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5. 자기 염려-지위에 대한 갈망-공포들과 전일한 공포-생각의 단편화-공포의 종식
먼저 나는 삶에 있어서의 당신의 기본적이고 영속적인 관심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모든 비뚤어진 대답은 옆으로 제쳐놓고 이 문제를 똑바로 정직하게 다룰 때,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아는가? 그것은 당신 자신 아닌가? 어떻든 이것이, 우리가 진실하게 대답할 때, 대개 하는 대답이다. 나는 나의 발전, 나의 직업, 내 가족, 내가 사는 작은 구석, 더 나은 자리를 얻는 것, 더 큰 명망, 더 강한 권력, 다른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지배 등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가 우선 갖고 있는 관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논리적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내>가 우선 아닌가? 어떤 사람은 우리 자신들에게 우선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적절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이 퍽 드물다는 것을 제외하면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인정을 하면, 우리는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니 그게 그렇다는 것이다-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우선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여러 이념적, 전통적 이유 때문에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바는 대중이 틀린다. 왜 그것의 그릇됨이라는 요인을 도입하는가? 그건 하나의 관념이요, 개념이다. 엄연한 사실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아마 당신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남을 돕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자리염려이다. 만일 남을 돕는 것이 당신에게 더 큰 만족감을 준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 이념적 개념을 그 속에 끌어들이는가? 왜 2중의 생각을 하는가? 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만족이다-그게 성이든, 남을 돕는 것이든 아니면 성자나 과학자 혹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든지간에>라고 말 못하는가? 그것은 같은 과정이 아닌가? 교묘하고 명백한 여러 가지 방법의 만족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주 대단하게 만족시켜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궁극적인 만족은 자기실현이라는 개인 특유의 관념이다. 우리가 정말 찾는 것은 전혀 불만족이 없는 만족인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어떤 지위를 갖기를 갈망한다. 사회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존경할 만한 지위에 있는 시민은 아주 정중하게 취급되고, 반면에 아무 지위도 없는 사람은 천대 받는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든 가정에서든 어떤 지위를 원하고 또는 신의 오른 팔 위에 앉기를 원하며, 그리고 이 지위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건 아무 지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단상에 앉지 않으면 안된다. 속으로 우리는 불행과 비참의 소용돌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깥으로 대단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다. 이 지위, 위세, 권력을 얻으려는 갈망, 사회에 의해 뛰어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갈망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바램이며, 이 지배에의 욕구는 공격의 한 형태이다. 자기의 성자다움에 비추어 어떤 지위를 찾는 성자는 농가의 마당에서 부리로 쪼고 있는 닭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이다. 그러면 이 공격성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건 공포이다. 그렇지 않은가?
공포는 삶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중의 하나이다. 공포에 붙잡힌 마음은 혼란 속에, 갈등 속에 살며, 따라서 난폭하고, 뒤틀리고, 공격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그것 자체의 사고의 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며, 이것이 위선을 키운다. 우리가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고 모든 종류의 신을 만들어내는 일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어둠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듯이, 두려움을 낳는 경쟁적 교육을 받으면서 썩고 우매한 사회에서 살 때, 우리는 모두 어떤 종류의 공포에 눌려 있게 되며, 그리고 공포는 우리의 나날을 비뚤어지고 뒤틀리고 무디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육체적 공포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동물들로부터 물려받은 반응이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심리적 공포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뿌리 깊은 심리적 공포를 이해하면 동물적 공포와 맞설 수 있는데 비해, 동물적 공포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공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에 관해서 두려워한다. 