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7. 관계-갈등-사회-가난-약물-의존-비교-욕망-이상-위선
우리가 전장에서 생각해본 바 폭력의 종식은 마음이 스스로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할 필요는 없으며, 따라서 그것(마음)의 모든 관계가 평온한 상태를 뜻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미지 형성, 방어 메카니즘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상대방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며, 이 두 개의 이미지가-사람들 자신이 아니라-관계를 갖는다. 아내는 남편에 관한 이미지를 가지며-아마 의식적이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미지는 있다-남편은 아내에 관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더욱 더 이미지를 보탬으로써 항상 그 이미지들을 강화한다. 그리고 관계를 갖는 것은 이 이미지들이다. 이미지 형성이 있는 한 두 사람 혹은 많은 사람들 사이의 진짜 관계는 완전히 끝나고 만다. 이러한 이미지들에 기초한 관계는 관계 속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지는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추상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건 이것이다-즉 관념 속에서, 이론 속에서, 상징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남들에 관해 만들어낸-따라서 전혀 실재가 아닌-이미지들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그것이 재산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관념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이든, 근본적으로 이 이미지 형성에 근거해 있으며, 따라서 거기엔 언제나 갈등이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 속에서 완전히 평화로운 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든 삶은 관계 속에서의 운동이고,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삶이라는 건 없으며, 그리고 만일 삶이 어떤 추상, 관념, 사변적 전제 위에 기초해 있다면, 그런 추상적 삶은 필연적으로 싸움터가 되는 관계를 초래한다. 그러면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런 강요, 모방, 억압 또는 승화 없이 완전히 정돈된 내적 삶은 가능한가? 사람은 관념의 틀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닌 삶-어떤 순간에도 어지러워지지 않는 내적 고요-다시 말해서 어떤 환상적이고 신비한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집과 일터의 나날의 삶 속에서 유지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질서를 자기 자신 속에 마련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이 질문 속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의식의 어느 구석도 갈등으로 물들지 않은 데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관계-그것이 친한 사람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이웃이나 사회와의 관계이든-속에는 이 갈등이 있다. 즉 반대, 분열 상태, 분리, 이중성 등의 갈등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회에 대한 관계를 관찰해 보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즉 아주 피상적인 대응이나 아니면 황폐한 결과를 가져오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갈등을 일상적 실존의 고유한 부분으로 받아 들여왔는데 왜냐하면 그는 경쟁, 질투, 탐욕, 취득심, 공격 등을 삶의 자연스런 방식으로 받아 들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한 생활방식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액면 그대로의 사회구조를 받아 들이는 것이며 그래서 존경할 만함의 패턴 속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사로잡혀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이 엄청나게 존대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과 가슴을 점검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그리고 나날의 삶 속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점검해 보면, 우리가 사회의 패턴(양식 혹은 모형)에 순응하는 한 삶은 전장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걸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그리고 어떤 종교적인 사람도 그런 사회를 수락할 수 없겠거니와-우리는 비로소 사회의 심리적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사회의 사물들로서 풍부하다. 사회가 우리 속에 만들어 놓은 것,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은 탐욕, 질투, 분노, 증오, 선망, 불안 등인데-우리는 이 모든 것들로서 매우 풍부한 것이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가난을 설교해왔다. 승려는 승복을 입고, 이름을 갈고, 머리 깎고, 암자에 들어가 가난과 순결을 맹세한다. 동양에서는 허리에 걸치는 간단한 옷 한 벌, 승복 한 벌에, 하루 한끼를 먹으며, 우리는 모두 그런 가난을 존경한다. 그러나 가난의 옷을 입은 사람들도 내적,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의 사물들로 풍부한데,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지위와 명망(위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이런 지위 혹은 저런 등급에 속해 있고, 이런 종교나 저런 종교에 속해 있으며, 여전히 한 문화, 한 전통의 분열 속에 살고 있다. 그런 가난이 아니다. 가난은, 옷이 좀 더 많고 먹을 게 좀 더 많다고 하더라도-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는 과시를 하려는 충동이 있다. 마음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난은 놀랄 만하게 아름다운 것이 된다. 우리는 내적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아무 요구, 아무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그렇다, 아무것도! 이 내적 가난만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엔 아무 갈등도 없다. 그러한 삶은 어떤 교회에서도 혹은 어떤 사원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 축복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 자신을 사회의 심리적 구조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가-즉 우리들 자신을 갈등의 핵심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가? 