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11. 보는 것과 듣는 것-예술-아름다움-엄격함-이미지들-문제들-공간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물어왔고, 내 생각에는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는데, 말하자면 그 문제에 대한 더 철저한 천착과 더 큰 인식이 필요한 지점에 이르렀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은 위안, 안전, 여생 동안 계속적인 감정적 만족을 위한 보장 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나 같은 사람이 와서 <그게 정말 사랑인가?>하고 물으면서 당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게 아주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보려고 하지 않는다-그러기 보다는 영혼이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해 토론하려고 한다-그러나 당신이 보는 곳으로 밀어넣어질 때, 당신은 당신이 항상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사랑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것은 상호 만족이며, 상호착취라는 걸 깨달을 것이다. 내가 <사랑은 내일도 어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무 중심이 없을 때 사랑이 있다>고 할 때, 그 말은 나에게는 정말이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걸 인용하고 그걸 어떤 공식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 당신은 스스로를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보는 자유, 모든 비난, 모든 판단, 모든 동의와 반대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며-또는 듣는 것도 그렇다-보는 것과 듣는 것은 같은 것이다. 만일 당신의 눈이 근심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당신은 황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연과의 접촉을 잃었다. 문명은 점점 대도시를 향해 가고 있다-우리는 점점 더 도시인이 되어 가고 있고, 밀집한 아파트촌에서 살고 있으며, 저녁 하늘이나 아침 하늘을 바라볼 공간조차도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는 상당한 아름다움과의 접촉을 잃고 있다. 우리가 해뜨는 거나 해지는 것, 달빛, 혹은 물 위의 빛의 반사를 얼마나 못 보고 있는가에 대해 당신이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자연과의 접촉을 잃으면 우리는 자연히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미술관과 연주회를 가고, TV를 보며 그밖에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고 예술에 관해 많은 생각과 말을 한다. 왜 우리는 예술에 그다지도 의존하는 것일까? 그것은 도피의 한 형태이며 자극의 한 형태인가? 만일 당신이 자연과 직접 접촉한다면-만일 당신이 날으는 새를 보고, 하늘의 모든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보고, 언덕 위의 그림자들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그림을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당신 주위의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더 잘 보기 위한 자극을 얻으려고 약물에 의지하는 것일 것이다.
매일 아침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던 종교적 교사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아침 강단에 올라가 막 얘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와 창가에 앉더니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새는 온가슴을 다해 노래했다. 그러다가 노래를 그치고 날아가 버리자 선생은 말했다. <오늘 아침 설법은 끝났습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가장 커다란 어려움중의 하나는 우리 스스로가 정말 분명히 보는 일로서, 그것은 바깥 사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내적 삶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가 나무나 꽃이나 또는 사람을 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말 그들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 말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는데 지나지 않는 것일까? 즉 당신이 나무를 보거나 어느날 저녁 빛나는 구름을 보면서 기뻐할 때, 당신은 그것을 단지 눈이나 지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정말 보는 것일까? 당신은 가령 나무 같은 객관적 사물을, 아무 연상 없이, 그것에 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지식도 없이, 아무 편견이나 판단 없이, 당신과 나무 사이에 어떤 막을 만들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어떠한 말도 없이 그것을 본 경험을 해본 일이 있는가, 그렇게 해보고,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존재를 다해, 당신의 에너지의 전부를 기울여 나무를 볼 때 실지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그 강렬함 속에서 당신은 관찰자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즉 오직 주의력만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부주의가 있을 때 거기엔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 있다. 당신이 어떤 것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보고 있을 때 거기엔 개념, 공식, 혹은 기억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이 이해하기 위해 퍽 중요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매우 조심스런 연구가 필요한 어떤 것을 구명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기포기와 함께 나무나 별 또는 번쩍이는 강물을 보는 마음만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며, 그리고 우리가 정말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랑의 상태에 있다. 우리는 흔히 비교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알거나 혹은 사람이 짜 맞춰 놓은 생각을 통해서 아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대상에 속한 것으로 돌린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내가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내가 향유하는 까닭은 건축에 대한 나의 지식 및 다른 건물들과의 비교 때문이다. 그러나 인제 나는 자문한다, <대상 없는 아름다움이 있을까?> 검열관이며 경험자이며 사고자인 관찰자가 있을 때, 아름다움은 외적인 어떤 것, 관찰자가 보고 판단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거기엔 아름다움이 없으며, 그러나 관찰자가 없을 때-이런 상태를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명상과 탐구가 요청되지만-비로소 대상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의 전적인 포기에 있으며, 자기포기는 와전한 엄격함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데-이 엄격함이란 성직자의 그것처럼 가혹함, 제재, 규칙 및 순종이 아니고, 옷, 생각, 음식 및 행위의 엄격함도 아니며, 완전한 겸손인 완전히 순진하게 되는 엄격함을 말한다. 그럴 때 거기엔 성취도 없고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도 없다-즉 거기엔 첫발이 있을 뿐이며 이 첫발이 영원한 걸음인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혼자 걷고 있거나 누구와 같이 걷고 있다가 하던 말을 그쳤다. 당신은 자연에 둘러싸여 있고, 거기엔 개 짖는 소리도, 차 지나가는 소리도, 또는 새가 나는 소리조차도 없다. 당신은 완전히 말이 없고 당신 주위의 자연도 완전히 말이 없다. 관찰자나 관찰되는 것이 다같이 그런 침묵의 상태에 있을 때-관찰자가 자기가 관찰한 것을 생각으로 번역하지 않을 때-그 침묵 속에 아름다움의 판이한 내용이 있다. 거기엔 자연도 관찰자도 없다. 있는 건 완전히 고독한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고독-고립이 아니라-고요 속의 고독이며, 그 고요가 아름다움이다. 당신이 사랑할 때, 거기 관찰자가 있는가? 사랑이 욕망이고 쾌락일 때에만 관찰자가 있다. 욕망과 쾌락이 사랑과 결부되지 않을 때, 사랑은 강렬하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것은 어제도 내일도 없다.
