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6. 폭력-분노-정당화와 비난-이상적(관념적)인 것과 현실적인(실재하는) 것
공포, 쾌락, 슬픔, 생각 및 폭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폭력, 누구를 싫어하기, 어떤 특별한 인종이나 집단을 증오하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것 등에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폭력이 사라진 마음의 상태 속에는 갈등, 증오, 공포가 포함된 폭력의 쾌락과 아주 다른 기쁨이 있다. 우리는 폭력의 뿌리를 파헤쳐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당신이 살고자 하는 방식이라면-그리고 분명히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그렇게 살라. 만일 당신이 <미안하지만 폭력은 결코 그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아무런 의사소통의 길이 없으며, 당신은 스스로를 폐쇄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삶의 다른 방법이 있음직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서로 얘기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형태의 폭력이 완전히 없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괴물스럽게 잔인한 세계에서 여전히 살 수 있는지를 같이 생각해 보자. 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속에 증오, 질투, 불안 또는 공포의 숨결을 갖고 있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내가 죽고 싶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도 충만하고 풍요하고, 아름다운 이 놀라운 지구 위에서 살고 싶다. 나는 나무, 꽃, 강, 초원, 여자, 소년 소녀들을 보고 싶으며, 동시에 나 자신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완전히 평화롭게 살고 싶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폭력-전쟁, 강탈, 국가적 적대와 계층간의 갈등 등 사회의 외적 폭력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폭력을 보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그걸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은 폭력적이었다. 세계 어디서나 종교는 그를 길들이려고 했으나 어떤 종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문제를 따져보려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아주 진지해야 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아주 다른 영역으로 안내할 터이기 때문이며,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만 지적 여흥을 위해 그 문제를 가지고 논다면 우리는 별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그 문제에 관해 스스로 매우 진지하다고 느낄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지 않고 그 문제에 관해 어떤 일을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한, 당신이 뭔가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그들이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느냐 않느냐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그걸 진지하게 취급하며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이 폭력의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느끼고 있으며, 내 속에서 내가 폭력적이 아니도록 그것을 관찰할 작정이다-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도 <폭력적이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은 의미가 없다-당신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 한. 그러니 당신이 이 폭력의 문제를 정말 이해하고 싶어한다면 우리의 탐구 여행을 계속해보자.
이 폭력의 문제는 저기 있는가, 아니면 여기 있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바깥 세계에서 풀려고 하는가, 아니면 당신 속에 있는 그대로의 폭력 자체를 묻고 있는가? 만일 당신 스스로가 폭력에서 해방되어 있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나는 이 폭력, 욕심, 탐욕, 질투, 잔인성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가? 나는 파괴되지 않을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질문되는 불가피한 질문이다.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내 생각에 당신은 사실상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다. 만일 당신이 평온하게 산다면, 당신은 아무런 문제도 갖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군대 가는 걸 거부하기 때문에 감옥에 갈는지도 모르고 전투를 거부하기 때문에 총살당할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즉 당신은 총살당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우리는 폭력을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이해하려고 하는 바, 사실이란 인간 속에 존재하는 사실을 말하며, 그리고 인간이란 나 자신이다. 또 문제를 파고 들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완전히 열려 있지 않으면 안되며 상처 입을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나를 나 자신에게 드러내야 하며-나 자신을 당신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흥미가 없을는지도 모르니까-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끝까지 관찰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하며, 어느 지점에서 중단하여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나는 난폭한 인간이라는 게 분명할 것이다. 나는 분노하면서 난폭을 체험했고, 성적 요구에 있어서의 폭력, 증오와 적대감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폭력, 질투에 있어서의 폭력 등을 체험했다-나는 그걸 체험했고, 그걸 알았고, 그리고 스스로 말한다. <나는 이 전문제를 이해하고 싶은데, 전쟁에서 표현된 단 하나의 단편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이 공격성-동물 속에도 있으며 나도 그것의 일부인-공격성을 이해하고 싶다.>
