트너 변두리의 아름다운 언덕에 올라갔다. 나도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닌데, 같이 간 사람은 나보다도 빨리 걸어 나를 항상 뒤에 두고 앞서가며 계속 지껄여댔다. 그 지껄임에 대해서 나는 이따금 그저 가늘게 네 혹은 아니오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껏한대야 네, 참 아름답군요! 할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려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 여자는 그저 새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이제 어떻게 내려가나가 문제였다. 굽 높은 부츠를 신었는데도 이 스물다섯 살의 쾌활한 젊은 아가씨는 쏜살같이 언덕을 내리달렸다. 나는 부끄러워 애를 쓰며 내려왔다. 여자는 먼저 내려가 서서 웃으며 나더러 기운을 내라면서, 와서 끌어 주겠다고 했다. 내가 어쩌면 이리도 옹졸할까? 죽을 고생을 하고, 가끔씩 기며, 간신히 밑에까지 어떻게 해서 굴러 내려왔다. 여자는 큰 소리로 웃어대며 멋지다. 고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부끄러웠다. 그 여자는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가는 데마다 상처를 입지 않고는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왜일까? 하느님이 내게서 거짓의 혹을 떼버리려 하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젠가 브라이턴에 갔던 일이 있다. 거기도 벤트너처럼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이것은 벤트너에 가기 전의 일이다. 그곳 어느 호텔에서 나이 많은 과부를 만났는데 웬만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내가 영국 간 첫해였다. 메뉴가 모두 프랑스어로 쓰여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늙은 부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내가 낯선 사람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자 그는 곧 나를 도와 주었다. 처음 오신 분인 듯합니다. 뭘 모르시겠어요? 왜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으세요? 내가 메뉴를 훑어보며, 심부름꾼에게 요리들의 내용이 뭔가를 알아보려고 하는 때에 부인은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부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프랑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어느 요리가 채식으로 된 것인지를 몰라서 그런다고 했다. 내가 도와 드리지요. 이 카드를 설명해 드리고 무엇을 드실 수 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부인은 말했다. 나는 그 부인의 신세를 많이 졌다. 이것이 서로 알게 된 시초인데, 그후 그 사귐은 자라 친구가 되어, 내가 영국에 있는 동안 내내 계속됐고, 그 후 오래도록 지속됐다. 부인은 내게 자기의 런던주소를 적어주고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초대해 주었다. 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나를 초대해 주고 수줍어함을 이기도록 도와주고, 나를 젊은 여자들에게 소개하여 교제하도록 끌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 교제에서 특히 두드러진 사람은 그 부인과 함께 있는 한 젊은 여자였는데, 종종 단 둘이만 남아 있는 일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처음에는 매우 괴롭게 생각되었다. 나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고, 또한 재미있게 농담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길을 터 주었다. 나는 차차 배우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에 일요일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됐으며, 그 젊은 여자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늙은 부인은 날마다 그물을 차차 넓혀갔다. 그녀는 우리가 서로 만나는데 흥미를 느꼈다. 아마 그녀는 우리에 대한 자기 복안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나는 난처해졌다. 그래 혼자서 생각했다. 착한 그 부인에게 나는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말했어야 할 것인데! 그랬더라면 우리 둘 사이의 약혼은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너무 늦어 고칠 길이 없을 정도는 아니다. 이제라도 진실을 밝히면 더 비참한 데까지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다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브리이턴에서 처음 만난 이래 오늘까지 당신께서는 제게 참 친절히 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이 돌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제가 결혼할 걱정까지 하시고 젊은 색시들께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대로 갈 것이 아니라, 이제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당초 당신을 방문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말씀드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영국 와 있는 인도 학생들이 결혼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저는 그것을 따랐습니다. 저는 이제 그렇게 할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려서 결혼을 했고 지금은 아기 아버지란 말씀까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오래두고 당신께 말씀하지 않으려니 제 마음은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이제 제게 진실을 고백할 용기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께서 고맙게 소개해 주신 그 젊은 숙녀에게 무례한 짓을 한 일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제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결혼한 줄 모르시는 당신께서 우리가 약혼하기를 원하셨던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일이 현재의 단계를 넘지 않게 하기 위해 저는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받으시고 제가 당신의 친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더라도 저는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에 베푸신 친절과 염려로 저는 영원한 감사의 빚을 졌습니다. 만일 이후로도 저를 버리지 않고 당신의 친절을 받을 만하다고 계속 생각해 주신다면, 저는 어떤 수고도 사양치 않겠으며 물론 행복하게 여길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더욱 더 큰 친절의 표시로 알겠습니다.