갈등의 어떤 가지들을 잘라내고 다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지금 완전한 내적-따라서 외적-고요 속에 살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식물적으로 되거나 정체적이 된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역동적이고 생동적이며 힘차게 될 것이다. 어떤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해서는 대단히 정열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육체적, 지적 에너지뿐만 아니라 어떤 동기, 심리적 자극 혹은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자극에 의존한다면 바로 그 자극이 마음을 둔하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어떤 약물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을 일시적으로 명징하게 보는 힘을 얻을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그래서 그 약물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자극-그것이 교회의 자극이든 술이나 약물 혹은 말의 자극이든-은 필연적으로 의존을 가져오며, 그리고 그 의존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을 분명히 보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생동적 에너지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모두 불행하게도 심리적으로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의존하는가? 왜 의존하고 싶은 충동이 있는가? 우리는 더불어 여행하고 있다-즉 당신은 당신의 의존의 원인들을 당신에게 말하기 위해 나를 기다린 게 아니다. 우리가 더불어서 찾으면 우리는 둘이 다 발견하게 될 터이고 따라서 그 발견은 당신 자신의 것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그것은 당신에게 활력을 줄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스스로 안다-예컨대 나를 자극하는 청중이 그것이다. 나는 많은 청중한테 강연을 하므로써 그들로부터 일종의 에너지를 끌어 낸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내 말에 동의하든 반대하든지간에, 그 청중한테 의존한다. 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더 나에게 활력을 준다. 만일 그들이 동의하면 그것(활력)은 매우 얕고 텅빈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한테 강연하는 게 아주 자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청중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왜 나는 의존하는가? 왜냐하면 나 자신 속에서 나는 얕으며, 나 자신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 자신 속에 항상 넘치고, 풍부하고, 활력 있고, 움직이며, 살아 있는 원천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의존한다. 나는 그 원인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원인의 발견이 나를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게 할것인가? 그 원인의 발견은 다만 지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분명히 내 마음을 그것의 의존성으로부터 해방하지 않는다. 어떤 관념을 단순히 지적으로 수락하는 것이나,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감정적 묵인은, 자극을 주게 될 어떤 것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마음을 의존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은 자극과 의존의 전구조를 아는 것이며 그 의존이 어떻게 마음을 어리석고, 둔하고, 활발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의 전부를 보는 것만이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전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걸 따져보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어떤 특별한 관점이나 소중히 여기는 독특한 체험으로부터 삶을 볼 때, 또는 내가 모은 어떤 독특한 지식으로부터 삶을 볼 때-위의 것들이 나의 배경이며 또 <나>인데-나는 전적으로 볼 수 없다. 나는 내 의존의 원인을 지적으로, 말로, 분석을 통해서 발견했지만, 그러나 생각이 탐색한 것은 무엇이든지 단편적일 것임에 틀림 없으며, 따라서 생각이 끼어들지 않을 때에만 나는 어떤 것을 전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야만 나는 나의 의존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즉 나는 있는 것을 정말 본다. 나는 좋고 싫고 없이 그걸 본다-나는 그 의존을 제거하고자 원하지도 않으며,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걸 관찰하며, 그리고 그러한 관찰이 있으면 나는 그림의 조각이 아니라 그림 전부를 볼 수 있고, 또 마음이 그림 전부를 볼 때 자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단편화가 있을 때 에너지의 분산이 있음을 알아냈다. 나는 에너지의 분산의 바로 그 원인을 발견했다.
만일 당신이 모방하고, 권위를 받아들이고, 사제한테 의존하고, 의식, 도그마, 당 혹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면 에너지의 낭비가 없으리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떤 이데올로기-그것이 좋든 나쁘든 또는 그것이 신성하든 신성하지 않든-를 따르고 수락하는 것은 조각난 행동이요 따라서 갈등의 원인이며, 그리고 <있어야 하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분열이 있는 한 필연적으로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또 어떤 갈등이든 그것은 에너지의 분산이다. 당신이 스스로 <어떻게 나는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갈등이 증가하게 되는 반면, 만일 당신이 그것을-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보듯-사실로서 분명히, 똑바로 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거기엔 아무 갈등도 없는 삶의 진실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걸 달리 얘기해 보자. 우리는 언제나 그런 우리(있는 우리)와 그래야 하는 우리(있어야 하는 우리)를 비교한다. 그래야 하는 것(당위)은 우리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의 투영이다. 비교가 있으면 갈등이 있는데, 이 비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과의 비교를 말하며, 그리하여 있었던 것과 있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게 된다. 아무 비교가 없을 때에만 있는 것 what is이 있으며, 그리고 있는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 속에 있는 것-그것이 절망, 추악함, 잔인성, 공포, 불안 등 어떤 것이든-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기울일 수 있고, 그것과 더불어 완전히 살게 된다. 그러면 모순이나 대립이 없게 되고 그래서 갈등이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어떤 것과 비교하고 있다-즉 더 돈 많고 더 훌륭한 사람, 더 머리 좋은 사람, 더 애정 깊고, 더 유명하고, 더 이렇고 더 저렇고... 