폭력은 다만 타자를 죽이는 게 아니다. 남의 아픈 데를 찌르는 가시 돋친 말을 할 때, 어떤 사람을 쓸어버리는 제스처를 쓸 때, 공포 때문에 복종할 때, 그건 모두 폭력이다. 그러므로 신의 이름으로 조직된 도살장만이 폭력은 아니다. 폭력은 보다 더 교묘하고, 한결 깊은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폭력의 바로 그 깊이를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인도인이라거나 유럽인이라거나, 혹은 그 어떤 것으로 부를 때 당신은 폭력적이다. 그게 왜 폭력적인지 아는가? 당신이 자신을 그 외의 모든 인류로부터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신념, 국적, 전통에 의해 분리할 때, 그것은 폭력을 키운다. 그러므로 폭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날, 어떤 종교, 어떤 정당이나 편파적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다-그는 인류에 대한 전적인 이해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폭력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달리하는 두 개의 학파가 있는데, 하나는 <폭력은 인간이 본래 타고 난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폭력은 인간이 그 속에서 사는 바의 사회적 문화적 유산의 결과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파에 속해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이지, 왜 폭력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가장 흔한 표현중의 하나가 분노이다. 내 아내가 누이가 공격 당했을 때 나는 마땅히 분노한다고 말한다-내 나라가 공격받고 내 생각, 내 원리, 내 삶의 방식이 공격받으면 나는 당연히 화를 낸다. 내 버릇이나 보잘 것 없는 의견이 공격 받아도 나는 화를 낸다. 당신이 내 발등을 밟거나 나를 해롭게 하면 나는 화내며, 만일 당신이 내 아내와 더불어 도망가면 나는 질투하게 되는데, 그 질투가 정당한 것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녀가 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분노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다. 그리고 내 나라를 위해서 죽이는 것도 정당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폭력의 일부인 분노를 얘기할 때, 우리는 자신의 성향과 환경의 추세에 따라 정당한 분노와 정당하지 않은 분노로서 분노를 보는가 아니면 우리는 다만 분노를 보는가? 정당한 분노가 있기는 한가? 아니면 다만 분노가 있을 따름인가?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은 없고 오직 영향만이 있을 뿐인데, 그러나 나에게 맞지 않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 때 나는 그걸 나쁜 영향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당신의 가족을 보호하는 순간, 당신의 나라, 국기라고 불리우는 색칠한 넝마 한 조각, 신념, 이념, 교조, 당신이 요구하거나 붙잡고 있는 어떤 것을 방어하는 순간, 바로 그 방어가 분노를 뜻한다. 그러니 당신은 어떤 해명이나 정당화 없이 분노를 볼 수 있으며, <나는 내 재산을 보호해야 돼>라든가 <내가 화낸 건 정당했어>라든가 <화내는 나는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따위의 말 없이 분노를 볼 수 있는가? 당신은 분노가 그것 자체로서 어떤 것인양 그걸 볼 수 있는가? 당신은 그걸 완전히 객관적으로, 즉 그걸 방어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가? 내가 당신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거나 또는 내가 당신을 아주 놀라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위와 같은 것들이 들어 있지 않은 어떤 관심을 갖고 당신을 볼 때에만 나는 당신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분노를 볼 수 있는가-즉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열려 있고 그것에 저항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은 채 그 별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을까?
분노란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걸 냉정하게 보기는 아주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바이다. 내 피부가 검든 누렇든 희든 자줏빛이든지간에, 한 폭력적 인간인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이 폭력이 타고 난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내 속에 심어준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내 관심의 전부는 다름 아니라 도대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이상 나에게 중요한 건 없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섹스, 음식, 지위보다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건 나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폭력은 나를 파괴하고 세계를 파괴하며, 그리고 나는 그걸 이해하고 싶고 그걸 넘어서고 싶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분노와 폭력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나는 책임을 느끼며-이 말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다-그래서 혼자 말한다, <내가 스스로 분노를 넘어서고, 폭력을 넘어서고, 국적만 넘어설 수 있다면 뭔가 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나 자신 속에서 폭력을 이해해야 된다는 나의 느낌은 그러기 위한 엄청난 생명력과 정열을 가져온다. 그러나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서 나는 그걸 억압할 수 없고, 그걸 거부할 수 없으며, <그래, 그건 나의 일부야, 그러니 어쩌겠는가>라든가 <나는 그걸 원치 않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걸 보아야 하고, 그걸 연구해야 하고, 그것과 아주 친해져야 하며, 그리고 내가 그걸 비난하거나 정당화한다면 나는 그것과 친해질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우리는 그걸 비난한다-우리는 그걸 정당화한다. 따라서 나는 얼마동안 그걸 비난하거나 정당화하는 일을 중지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폭력의 중지를 원하고, 전쟁의 중단을 원한다면, 당신은 얼마나 많은 활력을 그것에 줄 수 있고 얼마나 많은 당신 자신을 줄 수 있는가? 당신의 아이들이 살해되고 당신의 아들들이 군대에 가서 싸우다가 살해되는 게 당신한테 중요하지 않은가? 걱정이 안되는가? 세상에 그게 당신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면 무엇이 관심거리인가? 당신의 돈을 지키는 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거? 환각제를 먹는 거? 당신 속에 있는 이 폭력이 당신의 아이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걸 당신은 모르는가? 아니면 당신은 그걸 다만 어떤 추상으로 보는가? 그건 그렇고, 만일 당신이 흥미가 있다면, 발견하기 위해 당신의 온 마음을 바쳐 유의해라. 다만 뒷전에 물러앉아서 <어디, 그것에 대한 모든 걸 우리한테 말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비난이나 정당화가 들어 있는 눈으로는 분노도 폭력도 볼 수 없으며, 또 폭력이 당신에게 화급한 문제가 아니라면 당신은 그 두가지(비난과 정당화)를 제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우선 배워야 한다-분노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남편 보는 법을 알아야 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치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당신이 왜 객관적이지 못한지를 알아야 하며, 당신이 왜 비난하거나 변명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이 비난하거나 정당화하는 이유가 그것들(비난과 정당화)이 당신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회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하고, 독일인, 인도인, 니그로, 미국인이라는 제약과 그 제약으로 인해 무디어진 마음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근본적인 걸 알고 발견하기 위해서 당신은 깊이 들어가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둔한 도구, 무딘 도구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그 도구를 예리하게 하는 일인데, 도구란 곧 마음이다-그 모든 정당화와 비난에 의해 둔하게 된 마음, 당신의 마음이 바늘처럼 예리하고 다이어몬드처럼 단단할 때에만 당신은 깊이 파고 들 수 있다. 