독자들은 내가 이 편지를 단숨에 쓴 줄로 알아서는 안된다. 나는 이것을 몇번이고 고쳐쓰고 고쳐써야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를 덮어 누르던 짐이 벗겨졌다. 내 편지를 받자마자 곧 쓴 듯한 그 부인의 회답이 왔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당신의 솔직하신 편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둘이 다 반가웠고 실컷 웃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거짓이라 하신 것은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셔서 참 좋습니다. 저의 초대에는 변함이 없으며, 다음 일요일에도 오실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조혼 이야기를 듣는 것과 당신을 좀 놀려주는 즐거움을 기대하겠습니다. 우리 우정은 이 사건으로 인해 조금도 변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야 다시 말할 필요인들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거짓의 혹을 떼버렸고, 그 후로는 필요한 때라면 언제나 나는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꺼리지 않았다.
*1. Brahmachari : 브라마차랴를 지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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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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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 6장 제우스의 아들과 딸
3. 크로이소스
[크로이소스(기원전 595년 ~ 기원전 547년?)는 기원전 561년부터 리디아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기원전 547년 페르시아 제국에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떠돌이가 되었다. 크로이소스의 패배는 그리스에 심대한 문화적인 충격을 주었는데, 적어도 기원전 5세기 말경까지는 크로이소스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연대기의 전통적인 제약의 바깥 즉 여러 나라의 연대기에 동시에 나와 있었다. 크로이수스는 리디아의 유산으로 유명하다. 헤로도토스와 파우사니아스는 델포이에 보존된 그의 선물들을 기록하였다.] - 위키백과
크로이소스(Croesus)는 메름나다이 민족(가계)의 5대로 마지막 왕이며, 리디아를 통치한 알류아테스 2세의 아들이다. 인류가 나타난 이래 최고의 부자로 이름 높으며 그리스의 동방에서 리디아까지 지배한 최초의 왕이다. 궁성은 배움의 전당이 되고, 저명한 철학자나 우화작가인 아이소포스(이솝)을 위시하여 많은 인재를 환대하였다. 그는 철학가 솔론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인류의 가장 행복한 인물로 추앙해 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솔론은 이는 잘못된 생각이며 "죽음이 올 때까지 아무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며 검소와 미덕을 중시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후에 그는 페르시아의 왕 큐도스에 도전하여 42만의 군대와 6만 필의 군마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48년 대패를 당하여 수도는 함락되고 스스로는 포로가 되어 생화장에 처해지게 되었다. 장작더미에 불이 타오르자 승리한 군주 큐로스는 불 속에서 크로이소스가 슬픈 목소리로 세 번이나 "솔론!"하고 부르짖는 것을 듣고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이 때 크로이소스는 과거 그가 철학자 솔론과 나누었던 인간의 행복에 관한 대화를 이야기 하였고 그 말에 감동한 큐로스는 모든 인간사가 순간적임을 깨닫고 크로이소스를 살려주고 절친한 친구로 대하였다. 어쨌든 리디아 제국은 멸망하여 페르시아에 종속되고 크로이소스도 큐로스의 나라에서 살았으나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크로이소스는 인간으로서 최대의 부를 누린 인물로 선망되었으나, 할류스 강을 넘어가면 위대한 제국이 파멸할 것이라는 델포이의 신탁대로 결국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피레의 크로이수스, 붉은 항아리.(기원전 500년~기원전 490년, 루브르 박물관)]
오라클 오라클(Oracle, Oraculum)이란 신탁, 탁선 혹은 신탁이나 계시를 받는 곳을 의미한다. 인간의 물음에 대한 신의 답변인데, 신탁은 대개 애매하여 어떤 방향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당시 사람들은 나라의 중요한 일에서부터 개인의 사소한 생활까지 일일이 신탁을 받았다. 따라서 델포이, 델로스, 도도나, 암몬 등에 이름난 신탁소가 있었고 전성기에는 그리스 세계 도처에 신탁소가 생겨 보이오티아에는 25개소나 되었으며 이는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신탁소 수와 맞먹었다. 신탁은 6보격 시문이나 여러 형태의 암시, 예컨대 참나무잎의 소리나 조각상 머리의 끄덕임, 또는 호수에 있는 물고기의 헤엄으로도 지시되었다. 그러나 신탁은 신의 의지를 전달해 주는 매개체였을 뿐이고, 원래 신은 무슨 일이 닥칠 것인가를 명확히 진술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숨기지도 않았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사제나 여사제를 매수하여 원하는 신탁을 받는 타락행위까지 있었다 신탁을 잘못 판단한 예로는 크로이소스의 일화가 유명하다. 즉 만약 할류스 강을 건너게 되면 위대한 제국이 멸명하리라는 델포이의 신탁을 받고 그 제국을 적국으로 해석하였으나 불행히도 멸망한 것은 자신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신탁을 전한 사제들이 그리스 사회의 생활양식을 지속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적어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오면 식자층 그리스인은 신탁을 다만 공식 종교의 일부로만 시인할 뿐 믿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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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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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류시화
