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13. 생각이란 무엇인가-관련과 행동-도전-물질-생각의 시작
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배려, 논리 및 온전한 정신(우리의 나날의 일을 위한)을 가지고 연습되어야 할 사고의 의의와 전혀 뜻없는 사고에 대해 탐색하기로 하자. 그 두가지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사고가 닿을 수 없는 훨씬 깊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생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생각은 어떻게 우리의 모든 행동을 제약하는가 하는 복잡한 구조 전부를 이해하도록 해보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아마도 생각이 발견한 일이 없는 어떤 것, 사고가 열어 주지 못한 어떤 것과 만날는지도 모른다. 왜 사고가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그다지도 중요하게 되었는가-관념으로서의 사고, 우리의 뇌세포 속에 축적돼 있는 기억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고가 왜 중요하게 되었는가? 아마도 당신들 대부분은 일찌기 그런 질문을 묻지조차 않았을는지도 모르고, 또 만일 물었다면 이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중요한 건 감정이야.> 그러나 당신이 그 둘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만일 사고가 감정에 연속성을 주지 않으면, 감정은 금방 꺼져 버린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고되고, 지루하고, 두려운 삶 속에서, 왜 생각은 그렇게 어이없는 중요성을 갖는가? 내가 스스로 묻고 있는 것처럼 당신도 스스로 물어 보라-왜 우리는 생각의 노예인가-조직할 수 있는 교활하고 영리한 생각, 일들을 시작할 수 있는 생각, 그 많은 것을 발명해내고, 그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그렇게 많은 공포와 불안을 낳은 생각,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고 또 그것 자체의 꼬리를 좇는 생각-어제의 쾌락을 즐겼고 현재 속에서 그 쾌락에 연속성을 주었고 미래에도 그렇게 하게 될 생각-항상 활동적이고, 수다를 떨고, 움직이고, 구성하고, 가져가고, 보태고, 가정하는 사고의 노예인가?
관념은 우리에게 행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여러 분야의 지성인들에 의해서 책 속에 그렇게도 영리하게 표현된 관념 말이다. 그 관념들이 교활하고 기묘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들을 숭배하고, 그것들이 담겨 있는 책들을 숭앙한다. 우리가 그 책들이고, 우리가 그 관념들이며, 우리는 그것들에 의해 아주 무겁게 제약되어 있다. 우리는 영원히 관념과 이상을 토론하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견해를 내놓는다. 모든 종교가 그것 자체의 교리, 그것 자체의 법칙, 신에게 이르기 위한 그것 자체의 발판을 갖고 있으며, 생각의 처음을 문제 삼을 때 우리는 그 관념들의 전건축물을 묻는다. 우리는 관념을 행동으로부터 분리했는데, 왜냐하면 관념은 언제나 과거의 것이고 행동은 언제나 현재의 것이기 때문이다-즉 삶은 언제나 현재이다. 우리는 삶을 두려워하며 그러므로 관념으로서의 과거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 자신의 사고 작용을 관찰하는 것,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다만 관찰하는 것,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반작용이 어디로부터 솟아나는가를 관찰하는 일은 정말 엄청나게 흥미 있다. 분명히 기억으로부터 솟아난다. 도대체 처음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우리는 그 처음을 발견할 수 있는가-즉 그 처음이란 기억의 처음을 말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생각도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이 유지되고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쾌락에 연속성을 주는가에 대해 알았고 또 어떻게 생각이 쾌락의 반대, 즉 공포와 고통도 유지하는지를 알았으며, 그래서, 경험자-즉 사고자-가 쾌락이고 고통이며, 또한 쾌락과 고통에게 자양을 공급하는 실체라는 걸 알았다. 사고자가 쾌락을 고통으로부터 분리한다. 그는 쾌락을 위한 요구 바로 그것 속에 그가 고통과 공포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은 항상 쾌락을 요구하는데, 생각은 이 쾌락을 충성, 도움, 줌, 유지, 봉사 등의 다른 말들로 덮어 싼다. 왜 우리는 봉사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주유소는 훌륭한 봉사를 한다. 돕고, 주고, 봉사한다는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두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빛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 찬 꽃이 <나는 주고, 돕고, 봉사한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땅을 덮고 있다.