추상적인 공포란 없으며, 공포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공포를 아는가-직업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 충분한 음식과 돈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이웃과 대중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성공 못하면 어쩌나, 사회에서의 지위를 잃으면 어쩌나, 조롱당하고 경멸당하면 어쩌나-고통과 병에 대한 공포, 지배에 대한, 사랑이 무언지 모르거나 사랑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내나 아이들을 잃는 것에 대한, 죽음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지독한 권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신앙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이 모든 것과 그외의 수많은 공포들-당신은 당신 자신만의 공포를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들 공포에 관해 흔히 무엇을 하는가?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거나-그렇지 않은가-그것들을 은폐하기 위한 관념들과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러나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그것을 증가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공포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포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포를 없애기 위해 발전시켜온 도피의 네트워크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마음이-여기에는 두뇌도 포함되는데-공포를 극복하려 하고, 그걸 억누르려 하고, 길들이려 하고, 통어하려 하고, 어떤 다른 개념들로 번역하려 한다면, 거기엔 알력이 있고 갈등이 있으며, 그리고 이 갈등은 정력 낭비이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공포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포 자체로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 공포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지 내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삶을 영위해간다. 나는 어떤 패턴 속에서 생각한다. 나는 어떤 믿음과 도그마를 갖고 있으며 그 속에 내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실존의 패턴이 방해 받는 걸 원치 않는다. 방해 받지 않기를 바라는 까닭은 그 방해가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를 낳기 때문이며 그리고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내진다면, 내가 향해서 가고 있는 바 사물의 상태를 상당히 확실한 것으로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뇌세포들은 어떤 양식을 만들어 냈으며 그 뇌세포들은 불확실할는지도 모를 다른 양식 만들기를 거부한다. 확실한 것으로부터 불확실한 것에로 가는 운동이 내가 말하는 공포이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현재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고, 아무도 나를 위협하지 않으며 나에게서 뭔가를 빼앗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머에는 마음의 심층이 있어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있는 또 과거의 어떤 것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와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갈라 놓았다. 생각이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 혹은 <장래를 위해 준비해. 미래는 너한테 위험할는지도 몰라. 너는 지금 뭔가를 가졌지만 그걸 잃을 수도 있어. 너는 내일 죽을는지도 모르고, 네 마누라는 도망갈는지도 모르며, 네 직업을 잃을는지도 몰라. 너는 유명해지지 않을는지도 몰라. 너는 외로울는지도 몰라. 너는 내일이 확실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러면 당신 자신의 독특한 공포를 생각해 보라. 그걸 바라보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관찰하라. 당신은 아무런 도피의 움직임 없이, 정당화, 비난, 억압의 움직임 없이 그걸 바라볼 수 있는가? 당신은 그 공포의 원인이 되는 말 없이 그 공포를 바라볼 수 있는가? 예컨대 당신은 죽음의 공포를 일으키는 말 없이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가? 마치 사랑이라는 말이 그것 자체의 떨림, 그것 자체의 이미지를 갖고 있듯이 말 자체가 어떤 떨림을 가져온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죽음에 관해서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이미지, 당신이 본 수많은 죽음의 기억과 당신 스스로를 그 사건들에 연관시키는 것-즉 공포를 낳는 것은 이미지가 아닌가? 아니면 당신은 종말을 낳는 이미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는 것을 정말 두려워하는가? 죽음이라는 말이 당신의 공포의 원인인가 아니면 실제의 종말이 원인인가? 만일 당신의 공포가 말이나 기억 때문이라면 그건 전혀 공포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 보자-당신은 2년 전에 병을 앓았고, 그 병의 고통으로 기억은 남아 있으며, 그 기억은 이렇게 말한다. <조심해. 