성자와 나비
인생에서 때로 자신이 바람의 방향을 잘못 탄 거미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맞는 길인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20대 중반이 넘었을 때 나는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소위 영적인 추구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런 끝에 결국 인도까지 오게 됐으나, 나는 점점 아무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찾는 진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 결과 아열대의 태양 아래서 나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인도에 오기까지 기다린 세월과 투자한 여비가 아까웠다. 그냥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힌두교의 대표적인 성지라 일컬어지는 히말라야 기슭의 유서 깊은 도시 리시케시를 여행하기로 했다. 리시케시는 1960 년대에 비틀즈 멤버가 그들의 영적 스승인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를 만나러 옴으로써 일약 서구세계에 유명해진 곳이다. 리시케시는 '현자의 도시'라는 지명답게 히말라야 동굴에서 내려온 많은 성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나는 들었다. 그 성자들은 수백 년 동안 인간육체 속에 머물면서 늘 젊은 자태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성자들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들로부터 명쾌한 인생의 해답을 듣고 싶었다. 리시케시에 도착했을 때는 시월도 다 지난 석양 무렵이었다. 더 북쪽의 히말라야로 올라가는 길은 이미 두절되어 있었다. 폭설 때문에 그 길은 여름철에만 왕래가 가능했다.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나는 근처 강가로 걸어나갔다. 리시케시를 흐르는 갠지스 강은 근원지 히말라야와 가까워서 물이 얼음처럼 차고 맑았다. 강물은 해 저무는 모퉁이를 향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이상 없을 것이라고. 나는 모래사장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갠지스 강물에 내 마음을 비추려고 노력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헬로우, 스와미!" 스와미는 명상 수행자를 부르는 말이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힌두 탁발승 하나가 저만치 강가에 담요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구다리 바바였다. 구다리는 헝겊이란 뜻이고, 바바는 종교적인 아버지란 뜻이다. 누더기를 걸친 탁발승을 인도에선 그렇게 부른다. 통계에 따르면 인도에는 저런 구다리 바바가 어림잡아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를 부른 그 탁발승은 전형적인 구다리 바바답게 누더기 옷에 누더기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지저분한 머리에 새카맣게 벌어진 앞니를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외면하고 다시 명상에 들려고 노력했다. "나 좀 보시오. 스와미! 이리 좀 오시오!" 구다리 바바가 또다시 나를 소리쳐 불다. 쇳소리를 내며 꽥꽥대는 거지 탁발승 때문에 나는 도무지 명상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얼른 가서 한푼 적선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도대체 이 힌두 탁발승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자들일까. 그들은 막무가내로 잘난 체하고, 적선에 의존하면서도 신이 자신들을 먹여 살린다고 큰소릴 친다. 세수 따위는 하지도 않은 채 평생 깎지 않은 머리카락에 소똥을 묻히고 다닌다. 왜 떠돌아다니는 거냐고 물으면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라고 당당하게 소리친다. 내가 아무 반응도 없자 구다리 바바는 더욱 큰소리로 나를 못살게 굴었다. "어이, 스와미! 잠깐 나 좀 봅시다!" 이제는 강가에 있던 다른 인도인들과 외국인 여행자들까지도 호기심에 차서 그 구다리 바바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창피해서 더이상 모른 체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나는 모래를 털고 일어나 구다리 바바에게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몰골이 더 형편없었다. 헝겊 쪼가리 옷은 다해졌고, 올올이 때가 꼈다. 간짜(대마)를 너무 피워대서 눈동자도 흐릿했다. 지금도 그는 어디서 주워모았는지 실뭉치를 한 주먹 꺼내놓고 담요에다 헝겊 쪼가리를 이어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전 생에 아마도 삯바느질꾼으로 산 모양이었다. 나는 경멸의 시선을 담아 주머니에서 5루피를 꺼내 구다리 바바에게 내밀었다. 