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15. 체험-만족-이중성-명상
우리는 모두 어떤 종류의 체험을 원한다-신비적 체험, 종교적 체험, 성적 체험, 많은 돈, 권력, 지위, 지배력을 갖는 체험 등. 점점 나이가 들면 우리는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욕구는 끝날 수 있지만, 그때는 또 보다 넓고, 깊고, 뜻 있는 체험을 얻고자 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얻기 위한 여러 수단을 써본다-예컨대 예술의 다른 이름인 의식이 확장이라든가 여러 가지 약물의 복용 같은 게 그것이다. 이것은 기억할 수도 없는 옛날부터 있어왔던 낡은 속임수인데-잎사귀를 씹는다든가 또는 뇌세포의 구조에 일시적인 변화를 가져오거나 리얼리티 비슷한 걸 주는 보다 민감한 감수성과 고양된 지각을 가져오는 최근의 화학제품들이 그런 예에 속한다. 더욱 더 체험하고자 하는 이 요구는 인간의 내적 가난을 보여준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체험들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 만일 마음이 좁고, 질투하고, 불안하다면, 가장 최근의 약물을 복용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마음)은 다만 그것의 보잘 것 없는 산물, 그것 자신의 제약된 배경으로부터 나온 보잘 것 없는 투영만을 여전히 보게 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생각에 의해 파괴될 수 없는 완전한 만족, 영구적인 체험을 바란다. 그래서 체험하고자 하는 요구의 뒤에는 만족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만족을 위한 욕구는 체험을 명령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만족의 모든 관심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체험된 것을 이해하기도 한다. 커다란 만족을 얻는 것은 커다란 쾌락이다-체험이 영구적이고, 깊고, 넓으면 넓을수록 그것은 더욱 더 즐길 만하고, 그래서 쾌락은 우리가 요구하는 체험을 형태를 명령하며, 그리고 쾌락은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체험을 재는 자이다. 모든 잴 수 있는 것은 생각의 한계 안에 있으며, 환각을 만들어 내기 쉽다. 당신은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으면서도 완전히 현혹되어 있을 수 있다. 당신은 필연적으로 당신의 제약에 따라 비젼을 볼 것이다. 당신은 예수나 붓다 또는 당신이 믿게 된 누구라도 보게 될 것이며, 당신이 대단한 신자이면 신자일수록 당신의 비젼, 당신 자신의 요구와 충동의 투사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진실한 것과 같은 근본적인 무엇을 찾는데 있어서 쾌락이 자로 사용된다면, 당신은 이미 그 체험이 어떤 것일 거라는 것을 투여한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 당신이 말하는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 속에 어떤 새로운 것이나 오리지널한 것이 있는가? 체험은 도전에 대응한 기억들의 묶음이고, 그것(기억)은 오직 그것의 배경에 따라서만 반응하며, 그리고 당신이 체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영리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반응한다. 그래서 당신은 다른 사람의 체험을 문제 삼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체험도 문제 삼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체험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것은 전혀 체험이 아니다. 모든 체험은 이미 체험된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터이다. 당신은 어떤 체험을 당신의 조건(제약)에 따라 좋은 것, 나쁜 것, 아름다운 것, 신성한 것으로 인지하며, 따라서 한 체험에 대한 인지는 낡은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리얼리티(진실, 실재)의 체험을 요구할 때-우리 모두가 그러기를 바라고 왔거니와-그걸 체험하려면 그걸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리얼리티)을 투사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리얼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생각과 시간의 장속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고가 리얼리티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리얼리티일 수가 없다. 우리는 새로운 체험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아는 어떤 것만을 인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체험을 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전혀 새롭지가 않다. 여러가지 환각제로서 그렇게 하듯 의식의 팽창을 통해서 더욱 나아간 체험을 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식의 범위 속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아주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좀더 넓고 깊은 체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은 아주 얕고 무딘 마음이라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기억과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만일 우리가 전혀 아무 체험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깨어 있기 위해서 체험과 도전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들 자신 속에 아무 갈등이 없고, 아무 변화, 아무 불안(소동)이 없다면, 우리는 깊이 잠들 것이다. 그래서 도전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필요하다. 도전 없이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고 무거워질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많은 흥분과 강렬함을 주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예민하게 하기 위해 도전과 체험에 의존한다. 그러나 깨어 있기 위해 도전과 체험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디게 할 따름이다-즉 그것은 우리를 전혀 깨어 있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도전이나 체험 없이 완전히-즉 내 존재의 일부분이 아니라 완전히 깨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자문한다. 이것은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대단한 감수성을 암시한다. 즉 그것은 내가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요구하는 순간 나는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구와 만족에서 자유롭게 위해서는 나 자신을 연구, 조사할 필요가 있으며, 요구의 본질 전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구는 이중성으로부터 나온다-<나는 불행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바로 그 요구가 불행이다. 누가 착해지려고 노력할 때, 바로 그 선이 그것의 반대인 악이다. 긍정된 모든 것은 그것 자체의 반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것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것을 강화한다. 