아무 선입견, 아무 이미지 없이 볼 때에만 우리는 삶 속의 어떤 것과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실로 상상적이다-즉 생각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 만일 내가 당신에 관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또 당신은 나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서로 전혀 보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 관해 만든 이미지이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관계를 그르치게 하는 이유이다. 내가 당신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어제 당신을 알았다는 얘기이다. 나는 바로 지금의 당신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당신에 대한 이미지일 따름이다. 그 이미지는 당신이 나를 찬양하거나 모욕하느라고 한 말, 당신이 나에게 한일 등으로 짜맞춰진 것이고-내가 당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기억으로 짜맞춰진 것이며-그리고 나에 대한 당신의 이미지도 같은 방식으로 짜맞춰진 것인데, 관계를 갖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 정말 합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같이 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진정한 관계를 막는다. 만일 우리가 관계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협력이 가능하지만 그러나 이미지나 상징 또는 이념적 생각들을 통해서는 협동할 수 없다. 서로의 참된 관계를 이해할 때에만 사랑의 가능성은 있으며, 우리가 이미지들을 가질 때 사랑은 거부된다. 따라서 당신이 어떻게 해서 당신의 아내, 당신의 남편, 당신의 정치가들, 당신의 신들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도 지적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나날의 삶 속에서 참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당신은 이미지들 이외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이미지들이 당신과 당신이 보는 것 사이에 간격을 만들고 그 간격 속에 갈등이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지금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바깥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안에서 만드는 간격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 간격은 사람들을 그들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갈라 놓은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어떤 문제에 쏟는 주의력 바로 그것이 문제를 푸는 에너지이다. 당신이 당신의 완전한 주의력을 기울일 때-즉 당신 속의 모든 것을 기울일 때-거기엔 관찰자가 없다. 거기엔 순전한 에너지로서의 주의 상태가 있을 뿐이며, 그 순전한 에너지가 총명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당연히 완전한 침묵일 터이며, 그 침묵, 그 고요-훈련된 고요가 아니라-는 완전한 주의력이 있을 때 찾아 온다. 관찰자도 관찰되는 것도 없는 그 완전 침묵이 종교적 정신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일어난 일을 말로 나타낼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말로 발설된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 스스로 발견하려면 당신이 그것에 통달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다른 모든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래서 당신이 한 가지 문제-그것이 무엇이든 상관 없다-를 완전히 풀 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모든 문제와 쉽게 부딪쳐서 그것들을 풀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심리적 문제들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미 어떤 문제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문제를 불완전하게 만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문제의 본질과 구조를 알고 그것을 완전히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생겨날 때 그것과 만나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그것이 우리 마음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일 누가 어떤 문제를 안고 한 달이나 하루, 혹은 심지어 몇 분을 견딘다면, 그것은 마음을 일그러지게 한다. 그러면 어떤 문제를 아무 뒤틀림 없이 즉각적으로 만나고, 즉각적으로, 완전히 그것에 대해 자유롭고, 그래서 마음 속에 기억도, 아무 생채기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 기억들이란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이미지들이고 이 이미지들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범상치 않은 것을 만나며 따라서 거기엔 모순과 갈등이 있다. 삶은 아주 현실적인 것이며-삶은 추상이 아니다-당신이 이미지로서 그것을 만날 때 여러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시공의 간격 없이, 어떤 사람 자신과 그가 두려워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 없이 모든 문제를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관찰자가 아무 연속성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데, 그 관찰자란 이미지 건조자이고, 기억과 생각의 퇴적이며, 여러 추상의 묶음인 것이다.
당신이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거기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이 있다. 하늘은 빛나는 별들로 넘치고 서늘한 공기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있다-즉 관찰자이고, 경험자이고, 사고자이며, 활동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당신, 중심이며, 공간을 만들어 내는 당신이 있다. 당신은 당신과 별들 사이의 거리(공간), 당신 자신과 당신의 아내, 남편, 또는 친구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지 못할 터인데, 왜하냐면 당신은 이미지 없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며,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혹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이 모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신은 그것에 관해서 말하고, 그것에 관해 쓰지만, 그러나 드물게 있는 완전한 자기포기의 사이를 제외하면 당신은 그것을 안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 주위에 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심이 있는 한, 거기엔 사랑도 아름다움도 없다. 아무 중심도 아무 주위도 없을 때 사랑이 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이 아름다움이다. 당신이 상대편의 얼굴을 볼 때, 당신은 중심으로부터 보고 있는 것이며, 그 중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내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이 이다지도 공허하고 무감각한 이유이다. 당신은 사랑이나 아름다움을 경작할 수 없고, 진리를 만들어낼 수도 없지만,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항상 당신이 하고 있는 바를 안다면, 당신은 앎을 경작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앎으로 인해 당신은 쾌락, 욕망, 슬픔, 완전한 고독, 인간의 권태의 본질을 알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 당신은 <거리(공간)>라고 불리우는 것과 만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과 당신이 바라보는 것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는 걸 당신은 알게 될 것이고, 그리고 사랑이 없이는, 당신이 아무리 세계를 개혁하려 하거나 새로운 사회질서를 가져오려고 애쓴다 해도, 혹은 아무리 당신이 개선에 관해 말한다고 해도, 당신은 단지 심한 괴로움만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당신에 이르게 된다. 지도자도 없고 선생도 없으며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이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 속에 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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