하룻밤 숙박료가 15루피(450원)였으니 5루피라 해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구다리 바바는 히! 하고 웃으며 얼른 돈을 받아 챙겼다. 그런 그를 바라보니 슬픔이 밀려왔다. 삶이란 것도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히말라야의 성자들이라는 것 역시 커다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한때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나는 인도로의 여행을 꿈꾸었었다. 그런데 이 무슨 희극이란 말인가. 나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돌아서서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강의 수면에는 노을이 슬픔처럼 번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가슴에서 허무나 번뇌 같은 이피라들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없는 걸까. 그때 또다시 구다리 바바가 날 불러세웠다. "스와미, 잠깐만 봅시다!" 나는 뒤돌아보기도 싫었다. 이제 자비니 적선이니 하는 감정의 사치에도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구다리 바바는 더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헬로우, 스와미! 잠깐만 다시 와보시오. 내가 보여줄 게 있소!"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는 자기 앞의 모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와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어서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한 마력 같은 걸 갖고 있었다. 왠지 그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어떤 힘에 이끌려 내가 앞에 가서 앉자. 구다리 바바는 바느질하던 담요를 옆으로 치우고 뚫어져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생각보다 투명했다.
그 순간이었을까, 나는 갑자기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병의 주둥이로 훅 하고 흰 연기가 들어온 것처럼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머릿속으로 불어 들어왔다. 구다리 바바가 내게 최면을 건 게 틀림없었다. 인도의 마법사들은 곧잘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환상을 연출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최면에 걸리지 않으려고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구다리 바바는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바닥에서 모래 한 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바닥을 폈다. 그런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모래가 아니었다. 모래는 사라지고, 나비 한 마리가 그의 손바닥에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흰색 나비였다! 나비는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향해 풀풀 날아 올라갔다.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까 구다리 바바는 다시금 모래를 한 줌을 집어들었다. 그가 손을 펴자 또다시 모래는 사라지고, 나비가 날아올랐다. 이것이 환상이라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나는 소문대로 마법사의 최면에 걸린 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내 가슴을 채웠던 생의 허무감 같은 것이 나비와 함께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나비의 정체를 판독하느라 애를 썼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구다리 바바는 담요를 집어들고 저만치 걸어가고 내가 황급히 "바바지! 바바지!" 하고 소리쳐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사라져 가버렸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리시케시에 머물면서 구다리 바바를 찾아 강과 사원을 뒤지고 다녔지만 나는 끝내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행색을 설명하여 그가 간 곳을 물었으나 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앞니가 벌어진 탁발승이야 흔하다 해도, 모래를 집어 나비로 바꿔버렸다는 내 설명에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구다리 바바는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설산의 동굴 속으로 떠나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담요를 깁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멀리 환영처럼 선 히말라야 설산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비롭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한번 만나고 다신 만날 수 없었지만 앞니가 벌어진 구다리 바바는 내게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진실한 세계인가를 어렴풋이 알게 해준 소중한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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