뒷전에 물러 앉아 <어떻게 나는 그런 마음을 얻을 수 있나?>하고 묻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당신은 마치 당신이 다음 끼니를 원하듯이 그걸 원해야 하며, 또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당신은 볼 수 있고, 탐구할 수 있고, 뚫고 들어갈 수 있고 그래서 아마 모든 문제를 완전히 아는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심 문제로 돌아가 보자-우리 자신들 속의 폭력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 <당신은 변하지 않았어, 왜 안 변하지?>라고 말하는 건 폭력의 한 형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당신을 어떤 것으로 믿는 건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당신의 삶이지 나의 삶이 아니다. 당신의 사는 방식은 당신의 일이다. 내가 묻고 있는 건 어느 사회에서든 심리적으로 살고 있는 한 인간이 그의 마음 속으로부터 폭력을 말끔히 몰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게 만일 가능하다면, 바로 그 과정이 이 세계에 어떤 다른 삶의 방식을 낳을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폭력을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두 개의 끔찍한 전쟁은 인간들 사이에 더욱 더 장벽을 세우도록 가르쳤을 따름이다-즉 당신과 나 사이에 말이다. 그러나 폭력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일이든 분석을 통해서-우리 자신에 의해서든 한 전문가에 의해서든-성취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약간 변경할 수 있을는지 모르고, 좀더 조용히 살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전적 지각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분석하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건 무얼 뜻하느냐 하면 분석과정에서 내 마음이 비상하게 예리해진다는 것을 뜻하며, 그리고 전적인 지각을 가져오는 것은 그 예리함, 주의력, 진지함이라는 성질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한눈에 보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이 눈의 명징성은 사람이 미세한 부분들을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며, 그런 뒤에 도약한다. 우리중의 누구는, 스스로 폭력을 없애기 위해, 비폭력이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개념, 하나의 관념(이상)을 사용했으며, 또 우리는 폭력에 반대되는 관념 즉 비폭력이라는 관념을 가짐으로써, 사실적인 것, 실재하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관념(이상)들을 가져왔고, 모든 신성한 책들은 관념(이상)들로 가득차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이다-그렇다면 왜 폭력 자체를 다루지 않으며 그 말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하는가?
만일 당신이 실재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당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힘을 다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주의력과 에너지는 당신이 어떤 허구적, 관념적인 세계를 만들어낼 때 흐트러진다. 그렇다면 당신은 관념적인 것을 완전히 인멸할 수 있는가?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사랑인지 알아내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갖고 정말 진지한 사람은 도대체 아무 개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오직 있는 것 what is 속에서 살 따름이다. 당신의 분노라는 사실을 조사하려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려서는 안되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의 반대를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그것(분노)을 비난하게 되며, 그리하여 당신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당신이 누구를 싫어한다거나 증오한다고 말할 때, 비록 그 말이 아주 심한 소리로 들릴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사실일 것이다. 당신이 그걸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 속으로 완전히 들어간다면 그건 끝나지만, 그러나 당신이 <증오하지 말아야 해. 내 가슴 속에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중의 기준을 가진 위선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순간 속에 완전히 산다는 것은 아무 비난이나 합리화 없이, 있는 것 속에, 실재하는 것 속에 산다는 것이다-그러면 당신은 그걸(분노) 완전히 이해하는 나머지 그걸 끝낼 수 있다. 당신이 명징하게 볼 때 문제는 풀린다. 그러나 당신은 폭력의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는가-즉 당신 바깥뿐만 아니라 당신 안의 폭력의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는가-다시 말해서 그걸 제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일 없이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단지 말로만 찬성하거나 반대할 일이 아니라 아주 깊은 명상이 요구된다.
당신은 지금까지 일련의 진술을 읽어왔지만, 그러나 당신은 그걸 정말 이해했는가? 당신의 제약된 마음, 생활 방식,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전구조는 당신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즉각적으로 해방되지 못하게 한다. 당신은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거야. 나는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볼거야. 나는 자유로와지려고 해볼거야>라고 말한다. <해볼거야>라는 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우려할 만한 진술중의 하나이다. 해본다는 건 없으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없다. 하거나 안하거나 둘중의 하나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당신은 뜸을 들이고 있다. 전세계와 당신 자신 속의 폭력 때문에 집이 불타고 있는데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이데올로기가 저 불을 끄는데 가장 좋을까?> 집이 불타고 있을 때, 당신은 물을 나르는 사람의 머리카락 색깔에 관해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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