다시는 앓지 않도록.> 그래서 기억이 그 연상들과 함께 공포를 낳는데, 그러나 이건 전혀 공포가 아닌 것이, 실은 그 순간의 당신은 건강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생각이-생각이란 언제나 낡은 것인데, 왜냐하면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고 기억은 언제나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시간 속에서, 당신이 두렵다는 느낌-실제 사실이 아닌-을 낳는다. 실제 사실은 당신이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으로서 마음에 남아 있는 체험이 <조심해, 또 병 걸리지 않도록>이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한 가지의 공포를 낳는다는 걸 안다. 그러나 도대체 생각을 떠나서 공포가 있는가? 공포는 언제나 생각의 결과라면, 어떤 다른 형태의 공포가 있는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즉 시간 속에서, 내일이나 모레 일어날 어떤 것을 두려워한다.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생각은 그 상태를 체험했다-즉 죽음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은 <나는 죽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생각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낳는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떤 공포가 있는가? 공포는 생각의 결과인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이란 언제나 옛것이기 때문에, 공포는 언제나 옛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새로운 생각이란 없다. 새롭다는 걸 알면, 그것은 이미 옛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낡은 것의 되풀이이다-즉 미래 속으로 투사했었던 생각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생각은 공포에 책임이 있다.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 그걸 알 수 있다. 당신이 어떤 것과 즉각적으로 마주칠 때 거기엔 공포가 없다. 생각이 스며들 때에만 공포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질문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사고, 기억, 시간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는데 있어서 머리로만, 말로만 이해하지 않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내장으로 이해할 때, 당신은 공포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은 공포를 낳는 법 없이 생각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은, 기억과 마찬가지로, 물론 나날의 삶에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거나 직업을 수행하는 등의 일을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생각은 기억에 대한 반응인데 기억은 체험, 지식, 전통, 시간을 통해 쌓여온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기억의 배경으로부터 우리는 대응하며 이 대응이 생각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어떤 수준에서는 필수의 것이지만 생각이 쾌락뿐만 아니라 공포를 낳으면서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미래와 과거로 투영할 때, 마음은 무디어지며 따라서 나태가 불가피해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묻는다. <왜, 왜, 왜 나는, 그러한 생각이 공포를 낳는지 알면서, 쾌락과 고통에 의거해 미래와 과거에 관해 생각하는가? 공포가 사라지기 위해 심리적으로 생각을 중단할 수 없는가?>
생각의 기능 중의 하나는 항상 무엇으로 점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계속 점유되어 있기를 바라며 그러므로써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비어 있는 걸 두려워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포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의식상으로 당신은 당신의 공포들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마음의 좀더 깊은 곳에서 당신은 그것들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숨겨져 있고 은밀한 공포들을 발견하려고 하는가? 공포란 의식적인 것과 잠재의식적인 것으로 나뉘는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전문가, 심리학자, 분석가들은 공포를 심리적인 것과 표피적인 것으로 나누었는데, 그러나 당신이 심리학자의 말이나 내가 말하는 것을 따른다면, 당신은 우리의 이론, 우리의 도그마, 우리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지, 당신 자신을 이해하는 게 아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프로이트나 융 또는 나에 의해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은 도대체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물어야 할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이다-공포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나뉘는가? 아니면 당신이 다른 형태들로 번역하는 공포만이 있는가? 오직 하나의 욕망만이 있다-즉 욕망만이 있다. 당신이 욕망한다. 욕망의 대상들은 바뀌지만, 욕망은 언제나 똑같다. 이와 비슷하게 공포만이 있다. 당신은 여러 가지 일들을 두려워하지만 오직 하나의 공포가 있을 뿐이다.