생각이란 너무 교활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을 그것 자체의 편리를 위해 왜곡한다. 생각은 쾌락을 위한 그것의 요구 속에 그 자체의 속박을 초래한다. 생각은 우리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의 이중성의 양육자이다-우리 속에는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폭력이 있지만, 또한 평화를 위한 욕망, 친절하고 부드러우려는 욕망도 들어 있다. 이것이 항상 우리의 삶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은 우리 속에 이 이중성, 이 모순을 키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쾌락과 고통에 대해서 가졌던 무수한 기억들도 축적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 기억들로부터 그것(생각)은 다시 생겨난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했다시피, 생각은 과거이며, 생각은 언제나 낡은 것이다. 모든 도전이 과거에 의해 만나지듯이-도전은 항상 새로운 것이니까-도전에 대한 우리의 마주침은 언제나 완전히 부적절한 것일 터이고, 그래서 우리는 모순, 갈등, 모든 불행 및 슬픔의 상속자인 것이다. 우리의 작은 머리는 그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갈등 속에 있다. 그게 열망하든, 모방하든, 순응하든, 정화하든 혹은 그것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든지 간에-그것은 갈등의 상태에 있으며 그래서 갈등을 낳을 것이다.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물질적인데 왜냐하면 생각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마루, 벽, 전화들이 물질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은 물질이다. 어떤 패턴 속에서의 에너지 작용이 물질이 된다. 에너지 있는 곳에 물질 있다. 모든 삶이 그렇다. 우리는 생각이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생각은 물질이다. 생각은 이데올로기처럼 물질이다. 어디에 에너지가 있으면 그건 물질이 된다.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있을 수 없으며, 둘 사이에 조화가 있을수록 뇌세포들은 더 균형있고 더 활동적이다. 생각은 쾌락, 고통, 공포의 패턴을 세워 놓았고, 수천년 동안 그 속에서 기능하고 있으면서 그걸 깨뜨리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생각이 그 패턴을 낳았기 때문이다. 어떤 새로운 사실이 생각에 의해 보여질 수 없다. 그것(새로운 사실)은 나중에 생각에 의해 언어상으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새로운 사실의 이해는 생각에 대해 리얼리티가 아니다. 생각은 어떤 심리적 문제도 풀 수 없다. 아무리 현명하고, 아무리 영악하고, 아무리 박식하고, 생각이 과학을 통해, 전자 두뇌를 통해, 강제나 필요성을 통해 만들어낸 구조가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생각은 결코 새롭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어떤 중대한 질문에도 결코 대답할 수 없다. 낡은 두뇌는 살아 있는 삶의 엄청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각은 어떤 것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 없는 사물을 보기 때문에 뒤틀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별난 트릭을 부릴 수 있고, 그리하여 그것은 의존할 게 못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 생각하는 이유, 당신이 사용하는 말, 일상 생활에서의 당신의 행동 방식, 당신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 당신이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 당신이 걷는 방식, 당신이 먹는 방식들의 전구조를 이해한다면-이 모든 것을 당신이 안다면 당신의 마음은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속임 당하는 것도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요구하고 예속시키는 어떤 것이 아니다-그것은 비상하게 조용하고 유연하고, 민감하고, 고독하며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속임수도 없다. 당신이 완전한 주의의 상태에 있을 때 관찰자, 사고자, 중심, <나>가 없어지는 걸 주목한 일이 있는가? 그런 주의 상태에서 생각은 시들기 시작한다. 만일 누가 어떤 것을 아주 분명히 보고 싶어한다면, 그의 마음은 모든 편견, 지껄임, 대화, 이미지, 그림 따위들이 없이 아주 고요하지 않으면 안된다-즉 보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당신이 생각의 처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침묵 속에서이다-그러니까 찾고, 질문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할 때는 볼 수 없다. 그리하여 당신이 <생각의 처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조용할 때에만, 당신은, 그 침묵으로부터 어떻게 생각이 형성되는가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생각이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대한 앎이 있으면 생각을 통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우리의 생각을 통어하느라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이건 좋은 생각이니, 나는 이것에 관해 많이 생각해야 해. 이건 추한 생각이니, 나는 이걸 억제해야 해.> 한 생각과 다른 생각, 한 욕망과 다른 욕망 사이에 항상 싸움이 계속되고, 한 쾌락이 다른 모든 쾌락을 지배한다. 그러나 생각의 시작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생각 속에 모순이 없다. 그런데 당신이 <생각은 언제나 낡은 것이다>라거나 <시간은 슬픔이다>라는 말을 들 때, 생각은 그것을 번역하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번역과 설명은 어제의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 있으며, 그래서 당신은 늘 당신의 제약에 따라 번역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진술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단지 완전한 주의 attention(집중 concentration이 아니다)만을 기울인다면, 당신은 관찰자도 없고 관찰되는 것도 없으며,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생각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게 먼저 시작됐는가?>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아무데로도 데려가지 않는 영리한 추론이다. 생각이 없는 한-이것은 기억 상실이나 백지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기억, 체험, 지식-이것은 모두 과거의 것들이다-으로부터 끌어낸 생각이 없는 한, 도대체 사고자가 없는 한, 당신은 자기 자신 속에서 보고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철학적이거나 신비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실재하는 사실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당신은-만일 당신이 여행을 떠난 뒤 이렇게 멀리 와 있다면-당신이 어떤 도전에 대해서, 낡은 머리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 대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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