당신이 진실 혹은 리얼리티를 체험하고 싶어할 때, 바로 그 요구는 있는 것 what is에 대한 당신의 불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요구는 그것(요구)과 반대되는 것을 낳는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것 속에는 있었던 것 what has been이 들어 있다. 그래서 그는 이 끊임없는 요구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중성의 회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 자신을 아주 완전하게 알므로써 마음이 더 이상 뭔가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마음은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즉 그것은 도전을 바라지 않으며 도전을 알지도 못한다, 그런 마음은 <나는 잠들어 있다>거나 <나는 깨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있는 그대로이다. 오직 좌절하고, 좁고, 얕은 마음, 제약된 마음만이 항상 더 많이 얻고자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없이 살 수 있는가-이 끝 없는 비교없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가? 정말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자기 스스로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이 모든 질문을 탐색하는 것이 명상이다. 이 말은 동양과 서양 양쪽에서 다 가장 부적당하게 사용되어 왔다. 명상에는 다른 학파들과 다른 방법 및 다른 체계들이 있다. <당신의 엄지발가락의 움직임을 보라, 그걸 보라, 그걸 보라, 그걸 보라>고 말하는 계통이 있는가 하면, 어떤 자세로 앉아서 숨을 규칙적으로 쉬거나 인지(-감각을 통한 앎-역자)를 연습하라고 하는 계통도 있다. 이 모든것은 완전히 기계적이다. 또 다른 방법은 당신한테 어떤 말을 하나 던져주고, 당신이 그 말을 반복하면 당신은 어떤 비상한 초월적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넌센스일 따름이다. 이것은 자기 체면의 한 형태이다. 아멘이나 옴(힌두교의 최고 승려계급인 브라만에서 종교의식으로 읊는 일종의 영창. 세 가지 소리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소리들은 브라마 Brama 즉 창조, 비슈누 Vishnu 즉 보존, 시바 Siva 즉 파괴를 나타낸다고 하며 혹은 각성, 꿈, 깊은 잠을 나타낸다고 함-역자) 혹은 코카콜라를 무한정 되풀이 외우므로써 당신은 분명히 어떤 체험을 할 터인데 왜냐하면 반복하므로써 마음은 조용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도에서 수천년동안 실천되어 온 것으로서 잘 알려진 현상이다. 이것이 만트라 요가 Mantra Yoga라는 것이다. 반복에 의해 당신은 마음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보잘 것 없고 겉 꾸미는 작은 마음이다. 당신은 정원에서 막대기 하나를 주워서 벽난로 위에 올려 놓고 그 앞에다 매일 꽃 한송이를 놓을 수도 있다. 한 달이 못되어서 당신은 그것을 예배하게 될 것이고 그 앞에 꽃을 놓지 않는 것이 죄가 될 것이다. 명상은 어떤 체계도 따르지 않는다-그것은 끊임없는 되풀이도 아니고 모방도 아니다.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어떤 선생이 학도들에게 집중을 배우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가르치기 시작할 때 애용하는 시작 중의 하나이다-즉 마음을 한 가지 생각에 고정시키고 다른 모든 생각은 몰아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학교 학생도 강제로 시키면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고 추악한 일이다. 이것은 당신이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과 여러 다른 것들 속을 헤매는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걸 뜻한다-모름지기 당신은 마음이 어디를 헤매든지 그 모든 움직임에 민감히 유의해야 하는 데도 말이다. 당신의 마음이 헤맬 때 그것은 당신이 다른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명상은 놀라울 만큼 기민한 마음을 요구한다. 즉 명상은 삶의 전체성-그 속에서는 모든 단편화가 중지된-에 대한 이해이다. 명상은 생각의 통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생각이 통제될 때 그것은 마음 속에 갈등을 키우기 때문이며, 그러나 당신이 생각의 구조와 근원-그 속에 우리가 이미 있었던-을 이해할 때, 생각은 방해(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의 구조에 대한 바로 그 이해가 그것 자신의 단련이며 그것이 곧 명상이다. 명상은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을 느껴 아는 것이며, 옳다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다만 그것(생각과 느낌)을 바라보고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관찰 속에서, 당신은 생각과 느낌의 모든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으로부터 침묵이 나온다. 생각을 짜맞추는데서 오는 침묵은 정체이고 죽음이지만, 생각이 그것 자체의 처음을 이해하고, 그 자체의 본질을 알고, 어떻게 모든 생각이 자유롭지 않고 항상 낡은 것인가를 이해했을 때 오는 침묵이 명상이며, 이 명상 속에는 명상자가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그것의 과거를 비웠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읽었다면, 그것이 명상인 것이다. 당신이 나중에 생각해 보기 위해 다만 다소의 말들을 가져가고 또 약간의 생각을 모았을 뿐이라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명상은 모든 것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보는 것 즉 그것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하게 보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리고 아무도 당신에게 어떻게 주의 깊어지는가를 가르칠 수 없다. 만일 어떤 체계가 어떻게 주의 깊게 되는가를 당신에게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체계에 대해 주의 깊은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주의가 아니다. 명상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며, 아무에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는데, 그점이 그것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기술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권위가 없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배우고, 자신을 관찰할 때, 당신이 어떻게 걷고, 어떻게 먹는지를 관찰하고, 당신이 말하는 것, 가십, 증오, 질투를 관찰할 때-그 모든 것을 아무 선택없이, 당신 자신 속에서 알아차릴 때, 그것이 명상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당신이 버스에 앉아 있거나 빛과 그림자로 가득찬 숲 속을 걸어갈 때, 또는 새가 노래하는 걸 듣거나 당신의 아내나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다. 명상을 이해하는 데에 사랑이 있으며, 사랑은 체계, 습관, 방법을 따르는 것의 산물이 아니다. 사랑은 생각에 의해 심어 키워지지 않느다. 사랑은 아마도 완전한 침묵이 있을 때 존재하게 되는데, 그 침묵이란 그 속에 명상자가 완전히 없은 그런 침묵이다. 그리고 마음은 생각과 감정으로서의 그것 자신의 운동을 이해할 때에만 고요해질 수 있다. 이 생각과 감정의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아무 비난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이 훈련이며, 그런 종류의 훈련은, 순응 훈련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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