공포는 나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당신은 이 무의식의 문제를 물리치고 심리학자와 분석가들을 그럭저럭 모면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공포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단일한 움직임임을 이해할 때 그리고 그 움직임이 지향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움직임을 알 때, 당신은 다음과 같은 엄청난 질문에 부딪친다-즉 어떻게 우리 마음이 그동안 해온 단편화 없이 그걸 볼 수 있는가? 오직 전일한 공포만이 있는데, 그러나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어떻게 그 전일한 그림을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단편화된 삶을 살아왔으며, 생각의 단편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그 전일한 공포를 볼 수 있다. 사고의 기계 장치의 전과정은 모든 것을 조각으로 깨뜨리는 것이다-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 당신은 나의 적이며, 당신은 나의 친구이다. 나의 독특한 특성들과 의향들, 나의 직업, 지위, 특권, 아내, 아이, 내 나라와 당신의 나라, 나의 신과 당신의 신-이 모든 게 사고의 단편화이다. 그리고 이 생각이 공포의 전체 상태를 보거나 보려고 하며, 그리고 그것을 단편들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생각의 움직임이 없을 때에만 마음은 이 전일한 공포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당신은 아무 결론 없이, 당신이 그것(공포)에 관해 축적해온 지식의 간섭없이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이지, 공포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처음으로 과거의 간섭 없이 공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당신의 마음이 그것 자체의 문제와 불안에 관해 속으로 혼잣말을 하거나 속으로 지껄이지 않아야 어떤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을 수 있듯이, 마음이 아주 고요할 때에만 당신은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그걸(공포를) 해소하려 함이 없이, 그것의 반대 즉 용기를 끌어들이는 일 없이 당신의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당신이 <나는 그걸 제어해야 해, 나는 그걸 없애야 해, 나는 그걸 이해해야 해>라고 말하면,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구름, 나무 혹은 강의 움직임들을-이것들이 당신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아주 조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그 요구들이 아주 실질적이고, 그 반응이 아주 빠르기 때문에 한결 어렵다. 그리하여 당신이 공포, 절망, 고독이나 질투, 혹은 마음의 다른 어떤 추한 상태를 정면으로 대면할 때,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그걸 보기에 충분하도록 고요하리만큼 그렇게 완전히 볼 수 있는가? 마음은 공포의 다른 형태들이 아니라 공포를 지각할 수 있을까-즉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공포를 지각할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공포의 세목들만을 보거나 당신의 공포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루려고만 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중심 문제, 즉 공포와 더불어 사는 걸 배우는 문제와 만나지 못할 것이다.
공포와 같은 살아 있는 것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비범하게 민감하고 섬세한 마음과 가슴, 아무 결론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공포의 모든 움직임을 좇을 수 있는 마음이 요청된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그걸 보고 그것과 함께 산다면-그리고 공포의 전구조를 아는 데는 하루 종일 걸리는 게 아니라 1초 또는 1분쯤 걸린다고 할 수 있다-만일 당신이 그것과 더불어 그다지도 완전하게 사는 나머지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해 보자-<공포와 함께 사는 그 실체는 누구인가? 공포를 관찰하고, 공포의 주요 사실에 대해서 알뿐만 아니라 공포의 여러 형태의 움직임 전부를 보는 자는 누구인가? 관찰자는, 그 자신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축적한 죽은 실체, 정적 존재이며, 공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는 바로 그 죽은 자인가? 관찰자는 과거의 것인가 아니면 그는 살아있는 것인가?>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나에게 대답하지 말고 당신 자신에게 대답하라. 관찰자인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죽은 자인가 아니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살아 있는 자인가? 왜냐하면 관찰자 속에는 그 두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공포를 원치 않는 검열관이다. 즉 관찰자는 공포에 관한 그의 경험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관찰자는 그가 공포라고 부르는 것과 분리돼 있다. 그 둘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래서 그는 끝없이 그걸 극복하려 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며, 그리하여 그 자신과 공포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그렇게 정력 낭비인 싸움이. 당신이 관찰할 때, 당신은 관찰자가 아무런 타당성도 알맹이도 없는 관념과 기억의 뭉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며, 한편 공포는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추상으로서 어떤 사실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것은 물론 그럴 수 없는 일이다-을 안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고 말하는 관찰자는 공포인 관찰물과 사실상 무엇이 다른가? 관찰자가 공포이며 그리고 이것이 깨달아질 때, 공포를 제거하기위해 노력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의 에너지 낭비가 없고, 또 관찰자와 관찰물 사이의 시공의 간격이 사라진다. 당신이 공포와 동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일부임을 알 때-즉 당신이 공포임을 알 때-당신은 그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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