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8. 자유-저항-고독-천진성-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살기
어떤 억압의 고통도, 어떤 틀에 맞추는 잔혹한 훈련도 진리로 안내하지 못했다. 진리와 만나기 위해서 마음은, 한 점의 뒤틀림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정말 자유롭기를 원하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우리가 자유를 말할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불편하거나 불쾌한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고통스럽거나 추악한 기억 및 불행한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유쾌하고 만족스런 이데올로기, 신조 및 관계들은 지니고 유지한다. 그러나 저것 없이 이것을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살펴 봤듯, 쾌락은 고통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걸 원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유의 본질과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것이 자유인가-즉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어떤 종류의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이 자유인가? 아니면 자유 자체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인가? 예컨대 당신은 질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자유는 대응이 아닌가, 그리고 따라서 전혀 자유가 아니지 않은가? 당신은 도그마를 분석하고 차내버림으로써 아주 쉽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러나 도그마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동기는 그것 자체의 반응을 갖고 있는데, 왜냐하면 어떤 도그마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그 도그마가 더 이상 유행하는 것도 아니고 또 편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는 당신이 국제주의를 믿기 때문에, 혹은 그 깃발 및 모든 쓰레기 같은 것들과 더불어 내세워진 어리석은 민족주의적 도그마에 매어달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보아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당신은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당신은 쉽게 그걸 물리칠 수 있다. 또 당신은 당신에게 훈련이나 저항의 결과로서의 자유를 약속하는 정신적 지도자나 정치적 지도자에 반발함직도 하다. 그러나 그런 합리주의, 그런 논리적 결론이 자유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만일 당신이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순응, 또 다른 형태의 지배를 가져오게 될 또 하나의 반응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일련의 반응들(반응들의 연쇄, 쇠사슬)을 가질 수 있고 각 반응을 자유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그것은 마음이 매달리는 변형(가감)된 과거의 연속일 따름이다. 모든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젊은이들은 사회에 저항하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좋은 거지만, 그러나 저항은 자유가 아닌데, 왜냐하면 당신이 저항할 때 그것은 하나의 대응이고, 이 대응은 그것 자체의 패턴을 세우며, 그리하여 당신은 그 패턴에 붙잡혀 있는 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이 뭔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른 틀 속의 낡은 것이다. 어떤 사회적, 정치적 저항도 결국 무척 낡은 부르좌의 정신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유는 당신이 저항을 통해서 보거나(알거나) 행동하지 않을 때에만 온다. 보는 것(아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며 그 행동은 당신이 위험을 볼 때처럼 즉각적인 것이다. 그래서 거기엔 아무 두뇌작용도, 토론도, 주저도 없다-그 위험 자체가 행동하도록 하며, 그래서 보는(아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며 그리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자유는 마음의 상태이다-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의식, 모든 걸 회의하고 질문하는 자유이며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집중적이고 능동적이고 활기에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종류의 의존, 예속, 순응 및 수락을 내던진다. 그런 자유는 완전히 혼자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환경과 그것(문화) 자체의 경향에 그토록 의존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마음이 그런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즉 완전히 고독하고 아무리 리더쉽도 전통도 권위도 없는 그런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이 고독은 어떤 자극이나 지식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체험이나 결정의 결과도 아닌 마음의 내적 상태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결코 내적으로 고독하지 않다. 스스로 격리, 절연하는 고립 isolation과 고독aloneness, solitude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고립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안다-아픔을 당하지 않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자기 둘레에 벽을 쌓고, 또 다른 형태의 괴로움인 이탈을 도모하며, 이데올로기의 허황한 상아탑 속에 사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고독은 이것과 아주 다른 어떤 것이다. 당신은 기억으로 가득차고, 제약 투성이이며, 어제의 투덜거림으로 꽉차 있기 때문에 결코 고독하지 않다-당신의 마음은 그것이 축적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비우지 않은 것이다. 고독하려면 당신은 과거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고독할 때, 즉 어떤 가족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떤 나라에도 문화에도, 특별한 대륙에도 속해 있지 않고 완전히 고독할 때, 국외자가 된 느낌이 있게 된다. 이렇게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천진하며, 이 천진성이 마음을 슬픔으로부터 해방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말을 짊어지고 살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불행의 기억들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고독한 것이며, 그리고 고독한 마음은 순진할 뿐만 아니라 젊으며-나이나 시간에 있어서 젊은 게 아니라 어떤 나이에서든 젊고 천진하다-또 그런 마음만이 진실한 것을 알며 말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안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당신은, 당신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나 이러저러했던 바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아무 떨림 없이, 아무 그릇된 겸손, 공포, 합리화나 비난 없이 당신 자신을 볼 수 있는지 보라-오직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과 더불어 살라. 어떤 것과 친근하게 같이 살 때에만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에 익숙해지는 순간-그 익숙해지는 것이 당신 자신의 불안이든 선망이든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지간에-당신은 더 이상 그것과 더불어 살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강가에서 산다면 며칠이 지난 뒤 당신은 그 물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며, 또 만일 당신이 방안에 그림을 하나 걸어 놓고 매일 본다면 몇주일 뒤 당신은 그걸 잃어버린다. 그것은 산이나 계곡이나 나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당신의 가족이나 남편이나 아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질투, 선망, 불안 같은 것과 더불어 살 때 당신은 그것에 익숙해져서는 안되며, 그것을 수락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새로 심은 나무를 햇빛이나 폭풍으로부터 보호하듯 그걸 보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은 그걸 비난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그걸 보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걸 사랑하기 시작한다-당신이 그걸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질투하고 불안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당신과 나-은 우리가 무디어지고, 선망하고, 무서워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 우리가, 실은 그렇지도 않으며 엄청나게 애정을 갖고 있다고 믿으면서, 쉽게 마음 상하고 쉽게 알랑거리고 싫증내게 되면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우리는 그것들을 수락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병적이 되거나 혹은 의기소침하거나 의기 양양하게 됨이 없이 다만 그걸 관찰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문해 보자. 이 자유, 이 고독,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바 우리의 전구조와의 만남-이것은 이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즉 자유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럴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시간을 끌어들이자 마자 당신은 자기 자신을 더욱 더 노예화시키기 때문이다. 당신은 점진적으로 자유롭게 될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다음 질문은, 당신이 그 자유를 의식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나는 자유롭다>고 말하면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그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지나간 어떤 것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원망, 소원, 갈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연스럽게 올 수 있을 따름이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 이미지를 만들어 내므로써 그걸 찾을 수 없다. 그것(자유)을 만나려면 마음은 삶을 바라보는 법을 알아야 하며, 이것은, 시간의 속박 없이, 의식의 영역 너머에 있는 자유를 위한 굉장한 운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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