그 <더>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을 항상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갈등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도대체 비교라는 건 왜 있는가? 왜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다른 것과를 비교하는가? 비교는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져 왔다. 모든 학교에서 A는 B와 비교되었고, A는 B처럼 되기 위해 그 자신을 파괴했다. 당신이 전혀 비교하지 않을 때, 이상도 대립도 없고 이중성의 요인도 없을 때,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과 다르려고 애쓰지 않을 때-당신 마음 속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당신의 마음이 반대되는 걸 만들기를 그치고, 고도로 총명하고 고도로 민감하고 엄청난 정열이 생겼을 터인데, 왜냐하면 노력은 정열-정열은 생명력인데-의 낭비이며 당신은 정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다른 것(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될 것이다. 비교함으로써 당신은 발전하고자 하고, 자라려 하고, 더 이지적이 되려고 하며, 더 아름다워지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까?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며, 그리고 비교함으로써 당신은 사실을 조각낸다-그리고 이것이 또 에너지의 낭비이다. 비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에게 보기 위한 엄청난 힘을 준다. 비교 없이 당신 자신을 볼 수 있을 때 당신은 비교를 넘어서 있는 것이며, 이것은 마음이 만족으로 침체해 있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이 어떻게 에너지를 낭비하는가 하는 것을 그 본질에 있어서 알며, 이것은 삶의 전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너무도 필요하다.
나는 내가 누구와 갈등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즉 나는 존재의 주변적 갈등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도대체 왜 갈등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이다. 내가 이 문제를 나 자신에게 제기할 때 나는 주변적 갈등 및 그 해결과 아무 상관도 없는 기본적 문제를 본다. 나는 중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나는 욕망의 본질 바로 그것이-온당하게 이해되지 않을 경우-필연적으로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혹시 당신도 아는가? 욕망은 언제나 모순 속에 있다. 나는 모순된 것들을 욕망한다-이것은 내가 욕망을 부수고, 통어하고 혹은 승화시켜야 한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나는 다만 욕망 자체가 모순된다는 걸 알 따름이다. 모순된 것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내가 갈등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나는 욕망의 본질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 자신 속에서 우리는 모순의 상태에 있으며, 이 모순의 상태는 욕망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즉 쾌락을 쫓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미 그러한 욕망 속에서 살아오고 있는 바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모순의 뿌리로서의 욕망을 안다-어떤 건 원하고 어떤 건 원치 않는, 즉 이중의 행동이 그것이다. 우리가 뭔가 즐거운 일을 할 때 거기엔 아무 노력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쾌락은 고통을 가져오고 그래서 고통을 피하려는 발버둥이 있으며, 그리고 그게 또한 에너지의 낭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중성을 갖고 있는가? 물론 자연에는 이중성(이원성)이 있다-남자와 여자, 빛과 그림자, 밤과 낮-그러나 내적, 사회적으로, 왜 우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가? 내가 그 까닭을 당신에게 말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나와 함께 그걸 생각해내도록 해보자. 당신은 찾아내기 위해 당신 자신의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말은 당신이 비치어 보이는 거울에 불과하다. 왜 우리는 이 심리적 이중성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을 항상 비교하며 키워졌기 때문인가? 우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에 제약되어 왔다. 우리가 폭력의 반대, 선망의 반대, 질투, 비열함의 반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그것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이중성은 존재하게 된 것인가? 우리는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 반대되는 것을 지렛대로 사용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인가?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다룰지를 모르는 실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대되는 것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당신이 수천년 동안 들어온 주장이나 선전, 즉 현재를 잘 수습하기 위해서 당신은 어떤 이상-<있는 것>의 반대-을 가져야 한다는 것 때문인가? 당신이 이상(관념)을 가질 때, 그것이 <현존하는 것>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당신은 여생 동안 비폭력을 설교하는지 모르지만, 언제나 폭력의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실은 언제나 그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원칙, 신념, 이상들이 불가피하게 위선되고 부정직한 삶으로 이끌어 간다는 걸 안다. 있는 것에 반대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상인 바, 만일 당신이 <있는 것>과 더불어 있는 법을 안다면, 그때는 반대되는 것이 필요치 않다. 누구와 비슷하게 되려고 하는 것, 또는 당신의 이상(관념)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모순, 혼란 및 갈등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이다. 어떤 수준에서든 혼란되어 있는 마음은 혼란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즉 혼란이 낳은 행동은 모름지기 더욱 더 혼란으로 이끌어간다. 나는 이걸 아주 분명히 안다-나는 이것을 즉각적인 육체적 위험처럼 분명히 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더 이상 혼란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위는 완전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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